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스크랩] ☆ 스스로를 비추는 빛이 되라 ☆

장백산-1 2011. 12. 10. 15:23

 

 

 


 

 

 

 

☆ 스스로를 비추는 빛이 되라 ☆ 

 

 


붓다는 "스스로를 비추는 빛이 되라."고 말한다.
특정한 개인과 이데올로기를 신봉하지 말라.
그런 신봉을 버릴 때 거대한 신뢰가 폭발하듯 일어난다.
존재계 자체에 대한 신뢰, 나무, 바위, 사람들, 별,..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신뢰.

 
물론 붓다들 역시 그중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붓다를 특별히 믿지는 말라.
다만 존재계 자체를 믿어라.
장미의 향기를 믿듯이 예수의 향기를 믿어라.
이런 믿음은 관념에 뿌리박고 있지 않다.
사실, 이 믿음은 주관적인 것이지
객관적인 대상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만일 예수를 믿는 다면 그대는 크리슈나를 믿을 수 없다.
크리슈나를 믿는 다면 마하비라를 믿을 수 없다.
한 가지를 믿는 다면 당연히 다를 것 모두를 불신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방식이다.
인류의 역사는 잔인한 학살극과 종교 전쟁으로 가득 찼다.
종교라는 이름 아래 폭력이 난무하고 선혈이 낭자하다.
그 이유는 다른 모든 것에 반대해서
하나만을 믿으라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신뢰는 전혀 다르다.
만일 존재계를 신뢰한다면...
존재계는 예수, 크리슈나, 붓다,

 

'짜라투스트라'를 모두 포함한다.
그들은 모두 존재계의 한 부분이다.
그때, 그대는 붓다들만을 믿는 게 아니라.
그대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까지 믿는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나무, 바위까지 믿는다.
무엇을 믿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대상은 관계없다.

 
우리는 모두 이 존재계에 속해 있다.
우리는 이 기적적인 존재계의 일부분이다.
이 존재계는 우리에게 몰인정할 수 없다.
존재계는 우리를 탄생시켰다.
어떻게 어머니가 박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신뢰의 전혀 다른 의미이다.
신뢰는 믿음도 신앙도 아니다.
믿음과 신앙이라는 두 단어를 기억하라.
잘못 번역된 이 두 단어가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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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스스로를 비추는 빛이 되라."

"그대 자신을 비추는 등불이 되라."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사십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스승이 떠나고 있으니..
사십년 동안 그들은
엄청난 기쁨과 훌륭한 경험을 맛보았다.

그 기간은 인간에게 가능한 가장 아름다운 세월이었다.
마치 낙원과 같은 나날이었다.
그런데 이제 스승이 육체를 떠나고 있다.
그들이 슬퍼하며 흐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붓다는 눈을 뜨고 말했다.
"울지 마라. 너희들은 지금까지 내 말을 듣지 못했더냐?
왜 우는 것이냐?"

아난다(Ananda)가 말했다.
"우리의 빛인 부처님이 떠나고 있지 않습니까?
어둠이 우리를 덮치고 있는 느낌입니다.
저는 아직 깨닫지 못했는데 당신은 떠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당신이 가시고 나면 제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저는 말할 수 없이 절망스럽습니다.
저는 사십 년을 헛되이 보냈습니다.
저는 그림자처럼 당신을 따라 다녔고,
당신과 함께 지낸 나날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이 떠나시면 저희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붓다는..
"너희들이 우는 것은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나를 믿지 말라고 수차 말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 너희들의 내면에 빛을 창조했다면,
나를 통해 지식을 모으기보다는 너희들 스스로의 경험을
얻었다면 지금처럼 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주스리(Manjusri:문수보살)를 봐라!"
그는 근처의 나무 밑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는 너무나 고요하고 행복해 보였다.

붓다가 말했다.
"만주스리를 봐라.
가서 그에게 왜 울지 않는지를 물어 보거라."
제자들이 만주스리에게 물었다.
만주스리가 웃으며 말했다.

