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법문(安心法門)
이번 법회는 참으로 의의 있는 희유(稀有)한 법회입니다. 경륜이 깊으신 대덕 스님들도 오시고, 또 우리 법사님, 거사님, 보살님들도 오셔서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법회입니다.
저는 한국에서는 더러 우리 스님네들끼리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강의식 법문을 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모인 가운데서 일주일씩이나 강의를 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특히 한국이 아니라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이렇게 여여한 여러분들을 모시고 법문을 하게 된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 대덕 스님들과 강사스님 그리고 주지스님들은 모두 참선방에서 20년 이상씩 공부를 하신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거사님들 가운데는 법사도 여러분 계시고 학문적으로 높으신 박사들도 여러분 계십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제가 법문을 할 만한 사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그때 분주히 지내다 보면 부처님의 핵심 사상을 놓치고서 그냥 현실 생활에 매몰되기가 쉽습니다. 그러한 우리 일상적인 부족을 이런 때 서로 피차 반조(返照)하고자 하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시대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전에는 동서 양 진영이 서로 겨루고 다투는데서 그때그때 긴장을 고조해 왔지만 이제는 한 쪽 공산세계가 붕괴(崩壞)되면서 더욱 혼란이 가중되어 오고 있습니다.
대체로 어떻게 하여야 우리 인류를 구제(救濟)할 것인가? 그런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관(價値觀),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치관을 우리는 어디서 구해야 할 것인가?
사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부분의 혼란상은 주로 서구문화(西歐文化)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훌륭한 석학들이 다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만 서구(西歐)사상으로 해서는 앞으로 오는 21세기 이른바 새로운 문명에 있어서 참다운 지도원리(指導原理)를 구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반 위대한 분들도 역시 동양사상(東洋思想)이 아니면 앞으로 오는 새로운 시대의 지도 원리를 구할 수가 없다고 말씀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저희 불교인들은 더욱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가르침, 다른 문화 현상들은 모든 것을 나누어 분열해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부처님 가르침만은 모두를 하나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만이 본래 하나가 아니라, 자연계라든가 또는 어떠한 것이나 다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보는 일원주의(一元主義) 사상이기 때문에 이른바 동일률(同一律)이라!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통합이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불교 사상의 일원주의, 소위 동일률적인 사고방식, 이런 가르침만이 보로소 세계를 하나로 평화스럽게 묶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됩니다.
순선(純禪)
그런 의미에서 이번 법회의 제목도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라. 이렇게 법회의 명칭을 붙였습니다.
여러분께 나누어 드린 복사물이 아주 서툴게 됐습니다. 강사 스님들한테 부탁했으면 더 잘 될 것인데 여러모로 바쁜 일이 있어서 미루지 않고서 제가 스스로 한다는 것이 더러 오자도 있을 것이고 그럴 것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해 주십시오.
참선(參禪)은 비단 우리 불교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 일반 세간인도 참선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우리 몸과 정신 건강을 위해서나 기타 산란스러운 일들을 헤치고 나가는데 참선은 지극히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 쪽에서도 참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일반 사람들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참선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참선이면 참선이지 왜 이와 같이 순선(純禪)이라. 순수한 참선이라 이렇게 명칭을 붙였는가? 이것부터 의심이 생기실 것입니다. 불교를 전문적으로 안 하신 분들은 여러 가지고 어려운 술어가 있어서 가급적으로 풀이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더라도 어려운 술어가 나오면 그때그때 불편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번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 법문 정도는 꼭 알아두셔야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렇게 문제를 제기 했습니다.
보통 참선이 아니고 순선이라는 것은 이른바 순수한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을 순수한 참선이라 하는 것인가?
중국의 초조(初祖) 달마(達磨)스님 때부터서 육조(六祖) 혜능(慧能) 스님까지의 시대를 순선시대(純禪時代)라 하고 그때의 선을 순선(純禪)이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육조 혜능스님 이후에 다섯 파로 참선이 갈라지고, 그래서 서로 반목하고 옥신각신하는 그런 것을 주로 수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순선 그러면 참선하는 사람들도 그런 쪽으로 공부를 안하신 분들은 다소 생소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스님 때부터서 육조혜능 시대까지를 가장 순수한 참선으로 보고 이것을 순선이라 합니다.
다시 간단히 말씀드리면 화두선(話頭禪)이 있고, 묵조선(黙照禪)이 있고, 무엇이 있고 이런 복잡한 갈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 마음 그대로 닦아서 나아가는 그런 참선이란 말입니다.
안심(安心)
비단 불교(佛敎)뿐만 아니라 어느 종교나 다 우선 자기 마음이 편안(便安)하고 남과 화해(和解)하고 그렇게 청정(淸淨)하게 지내는 이런 것이 되어야 되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어느 종교나 안심(安心)이라. 마음이 편안하고 안온한 것을 다 추구합니다.
그러나 특히 불교는 오로지 팔만사천 법문 전부가 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보고 안심법문 그럽니다.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나 자기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불안스러우면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불안스럽다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잘 안되기도 하고, 또는 내가 대체로 무엇인가? 자기 마음도 미처 무엇인가를 잘 모르고, 나한테는 지독한 고민이 있고, 더러는 미운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게 내가 편안할 것인가? 사실 여러 가지로 불안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천재(天災)인 지진(地震), 풍수해(風水害), 가뭄 그런 것 때문에도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굉장히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정치를 잘못한다던가 무슨 제도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한테 들씌우는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받는 인재(人災), 사람들 때문에 받는 재앙도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가 안락스럽게 마음을 그야말로 안심하고 살 것인가?
부처님 법(法)에는 더러 자기가 사업에 실패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이 죽기도 하고, 이별하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능히 안락스러운 마음, 안심(安心)을 할 수가 있는 법문이 있습니다.
이런 법문은 어디서 얻는고 하면 허두에 말씀한 순선, 이른바 순수한 참선, 순수한 참선을 하여야만 그런 안심을 얻습니다. 따라서 순수한 참선을 떠나서는 우리 마음의 안심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순수한 참선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때나 안심을 얻고서 시시때때로 모두가 다 행복(幸福)스럽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要諦)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선안심탁마법회』라!
이러한 순수한 참선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어느 때나 안락하게 나날이 행복스러운 날이 되는 것을 서로 피차 토론(討論)도 하고 갈고 닦는 그런 법회(法會)가 이번 법회입니다.
따라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要旨)도 주로 순수한 선(禪)쪽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순수한 선 이것은 어느 것에도 막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흔한 말로 하면 이른바 원통불교(圓通佛敎)라! 원통사상, 또는 회통사상입니다.
회통사상(會通思想)은 이것저것 합해서 모두 다 화해를 시켜서 이루어진 하나의 진리(眞理)가 이른바 회통사상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뿐만이 아니라 자고로 위대한 성인(聖人)들은 다 회통사상입니다. 우리 한국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신라 시대의 원효, 의상, 자장, 고려 때 대각, 보조, 태고, 이조 때 서산대사 모두가 다 회통사상입니다.
왜 그 분들이 회통사상일 것인가? 성자라 하는 분들은 천지 우주의 하나의 도리를 압니다.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기 때문에 나는 나요, 너는 너요, 좋은 것은 좋다, 궂은 것은 궂다 시비 분별해서 봅니다. 형상적인 것은 그럴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봅니다.
따라서 근본 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란 말입니다. 예수도 공자도 다 그랬습니다. 근본 하나의 자리를 봅니다. 그 하나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고 부처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순선 도리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낸 법문을 제시하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안심삼매(安心三昧)
* 안심법문(安心法門) : 안락법문(安樂法門) 또는 안상삼매(安詳三昧)로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법문(法門)을 의미(意味)함
이 안심법문을 다른 말로 하면 안락법문이라고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과 몸을 하나로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안심하면 바로 안락스럽게 되겠지요.
복사물에 다 있습니다마는 중요해서 재차 여러분들한테 시각적으로 보다 더 인식을 깊이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발췌 정리했습니다.
저같이 한문 세대인 나이를 많이 드신 분들은 몰라도 젊은 세대는 대학을 나오고 박사가 되고 하여도 한자를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한글로 음을 달았습니다.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그야말로 글자만 봐도 마음이 편안한 법문입니다.
안심법문은 바로 안락법문입니다.
불교의 특색은 마음과 몸을 절대로 둘로 안봅니다. 하나로 봅니다. 마음도 몸도 하나요, 또는 자연(自然)과 인간(人間)도 하나요, 우주(宇宙)를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보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중요한 핵심(核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안심스러우면 몸도 안락스럽고, 불교 전문적인 참선하는 공부로 말할 때는 안상삼매(安詳三昧)라! 편안할 안(安)자, 자상할 상(詳)자입니다. 차분하게 우리가 조금도 서둘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불안스러워야 서두르는 것인데, 급할 것도 없고, 앞에 갈 것도 없고, 끝에 갈 것도 없고 말입니다.
자기만 잘나고 자기만 무엇이 잘되고 그런 때는 우리 마음이 안락스럽게 안됩니다. 안심이 안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언제나 꼼꼼하고 자상스럽고 말입니다. 이른바 유연스러운 것, 이것이 안상입니다. 안상삼매라. 삼매(三昧)라는 것은 오로지 거기에 몰입한단 말입니다.
인도(印度) 말로는 삼마지(三摩地 : Samadhi)인데, 삼매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쓰지 않습니까. 거기에 몰입하는 이것이 삼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또는 움직이나 누구하고 말을 하던지간에 언제든지 마음이 차분하고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안상삼매에 들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되고 몸도 안락스럽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안심이 되고 안락 스러울려면 우리 공부하는 것도 역시 선오후수(先悟後修)라. 우선 이치로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이치로 막힘이 없어야 비로소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 길도 우리가 길을 잘 모르면 불안스럽고 헤매지 않습니까? 길을 가더라도 갈래를 알아야 이제 안심하고 갈 수가 있는데 하물며 우리 인생살이는 더욱 가는 길이 확실하여야 되겠지요.
더구나 현대와 같이 정보가 종횡으로 착종(錯綜)하고 있는 이런 시대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현대를 가리켜 정보화시대(情報化時代)라 하지 않습니까.
정보화 시대가 좋기는 좋은데 정보가 너무나 범람하므로 자기 인생관(人生觀), 가치관(價値觀)이 확립 안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느 정보를 우리가 선택할 것인가?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저번에 신문 쪽지를 보니까 미국 사람들 5분의 3정도는 노이로제 증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항시 마음이 불안스럽기 때문입니다.
항시 긴장되어 있고 항시 스트레스를 풀래야 풀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병의 원인도 되고, 가정 불화의 씨앗도 되고, 민족들끼리 분열도 되고, 그럴 수가 있겠지요. 아무튼 그런 것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내일은 어떻고 우리 공부는 어떠할 것인가?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도 지금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더러 대답을 확실히 못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슨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가?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오후수라! 선오후수라는 말을 우리가 꼭 명심해서 자기가 선오후수가 되도록까지 노력을 해야합니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만은 먼저 깨닫는단 말입니다. 참다운 중도(中道)를 깨닫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참선(參禪)도 하고 기도(祈禱)도 모셔서 우리 업장(業障)이 녹아나야 되겠습니다만 그렇기 전에 이론적(理論的)으로 먼저 깨닫는단 말입니다.
더구나 이 현대는 이론적인 논리(論理)가 앞선 시대 아닙니까? 하기 때문에 꼭 부처님의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논리로 해서 먼저 깨닫고서 뒤에 닦아야만 이른바 정수법문(正修法門)입니다. 바르게 닦는 법문입니다.
덮어놓고서 공부해라. 이렇게 해서는 지금 통할 때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의 요체는 어떤 것인데 그대는 지금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그대한테 제일 좋다. 남한테 지도를 못 받으면 스스로 연구해서라도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서 나한테 안맞은 것은 어떤 법문인가?
분명히 선택해서 공부를 하여야 이제 마음이 안락스럽습니다. 그래서 선오후수, 먼저 이론적으로 알고 단계단계 느끼면서 닦는 그러한 법문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 법문입니다.
제불여래시법계신(諸佛如來是法界身)
* 제불여래시법계신(諸佛如來是法界身)
입일체중생심상중(入一切衆生心想中)
시고여등심상불시(是故汝等心想佛時)
시심즉시삼십이상팔십수형호(是心卽是三十二相八十隨形好)
시심작불(是心作佛) 시심시불(是心是佛)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제불여래(諸佛如來)". 제불여래는 바로 모든 부처님이십니다. 모든 부처님이라고 할 때는 수에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했을 때는 무량무수(無量無數)의 헤아릴 수 없는 그러한 우주의 순수생명(純粹生命)!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 부처님은 저 어디 밖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것은 방편 가르침입니다.
방편(方便)을 떠나서 부처님을 대승적(大乘的)으로 생각할 때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우주의 생명입니다. 나의 생명인 동시에 동물이나 식물이나 자연계나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우주 전부의 근원적인 생명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생명이니까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부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생명인데 마음의 근본 고향(故鄕)인 동시에 일체(一切)생명(生命)의 근본(根本)자리가 생명이 아니라고 할 대는 우리 마음이 너무나 건조해져버립니다.
우리 신앙(信仰)의 대상이 생명이 아니라 논리(論理)다, 이치(理致)다, 지혜(智慧)다,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자기 신앙이 정말로 감성적(感性的)으로 감격(感激)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필히 부처님을 내 생명의 근본 생명인 동시에 우주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으로 느끼셔야 합니다.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라 하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방여래(十方如來)라는 것은 바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이며 우주 전체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방여래, 우주 전체의 생명이 "시법계신(是法界身)"이라. 법계라는 것도 우주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바로 어디 다른 데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이어 거기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바로,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계신이라, 부처님 몸이 바로 우주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일반적으로는 다 자기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항시 불안스럽고,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부처님과 가깝지 않단 말입니다. 우주의 생명이 바로 부처니이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는 누구나 바로 거기에 다 포함됩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 법계를 몸으로 하시기 때문에 "입일체중생심상중(入一切衆生心想中)"이라. 모든 중생의 마음 가운데 다 들어 계신단 말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나 그대 마음 가운데나 또는 다른 동물, 식물 가운데나 다 들어 계십니다.
우리 불교에서 마음이라고 할 때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사람만의 마음을 마음이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다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도 마음이 안보이지만 마음이 바로 주인공(主人公) 아닙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산(山)도 우리는 산으로 보이지만 내내야 산에도 안보이는 산신(山神)이라, 산에 들어 있는 정기(精氣), 산 기운, 산 에너지가 참다운 산의 한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물을 물로만 보지만 물의 정기, 그것은 바로 용왕(龍王)입니다. 물의 정기가 바로 참다운 물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우주도 태양계(太陽系), 은하계(銀河系) 이렇게 구분해서 봅니다. 이런 것은 우리 중생의 분별(分別)로 해서 나누어 놓은 것이지 본래적인 생명 자체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가 부처님이라 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주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 가운데 부처님, 하나님이 다 들어 있습니다.
"시고(是故)" 그러기 때문에 "여등(汝等)" 그대들이 "심상불시(心想佛時)" 이와 같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을 제한되게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그와같이 광대무변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시심즉시(是心卽是)" 이 마음이 곧바로
"삼십이상팔십수형호(三十二相八十隨形好)"라. 이런 것들은 불교 술어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것은 부처님한테 들어 있는 모든 공덕(功德)이 삼십이상 팔십수형호입니다. 우리 마음이 부처님같이 청정하고 번뇌가 없고 자기라 하는 것을 떠나서 무아(無我)의 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얼굴도 사실은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이, 예수같이 잘날 것입니다.
사실 성인(聖人)들은 얼굴도 이와 같이 일체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어놔서 사람 얼굴로서 조금도 흠이 없는, 눈이나 입이나 코나 몸 어디나 조금도 흠이 없는, 그런 것을 상징적으로 서른 두 가지 큰 상과 여든가지 작은 상이라고 구분을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뜻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한의 공덕입니다.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능력(能力)이나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고 말입니다.
환희공덕(歡喜功德)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기계만능시대, 물질만능시대에 살고 있어 놔서 기술이면 다고 모두 그렇게만 생각하는데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습니다. 사실 물질이 사람 마음까지 지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성(人間性)을 너무나 왜소(矮小)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 마음으로 지금 금생(今生)에 나와서 뭘 좀 배우다 다 못 배우고 죽어지지 않겠는가? 이렇게만 가볍게 생각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쓰는 이 마음이 성자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가르침이요, 그들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지혜도, 자비도, 사랑도, 능력도 예수나 석가와 공자와 더불어서 절대로 다르지 않습니다. 성인과 똑같습니다.
그 아인슈타인같은 천재나 우리나 인간성은 똑같습니다. 다만 개발을 누가 얼마만큼 했는가 하는 그 차이 뿐인 것입니다.
불교가 절대적으로 평등사상(平等思想)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누구나 본래로 잠재해 있고 갖추고 있는 것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대 천재나 우리나 다 똑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게을러서 불교 말로 하면 나쁜 버릇이 많이 붙어서 개발을 미처 못해 있단 말입니다. 불교 신앙이라는 것은 내 본래가 하나님이고, 부처님이다. 이렇게 믿는 것이 불교의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대승적인 신앙입니다.
나는 나밖에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는 대승적인 신앙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에 어느 제한된 부처가 아니라 '부처님은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춘 우주의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만공덕을 갖춘 그 생명이 나한테나 너한테나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흔히 나한테나 너한테나 부처님이 들어 있다고 말하면, 부처님은 본래 무량무변한 그런 공덕인데, 나한테 들어가고 너한테 들어가 있는 것은 그 한 부분만 들어가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통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란 의미는 이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크고 작고하는 그런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른바 순수 생명에너지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많고 적고 하는 그런 대립이 없습니다. 많고 적고 하는 그런 비교를 할 수가 없이 우주에 바로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공기는 지구의 대류권(對流圈)에만 있고 더 올라가면 없는 곳이 있지만, 부처님은우주에 언제 어디에나 충만해 있습니다. 내 몸 속에나, 다이아몬드 가운데나 저 태양 가운데나 빈틈도 없이 충만해 있는 하나의 생명 자체란 말입니다.
이렇게 나한테 있는 불성과 석가모니한테 있는 불성이 똑같다. 그래야 불교의 참다운 이해가 됩니다.
이와 같이 그러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이 곧 삼십이상 팔십수형호라. 우리 마음이 이와 같이 부처님의 만공덕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어리석어서 다는 느끼지는 못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기에 "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른다. 이 마음으로 성불(成佛)을 한단 말입니다. 다른 걸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이 본래 부처인 것이고, 또 부처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마음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고 또 동시에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이 시(是)자는 '이 시' 혹은 '바로 시' 그럽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때는 '바로'라고도 합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이것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있는 가장 중요한 법문입니다.
여러분들한테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나누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정토삼부경 맨 허두에 가서 이와 같이 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이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법문이 팔만사천 법문을 모두 다 포섭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앞으로 두고두고 말씀드리는 것도 이러한 법문을 보다 더 부언해서 말씀드리는 것에 사실은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법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선 즉, 참다운 순수한 선 역시 이러한 사상 밑에서 이루어지는 참선입니다.
참선하면 우리가 기운도 있고 잔병도 떨어지고 기분도 좋고 개운하다. 이런 정도는 순수한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부처가 무엇인가를 바로 느끼고서 그 부처의 자리에 마음을 딱 못 박아 두고서 그 자리를 여의지 않는, 자나깨나 남하고 말을 하나 밥을 먹을 때에도 부처님 자리, 하나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이것이 우리들의 참다운 신앙입니다.
하나의 도리(道理)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네것, 내것 싸워서는 민족(民族)이나 국제(國際)간에도 절대로 화합(和合)이 못됩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가 국제화(國際化), 세계화(世界化)가 되고 싶어서 됩니까? 지금은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경제만 해도 다국적(多國籍) 기업이라. 한 나라만 가지고서는 자본주의 후기는 경제가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필연적(必然的)으로 국제화가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마땅히 경제인들만이 아니라 전 인류가 화합이 되어야 하겠지요.
화합을 하려면 바른 인생관과 세계관이 있어야 하겠지요.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바른 인생관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 때는 투쟁과 반목뿐입니다.
평소에 가치관이나 인생관 문제에 대해서 별로 큰 관심을 안 두고 살아온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너무나 각박해서 그럴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알고 보면 자기 마음이 무엇인가? 천지를 다 주어도 나를 모르면 아무 가치가 없다 하듯이 자기가 무엇인가?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인가?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디서 와서 앞으로 가는 곳은 어디인가?
또 기독교(基督敎)와 불교(佛敎)의 차이는 무엇인가? 도교(道敎)와 유교(儒敎)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지금 모르고 살 때가 아닙니다.
금방 닥쳐온단 말입니다. 금방 자기 아들이 기독교도 믿고 유교도 믿고 그럽니다. 몇 해전에 어느 분이 자기는 지금 이른바 단군교(檀君敎)를 믿고, 자기 아내는 불교(佛敎)를 믿고, 아들은 기독교(基督敎)를 딸은 천도교(天道敎)를 믿는다. 그렇게 자랑삼아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좋은데 피차 그것이 화합되게끔 하나의 도리(道理)를 딱 느끼고서 그렇게 화해(和解)가 되면 좋은데 그렇게 못된다고 생각할 때는 싸움판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꼭 '하나의 도리'를 알 때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여러분들께서도 하나의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피차가 순수(純粹)해야 됩니다. 순수하다 보면 순수한 것은 같아지겠지요. 불교도 순수하고 기독교도 순수하고 사람도 순수하고 순수한 사람들끼리는 잘 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허두에 순선시대(純禪時代)라. 참선도 그냥 화두(話頭)한 사람이 옳다, 묵조(黙照)한 사람이 옳다. 뭐한 사람이 옳다. 우리 한국이나 일본 불교도 그런 시비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비나 문중이 이루어지기 전 순수한 때에 순선 시대에 어떻게 말했던가? 그리고 석가모니께서는 어떻게 말했던가? 순수한 마태복음서나 요한복음서에 예수가 어떻게 말했던가?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두루 훑어보면 거의 같아 버린단 말입니다. 이번 법회의 목적도 그런 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이런 도리를 '천지 우주는 다른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일체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님뿐이 아닌가?' 부처뿐이라고 생각할 때에 나나, 너나, 미운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내 딸이나, 남의 아들이나 다 포함됩니다.
