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월호스님의 선어록의 향기)기도로 일심공부를 하라

장백산-1 2011. 3. 25. 02:12

기도로 일심공부를 하라



소타고 이미 고향에 도착하였으니

소 또한 공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붉은 해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속이니

채찍과 고삐는 띠집에 할 일없이 놓여있네.

                                                         - <십우도 7. 到家忘牛>

마음공부에도 3단계가 있다.

첫째는 일심(一心)공부, 둘째는 무심(無心)공부, 셋째는 발심(發心)공부이다.

일심공부는 기도요, 무심공부는 참선이며, 발심공부는 행불(行佛)이라 말할 수 있다.

기도를 통해 일심공부가 되었다면, 이제는 무심해지는 공부가 필요하다.

한 마음이든 두 마음이든 마음이 존재하는 한 윤회를 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선을 잘 닦다보면 먼저 몸뚱이가 사라진다.

분명히 앉아 있지만 몸뚱이가 인식조차 되지 않는 상태, 이른 바 몸뚱이 착(着)이 쉬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삶의 차원이 바뀐다. 물질 위주의 삶에서 마음 위주의 삶으로 전환하게 된다.

부처님 당시에 이름이 웃따라란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본래 가난한 농부였으나 사리뿌뜨라 장로에게 자신의 점심을 공양올린 공덕으로

흙덩이가 황금으로 변하여 복락을 누리게 되었다.

훗날 웃따라는 다른 집의 며느리로 가게 되었는데,

그 집은 불교도가 아니었으므로 부처님과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법문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참선 통해 무심공부하고

발심공부로 行佛 ‘실현’


이를 아쉬워하던 웃따라는 백중을 보름가량 남겨두고 마침내 유녀인 시리마를 사서

보름간 남편을 시봉케 하고 자신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공양 올리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백중을 하루 앞둔 날, 남편은 웃따라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몸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우연히 이를 목격한 시리마는 자신의 처지를 잊고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웃따라에게 끓는 기름을 끼얹게 되었다.

이때 웃따라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시리마의 도움으로 부처님과 비구스님들께 공양을 올릴 수 있었고, 또 법문도 들을 수 있었다.

자비로운 마음만 있다면 기름을 써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웃따라는 전혀 다친 바가 없었으며, 오히려 부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얘깃거리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의 차원이 바뀌면 고민도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차원에서 여러 가지 고민과 문제꺼리를 말하지만, 대부분은 차원이 바뀌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들이다.

마치 어렸을 적에 그토록 중대하다고 여겼던 문제가, 성인이 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처럼.

선사들의 좌탈입망(坐脫立亡)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죽고 살 수 있습니까?”하는 말이 선사들에게는 이렇게 들린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옷 갈아입을 수 있습니까?”

월호스님 /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

출처 : 석가모니불
글쓴이 : 동다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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