"왜 운단 말인가?
붓다는 나 자신의 빛을 알도록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저 감사할 뿐, 어둠이 덮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붓다가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강물이 바다로 사라지듯이 그는 우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우주 전체로 퍼져갈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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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작은 육체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향기는 우주 곳곳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는 존재계 전체에 스며들 것이다.
이제 붓다는 우주 전체로 퍼져나갈 것을 생각하니
나는 기쁘기 한량없다. 나는 떠오르는 태양 안에서,
날아가는 새들 안에서, 바다의 파도 안에서..
모든 것에서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단지 육체를 떠나고 있을 뿐이다.
육체는 감옥이었다.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은
나 자신의 영혼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런데 그대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그대들은 울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그대 스스로를 비추는 빛이 되라."
그 다음에 그는 눈을 감고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또한 첫 번째 말이기도 했다.
사실, 그것은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 전부였다.
그는 평생 동안 똑같은 메시지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대가 지금 단 하나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시(watchfulness)'이다.

주시하라!

그대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라.

마음속에 지나가는 모든 사념을 주시하라.

그대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욕망을 주시하라.

걷고, 말하고, 먹고, 목욕하고, 작은 몸짓 하나까지 주시하라.

모든 것을 주시하라. 모든 것을 주시의 기회로 삼으라.


기계적으로 먹지 말라.

뱃속을 채우는 데 급급하지 말라.

주의 깊게 깨어 있으라.

차근차근 씹으면서 주시하라..

그러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쳐왔는지 깜짝 놀랄 것이다.

한 번 씹을 때마다 엄청난 만족감이 들 것이다.

주의 깊게 먹으면 더 맛있어진다.

주의 깊게 먹으면

날마다 먹는 음식도 훨씬 더 맛있어진다.

그러나 주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음식을 먹어도 별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시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뱃속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주의 깊게 지켜보며 천천히 먹으라.

차근차근 씹으면서 맛을 음미하라.

냄새와 감촉을 느껴라.


산들바람과 햇빛을 느껴라.

달을 쳐다보면서 고요한 주시의 연못이 되라.

그러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달이 그대 안에 비칠 것이다.

끊임없이 주시하며 삶 속으로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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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자꾸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말라.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대는 수많은 생 동안 한 번도 주시하려고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자꾸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잊어버리고 있음을 아는 순간에는 다시 주시하라.


한 가지 사실을 명심하라.

주시를 잊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후회하지 말라.

자책하지 말라.

그것은 또 한 번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비관하지 말라.

그대 자신을 비난하지 말라.

그것은 순전히 시간 낭비일 뿐이다.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절대 후회하지 말라!

순간 속에 살아라. 주시를 잊고 있었다면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습관은 고치기 힘들다.

이것은 한 번의 생 안에서 이루어진 습관이 아니다.

이 습관은 수많은 생 동안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단 한 순간만 주시한다 해도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신에게 감사하라.

그 짧은 순간조차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주시할 때 명확성(clarity)이 생긴다.

왜 주시에서 명확성이 싹트는가?

주시하면 할수록 조급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대는 우아해진다.

 

그리고 재잘거리던 마음이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재잘거리는데 쓰이는 에너지가 주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것은 똑같은 에너지이다!

이제 점점 더 많은 에너지가 주시로 변형되고,

마음은 영양분을 얻지 못할 것이다.

비대한 몸집을 자랑하던 '생각'이 바싹 여위고 체중이 줄기 시작할 것이다.

서서히 생각은 죽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각이 죽기 시작할 때, 명확성이 떠오른다.

이제 그대의 마음은 투명한 거울이 된다.


시야가 투명해질 때 지복이 온다.

혼란된 시각은 불행의 뿌리이다.

그리고 명확성은 지복의 기초이다.


주시의 ' 깨어 있음'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죽음이 온다 해도 그는 죽음 또한 주시할 것이다.

그는 주시하며 죽을 것이다.

육체는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시는 영원히 남는다.

그것은 우주의 일부, 우주의식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 순간을 우파니샤드의 구도자는 이렇게 선언한다.

"아함 브라흐마스미(Aham Brahmasmi)! - 나는 우주의식이다!"


그리고 알 힐라즈 만수르(Al Hillaj Mansoor) 는 이렇게 외쳤다.

"아날 하크(Ana'l Haq)! - 나는 진리이다!"


그대 또한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것은 타고난 권리이다.