불교에서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 무소유(無所有)라! 본래 내 소유가 없다. 이런 것도 그러한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종교철학(宗敎哲學)적인 의미에서 그때는 필연적으로 무아가 되고 무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무아가 되고 무소유가 되어야지 억지로 뭐 내가 제일 좋은데, 제일 훌륭한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한테 무아가 되라 하면 무아가 되겠습니까. 내 것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 이런 사람한테 남에게 보시(布施)하라 하면 함부로 보시하겠습니까? 기본적인 철학이 확립돼 놓으면 그때는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회를 맑혀야 한다, 어떠해야 된다. 그런 캠페인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한마음 운도, 한 몸 운동. 이러한 운동도 분명히 이와 같이 하나의 도리로 해서 본래가 한 몸이요, 한마음이요, 알고 하면 좋을 것인데 그걸 모르고서 뿔뿔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한 몸 운동, 한마음 운동하라고 하면 그것이 노력은 많이 하지만 별로 성과는 없단 말입니다.
어떠한 분야나 지금은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이 앞서는 때입니다. 법학을 하나, 정치를 하나 다 그렇습니다. 정치를 하시는 분들도 '천지 우주가 본래로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철학과 도리를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대는 설사 정당을 따로 한다 하더라도 요새같이 그렇게 추태되는 일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삼십년, 사십년 정치한 사람들 지금 보십시오.
그런 분들 가운데는 기독교도 믿고 불교도 믿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그런데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종교를 믿어도 피상적(皮相的)으로만 보통은 믿고 있다. 이렇게 한탄을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때는 서로 피차 자기반조(自己返照)를 해 가면서 부처님 법문의 핵심을 공부하시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사종연기(四種緣起)
1. 업감연기(業感緣起)
: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혹(惑), 업(業), 고(苦)의 삼도(三道)가 전 전(展轉)하여 인과상속(因果相續)함을 말하며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상(相)임.
2.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장식(藏識)으로서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훈종자(現行薰種 子), 삼법전전(三法展轉) 인과동시(因果同時)함을 말함.
3.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도 함. 일미평 등(一味平等)한 진여(眞如)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한 실체(實體)인 데 염정(染淨)의 연(緣)에 따라 종종(種種)의 법(法)을 생(生)함을 말함. 곧 그 실체(實體) 에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의 이의(二義)가 있어서, 진여문(眞如門)으로는 일미평 등(一味平等)한 실체(實體)이나, 생멸문(生滅門)으로는 염연(染緣)에 따라서 육도(六道)를 현(現)하고 정연(淨緣)에 따라서 사성(四聖)을 나툰다.
4. 육대연기(六大緣起)…지수화풍(地水火風), 공(空), 식(識)의 육대(六大)가 우주(宇宙) 법계 (法界)에 두루 가득하여 만유제법(萬有諸法)을 연기(緣起)함을 말함.
* 이진여(二眞如) : 수연진여(隨緣眞如)와 불변진여(不變眞如)
1. 수연진여(隨緣眞如) : 자성(自性)을 불수(不守)하고 염연(染緣)에 따라 염법(染法)인 육도 사생(六道四生)을 나투고 정연(淨緣)에 따라 사성(四聖)을 나툼.
2. 불변진여(不變眞如) : 연(緣)에 따라 만차(萬差)의 제법(諸法)이 이루어지나 진여(眞如)의 자성(自性)을 잃지 않음을 말함.
* 수연진여(隨緣眞如)는 파(波)와 같고 불변진여(不變眞如)는 수(水)와 같음.
불변(不變)의 수(水)가 파상(波相)을 일으키고 수연(隨緣)의 파(波)가 수성(水性)을 불실(不失)한다. 그래서 수연진여(隨緣眞如)이기 때문에 진여(眞如)가 곧 만법(萬法)이며 불변진여(不變眞如)이기 때문에 만법(萬法) 그대로 곧 진여(眞如)이다.
소승(小乘)은 아예 이종(二種)의 진여(眞如)를 모르고 대승(大乘)의 권교(權敎)는 불변진여(不變眞如)는 아나 수연진여(隨緣眞如)를 모르며 대승실교(大乘實敎)는 두 진여(眞如)를 다 안다. 기신론(起信論)은 바로 이 도리를 밝혔다.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부처님 법은 연기법(緣起法)을 기본으로 합니다. 부처님 법은 인연법(因緣法)을 줄거리로 합니다. 논리적인 줄거리는 바로 인연 연기법입니다. 따라서 인연법을 알면 부처님 진리를 알고 인연법을 모르면 부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연기법은 저급한 차원에 머물게 되면 이것은 세간적인 하나의 상대적인 원리 그런 것밖에는 안됩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이 중요한 점은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그런 차원까지 높여져야 참다운 대승적 연기법이 됩니다.
이 시간은 주로 연기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법(佛法)을 얘기하는 분이 연기법을 말하지 않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앞서 말씀과 같이 세간적인 차원 상대 유한적인 차원에 머물러 버립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도. 그런 차원에서만 그쳐 버리면 사실은 우리 생활에 큰 힘이 못됩니다. 이른바 상대적인 것밖에 안됩니다.
불교 연기법은 업감연기, 아뢰야연기, 여래장연기, 육대연기, 이렇게 4종으로 구분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1. 업감연기(業感緣起)
먼저 업감연기(業感緣起)라. 업감연기는 우리가 업(業)을 짓고서, 업은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가사 우리가 무엇을 좋다 그러면 그냥 좋다는 것이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다 흔적(痕迹)을 둡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도 그런 것이 그만치 흔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말 한마디를 한다던가 생각을 한 번 한다던가 행동으로 옮긴다던가, 이른바 신구의(身口意)라. 우리 몸으로 행동을 하고, 입으로 말하고, 뜻으로 생각을 하고,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업인데, 업을 지어 놓으면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꼭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우리가 업을 짓고 또 업을 지어 놓으면 그 하나의 업보(業報)로 해서 고(苦)를 받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번뇌(煩惱)를 일으키고, 또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지어 놓으면 결과적으로 인생고(人生苦)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 전생에 지은바 그런 하나의 업보에 따라서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와 같이 과거 전생에 업을 지어서 그 업의 과보에 따라서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났고, 금생에 또 업을 지어서 거기에 상응(相應)되게끔 내생 가서 태어나고, 이것이 이른바 삼세인과법칙(三世因果法則)이라. 이것은 불교의 기초적인 법문입니다.
우리 부처님 공부를 하실 분들은 역시 삼보사제(三寶四諦)라! 부처님과 부처님 법과 부처님 법 따라서 수행하는 승(僧) 이것이 삼보 아니겠습니까.
삼보 이것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가 삼보입니다.
천지 우주의 근본 도리, 대 자연의 도리가 부처인 것이고, 그 부처님 법을 깨달으면 또 부처인 것이고, 그래서 천지 우주의 도리 이것이 하나의 부처인 동시에 바로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우주의 근본적인 법에 따라서 행동하면 좋은데 우리가 그렇지 못하니까 업을 짓고서 거기에 상응된 고를 받는 것입니다.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 업을 받는가? 번뇌(煩惱)를 일으켜서 업을 받는가?
과거 전생에도 무명(無明)이라 하는, 무명 이것은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진리를 모르는 무지(無知)가 무명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과거 전생에 무지, 무명 때문에 부모 연(緣)을 만난단 말입니다.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따르고, 무지하기 때문에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무지한 행 따라서 식(識)이 생기고, 그 업식이 중음계(中陰界)를 헤매다가 부모 연 만나서 태 가운데 잉태하고, 또 자라나 열 달이 차면 태어난단 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보고, 듣고, 느끼고 해서 또 업을 짓는 것입니다. 업을 지어 놓으면 금생에 그것이 씨앗이 되어서 죽은 뒤에는 내생 가서 그대로 또 다시 과보(果報)를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가 항시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고 도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그래서 혹업고(惑業苦)라. 혹(惑) 이것은 미혹할 혹(惑)자, 번뇌를 가리킵니다.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 따라서 받는 결과가 고(苦)란 말입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혹이란 말입니다. 무엇에 탐착(貪着)을 한다. 이것도 혹입니다. 혹이 있으면 그런 번뇌에 따라서 행동이 있게 되겠지요. 그래서 업을 짓고 고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항시 이와 같이 혹업고가 되풀이 됩니다.
무지한 번뇌 때문에 행동을 하고, 그 행동 따라서 인생고(人生苦)를 받고, 혹업고의 삼도(三道)가 전전(展轉)하여 인과상속(因果相續)이라.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항상 이것이 상속이 되어간단 말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상속되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삽니다.
뱅뱅 도는 인생고, 그것을 뚝 끊어 버리는 것이 성자의 가르침이요, 성자의 길입니다. 우리 중생은 항시 이와 같이 죽고 나고 살고 죽고 끝도 갓도 없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회의 바퀴를 번뇌에 다라서 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인생고의 바퀴를 다 끊어 버려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업감연기(業感緣起)라 하는 낮은 차원의 연기법으로 해서는 영생해탈이라는 그런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 행동 따라서 인생고를 받고, 이런 것만이 업감연기라 하는 차원 낮은 연기법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다. 불교에서 연기를 보는 사람은 부처님 진리법을 확실히 알고 부처님 법을 보는 사람은 부처님을 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연기법을 모르면 그때는 불법을 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연기법은 불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연기를 안다고 할 때는 불법을 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연기를 모르면 불법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인연 따라서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 세상 만물 어느 것이나 인연 따라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연기법으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현대말로 하면 인과율(因果律)이라. 인과율을 떠나서 과학도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이라는 것은 인과율을 공리(公理)로 합니다. 인과율이 없으면 과학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과율보다 훨씬 더 심오한 가르침이 부처님 연기법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과학적 인과율은 단순히 원인과 결과만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인 연기법은 그 인(因)과 연(緣)과 과(果),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조건과 이것이 합해서 결과가 나온다는 보다 심오한 범위가 넓은 것입니다.
그런데 업감 연기법 정도는 우리 눈앞에서도 다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범부에 속한 연기법 이것이 업감 연기법입니다.
그러면 이 연기법의 근원은 무엇인가? 연기법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원인을 캐서 물을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이나 과학적인 가르침은 모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천재도 상대성(相對性)이 어디서 왔는가? 그 원인을 어떻게 풀지를 못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을 세우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참다운 본질(本質)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을 초월(超越)한 세계, 상대(相對)를 초월한 세계가 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이와 같은 연기법의 원인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입니다.
아뢰야(阿賴耶)란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장식(藏識)이라. 우리 마음이나 우주 만유는 중생들 눈에는 안보인다 하더라도 모두를 거기에 다 담는 하나의 식(識)이 있단 말입니다. 알 식(識)자 이것은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마음이란 뜻이나 식이란 뜻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 모든 존재가 다 식이 있는 것인데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는 물질은 물질이고 마음은 마음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항시 어느 물질이나 근본은 다 마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야 불교가 성립됩니다.
마음, 식 이것은 하나의 순수 에너지입니다. 이른바 우주의 정기(精氣),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본질인 동시에 알 식(識)자 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개념의 차이가 있어 놓으면 혼돈하기 쉬우므로 개념을 정확히 알아 둬야 어려운 공부를 할 때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이 우리 사람도 역시 근본은 마음이고, 또 다른 존재도 근본은 마음입니다. 산도 근본은 마음이고, 해나 달이나 모두가 다 근본은 마음이라는 하나의 식입니다.
앞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현대 물리학자들도 그것을 긍정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저 끄트머리에 가면 동물과 식물도 한계가 없어져 버립니다.
가사 화분에 좋은 꽃을 가꿀 때도 화분(花盆) 그것은 단순히 아름답게 꽃을 피우기만 하는 식물인 것이지 무슨 뜻이 있으랴? 하지만 똑같은 화분을 놓고서 거름이나 관리도 똑같이 하면서 한 쪽 화분에 마음을 더 주고 다른 한 쪽 화분에는 마음을 덜 두면 이상하게 마음을 더 두고 관심을 느끼고 있는 화분이 훨씬 더 성장이 빠르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증명해서 밝힌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의 순수 에너지이기 때문에 관심을 두면 그만큼 화분의 꽃에 대해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지독히 미워하면 그 마음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미워하는 만큼 그 사람 인생에 대해서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영국이나 미국이나 자기 아들, 딸이 있다고 생각할 때 어머니나 아버지가 기도를 모셨다고 합시다. 저 멀리 있는 아들, 딸한테 아무 도움이 없다면 무슨 필요로 기도를 모시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오랜 경험으로 어디가 있던지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정성(精誠)을 드리면 틀림없이 그만큼 정성이 닿으므로 기도를 모시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인간의 오랜 경험으로 해서 알려져 내려왔단 말입니다. 그런 것만 봐도 다 알 수 있듯이 우리 마음은 무한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만이 마음이 아니라 개나 소나 돼지 그런 축생(畜生)들도 마음이 다 있습니다. 단지 인간같이 의식(意識)이 발달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으로 되었다. 만법유식(萬法有識)이라. 불법에서 만법(萬法)이라고 말할 때는 일체 존재를 다 가리킵니다.
오직 유(唯)자, 알 식(識)자 오직 식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요, 모두가 다 마음이라 하는 순수생명(純粹生命)으로 만들어지고 또는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식이다. 식이라는 말이나 마음이라는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다만 식 이것은 분별시비(分別是非)를 가질 때 식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래도 겉으로만 그러는 것이고 본질에 가서는 똑같아 버립니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불법 공부를 하셔야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아뢰야식 이것은 장식이라. 감출 장(藏)자입니다. 모두를 다 그 속에다 담아 두는 식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좋다 하면 좋다 하는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흔적이 없어 보이겠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에는 좋다는 흔적을 남깁니다. 남을 밉다 하면 미워하는 그것은 끝나 버리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은 밉다는 흔적을 둡니다. 자꾸만 남을 미워하면 그때는 더욱더 미워진단 말입니다. 남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그때는 그것이 더욱더 사랑해지고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생각이나 행동이,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도, 남을 한 번 딱 때리면 그 행동은 그쳐 버리지만 때렸다는 그 에너지는 역시 식에 갈무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도 함부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말이 그대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식에 역시 머물러 둔단 말입니다.
이른바 우리 식에 종자(種子)를 심어둡니다. 나쁜 생각은 나쁜 종자를 심어 두고 좋은 생각은 좋은 종자를 심어 둡니다.
좋은 사람은 마음속에 과거 전생이나 금생에 좋은 종자를 많이 심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들은 나쁜 말 많이 하고 남도 미워도 하고 해하고 이런 사람들은 결국 나쁜 종자가 마음에 심어져 있기 때문에 나쁜 일 하기가 더 쉬운 것입니다.
장식으로서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 우리가 가사 저 사람이 밉다. 그럴 때는 그냥 우연히 미운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벌써 밉다는 종자가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자에서 현행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좋다는 것이나, 궂다는 것이나 그런 것이 그냥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연인 것 같지만 잠재의식(潛在意識), 우리가 미처 못 느끼는 마음의 그런 바탕에는 종자가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자가 현행 행위를 나투고, 때리기도 하고 안 때리기도 하고 밥도 먹고 걸음걸이도 하고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런 행동이 다시 훈종자(熏種子)라. 다시 종자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본래에서 보면 선악이 없지만 우리 과거 전생의 업식(業識), 마음에 들어 있는 선악의 종자가 인연 따라서 현실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것이 종자생 현행인 것이고, 그리고 현실로 행동하면 또 그것이 거기에 걸맞는 종자를 다시 심는 것입니다.
이를 불교 술어로 훈종자(熏種子)라. 훈 이것은 더웁게 할 훈(熏)자입니다. 우리 마음에다 따습게 종자 훈기를 심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삼법전전 인과동시(三法展轉 因果同時)라.
이 삼법(三法)은 혹업고(惑業苦)라. 맨 처음에 우리 마음에 갈무리된 종자가 있으면 그 종자에 따라서 행동이 나오고, 행동을 하면 다시 업을 짓고, 그 업보로 해서 고를 받고, 다시 종자를 심고, 이렇게 해서 이것이 인과동시(因果同時)라. 인(因)과 과(果)가 서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즉시 종자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종자를 심어 놓으면 그때는 또 인연이 있으면 그냥 바로 현실로 행동이 나오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 인간의 행동이 규정(規定)되는 것입니다.
종자생 현행이라. 우리 마음에 있는 선악(善惡)의 종자가 현실 행동을 낳는 것이고, 행동을 하면 그 행동 때문에 종자를 다시 심고, 그 종자에서 또 현실적인 행동이 나오고, 다시 또 종자를 심는 이 삼법이 이와 같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가 다 식(識), 마음이라 하는 거기다 종자를 애초에 심어서 그런 결과가 생깁니다.
그러면 우주가 다 파괴되어 버려서 텅텅 비어가지고 있을 때는 종자가 어디서 나올 것인가? 우주가 다 파괴되어 버려도 물질적인 세계, 시간 공간적인 세계만 파괴되는 것이지 마음의 세계는 절대로 파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 천상계 어딘가에 그대로 생존하고 있으므로 그 종자 그대로 남아 가지고서 다시 우주가 구성되면 종자에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나고 나무로 태어나곤 합니다. 이렇게 그 마음에다 종자(種子)를 심고 거기서 현실로 행동(行動)이 나오고 다시 또 그 현행(現行)이 인(因)이 되어 종자를 심고 삼법(三法)이 전전(展轉)하는 이것이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입니다.
그러므로 아뢰야연기법 이것은 앞서 언급한 업감연기 즉, 십이인연법보다 정도가 높은 것입니다. 어느정도 마음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식(識)이란 대체로 무엇인가?
불교는 꼬치꼬치 밝혀서 끄트머리까지 다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믿으라는 것은 불교에는 없습니다. 불교는 모두를 다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덮어놓고 믿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중생의 합리적인 사고(思考)를 그대로 이끌어 갑니다. 우주의 도리(道理)라는 것은 조금도 차질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약 500년 분 아닙니까. 그는 우주는 정확한 수리(數理)로 구성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주는 정확한 수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역(周易)같은 그런 어려운 것도 역시 다 하나의 괘(卦)라는 수리로 풀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악(音樂)을 본다 하더라도 한 옥타브(Octave)는 팔진법에 따라서 화음(和音)이 되어 갑니다. 진동수에 따라서 전파, 광파가 있는 것이고, 음파도 가청 주파수대의 음파가 있고 초음파가 있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몇 사이클인가? 얼마만큼 진동하는가?
그런 정확한 수리로 해서 우주의 현상적인 문제가 규정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고 물리학을 공부한다 하더라도 수학(數學)을 잘 모르면 못하는 것입니다. 우주 물리는 정확한 수리로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불교라는 것은 이와 같이 정확히 우주의 근원을 따지고 캐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 식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식(識)에다 종자(種子)를 심어 놓으면 다시 행동(行動)이 나오고, 행동을 하면 또 다시 종자가 심어지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식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식의 근본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따라서 인연법을 보다 더 깊이 파고들면 이것은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
여래(如來)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여래라는 뜻이나 부처라는 뜻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우주의 도리 그대로, 우주의 도리에서 그대로 왔다. 그래서 여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우주의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식이라는 것은 그냥 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의 본체는 바로 여래입니다. 바로 부처란 뜻입니다.
따라서 끄트머리 가서는 결국은 다 부처까지 가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래장연기라. 이것은 또 진여연기(眞如緣起)라고도 합니다.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도 합니다. 여래(如來)란 뜻이나 진여(眞如)란 뜻이나 법계(法界)란 뜻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여래는 진리 그대로다. 그러므로 여래라고 하는 것이고, 또 진여 이것도 역시 바로 진리다. 진리와 똑같다. 진리와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법계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경계 이것이 법계입니다. 바로 진리의 세계란 말입니다. 이것은 다 똑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좋은 말하고 나쁜 생각하고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마음에다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가사 개나 소나 그런 축생들도 다 나름대로 행동을 하므로 종자를 자기 마음에 심겠지요. 그런 것들의 근원이 무엇인가 파고들면 모두가 다 부처라는 데까지 이른단 말입니다. 따라서 인연법(因緣法)의 가장 시초 기본적인 틀은 본 바탕은 역시 부처 진여불성입니다.
우리 인간이 미처 몰라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지 원인(原因)을 캐고 들어가서 끄트머리에 들어가면 다 부처님한테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그때그때 연(緣)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 지금 현상계라는 것입니다.
내가 금생에 태어난 것이나, 또 살다 죽는 것이나, 사업에 실패하는 것이나, 누구를 좋아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겉만 보면 별것도 아니고 상대적인 걸로 해서 되는 것 같지만 근본 뿌리를 캐 들어간다고 할 때는 다 부처님의 도리란 말입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攝理)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면 우습게 생각하고 미신(迷信)같이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라는 것이 근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하나님의 섭리요 근본 도리입니다. 다 진리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뚝 떼어서 현상적인 세계만 볼 때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렇게 되겠습니다마는 가장 근본적인 도리에서 생각할 때는 부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기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여래장연기 즉, 진여연기 이것은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두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여문에서는 진여, 즉 진리는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실체(實體)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여 진리를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해서 구분해 보는 것입니다. 진여라는 부처님의 실상을 이렇게 저렇게 나눌 수가 없는 문제 아닙니까.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우주의 생명 그 자리의 참다운 면, 이것이 진여문이고, 또 진여문에서 인연 따라 현상계가 이루어지는 생멸문, 나고 죽고 하는 문, 우리가 태어나고 천지 우주가 이루어지고, 일본 고베 같은 지진이 생기고, 이런 것은 모두가 생멸문에서 일어났다가 없어졌다 하는 것입니다. 행복해졌다 불행해졌다 이런 것들이 다 생멸문입니다.
