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참선의 요체(要諦)

장백산-1 2012. 12. 28. 12:31

 

 

 

 

 

참선(參禪)의 요체(要諦)[1]

 

우리가 바른 生覺을 하고 거기에 따르는 바른 행동(行動)을 함으로 해서

바른 깨달음과 위없는 행복(幸福)을 얻습니다.

따라서 바른 生覺이 없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무명심(無明心)이라든가 무지(無知)라든가 그런 것을 가지고서는

부처님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의 가지가지의 고난(苦難)같은 것은

모두가 연원(淵源)이 무명(無明)으로부터 옵니다.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다 배워서 아시는 바와 같이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해서 거기에 行動이 따르는 것이고,

또는 우리가 식(識)을 받는 것이고,또 무명(無明)이 없으므로 해서

거기에 따라서 우리 모든 업장(業障)이 소멸(消滅)되고

드디어는 깨달음과 행복(幸福)이 수반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무명(無明)이고 어떠한 것이 바른 지혜(智慧)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바른 지혜(智慧)의 가르침,

이른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가르침입니다.

무명(無明)이라 하는 것은

文字 그대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도 바로 못 보고

우주(宇宙)의 본바탕도 本來 있는 그대로 못 보는

그러한 흐리멍텅한 어리석은 마음 이것이 무명심(無明心) 아니겠습니까.

 

기신론(起信論)에 무명심(無明心)의 풀이가 아주 간략히 나와 있습니다.

부달일법계고(不達一法界故)로, 모두가 다 본래(本來)에서 본다고 生覺할 때는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법계실상(法界實相)인데

그러한 淸淨微妙한 法界實相을 우리가 了達하지 못했기 때문에,

홀연염기(忽然念起) 명위무명(名爲無明)이라,

문득 일어나는 한 生覺, 이것을 보고 無明이라 한다하는 법문(法門)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사코 무명을 여읜 반야지혜(般若智慧)에 입각하는 工夫를 해야만이

참선(參禪)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냥 방편(方便) 공부는, 世間的인 工夫는 般若智慧가 없어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이른바 부처님의 진지(眞智), 참다운 智慧를 가지고 하는 工夫가 되어야만이

참다운 수행(修行)인 同時에 이른바 참선(參禪)을 한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일법계(一法界)라!

一法界는 물질(物質)과 정신(精神)이 따로 있다든가 나와 남이 따로 있다든가 그런 것은

一法界라고 못하는 것입니다.

우주(宇宙)는 우리가 알고 모르고 相關이 없이 청정미묘(淸淨微妙)한 一法界입니다.

'하나'의 법(法)의 世界입니다.

화엄경(華嚴經)식으로 말하면 화장세계(華藏世界)입니다.

정토경(淨土經)식으로 말하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극락세계, 화장세계, 卽 일법계(一法界)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過去, 未來, 現在, 그런 時間的인 制限도 없고 恒時 그대로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衆生)이 어리석어서 법계(法界)의 뜻을 達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래저래한  生覺이 나온단 말입니다.

'나'라는 生覺 ' 너'라는 生覺  또는 物質이라는 生覺,  마음이라는 生覺이 나옵니다.

 

우리 참선(參禪) 수행자(修行者)는 그런 무명심(無明心)을 단연코 돈단(頓斷)이라, 문득 떠나야 합니다.

우리 사고(思考)와 우리 건강(健康)이 絶對로 이원적(二元的)이 아닙니다.

別個의 問題가 아닙니다.

한 生覺 잘못하면 이른바 無明心 때문에 성도 내고 탐욕심(貪慾心)도 냅니다.

無明心으로 해서 우리가 '나'라는 生覺이 들지 않습니까.

'나'라고 生覺이 들면 나한테 좋게 하면 貪心을 내고 나한테 싫게 하면 應當  嗔心을 내겠지요.

따라서 無明心이 없다고 生覺할 때는

자기(自己)라는 것에 對해서 자기 권속(眷屬)이나 자기 소유(所有)나

자기 권력(勸力)에 대해서 집착(執着)할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 生覺이 나올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대승적(大乘的)인 工夫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무명심(無明心)을 떠난 자리 참다운 법계(法界)자리, 실상(實相) 자리에 입각을 해버려야 이른바 대승적인 공부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般若智慧, 般若波羅蜜의 智慧에 입각해야 그래야 가정(假定)이 아닌 유루법(有漏法)이 아닌 때 묻은 공부가 아닌 참다운 무루(無漏) 지혜(智慧)입니다.

 

남한테 우리가 돈 만원 한 장을 베푼다 하더라도 ‘나'라는 관념(觀念)이 있고 '너'라는 觀念이 있고,

돈이 많다 적다하는 그런 觀念이 있다고 生覺할 때는 이것은 참다운 보시(布施)가 못됩니다.

