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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역사상 첫 흑인 여성 대법관 탄생 의미

장백산-1 2022. 4. 10. 11:39

[특파원 리포트] 미 역사상 첫 흑인 여성 대법관 탄생 의미


김양순 입력 2022.04.10. 10:34
미국 최초의 흑인여성 연방 대법관이 된 케탄지 잭슨 브라운이 백악관 잔디밭에서 연설하고 있다. 왼쪽은 바이든 대통령, 오른쪽은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 21.4.8.

'역사적'이라는 단어와 함께 거의 모든 미국 신문 1면을 장식한 케탄지 브라운 잭슨, 새 연방 대법관은 미 백악관 남쪽 잔디밭으로 들어서며 반짝이는 눈물을 닦아냈다.

"나는 노예의 꿈이자 희망이다"

그가 인용한 시인 마야 앤젤루의 싯구는 대법관으로 인준된 자신의 여정과 역할을 함축적으로 담아냈다.
잭슨의 왼쪽에는 미 역사상 첫 아시아계 여성 부통령이 섰고, 오른쪽에는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과 함께 미국을 이끌었던 바이든 대통령이 섰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역사상 첫 흑인 여성 대법관을 지명하겠다고 공약했고, 지난 2월 워싱턴 D.C. 순회법원 판사인 케탄지 브라운 잭슨을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다. 여러 차례 걸쳐 이뤄진 미 의회 청문회를 거쳐 찬성 53표, 반대 47표로 잭슨 판사가 대법관으로 상원 인준된 순간, 백악관에서는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미 언론은 일제히 "사상 첫 흑인 여성 대법관", "233년 벽 깨졌다", "역사를 새로 쓰다"와 같은 거창한 수식어들로 1면 머릿기사를 송고했다.

 

233년 동안 지명된 116명(케탄지 포함)의 연방대법관 가운데 3번째 흑인이고 6번째 여성 대법관이다.

 

■"능력은 ...흑인 여성이어서 지명됐다"?


케탄지 브라운 잭슨의 인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가장 먼저, 그리고 대중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마타도어는 그녀가 능력이 탁월하지 않은데 흑인 여성이라서 지명됐다는 것.

 

"단지 흑인이어서, 여성이어서, 합쳐놓으니 흑인 여성이어서 대법관에 지명되는 것이 온당(공정)한가. 실체적 진실을 가려내고, 역사의 길을 내는 작업을 하는 연방 대법관은(게다가 종신직이다)철저하게 능력에 의해서 임명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흑색선전이 퍼져나갔다. 마치 케탄지 브라운 잭슨이 능력이 없는데 운좋게도 흑인이자 여성인 판사여서 연방 대법관에 지명됐다는 논리. 사실일까?

 

케탄지 브라운 잭슨은 흑인 여성이라는 물리적 상징성(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을 제외하면, 하버드대, 하버드 로스쿨, 대법관 서기, 워싱턴 D.C.순회법원까지 전형적인 대법관 코스를 밟아왔다. 현재 대법관의 학력과 경력 커리어를 보면 아이비리그 대학과 로스쿨, 대법관 서기는 공통 코스다. 이른바 업계에서 탁월하다고 인정받아야 뽑힐 수 있는 자리들을 착착 밟아 올라갔음에도 '능력' 이 없는데 순전히 흑인 여성이어서 지명됐다는 프레임이 씌워진 공격이었다.

 

케탄지 브라운 잭슨과 현재 연방 대법관들의 학력, 경력을 비교한 인포그램. 출처: 워싱턴포스트.

 

결론적으로 케탄지 브라운의 이력과 그간의 판결에는 하자를 삼을 만한 요인이 거의 없었다. 당파성을 앞세워 잭슨 판사를 낙마시키려했던 공화당의 노력은 여러 모로 자충수로 끝났다.

 

■미 대통령들이 가장 목숨거는 지명권...연방 대법관


미 연방 대법관은 9명이다. 미국은 물론(연방 대법원의 판례는 곧 법이 된다) 서방세계에 법치국가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강한 사법체계는 9명의 대법관으로 이뤄진다. 대법관은 각자 맡은 사건에 대해 고유하게 심의하고, 기록을 작성하고, 서로 논의해 최종적으로 판결을 이끌어내지만 그 과정은 거의 공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행정 과정에 투명하게 공개되는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 투명성이 낮은 곳이 연방 대법원이다. 여기에다, 연방 대법관은 종신직이다.

 

때문에 연방 대법관으로 누가 임명되느냐는 향후 최소 30년 간 국가의 가치관을 정립해나가는 문제로 인식된다. 흑인들이 공립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교육에서 차별을 철폐하도록 한 판결도, 언론 보도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공익성을 인정한 판결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장했던 대선 사기주장을 신속하게 거부한 것도 연방 대법원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가 9개월 남았을 당시 대법관 자리가 공석이 되자, 이를 임명해선 안된다고 공화당이 결사적으로 막아선 것도(이후 트럼프가 들어서자마자 보수 대법관으로 임명), 트럼프 임기가 2개월 남았을 때 루스 긴스버그 대법관이 사망하자 트럼프가 재빨리 에이미 배럿(보수 성향) 대법관을 임명한 것도 그만큼 대법관의 역할이 중요하고, 또 오랜 시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케탄지가 되었으니, 뭐가 나아지는 걸까?

 

233년 동안 미 연방대법원의 구성을 그림 인포그램. 116명을 대법관 가운데 3번째 흑인, 6번 째 여성인 케탄지 브라운.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미 굳건한 보수 체제를 갖추고 있다. 9명 중 6명이 보수, 3명이 진보. 케탄지가 임명됐다 하더라도 진보와 보수의 틀을 바꿀 수는 없다. 공화당 당수 미치 매코넬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꼼수와 말바꾸기를 이용해 이미 4년 동안 무려 3명이나 보수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했다.(그것도 아주 젊은 사람들로. 오랫동안 보수의 틀을 바꿀 수 없을 만큼 젊다.)

 

당장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하는 판결과 흑인과 소수자들이 투표하기 어렵도록 하는 법안의 위헌 판결은 뒤집어질 것으로 보인다. 3명의 진보 대법관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6명의 보수 대법관들을 설득해 뒤집기 어려운 사안들이다. 제아무리 케탄지 잭슨 대법관이 설득과 협치에 능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아프리카 노예 출신의 조상들을 기억하기 위해 부모가 지어준 케탄지라는 이름을 고수하고 (케탄지는 아프리카어로 사랑스러운 사람이란 뜻이다), 아프리카 의상을 즐겨입는 국선변호사 경험을 가진 이 여성은 대법관 구도에 다양성을 부여할 것이다. 흑인이어서, 여성이어서, 국선 변호사를 하며 형사 사법제도의 피해를 당한 이들 옆에 서 봐서 그렇다. 경험치는 확실히 시야를 넓고, 깊게 해주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유색인종과 여성, 장애인에 대한 비하 발언을 하고 그같은 발언과 행동들이 켜켜이 쌓여 혐오가 된다. 부끄러움을 상실한 트럼프 시대의 인권 비하 발언들이 서슴없이 쌓여 오늘날 미국에서 아시아계를 겨냥한 증오범죄가 판치고 있다는 점(한인들도 이유 없이 구타당했고, 살해당했고 지금도 증오범죄의 타겟이 되고 있다)에서, 미 연방 대법원에 다양성이 추가되었다는 사실은 어쩐지 안심이다.

 

김양순 기자 (ysooni@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