그래서 진여문에서 볼 때는 일미평등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는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한 우주의 한(하나의) 실체라. 즉 말하자면 우주는 부처님 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인연 따라서 나고 죽고하는 생멸문에서 볼 때는 염연(染緣)이라. 별로 좋지 않은 때묻은 인연에 따르면 그때는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것입니다.
육도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아닙니까. 지옥도 가고 인간 세계로도 나고 천상도 가고 이것은 아직 부처 경계가 못되므로 아직은 청정한 인연이 아닌 것입니다.
지옥은 더 오염되고 천상은 덜 오염됐다 하더라도 때묻은 번뇌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천상 역시 욕계(欲界) 천상이나, 색계(色界) 천상이나, 무색계(無色界) 천상이나 아직은 인간보다는 더 낫다 하더라도 역시 때가 번뇌가 다 가신 것이 아닙니다. 번뇌가 남아 있습니다.
가사 우리가 죽을 때 남을 굉장히 미워한 체로 죽어버리면 그것은 틀림없이 싸움 잘하는 아수라 세계로 갓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또 죽는 순간에 독한 마음, 잔인한 마음을 품을 때는 지옥가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금생에 좀 나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죽을 무렵에 좋은 스승 만나서 정말로 본래가 다 부처 아닌가. 원래 번뇌라는 것은 씨앗이 없는 게 아닌가. 번뇌는 근본 자취가 없지 않는가. 이렇게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서 부처님만 오로지 믿고 밀고 나간다고 생각할 때는 평소에 별로 좋지 않은 사람도 그 임종(臨終) 때 좋은 마음 때문에 좋은데 가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경에 보면 십염왕생(十念往生)이라! 평소에 잘 못 살았다 하더라도 죽을 때 좋은 마음으로 열 번만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운다면 그 공덕으로 해서 좋은데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임종때 우리 마음의 자세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임종 공부라. 평상 공부도 필요하지만 임종 공부를 나이 자신 사람들은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나이를 먹었습니다만 나이가 들어 황혼이 되면 참 주의해야 됩니다. 평소에 내가 무던히 양심(良心)대로 살았거니 안심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때까지 고이고이 잘 살아서 꼭 내생에는 좋은데 가서 태어나야 합니다. 본래 성불(成佛)을 깨달아서 바로 극락(極樂)가면 더욱 좋고요.
금생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 과거 전생이 있었으므로 금생이 있는 것이고, 또 금생이 있었으므로 내생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전생이나 내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이 되시겠지요.
그래서 때묻은 좋지 않은 인연, 염연(染緣)을 만나면 그때는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인간이나 천상이나 그런 과보(果報)를 받는 것이고, 청정한 인연 정연(淨緣)을 만나면 그때는 사성(四聖)이라.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불(佛)을 이룬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기르고 친구들과 우정(友情)을 맺고 하는 그런 경우도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저 친구를 지금 좋은 길로 이끌고 있는가? 이렇게 한번씩 자기 반조(返照)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슨 이익 있는 일이나 하고, 당이나 만들어서 나중에 정권이나 잡을 그런 일이나 하고, 그러면 결국 때묻은 인연이기 때문에 자기 친구도 그런쪽으로 엉뚱하게 이끌어 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정치해도 좋고 경제활동해도 좋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나와 남이 성불하는 쪽으로, 나와 남이 동시에 다 좋은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런 뜻으로 돈도 벌면 좋고 정치를 하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와의 우정에도 우리가 때묻은 인연이 될 것이 아니라 맑은 인연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정연(淨緣) 말입니다. 실상은 염정(染淨)이 둘이 아니지만 우리가 의미로 나누어 보면 염연(染緣)과 정연(淨緣)이라.
내외간에 함께 계실 때도 내가 저 사람한테 때묻은 인연이 되는가? 내가 맑은 인연이 되어서 저이가 나 때문에 보다 더 맑아질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생활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육도 가운데는 개나 소나 돼지와 같은 축생계(畜生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귀신(鬼神)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부인을 합니다만 귀신도 존재하기 때문에 절에서 천도(薦度)도 모시고 다 하지 않습니까.
귀신 세계는 스승이 없는 어두운 세계이기 때문에 다른 걸로 해서는 인도(引渡)를 못합니다. 부처님 법으로 비로소 인도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비밀주(秘密呪)로 해서 '그대 이리로 오너라' 하면 올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보소청진언(普召請眞言)이라. 이 진언을 하면 그때는 귀신도 '누구 누구 영가(靈駕)여' 하면 다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이라는 것이 우주의 기본적인, 우주의 근본적인 순수 에너지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참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들도 부처님 힘으로 해서 '그대가 지금 너무 헤매지 말고, 그대가 헤매는 것은 그대한테도 좋지 않고 그대 가족에게도 안 좋으니까 그런 망념을 다 끊어버리고서 극락세계라든가 극락세계에 못 가면 천상이라든가, 천상에 못 가면 인도 환생해서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소서' 이렇게 타이르는 것이 천도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꼭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쁜 쪽으로 가는 것을 항시 주의하고 자기 점검을 잘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누가 불행해지지 않는가? 나 때문에 누가 실패하지 않는가? 그리고 꼭 한 걸음씩이라도 성자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여기 사성(四聖)이란 말씀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자(聖者)도 구분이 있습니다. 완벽한 진리를 깨달은 그런 분은 바로 부처고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은 보살, 보살은 나와 남을 다 더불어서 진리로 이끌어 가는, 자기도 성자가 되고자 최선을 다하고 남도 성자의 길로 인도하는 이가 보살 아니겠습니까.
연각(緣覺) 이것은 다른 사람은 제쳐놓고 자기만 성자가 되려고 애쓰는 그런 분이 연각승입니다. 성문(聲聞)도 역시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충실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은 별로 안보이고 자기 스스로 자기 공부만 주로 하는 그런 성자가 성문승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장연기라. 따라서 인연법은 여기까지 가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인연법이 됩니다. 여기까지 간다고 생각할 때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다 진여라 하는 여래라 하는 진리에서 왔단 말입니다.
요새 무슨 지존파라 하는 나쁜 사람들도 역시 겉모습만 지존파지 그 본성은 똑같이 여래에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도 미워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저 사람은 과거 전생에 나쁜 죄악의 씨앗을 너무 많이 심고, 금생에도 스스로 지은 죄악 때문에 좋은 환경을 만나지 못하고서 참 불쌍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측은히 생각했으면 생각했지 그 사람을 성자들은 미워를 못합니다.
가장 깊은 도리가 여기 있는 여래장연기라. 이 진여연기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생각을 깊이 해보십시오.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그 근본 뿌리를 모르고서 겉에서만 뱅뱅 돌아 버리는 것입니다. 번뇌를 일으키고 또 행동을 하고, 보통은 말도 번뇌에 따라서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고 생각도 그럽니다. 그러면 결국 차근차근 나쁜 번뇌 종자만 더 깊어집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상대성 원리에도 다 있습니다. 이런 것은 현대 물리학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가 부처라는 것은 불법에만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성선설(性善說), 성악설(性惡說)이라.
맹자(孟子)는 성선설, 인간성은 본래 선량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순자(荀子)는 인간성은 본래 나쁜 것이다. 인간성은 나쁜 것이므로 교육을 잘 시켜서 훈도(訓導)를 해야 된다. 맹자는 본래가 선량하므로 선량한 인간성을 때묻지 않게 해야된다.
역시 맹자의 주장이 보다 공자(孔子)의 뜻에 맞고 인간성은 제아무리 나쁜 사람도 겉만 그런 것이지 본래는 선량(善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량하다는 것도 부처님 사상같이 철저하지는 못합니다. 부처님 사상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냥 선량한 정도가 아니라 앞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갖춘 것입니다.
자비도 원만, 지혜도 원만, 능력도 원만, 일체 만공덕(萬功德)을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의 본체(本體)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여래장연기의 인연법 따라서 태어난 것이 또 우리 인간(人間)인 것이고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제바달다'가 부처님을 상해하려고 코끼리에다 독주(毒酒)를 먹여서 부처님 오시는 길에 풀어놓았습니다. 그 독주를 마신 코끼리가 이것저것 앞뒤도 가리지 않고 할퀴고 유린하곤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 가서는 그냥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앞발을 꿇고서 그대로 유순(柔順)하게 변해 버립니다. 그 코끼리한테도 순수한 성품은 다 있습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식물(植物)에도 다 있습니다. 식물도 무생물(無生物)도 모든 일체존재가 근본 성품은 역시 진여불성입니다.
어느 물질이든 에너지가 없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순수 에너지, 에너지 가운데서도 가장 순수 에너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여불성 자리만 온전히 생각할 때는 우리 신앙심(信仰心)은 한결 더 수승하게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가 아프다. 내 몸이 거북하다. 이런 때도 나한테는 만능(萬能)한 진여불성이 내 생명의 본질이 아닌가. 이렇게 한 번 생각한 그걸로 해서 그냥 왠만한 것은 다 풀리는 것입니다. 나는 나고 가까스로 내 몸무게는 얼마고 내 힘은 얼마고 내가 배운 것은 뭐 대학교 나오고 무엇도 좀 하다 말았고, 이렇게 자기 능력을 제한시켜 놓으면 그만 그밖에는 못 나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구나 배웠던 안배웠던 무한한 가능성(可能性)을 갖고 있습니다. 지혜, 자비, 행복이 다 완벽한 것입니다. 불법 말로는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부처님 공덕을 말할 때에 삼명육통은 자연히 거기에 따라갑니다.
삼명육통은 무엇인가 하면 신족통(神足通),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이 육통이고, 그 중에 특히 천안, 숙명, 누진 셋을 삼명이라 합니다.
이렇게 지금 말씀을 하면 같은 불교를 믿는 분들도 신통 그런 것은 외도나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의 기적도 과장시킨 것이지 무슨 기적이랴?
성자들은 우주의 순수 에너지를 쓰는 것입니다. 우주의 순수 에너지는 무한한 힘이 있단 말입니다. 지금 원자력같은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우리가 지금 원자력 가운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원자력보다도 더 무한한 성능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가운데는 무시무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안보이는 광명 파동이 초속 30만 킬로미터입니다. 눈에도 안보이는 그 광입자(光粒子)의 속도가 일초에 30만 킬로미너란 말입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힘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절대로 자기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나쁜 버릇 때문에 과거 전생에 잘 못 살아서 자기 마음을 제한해 왔고, 금생에도 학교에서 배우고, 누구한테 말 듣고, 부모한테 영향받고, 사회에서 나쁘게 배우고, 이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지금 왜소화되었습니다.
불교는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어디로 마음을 여는 것인가? 무한(無限)의 광장(廣場), 무한의 자비, 지혜, 행복, 능력이 갖추어진 광장으로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신앙입니다. 마음 열지 않고 부처님 믿는다면 그건 신앙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서 내 본래 생명(生命)의 고향(故鄕)자리, 거기다가 마음을 둔단 말입니다. 그런다고 생각할 때에 좋아할 사람도 미워할 사람도 아무도 없이 모두가 다 좋은 것뿐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안심(安心)이 됩니다. 이것이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2조 혜가(慧可) 스님이 달마(達磨) 스님한테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마음이 불안(不安)합니다. 제 마음의 불안을 가시게 해 주십시오.'
달마스님 말씀이 '그래, 그대 불안한 마음을 한 번 내 놔 봐라.'
좋은 마음이나 불안한 마음이나 어디 흔적이 있습니까?
그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한 마음에다 자기 스스로 나쁜 버릇만 잔뜩 종자로 심어 놓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것입니다.
원래 마음은 모양이 없는 것인데 자취가 없는 그 마음을 좋다, 궂다 한단 말입니다. 스스로 괴로워한단 말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스스로의 번뇌에 스스로 묶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여연기, 법계연기, 여래장연기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우리가 항시 여기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염불(念佛)을 하는 것도 역시 진여연기, 법계연기라. 우리가 진여의 자리, 연래의 자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모두를 다 부처님 차원에서 영원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본단 말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봐야 바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차원에서 보니까 바로 못 보인단 말입니다. 자기 번뇌로 굴곡(屈曲)시켜 보는 것입니다.
육대연기(六大緣起)
네 번째 가서 육대연기(六大緣起)라. 육대라는 이것은 밀교에 있습니다. 밀교도 요새 무슨 '탄트라'나 그런게 아니고 순수밀교라는 것은 아주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육대란 이것은 땅기운, 물 기운, 불기운, 바람 기운, 또는 텅 빈 공 기운, 마음기운입니다. 그냥 우리 눈에 보이는 땅기운, 물 기운, 불기운, 바람 기운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성품(性品)으로 해서 기운입니다.
진여불성 가운데는 성품으로 해서 무한의 성품이 있지마는 대개 여섯 개의 속성으로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에너지 가운데는 모든 것을 굳게 만드는, 고체를 형성시키는 그런 땅기운도 있고, 모든 것을 윤택하게 만드는 물기운도 있고, 또 산소와 같이 모든 것을 다습게 만드는 불기운도 있고, 또는 모든 운동에너지 즉, 동력인 바람기운도 있고, 그리고 끝도 갓도 없는 텅 빈 모든 존재의 공간성인 공기운도 있는 것이고, 그 모두의 근본이 바로 마음기운 식(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체 존재라는 것은 이와 같이 본래 진여불성이 갖추고 있는 그런 땅기운, 물 기운, 불기운, 바람 기운 또는 빈 기운 또 마음기운 이런 것이 어울리고 어울려서 존재가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육대 역시 진여불성, 여래장 가운데 다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알아야 바르게 보는 것이고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나 내가 지금 당장 교통사고를 만나고 지진을 만나서 선지피를 뚝뚝 흘리고 죽어 가는 그런 마당에도 역시 지금 내 존재가 진여불성에서 잠시간 이렇게 모양을 나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모양을 나툰 존재 이것은 사실은 실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앞서 말씀과 같이 세로로 구성된 허우대뿐인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신진대사해서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정확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한 동안도 고유한 내 존재는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고유한 존재가 없다고 생각할 때에 바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결국 이대로 다 공(空)이란 말입니다. 일 초 전과 일 초 후의 내 세포가 같지를 않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어리석어서 상속되는 찰나를 보지 못하고 이 몸뚱이 이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우리가 엄격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일 초 전과 일 초 후가 같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원리에서 부처님께서 제법(諸法)이 공(空)이다. 모두가 다 비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법이 공이다.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이란 것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우리 불교 하시는 분들은 수 천번 수 만번 하시겠지요. 그래도 그 물질이 공(空)이라는 것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질이 생기면 거기에 얽매여서 허물을 범하고, 누구한테 뇌물(賂物)도 받고, 도 비리(非理)도 저지르고 하는 것입니다.
물질(物質)이라는 것은 고유(固有)한 것이 아닙니다. 시시각각으로 변동해 마지않는 이것은 그야말로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무상이라는 것은 항상(恒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전변무상(轉變無常), 변화무쌍(變化無雙)이라.
모든 물질은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 내 몸뚱이요, 그런 것이 물질이요, 그런 것이 감투요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연 따라서 남들이 양보해서 추대하면 감투를 써도 그때는 무방하겠지요. 감투를 써도 조금도 집착을 말고 인연이 다 되면 선선히 물러나서 용퇴를 한단 말입니다.
이리 되면 사회가 참 편할 것인데 종교인들도 무슨 감투를 써 놓으면 한 곳에만 붙어 가지고 지내려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진여연기란 연기법을 몰라서 그럽니다.
이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살기가 참 편한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손해가 없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장에 죽어 나간다 하더라도 인연 따라서 어차피 죽을 자기 몸뚱이 집착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나투지만 실로 온 것이 아니고 인연 따라서 사라지지만 참으로 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본래 진리 그대로 순수 생명 그대로인 것입니다. 오고 감이 없지 않습니까. 그림자 헛것을 잘 못 보고 생사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람 따라서 물에서 파도가 일어나 바람이 자면 다시 물로 돌아가듯이 이치가 똑같은 것입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진리(眞理)에서 왔다가 다시 진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 고향(故鄕)으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성인(聖人)들은 그렇게 보기 때문에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한단 말입니다.
예수가 죽음을 두려워했습니까. 석가가 두려워했습니까.
순교(殉敎)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멋도 모르고 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겠지만 보통은 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찮은 그런 눈에 보이는, 사실은 있지도 않는 것 때문에, 내 몸뚱이나 물질이나 감투나 사실 이것은 허망한 것인데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 생명을 오염(汚染)시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업감연기(業感緣起)나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은 불교 기본적인 책을 보시면 정확히 아실 수 있습니다.
업감연기 이것은 번뇌(煩惱)라는 혹(惑)을 일으키고 거기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 행동이나 말이나 뜻으로 해서 업(業)을 짓고 그래서 인생고(人生苦)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내야 인생고도 우리가 지어서 받습니다. 과거 전생이나 금생이나 번뇌 때문에 행동을 바르게 못해서 업을 짓고 고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 원망(怨望)할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애매하게 받는다. 내가 무던히 착실하게 살았는데 저 사람이 나를 비방(誹謗)한다. 그생에 안했으면 과거 전생에 자기가 꼭 그렇게 받을 만한 짓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고 적어도 이 인연을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남을 원만해서는 안됩니다.
하물며 더 나아가서 이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 모두가 본래는 다 부처님이 아닌가. 일체존재가 부처님이 아닌가. 부처님한테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모양이 되었다가 다시 부처로 돌아간다. 지옥으로 가고 어디로 간다 하더라도 잠시간 가는 것이지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에 다 부처가 들어 있는 것이고 본래불(本來佛)인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종당에는 몇 만 생을 헤맨다 하더라도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심(安心)하고 살아야 그래야 안심법문(安心法門)이 됩니다.
지금 기본적인 문제를 알아두시면 나중에 제가 새삼스럽게 말씀을 드리지 않더라도 복사되신 것을 보시면 다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남을 위해서 법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자기가 하는 것은 수월한데 듣는 것은 괴로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연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제가 주로 말씀을 하게 됩니다. 불교가 복잡하고 어려운 법문이라고 다들 그렇게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인 것이고 오천권 이상이 되는 불교경전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다 독파할 수는 없습니다.
저같은 사람도 참선(參禪)한다고 애쓰고 불경도 그때그때 봤으나 어떻게 그걸 다 자세히 봤겠습니까. 중점적으로 본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일반 분들은 체계있게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저같은 사람도 20년 좀 넘어서 승려가 되었지만 이래저래 고생고생 하고 한 15년 남짓 지나서 40이 되니까 비로소 좀 갈래가 잡힌단 말입니다.
여기 가서 묻기도 하고, 저기 가서 묻기도 하고, 토굴에서 혼자 지내기도 하고, 고생고생 하고 난 뒤에 조금씩 불경을 봐도 그때야 물리가 익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맨 처음 불교를 공부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어렵게 생각이 되시겠구나 하고 동정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번 법회(法會)도 이와 같이 마련한 것입니다. 사실 경험자들이 간추려서 말씀해버리면 도움이 되시는 분들은 상당히 도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삼신일불(三身一佛)
삼신일불(三身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 삼신일불(三身一佛)
+-여래(如來)
| 진여(眞如)
+- 법신… 청정법신비로자나불 -+ | 법성(法性)
| 法身…淸淨法身毘盧遮那佛 | | 실상(實相)
| | | 보리(菩提)
심(心:Mind) | 보신…원만보신노사나불 | 불(佛:Buddha) | 진아(眞我)
| 報身…圓滿報身盧舍那佛 | | 열반(涅槃)
| | | 극락(極樂)
| 화신…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 | | 주인공(主人公)
+- 化身…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 | 중도(中道)
| 묘각(妙覺)
+-일물(一物)
부처님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를 보다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삼신일불(三身一佛)을 아시면 아주 편리하십니다. 이것은 현교(顯敎)나 밀교(密敎)나 다 삼신일불, 이른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이른바 근본불교(根本佛敎)라든가 또는 보통 공부하는 분들은 삼신(三身)에 대해서 별로 말씀을 많이 안하기 때문에 불교를 하신 분들도 이 삼신일불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을 가지시기가 좀 어려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꼭 이렇게 외워 두셔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삼위일체(三位一體)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신조이듯이 불교도 이 불타론(佛陀論), 부처란 무엇인가? 하는 불타론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연관을 시키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합니다.
법신, 보신, 화신이 삼신입니다. 그런데 부처면 부처님 하면 될텐데 왜 이와 같이 부처를 나누고서 법신, 보신, 화신 삼신으로 구분해서 더 복잡하지 않는가? 그러나 부처란 공덕(功德)이 하도 무량무변(無量無邊)하기 때문입니다.
이 중생계(衆生界)하 하는 것은 지금 현재는 사람도 있고 태양계도 있고 지구도 있습니다마는 몇 100억년이 지나면 파괴되어서 텅텅 비어버리고 그때는 에너지만 남습니다.
그런 때는 부처는 하나 뿐이다 해도 무방하겠지만 지금 현재와 같이 산도 있고 내도있고 지구도 있고 사라도 있고 이런 때는 변화된 그런 여러 모양이 있기 때문에 변화된 모양도 거기에 포함해서 말씀을 하셔야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겠지요.
그래서 법신(法身) 이것은 바로 우주의 순수한 생명 그 자체의 그런 면을 법신 그럽니다. 그리고 불교의 말로 해서 이것을 더 구체화시키면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조금도 때가 묻지 않은 청정한 몸인 비로자나불을 가리킵니다.
'비로자나(Vairocana)' 이 말은 인도 말인데 우리말로 풀이하면 광명변조(光明遍照)라. 생명(生命)의 광명(光明)이 우주(宇宙)에 두루 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말로 하면 청정(淸淨)하고 무량(無量)의 공덕(功德)을 갖춘 그런 광명의 몸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말로 달리 하면 대일여래(大日如來)라. 큰 대(大)자, 날 일(日)자입니다. 대일여래라는 것은 보통 태양과 같은 광명이 아니라 무장무애(無障無?)하게 우주를 다 비추고 우주에 가득찬 광명이란 의미로 대일여래라 합니다.
