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 즉, 나의 본래면목과 힌두교의 아트만
佛敎에서 가장 重要한 점은 바로 法性, 즉 나의 本來面目을 깨닫는 겁니다. 禪불교에서는 자신의 성품,
즉 法性을 確認한 것을 두고 ‘見性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니까, 초기불교를 전공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인도 힌두교의 아트만 思想과 불교의 法性 思想이 뭐가 다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사실 禪師스님들이 남겨 놓으신 어록을 조금만 보더라도 금방 그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사 어록을 보면 끊임없이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성품, 법성, 본래면
목을 確認하는 것 즉, 見性이라는 말을 사용은 하지만, 法性 즉, 나의 本來面目이 固定不變하는 實體로
따로 있다는 生覺을 하면 그 生覺은 아주 잘못된 生覺이라고 말이지요. 法性 즉, 나의 本來面目을 보라
고 見性하라고 方便으로 계속 그런 말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깨달아야만 할 對相으로서의 法性 즉,
나의 本來面目, 自性이 固定不變하는 독립된 實體로써 實際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金剛經에서도 ‘얻을 수 있는 法이 조금도 없다(無法可得)’고 말했고, ‘如來가 말한 定해진 法도 없다(無
有定法)’이라고 말했으며, 般若心經에서도 無所得이라 해서 얻을 깨달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육조단경
에서는 ‘本來無一物’이라고 해서 나의 本來面目 즉, 法性을 본래무일물이라는 말로 표현은 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方便上으로 그렇게 이름지어 놓았을 뿐, 本來가 한 物件도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만약 법성, 본래면목을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그런 앎은 그냥 알음알이(識),
分別心, 分別意識으로 허망한 시비 분별하는 生覺 煩惱 妄想에 불과할 뿐입니다. 깨닫고 보면 아무것도
없단 말이죠!(本來無一物). 그래서 法性, 나의 本來面目을 가리켜서 空이라고도 표현하고, 無我 즉, 고정
된 실체가 없다 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는 그 말이 그냥 모조리 아무것도 없는 즉, 죽
은 空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作用을 하고 活動을 하고 있는 空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
은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作用을 하고 活動을 하고 있는 이런 空을 가리켜서 춤추는 空(Emptiness
Dancing)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바탕에서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만물이 온갖
現象들로 現示되어 드러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줄여서 진공묘유(眞空妙有 : 진공인데 묘하게 있고
묘하게 있는데 진공이다) 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색 : 드러나 있는 것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라는 방편의 말입니다.
그래서 나의 本來面目, 法性을 법의 성품이라는 말로 표현은 했지만 이 표현 法性 즉, 나의 本來面目이
뜻하는 바는 人間의 알음알이(識, 意識), 分別心, 分別意識으로 이해할 수 있는 知識의 對相이 결코 아닙
니다.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生覺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槪念으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의 본래면목 법성이라는 방편이 가리키는 그것은 槪念 觀念으로 이해할 수 있는 認識 對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로서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
니다. 法性 즉, 나의 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이 기리키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全切이고, 티끌만한
것도 아니면서 宇宙 전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法性, 自性, 佛性, 佛(부처), 진짜 나, 나의 本來面目은 단지 方便으로써 그 이름만이 있을 뿐
그 이름에 걸맞는 고정불변하는 독립된 실체로서의 어떤 ‘것, 對相, 境界’는 절대로 없습니다. 初期불교
에서 말한 無我라는 방편이 가리키는 그것은 大乘佛敎에서 말하는 空 思想, 一乘思想, 一佛思想이라는
방편이 가리키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그것입니다.
禪불교의 公案이나 話頭를 보면 ‘무엇이 道입니까?’, ‘무엇이 깨달음(보리)입니까?’라고 묻는 質問에,
마른 똥막대기, 뜰 앞의 잣나무, 동쪽 산이 물 위로 걸어간다, 바람이 불어오니 처마 밑이 시원하구나
라고 答하기도 했고, 혹은 방망이로 때리기도 했고, 할하는 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行爲로써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습니다. 이런 모든 대답들이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나의 本來面目’, 法性,
佛性, 自性, 진짜 나, 본래의 나, 근원의 나, 佛(부처), 如來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바로 당장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공간의식 하나 이 자리를 가리켜 알려주기 위한 하나의 方便(방편), 하나의
手段(수단)일 뿐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말로써 이해시킬 수 없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시비 분별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생각 망상 번뇌 의식 마음 즉, 분별심 분별의식이 꼼짝 못하게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
어야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이해 너머 도무지 알 수 없는 말 아닌 말로써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런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禪불교의 말들이 바로 말 아닌 말, 즉 話頭, 公案입니다. 本來無一物,
아무것도 어떤것도 얻을 수 없는 ‘이 자리’ 아닌 ‘이 자리’, 法性, 自性, 佛性, 부처(佛), 깨달음, 본래의 나
근원의 나, 진짜 나, 本來面目의 자리를 말이나 思量하고 分別하는 生覺 妄想 煩惱 의식 마음 즉, 分別心
分別意識 너머의 것으로 깨닫게 하려고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方便이 公案, 話頭입니다. 이처럼
禪불교에서 사용하는 모든 言語(화두, 공안)와 方便은 철저하게 無我 思想(이 세상 모든 것은 고정불변
하는 실체가 없다)과 空 思想에 입각해 있습니다.
본래면목은 본래면목이 아니라 단지 이름이 본래면목일 뿐이고, 불성은 불성이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이
불성일 뿐이고, 법성은 법성이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이 법성일 뿐이듯, 본래면목 불성 법성이 본래면목
불성 법성이 아닐 때 그때 비로소 본래면목 불성 법성이라는 방편은 그같은 방편이 가리키는 그것일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가장 기초적인 方便으로 사용하는 言語的인 側面을 무시하고 단순히 自性,
法性, 佛性, 本來面目, 見性, 본래의 나, 근원의 나, 진짜 나, 참나(眞我)라는 방편의 言語를 쓴다고
해서 방편인 그 言語들이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이야말로 禪불교의 가장 기본적
方便마져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법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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