이른바 상(相)이 있는 유주상(有住相) 보시입니다.

무주상(無住相) 보시가 될 때는 相이 없는 참다운 보시가 된다고 生覺할 때는

나라는 相, 너라는 相, 또는 物質이 많다, 적다하는 相을 떠나야 합니다.

이 參禪 工夫는 그러한 無明心을 除去하고 참다운 반야지혜(般若智慧)에 입각해야,

그래야 비로소 參禪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限界를 分明히 느껴야 합니다.

 

가치관(價値觀)의 混亂 때문에 우리는 지금 저와 같은 混亂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불교(佛敎) 내에도 마찬가지고 다종교(多宗敎) 사회(社會)인지라 다른 종교와 교섭적인 관계도 마찬가지고 또는 정치, 경제 모두가 다 混亂 가운데 있습니다. 어떠한 것이 바른 政治고, 어떠한 것이 바른 經濟고, 또는 宗敎는 어떠한 것이 바른 종교인가?

이런 가운데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한 가족(家族) 내에도 개신교(改新敎) 믿고,

천주교(天主敎) 믿고, 불교(佛敎) 믿고 또는 천도교(天道敎) 믿고 하는 집안도 있습니다.

문교부장관도 지냈고 철학박사(哲學博士)였던 어느 분은 자기 가족이 대식구(大食口)인데 자기는 단군교(檀君敎) 믿고, 아내는 불교(佛敎)를 믿고 그리고 자기 딸이 둘인데 한 딸은 가톨릭을 믿고, 다른 한 딸은

개신교(改新敎)를 믿는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다 초월(超越)하는 立場에서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념체계(理念體系)가 다른지라, 信念體系가 다른지라 화합(和合) 되기는 참 곤란스럽습니다.

제사(祭祀) 모시는 것은 도리어 魔鬼한테 베푸는 것이라고 믿는 그런 사람들하고 和合이 되겠습니까.

지금은 이와 같이 굉장히 어려운 때입니다. 어째서 어렵게 이리 갈라지고, 저리 갈라지고 할 것인가?

이런 상황은 우주(宇宙)의 본체(本體)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自己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예수나 그런 분들 역시 본체(本體)를 다 알으셨겠지요. 성인(聖人)이라고 그래서 몇 천 년 동안 그분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으므로 알았다고 우리는 生覺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법문(法門)을 할 만한 개재(介在)가 못되어서 방편설(方便說)만 하시다가 가셨지만, 그래도 논어(論語)나 요한 마태 복음서의 허두에 보면 다소 方便說을 떠난 眞實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 現行的인 종교 형태로 보아서는 불교 아닌 것은

인간(人間)의 本 성품(性品)이 무엇인가?,

참다운 자기(自己)가 무엇인가?,

우주(宇宙)의 本 바탕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밝힐 만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人間 自體가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우리가 올바른 人間 敎育을 할 수가 있습니까!.

 

참다운 人間의 幸福을 말할 수가 있습니까!.

 

經濟나 政治나 모두가 人間의 행복(幸福)을 위해서 奉使하는 것인데

人間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바른 政治, 바른 경제학(經濟學)을 成立시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법학(法學)을 하거나 經濟學을 하거나 교육학(敎育學)을 工夫하거나

어떠한 分野나 꼭 기본적(基本的)인 問題인

'인간(人間)이 무엇인가?',

'우주(宇宙)의 본질(本質)이 무엇인가?'

이런 問題를 알아야 합니다.

政治學도 없고, 經濟學도 없고, 그런 아직 未開한 저 原始 共産 時代라든가

中世紀의 未開한 때는 모르거니와, 어차피 多樣하게 모든 學門이나 모든 主意, 주장이나

종교가 이렇게 混在해 있어 놓아서 이런 混亂스러운 가운데서는

꼭 바른 도리(道理) 모두를 다 종합(綜合)하는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바르게 살 수가 없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참선(參禪)한다고 애쓰고 또는 所重한 時間을 할애하고

이렇게 삼동(三冬)동안 모였습니다만  “參禪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 길을 잘 모르고서는 所重한 우리 힘을, 우리 생명(生命)같은 우리 時間을 낭비만 합니다.

 

아! 저 같은 경우도 승려가 되어서 한 10년 동안은 걸망지고 갔다 왔다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저래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이말 듣고 저 말도 듣고, 꼭 自己한테 맞는 수행법(修行法)을 確立을

못했습니다. 따라서 맨 처음 선방(禪房)에 오신 분들도 대체로 제가 방황하던 그런 때나 비슷하지 않은가 그렇게 生覺을 해서 저는 기우 때문에, 노파심 때문에 몇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좌선(坐禪)하는 形態는 이른바 大乘圈에서, 대승권이라 하는 것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중국(中國)이나 일본(日本)이나 한국(韓國)이나 그런데서 이루어진 불법(佛法)의 형태가 대승권이라고 합니다.