그래서 법신이란 뜻이나 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란 뜻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와 같이 청정하니 우주에 광명으로 두루 빛나기만 하면 그때는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겠지요.
그러나 이 법신 우주에 가득찬 청정광명(淸淨光明) 가운데는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어떠한 것이나 원만하게 다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한테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능력이 원만하게 갖추고 있는 그 자리, 그 자리르 보신(報身) 그럽니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 모든 공덕(功德)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는 부처란 뜻입니다.
따라서 법신과 보신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법신이라 하는 그 우주에 충만해 있는 우주에 두루한 그런 광명 가운데 들어 있는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모든 그 성품 공덕이 보신입니다.
그리고 화신 이것은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 현상계(現象界), 태양계나 은하계나 또 산이나 지구나 우리 인간이나 모든 현상계가 이것이 화신(化身)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도 화신이고 너도 화신이고 자연도 화신이고 두두물물 다 화신입니다. 그런데 화신 견지에서는 하도 수가 많단 말입니다. 사람 수도 많지만 여러 가지 그런 갈래의 중생들이 많습니다. 생각이 없는 중생(無情衆生), 생각이 있는 중생(有情衆生), 눈에 보이지 않는 중생(無色衆生), 이런 중생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그런 차원에서 화신 그럽니다.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므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석가모니불 할 때는 좁은 의미로 인도에서 왕자(王子)로 태어나 출가해서 도를 성취한 그리고 부처가 되신 분이 석가모니불인 것이고, 광범위하게 대승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나, 너나, 천지 우주의 현상계가 모두가 다 석가모니불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지루하고 재미도 없고 그럽니다.
불교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만 염(念)하면 누구나 성불(成佛)한다. 그래 버리면 참 쉽기도 하고 누구나 할만 하겠지요.
그런데 현대(現代)를 살기가 참 어려운 때 아닙니까? 과학(科學)도 접촉해야 하고, 기독교인도 접촉해야 하고, 유교인, 도교인 우리가 모두 접촉해야 되는데 그런 가운데서 화해하고 살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것도 바르게 알고 다른 것도 바르게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피차가 다 순수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통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기본적인 것은 꼭 알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제 생활의 지침이 됩니다. 여러분들 자녀분들은 앞으로 다 대학 나오고 박사 되고 모두 다 그럴 것인데 그런 분들은 제법 무엇을 압니다. 그네들을 설득시키려고 할 때는 우리가 좀 더 알아야 합니다.
이 법신, 보신, 화신은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끝도 없이 우주를 다 포섭해 있는 그런 쪽으로 보아서는 법신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들어 있는 모든 자비 지혜 공덕 능력 행복 이것은 보신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자리에는 행복도 다 충만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처님 자리에는 자비나 지혜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행복이사 우리가 만들어서 행복스럽게 사는, 이런 좋은 사람 만나고, 무엇이 많이 생기고, 그래야 행복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참다운 행복은 우주가 나가 되고 내가 우주가 되어서 어느 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때 그런 때같이 행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 행복이 이 보신 부처님 가운데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자비도 사랑도 한도 끝도 없고, 지혜도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를 깨달은 분들이 예수나 공자, 석가 아닙니까. 이런 분들의 사랑이나 자비는 한계가 없습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 부모를 죽인다 하더라도 원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 원수같은 모양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 우주에 가득한 생명의 광명이 바로 법신불(法身佛)인가 하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자비나 행복이나 지혜나 능력이나 이것이 보신불(報身佛)이고, 이 법신과 보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현상계 모두가 화신불(化身佛)입니다.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지금 끝도 갓도 없는 바다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끝도 갓도 없는 바다 자체는 법신불에 해당하고, 바다에 가득 차 있는 물 그것은 보신에 해당하고, 그 바다 물에서 바람 따라 일어나는 크고 작은 그 많은 거품이나 파도는 화신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세존 부처님께서도 이런 비유를 많이 쓰셨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신 이것은 그야말로 끝도 갓도없는 무량무변의 바다에 비유하고, 보신은 바닷물에 비유할 수가 있고, 화신은 바닷물에서 바람 따라 일어나는 천파만파, 천백억개 그런 거품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또 하나의 태양에 비유할 때는 태양 전체는 법신불에 해당하고, 태양 광명은 보신불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이런 비유도 부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법신불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라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고 또는 아미타불로 배대해서 의미할 때는 아미타(阿彌陀)의 타(陀)에 해당합니다.
법신이라는 것은 어디에 구간 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 적으로 우주에 충만한 순수한 생명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만보신 노사나불, 이것은 바로 그 한도 끝도 없는 법신에 들어 있는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하나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때는 성(性)이라 하고, 즉 하나의 성품(性品)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우주에 들어 있는 하나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미타(阿彌陀)의 미(彌)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은 우주의 모든 현상, 나나 너나 일체존재 현상계 이것은 상이기 때문에 이제 공성상(空性相)의 상(相)에 대비합니다. 그와 동시에 아미타불에 붙이면 그때는 아(阿)에 해당합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것은 밀교적인, 참다운 대승의 뜻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법신과 보신과 화신을 다 합한, 즉 말하자면 삼신일불(三身一佛) 하나의 부처님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입으로 쉽게 외우시는 아미타불 이것이 사실은 이와같이 우주 모두를 다 포함해 있는 우주의 생명 자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통 염하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무엇인가? 무슨 보살 무슨 보살 그 굉장히 많이 있어서 부처님 이름도 하나만 있으면 좋은 것인데 하도 많으므로 우리가 곤란스럽습니다. 그리고 어떤 스님들한테 물어 보면 부처님도 이름따라 따로따로 있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버리면 더욱 혼란스럽겠지요.
부처님은 하나의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이 부처, 저 부처가 뿔뿔히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은 하나의 공간성(空間性)이 있는 물질이 되겠지요. 그러나 시공(時空)을 떠나버린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이 부처, 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부처님 이름도 약사여래(藥師如來) 부처님!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부처님! 그렇게 이름들이 많이 있지마는 그것이 따로따로 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하도 많지만 간단히 세 차원으로 나누면 이와같이 법신, 보신, 화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 차원에 다 못들어 갈 때는 약으로 해서 우리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면에서는 약사여래, 도 하늘에 있는 별만을 의미할 대는 치성광여래, 이와 같이 이름이 붙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실은 부처님은 하나입니다. 무량무변의 끝도 갓도 없는 생명이 어디 가서 몸이 있고 작고 크고 넓고 좁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지장보살(地藏菩薩)도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하나의 순수 생명 자리입니다.
중생 영혼(靈魂)은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영혼을 다스려서 인도하는 그러한 의미에서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자비로 우리 중생을 제도하시는 부처님을 볼 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 지혜로 우리 중생을 제도하는 면에서 볼 때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시든지 평소에 관세음보살을 많이 외우셔서 관세음보살 하시기가 좋으신 분들은 관세음보살을 외이신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마음만은 이와같이 삼신일불이라. 부처님은 바로 우주를 통괄해 있구나 생각하십시오.
마음을 열어야 됩니다. 불교는 마음을 여는 공부입니다. 불자님들 어려우시더라도 이 부처님 공부는 마음을 여는 공부입니다.
여기 계시는 어른들께서는 그야말로 일기당천(一騎當千)이라. 모두 한 분이 천분이나 만분이나 제도(濟度)하실 분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꼭 필요하다고 되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앞서 삼신이 바로 부처인데, 그것은 또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부처를 생각하실 때는 꼭 항시 '마음'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가운데 들어 있는 법신, 보신, 화신 그런 공덕이나, 내 마음 가운데 있는 공덕, 지금 더러는 남도 미워하고, 못난 짓도 하고, 그런 마음 가운데 들어 있는 법신, 보신, 화신이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불교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각(自覺)입니다. 스스로 본래 부처임을 깨달아야 참다운 신앙인이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겉 신앙밖에는 못됩니다. 참 신앙이 돼야 자기를 구제하고 남한테도 구제의 소임을 다 할 수가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마음의 본래 자리가 바로 법신(法身) 부처님이고, 내 마음 가운데 들어 있는 자비나 사랑이나 지혜나 행복이 보신(報身)인 것이고, 또 내 마음의 공덕으로 이루어지는 우주만유(宇宙萬有)가 바로 화신(化身)입니다.
나와 우주는 절대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인 문제를 꼭 확실하게 느끼셔야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진리를 생각할 때는 항시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봐야 됩니다.
다른 종교와 불교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다른 종교는 뿔뿔히 봅니다. 나와 남이 둘로 있고, 도는 다른 나라와 우리 나라가 따로 있고, 자연과 인간과 다르고 하지만 불교의 기본적인 대승사상 이것은 절대적으로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지금 현상계 겉만 보기 때문에 나와 남이 둘이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도 우리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대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지금 자연보호(自然保護) 운동을 굉장히 맹렬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연보존이라 자연정화라 모두 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큰소리 치고 제아무리 그런 캠페인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자연과 나와 뿔뿔이다.' '자연은 자연이고 나는 나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온전한 운동이 못됩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과 같이 자연과 나는 혼연히 하나의 생명이다. 이래야 자연이 온전합니다.
다만 일반 중생들은 겉으로 보고 성인들은 안으로, 속으로, 본질로 봅니다. 우리는 본 바탕에서 볼 것인가 또 피상적으로 겉만 볼 것인가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성인과 일반 중생은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성인들은 근본 바탕에서 보는 것이고 일반 중생들은 겉으로 봅니다.
그리고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우리 마음을 성자 마음과 같이 여는 것입니다. 성자 마음은 우주를 곧대로 그대로 봅니다. 자연의 도리 그대로 보는 것이 성자의 마음입니다.
공자나 석가나 예수나 다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시대에 따라서 그때그때 표현의 방편은 다르게 했다 하더라도 그분들이 보신 것은 다 줄거리는 똑같습니다.
그것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분들 차원에서는 나와 남이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자(聖者)들은 항시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입니다. 내가 따로 없고 도 내 것이라고 고집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분들은 자기 소유가 없습니다.
석가의 평생을 보시고 공자나 예수의 평생을 보십시오. 자기 앞으로 무슨 소유를 남겼습니까. 우리 세간 사람들이 그렇게 다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을 우리가 표준으로 해야 합니다. 어느 땐가는 우리도 꼭 성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라는 것은 종당(終當)에는 다 파괴(破壞)가 되는 것입니다. 150억년 이상이 되면, 현대 물리학도 증명을 다 합니다. 파괴가 된다고 합니다. 그때는 자기 몸뚱이나 남의 몸뚱이나 어디가 남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생명은 비단 인간 생명분만 아니라 소나 돼지나 또는 개나 그러한 축생(畜生)도 한 생명입니다. 근본 자리에서는 그런 축생도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무생물(無生物)이나 생물(生物)도 근본 순수 에너지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따라서 지금 눈앞에 있는 고양이 한 마리나 개 한 마리나 또는 곤충이나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진화(進化)가 되어서 종당에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사람보다 더 진화돼서 천상(天上)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에 보면 다 나와 잇습니다. 천지 우주가 몇 100억년 뒤에 파괴될 때에 우리 인간 존재나 중생들은 다 높은 천상에 올라가서 우주의 이 형체가 파괴되어도 그 비참한 꼴을 우리가 당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바이블을 잘 못 해석한 사람들은 중생을 태운 체로, 믿는 자기들만 휴거로 해서 구제해 올라가고 다른 사람들은 심판(審判)을 받는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성인의 우주관(宇宙觀)은 중생들이 닦으면 우리 사람보다 못한 중생들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우리 사람도 보다 금생(今生)에 선량(善良)한 행동을 많이 해서 천상으로 올라가고, 그렇게 해서 모든 생명체가 순수한 천상에 올라갔을 때 우주가 파괴된단 말입니다. 우주가 파괴되는 참화(慘禍)를 우리가 입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 부처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또 잘 이해를 못하신 분들은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욕심도 많고 남들을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고 내 마음 내가 돌아보아도 하찮은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부처일 것인가? 하찮은 이것은 자기 겉에 뜬 그림자같은 허망한 마음입니다.
우리 본심(本心) 양지(良知)라. 우리 본심 이것은 석가모니와 공자와 예수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우주를 사무쳐 보고 우주와 한 생명인 그 마음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어떤 종교나 우리 마음을 성자의 마음같이 활짝 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차원에서 볼 때는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 가운데는 끝도 갓도 없는 자리가 법신인 것이고,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자비, 지혜, 행복, 능력이 원만한 그 자리가 바로 보신인 것이고, 이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현상계, 내 몸둥이나 당신 몸뚱이나 일체 존재 이것은 화신입니다.
이것을 다 합한 것이 결국 내 마음의 본체(本體)이고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또 다르게 말씀을 하면, 불교에 나와 있는 술어로 한도 끝도 없으나 우선 중요한 것만 다 발취했습니다.
우선 '진여(眞如)'. 바로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진여라, 또는 여래라, 진리라, 단지 진니라 하는 이치가 아니라,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입니다. 바로 여래란 말입니다. 바로 생명입니다.
우주는 모두가 다 생명 덩어리입니다. 다이아몬드나 금(金)이 다만 다이아몬드나 금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 덩어리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증명합니다. 다이아몬드도 내내야 탄소(炭素)가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탄소는 무엇인가? 탄소는 원자 핵(核)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가 적당히 거기에 알맞게 돈단 말입니다.
원자핵은 무엇인가? 또 전자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현대 물리학은 측정(測定)을 못합니다. 왜 측정을 못하는가 하면 부단히 변화무상(變化無常)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위치(位置)를 알려고 하면 속도(速度)를 모르는 것이고, 진동(振動)하는 속도를 알려고 하면 위치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이젠베르그(Wernen K.Heigenberg)의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원리(原理)라. 물질도 저 끄트머리 가서는 결국은 확실히 알 수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자는 물질이라는 것은 본래 진동하는 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여서 하나의 모양만 낸 것이지 본래는 에너지(Energy)뿐이다.
그러기에 에너지가 바로 물질이고 물질이 바로 에너지란 그런 말씀이 여실히 현대 물리학의 결론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결론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 바로 본래에서는 에너지뿐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교식으로 말하면 색즉공(色卽空)입니다. 공즉색(空卽色)입니다. 우리 중생의 그 제한된 탐욕심(貪慾心)이나 분노하는 마음(貪心)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痴心)이나 그런 독스러운 마음 그런 흐리멍텅한 마음에 가려서 우리 중생은 지금 겉밖에는 못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의 밝은 눈으로 볼 때는 천지 우주의 겉, 이것은 움직여 가는 하나의 과정(過程)에 불과한 가상(假相)에 불과한 것이고, 그 본 바탕은 모두가 다 순수한 에너지고 생명이고 바로 부처로 봅니다.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이 우리가 지금 사는 세계 좋다고 싸우고, 궂다고 싸우고, 서로 아귀다툼 하는 사회, 이 사회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다. 이것은 지금 현대 물리학이 증명을 합니다.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모든 것은 결국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이고 또는 법성(法性), 우주의 성품(性品)입니다. 내 마음이나 부처나 이것은 바로 우주의 성품입니다.
또 중도(中道)라. 조금도 치우침이 없습니다. 중도는 우리가 공부해 가지고서 뒤에 중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이 바로 중도입니다. 어디에 치우침이 없습니다. 자비나 지혜나 사랑이나 행복이나 다 원만히 갖추고있단 말입니다.
물질에 치우침도 없고, 또 정신(精神)에 치우침도 없고, 모두가 다 마음뿐인데 물질은 우리 마음이 잠시간 모양을, 가상을 나툰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자취가 없으며 잡을 수도 없습니다. 물질과 정신은 본래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금강경을 보실 적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 인간이 보는 나라는 상(我相), 너라는 상(人相), 중생이라는 상(衆生相), 수명이 길다, 짧다 하는 상(壽者相)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같단 말입니다.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일반 사람들은 불교를 단순히 중생들이 보는 차원에서만 해석을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보통 성경은 쉽다고 생각을 하겠지요. 그러나 그 당시에 예수님은 어렵게 말씀을 해서는 누가 못 알아먹습니다. '갈릴리' 해안에서 어부나 그런 사람들이 알아 먹겠습니까? '베드로'나 '요한' 그 사람들이 어부(漁夫)인데, 따라서 소박하게 말씀하신 것이지 예수의 뜻도 똑같이 우리가 느끼는 감투나 식욕(食慾)이나 이성욕(異性慾)이나 모두가 다 허망(虛妄)하다는 것입니다.
허망하다고 느껴도 우리가 참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허망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는 그것만 가지고 싸운단 말입니다. 감투 가지고 싸우는 추태가 지금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종교를 공부하는 것은 당장에 성인은 못된다 하더라도 성인들이 말씀하신 것은 다 옳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들 말씀은 다 옳으니까 말입니다. 그분들 말씀은 다 우주의 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옳은 것입니다. 다소 약간의 차이 있게 말씀하신 것은 그 시대 상황 따라서 도는 교화(敎化) 중생의 근기(根氣)에 맞추어서 말씀했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그 분들 본래 뜻은 다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경을 보나 논어를 읽으나 바이블을 보나 칸트의 철학서를 보나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금생에 나와서 쥐꼬리만큼 배운 것, 학교에서 배우고 어디서 배우고 그런 선입관념(先入觀念)을 배제하고서 허심탄회하게 생각할 때는 다 같아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살 때입니다. 그래야 화해(和解)가 됩니다. 여러분들 이슬람의 알제리에서 극렬주의자(極烈主義者)들을 보십시오. 프랑스의 비행기를 납치해 가지고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자기들도 죽고 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이슬람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마호멧의 뜻이 거기에가 있지도 않은 것인데, 마호멧도 위대한 성자입니다. 따라서 그의 가르침도 근본 뜻은 기독교와 똑같습니다.
다만 그때그때 시대 상황에 따라서 약간씩 표현을 달리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이블을 보나 불경을 보나 가장 핵심을 보아야 합니다.
소승을 봐서는 다른 가르침하고 자꾸만 충돌이 됩니다. 대승을 봐야만 불교도 하나가 되고 다른 종교하고도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실상(實相)'이라. 부처라는 것은 바로 우주의 참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가상만 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세간적인, 성인이 아닌 한에는 모두 가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먼저 자기 무지(無知)를 알아라. 우리 범부는 자기 무지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아, 내가 무던히 공부했는데 내가 무엇을 좀 봤는데 꼭 자기 아는 것을 고집(固執)을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들대로 고집하기 때문에 서로 피차 다투게 되겠지요.
우리 중생들은 지금 가상(假相)을 봅니다.
우리 중생들 자신이 성자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판단(判斷)할 것인가? 나한테 '나'라는 관념(觀念)이 있고, 욕심(慾心)이 있고 또 기분 사나울 때 불룩거리고 하면 성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 만유가 무엇인가?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과거는 무엇인가? 이것을 모를 때는 성인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인이 아닐 때는 항시 겸허(謙虛)해야 합니다. 이른바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먼저 자기 무지를 알아라. 자기 부족(不足)을 먼저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참다운 지혜(智慧)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실상이라. 우주의 참다운 모습이란 말입니다.
또는 보리(菩提)라! 참다운 지혜입니다. 보리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라.
도는 진아(眞我)라. 참 나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중생들의 나는 망아(妄我)라. 망령될 망(妄), 나 아(我)자 망아라 합니다. 우리 범부의 나는 올바른 나가 못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나올 때 가지고 온 자기 업장(業障)에다 금생에 나와서 쥐고리만큼 배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처를 성취한 성자의 나는 그때는 참다운 나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되고 석가가 되고 공자가 되고 그래야 이제 비로소 진아(眞我)란 말을 붙입니다.
'열반(涅槃)'이라. 영원히 행복스럽단 말입니다. 번뇌(煩惱)가 조금도 없이 우리 생명도 몸뚱이사 천 번 만 번 바꿔진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 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 남편이 죽고 아내가 죽고 아들이 죽고 한다고 생각할 대는 누구나 다 슬퍼서 자기를 지탱하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생명이 자기 몸뚱이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십자가(十字架)에서 조금도 아낌없이 한 점의 회한(悔恨)도 없이 자기 몸을 바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자기 생명이 자기 몸뚱이에만 있지를 않단 말입니다. 우리 생명자체는 원래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생(前生)에도 나라는 생명이 있었고, 또 내생(來生)에 죽은 다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는 과거에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쓰는 이 몸뚱이는 과거에 있었던 것도 아니라 금생에 부모님의 연(緣) 따라서 잠시간 나와서 이와 같은 몸이 된 것입니다.
죽은 뒤에는 금덩어리보다 더 귀한 내 몸이 그대로 있을 것인가? 화장(火葬)하면 재가 되고 묻으면 썩어서 없어지지 않습니까. 죽은 다음에는 이 몸뚱이 어디에도 흔적도 없단 말입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금생만 잠시간 부지하는데 금생마져도 잠시간 동안도 그 풍재(風災)라, 화재(火災)라, 지진(地震)이라 얼마나 고난(苦難)이 많습니까?
남한테 배신당하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으로 인생개고(人生皆苦)라. 결국은 따지고 보면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고생의 물결 위에서 우리가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반(涅槃)이라. 비로소 작은 나, 망령된 나를 떠나버려야 참다운 나가 돼서 영생(永生)으로 행복한, 몸뚱이야 교통사고를 만나서 죽으나 어떻게 되든지 우리는 항시 행복스럽단 말입니다.
이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 살아야 바로 안심법문입니다.
'극락(極樂)'이라. 다시 위없는 행복이란 말입니다. 극락은 저 극락세계가 어디에 별도로 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현상적인 눈에 보이는 그런 물질 세계를 떠나서 참다운 정신세계,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는 바꿔서 말씀드리면 성자가 되었을 때는 바로 그때는 어디나 다 극락입니다.
'주인공(主人公)'이라.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주인공입니다.
민주주의도 참다운 주인공 자리를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망령된 알듯말듯한 사람들이 주인이 될 때는 자기도 혼란스럽고 남한테도 혼란을 일으키기만 합니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성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해야 참다운 민주주의가 됩니다.