만일 이런 경지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대의 책임이지 다른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명상은 주시를 의미한다.

명상하라. 그러면 자유와 행복을 얻을 것이다.


빛은 스스로 성장한다.

더 침묵하고 주시하라. 더 명상적이 되라.

그러면 빛은 제 스스로 그대를 찾아온다.

그대는 아무 데로도 갈 필요가 없다.


그대의 주시는 하나의 섬이 된다.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다.

어떤 탐욕과 분노도 그 성을 함락할 수 없다.

그 섬과 더불어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통합된 개체가 된다.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인간(human being)이 된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말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신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을지니."

예수의 말은 무슨 뜻인가?

먼저 육체적으로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예수가 의미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하나의 에고,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죽어야 한다.

과거로서의 인간, 마음으로서의 인간은 죽어야 한다.

마음으로서의 그대가 죽어야만

존재로서의 그대가 태어난다.


인도에서는 붓다들을 '드위자(dwija)',

즉 '두 번 태어난 자'로 부른다.

다른 사람들은 단 한 번 태어난다.

그러나 붓다는 두 번 태어난다.

삶의 첫 번째 선물은 부모를 통해 온다.

두 번째 선물은 그대가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두 번째 태어남 그것이 깨달음이며, 도이며,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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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깊지 못함'이라는 말에 의해 붓다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자를 지칭한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다만 몰두하지 않은 상태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이나 하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몰두하기를 원한다. 그는 혼자 남을 수 없다.

계속 동반자가 있어야 한다.

그는 단 한순간도 몰두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것에든 몰두하지 않으면 자신과 마주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마주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의 심연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 곳에서는 그가 아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또한 그가 아는 것을 모든 지식을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다.

내면세계에서는

그의 지식, 경전, 이론, 그의 유능함 등 모든 것이 아무 쓸모도 없다.

그는 외부 세계에 집착한다.

왜냐하면 외부 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세계에서는 그는 아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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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관찰해 보라!

그것은 가장 훌륭한 오락이다. 길가에 서서 사람들을 지켜보라.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그것을 하고 있는가?

그 다음에는 그대 자신을 관찰해 보라.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그것을 하는가?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그림자를 쫓고 있다.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추구한다.

어떤 것을 얻으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일단 얻은 후에는

그것을 갖고 무엇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위해 달리고 있다.

그리고 일단 그것을 얻은 후에는 그것을 갖고 무엇을 할지도 모른다.

단지

마음의 끊임없는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을 뿐.


그대는 끊임없이 불필요한 것들을 욕망한다.

그대의 집에 있는 수집품이 그대에게 진정 어떤 도움을 주겠는가.

그 물건들이 그대를 더 행복하게 하는가?

물론 잠시나마 마음은 만족해 할 것이다.

하지만 몇 칠이 지나만 마음은 더 좋은 것을 또 욕망한다.

그러면 그대는 그것을 사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된다.


만약 그대가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탐내기 전에 세 번만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대에게 백 개의 욕망이 있다면 그중의

구십 구개는 전혀 쓸모없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대를 몰두시킬 뿐이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기능이다.

그들은 그대를 그대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린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유용성이다.

그들은 그대가 그대 자신과 함께 지낼 시간,

함께 지낼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위험하다.

이 불필요한 욕망들로 인해

그대는 평생을 낭비하고 파산 상태로 죽을 것이다.


마음은 곧 혼란이다. 생각과 생각..

수많은 생각이

아우성치고 충돌하며 서로 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싸우고 있다.

수많은 생각이 그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대가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다.

그대는 어느 정도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럴 뿐이다.

깊은 곳에서는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아우성치는 군중이 우글거린다.

수많은 생각이 서로 싸운다.

그들은 서로 자기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그대에게 매달린다.

그것은 엄청난 혼란이다.

그런데 그대는 그것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음이 곧 혼란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과 동일시되지 않는다면,

그대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무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시함으로서 해서

그대의 에너지는 서서히 마음에서 철수할 것이다.

마음은 더 이상 에너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명상은 불이다.

명상의 불꽃은 그대의 사념과 욕망, 기억을 태운다.

그대의 과거와 미래를 태우고 마음과 에고를 태운다.

