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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가장 위대한 순간인 마음의 등불, 지혜의 등불 켜기

장백산-1 2019. 7. 29. 13:06

내 인생에 가장 위대한 순간인

마음의 등불, 지혜의 등불 켜기  - - 법상스님


불교 속에서 혹은 수많은 영적인 전통 속에서 '등불을 밝힌다', '불을 밝힌다'라는 의미는 너무 중요한 상징적 의미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제자들에게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해라.” 내 안에 마음의 등불을 켜고 법의 등불을 켜라,라고 이렇게 말씀하셨듯이 '등불을 켜라'는 의미 이게 '낙처(落處)'를 가리키는 방편입니다.


연등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연등을 통해서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일' 이 사실을, 이 핵심을 놓친다면 이런 화려한 연등행사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연등축제를 하는데, 이건 뭐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돈도 들고 많은 사람들이 동원이 되어도 핵심을 놓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의 연등축제 주간에 한국으로 오는 여행상품이 지금 세계적으로 엄청 불티나게 잘 팔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연등축제에 맞춰서 수많은 세계적인 여행사를 통해 많은 외국 사람들이 한국으로 이렇게 옵니다. 작년 에는 한강공원에서 외국인들 몇 천 명을 대상으로 대중공양하는 의식, 이런 일도 있었고. 이런 연등축제가 다양한 세계인의 축제로 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방편(方便)으로써 너무 아름답고 좋습니다. 그런데 핵심은 그런 방편적인 행사에서 이것을 왜 하는지? 등불을 왜 밝히는지에 대한 '낙처(落處), 본뜻'을 알지 못하면 많은 행사로써만 끝나게 되고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연등행사이지요. 본뜻, 낙처(落處)는 뭐냐 하면, 우리는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면 언제 넘어질지, 앞에 독사가 와서 나를 물지, 아니면 낭떠러지가 있어서 떨어질지, 언제 사고 날지, 언제 다치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등불을 밝히고 등불을 켜 들고 걸어가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선명하게 다 잘 보이니까 명백하게 뭐가 있는지 다 드러나 있으니까 위험한지 위험하지 않은지를 훤히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과 똑같다는 거지요. 인생길, 삶의 길,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 이 인생의 길이, 우리는 대낮에 이렇게 밝을 때 밝은 인생을 살아간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전혀 밝은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다 아주 깜깜한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무엇이 어두운 깜깜한 밤길일까요?


무엇이 깜깜한 어두운 밤길이냐 면요? 이 머릿속의 생각, 개념, 관념이 깜깜한 밤길이고 교리로 말하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 모양, 느낌, 생각, 욕망, 분별심)이라는 오온(五蘊)입니다. 오온을 나라고 착각하는 그 생각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즉 생각을 나라고 잘못 알고 그 생각을 믿고 그 생각이 이 세상에 대해서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하는 모든 것들이 실체가 있는 이 세상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간단 말이지요. 사실은 그같은 허망한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하는 그런 생각이 없으면 우리는 괴로울 일이 전혀 없습니다. 생각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좋은 거 나쁜 걸로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고, 좋은 거는 집착하고, 집착한 게 내게 되지 않으면 괴롭고. 싫은 건 거부하고 거부한 게 자꾸 나에게 찾아오면 괴롭고, 그래서 이 좋고 싫음 취사간택하는 놀이를 하고 있고. 그러는 동안은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도 없고 내가 싫어한다고 거부되지도 않는 게 이 세상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건 괴로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나라고 여기지요. 사실은 내가 누구냐를 생각하면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생각되는 게 있어요. 그런데 그건 전부 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할 때만 나라는 존재가 가짜로 만들어지지요. 나라는 존재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지, 생각이 없으면 그때 나는 누구지요? 난 여자야. 나는 나이가 몇이야. 난 남자고 난 누구야. 나는 군인이야. 이건 다 생각이잖아요. 생각을 일으켰을 때만 그러한 가짜 내가 만들어집니다. 그 생각이 없으면 여러분은 누구지요?


사실은 그 생각이 나라는 가상현실(假想現實, VR ; virtual reality), 나라는 가짜 나, 가짜의 나, 에고, 아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겁니다. 그 생각을 맹목적으로 믿고 당연히 이게 나겠지 라고 믿으면서 속아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생각이 만들어낸 이 가상현실이 진짜인 줄 알고, 그러니까 안 좋은 상황에 처하면 괴롭다. 이거는 밀쳐내고 싶다. 좋은 일이 생기면 더 취하고 싶고. 그리구 그렇게 판단 내린 것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거는 그냥 내 생각이 만들어낸 가상(假想), 허상(虛想), 환상(幻想)일 뿐인데. 내 식(識)대로 취하고 버린 것일 뿐인데. 나는 어떤 걸 취해야 되고 어떤 걸 버려야 되는지를 사실은 모르거든요.