'묘각(妙覺)'이라. 다시 위없는 깨달음이란 말입니다. 그냥 알듯말듯한 깨달음이 아니라 다시 위없는, 불교말로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多羅三必三菩提)라. 이른바 그야말로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위없는 가장 평등하고 궁극적인, 보편적인 가르침이 바로 묘각이고 부처님 지혜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부처고 우리 마음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마음인데 우리가 짧은, 한 80년도 못 사는 인생 가운데서 이렇게 훌륭한 마음을 개발하는 일은 뒤로 제쳐 버리고서 그 엉뚱한 것 때문에, 감투를 제아무리 높이 써봐도 그것은 별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요새 그 일본의 고베 지진을 보십시오. 참화를 당한 3000여명 가운데는 위대한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부자도 많이 있고, 학자도 많이 있고, 그런 참화가 그 사람들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도 언제 올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정말로 다른 허드레 것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저는 그 기독교 예수님 말씀 가운데서 굉장히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가 자기 제자들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제도하려 나아갈 때입니다. 그때 제자 한 사람이 예수께 '주여 저는 지금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님 장래를 모시고 주를 따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말씀이 '죽은 자는 죽은 자 스스로 장례케 하고 그대는 나를 따르라.' 성자가 되는 길이라는 것은 자기 아버지 장래를 모실 그런 시간 여유도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급한 것입니다. 당장에 하늘이 무너져 벼락치고 지진이 일어나고 땅이 무너지면 그때는 경각에 오늘 목숨이 내일 갈지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금방 몇 시간 뒤에 목숨이 어긋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가 못되고서 부처의 길을 모르고 죽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 때는 죽어서는 금생에 닦은 대로 갑니다. 욕심 많으면 욕심 많은 대로 아귀(餓鬼)로 가는 것이고, 아귀 귀신(鬼神)이 되는 것이고, 성내기를 좋아한 그런 사람들은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阿修羅)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또는 사리 분별을 잘못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돼지나 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대는 보통 상식적으로 말할 때는 돼지나 개는 씨가 따로 있지 않는가? 우리 불교에서는 그렇게 안봅니다. 삼계윤회(三界輪廻)라, 자기가 지은대로 돼지가 되고 개가되고 소가 되고 사람되고 천상가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나쁘게 배우고 잘 못 살고, 잘못된 버릇 때문에 돼지가 되고 소가 되고 나쁜 사람되고 하는 것입니다.
앞서 삼신일불, 법신, 보신, 화신, 삼신일불 이것은 불교의 대승 경전에는 그때그때 많이 있습니다. 특히 밀교에는 더욱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삼신일불의 체계는 어디서 인용을 했는가 하면은 용수보살(龍樹菩薩), 용수보살은 제 2의 석가(釋迦)라 하는 분입니다. 대승불교는 주로 용수보살 때 추천되었습니다. 용수보살이 낸 책 가운데서 보리심론(菩提心論)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리심론 책 가운데서, 그 당시에 인도 사회에서 용수보살은 석가가 돌아가신 약 250년 뒤에 나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보다는 한 300년 앞서 나오신 분이지요.
그런데 용수보살이 낸 보리심론이라는 책은 그 당시 왕자나 대신들, 학자들, 그 당시의 최고 엘리트 그들한테 설한 수도법문(修道法門)입니다.
여러분들께 지금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그 가운데 보면 앞서 말씀드린 체계도 있습니다. 보리방편문의 맨 허두에 마음 심(心)자가 있지요. 그 다음 것은 한글로 쉽게 풀이한 것입니다.
그 뒤에는 앞서 말씀드린 삼신일불 아미타불 체계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 대의(大義)는 무엇인가 하면 한 말씀으로 말씀드리면 바로 우리 마음이나 또는 우주만유의 모든 것의 근본 성품이 부처다. 그 부처의 대명사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그런 뜻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니까.
이것은 용수보살의 보리심론에 있는 것인데 그 당시에 가장 최고 엘리트한테 하신 수도법문입니다. 그 개요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이나 산이나 냇이나 태양이나 일체 존재의 근본 성품이 부처고, 그 부처의 대명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모든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이름이 많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부처한테 들어 있는 공덕이 하도 많기 때문에 일일이 개념적으로 표현을 못해서 그 공덕 따가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지혜(智慧)로운 면으로 해서 문수보살(文殊菩薩), 자비(慈悲)로운 면으로 해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우리 중생의 영혼(靈魂)을 다스리는 면으로 해서 지장보살(地藏菩薩) 그러는 것이지 이 부처, 저 부처가 뿔뿔이 있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삼신일불(三身一佛), 법보화(法報化) 삼신(三身)이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이것은 불교 사상 가운데서 핵심적인 사상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 삼위일체(三位一體)…크리스트교의 정통신조
┌ 성부(聖父 : Holy father) … 하느님 ┐
천주(天主:God)│ 성신(聖神:Holy Spirit) … 성령(聖靈) │조물주(造物主:Creator)
└ 성자(聖子 : Holy Son)… 예수(Christ) ┘
그런가 하면 지금 세계적으로 18억 인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핵심은 삼위일체(三位一體)입니다.
불교는 한 10억쯤 믿고 있는데 기독교는 18억쯤 믿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10억쯤 믿고 있는 불교인하고 18억 믿고 있는 기독교인하고 또 10억이 훨씬 못되는 이슬람하고 그 세 종교가 서로 옥신각신 싸운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 보스니아나 체챈이나 그런데는 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사움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생각을 할 때에 우리 인간은 참 그야말로 겉잡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비극입니다. 이 종교의 싸움은 문화 문명의 싸움입니다.
기계나 전자로 만든 무기 싸움이 아니라 앞으로는 문명의 싸움입니다.
어느 종교가 가장 위대한가? 가장 위대한 정보가 내내야 종교와 철학이 아닙니까. 세계를 주름잡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싫든 좋든간에 세계 삼대 종교의 핵심을 알아서 공통점(共通點)을 알아야지 그렇지 못하고서는 자기 마음도 편치 못하고 자기 가정도 잘못 다스리고 아들이나 딸들이 기독교 믿고 무슨교 믿고 할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설득을 시키겠습니까. 억지로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냥 도망치고 말겠지요.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과 딸들이 참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배우기는 많이 배웠지만 무엇인가 갈피를 잘 못 잡고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네 어른들이 정말로 세계 삼대 종교의 핵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싫든 좋든 간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싸움판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이것은 예수가 애초에 만든 것이 아니고, 앞서 말한 삼신일불(三身一佛)도 부처님께서 초기에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차근차근 우리 중생들의 지혜가 발달되니까 중생들의 혼란스런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하나의 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서기 325년 제 1 회 니케아(Nicaeca)회의 및 제 1 회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채택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 및 '아타나슈스 신조'에 의하여 기독교 핵심 교리로 확립되었습니다. 기독교 주교라든가 또는 신부나 학자들이 모여서 혼란스러운 기독교 학설을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서 니케아 공의회라면 유명합니다. 기독교는 가끔 이와같이 교리가 혼란스러울 때 공의회를 엽니다. 공의회에서 비로소 삼위일체를 책정했습니다.
그것은 성부(聖父), 성신(聖神), 성자(聖子)로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하나다. 이른바 성부, 성신, 성자 삼위가 한 몸이란 말입니다.
지금 이 삼위일체 설을 가장 역설하는 데가 몰몬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나 석가나 부처님이나 본래 둘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겉만 보고 삽니다. 겉으로 볼 때는 나는 나요 너는 너요 석가모니는 석가모니고 부처는 부처요 그러겠지요. 그러나 근본 성품, 본질적으로 볼 때는 다 하나란 말입니다.
그렇듯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성부 즉, 우주를 다스리고 섭리하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 가운데 들어있는, 우주 가운데 들어 있는 이른바 성령(聖靈)이 성신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생명이 하느님입니다.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신비로운 모든 것을 다 갖춘, 무소불능(無所不能)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어디에나 있고 능하지 않음이 없는 만공덕(萬功德)이 성령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성부와 성신에 붙어서 오염되지 않은 사람, 즉 성자가 예수란 말입니다.
예수님도 요단강 하단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禁食祈禱)를 모시고 마구니와 싸워서 비로소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과거 전생에 좋은 일 많이 해서 업장이 가벼웠다 하더라도 하나의 범부였습니다.
석가모니께서도 6년 고행(苦行) 끝에 마지막 보리수(菩提樹) 밑에서 팔만 마구니와 싸워 대각(大覺)을 성취하고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란 말입니다. 대각을 성취한 부처님입니다.
그렇듯이 예수 역시 범부 중생인데 요단강 하단에서 모든 번뇌를 다 조복(調伏)받고 깨달아서 천지 우주의 도리와 하나가 됐습니다. 참다운 신성한 우주의 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명실공히 석가모니(釋迦牟尼), 달마(達磨), 서산대사(西山大師)와 같은 성인들은 다 부처입?. 우리 중생도 욕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어리석은 이 모양 이대로는 부처라고는 감히 할 수가 없으니 본래에서 볼 때는 이 못난 이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못나고 못생기고 더러는 남한테 사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용수보살같은 제 2의 석가(釋迦)란 분도 출가하기 전 궁중에 들어가서 궁녀를 희롱하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간신히 역사(力士)들의 칼날을 피해 살아났습니다. 그 때 반성하기를 욕심이라는 것이 이렇게 나를 망치는구나! 다른 사람들은 다 잡혀 맞아 죽었단 말입니다. 이렇게 발심해서 출가하여 제 2의 석가라 할 정도로 위대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다라서 우리가 과거를 더듬어 보면 어느 누구나 다 심란한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한 50년 가까이 중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자의로 반성할 때 과거에 조금 더 부지런하고 순수했으면 하는 그런 한심스러운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 모양 이대로 자신을 생각할 때는 한심스럽지만 부처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이 하느님 아들이고 또 화신 부처님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중에 또 배우게 됩니다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천지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물질로 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에너지, 순수한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 몸이 물질이고 내가 지금 끼고 있는 반지도 물질이고 이 펜도 물질이고 한데 왜 물질이 아닐 것인가? 내 몸이나 내 패물이나 내 연필이나 이런 것도 다 원자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원자로 안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원자는 무엇인가? 원자 이것은 중성자(中性子), 양자(陽子), 전자(電子) 또는 중간자(中間子) 그런 하나의 소립자(素粒子)로 되어 있습니다. 소립자 그것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현대 물리학에서 모든 물질 구성의 가장 작은 알갱이가 양자, 중성자, 전자 아닙니까? 이제 전기 에너지가 있으므로 전등이 빛을 내겠지요. 그런데 전자나 중성자나 양성자나 그런 차원에서는 측정을 못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측정을 못합니다. 왜 측정을 못하는가 하면 일정한 공간성(空間性)이 없단 말입니다.
전자는 정밀한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모양이 안 보입니다. 움직이는 것만 보이지 일정한 모양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라. 일체 물질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이라. 절대시간, 절대공간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시간성, 공간성을 갖고 있는 것을 우리는 물질이라 하므로 절대물질은 없다고 보아야 옳겠지요.
상대성 이론에서만 보면 물질은 상대적으로는 존재하고 절대적으로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 차원에서 보면 상대적으로도 물질은 찰나 찰나 천류(遷流)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존재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현대 물리학은 물질의 근원에 들어가 물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에너지만 빙빙 돌아서 어떻게 진동하는가? 진동의 특성 여하에 따라서 전자라, 양자라 하는 것이지 일정한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부단히 변화해 간단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산소(酸素), 수소(水素), 탄소(炭素)가 되곤 합니다. 또 그것들이 모여서 다이아몬드가 되고 사람 몸뚱이가 됩니다. 산소, 수소, 탄소 그것들이 적당히 모여서 세포(細胞)를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일체 물질을 구성한 근본 알맹이가 항시 움직이고 있어놔서 무엇인가 모르는데 그런 것들이 또 모여서 된 우리 몸뚱이 이것도 일정한 실체(實體)가 없는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것이라고 볼 수도 없단 말입니다.
내 몸 가운데는 지금 세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포가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화무쌍(變化無雙)합니다. 신진대사(新陳代謝)에 지나지 않는 세포들의 집합체를 지금 나라고 합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니까 내 몸 이렇게 잘나게, 못나게도 보이고 그럴는지 모르겠지만 성자가 볼 때는 본 바탕을 보므로 그 못나고 잘난 몸둥이가 모두가 다 부처님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순수 에너지가 바로 불성(佛性)이고 부처님입니다. 성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성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두두물물이 순수 에너지 불성이요 바로 부처입니다. 우주의 성품으로 말할 때는 법성 그럽니다.
그렇게 모양이 없는 것이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모양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눈으로 잘나고 못나고 보이는 것이지 성자가 볼 때는 본래 모양이 없는 그 자리, 천지 우주에 훤히 빛나는 광명불성(光明佛性), 그 자리를 바로 봅니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보면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설사 독사(毒蛇)라도 모두 광명으로 빛나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나는 못났다 나를 배신한 저놈은 죽여야 한다. 이런 것도 역시 겉만 봐서 그럽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가 다 근본 바탕에서 영원적(永遠的)인 차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부처님입니다. 그러기에 위대한 사람들은 남을 단죄(斷罪)를 못하고 심판(審判)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톨스토이 전집(全集)'도 보십시오. 우리 범부는 남을 단죄하고 나쁜 놈, 좋은 놈이라고 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十字架) 위에서도 원수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고 자기를 핍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모시고 안했습니까.
그런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이 원수가 원수로 보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나가 있고, 너가 있고 하니까 나한테 삐딱한 사람은 원수고 싫고 하는 것이지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안보이니까 원수가 있을 수 없고, 미운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진리(眞理)는 본래 하나!
저는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나 불교의 삼신일불(三身一佛)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종교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본래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는 성자 하면 예수만 성자고 다른 사람들은 성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다른 종교도 함부로 하고 다른 사람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그런 소지가 있습니다.
불교 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도둑놈이나 누구나 모두가 다 본래로 화신불(化身佛)이란 말입니다.
본래 기독교 사상 역시 예수의 본 뜻대로 예수만 성자인 것이 아니라 천지 우주에 있는 모든 현상계, 나나, 너나, 도둑놈이나, 나쁜놈이나 모두가 다 원래는 성자란 말입니다.
다만 예수나 석가나 그런 분들은 깨달은 성자이고 스스로 성자인줄을 분명히 아는 성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본래는 다 성자인데 미처 번뇌(煩惱)에 가리워서 깨닫지 못한 성자란 말입니다.
만약 예수만 성자고 다른 사람들은 성자가 아니다. 그래 놓으면 결국 다른 사람하고 자기하고 구분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배격도 하고 허물이 생깁니다. 따라서 기독교도 앞으로는 꼭 예수님의 본 뜻대로 예수만 성자가 아니라 누구나 다 한결같이 성자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강목사나 안교수같은 분들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다변 된 사회에 그냥 그렁저렁 살 때가 아닙니다. 세계화(世界化) 하지만 우리가 정신적으로 철학적으로 하나의 도리를 알아야 참다운 세계화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종교인 불교, 기독교가 이와 같이 똑같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슬람도 내내야 똑같은 것인데 기독교 신앙에 좀 미치지 못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그네들을 교도(敎導)하고 가르쳐서 참다운 종교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모두를 회통(會通)하는, 모두를 하나로 보는 진리의 수행자(修行者)가 할 일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육즉불(六卽佛)
육즉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금번 법회용으로 준비한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유인물 구성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요약해 놓았습니다.
맨 처음에는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불타론(佛陀論)을 위주로 하고, 그 다음에 연기법(緣起法)에다 가장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윤곽만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마음의 고향 16집 참조)
연기법(緣起法)과 동체대비(同體大悲)
우리가 연기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부처을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연기법을 알면 나를 아는 것이고 연기법을 모르면 부처란 나를 모른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연기법은 불교의 대강령(大綱領)입니다. 실은 연기법이라 하는 우주의 대법(大法) 위에 불교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연기법이 바로 우주의 대법입니다.
따라서 우주가 바로 인연․연기이므로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도 표현은 좀 달리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연기법에 포섭되고 특히 불교는 연기법으로 체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동체대비'라는 것은 남하고 나하고 같은 몸이기 때문에 참다운 사랑과 참다운 자비가 나온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불보살(佛菩薩)은 일체 중생을 동일체로 관찰하기 때문에 대자비심(大慈悲心)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째서 다른 사람과 나와 같을 것인가? 분명히 현상적인 세계에서는 뿔뿔이 있는 것인데 왜 한 몸, 한 마음일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내린 것이 이른바 바로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이 우주(宇宙)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참다운 생명자체(生命自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명자체는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분열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주 자체가 바로 한 덩어리 생명(生命)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분할(分割)할 수가 없습니다.
한계가 없는 우주가 하나의 부처님 덩어리입니다. 하나님 덩어리입니다.
따라서 거기서 인연 따라 잠시간 이렇게 저렇게 전변무상(轉變無常)한 모양만 나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은 같다 하더라도 한 번 모양을 나투면 뿔뿔이 다르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통은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의 어려운 말로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조금도 한계가 없는 순수생명(純粹生命)이기 때문에 바늘구멍만큼 적은 현상적인 존재나 히말라야 산같이 큰 존재나 부처님의 정기(精氣)라는 뜻에서는 원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相對)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주는 빈틈도 없이 부처님 진여불성이란 한 생명만으로 충만(充滿)해 있기 때문에 어떻게 구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나한테 있는 불성(佛性)이나 너한테 있는, 예수한테, 공자한테, 석가모니한테 있는 불성이나 다 똑같습니다. 다만 개발하고 못하고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도 아시이성불(我是已成佛)이요, 나는 이미 부처를 성취한 사람이요. 나 아(我)자, 바로 시(是)자, 이 시자는 옳을 시, 바로 시, 그렇게도 쓰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는 바로, 이미 이(已)자, 이룰 성(成)자, 부처 불(佛)자, 나는 이미 부처를 성취한 사람이고, 여시당성불(汝是當成佛)이라. 그대는 바로 당성불(當成佛)이라. 마땅 당(當)자, 앞으로 그대 역시 필히 부처가 될 사람이다.
이렇게 차이만 있을 뿐이지 원래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생명 자리는 호리(豪釐)도 차이가 없습니다. 어두워서 겉으로는 나같이 보이고, 남같이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근본 성품 자리, 근본 본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습니다.
넓은 바다에서 바람 따라 천파만파(千波萬波) 파도(波濤)가 친다 하더라도 똑같은 물이듯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순수한 생명자리에서 나온 너나, 나나 일체의 존재는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습니다.
진여불성을 깨달은 분이 도인이고 진여불성을 깨닫지 못하면 제아무리 무엇을 분별지로 많이 안다 하더라도 도인이 아닙니다. 생명 자체를 깨달아 체증(體證)해야 도인(道人)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성취한 분들은 그때는 나와 남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나한테 들어 있는 것이나 너한테 들어 있는 것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진여불성이 들어 있으므로 어떻게 남을 무시하고 다르게 구분 지어서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은 그런 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도덕(道德)이라는 것도, 우리가 이제 자기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참다운 도덕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나와 남을 구분하기 때문에 아무리 남을 돌본다 해도 항시 자기가 중심이 돼 있단 말입니다. 누구한테 재물을 보시하고 어디다 봉사를 하나 항시 자기라는 것이 전제가 돼 있고 자기라는 흔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른바 상(相)을 떠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보통은 쉽게 상을 떠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이런 말을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중생들은 언제나 위선(僞善)이 깔려 있습니다. 자기라는 것을 미처 못 떠났기 때문에 위선을 미처 떨쳐 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나나, 너나,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자리, 그 자리를 체험을 해버려야 비로소 위선을 떠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지 못하면 조금 양심이 더 있고 덜 있고 하는 상대적인 차이 뿐이지 온전히 상을 떠나서 조금도 흐림 없는 베풀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독교나 카톨릭 계통에서도 하고 있는 한마음 한 몸 운동, 그런 것도 참 굉장히 좋은 운동이지요. 그러나 그네들로 해서는 한마음 한 몸을 제대로 해석을 못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했고, 한 번 창조한 사람들은 뿔뿔이 있고, 하나님과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이런 이론 체계로 해서는 한마음이나 한 몸이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상대적으로 될수록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서 남을 돕는다는 그런 의미인 것이지 불교와 같이 바로 철학적으로 온전히 나와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다. 이렇게는 안됩니다.
무아(無我)의 구조화(構造化)
우리가 '내가 없는 무아(無我)라' 이렇게 말하면 보통은 다 본래 나와 남이 구분이 있고 내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부처님께서 나가 없다고 그런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게 하고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겠지? 이렇게 천박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전문 술어로 본래로 무아(無我)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만 달리 했기 때문에 생명자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본질적으로 본래로 무아의 구조화(構造化)가 되어 있습니다. 본래로 나가 없고 너가 없는 그런 오직 하나의 생명이 다만 현상적으로 모양을 나툰다 하더라도 모양이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상(假相)만, 그림자만 나투고 있습니다.
수심결(修心訣)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범부미시(凡夫迷時), 범부는 미혹되어 참다운 지혜가 없어서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범부가 미혹했을 때는 사대위신(四大爲身)이요,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 이것을 내 몸, 내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망상위심(妄想爲心)이라. 잘 못 생각하고 이래저래 스스로 망상하고 무지로운 이것을 내 마음이라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진여불성의 자리, 우리 생명의 고향자리, 그 마음 자리를 증명을 못했을 때는 다 이것은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거꾸로 뒤바꿔서 보는 것입니다. 실지로 있는 실상은 없다고 보고, 실지로 없는 가상은 있다고 봅니다.
앞서 세 가지 차원으로 소견을 말씀 드렸습니다만 우리 중생은 망견(妄見)으로 보고서 고집(固執)을 합니다. 그러나 성자(聖者)가 되어야 사실을 사실대로 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본래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닙니다.
사실 본래 우주 구조 자체가 나라고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중생들이 바탕을 못 보고서 겉만 보기 때문에 나와 같이 보고 너와같이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이 몸뚱이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신진대사해서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데, 자기라는 존재가 한 순간도 같은 존재가 없는 것인데 그걸 보고 어떻게 우리가 실지로 있다고 하겠습니까?