명상은 

그대가 '그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명상은 죽음인 동시에 환생이다. 십자가인 동시에 부활이다.

그대는 새로 태어난다.

그대는 기존의 동일시를 완전히 잃고 삶에 대해 새로운 비전을 획득한다.


마음이 죽고 그대가 태어난다.

무심으로서의 그대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 탄생이 깨달음이다.

그 탄생은 그대에게 평화의 땅을, 연꽃의 낙원을 가져다준다.

축복과 은총의 세계를 가져다준다.

그렇지 않는 한 그대는 지옥에 남을 것이다.

지금 그대는 지옥에 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결단을 내린다면,

의식을 선택한다면 지금 당장 지옥에서 점프하여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렸다.

그대는 지옥을 택할 수도 있고, 낙원을 택할 수도 있다.

지옥은 손쉽게 얻어진다.

그러나 낙원은 상당한 노력을 요구한다.

불굴의 인내와 결단력이 있어야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

 


지옥은 그대가 지금처럼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낙원은

그대 자신을 초월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대는 어두운 계곡에서 정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정상은 그대의 것이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주의 깊은 의식으로 주시하라. 명상하라.

그러면 어느 날엔가

햇빛 찬란한 정상에서 그대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 해방이고 모크샤이다. 이것이 니르바나 이다.

에고가 사라지고 신이 탄생한다.


자아를 버리고 의식적이 되라!

이것이 모든 붓다의 메시지이다.

메지시의 본질적인 핵심은 아주 간단하다.

자아, 에고, 마음을 버리고 그저 존재하라.

 

 


마음은 함부로 날뛰며 헤매는 것,

마음은 제멋대로 방황한다.


마음은 그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의지가 있다.

모든 생각들이 제각기 다른 의지를 갖고 살아남기를 고집한다.

마음은 그대가 간섭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간섭하려 들면 강력하게 저항한다.

모든 사념이 제각기 고유한 개체성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자신의 독립성과 자유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뭐라고 말하면 그들은 "당신이 뭔데?"하고 따질 것이다.

매번 그들은 그대에게 그대의 위치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대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끌어내릴 것이다.


붓다는 그 생각들을 다스리지 않는 한 행복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대는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유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은 결코 그대의 것이 아니다.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어떤 부분은 어머니에게 속하고, 어떤 부분은 아버지에게,

어떤 부분은 삼촌에게,

어떤 부분은 목사에게, 어떤 부분은 선생님에게..그렇게 계속된다.

그대는 전 세계에서 조각들을 긁어모았다. 책에서 영화에서...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빌려온 것이다!

그러니 그대가 어떻게 진실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이것저것 편집된 현상에 불과하다.

다양한 출처에서 유래한 여러 조각들이 그대를 이룬다.

그 조각들은 서로 용해되어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빌려오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그대의 의식과 각성이다.

그것은 그대 내면의 핵심에 속한다.

그 의식과 각성에 의존하라.

마음에 의존하지 말라.

마음에서 독립하라.

그리고 의식에 전적으로 의지하라.

그러면 그대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걸음을 성큼 내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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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음은 억눌려지지 않는다.

마음은 교활하기 이를데 없다.

마음은 항상 그대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마음의 기존의 모습 그대로 남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마음은 새로운 장신구를 발견하고 그 뒤에 숨는다.

마음은 언제나 그럴 듯한 합리화를 발견한다.


조심하라!

마음은 간단한 현상이 아니다.

마음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하다.

마음을 잡으려고 하면 그대는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마음은 앞문으로 밀어내면 뒷문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대가 마음을 통제하고 억누르기를 원한다면

마음은 무의식에 숨어서 작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무의식에 숨은 마음은 더 위험하다.

그 마음은 여전히 그대를 조종할 것이지만

그대는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억눌려지지 않는다.

마음은 포착되지 않는다.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가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지배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용히 가라앉은 마음을 통해서이다.

이 과정을 명심하라.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다르다.

정반대이다. 

그대는 먼저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혀야 한다.

먼저, 마음을 조용하게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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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법은 아무 판단 없이,

선악을 따지지 않고 조용하게 주시하는 것이다.

선악을 따지는 순간, 그대는 수렁에 빠진다.