나는 지금은 이걸 취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걸 취하면 잘 안 될 수 있고 다른 걸 취하는 게 더 좋을 수 있거든요. 나는 지금 이거는 버려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버려야 되는 게 내 인생에 정말 필요한 것일 수도 있거든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안다고 착각하는 거지요. 자기 생각 속에 생각의 늪에 빠지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판단 해석을 하는 망상(妄想)이 어둡게 우리 빛을 가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본래 있는 밝은 빛, 광명, 밝은 지혜의 빛을 가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혜의 밝은 빛이 가려지니까 우리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매일 괴로움 속에 허덕이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실은 정말 엄청 단순합니다. 자기 생각을 믿지 않으면. 자기 생각을 믿지 않고 그 생각을 집착하고 고집하지 않으면, 세상 인생 삶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세상을 대상으로 내가 생각으로 시비하고 분별하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해석할 때만 문제가 생겨납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들은 아마 믿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관찰해보아라. 비추어 보아라. 관해 보라고 말합니다. 명상. 위빠사나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거예요. 해석하지 않고 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해석해서 판단해서 보잖아요. 그게 바로 나를 어둡게 만드는 것이고. 판단 해석하지 않고 그냥 볼 때, 그게 우리 안에 본래 구족 되어 있던 지혜의 빛을 현실로 가져오는 겁니다.


그래서요. 하루에 한 번씩 이 지혜의 등불을, 점등식 날만 지혜의 등불을 켜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내 안에 있는 지혜의 빛을 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작은 방법을 하나 알려드리고 오늘 설법을 마치겠습니다. 내 마음에 언제나 지혜의 등불을등을 켤수가 있어요. 매일 마다 점등을 해야 합니다. 하루에 5분도 좋고 3분도 좋고 1분도 좋다. 어떻게 하면 점등이냐?


맨 날 이 스마트폰 보느라고 심심한 시간을 사람들은 싫어하잖아요. 심심할 때가 없어요. 생각해보니까 옛날 우리 어릴 적에 어르신들은 TV도 없고 어디 놀 곳도 없고 게임도 없고 이랬을 때는 되게 심심한 때가 많았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심심할 때가 없지요. 이게 어찌 보면 그때는 난 심심한 게 참 싫다고 생각했는데, 아, 지금 보니까 정말 그 심심할 수 있었던 그 당시 그때가 참 좋을 때였구나!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TV를 잠시 끄고. 잠시 머릿속에서 생중계되는 이 가상현실 세계를 끊임없이 생중계하고 있는 이 머릿속에서 뇌 과학에서 얘기하는 해석자의 존재를 잠깐 내려놓고. 그냥 아무 때나 좋습니다.


버스를 타고 있을 때, 차를 타고 있을 때, 운전할 때, 밥을 먹을 때, 청소할 때, 설거지할 때, 길을 걸을 때, 그냥 가만히 집에 있을 때, 절에 와서 기도할 때, 어느 때든 좋습니다. 하루 중 아무 때나 내가 잠시 지혜의 등불을 밝혀야 되겠다 싶을 때, 혹은 내가 괴로운 일이 생길 때, 힘들 때, 답답할 때, 누군가와 자꾸 부딪치고 싸울 때, 마음이 우울할 때, 괴로울 때, 그 어느 때도 좋습니다. 그때 순간 내 마음의 등불을 탁 켜면 그 모든 괴로움이 싹 사라져버립니다. 실제로 사라져버립니다. 그게 뭐겠어요? 괴로운 것은 뭐냐 하면 생각이 작동할 때 괴롭습니다. 사실은 가상현실이 괴로운 게 아니라, 가상현실을 생각이 괴롭다,라고 해석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괴로운 거예요.


예를 들어 누가 나한테 욕했어요. 욕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우린 욕 한 걸 생각이 꽉 쥐고 있고, 욕 한 걸 자꾸 생각하고,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생각)을 맞으면서 내게 욕을 한 그 사람을 나쁘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내가 괴로운 겁니다. 그런데 괴로운 순간 지혜의 등불을 탁 켜면 어떻게 되느냐면, 곧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로 돌아와서 지금 이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됩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과거나 미래로 전혀 가지 않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 올라온다는 거는 생각은 무조건 과거나 미래로 갑니다. 생각은 과거와 미래 무조건 과거 아니면 미래입니다. 생각이 올라올 때는 무조건 현재는 생각할 수 없어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존재할 때는 결코 과거나 미래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나 미래로 가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무엇인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현재를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경험해주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면,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이 단순함을 경험해주는 겁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지요. 예를 들어 제가 제 방안에 이렇게 있습니다. 앉아있으면요.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도 미세하게 들립니다. 바깥에서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소리도 들리구요. 2층에서는 때때로 합창단 노래하는 소리도 들려오구요. 공양 간에서 보살님들이 아주 아기자기 이야기 나누는 목소리도 들려오구요. 또 바깥에서 지나가는 분들의 발자국 소리도 들려오구요. 그 모든 소리들이 그냥 그대로 경험됩니다. 소리들이 그대로 알아차려집니다. 그냥 알아차려질 뿐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들을 듣고는 야, 합창단 노래 진짜 잘한다. 야, 전에 있던 어떤 합창단보다 훨씬 잘 하는 거 같다. 내지는 야, 이분들은 노래를 원래 잘 하시는 분들인가? 아니면 반주자분이 훌륭하신가? 지휘자분이 훌륭하신가? 이렇게 생각을 하면 저는 그 생각들 속을 살게 돼요.