성자들은 본질을 보기 때문에 욕심을 낼 래야 낼 수가 없고 탐심을 낼래야 낼 수가 없고 남하고 싸우려야 싸울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싸우지 말라, 남한테 베풀어라, 이래서 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철학적으로 기본적인 도리를 바로 알고 깨달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저절로 남을 사랑하고 남한테 베풀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어느 면에서나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자동적으로 저절로 바로 서는 형태가 되어야 참말로 위선이 없는 참다운 화평(和平), 참다운 민주화(民主化) 사회가 되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요약된 이것은 구성이 앞서 말씀드린 연기법을 주로 했습니다. 연기법에서 풀어 나가야 모두가 술술 풀립니다.
부처님이나 도인들이나 과거 선지식들의 비유를 본다 하더라도 우리가 연기법을 바로 안다고 생각할 때에는 여룡득수(如龍得水)라! 용이란 놈이 제 아무리 올라가고 싶어도 물이 없으면 올라갈 수가 없지요. 그러나 연기법을 바로 안다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 공부가 순풍에 돛단배나 용이 물을 얻어서 승천하는거나 같단 말입니다.
호랑이란 놈이 제아무리 힘이 세고 날뛰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언덕이 없으면 하룻밤에 몇 백리고 몇 천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언덕이 있어야 기대서 호랑이가 몇 천리를 갈 수 있듯이 이 연기법이 있어야 연기법으로 해서 모두를 술술 순수하게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말씀에도, 조사 어록에도 다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어 있고, 논쟁이 되어 있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문제, 그런 문제를 제가 무엇이 옳다 그러다 해서 여기다 기록을 해 놓은 것이 아니라 조사 스님들 과거의 도인들 또는 경에 있는 중요한 대목을 여기에 소개만 해서 해답은 여러분 스스로가 내리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육조단경(六組檀經)이라든가 능엄경(?嚴經)등 여러 경전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을 보시면 여러분 스스로 충분히 해답을 내릴 수가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번 3일 동안에 시간이 부족하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시고 나중에 보셔도 그냥 아실 수가 있습니다.
염불은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
그리고 다음에는 염불(念佛)과 참선(參禪)문제. 염불과 참선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보통 불교인도 '염불은 하근중생(下根衆生), 근기 낮은 사람들이 하고 참선은 근기가 높은 사람들이 한다.' 이렇게 소박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 말씀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도 아닐뿐더러 정통 조사 말씀도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염불은 우리가 본래로 부처인데 그 부처가 부처를 생각한단 말이니다. 내가 참 나를 생각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또는 부처 가운데는 끝도 갓도 없는 신비(神秘) 부사의(不思議)한 생명의 공덕(功德)이 거기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자기 마음에 들어 있는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생각하고, 무량공덕의 이름을 외우고 그렇게 하는 그것이 방편(方便) 공부가 될 수 있습니까?
다만 염불을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부처님은 저 밖에 어디 계신다.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부처님이 계신다.' 이렇게 할 때는 그것이 방편 염불이 됩니다.
그러나 참 염불 그것은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 앞서 우리가 배우지 않았습니까. 본래 우리가 부처기 때문에 이 마음으로 부처를 성취하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욕심도 부리고 못난 이마음, 이 마음의 본 성품이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본래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그 공부가 어떻게 해서 그것이 방편이라든가 낮은 차원의 공부가 되겠습니까? 사실 어떠한 공부나 주문(呪文)을 외우거나, 화두(話頭)를 참구하건, 염불을 하나, 기도를 모시나, 모두가 다 사실은 부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눈에 안 보이니까 이렇게 저렇게 방편을 내 세우는 것이지 본래 부처가 없다면 불교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천지 우주가 바로 하나의 법신(法身) 부처님이고 그대로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光明)입니다.
때문에 염불은 부처를 대상적으로 밖에서 구할 때 이것이 낮은 공부 방식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내 마음의 본 성품이 바로 ?요, 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염불을 하실 때에는 사실 가장 가까운 공부입니다.
우리 심리학에서 자기암시(自己暗示)라, 자기 암시라는 것은 가사 '내가 나쁜 놈이다. 나는 아무 힘도 없다. 나는 시험만 보면 매번 떨어만 진다.' 이렇게 자기 비하(卑下)를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사람은 꼭 떨어지고 맙니다.
내가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의사가 잘 못 오진(誤診)을 해서 '당신은 무슨 병입니다.' 한 둘이 아니라 몇이서 그래 놓으면 정말로 아파버립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기암시 아닙니까?
우리 참다운 자기가 누구입니까? 참다운 자기가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나는 본래 부처다. 그러므로 나는 무한공덕을 본래 갖추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기 암시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부처가 어디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내가 바로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옳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위대한 도인들이 안 나왔으면 모르거니와 그 분들이 다 증명하시구 구구절절이 말씀을 하셨지 않습니까.
달마(達磨) 스님, 그리고 이조(二祖) 혜가(慧可) 스님 말씀이나,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 말씀이나 그냥 직설(直說)로 바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비었으면 '비었다', 부처면 '부처다.' 그리고 육조단경에서도 '심즉시불(心卽是佛)'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작불(是心作佛)' 우리의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그런 말씀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매 번 달마스님과 혜가스님의 일화를 소개해 드렸습니다마는 우리 마음이 어디가 별도로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좋고, 궂고 어디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우리가 버릇을 잘 못 붙였기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 자리' 그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부처가 지금 보입니까? 자기는 못나게 보이고 이상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많이 있으니까, 아! 저 따위 사람들한테 무슨 부처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 아들딸한테나 친구한테나 그 사람을 가장 잘 대접하는 것이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본래대로 부처같이 보고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그렇게 먼저 부처님같이 봐 놓고서 '다만 인연 따라서 내 아들로 태어났구나. 저 사람도 본래는 부처인데 인연 따라서 잠시간 나쁜 행동을 보일 뿐이구나.'
부처님의 은혜(恩惠)에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실은 무량한 은혜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가 은승창열은(隱勝彰劣恩)이라. 부처님의 은혜가 많지만 부처님의 좋은 점은 숨기시고 나쁜 점을 우리한테 보인 은혜(恩惠)란 말입니다. 도둑놈이나 그런 사람들도 본래는 부처인데 부처란 좋은 점을 지금 가리고서 도둑이라는 나쁜 걸로 해서 우리에게 보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대하나 딸, 남편, 아내, 누구를 대하든지 먼저 '아! 저분도 본래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여 놓고서 그 다음에는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다 보니 아들딸이 되고 남편이 되었구나' 그래야 바르게 관계가 섭니다.
이것이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 연기법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연기법이기 때문에 본래 무아(無我)고, 본래 무아기 때문에 사실 내 소유(所有)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큰 빌딩을 가지고 있고 또는 막대한 재벌가가 된다 하더라도 마음만은 탈탈 다 털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괴롭지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기업도 경영하고, 장사도 잘하고, 남한테 베풀기도 하고, 그래야 사회도 풍요롭게 되고 그렇겠지요.
그래서 최선으로 한다 하더라도 본래 이것은 나도 내것이 아닌데,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닌데 저 따위 것들이 무슨 내 소유일 것인가?
다만 이것은 우주의 모든 존재, 모든 인간들의 공유물인데 내가 지금 관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최선으로 관리해야 내가 인간으로서 내 책임을 다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불자로서 우리 기업인으로서 자기 사업에 대해서 가지는 바른 태도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우리 인간 세상에 참다운 평화가 옵니다. 그렇지 않고서 연기법으로 보지 못하고서 그냥 세간적인 지헤로 분별시비(分別是非)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 인류 사회에 갈등(葛藤)과 반목(反目), 전쟁(戰爭)과 부패 여러 가지 비리(非理)같은 것을 도저히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인 것이지 그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염불을 저는 강조했습니다. 해서 참선을 하신 과거의 선지식(善知識)이라든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인용해 가지고서, 내가 원래 부처인데, 내 이름 내가 부르는데, 사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그런 이름이 바로 내 진짜 이름입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그것은 금생에 작명가나 부모가 붙인 가짜 이름입니다.
내 진짜 이름은 바로 부처가 진짜 이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침에 쇳송을 들어보면 알 수 있듯이 아미타불이 어디 한 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십일만구천오백 동명동호아미타불(同名同號阿彌陀佛)이라! 한도 끝도 없이 아미타불뿐이란 말입니다. 이름도 같고 호도 같고,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런데 가서 '두두물물'이란 말씀이 해당됩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이고 아미타불이란 말씀입니다.
인생(人生)이란 마음 한 생각 돌이키면 참 행복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계가 바로 그대로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다 아미타불인데 극락세계가 안 될 수가 있습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바뀌고 우리 행동도 바뀌는 것입니다. 1년이나 2년이나 부처님 믿고 변신하지 않으면 믿은 보람이 없지요. 부처님이 되고자 해서 부처님이 되어 가는 그런 쪽으로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바꿔져야 합니다. 우리 근기가 약해서 단박에 비약적으로 바꿔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바꿔져야 신앙인으로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다 지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천지신명이 지킨다는 이른바 호법신장(護法神將)이 지킨다는 것을 꼭 명심(銘心)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만 믿어도 36부선신들이 우리를 다 지킵니다. 오계(五戒)만 우리가 지켜도 오오는 이십오라. 이십오선신이 우리를 지킨단 말입니다. 천지 우주라는 것은 우주의 도리, 우주의 법도(法道)에 따르기 때문에 신장이나 하늘에 있는 천신(天神)들이나 모두가 다 우주의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우주의 법도를 따른다고 생각할 때에는 또 그런 신장들이나 천신들이 우리를 가호(加護)합니다.
그래서 염불과 참선이 본래로 둘이 아니라는 그런 쪽으로 제가 정리를 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 위대한 사람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원효(元曉) 스님, 의상(義湘) 스님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서산(西山)대사, 태고(太古) 대사 모두가 그리했습니다. 이조 십삼대 종사의 글을 다 봤습니다만 그 분들 역시 다 그렇습니다. 조금도 집착이 없단 말입니다.
참선과 염불이 둘이 아닙니다. 참선할 때도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 자리에 입각해 있으면 참선이 되지만 그냥 덮어놓고 '이뭣고' 한다고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화두(話頭) 나올 때 그 자체가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참구하고자 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화두를 들든지 간에 분명히 본래면목 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른 참선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염불도 부처님이 저 밖에 어디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참선이 못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천지우주가 그대로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하면서 염불할 때는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우리가 참구할 때도 하나님을 저 밖에서만 생각할 때는 그것은 참선이 못되겠지요. 그러나 내 마음이 본래 하나님이고 천지 우주는 하나님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안 계신데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오! 주여' 할 때는 그것도 참선이란 말입니다.
참선이 꼭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적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떠나지 않으면 다 참선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종교도 비로소 화해(和解)가 되고 그렇게 되어야 자기 마음이 넓어지곤 합니다.
본래 우주 구조 자체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온 것인데 진여불성 안 여의고 생각한다고 할 때에는 모두가 술술 풀이가 됩니다.
그리고 끄트머리에 가서는 우리 공부를 북돋을 수 있는 게송(偈誦), 즉 말하자면 불교 시(詩)를 몇 구절 넣어서 마무리를 잡았습니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것만 생각하시면 사실은 그냥 보기만 하셔도 쭉쭉 같은 도리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육즉불(六卽佛) 이것 풀이만 하시도록 하십시다. 이것 풀이만 해도 한 두 시간은 걸립니다.
육즉불(六卽佛)
1. 리즉불(理卽佛)…다만 불성(佛性)을 갖춘 자(者)…외범(外凡)
2. 명자즉불(名字卽佛)…다만 불성(佛性)이란 명(名)을 해(解)한 자…외범(外凡)
3. 관행즉불(觀行卽佛)…사가행위(四加行位 : 난(煖), 정(頂), 인(忍), 세제일법(世第 一法))…내 범(內凡)
4. 상사즉불(相似卽佛)…육근청정위(六根淸淨位), 무간정위(無間定位)…내범(內凡)
5. 분진즉불(分眞卽佛)…보살 초지(初地)에서 십지(十地)까지…성위(聖位)
6. 구경즉불(究竟卽佛)…묘각(妙覺) 또는 대각(大覺)…성위(聖位)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이 천태지의(天台智의) 선사, 선사의 천태 철학이 불교 철학으로는 제일 높은 철학입니다. 때문에 적어도 불교학도면 꼭 천태학(天台學)을 거쳐야 한다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참선 법문(法門)이나, 무슨 법문이나 하나의 체계로 공부할 때는 천태 학문이 필요합니다. 천태스님의 여러 저서 가운데서 마하지관(摩訶止觀) 이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하나의 위대한 체계적인 작업입니다. 이것은 지관법에 있는 하나의 법문입니다.
육즉불(六卽佛)이라. 여섯 단계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맨 먼저 리즉불(理卽佛)이라. 원리로 봐서 부처란 말입니다.
다음이 명자즉불(名字卽佛)이라. 다만 이름만 부처입니다. 부처란 이름만 좀 들었지 부처의 옆에는 조금도 가지 못했단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인이라 하더라도 공부를 않고 그냥 지내면 이름만 좀 들었을 뿐이지 조금도 결심도 못하고 부처님께 한 걸음도 못 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관행즉불(觀行卽佛)이라. 실지로 우리가 닦아서 차근차근 부처가 돼 간단 말입니다. 부처란 생각도 하고 부처의 경계도 관찰하고 염불도 하고 화두도 참구하고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관행즉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애써 공부하시는 사람들은 세 번째 단계인 관행즉불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공부가 좀 익혀져서 네 번째 가서 상사즉불(相似卽佛)이라. 거의 닮아 있는 부처란 뜻입니다. 부처가 확실히는 못되었지만 거의 비슷한 부처란 말입니다.
모든 면에서 신통도 못하고 하지만 해석하는데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마음이 바꿔지고 또 도리에 대해서 밝아서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분진즉불(分眞卽佛)이라. 비로소 우리가 닮은 정도에서 용맹정진을 거듭해 가지고서 참말로 진여불성을 증명하는 단계입니다. 진리는 증명했습니다. 증명은 했으나 완벽한 단계는 아직 못됩니다.
따라서 차근차근 진리가 더욱더 익어져서 우리가 습관성(習慣性)을 녹이고서 불교 말로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그래서 차근차근 완벽한 부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완전한 부처가 될 때가 이른바 구경각(究竟覺), 조금도 흠축이 없이 번뇌(煩惱)는 다 떨쳐서 자기 성취도 완벽하고, 다른 사람에게 완벽하게 법문도 하고, 제도도 하고, 이런 경지가 이른바 구경각을 성취한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시 자기 공부를 점검해야 합니다.
리즉불(理卽佛)
맨 처음에 리즉불이라.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라는 말 한번도 안 들어도 이슬람을 믿든 또는 과학을 하든 상관없이 내내야 부처는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는 다 부처입니다.
그와 같이 이치로 봐서는 누구나 다 부처인 단계입니다. 이것은 불교인이 되고 안되고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튼 모든 사람이 다 이치로 봐서는 부처란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다만 불성만을 갖추고 있을 뿐입니다. 원래 갖추고 있으니까 뱀이나 곤충이나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즉불 단계는 모두가 다 갖추고 있습니다.
명자즉불(名字卽佛)
그러나 그 다음에 명자즉불이라. 이름이나 문자로 해서 우리가 부처란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품, 본래면목은 다 부처다.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본성품은 다 부처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번뇌만 다 녹이면 부처가 된다. 이치로만 좀 알고 부처의 이름을 좀 외울 정도입니다. 다만 불성이란 뜻이나 이름을 해석할 정도입니다. 이 리즉불 단계와 명자즉불 단계를 불교 전문술어로 외범(外凡)이라. 외래범부라 합니다.
이 외범은 불교의 문중에 온전히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름만 들어서 상식적으로 알뿐이기 때문에 그것은 외도 범부입니다. 따라서 이름만 듣고 조금도 자기 수행을 안한 분들은 외도 범부의 부류에 속해 있는 셈입니다.
관행즉불(觀行卽佛)
그 다음에 관행즉불이라.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불교수행을 한다고 볼 수 있지요. 이것은 사가행(四加行). 가행이란 우리의 노력을 가속화 시켜서 온 힘을 경주해서 공부한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불교 말로 하면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우리가 겨울철에 공부할 때 즉, 가행정진을 할 때에는 시간을 훨씬 더 많이 할애해서 쉬지 않고 밀어 부칩니다.
지금 나한테 있는 내 본 성품은 부처다. 부처가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길은 없다. 이렇게 한 번 알고 이해한 다음에는 자기의 온 힘을 경주해서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 정진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가행위(加行位)입니다.
이 가행위도 역시 네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이른바 사선근(四善根)이라. 우리의 공부함에 따라서 착한 성품은 차근차근 더 깊어집니다. 맨 처음에는 별 것도 아니었다가 참선도 많이 하고, 염불도 많이 하고, 불경이나 바이블도 많이 읽고 그러다 보면 차근차근 우리의 품성은 더 고상해집니다.
첫째 단계가 난법(煖法). 이것은 다스울 난(煖)자입니다. 두 번째가 이마 정(頂)자 정법(頂法)이라. 다음이 참을 인(忍)자 인법(忍法)단계고, 마지막 네 번째가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이 세계에서는 가장 높은 법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도인들 세계는 빼놓고서 세간적인 세계에서는 제일 높은 법이란 뜻입니다.
이 네 가지가 즉, 말하자면 우리의 착한 성품입니다. 이것은 미처 성인이 되기 전에 우리 범부 중생들이 닦아 나아갈 때에 그 닦아 나아가는 품성의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일 낮은 것이 난법인데 난법은 우리가 참선도 많이 하고, 염불이나 주문도 많이 외우고 이렇게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시원해 온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대체로 그런 경계를 다 맛보셨겠지요.
몸도 마음도 시원해 와서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단계로 불교 전문 술어로 말하면 그때는 경안(輕安)이라. 몸도 마음도 가뿐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제 난법이라 하는 품성이 비로소 발휘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런 네 가지 법을 사람들이 별로 말을 잘 안해요. 원래 불경에 다 있는 것인데, 앞으로는 차근차근 올라가는 법을 알아야 '내가 지금 어디만치 갔구나' 점검을 할 수 있습니다. '담박에 성불해 버린다' 이렇게 말씀하는 분들이 더러 있으니까 우리가 이런 과정을 자칫 무시해 버립니다.
난법 이것은 우리가 바로 믿어 가지고서 우리 몸도 마음도 가뿐할 정도로 어떠한 고행도 충분히 할 수 있구나 하는 그런 용맹심도 나고 이렇게 되어야 난법이 나한테 발득(發得)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 전문 술어로 발득이라 합니다. 이미 내 업장이 녹아져서 선정의 맑은 지혜가 얻어졌단 말입니다.
이런 단계에서도 오히려 공부를 놓치지 않고 더욱더 가행정진하면 정법이라. 그때는 맑아진 기운이 더욱더 맑아 옵니다. 온 전신이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르르 할 정도로 아주 개운합니다. 그러면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 무게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 정도 되면 불식(不食)이라 해서 안 먹어도 되는 경지입니다.
이렇게 자기 품성이 더 고상하게 되어 가다가 인법(忍法)이라. 인법에 가서는 그렁저렁 살아 버리면 쑥 내려간단 말입니다. 내려가 후퇴하지만 한 번 그런 맑은 기운을 오랫동안 경험을 하고 지속적으로 우리 몸에 딱 베여 버리면 후퇴를 않습니다.
그것이 참일 인(忍)자 인법입니다.
이 단계에서도 공부를 그만 둬 버리면 항시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밖에 안되겠지요. 그러나 용맹정진이라. 더욱더 애써 공부를 하고 마음을 애써 닦고, 우리 마음을 장사를 한다거나 다른 사업을 하고 집에서 밥을 먹거나 항시 부처님한테 가 있게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공부가 한 차원 올라가서 그 때는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도인이 미처 못된 단계에서는 이것이 제일 높은 단계입니다.
세제일법이 되면 이때는 부처님의 광명(光明)이, 부처님은 바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자비 광명입니다. 빛입니다. 불성광명은 눈부신 태양광선과 같은 그런 빛이 아니라 청정광명(淸淨光明)입니다. 생명의 빛, 진리의 빛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도 광명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빛이요, 나는 길이요, 나는 생명이다.' 기독교 복음서의 이 '나'라는 것은 우리 불교적인 의미로 볼 때는 '참 나', 참다운 나라는 뜻입니다. 참 나는 광명이고, 진리고, 그야말로 하나의 순수 생명입니다.
성인(聖人)들의 진리(眞理) 말씀이 이렇게 똑같은 걸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때 굉장히 크게 환희심(歡喜心)을 주고 희망을 갖게 합니다. 지금 내 문중, 네 문중 하고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될수록 각 종교간의 문호를 타파해야 됩니다.
진리만 가지고서 진리만을 말하고, 하나님도 바로 진리고, 부처님도 바로 진리입니다. 부처님, 하나님은 바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이요, 빛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서 자기 얼굴도 밝아 온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그러한 부처님을 생각하고,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몸 전체가 광명으로 차근차근 비춰 옵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몸에 부처님의 광명이 가까이 온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나쁜 것이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지 신명이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가 되어서 우리 마음에서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훤한 빛을 보는 것입니다. 실지로 눈을 감아도 그 훤한 빛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가 되면 그때는 세제일법이라. 도인은 미처 못 되었지만 이 인간 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 즉, 말하자면 성자(聖者)가 못되었어도 현자(賢者)란 말입니다. 현인(賢人)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것입니다. 벌써 정화가 되었단 말입니다.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되어 가는 것이고 자기 생리(生理)가 바꿔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마다 그냥 쉽게 깊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한계를 알으셔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열심히 공부해서 난법상에서 자기 몸도 마음도 시원스럽게 조금도 부담이 없는 그런 것을 느끼셔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잔병은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좌선(坐禪)할 때 다리가 아파서 거북한 것도 역시 이 난법상이 이루어질 때쯤 사르르 풀려 오는 것입니다. 참 묘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 가르침이나 다 신비(神秘)에 차 있습니다.