마음은 이미 그대를 사로잡아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그저 주시하라.

그대의 도덕 선생들은 주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조용히 앉아서 지켜보라...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대의 마음은 그를 죽이는 생각을 하며 즐긴다.

이것이 마음의 한 부분이다.

다른 부분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아주 나쁜 짓이다. 너는 그런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품는 것조차 죄악이다.


이것은 마음의 다른 부분이다.

그리고 그대는 마음의 도덕적인 부분에 동일시된다.

그대는 "이것이 내 양심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의 양심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에게 주입된 것이다.

내면으로부터 사회가 그대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를 조종하기 위한 사회의 계략이다.

그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른다.


아무 판단 없이 주시하라.

두 생각 모두를 주시하라. 마음의 한 부분은 말한다.

"그 놈을 죽여라! 그놈은 너를 모욕했다."

그리고 마음의 다른 부분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비도덕적이고 악한 짓이다.

너는 그 죄 값으로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다.

너는 다음 생에 고통 받을 것이다."


두 번째 부분 또한 마음이다. 두 부분 가운데 선택할 필요가 없다.

두 부분 다 주시하라.

둘 다 즐겨라. 마음의 모순을 보아라.

어느 부분에도 동일시되지 말라.


에고는 선하고 도덕적인 부분에 동일시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것은 기분을 좋게 만든다.


"나는 살인에 반대한다. 봐라! 나는 살인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는 마음의 다른 부분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대는 여전히 노예이다.

그대의 죄인과 성자 둘 다 노예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 둘 다에서 자유롭다.

그는 선악을 초월한다.

그는 다만 의식일 뿐,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관찰할 뿐이다.

동일시되지 않고 관찰할 수 있다면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때, 그대의 주권이 생긴다.

어느 날엔가 마음이 완전히 가버리면,

완전히 고요해지면,

그대는 주권을 가진 통치자가 된다.

 



지혜로운 자는 전력을 다해

사념을 조용히 가라앉힌다.

그는 마음의 방황을 끝낸다.

그는 가슴의 동굴에 앉아

자유를 발견한다.


마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돌연 그대는 가슴으로 들어간다.

그대는 마음으로부터, 머리의 세력권에서 미끄러져 나온다.

그 다음에는 가슴의 동굴이 그대의 자리이다.

마음은 사회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가슴은 신의 연장이다.


이것은 마음을 평정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때에만 가능하다.

마음을 인식하기 위해,

판단이나 동일시에 빠지지 않고 완전히 주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때,

오직 그럴 때에만 그대는 가슴의 동굴로 들어간다.


머리는 노예이지만 가슴은 자유이다.

머리는 불행이다.

그러나 가슴은 최고의 행복이다.


아이스 담모 사난따노..


항상 이 말을 명심하라.


여행은 길고 험난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계속 실패하고 잊을 것이다.

그대는 계속 판단하기 시작할 것이다.

계속 이런 저런 것과 동일시될 것이고,

에고는 계속해서 자신을 주장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즉시 주시를 명심하라.

그저 주시하라.

그러면 거기에 이해가 있을 것이다.


주의 깊게 깨어 있으라.

판단하지 말라.

도덕주의자가 되지 말라.

종교적인 의식은 선택 없는 각성을 의미한다.

선택 없는 각성,

이 말을 가슴에 새겨라.

이것이 모든 붓다들의 가르침의 본질이다.


죽음은 욕망의 장신구 안에 사는 사람만을 볼 수 있다.

죽음은 오직 욕망을 볼 수 있다.

욕망을 버리면 그대는 죽음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때엔 죽음이 그대를 건드릴 수 없다.

욕망이 없으면 그대는 순수한 의식일 뿐,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더 이상 마음과 육체에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이 주시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안다.

그때, 그대는 죽음을 볼 수 있지만 죽음은 그대를 보지 못한다.


보통의 경우, 죽음은 그대를 보지만 그대는 죽음을 보지 못한다.

비대한 욕망이 그대의 눈을 가리는 대신 죽음의 눈에 쉽게 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의식은 물질이 아니라 순수한 에너지이다.

의식은 빛이다.


그래서 그대는 죽음을 볼 수 있지만 죽음은 그대를 보지 못한다.

