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법에 통달하면 윤회는 없다 |
사람에게도 온갖 기질이 있으므로 여러 방편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법에는 ‘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을 따르는’ 두 이치가 있고, 사람에게는 ‘단박 깨치는 이’와 ‘점차 닦아야 하는 이’의 두 기질이 있으므로, 문자나 말로 가르치는 여러 방편이 필요하다. 이른 바 “공적인 일에는 바늘 끝만큼도 용납할 수 없으나, 개인적인 정으로는 수레도 오고간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세상에서 초월한 금칼이 아니라면 누가 이 무명의 두꺼운 껍질을 벗겨줄 것인가? 고생바다를 건너 즐거운 저편 기슭에 오르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크게 가엾이 여기는 은혜 덕분이다. 그러므로 한량없는 목숨을 바치더라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을 수 없다.
‘나’라는 생각이 있는 한
그런데 한편으로 윤회설(輪回說)도 말한다. 무아와 윤회는 얼핏 모순되어 보인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까? 내가 없다면, 과연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라고 하는 생각이 남아 있는 한 윤회를 면할 수 없다. 바로 이 한 생각이 근본이 돼 윤회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서로 다른 차원의 가르침을 동일선상에서 설명하려고 하니 무리가 따른다. 본래 무아(無我)였지만, ‘나’라는 한 생각이 일어남으로써 유아(有我)로서의 삶이 펼쳐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라는 한 생각은 어떻게 일어나게 될까? 일단 잠재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물결이 쉬면 왜 일어났는지도 자연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법신불(法身佛)이 몸을 나투어 보신불(報身佛)과 화신불(化身佛)로 다가오신 것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모양으로도 나툴 수 있고 어떠한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바로 알아차리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가 많다. 그래서 마음으로 나투신 부처님이 보신불이다. 보신불 또한 마음의 눈이 열린 이는 보고 들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도 많다. 그래서 결국 몸으로 나투신 부처님이 화신불이다.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서 직접 마음과 몸으로 나투신 부처님의 은혜는 참으로 백골난망이다. 부처님이 안 오셨다면 나는 지금 어느 지옥에서 헤매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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