대승권에서는 참선하는 방법을 대체로 3가지로 區分해 있습니다.

달마(達磨)스님이나 육조(六曹) 혜능(慧能)스님,

이른바 정통(正統)조사(祖師), 흔히 말하기를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그리고 마하가섭부터 헤아려서 육조 혜능스님까지 33대 삽삼조사(救三祖師) 이렇게 말합니다.

이 분들은 이른바 正統祖師라고 말씀을 해서 그런 분들이 말씀한 것은 조금도 誤謬가 없다고

지금 우리가 다 느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달마스님 때부터서 - 달마스님은 중국에 와서는 초조(初祖)이지요.

저 인도(印度)까지 합하면 28대 조사이고 - 육조 혜능스님 때까지는 별로 분파(分派)가 없습니다.

分派가 없이 그냥 관심일법(觀心一法)이라. 마음을 관조(觀照)하는 그런 식으로만 쭉 이어져 나왔습니다.

달마(達磨) 혈맥(血脈)론을 보거나 또는 석실소문(釋室疏門)이라든가,

달마가 스스로 말씀했다는 그런 어록(語錄)을 보거나 승찬(僧璨)스님의 신심명(信心銘)을 보거나,

도신(道信)스님이나 홍인(弘忍)스님의 어록을 보거나 여러분들도 다 대체로 보신 바와 같이

육조단경(六組檀經)을 보거나 별로 분파(分派)가 없습니다.

 

중국(中國) 당(唐)나라 以後 북송(北宋) 때에는 자꾸만 여러 가지로 사람 근기(根氣)에 따라서 교파(敎派)가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는 마음을 관조(觀照)하는 하나의 법(法)만 있었습니다.

왜 마음을 觀照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른 지혜(智慧)로 마음을 관조(觀照)하면

우리 인간(人間)이 보는 현상계(現象界)라는 이것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합니다.

現象界가 虛妄無常하기 때문에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 도리(道理) 그대로 事實 모두가 虛妄無常 합니다.

金剛經 道理는 壓縮하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또는 중생(衆生)이라고 할 것도 없고, 수명(壽命)이 길다

짧다 하는 시간적(時間的)인 관념(觀念)도 原來 없는 것이고, 이런 道理가 金剛經 道理 아닙니까.

 따라서 金剛經 道理는 현실(現實)을 바로 본 道理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잘 몰라서 現實 그러면 이대로 내가 있고, 저대로 그대가 있다,

물질(物質)은 物質대로 있고, 이대로 된다 이렇게 生覺하지만,

부처님 법(法)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른 눈으로 볼 때는 나도 공()이고 너도 공()이고 또는 중생(衆生)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어서 衆生도 이고 시간(時間)도 結局은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 그런 것도 없습니다.

 

人間的인 차원(次元)에서 본다면 分明히 過去가 있고 現在가 있고 未來가 있습니다.

어제가 있고 來日이 있으므로 있다고 보겠지요. 이런 것 마저 없다면 우리가 허무(虛無)한 感이 듭니다.

여태까지 배운 것은 그렇게 안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반야사상(般若思想), 반야공(般若空),

이것이 불교와 다른 가르침과의 特色이 있는 區分입니다.

般若의 智慧가 있으면 불교(佛敎)이고 般若의 智慧가 없으면 이것은 외도(外道)입니다.

물질(物質)이라고 할 것이 없으므로 結局은 마음밖에는 없습니다.

마음이 個別的인 내 마음, 네 마음. 그 마음이 物質이 아닌데 따로 따로 그렇게 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物質이라고 生覺하면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내 마음, 네 마음이 있겠습니다만 物質이 아닌지라, 物質이라는 것은 시간성(時間性), 공간성(空間性)이 있어야 物質인 것인데,

마음은 그런 時空性이 없으므로 우리 마음이 어디가 있고 저기가 있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이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우주(宇宙)에 둘러있다 이렇게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라.

내 마음, 네 마음 따로 있다는 그런 좁은 마음은 부처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참다운 깨달음은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限界가 없고 어디에나 언제나 있는

그러한 생명(生命)의 본체(本體), 이것이 바로 마음의 本體인 同時에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부처입니다.

따라서 달마 때부터서 육조 혜능까지는 그와 같이 마음을 觀照하는 法으로 말씀했습니다.

六祖 惠能스님도 '내 법(法)은 항시 본체(本體)를 여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현상계(現象界)가 연기법(緣起法)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천차만별(千差萬別)로 區分된다 하더라도

내내야 그 本來的인 마음자리, 부처님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마음자리, 부처님 자리, 그 자리를 안 떠나야 그래야 우리가 이제 法을 離脫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