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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호령한 그 많던 말은 어디로 갔나?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이어 사는 우리 삼천만, 복되도다 그 이름 대한이로세”
위 노래는 ‘대한의 노래’의 1절 가사로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와 ‘동북공정’과 ‘간도협정’으로 불거진 역사 분쟁과 영토문제로 비추어 보면 위 노래는 이제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반도 삼천리’와 ‘무궁화 이 강산에’라는 가사 때문이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3천리(?)
우리의 역사 강역은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삼천리에 국한된 적이 없다. 신시시대와 단군조선은 물론 삼국시대를 거쳐 발해,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반도 삼천리’에 갇혀 산 적이 없다.
보통 ‘만주(滿洲)’라 하면 현 중국의 동북3성 즉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3개 지역을 떠올린다. 현 중국에서는 만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중국은 만주와 청나라의 흔적을 굳이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으며 만주족은 ‘만족(滿族)’으로 만주는 ‘동북3성’으로 대체하여 쓰고 있다.
고대사에서 요동(遼東)을 현 요하(遼河) 동쪽이라고 우기는 것도 우리 역사 강역을 축소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만주를 포함한 요동지역이 5천년 이상 연고를 갖고 있는 우리와 만주족 등 이른바 동이의 흥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우리는 한반도에서만 살겠다는 노래 아닌 노래를 부르고 살고 있다.
우리는 언제 요동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그 단초는 고려 말의 역사에 있다. 우리가 요동을 포기하게 되는 아픈 역사가 있다.
<명사(明史)> 권320 ‘고려전’과 같은 책 권136 ‘이원명(李原名) 전’에 기록된 내용이 그것이다.
<명사(明史)> 권136 ‘이원명(李原名) 전’에는 “고려에서 ‘요동의 문주(文州),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는 모두 고려의 옛 땅이니 철령(鐵嶺)에 병영을 설치하겠다.’고 주청하니 원명이 ‘여러 주(州)가 원(元)의 판도 안에 있어 요(遼)에 속하여 있으며 고려의 땅은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고 있고 지금 철령은 이미 위(衛)가 설치되어 있어 마땅하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고려에서 재차 주청을 하니 임금(명 태조)이 고려에 유시하여 땅이 갈라져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반해 <명사(明史)> 권320 ‘고려전’에는 “홍무(洪武) 20년(1387년) 12월 호부(戶部)에 명하여 고려왕이 철령 북쪽의 동서의 땅으로 옛 개원(開元)에 속한 것은 요동에서 다스리도록 하고, 철령 이남의 땅으로 고려에 속한 것은 본국에서 다스리도록 하라고 하고 나라의 경계를 바로 하고 침범하지 말도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홍무 21년(1388년) 4월 고려의 우왕(禑王)이 표를 올려 ‘철령의 땅은 실로 대대로 고려에서 지키어 왔으니 마땅히 옛날처럼 되길 바란다.’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때는 중원대륙에서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시점이고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는 명나라를 견제해야할 처지에 있었다.
최영 등의 지지를 받고 있던 고려의 우왕(禑王)은 우왕 13년(1387년)에 대대로 고려의 땅이었던 요동의 철령 지역을 되찾고자 명나라에 되돌려 달라고 한 것이다.
최영 요동정벌, 고려 영토였던 심양 북쪽 철령 수복 의도
여기에서 철령은 어디인가? 보통 철령하면 현 강원도와 함경남도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알고 있으나 아니다.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있는데 압록강 이남에 있는 철령에 병영을 설치하고 명나라와 싸워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철령은 현 중국 요녕성의 심양 북쪽에 철령이 있으며 철령 북쪽에 개원이 있다.
고려는 이 철령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명나라에 돌려달라고 요구를 하지만 명나라가 거절을 하여 고려는 최영과 이성계, 조민수 등을 장수로 하여 팔도의 군사를 모아 요동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고 치는 것은 불가하다는 등 4가지의 요동 정벌 불가 사유를 들어 군사를 돌려 곧바로 왕성을 공격하여 우왕과 최영 등을 사로잡았다. 우왕을 강화도로, 최영을 합포로 유배를 보내고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삼는 쿠데타에 성공을 하였다.
명나라를 숭배하는 숭명(崇明)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고려 왕조를 뒤엎고 임금이 된 이성계는
나라 이름을 정함에 있어서도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옛 강역인 요동을 버리고 주체성을 망각한 명나라를 숭상하는 사대주의는 세종 때 확고하게 정립이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세종대왕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은 태종의 왕세자가 아닌 셋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기에 철저한 사대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세종에 대하여 <명사(明史)>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영락 16년(1418년) 도(祹, 세종의 이름)를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이해에 황제가 북쪽으로 도읍지를 옮기니 조선은 더욱 가까워졌으며 사대의 예(事大之禮)는 더욱 공손하여졌다. 조정에서도 또한 조선을 대함이 예를 더하니 다른 나라에서는 감히 넘볼 수가 없었다. 도(祹)가 말 1만 필을 바쳤다.”라고 하여 세종이 명나라에 철저한 사대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살아있는 말을 대량으로 명나라에 조공을 한 것은 고려시대 말기부터였다. 명나라는 조선이 금과 옥 등이 많이 출토되지 않으니 말로 대신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말을 조공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려 우왕 때인 1384년 말 2천 필, 1386년 말 1천 필을 바쳤으며, 이성계가 실권을 쥐고 난 뒤인 1391년 말 1500필, 조선 건국 후인 1393년 9천8백여 필의 말을 명나라에 바쳤다.
