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중국의 동북공정과 가톨릭의 불교 침탈
침탈의 역사 세탁하려 이웃 종교 문화까지 탐하는 가톨릭
중국 동북공정과 다를바 없어…반성 없는 역사엔 발전 없어
문화대혁명을 겪은 중국은 유구한 역사의 뿌리를 스스로 송두리째 잘라버렸다. 뿌리가 잘린 나무는 다시 자랄 수 없듯, 파괴되고 끊어진 역사는 되살릴 수 없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절감한 중국은 지금 동북공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주변 민족과 국가들의 역사를 자기 것이라 우겨 중국 문화의 공백을 채우려는 것이다. 이왕이면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가져가고 싶을 터. 한민족과 한반도의 역사·문화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고구려도, 김치도, 한복도 무조건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긴다. 그 모습이 뿌리 잘린 꽃처럼 보여 안쓰러운 마음마저 든다.
가톨릭 역시 중국 못지 않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한때 지구촌을 호령하던 많은 나라들이 가톨릭 영향력 아래서, 혹은 상부상조의 연대 속에서 경제 부강을 이루고 문화의 꽃을 피웠다. 오늘날 전 세계서 가톨릭의 흔적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것도 이에 기인한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가톨릭의 뿌리는 튼튼하지만 그 가톨릭이 세계 종교로 확산된 과정은 그리 자랑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하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대륙으로의 확산에 앞선 연습 과정이었을까. 가톨릭의 한반도 진출은 침략전쟁과의 연대였다. 창원에 있는 ‘세스페데스 기념공원’은 가톨릭 신부 세스페데스(1552~1611)가 한반도에 처음 발을 들인 ‘최초 도래지’라는 이유로 기념되고 성역화까지 진행된 곳이다. 하지만 이제는 적지 않게 알려져 있듯,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소속 신부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세스페데스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선봉대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종군신부였다. 그는 조선을 침략하는 왜선을 타고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의 한반도 상륙은 가톨릭 신부의 첫 도래가 아닌 임진왜란의 시작이었고, 그는 가톨릭 선교를 목표로 왜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참전한 부역자였다.
그뿐인가, 황사영 백서사건은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전복 시키려는 반역이고, 김대건의 지도 밀반출사건은 나라의 기밀을 빼돌리는 매국이자 스파이 행위였다. 역사학적 평가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강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행적이 이런 논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건강하지 못한, 순수하지 못한 이들의 활동을 거름 삼아 한반도에 이식된 가톨릭의 뿌리는 처음부터 자랑스러운 역사일 수 없었다. 여기에 독립투사 안중근을 파문시키고 독립운동을 일제에 밀고하는 등 근대 역사를 더해 가톨릭을 평가하자면 ‘척결의 대상’이라는 말도 결코 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가톨릭에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역사 세탁이다. 반역과 매국, 침략과 부역의 역사를 세탁해 그럴듯한 뿌리를 만들기 위한 몸부림.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웃 종교의 문화를 침탈해 자신들의 것이라 우긴다면 중국의 동북공정과 무엇이 다르랴. 불교와 조선의 역사를 왜곡 축소해 한 줌도 안 되는 가톨릭의 역사를 상대적으로 부각시키려 한다면 중국의 동북공정과 무엇이 다르랴. 이를 가벼이 여기고 무관심하거나 혹여 묵인한다면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 앞에 무릎 꿇는 것과 또한 무엇이 다르랴.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다.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 역사 앞에 무릎 꿇고 반성한 빌리 브란트 전 독일총리와 퇴임 직전까지도 거듭 독일의 책임을 인정했던 메르켈 전 총리가 박수받는 이유는 그들의 적확한 역사 인식 때문이다. 부끄러운 역사임을 알고, 그것을 반성하는 자세 때문이다. 그것은 조상들의 잘못된 행보를 기꺼이 인정하는 용기다. 그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책임감이다.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바른길로 나아가겠다는 비전이다. 지금 가톨릭에 필요한 것은 이웃 종교의 문화를 슬쩍 도용해 내 것에 집어넣는 꼼수나 역사를 유리한 방향으로 세탁하는 왜곡이 아니다. 진정한 사과와 반성의 토대 없이 역사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 “종교 간 상생과 화합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최기복 옹청박물관장(전 원로사목자)의 발언에서 한 줌의 진정성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반성도, 사과도, 책임감도 없기 때문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655호 / 2022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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