죽음을 보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다.

죽음을 보고 비웃기 시작하면 죽음은 무기력해진다.

죽음의 힘은 죽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힘은 그대의 욕망에 찬 마음 안에 있다.

그대가 죽음에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더 많은 욕망을 가질수록 그대는 죽음을 더 두려워하게 된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불안해진다.

곧 죽음이 찾아와 모든 것을 빼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욕망과 쾌락에 사로잡혀 있다면,

감각적 쾌감을 지나치게 열망한다면,

어리석게도 외부 세계에서 행복을 구한다면,

홍수가 잠든 마을을 덮치듯 죽음은 그대를 잡아간다.


외부세계에서 행복을 구하는 자는 깊이 잠들어 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행복은 바깥세상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결국 불행의 원천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외부 세계는 약속만 할 뿐, 상품을 배달해 주지 않는다.

외부 세계의 물질은 멀리 떨어져서 볼 때에는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더 가까이 다가가면 그들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오랜 노력 끝에 그것을 얻었을 때 그대는 당황한다.

그대는 어찌 된 영문인지 믿을 수 없다.

그것은 신기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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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욕망을 채울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물질에 만족할 수 없다.

마음은 계속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더 많이 가질수록

그대는 스스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대는 문제를 가질 여유와 시간이 있다.

사실, 그대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그 시간에 무엇을 할지도 모른다.

그대는 빈둥빈둥 돌아다니며 자진하여 더 많은 불행과 근심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만족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너무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대는 기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는 잠들어 있다.

그대는 무의식적으로 살고 있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주의 깊은 의식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상하라.

존재의 가장 깊은 핵심에서

그대는 시간의 부분이 아니라 영원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시간 안에 존재하지만 영원에 속한다.


영원이 시간의 세상 안에 뚫고 들어온 것, 그것이 바로 그대이다.

그대는 죽음의 육체 안에 사는 불멸의 존재이다.

그대의 의식은 죽음과 탄생을 모른다.

다만 육체가 낳고 죽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는 의식을 인식하지 못한다.

의식 자체를 의식하는 것, 이것이 명상의 모든 것이다.

육체 안에 거주하는 자를 아는 순간,

그대가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 그대는 죽음의 세계를 넘어선다.


순간적이고 덧없는 모든 것을 초월한다.

 


육체에 관한 한, 우리는 끊임없이 죽어간다...

물거품이 사라져간다.

칠십 년이란 세월에 현혹되지 말라.


영원의 선상에서 보면 칠십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칠십 년이란 세월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물거품처럼 순간적이다.


육체는 그림자조차도 아니다.

육체는 그림자의 그림자이다.

붓다는 육체의 비실체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육체는 메아리의 메아리이다.

실체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신은 실체이다. 그것을 진리라 불러도 된다.


신은 궁극적 실체이다.

그 다음에 영혼은 그의 그림자이며, 육체는 그림자의 그림자이다.

육체에서 영혼, 영혼에서 신으로 - 영원한 법, 담마 - 나아가라.


영원한 법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정지하지 말라.

오늘 그대는 여기에 있지만 내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 소중한 날을

헛된 것에 매달려 낭비하지 말라.


사람들은 계속 헛된 것을 긁어모으다가 어느 날 빈손으로 떠난다.

당신이 평생 동안 모았던 모든 것이 뒤에 남는다.

당신은 단 한 가지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오직 그대의 의식이 남을 뿐..


-OSHO-


 

 

 

  

 

 


 

☆ "너희가 하느님의 성전인 것과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장 16절)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레위기11:44-45절).|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오 22:37-38절, 루가10:27절)




 

 

 

우주와 같은 넓은 마음이 되어

살아가면서

서로를 소중히 그리고 아끼며 살아야합니다. 

 

☆ 우리 모두 애국하는 마음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인권, 생명 지킴이 '수호천사'가 됩시다!

 

 

 

 

 

  

- 자살예방대책위원장 -

 

강지원


  

 

 

Rrom

글  쓴  이 :  신성합일(평화)

 

 

 

 

 

 

 

 

 

 

 

 

 

 

 

 

 











 

                

출처 : 21C 희망
글쓴이 : 신성합일(평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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