태종 때인 1407년에는 말 3천 필을 바쳤으며, 세종 때에도 즉위 당시에 말 1만 필을 바친 것을 비롯하여 1427년 5천 필, 1450년 5백 필 등을 바쳤다.
조선 세종 말년인 1450년에는 명나라로부터 2,3만 필의 말을 변제하라는 칙명을 받았으나 외적들이 변방을 침략하여 말들이 많이 죽게 되어 힘들다고 명나라에 하소연을 하자 명나라에서 이미 보낸 말은 거기에 따른 보상을 할 것이고 아직 못 보낸 것은 그만두라고 하였다고 <명사>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부터 세종 때까지 명나라에 보낸 말은 수만 필이었다. 2,3만 필의 말을 명나라에 바쳐야 한다는 부담은 세종대왕이 죽게 된 원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한글날에 맞춰 광화문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 - 우리 역사상 위대한 임금이었음은 분명하나 명나라에 철저한 사대를 한 점은 다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명나라에 말 수만필을 바쳤다(?)....목장은 어디(?)
그런데 이 수만 필의 말을 어디서 어떻게 길러서 어떻게 명나라에 보내졌는지 참으로 궁금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영토가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어디에서 말을 길렀을까 생각하면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한반도는 70%이상이 산악지형이다. 대규모로 말을 기르고 조공을 하였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말 목장이 있었어야 함에도 한반도 지형으로 보건대 수만 필의 말을 길렀던 곳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말을 조공하였다는 기록은 삼국시대 때의 동예나 백제 그리고 신라에서 과하마를 조공한 기사가 있다.
또한 25사 전체를 보면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민족들도 말을 조공하였다는 기사는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매우 적을 뿐더러 고려시대 말과 조선시대 초기처럼 5천 필, 1만 필 등 대규모로 계속하여 말을 조공하였다는 기사는 없다.
말을 조공한 것은 명분이 없는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고려 말의 이성계 등 신진 사대부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명나라에 사대함으로써 국제적인 지원세력을 획득하여 내외적으로 정치권력을 굳건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
말은 평상시에나 전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이러한 말을 바침으로써 조선은 명나라와 대결을 원치 않으며 확실하게 명나라를 섬기겠다고 한 것이었다.
고려시대 대대로 이어서 지켜온 고려의 땅인 요동을 떼어 준 것을 말을 바쳤다는 표현으로 대신한 것이다. 말 1만 필을 보냈다는 것은 말 1만 필이 살 수 있는 영토를 넘겨주었다는 말과 같다.
고대 사서에는 이러한 표현이 많다. 예컨대 읍(邑)을 들어 항복을 했다느니 몇 천 호(戶)가 투항을 했다는 식의 표현은 그 해당되는 지역이 항복을 하여 그 나라에 속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조선 세종 때까지 말 조공을 하였다는 것은 조선과 명나라의 영역과 관할 지역의 획정이 이때에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명일통지>, '조선은 동서 2천리, 남북 4천리'
우리는 세종대왕이 내치와 외치 모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고 배워왔다.
세종 때의 김종서가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하여 나라의 영역을 넓히고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었다고 알고 있다.
통일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렀고, 고려시대에는 이보다 위쪽인 자비령을 경계로 하였으며,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4군과 6진을 개척함으로써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신라와 고려는 현 만주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다.
명나라에 철저한 사대를 하였던 조선의 강역은 명나라의 지리지인 <명일통지(明一統志)> 권89 ‘외이 조선국’편에 “조선은 동서 2천리, 남북 4천리”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강역을 이와 같이 기록한 책으로는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 <정개양잡저(鄭開陽雜著)>, <도서편(圖書編)>, <조선부(朝鮮賦)> 등이 있다.
요동을 제외하고도 동서 2천리, 남북 4천리라면 조선의 영토는 분명히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땅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요동은 훨씬 더 서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이 이럴진대 ‘무궁화 3천리’니 ‘ 반도 3천리’라는 말을 계속 사용해야 되겠는가?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과도한 집착은 조선 후기까지도 나타난다. 1644년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뒤에도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마지막 임금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2백년 후까지도 계속 사용하였다.
국가의 공식적인 문서 외에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숭정 후 몇 년이라고 썼으며 망해버린 명나라 임금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숙종 때 황단(皇壇)과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1만년 우리의 역사 강역인 요동을 포기하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망령은 너무나도 깊고도 뼈아프다.
요동이라는 강역뿐만이 아니라 역사와 민족의 혼까지도 잃어버린 것이다. 이를 뛰어넘지 않고는 진정한 역사복원과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
<규원사화>를 쓴 북애자 선생의 ‘압록강 너머 1만 리의 땅이 조선의 영토였다’고 한 애절한 절규가 가슴 속을 저며 온다.
초원과 대륙을 포효하며 달리던 말이 잃어버린 요동과 함께 천마(天馬)가 되어 다시 돌아오길 기대한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 - 조선 건국 전후에 명나라에 보냈던 수만 필의 말은 어디로 간 것일까? 말과 함께 사라진 우리의 땅 요동이 그립다.>
(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