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교의 근원은 부처님 |
선(禪)의 가르침이 되고, 한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敎)의 가르침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보이심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이 셋째이다. 이른바 가섭존자가 선의 등불을 따로 전해 받았다는 것이 이것이다. 부처님께서 한평생 말씀하신 것이란 49년 동안 말씀하신 다섯 가지 가르침이다. 첫째는 인천교(人天敎), 둘째는 소승교(小乘敎), 셋째는 대승교(大乘敎), 넷째는 돈교(頓敎), 다섯째는 원교(圓敎)이다. 이른 바 아난존자가 교의 바다를 널리 흐르게 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禪’은 부처님의 마음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교다. 또한 마음은 선법이고 말은 교법이다. 법은 비록 한 맛이라도 뜻은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떨어진다. 세존께서 그 꽃을 들어 올려 대중에게 보이시자 가섭 존자만이 홀로 빙그레 웃었다. 이에 세존께서 “나에게 정법안장이 있는데 마하가섭에게 전해주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염화시중의 미소로서, 말없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다 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을 뜻한다. 하지만 문자를 떠나서 진리를 전할 수 있는 방편도 없다. 문자 분별에 떨어져서도 안 되겠지만, 문자를 떠나서 진리를 표현할 수도 없다. 방(棒)이니 할(喝)이니 하는 것도 결국은 문자적 표현 수단이요, 침묵도 문자적 표현이다. 이와 같은 표현 수단을 떠나서 선을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전의 가르침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그 무엇에 의해서도 휘둘리지 않는 궁극적인 편안함이 있고, 외부의 존재나 조건에 기대어서 얻어지는 일시적인 편안함이 있다. 예를 들어서 외부의 어떤 존재 즉 신(神)이나 경전에 기대어서 ‘믿습니다.’ 해서 얻어지는 안심은 조건 지워진 안심이다. 외부의 존재에 기댄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갈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마음 자체가 실체가 없음을 통달해서 얻어진 안심, 조건 지워지지 않은 안심이야말로 진정한 안심, 궁극적인 편안함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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