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慈悲)의 본래적인 이치
자비(慈悲)란 상대방의 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이념이나 집착으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자들은 자비원리 무시하는 것
서양사의 종교전쟁, 동양의 훼불이 대표 사례… 선(禪) 교(敎) 논쟁 마찬가지
자비의 본래적인 이치원리 이해 못하면 다른 의견을 인정하는 태도라도 갖춰야
그림=허재경
붓다가 말한 자비(慈悲)의 원래 뜻은 따뜻한 마음으로 포근히 품어주는 덕이 아니라, 집착(執着)을 하지 않도록 아무 감정의 개입이 없는 상태로 행해지는 타인의 어려움에 대한 배려(配慮)라는 의미인데 정(情) 이 많은 불자들을 종종 당황스럽게 만든다. 아니, 자비(慈悲)가 ‘무정(無情)한 배려(配慮)’라니 라고 얼토당토않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붓다가 말한 자비(慈悲)는 감정도 집착도 없이 베풀어지는 타인의 어려움, 타인의 번뇌에 대한 배려(配慮)가 맞다.
한편 ‘자선(慈善)’이라고 번역되는 영어의 ‘charity’가 철학의 의미론과 인식론에서 논하는 ‘principle of charity’에서는 엉뚱하게도 ‘자비(慈悲)의 원리’로 번역된다. 여기서 말하는 자비(慈悲)의 원리란 상대방의 말을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그의 말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의 지성(知性)에 대한 긍정적 배려(配慮)를 함축하기 때문에 철학의 의미론과 인식론에서 논하는 ‘principle of charity’를 ‘자비(慈悲)의 원리’라고 번역함이 옳다.
평소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그의 말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인 자비(慈悲)의 원리를 실천한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는 교과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교과서 안에 있는 이야기와 주장이 서로 앞뒤가 맞고 옳을 것이라고 전제하며 이해하려 노력한다. 불교 경전이나, 성경이나, 철학 서적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 안의 내용이 대부분 옳고 또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으며 해석하고자 한다. 이게 자비(慈悲)의 원리다.
역사상 전례가 없지는 않지만, 자비(慈悲)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확립한 사람은 20세기 후반 미국의 '데이비슨'이다. 그는 한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그리고 나아가 다른 사회나 다른 나라 사람의 말과 생각을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기본 원리 또는 갖추어야 할 지적(知的) 태도로서 자비(慈悲)의 원리를 제시했다.
자비(慈悲)의 원리(原理)는 다음의 두 요소로 되어 있다.
1.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 일관되며 명백히 모순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고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만난 이탈리아인이 말한 첫마디를 ‘지구는 둥글다’라고 해석했다면 그의 둘째 말을 ‘지구는 평평하다’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누구라도 그렇게 분명히 모순되게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도 우리와 같이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사고하며, 그의 생각도 우리처럼 대체로 서로 앞뒤가 맞는 정합적(整合的)인 체계를 이룬다고 가정해야 옳다. 만약 누군가가 ‘지구는 둥글다’와 ‘지구는 평평하다’를 동시에 진지하게 믿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렇게 모순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생각은 해석이 불가능하다. 실은 그 사람에게 과연 사고(思考)가 가능한지조차 알 수 없다. 또 논리적 추론이 불가능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잡다한 생각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말도 해석하기가 난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다양한 사람과 서로의 말과 생각을 올바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소통하며 산다. 이런 성공적인 의사소통 자체가 자비(慈悲)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증거다. 자비(慈悲)의 원리는 옳다.
2. 다른 사람의 생각도 우리들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옳다고 전제해야 한다. 우리가 처음 조우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해는 서쪽에서 뜬다’나 ‘북극성은 남쪽에 있다’와 같이 번역한다면 우리가 이 사람들의 말과 생각을 해석하고 이해할 가능성은 없다. 처음 조우한 이 사람들도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점을 알고 있고, 또 북극성은 북쪽에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우리가 처음 조우한 이 사람들의 말과 생각도 옳다는 가정 아래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려 해야 해석이 가능하다.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은 세계와 주변 환경의 자극(刺戟)이 원인(原因)이 되어 그 원인에 대한 결과(結果)로 형성된다. 이렇게 원인(原因)과 그에 따른 결과(結果)로 형성된 생각과 믿음이 세계와 환경에 맞지 않는다면, 우리가 성공적으로 자연(自然)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성공적인 생존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 체계도 대체로 옳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증거다.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을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그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해 대체로 옳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또 우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논리적이라고 전제해야 한다. 이같은 자비(慈悲)의 원리는 서양철학의 의미론과 인식론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지만, 나는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서로 올바로 의사를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원리로 생각한다.
자비(慈悲)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분야는 한없이 많다. 사람들이 이념 또는 무슨 ~ ~주의(主義)에 집착해 그들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모두 그르고 사악하다며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비(慈悲)의 원리를 부정하고 있다. 정치권에 흔한 이런 사람들과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데 필수인 자비(慈悲)의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말하자면 의미론적 인식론적으로 ‘무자비(無慈悲)한’ 사람들이다.
종교로 눈을 돌려 보자. 주지하듯이, 서양종교들은 자기들만 구원되고 동양의 타종교의 신자들은 모두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가르쳐 왔다. 서양종교들은 자비(慈悲)의 원리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수천 년 동안 서로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점철해 왔다. 다른 종교도 세상에 대해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또 그쪽 신도들도 자기들만큼 훌륭하다는 점을 부정해 왔으니, 서양의 이 무자비(無慈悲)한 종교들은 평화보다 전쟁을 더 많이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동양도 그다지 나을 것이 없었다. 성리학의 훼불과 불교 폄훼는 극도로 심했다. 한편 불교 안에서도 경전들을 읽다보면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왜 그다지도 깔보고 무시하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내가 읽는 경전의 가르침만이 최고이고, 다른 사람이 읽는 경전의 가르침은 모두 어리석은 이들을 위한 방편(方便)의 가르침일 뿐이다’라는 생각들은 자비(無慈悲)의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꼭 그렇게 주장해야 하나? 자비(無慈悲)의 가르침인 불교 안에서조차 그런 무자비(無慈悲)한 태도로 나와야 했나?
선교(禪敎) 논쟁도 마찬가지다. 지난 1000여년 동안 주로 선문(禪門)이 논쟁의 우위를 점해 왔는데, 글을 읽고 쓰며 공부하는 사람에 대한 선승의 험한 태도는 아직까지도 그칠 줄 모른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어리석어진다’며 학문하는 사람을 하근기 취급하는 무자비(無慈悲)한 전통(?)을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 이제는 그만할 때가 아닌가?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을 옳게 해석하고 이해하려면 받아들여야 하는 자비(慈悲)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소화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견해의 존재 가능성을 허용하는 너그러운 태도라도 갖추어야 옳다. 더욱이 부처님의 자비(慈悲)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불자라면 그래야 한다. 원효의 화쟁론도 자비(慈悲)의 원리를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77호 / 2021년 3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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