우리 중생의 분별시비나 중생의 생각을 초월(超越)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원해 오다가 정법상에서는 더욱더 맑아 옵니다. 더욱 더 맑아 와서 어렴풋이 빛이 비춰 옵니다. 그 다음 인법상이 되면 빛이 더욱 더 밝게 비춰 오고 그러다 세지일법이 되면 그야말로 훤한 빛이 비춰 옵니다.
이렇게 되면 별로 후퇴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관행즉불,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화두를 참고하고, 실지로 기도를 모시고, 기도나 참선이나 다 똑같습니다. 부처님만 떠나지 않으면 다 하나입니다. 참선인 동시에 염불이고 다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것저것 구분해서 피차 그런 것 때문에 서로 의를 상하고 불화스럽게 될 아무런 필요도 없습니다. 본래 근본 자리에 우리 마음만 두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가장 위대한 공부가 됩니다.
따라서 그렇게 해서 사선근, 난법이라. 우리 마음이, 몸이 정화?서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맑아지면 몸도 정화가 됩니다. 더 맑아지면 그야말로 시원하고 맑은 기운과 가벼운 기운이 느껴지고, 그때는 정법이라. 삼계(三界)로 말하면 욕계(欲界)의 끄트머리란 말입니다. 욕계 정천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냥 욕계 내에서 첨벙거리고 지냅니다. 욕심의 바다 가운데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만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다 꿈같이 생각하고 욕심을 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안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각자 책임은 다해야 하겠지요. 가사 우리가 음식점을 하면서 남한테 밥을 판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내가 파는 음식을 먹고 마음이 정화되고 건강하게 되어서 빨리 부처가 되소서! 빨리 천국에 가소서!'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이 큰 공덕이 됩니다.
그러나 꼭 내가 돈벌어서…, 저 사람들 맛있게 먹던 말던…, 그러면 결국 죄만 짓지요. 어떤 분야나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기 장사를 하나 무엇을 하던지간에 나와 남이 더불어서 똑같이 빨리 부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담겨 있으면 다 옳은 것입니다.
상사즉불(相似卽佛)
그 다음은 상사즉불(相似卽佛)이라. 서로 상(相)자, 닮을 사(似)자. 부처와 꼭 닮아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태어나서 비록 성불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 빤히 길이 다 나 있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성불의 길을 새로 개척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무수한 도인들이 난행고행(難行苦行) 해가며 못 먹고, 못 입고, 못 자고 이렇게 해서 훤히 길을 내 놨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길도 못 따라 간다고 생각할 때에는 참 억울한 일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사실은 제일 쉬운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꼭 승려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아내가 되든, 남편이 되든, 자기의 위치는 어디가 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내 생명의 근본자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나님이다. 그것은 석가나 예수나 나나 똑같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개발 여하에 따라서,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개발하기 위해서는 본래로 나나 누구한테나 무한한 공덕이 갖춰져 있다. 대 천재인 예수나 석가나 그런 분들도 나하고 본래로 역량이 똑같다. 이렇게 분명히 믿는 그것이 자기 암시가 되어서 우리 업장이 녹아지고 우리가 차근차근 부처의 길로 영생 해탈의 길로 인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여기까지, 구경각까지는 못간다 하더라도 거의 닮은 정도는 되어야 사람 몸 받은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와서 개나 소나 돼지로 안 태어나고서 또 지옥으로 안 떨어지고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한국에 태어났고 부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한국불교가 세계불교 가운데서 제일 빛납니다. 이건 틀림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의 인간으로 해서 정말로 불교 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우리가 백만 생 동안 헤매다 다행히도 어쩌다 하필이면 한국에 태어나고 부처님 믿게 되었단 말입니다. 사업이 잘 안되고, 무엇을 하다 실패하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어도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참 불교를 믿는 그것만 가지고도 이미 행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관행즉불, 정작으로 우리가 닦아 나아가는 그것과 닦아서 거의 부처와 닮아 있는 그런 지위. 이때는 육근 청정이라. 우리의 눈이나 귀나 코나 입이나 몸이마 머리나 모두가 청정한 기운이 돈단 말입니다. 청정기풍(淸淨氣風)이라.
아직 부처가 못 되놔서 완전한 청정은 못 되었겠지요. 그러나 오염은 받지 않습니다. 이런 정도가 되면 독을 먹여도 독살을 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약간 무얼 함부로 먹여도 뱃병도 안 난단 말입니다.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우리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우리 눈이 밝아지고, 귀도 밝아지고, 후각도 밝아지고, 촉각도 맑고 이와 같이 육근청정이 됩니다.
아직 온전한 것은 아니어도, 따라서 부처님 공부라는 것은 내 몸도 좋고 다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자기 집안에서도 아들이나 딸이나 남편이나 다 자기를 숭배한단 말입니다. 침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나 남편도 되지만 공부해서 부처를 닮아 갈수록 누가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산신(山神)을 숭배하고, 어느 산에 척 들어앉으면 그야말로 산신도 굽어보고서 지켜 준단 말입니다.
사람 정기(精氣)가 우리 마음 아닙니까. 산 정기가 산신입니다. 집 정기가 택신(宅神)이고 물 정기가 용왕(龍王)입니다.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입니다. 부처가 별한테 가 있으면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입니다. 부처가 태양에 있으면, 불성 기운이 태양에 있으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 불성기운이 달에 있으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란 말입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는 모두가 부처님 기운이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이래저래 현상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근본은 다 똑같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관행즉불' 정작으로 닦아 나가는 우리 수행 과정, 이렇게 해서 난법상, 우리 마음이나 몸도 개운하고, 더 개운해서 정법상, 빛이 어렴풋이 빛나고, 또 후퇴가 없을 정도로 더욱 더 맑고 개운하고(忍法相), 그러다가 더 나아가서는 훤한 빛이 나온단 말입니다(世第一法). 그 때는 눈이 흐릿한 사람도 눈이 밝아지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은 육근청정이라. 우리 눈이나 귀나 코나 입이나 몸이나 정신 모두가 청정하게 되어서 그때는 무간정(無間定)이라. 무간정은 무엇인고 하면 없을 무(無)자, 사이 간(間)자. 참선이라는 정(定)자. 나쁜 생각이 우리한테 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이에 낄 수가 없습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시 좋은 생각만 이어 간단 말입니다. 도인들이 나쁜 짓을 하려야 그때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사즉불(相似卽佛), 이 자리는 아직은 미처 도인이 못 되었다 하더라도 나쁜 생각이 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진여불성을 훤히 볼 정도는 못됩니다.
나쁜 생각은 낄 수 없으니까 무간정이라. 조금도 나쁜 생각이 들어가지 않는 하나의 그야말로 참 삼매에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관행즉불과 상사즉불의 단계는 내범(內凡)으로 아직은 범부입니다. 성자가 아닙니다.
성자란 것은 범부를 초월해서 분명히 우주의 진여불성 자리를 체험해야 성자입니다.
인간(人間)이 태어난 보람은 성자(聖者)가 되는 것이 가장 최고(最高)의 가치(價値)입니다. 금생에 못되면 그냥 마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몇만생이 걸리더라도 꼭 성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학식도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성자가 될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자기 비하를 할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은 지식이 많고 적고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이 얼마만큼 선량(善良)한가 그것에 달린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성자가 안되고 뱃길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꼭 성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금생에 게으름 부리면 내생에 가서 더욱 더 부지런히 해야 되는 것이고, 금생에 욕심부리고 죄 많이 지으면 내생 가서 오욕을 다 떼어 내야하고 그만큼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몇 만 생을 두고라도 필연적으로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분진즉불(分眞卽佛)
다섯 번째 가서 분진즉불이라. 진리를 증명한다 했는데 여기서도 차근차근 올라갑니다. 보살십지로 말하자면 보살 초지(初地)에서 이지(二地),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지(十地)까지 성인지(聖人地)까지 올라갑니다.
같은 성인도 그 습관성을 온전히 녹인 분인가? 좀 많이 녹인 분인가? 그 습관성을 녹인 정도에 따라서 일지, 이지…, 그와 같이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십지에서 온전히 녹여서 그때는 그야말로 참 불지(佛地)로 구경각(究竟覺)을 우리가 성취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도달하는 것이 물론 어렵겠지요. 어려우나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벌써 이 자리가 갖춰 있습니다. 갖춰져 있다고 분명히 믿고서 염불(念佛)도 하고 화두(話頭)도 하고 그래야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나는 아직 멀었다. 이렇게 공부해서는 자기 암시가 되지 못하고 그러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공부가 더딘 것입니다. 따라서 '본래 내가 부처다!' 하는 그 생각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도인들이 위차(位次)를 말씀해 놓은 것이 무엇인고 하면 이런 자리를 우리가 빨리 알아가지고서 이 자리가 바로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까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서 공부를 하라는 그런 의미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도 스스로 자기 비하라든가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러지가 된다 하더라도, 아파서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시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성불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신을 속인 죄로 꽁꽁 묶이어 코카사스 큰 바위 위에 놓입니다. 사나운 독수리들이 날아와서 프로메테우스의 눈과 간장을 쪼아먹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때마침 헤라클레스의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런 사람도 구제를 받습니다. 몸뚱이 이것은 허깨비인 것입니다. 어느 순간도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영생 불멸하는 생명 자체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구제를 받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와 같이 보살 초지에서 이지, 삼지…, 이렇게 올라가는 것을 부정을 합니다.
돈오(頓悟)라는 것은 성불(成佛)만이 돈오인 것이지 다른 것은 아직 견성(見性)도 못된다. 이렇게 그 분들이 말씀합니다만 사실은 부처님 경전을 뚜렷이 보고 조사 어록을 착실하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다 한계가 있습니다. 같은 성인도 똑같은 정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인도 근본 번뇌는 다 없애 버려서 성인이 되겠지만 습관성은 미쳐 못 여의어 있단 말입니다.
가사 사과의 예를 들어본다고 할 때 사과가 비배(肥培) 관리를 잘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지만 아직 갓 선 사과는 먹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상당히 오랫동안 시일이 지나서 익어야 비로소 사과 구실을 한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근본 번뇌를 떼어버리고서 성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습관성이 남아 있습니다. 금생의 습관성은 빨리 끊어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의 습관성, 우리 인간은 어떤 누구나 과거 전생(前生)에 지옥(地獄)으로, 아귀(餓鬼)로 또는 축생(畜生)으로 다 거쳐왔단 말입니다. 하기 때문에 과거 무수생 동안에 지어 내려온 버릇이 우리 마음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꽉 차 있습니다. 즉 과거로부터 묻어 나온 그런 번뇌는 우리가 쉽게 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여불성은 증명했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랫동안 두고두고 이른바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여기서 비로소 부임수행이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보임수행은 견성(見性), 견도(見道) 한 뒤에 차근차근 이지(二地)로, 삼지(三地)로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육조단경(六組檀經)의 맨 마지막 부촉품(付囑品)에 가서 '그대들이 만약 부처의 일체종지(一切種智)이라. 부처의 그런 조금도 흠축없는 지혜(智慧)를 알려고 생각할 때는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을 지니라.' 이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육조단경 그러면 참선법으로 해서는 보배같은 경(經) 아닙니까. 그리고 같은 경에서도 부촉품은 결론적인 것입니다.
돈황본(敦惶本)에는 없고, 덕이본이나 다른 본에서는 다 있습니다만 부촉품에 가서 어떤 말씀이 있는고 하면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육조스님께서 우리 중생한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부처의 무량지혜(無量智慧)를 얻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닦을 지니라' 일상삼매(一相三昧)는 무엇인고 하면은 한 일(一)자, 서로 상(相)자. 천지 우주가 오직 다 부처뿐이라는 그러한 의미가 일상삼매입니다. 천지우주가 다른 것이 없이 우리 중생은 그렇게 안보이지요. 그러나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조금도 구분 없이 우주가 하나의 도리로 봅니다. 우주를 하나의 도리로 보는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우리가 본래는 그와 같이 부처이기 때문에 다 갖추고 있는 것인데, 금생에도 우리가 잘 못 배우고, 잘 못 생각하고, 잘 못 듣고, 잘 못 버릇 붙이고, 이것 때문에 그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또는 과거 전생의 나쁜 버릇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와 같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 전생의 업장(業障)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극락세계에 벌써 다 가버렸겠지요. 업장이 가벼우면 천상에도 가 버리고, 사람정도 밖에 업장이 안되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났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 차원에서 업장을 녹여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죄를 없애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본래가 하나이기 때문에 '천지 우주는 오직 하나의 부처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그러면 일행삼매(一行三昧)는 무엇인가?
우리가 '모두가 오직 하나의 부처뿐이다.' 이렇게 일상삼매를 한다 하더라도 금방금방 또 우리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다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저것 생각하고 순식간에 생각이 다른 데로 달아나고 만단 말입니다. 이런데서 불교말로 '우리 범부는 모도범부(毛道凡夫)라' 터럭 모(毛)자, 길 도(道)자. 마치 터럭이 바람이 없어도 항시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 마음은 항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 소중한 법문 '모두가 다 오직 부처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생각이 지속(持續)이 잘 안됩니다. 지속이 안되면 우리 버릇은 녹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염주(念珠)를 헤아리고, 철야정진(徹夜精進)도 하고, 정근(精勤)도 하고, 참선(參禪)도 하고, 그러는 것은 다 지속을 시키기 위해서 합니다. 우리 참선하는 스님네가 앉아서 90일 동안 결제(結制)하는 것도 모두가 다 바른 생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 우주가 오직 부처뿐이다' 이 생각을 빈틈없이 지속시키는 것이 일행삼매입니다. 한 일(一)자, 행할 행(行)자,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통틀어서 대의(大義)가 무엇인가? 그렇게 말하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입니다.
이것이 생소하므로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가 곤란스럽겠지요.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모든 것이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 '오직 하나의 부처뿐이다'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천지 우주는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상삼매인 것이고, 그리고 그런 생각을 지속을 시킨단 말입니다. 염주를 헤아리고 그런 것도 모두가 부처라는 생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냥 덮어놓고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부처님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입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내 몸에도 충만해 있고, 이 공간 속 어디에도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어리석어서 그 빛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공부가 되면 된 만치 우리는 그 빛과 가까워집니다.
그러다가 우리 업장이 녹아지면,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정말로 그 빛이 정작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구경즉불(究竟卽佛)
그러다가 묘각(妙覺)이라. 다 성취해 버리면 그 때는 우리가 이젠 자기 스스로 빛이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바로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생명의 광명이란 말입니다.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의 중요한 대목에서도 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빛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것은 참 나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인 나, 하나님인 나, 이것이 참 나란 말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수하고 우리 중생하고 같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나 '관세음보살'을 외우나 우주에 충만해 있는 부처님의 광명을 상상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빨리 광명을 보게 됩니다. 본래가 광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것은 어둠과 광명의 싸움입니다. 남 미워하는 것은 어두운 마음입니다. 욕심 내는 마음도 벌써 어두운 마음입니다. 남을 사랑하고 베풀고 자비심(慈悲心)을 내면 이것은 벌써 밝은 마음입니다. 한 평생동안 광명과 어둠과의 싸움입니다.
그 광명으로 가는 길을 보다 촉진시킨단 말입니다. 보다 더 가속화시킨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을 하고 주문을 외우고 하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더듬어 봐도 모두가 이 두 뜻으로 귀일(歸一)이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란 두 뜻으로 귀일(歸一)이 됩니다.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생각, 그와 동시에 그 생각을 밥을 먹으나, 길을 가나, 운전대를 잡으나 항시 그 생각을 놓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본래가 부처인지라 걸음걸음 부처가 되어 갑니다.
육조단경의 마지막 대문에 있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부처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성취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을 지니라' 마치 땅에다가 종자를 뿌려서 오랫동안 잘 가꾸고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어 가듯이 우리가 본래 부처이므로 그와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오랫동안 닦고 있으면 저절로 부처가 되어 간단 말입니다. 끝내는 열매를 맺어 성불(成佛)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 금생에 하직하고 가는 마당에도 가장 큰 자산은, 아무 것도 가지고 못 갑니다. 자기 몸뚱이도 가지고 못가는데 다른 무엇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자기 남편하고 같이 가겠습니까? 누구와 같이 가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공부한 것, 그 부처님 공부 가지고 갑니다. 업(業)을 지어 놓으면 그 업을 가지고 갑니다.
게송(偈誦)
1.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
유심정토유심현(唯心淨土唯心現)
- 오직 마음이 본래 정토이니 마음 닦아 정토이루고
자성불타자성개(自性佛陀自性開)
- 우리 자성이 본래 부처이니 스스로 부처이루네
억모자종보자재(憶母子終逢自在)
- 어머니가 자식 그리워하듯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 만나네
염향인자대향래(染香人自帶香來)
- 향에 물든 자 향기나 듯 법향 또한 그러하다네
'유심정토유심현'이라. 淨土란 것은 극락세계를 말합니다. 극락세계가 어디가 있는가 하면 천지우주가 다 진여불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오직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이 마음이 어두워지면 지옥이 되고, 이 마음이 맑아지면 극락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극락을 만듭니다. 오직 우리 마음의 그러한 순수한 상태 이것이 정토이기 때문에 유심현이라. 우리 마음으로 정토를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본래는 다 정토인데, 우리 마음이 어두워서 잘 못 보다가 마음이 정화되면 스스로 정토를 마음으로 이룩한다는 것입니다.
'자성불타자성개'라. 부처가 어디 있는가 하면 내 자성, 내 본래 면목이 바로 부처입니다. 때문에 다른 걸로 부처가 못되고서 내 스스로 부처가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부처가 되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내 본래면목, 나한테 원래 부처가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닦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억모자종봉자재'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깊은 사랑은 역시 어머니와 자식입니다. 어느 사랑, 어떤 사랑 하지만 어머니와 자식 같이 순수한 사랑은 없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고 자식이 어머니를 생각하듯이, 우리의 참다운 근본은 부처님 아닙니까. 우리 중생들이 부처님 생각하는 것이 마치 어머님이 자식을 생각하고, 자식이 어머님 생각하듯이 그렇게 한다고 할 때는 자비롭게 언제나 같이 만난단 말입니다. 내가 본래 부처거니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가 안되겠습니까?
부모님과 자식간은 10겁이라! 열 겁이란 것은 무량 세월입니다. 무량 겁 동안 서로 자식이 되고 부모 되고 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부부간도 그렇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이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고 자식을 어머니 생각하듯이 부처님을 생각한다고 할 때는 자재롭게 언젠가 설사 금생에 못되면 내생에 가서 꼭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염향인자대향래'라. 마치 우리가 향을 지니고 있으면 스스로 향기가 풍기듯이 우리가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고 부처님 생각하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한테서는 부처님 냄새가 풍긴단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어 간단 말입니다.
이것은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 이 분은 참선 법안종(法眼宗)의 제 3 대 조사입니다. 이 분은 그야말로 부처같은 분입니다. 자기 평생 청정하니 맑게 사신 분입니다.
'유심정토유심현'하니, 오직 마음이 본래 정토거니 우리 마음을 닦으로 해서 비로소 스스로 정토를 이룩하고, '자성불타자성개'로다. 우리 자성이 우리 본래면목이 본래 부처거니 우리 스스로 부처를 성취할 수밖에는 없다.
'억모자종봉자재'라.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그리워하듯이 우리가 부처님을 흠모하고 동경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자유자재로 부처님을 만날 수 밖에 없다.
'염향인자대향래'라. 그것이 마치 우리가 향을 지니고 있으면 향내가 스스로 풍기듯이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만큼 부처님 기운이 빛나 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게송은 불교이 시(詩)입니다.
장경혜능(長慶慧稜) 선사. 이 분도 중국 당나라 때의 위대한 선사입니다.
설봉스님의 법 제자인데 굉장히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입니다. 이 분은 12년 동안이나 자기 스승도 방문하고 또 제방도 방문하면서 어떻게 공부를 열심히 했기에 좌복을 12개나 떨어뜨렸습니다.
하루종일 앉아 있으니까 좌복이 빨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좌복이 그와 같이 많이 떨어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안 통한단 말입니다.
본래가 부처라 하더라도 부처가 되는 것이 쉬운 길은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도 지금 천리 만리입니다.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부처가 되는 것이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 분도 위대한 선사이지만 그렇게 12년 동안이나 자기 스승한테나 제방에 다니면서 그냥 좌복이 12개나 떨어질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허나 말이 안 통한단 말입니다. 이른바 확철대오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에 친 발을 걷는 순간, 발을 걷고서 풍광을 보는 순간 마음이 확 트였단 말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순간은 찰나인 것입니다. 깨닫는 순간까지 가기가 어려운 것이지 깨닫는 순간은 찰나입니다. 그렇게 깨닫고 읊은 시입니다.
2. 장경혜릉선사(長慶慧稜禪師) - 당나리 시인
야대차의야대차의(也大差矣也大差矣)
- 깨닫기 전과는 큰 차이로다 큰 차이로다
권기염래견천하(捲起簾來見天下)
- 발을 걷으니 온 천하 다 보이네
유인문아해하종(有人問我解何宗)
- 누가 나의 종지를 묻는다면
염기불자벽구타(拈起拂子劈口打)
먼지털이로 아가리를 날리리라
'야대차의야대차의' 깨닫기 전의 자기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큰 차이로다, 큰 차이로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견성오도(見性悟道)한 사람이나 범부나 비슷하지 않는가? 모양이나 얼굴이나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정신적인 의미에서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큰 차이로다, 큰 차이로다.
'권기염래견천하'하니, 발(無明)을 걷으니 온 천하가 다 보인단 말입니다. 온 천하가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발을 걷는 순간에 깨달아 버리니까 이제 막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인문아해하종'을, 어떤 사람이 나한테 당신의 깨달음은 어떠한 것인가?
당신의 종지는 무엇인가? 이렇게 물어오면, '염기불자벽구타'라. 불자는 총채로, 이것은 먼지털이도 되고, 또 큰스님들이 위의를 풀기기 위해서 들기도 합니다. 총채로 그 사람의 입아리를 냅다 짜개 버린단 말입니다.