그런데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하는 그런 생각들을 하지 않고 그냥 들려오는 소리를 그냥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하지 않고 소리를 그냥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모든 소리, 짹짹하고 울고 지나가는 새 소리가,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고양이의 야옹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선(禪)이고 명상(冥想)이고 도(道)이고 진리이고 부처이고 그것이 바로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순간이 됩니다. 그 순간의 그 소리와 함께 존재하게 되구요. 그 소리와 함께 깨어있게 됩니다. 눈에 컴퓨터 모니터가 등장하고 혹은 의자를 뒤로 살짝 재끼면 벽에 있는 시계가 보이고 시계 초침이 이렇게 가는 게 보여요. 어, 지금 벌써 몇 시가 됐네 이렇게 해석하고 보지 않고, 그냥 그 움직임과 하나 되어 그냥 그것을 가만히 함께 있어주는, 그리고 초침 소리가 상당히 크게 들려옵니다.


내 온 존재로 초침 소리가 울리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렇게 잠시 1분도 좋고 2분도 좋고 3분도 좋고. 지금 있는 초침 소리 이것과 잠시 같이 있어주는 이 심심한 시간, 이 밍밍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 그 시간을 보내주는 것. 그게 가장 위대한 선이고 명상이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마음의 등불을 켜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 이렇게 아무리 가르쳐드려도 이걸 필사적으로 안 하려고 애씁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서. 너무 심심하고 너무 아무것도 아닌 거 같고. 그게 무슨 공부이고 그게 무슨 선이고 명상이야. 이건 너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곧장 내 감각을, 오감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좇아갑니다. 생각을 좇아갑니다.


잠시 생각을 좇아가지 말고 그냥 지금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과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함이 없이 그냥 같이 있어주는 그 시간을 보낼 때, 그래서 아무 생각과 함께 하지 않고 그냥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같이 경험해주고 있을 때, 알아차려지는 모든 것과 그냥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 그게 바로 선이고 명상입니다.


그런 명상의 순간 여러분 안에 있었던 본래의 빛,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십, 육십, 칠십, 평생 어찌 보면 한 번도 반짝이며 드러나지 못했던 그 진실의 빛, 진리의 빛이 내 안에서 퍼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있던 이 우주 전체와 둘이 아닌 하나 임의 그 지혜와 복덕, 원만 구족한 모든 공덕이 비로소 내 안에서 이제 꿈틀거리며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장병 여러분들이 군 생활하느라고 전역하면 뭘 할까? 나중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오만 가지 생각들이 있지만, 그걸 효율적으로 생각해서 나중에 이걸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시간보다 더 위대하게 나중에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것은 잠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와 함께 있어주는 시간입니다. 그게 가장 위대한 시간이에요.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이 바로 창조의 공간(創造의 空間)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사실은 창조의 공간에서 나와요. 생각 속에서는 창조적인 진정한 힘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 너머에 텅~빈 공의 자리, 텅~빈 고요함의 자리, 창조의 공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그 자리에서 우주 전체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여러분의 근원의 힘, 근원의 지혜, 근원의 무량공덕이 피어납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잠깐의 1분 명상, 2분 명상, 3분 명상 그 고요함의 시간, 그냥 있는 이 시간. 그냥 존재하는 시간. 그 시간이야말로 내 인생에 가장 위대한 순간이고 가장 나를 깨어있게 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이 절에 다닌다면 절에 와서 기도하는 시간이 그 시간이 아니고 잠깐, 내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모든 것과 함께 있는 시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이대로가 진리(眞理), 법(法), 선(禪), 도(道), 부처(佛), 마음(心), 본래면목, 본래의 나, 공적영지, 진공묘유이기 때문에 그 진리(眞理), 법(法), 선(禪), 도(道), 부처(佛), 마음(心), 본래면목, 본래의 나, 공적영지, 진공묘유와 함께 있어주는 시간입니다. 진리는 텅 비어서 공이다. 느낌 이런 게 전혀 없어요. 모양,느낌 감정, 생각, 욕망 의도, 인식 분별심 이거는 허상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과 그냥 잠시 같이 있어주는 그게 진리와 같이 있는 시간입니다. 비로소 내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시간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이 점등식 날, 잠시 뒤에 반짝이는 불을 켜면서 우리 마음의 등불을 한번 이렇게 반짝 밝히고 또 이것을 계기로 앞으로 올 한 해 우리 마음속에 항상 틈만 나면 마음의 등불을 밝힐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녹취, 정리 by 하이먄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