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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선지식을 찾으라

장백산-1 2025. 1. 5. 18:34

서둘러 선지식을 찾으라

 

만약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본성(本性)을 보아야 하니, 본성이 곧 부처이다. 만약 부처인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염불하고 독송하고 재를 지내고 계(戒)를 지켜도 이익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만약 스스로 바르고 밝게 깨닫지 못했다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 생사의 근본을 밝혀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서너 권의 경론(經論)을 강의할 수 있는 것을 불법이라고 여긴다면 그런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고 글만 외운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죽고 사는 일이 크니,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라.

 

만약 급히 선지식을 찾지 않는다면 헛되이 인생을 보낼 것이다. 불성은 자신에게 있지만, 스승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끝내 불성을 알 수가 없다. 선지식을 말미암지 않고 깨닫는 자는 매우 희귀하다.

 

“만약 본성(부처)을 보지 않더라도, 염불(念佛)하고 독경(讀經)하고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정진하고 널리 이로운 일을 한다면 성불(成佛)할 수 있습니까?”

“성불할 수 없다.”

“어찌하여 성불할 수 없습니까?”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법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유위법(有爲法)이고 인과법(因果法)으로써 과보를 받는 것이니 곧 윤회(輪回)하는 법이다.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서 어느 때 불도(佛道)를 이루겠는가?”

 

부처는 업(業)을 짓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에게는 인과(因果)가 없다. 부처에게는 지키거나 범해야 할 것이 없다.

 

모든 법은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 부처는 계율을 지키지도 않고, 선을 닦지도 않지만 불선을 짓지도 않고, 정진하지도 않지만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만드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니 부처라는 견해를 만들지 말라.

 

 

✔ 성불(成佛)한다는 것, 깨닫는다는 것은 곧 이 마음, 법, 한마음, 본성을 보는 것이다. 본성을 본다고 하여 견성(見性),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본성이다.

 

본성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본성을 보려고 애쓰는 자신이 바로 본성이기에 본성을 보려는 것은 곧 눈이 눈을 보는 것과 같고, 머리를 달고 머리를 찾는 것과 같다.

 

본성은 찾는다고 해서 본성은 찾아지지 않는다. 내가 바로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성을 찾는 수행법이나 방법 따위는 없다. 방법은 여기에서 저기로 가기 위해 있는 것인데, 내가 나를 확인하는 것이니 따로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서울에서 서울로 가는 방법을 묻지만 이미 서울에 있으니 서룽로 가는 방법이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은 허망한 분별심에 놀아나기 때문에 스스로 본성을 보지 않고, 자신의 분별심만을 보는 것일 뿐이다. 세상을 볼 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편견과 분별이라는 색안경, 중생심의 필터로 걸러서 세상을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보는 것이다. 언제나 어는 곳에서나 본성(부처, 진가 펼쳐져 있음에도 그것을 보지 않고 자기 안에 있는 분별의 필터로 걸러진 중생의세상만을 본다.

 

중생이 본성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부처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방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길 없는 길, 방법 아닌 방법이 바로 불교의 수행의 길이니 그것은 오로지 선지식을 만나는 것이다.

 

아무리 경론을 읽고 공부한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선지식을 보는 안목이 이 공부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바른 선지식만 만난다면 깨닫는 것은 멀지 않다. 그저 바른 선지식을 만나고, 그 선지식의 회상에 깃들어 가르침에 젖어드는 것이 이 공부의 가장 중요한 방법 아닌 방법이다.

 

선지식을 찾아가 생사의 근본을 밝혀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써 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길이다. 선지식을 만나지 않는다면 백 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낼 수밖에 없다.

 

불성(한마음, 본래면목, 법, 부처)은 자기 자신에게 이미 드러나 있지만, 스스로 자신이 본래 깨달았음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선지식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염불하고 독경하고 보시하고 지계(持戒)를 잘 지킨다고 해서 성불할 수 있을까? 없다. 그런 기도방법, 수행법을 아무리 열심히 갈고 닦는다고 해서 본성 (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법, 부처) 을 보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수행법을 갈고 닦는 것을 통해 특정한 결과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과법으로써 과보를 받는 일이고 윤회하는 법일 뿐이다. 마음공부는 비인비과(非因非果)다. 특정한 수행법이라는 원인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불성(한마음, 본래면목, 법, 부처)은  이미 결과로써 지금 여기에 있는데 또 다른 결과를 얻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 여기에 불성(한마음, 본래면목, 법, 부처)은  100% 완전하게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특정한 수행법을 통해 열심히 갈고 닦아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낸다면, 그것 자체가 유위법일 뿐이다. 이 공부는 무위법(無爲法)이다.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얻을 수 있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완전하게 주어져 있기에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는 공부다. 공부 아닌 공부다.

 

불교 경전을 공부하는 이유는 바른 선지식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기 위함이다. 이 공부를 통해 다만 바른 선지식을 만나고, 그 선지식을 자주 찾아뵙고 법문을 들으라. 그것이 이 공부의 전부다.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에게 제자들이 묻는다.

“스승님은 어떻게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스승은 답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스승님을 믿고, 스승님의 곁에 있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깨달은 이들이 종종 말하는 방식이다. 서둘러 선지식을 찾으라. 죽고 사는 일이 크니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라.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