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없다(無心)
제자가 화상에게 묻는다. “마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한다. “마음은 없다”
“내게 마음은 없지만, 나는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다”
“화상께서 마음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마음이 없다면 죄도 없고 복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중생들은 육도에 윤회하면서 삶과 죽음이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답한다. 중생은 허망하게 헤매면서 마음 없는 가운데 허망하게 마음을 만들어 내고, 여러 가지 업을 지으며 헛되이 집착하여 있다고 여긴다. 그런 까닭에 육도윤회(六道輪廻)하며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것이다. 비유하면 사람이 어둠 속에서 나무 등걸을 보고 귀신으로 여기고,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여겨서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중생의 허망한 집착이 이와 같아서 마음 없는 속에서 마음이 있다고 허망하게 집착하여 여러 가지 업을 지으니 육도에 윤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중생이 대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선을 통해 마음 없음을 깨달으면 모든 업장(業障)이 전부 남김없이 소멸하고 생사윤회가 곧장 끊어진다.”
“결단코 마음은 없다. 다만 중생이 마음이 있다고 헛되이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있을 뿐이다. 만약 마음 없음을 깨닫는다면 번뇌와 보리(菩提:깨달음), 생사(生死)와 열반(涅槃)도 없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생사는 마음이 있는 자에게만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보리와 열반을 얻을 수 없다면,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이 전부 보리를 얻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답한다. “다만 세속제(世俗諦:세간의 진리)의 문자로써 말하는 것일 뿐, 진제(眞諦 : 출세간의 진리)에서는 진실로 얻을 것이 없다. 『유마경』에서도 ‘보리는 몸으로도 얻을 수 없고,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다’고 했고, 『금강경』에서는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법도 없다’고 했다. 모든 부처님은 다만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었다.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음을 알라.”
“만약 스님 말씀처럼 마음이 전혀 없다면 나무나 돌과 같은 것이 아닌지요?”
“나의 마음 없는 이 마음은 나무와 돌과는 같지 않다. 왜 그런가 하면, 비유하면 마치 하늘북(天鼓)과 같아서 비록 마음은 없으나 저절로 여러 가지 묘한 법을 내어 중생들을 교화한다. 또 여의주(如意珠)와 같아서 비록 마음은 없으나 저절로 여러 가지 변화된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처럼 비록 마음은 없으나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잘 깨닫고 참된 반야(般若:지혜)를 갖추어 삼신(三身)이 자재하게 반응하고 작용함에 거리낌이 없다.”
“이제 마음속에서 어떤 수행을 할까요?”
“다만 모든 일 위에서 마음 없음을 깨달으면 될 뿐, 다시 다른 수행은 필요 없다.”
✔ 불교에서 ‘마음’은 2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째는 중생심(衆生心)으로써 시비를 가리고 분별(分別)하는 마음이며, 둘째는 진여심(眞如心)으로써 부처님 마음, 무분별(無分別)의 마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첫 번째의 중생심이다. 그런데 이 마음의 특징은, 그것을 분별심(分別心)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대상을 비교하고 나누어서 파악하는 마음이다.
예를 들어, 내 키가 큰지 작은지를 우리는 마음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그 마음은 분별심이기 때문에, 누군가와 비교를 통해서 큰지 작은지를 판단한다. 비교하지 않으면 큰지 작은지를 알 수 없다. 가난과 부자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비교를 통해서만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생심은 비교를 통해 대상을 파악하여 아는 마음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 내 키가 큰지 작은지, 부자인지 가난한지는 나에게 그렇게 파악된 마음일 뿐,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인 것은 아니다. 가난하다고 여겼지만,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도 풍요롭다고 여기며 잘 살 수도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중생심의 비교 분별하는 특징으로 인해 우리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것들과 비교함으로써 온갖 거짓 정보를 만들어낸다. 옳은지 그른지, 큰지 작은지, 좋은지 나쁜지, 아름다운지 추한지, 부자인지 가난한지 등 온갖 대상들을 둘로 나누어 놓고 비교 분별하여 어느 하나를 선택한 뒤, 그것이 옳다고 여기며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보고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 본 뒤에 그 사람을 내 식대로 분별하여 판단한다. 그 사람은 키도 작고, 못생겼고, 능력도 없고, 학벌도 나쁘고, 성격도 별로고, 가난하다고 판단한 뒤에 그것을 내 의식은 진짜라고 믿는다. 그리고는 그 분별심에 집착한다. 내 딸이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하면 재빨리 내 분별심은 그것에 대해 잘못된 판단이라고 결론을 짓고는 결사반대를 한다. 그럼에도 결혼을 하겠노라고 하면 괴로워한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해서 보니 잘 살고, 사람도 훌륭하고, 참 괜찮은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 수도 있다.
