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월호스님 어록의향기] ‘바닷물 짠맛’은 먹어봐야 안다

장백산-1 2011. 3. 25. 02:28

‘바닷물 짠맛’은 먹어봐야 안다


노란 꾀꼬리 가지 위에 지저귀고

햇볕 따사롭고 바람 온화해 언덕엔 푸른 버들

다만 이 회피할 수 없는 곳에

삼삼(森森)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 <곽암선사 십우도 3. 견우>

 

본마음에서 한마음이 생겨나고, 한마음에서 다수의 분별심이 일어나

천차만별의 세계가 펼쳐졌다면, 도대체 본마음은 어떤 걸까, 어떻게 생겼을까?

본마음은 일반적인 마음, 즉 분별심과 구분하여 성품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이 성품은 어떤 것일까?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일까, 악한 것일까?

불교는 성선설일까, 성악설일까?

 

본마음에서 한마음이 생겨나고, 한마음에서 다수의 분별심이 일어나 천차만별의 세계가 펼쳐졌다면,

도대체 본마음은 어떤 걸까, 어떻게 생겼을까? 본마음은 일반적인 마음, 즉 분별심과 구분하여 성품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이 성품은 어떤 것일까?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일까, 악한 것일까?

불교는 성선설일까, 성악설일까?

 

불교에서는 성공설(性空說)을 말한다. 성품은 공(空)한 것이다. 공하다는 것은 비어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채울 수 있음에 진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무아(無我)설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에서의 무아설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것인가? 불교는 염세주의이며, 허무주의인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고정된 ‘나’가 없으므로 어떠한 ‘나’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하는 데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보자면, 이보다 더 역동적인 가르침은 없다.

“나는 내가 창조합니다. 지금 이 모습도 나의 작품일 뿐!”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다.

“대사는 성품을 보았는가?”

“저는 이미 성품을 보았습니다.”

“성품이 어디에 있는가?”

“성품은 작용하는 곳에 있습니다.”

 

성품은 없는 곳이 없지만

작용을 통해서 나타난다


덧붙여 바라제 존자가 게송으로 대답했다. “태속에선 몸이요,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이며, 눈으로는 본다하고,

귀로는 듣는다 하며,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고, 손으로는 움켜쥐고,

발로는 옮겨 다니네. 두루 나타나서는 무수한 세계를 덮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에 있네.

아는 이는 그것을 불성(佛性)이라 하지만, 알지 못하는 이는 정혼(精魂)이라 한다네.”

성품은 어떻게 생겼을까? 둥글까, 모날까? 클까, 작을까? 성품에는 일정한 형상이 없다.

만약 성품에 일정한 형상이 있다면, 그 모습 이외의 것은 성품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성품에 일정한 형상이 없으므로 어떠한 형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결국 꾀꼬리의 지저귐과 따사로운 햇볕, 온화한 바람과 푸르른 버드나무가 성품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성품은 없는 곳이 없지만, 작용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고, 작용을 떠나서는 인식조차 하기 어렵다.

바닷물 속의 짠맛과 색깔속의 아교는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먹어봐야 맛을 알고, 묻혀서 그려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사물은 본마음자리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알고 보면 성품 아닌 것이 없다.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 헤매지만 바로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야말로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실상은 진리 아닌 것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월호스님 /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

출처 : 석가모니불
글쓴이 : 동다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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