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 노무현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서프라이즈 / 김원웅 / 2009-07-08)
|
김원웅 前 국회 외교통상위원장 |
나의 동지 바보 노무현은 그렇게 갔다.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를 읽고 또 읽으며, 느끼고 또 느끼며 울고 또 울었다.
살지 못해서, 살 수 없어서 죽음을 선택한 그의 처절한 선택이 저리고 또 저렸다. 그는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 했지만 자연스럽지 못한 그의 죽음은 남몰래 그가 흘렸을 비통한 속울음의 증거였다.
“슬퍼하지 마라”는 그의 위로는 그가 건너야 했던 고독의 강을 가늠케 했다. 사랑도, 명예도, 동지도 도움이 안 되는 절체절명의 고독의 강! 그의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라면 그것은 태풍이었다.
그의 죽음이 “자살”임을 강조하면서 자살한 영혼은 천국에 가지 못하는 거라며 그의 영혼에 침을 뱉는 자는 누구인가? 천국은 그렇게 몰상식한 사람들의 것인가.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크다며,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며,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며 모든 것을 안고, 지고 꽃잎처럼 떨어진 고독한 영혼을 향해 그런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 천국이라면 그는 결코 천국에 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그가 그런 천국에 가기를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내였다. 전사였다. 우리는 사내 중의 사내, 영웅 중의 영웅을 잃은 것이다. 그는 삼손처럼 대담했고 삼손처럼 자유로웠다. 자기만의 표정이 있었고, 자기만의 언어가 있었다. 모든 영웅들에는 약점이 있다. 아킬레스의 뒤꿈치, 삼손의 머리카락….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영웅은 약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약점은 누구에게나 있다. 약점 뒤에 숨어 비굴해지거나 세상 탓 하는 자가 소인배라면 영웅은 약점을 무릅쓰고 싸우는 자다. 영웅은 그가 믿는 것을 위해서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싸운다. 그러고 보니까 성서에 나오는 단순한 저 문장이 다르게 보인다.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그가 사는 동안에 죽인 사람보다 더 많았다.”
자기 죽음으로 적을 파멸시킨 삼손! 그 전에 삼손은 그의 강점이었던 머리를 잘렸다. 힘의 원천이었던 머리카락이 잘리자 그는 무력해졌다. 장점이 약점이 된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는 살려달라고 애걸하지 않았다. 책잡히며 조롱받는 상황에서 그는 고독하게 자기 속에 정주했다. 조용히 스스로를 반추하는 사이 머리카락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기 모두를 걸었다. 죽을 줄 알면서 기둥뿌리를 뽑고 기둥 밑에 깔려 죽으면서 적들을 전멸시켰다. 그것이 영웅 삼손이었다.
삼손의 죽음이 삼손의 삶의 절정이었던 것처럼 죽은 노짱은 살아있는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했다. 살아서 바보 노무현이 받았던 어떤 지지보다도 깊고 애달픈 사랑을 받으며. 영국인 친구가 노무현의 장례식을 보고 놀란 모양이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장례식이 인상적이었다며 그가 말한다. “어떻게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저리도 깊게 슬퍼할 수 있냐”고.
노무현은 누구보다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보여준 정치인이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직책과 사람을 동일시했다. “대통령”이라고 하면, “어느 기업의 누구”라고 하면, “국회의원”이라고 하면 그 자체로 통했다. 외형적 성공이 가치의 척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서라면 때론 국회의원을 안 해도 된다고 자기를 던졌고, 권위주의 극복을 위해서라면 “제왕적 대통령”을 누리지 않겠다고 자기 길을 갔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길을 살 수 없다면 무릎 꿇고 사는 일보다는 서서 죽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니 국민들이, 아무런 이해관계 없는 사람들이 “진짜 사람”을 잃었다고 슬퍼하며 통곡하는 것이다.
노무현의 바보 정신의 불길이 엉뚱한 사람들을 살려 줄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애도도 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 국민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적이었기에 무찔렀으나 영웅으로서 죽은 헥토르의 마지막 길을 열어주었던 아킬레스처럼!
우리 모두 그렇게 인간의 길 위에서 그를 배웅하면서 ‘나’를 반추해야 하지 않을까.
김원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