결혼을 반대하며 괴로워했을 때 그 괴로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상대방의 나쁜 성격과 외모 등에서 온 것이라고 여기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 분별심에서 온 것이다. 그 분별심을 옳다고 집착하고 고집한데서 생겨난 것일 뿐이다.
간단한 비유이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중생심, 비교 분별심을 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대상을 전부 다 판단하고 분별한다.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 아름다운지 추한지를 대번에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고집하고 집착함으로써 온갖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이 생겨나는 이유다.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 때문에 식(識:의식=분별)이라는 분별심이 생겨나고, 대상을 자기 분별심대로 비교해서 파악한 뒤에 그것에 대해 애착하고 집착하고, 그 집착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업을 짓고 괴로움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무명과 식(識),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등으로 이어지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대략적인 과정이다.
결론적으로, 비교 분별하는 중생심으로 인해 중생들은 괴로움에 허덕인다. 그 괴로움이 내 분별심이 만들어낸 허망한 착각임을 모르고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분별심으로 인해 만들어진 괴로움도 진짜라고 믿는다. 이 모든 괴로움이 나를 괴롭히는 실체적인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삶은 괴롭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正見)이 아니라, 내 중생심, 분별심이라는 의식의 필터를 통해서 왜곡되게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은 온통 괴로운 곳으로 왜곡되게 보인다.
선(禪)은 바로 그러한 허망한 중생심, 즉 분별심인 식(識)을 통해 세상을 보던 습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곧장 바로 보게 만든다. 비교 분별없이, 왜곡 없이,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저 있는 그대로 통찰하게 되면, 집착도 괴로움도 설 자리를 잃는다.
분별심이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지 않고, 아무런 필터 없이 텅 빈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될 때, 본래 드러나 있던 있는 그대로의 진실, 진리가 드러난다.
사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중생들이 분별심이라는 필터를 통해 바라보기 때문에 온갖 문제가 생겨났던 것일 뿐이다.
그래서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완전한 모습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표현했고, 승조스님은 ‘촉사이진(觸事而眞)’, 즉 부딪치는 것이 모두 참이라고 했으며, 석두스님은 ‘촉목회도(觸目會道)’라 하여, 눈에 보이는 대로 도를 만난다고 했다.
또한 도오스님은 ‘촉목보리(觸目菩提)’라 하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깨달음이라고 했으며, 경봉스님은 ‘목격도존(目擊道存)’이라 하여 눈앞에 도가 있다고 했다. 마조스님은 이를 ‘입처즉진(入處卽眞)’으로, 임제스님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고 함으로써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참된 진실, 진리는 있다고 했다.
이처럼 진리는 이미 눈앞에 완전하게 드러나 있다. 드러나 있지만 분별심이라는 중생심 때문에 보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괴롭고 어리석은 중생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드러나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자기식대로 해석한 분별의 허망한 세계만을 보며, 그것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선(禪)에서는 이처럼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완전한 제법실상의 세계를 마음, 법(法), 자성(自性), 본성(本性), 실상(實相), 본래면목(本來面目), 불성(佛性), 진여(眞如), 무분별심(無分別心), 해탈(解脫), 열반(涅槃)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은 그저 편의상 붙인 하나의 이름일 뿐이며, 그저 방편으로 붙인 말일 뿐, 이 말 속에 참된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진리의 자리는 무엇이라고 이름붙일 수도 없다.
이름을 붙이려면 그 이름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 진리는 대상이 아니다. 그 어떤 대상도 아닌, 말로 표현하자면 이 온 우주의 바탕, 배경과도 같은 말로 붙일 수 없는 자리인 것이다.
어떤 ‘것’이 아니다보니,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도 사실상 맞지 않는다. 모든 이름은 그저 방편일 뿐.
