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어부와 나뭇꾼의 대화

장백산-1 2019. 3. 20. 01:16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훌륭한 가르침 전해주는 세속 초월한 선지식


소웅의 ‘어초문대’ 속 어부 · 나무꾼

세상원리에 대한 대화 그림으로

부처님도 문답으로 가르침 전해

대화는 상대에 대한 이해서 시작


이명욱 作 ‘어초문답도’, 173×94cm, 17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이명욱 作 ‘어초문답도’, 173×94cm, 17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얼마 전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하였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 파행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번 회담만 잘 성사되면 한반도에 진짜 봄이 찾아오고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북미는 회담이 파행으로 끝난 후에도 파행의 책임이 상대에게 있다며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이후 회담 결과의 원인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흘러나왔지만 결국 모든 이유의 밑바탕에는 오랫동안 적대시하며 쌓아놓은 상대에 대한 불신이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북미 정상회담이 아무 소득 없이 끝이 나니 생각나는 그림이 한 점 있습니다. 조선 중기 화가 이명욱이 그린 간송미술관 소장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입니다.


‘어초문답도’는 제목 그대로 어부(漁夫)와 초부(樵夫)가 묻고 대답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여기서 초부(樵夫)는 산에서 나무로 생계를 꾸리는 나무꾼입니다. 그럼 누가 어부고 누가 초부일까요? 당연히 그림에서 왼손으로 물고기를 들고 오른손으로 낚싯대를 잡고 있는 오른쪽 인물이 어부일 테니 자연스럽게 왼쪽 인물은 초부일 것입니다. 혹시 초부인지 모를까 봐 친절하게도 뒤춤에 도끼를 차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어부는 테만 있는 모자를 이마가 보일 만큼 눌러쓰고 낚싯대와 물고기를 들고 있는데 물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소매가 없는 상의와 맨발, 바지는 걷어 올려 종아리가 다 드러나게끔 표현했습니다. 초부는 머리를 묶고 나무 막대를 오른쪽 어깨에 걸친 채 도끼를 차고 손을 들어가며 열심히 무엇인가 설명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외양만으로는 나무꾼보다는 유생에 가깝게 그렸습니다. 


옷 주름은 선의 굵기에 변화를 주며 양감이 풍부하고 걸어가면서 대화하는 힘찬 생동감을 잘 묘사했습니다. 구도상으로는 두 인물이 서 있는 방향과 두 인물이 들고 있는 막대기, 초부의 펄럭이는 옷 주름의 방향이 ‘X’자로 교차하게끔 배치한 후 왼쪽 상단과 오른쪽 하단에 대나무를 배치하여 균형감을 완성하였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이런 자연스러움은 화가의 치밀한 구도가 있기에 편안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부(漁夫)는 물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며 나무꾼(樵夫)은 숲과 산에서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인물들의 만남입니다. 그 둘은 무슨 이야기를 묻고 답했을까요? 어부와 나무꾼의 문답이야기는 북송의 유학자 소웅(邵雍)이 지은 ‘어초문대(漁樵問對)’에서 어부와 나무꾼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천지 사물의 원리와 의리에 대해 대화하는 어초문답(漁樵問答)의 내용입니다. 


나무꾼이 어부에게 묻습니다. 

“사람이 귀신에게 빌어서 복을 구하려고 하는데 복을 기도하여 구할 수가 있습니까?”


어부가 대답합니다. 

“선과 악을 말하는 것은 사람이고, 화와 복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지은 허물은 참으로 피하기 어려운 것이거늘 하늘이 내리는 재앙을 어찌 없애달라고 빌어서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나무꾼이 어부에게 또 묻습니다. 

“착한 일을 했는데 재앙을 만나고, 나쁜 일을 했는데 복을 받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어부가 또 대답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운명이고, 당하고 안 당하는 것은 인연(연분)입니다. 운명과 연분을 사람으로서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어부와 나무꾼은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라 세속을 초월한 선지식(善知識)으로 화와 복, 인과 연 등에 대해 훌륭한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소웅은 이러한 묻고 답하는 방식을 통해 인생의 귀중한 교훈을 전하려 한 것입니다.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주는 사람으로 가장 뛰어난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닐까 합니다. 부처님은 평생 전법의 과정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묻고 답하며 깨달음을 전했습니다. 종교, 계급, 지위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과 묻고 답하며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모두 부처님의 이야기에 감명받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는 분명 부처님의 대화법에는 무엇인가 특별함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궁금증을 부처님 당시에도 가졌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이나교의 재가신도였던 아바야 왕자였습니다. 어느 날 아바야 왕자는 부처님을 찾아가 질문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如來)께서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십니까?” 


사실 이 질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당신도 일반사람과 다른 게 없다고 하고, “아니다”라고 하면 “그럼 데와닷타는 부처님을 시해하려는 악업으로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서 일 겁을 머물고 고통받을 거라는 데와닷타가 싫어하는 말을 했냐”고 따질 목적으로 아바야 왕자의 스승인 자이나교 교주가 시킨 일입니다.


이 질문을 받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바야 왕자가 질문하는 의도를 물으신 후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명한 대화법입니다. 


“왕자여, 

여래는 사실이 아니고 진실하지 않고 유익하지 않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말하지 않습니다.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하지만 유익하지 않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말하지 않습니다.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하고 유익한 말이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말해야 할 때를 고려하여 말합니다. 


여래는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 아니고 유익하지 않은 말이라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더라도 말하지 않습니다.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이지만 유익하지 않은 말이라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어도 말하지 않습니다.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이고 유익한 말일 뿐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 때에도, 말할 때를 고려하여 말합니다. 


왜냐하면 왕자여, 여래는 중생들에 대한 연민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의 마음으로 대화하기에 그 대화가 힘이 있고 유익하며 감동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아바야왕자는 크게 감명받아 부처님께 평생 귀의할 것을 맹세합니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세상 사람들 간에 시간적, 언어적, 공간적 제약은 사라지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는 세상이 왔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대화가 상대에 대한 참다운 이해 하에 이뤄지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더욱이 서로 인정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의심하고 공격하는 대화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국가 간의 회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불신과 불통의 시대에 부처님의 대화법은 참으로 귀중한 교훈이자 가르침입니다. 세속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묻고 답하는 ‘어초문답도’를 보며 지난날 말로 상처를 주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함께 생기나니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을 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찍도다.” 숫타니파다 ‘꼬깔리야 경’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481호 / 2019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