그래서 선에서는 이 참된 진실의 자리를 그저 ‘이것’이라고 부르곤 한다. 또한 이 자리는 중생심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심(如來心), 진여심(眞如心)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 그리고 더 줄여서 ‘마음’ 혹은 ‘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에서는 ‘마음’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쓴다. 선에서 ‘마음’이라고 하면 그것은 중생심이거나 여래심을 말하는데, 문맥에 따라 중생심을 말하는지 여래심을 말하는지를 잘 새겨야 한다.
달마는 ‘마음은 없다’고 했다. 여기에서 ‘마음’은 물론 진여심, 여래심, 본래면목, 자성으로써의 마음이다.
이 여래심이라는 마음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있다거나 없다고 하려면 있거나 없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마음, 본성은 있거나 없는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배경 같은 것일 뿐, 어떤 특정한 대상은 아니다.
달마는 ‘결단코 마음은 없다. 다만 중생이 마음이 있다고 헛되이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중생이 분별심을 일으키면 그 중생의 분별심과 상대적으로 여래의 무분별심도 함께 분별되어 생겨난다. 즉, 분별심이 있으면 무분별심도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처럼 둘로 쪼개서 분별하여 인식하는 것이 우리 중생심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별심이 중생의 허망한 착각이기 때문에, 그 허망한 착각만 사라지면 될 뿐, 허망한 착각이 사라진 뒤에 또 다른 착각 없는 진여심이 다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름만 무분별심(無分別心), 진여심이라고 붙여놓았을 뿐이지, 그런 진여심에 해당되는 무언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없다’고 한 것이다.
여래심, 진여심, 불성, 자성, 본성, 마음이라는 어떤 것이 따로 실체적으로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없다. 중생들이 허망한 분별심을 일으키니까 그것과 상대적으로 무분별심, 진여심이라는 것을 방편으로 설했을 뿐이지, 그 진여심, 마음이라는 것에 해당하는 어떤 실체적 대상은 없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중생심으로 인해 괴로워하기 때문에, 그 중생의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를 ‘열반’, ‘부처’, ‘마음’이라고 이름 한 것일 뿐이다. 중생이 있기에 부처도 있고, 생사가 있기에 열반도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수많은 경전에서는 ‘부처도 열반도 진리도 없다’고 설했다. 중생심이 없으면 진여심도 없다. 어리석은 중생이 없으면 지혜로운 부처도 없다.
중생이 스스로 자신의 괴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 놓고는 그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또 다른 열반과 해탈이라는 목표를 세워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중생의 헛된 망상이 없으면, 분별심이 없으면, 그저 아무 일이 없다. 중생의 분별심이라는 병이 없으면 그저 건강하게 아무 일 없이 살아갈 뿐이다. 중생이 부처라는 특정한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중생의 병이 곧 중생심이고 병이 없는 것을 이름 하여 부처, 열반이라고 했을 뿐이다. 열반, 해탈이라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핵심은 사성제(四聖諦)다. 즉 인간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해결이야말로 불교의 주제다. 인간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 불교다. 괴로움의 원인이 분별심에 있기 때문에 분별심을 소멸시키면 그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일 뿐, 또 다른 괴로움이 없는 행복한 세계가 따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의 세계에서 저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괴로움이라는 병이 있다가 병이 사라졌을 뿐이다.
그러니 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를 이름 하여 해탈, 열반이라고 했을 뿐이지, 그런 특정한 건강한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열반은 이름이 열반일 뿐, 열반이라는 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진여심, 불심, 부처님의 마음도 없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무지 역무득(無智 亦無得)’이라고 하여, 지혜도 없고 깨달음, 불성, 마음을 얻을 것도 없음을 설하고 있다.
이를 선에서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도 하고, 무심(無心)이라고도 하며, 무아(無我), 공(空)이라고 한다.
깨닫고 보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중생의 마음도 없고, 부처의 마음도 없다. 그 어떤 마음도 없다. 무심(無心)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이 무심을 깨닫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비로소 ‘참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사라지는 것일 뿐. 그 어떤 티끌조차 붙을 자리 없이 텅 비어 공할 뿐. 거기에는 부처도 붙을 자리가 없다. 아무 일이 없다.
확연무성(廓然無聖), 거기에는 성스러운 것조차 붙을 자리가 없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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