당신의 깨달음이 어떠한 것인가? 당신의 종지가 어떠한 것인가? 이렇게 누가 나한테 물어 온다면 총채로 그 사람의 아가리를 때려서 날려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깨달음이 쉽게 그냥 말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생명을 걸고도 죽을둥 살둥 모르고 공부해서 그렇게 된 것인데 그냥 분별시비로서 알아 버리려고 한단 말입니다. 도인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그 '방'을 하고 내려치고 하는 것도 다 그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고생고생 해가며 오랜 세월 동안에 그렇게 얻어서 그와 같이 본래면목을 통한 것인데 그냥 말 몇 마디로 알아 버리려고 합니다.
따라서 똑같이 참구자득(參究自得)이라. 어느 누구나 다 똑같이 참구해서 혜릉(慧稜) 스님 모양으로 그야말로 좌복을 몇 십 개나 떨어뜨리고, 신명(身命)을 걸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을 그냥 당신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말로 알아먹으려고 하면 화가 나겠지요.
3. 석옥청공선사(石屋淸珙禪師) - 태고스님(고려말)의 스승의 열반송
청산불착취시해(靑山不着臭屍骸)
- 청산은 냄새나는 시체를 싫어하니
사료하수굴토매(死了何須掘土埋)
- 죽은 후에 이 몸 땅에 묻어 무엇하랴
고아야무삼매화(顧我也蕪三昧火)
- 돌아 보건대 (스스로)내 몸 태울 삼매화가 없으니
선전절후일퇴시(先前絶後一堆柴)
- 잠시 후에 몸을 태울 장작더미만 쌓였네
이것은 석옥 청공화상의 게송입니다. 고려 말엽 태고스님께서 중국에 들어가서 법을 받으신 선사가 석옥 청공화상입니다. 청공화상이 열반에 들으실 때 읊은 게송입니다.
“청산불착취시해'요, 그 푸른 산은 이 냄새나는 시체를 붙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맑은 푸른 산이 썩어서 문드러지는 시체를 묻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명당을 찾아서 묻고 옮기고 하지만 푸른 산도 하나의 생명인데 다 썩어가는 몸뚱이를 파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사료하수굴토매'로다. 내가 죽어서 하필이면 꼭 땅에 묻어야 할 것인가? 그 맑은 푸른 산도 냄새나는 내 시체를 붙이기를 싫어하니 내가 죽어서 하필이면 꼭 산에다 흙을 파고서 묻어야 할 것인가?
그러나 '고아야무삼매화'인을, 내가 나를 돌아보니 내 몸을 태울만한 삼매의 불이 없구나!
저는 가끔 얘기를 합니다만 과거의 위대한 도인들은 자기가 공부를 해서 자기 삼매의 불로 스스로 몸을 태웠단 말입니다. 그런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부터서 육조혜능 스님까지 그 분들 가운데서 대체로 7할 정도는 모두가 화광삼매(火光三昧)라. 불 화(火)자, 빛 광(光)자, 자기 몸의 심장에서 불을 내어 스스로 몸을 태웠던 것입니다.
다른 스님들도 할 수 있었지만 인연 따라서 안 하셨고, 정말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할 수 있는 참다운 깨달음에 있어서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에서 불을 내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서 바람 내려면 바람 내고, 불을 내려면 불을 내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그런 경계는 아직도 천리만리이기 때문에 부끄럽게 생각하고 지금 죽음이 온다고 생각할 때는 이런 스님 모양으로 한탄하는 노래나 부를 수밖에 없겠지요. 나를 돌아보니 삼매로 내 몸을 태울 불이 없단 말입니다.
'고아야무삼매화'라. 내가 나를 돌아보니 내 공부가 아직은 선정이 부족해서 삼매의 불이 없구나!
'선전절후일퇴시'로다. 다만 지금 곧 있다가 사라질 이 몸뚱이와 화장할 나무 한 무더기만 앞에 있구나! 시체를 화장하고 나면 다 사라지고 말겠지요. 선전절후(先前絶後)라는 뜻은 지금은 있지만 곧 잠시 뒤에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꼭 삼매의 불을 내어서 자기 몸뚱이를 보란듯이 중생한테 보일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공부를 잘 했다 하면 이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새같이 신앙심이 부족할 때 정말로 그렇게 의젓하게 열반에 들어서 자기 심장에서 불을 내어 화장할 수 있다면 중생들의 신심을 얼마나 북돋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꼭 그런 정도의 참선을 많이 한 분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설만세계화(設滿世界火) - 세계가 불로 가득 하드라도
필과요문법(必過要聞法) - 필히 통과하여 법문 들으라
요당성불도(要當成佛道) - 마땅히 성불하여서
광재생사류(廣濟生死流) - 널리 중생을 제도하라
그 다음에는 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설만세계화'라도, 설사 온 세계가 불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필과요문법'이라. 꼭 반드시 통과해서 법을 들을지라.
요(要)자는 '꼭'이라는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반드시 통과해서 꼭 법을 들어라! 그냥 놀려 가듯이 법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불로 가득 차 있을 지라도, 그러면 가다가 못 가고 불에 타 죽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꼭 통과해서 법을 들을 지니라.
'요당성불도'라. 요긴할 요(要)자는 굉장히 중요하게 쓰입니다. '꼭'이란 말도 되고 '한사코'라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한사코 마땅히 불도를 성취해서, 한사코 부처가 되어서...
'광재생사류'라. 널리 생사에 헤매는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 하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설령 온 세계가 훨훨 타오르는 불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반드시 통과해서 불법을 듣고 그래서 한사코 우리가 부처를 성취하여서 무량중생을 제도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오늘 저녁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삼시교판(三時敎判)
삼시교판이라!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의 설법을 49년 설(說)이라 합니다. 더러는 45년 설도 있으나 부처님이 30세에 깨달았다고 보면 보통 49년설이 정설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법문을 한꺼번에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때그때 중생 근기에 따라서 하신 것입니다.
그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인도(印度)란 나라는 지금도 9억쯤 되는 인구를 수용하고 있는 큰 나라이고 떵덩이도 넓은 나라이기 때문에 그 때 당시는 교통이 아주 나빠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80평생을 사셨지만 부처님이 금생에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3분의 1도 못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어디서 위대한 사람이 태어났다 하면 금방 알곤 합니다만 석가모니 같이 위대한 성인(聖人)이 인도에 태어나서 80년 동안 지냈지만 3분의 1도 몰랐다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문을 제대로 소화시키는 분들은 아주 극소수가 되었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초기 법문은 아주 쉽게끔 어느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애초에는 부처님계서 신중(神衆)들이나 고급 영(靈)이나 그런 중생들한테 화엄경(華嚴經)을 법문 하셨다 합니다. 화엄경 법문은 석가모니께서 깨달은 그대로 아주 에누리 없이 말씀하신 고도의 법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못 알아듣는단 말입니다. 신장이나 알아듣지 우리 인간은 통 못 알아듣습니다. 때문에 할 수 없이 차원을 낮추어서 일반 사람들한테 낮은 법문을 하셨습니다.
제일시교(第一時敎) - 유교(有敎)
실재한 아(我)가 있다는 망집(妄執)을 깨뜨리기 위하여 아(我)는 공(空)하나 사대오온(四大五蘊) 등의 제법은 실유(實有)하다 함. 아함경(阿含經)등의 소승경(小乘經).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우리 중생들이 느끼는 그런 차원에서 중생 시각에 맞추어서 하신 법문이 제일시교(第一時敎)입니다.
따라서 보통 우리가 아는 것은 제일시교.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짓도 하고, 앞서 업감연기(業感緣起)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쁜 짓 하면 거기에 상응된 벌을 받고 좋은 일하면 그만큼 정화가 되고 행복이 온다.
그런 정도의 법문들은 모두가 제일시교에 해당된 법문입니다.
이것을 있을 유(有)자 유교(有敎)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이 있다 하는 세계 아닙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산이 있고, 무엇이 있고 하는 세계가 우리 중생들이 보는 세계고 그리고 거기에 맞는 가르침이 유교입니다.
유교 이것은 아함경(阿含經) 등 소승경이 유교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보는 대로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차원의 유교 이것은 대승(大乘)이 못됩니다. 이것은 소승(小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비록 소승경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 가운데는 다 대승이 갈무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자로 해서는 표현은 안했다 하더라도 다 깨달은 우주의 만유를 제대로 온전히 통달한 부처님 차원의 말씀이기 때문에 중생이 불쌍해서 중생에 걸맞게끔 낮은 법문을 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대승 법문이 다 깔려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셔야지 '소승 법문에는 대승은 전혀 없고 소승뿐이다.' 그래 버리면 또 허물이 됩니다.
아무튼 아함경같은 그런 경은 초기에 부처님께서 일반 대중들한테 설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부처님 육성같고 동시에 우리 수행면에서는 아주 중요한 법문이 많이 들어 있는데 지금 와서 이 쪽 대승권에서는 좀 소홀히 합니다.
불교는 대승권, 소승권이 있습니다. 대승권은 중국(中國), 한국(韓國), 일본(日本) 이런 나라가 대승권이지요. 소승권은 저 쪽 스리랑카, 또는 네팔이라든가 동남아 지방에 있는 불교는 대체로 소승권이라 합니다.
그래서 소승권들은 주로 아함경같은 경을 합니다. 소승권에서 허물이 무엇인가 하면 앞서 우리가 누누히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이 본래로 부처다' 이런 말을 소승권에서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소승권에서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란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가 소승과 대승을 구분하여 보았을 때 스리랑카나 동남아에서 온 불교는 수행면에서는 중요하기도 하고 모양은 좋게 보이지만 불교로 봐서는 소승권이기 때문에 안심법문이 못됩니다. 항시 갑갑합니다.
본래 모든 것이 바로 부처다. 이런 소식을 그네들은 모른단 말입니다.
대승은 거기에 대해서 가장 근원적인 본체를 딱 들어낸단 말입니다. 본래적인 형이상학 그런 것이 완전히 대승권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너무나 거기에 치우쳐 '본래 부처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또 그런 사람들도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행동이라든가, 계율이나 그런 것을 대승권에서는 함부로 하는 분이 있습니다. '술이나 고기나 그런 것도 먹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함부로 말입니다.
'본래 때묻지 않은 것이고 본래가 부처인데 그것이 뭐 허물이 될 것인가?' 어떤 아주 특별한 경우에 먹기는 먹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합리화 시켜서 먹어서는 안됩니다. 소승경에서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말씀하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고기 먹는 것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고기를 먹어서 이른바 단백질은 좀 많아지고 스테미너는 나아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걸로 해서 우리 세포는 더욱 오염되는 것입니다. 돼지나 소나 닭이나 그런 축생들은 사람보다는 진화가 훨씬 덜 된 동물들 아닙니까. 불교 말로 하면 업장이 훨씬 더 무거운 것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세포가 내 몸 세포로 들어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좋을 턱이 없습니다.
다행히도 현대 병리학자들은 이 문제를 다 밝히고 있습니다. 이른바 문명병인 당뇨벙, 고혈압, 심장병들이 훨씬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성자가 하신 말씀은 지금 인류 과학자들이 미쳐 다 밝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 신앙인(信仰人)들은 일단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자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를 내다봅니다.
과거를 환히 내다보는 이른바 숙명통(宿命通), 또는 미래를 내다보는 천안통(天眼通)을 하십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천안통은 미래 세상을 다 알고 동시에 이 현세를 모두 다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또 남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보고, 일체 세간의 음성(音聲)을 다 듣는 것이고, 가령 개가 멍멍 짖으면 저 개가 무슨 생각을 하고서 짖는가? 그걸 다 안단 말이니다.
또는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이른바 신족통(神足通)이라. 신여의통 이것은 쉽게 말하면 축지법(縮地法)이란 말입니다. 순간동안에 마음을 먹으면 천리 만리 가버립니다. 그와 동시에 모양을 바꿔서 중생한테 다른 모습으로 나투는 것입니다. 중생이 불상하면 중생한테 극락세계의 훤한 빛나는 모양을 그대로 다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많은 사람 수대로 빵을 기적적으로 만들어 내 놓곤 하신 것이 모두가 거짓말이 아닙니다.
성자의 경계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부사의(不思議)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물질 세계를 초월한 부사의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분들이 물질 세계만 가지고서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서 종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종교의 가장 중요한 본체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종교는 결국 형이상학적인 문제입니다.
물질을 떠난 것은 우리가 볼 수가 없습니다. 성자들은 훤히 보고 느끼지만, 우리가 불성(佛性)이 보입니까? 여래(如來)가 보입니까?
불교를 믿는 분들도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려고 합니다. 우선 중생제도(衆生制度) 하려면 무슨 빌딩 많이 짓고, 물질적으로 혜택을 많이 주고, 물론 그런 봉사 사업도 필요는 합니다. 필요하나 그것이 더 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구제하는 일이 더 급선무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하는 것이지 물질로 배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사회복지 사업으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종교가 종교인 점은 우리 정신구제(精神救濟)에 있습니다. 거기다 덧붙여서 힘이 닿으면 유치원도 짓고, 무엇도 하고 다 좋겠지요.
그러나 가장 큰 것은 설사 유치원도 못 짓고, 노인당도 못 짓는다 하더라도 정신구제하는 일이 제일 급하고 큰일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의 한계를 우리가 알아두어야 그래야 자기 점검을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제이시교(第二時敎) - 공교(空敎)
소승중(小乘衆)의 실법(實法)을 집착(執着)을 파(破)하기 위하여 제법공(諸法空)의 리(理)를 설(說)함. 제부(諸部)의 반야경(般若經)
처음에는 우리 중생 차원에서 있다, 없다 하는 이른바 유교(有敎), 우리 중생의 유무를 따지는 그런 경계를 가르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공교(空敎)라! 빌 공(空)자 공교는 참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공교를 해석을 못하면 반야(般若)를 모르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모르면 중도(中道)를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혼신의 힘을 다해서 공교를 알아야 합니다. 공교를 알아서 정말로 무상(無常)이 우리 몸에 배어야 합니다. 무상이 몸에 배어야 그래야 우리 행동이 빗나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 공교를 말씀한 경이 반야경(般若經)이라. 반야경 이것은 600부라.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모두가 다 본래로 공이라.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 색(色)이 공(空)이라. 이런 것을 말씀하신 부처님 경전이 600부란 말입니다. 이렇게 방대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반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아주 집착돼 있는 그런 마음을 풀어서 모두 다 해방시켜야 할 것인데, 해방시키려면 본질대로 진실 그대로 말씀해야 할 것인데 사실 그대로 말하다 보니까 모두가 다 비었다는 그 말씀을 안할 수가 없고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째서 있는 것보고 비었다고 할 것인가? 이것을 우리 불교인들이 알기가 어렵습니다. 불교인 아닌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교인들도 불교를 제법 아는 소리를 하지만 말씀들 들어보면 결국 공도리(空道理)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왜 공(空)일 것인가? 앞 시간에 우리가 연기법(緣起法)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연기법이란 인연(因緣) 따라서 모두가 다 잠시간 모양을 낸단 말입니다.
사실 실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강물 속에 비친 달 그림자같이 우리 중생들이 사실로 착각하여 있다고 집착하는 세계가 중생계입니다.
휘영청 밝은 달이 강물 속에 비친다고 생각할 때에 분명히 물 속에 달이 있어 보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있지가 않은 그림자이듯이 우리 중생이 나라고 생각하고, 너라고 생각하고, 밉다고 생각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틀림없이 물 속에 비치는 달 그림자나 같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앞서도 누누히 말씀을 했습니다만 우리 중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흘러가는 흔적에 불과합니다. 흔적을 잡을 수가 있습니까. 얻을 수가 있습니까.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것입니다.
우리 어제 마음, 오늘 마음이 같지가 않습니다. 마음이 순간 찰나(刹那)도 머물지 않습니다.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항상 이대로 같지 않는가? 몸뚱이도 역시 순간순간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마지않습니다. 일초의 몇 억 분의 일도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연기법(緣起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다. 이렇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物質)이란 공간성(空間性)도 없고 따라서 시간성(時間性)도 없고 인과(因果)도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어야 인과도 있겠지요.
연기법이기 때문에, 나중에 나오는 법문에도 있습니다만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법은 결국 모두가 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는 '인연생'이라는 말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비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흘러가는 것을 잘 파악을 못하니까 실재로 있다고 고집한단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몇 천 번 외운다 하더라도 이 공도리를 모르면 반야심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또 내 의식(意識)도 공이요, 소리도 공이요, 맛도 공이요, 다 공이라 했지 않습니까.
어째서 공일 것인가? 인연생이기 때문에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실지로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있는 것같이 보일 뿐입니다.
젊은 나이에는 사무치게 느끼기가 좀 곤란스럽겠지요. 나이가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면 젊은 시절의 청춘도 별 것이 아닌 것이고 몇 년 안 지나면 무덤에 들어가겠구나. 죽어지겠구나. 죽어지면 또 뭐가 남는가?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이렇게 인간의 경륜(經綸)으로 해서는 느낄 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냥은 잘 못 느낀단 말입니다. 자기 청춘이 항시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예쁜 얼굴이 항시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무상을 느껴야 신앙의 문에 참답게 들어 올 수가 있습니다. 무상을 못 느끼면 신앙의 문에는 못 들어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내 몸뚱이 그대로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대로 있고, 항시 이별도 없고, 재산도 차근차근 불어나고 이렇게만 생각하다가는 깊은 신앙에 못 들어옵니다. 기본적인 범주에서만 뱅뱅 돈단 말입니다. 복(福)이나 빌고 하는 정도밖에는 안됩니다.
내 생명의 본질을 내 스스로 밝혀서 내가 참답게 나를 알고, 우주의 도리를 참답게 밝혀서 알려고 생각할 때는 싫든 좋든 간에 공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무상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상하지 않는 참다운 생명을 우리가 추구하고 구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기독교 바이블에도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을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은 그대에게 주어지리라.' 먼저 근본적인 진리를 구하면 다른 것은 따라 옵니다. 일반 중생들은 그냥 부스러기만 구하려고 생각합니다. 부스러기는 사실은 있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니까 허물어지기가 알맞지요. 있다간 없고 없다간 있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먼저 생명 자체, 생명의 본체인 영생불멸(永生不滅)한 도리를 우리가 참으로 구할 때는 다른 것은 적당히 다 우리한테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남한테 봉사하고 남한테 바치고 하려는 경우 같으면 몰라도 정말로 우리가 영원적인 진리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생각할 때는 필요한 만큼은 다 갖추어집니다.
이 공 도리를 알아야 이른바 반야지혜(般若智慧)! 참다운 반야의 지혜가 있어야 우리 공부가 순풍에 돛단배가 됩니다. 우리 공도리를 모르면 항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고 이렇게 생각할 때는 우리 공부는 항시 빡빡합니다.
'이렇게 아끼는 이 몸뚱이 이대로 공이다.' 이렇게 느껴 버려야 합니다.
'금쪽같이 아끼는 이 몸뚱이 이대로 공이다.' 이렇게 느껴야 공부가 되는 것이지 이 몸뚱이 이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가족만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만 소중하고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 정도로는 참다운 도덕(道德)도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도덕은 진리에 따라서 진리에 맞추어서 모든 것이 다 허망하고 무상하다고 알아야 참다운 도덕이 확립이 됩니다. 참다운 철학(哲學)이 있어야 참다운 도덕이 됩니다.
이렇게 비었다는 것을 저는 항시 말씀드립니다만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이 증명을 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모든 물질의 기본적인 작은 알갱이가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측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떤 물질도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로 구성 안 된 것은 없습니다. 산소나 수소나 다 그렇습니다. 모든 물질이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들이 어떻게 모여 있는가? 결합 여하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무엇이 되고 그럽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분자가 되고 성분이 도고 우리 세포가 되고 다 그러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어떠한 것이고 모두가 다 기본적인 조그마한 알갱이는 내내야 전자, 양성자, 중성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를 구성한 물질의 근본 이들 알갱이는 위치나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가 모른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앞 시간에 말씀드린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그런 위대한 천재들은 그야말로 훌륭한 물리학자이면서 철학자입니다. 대 천재가 평생동안 연구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전자현미경을 놓고, 또 그렇게 어려운 고등 수학과 사고(思考)로 풀어 봐도 결국은 물질의 알맹이는 측정할 수 없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란 말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몰라버리니 그들로 이루어진 것 역시 무엇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다만 물리적인 차원의 기본은 장(場) 에너지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의 본질에 대해서는 해답을 못 내립니다.
그 에너지가 좌편으로 진동하면 양성자가 되고, 에너지가 우편으로 진동하면 전자가 되는 것입니다. 소위 금진좌선자기(金塵左旋磁氣)요, 금진우선전기(金塵右旋電氣)라! 순수 장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느냐에 따라서 음양(陰陽)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역에서는 음양이 나오는 우주의 순수한 정기(精氣)를 태극(太極)이라 하지 않습니까. 우주의 정기가 어떻게 진동하는가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음이 되고 양이 되곤 한단 말입니다.
이러는 것이지 고유한 물질은 없습니다. 물질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벌써 공(空)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물질이라는 것은 본래 에너지의 진동뿐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번복을 시키겠습니까. 수많은 우수한 과학자, 철학자들이 다 결론을 내린 것이고 또한 동시에 부처님께서 다 밝혀 놓고 옛날 성인들이 다 밝힌 것입니다.
그리스의 플라톤도 역시 현상계(現象界)와 이상계(理想界)라. 참다운 이상계만 존재하는 것이고 현상계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어느 철인들이나 대체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칸트같은 대 천재도 물(物) 자체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다.
이것이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모두가 다 비었다는 부처님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좋아하고 하는 것이 모두가 다 있다는 차원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그렇습니다. 싸우고 아귀다툼하고 전쟁이고 다 그렇습니다.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없다고만 생각해 버리면 그런 저런 것 다 풀려버립니다.
그래서 반야사상(般若思想) 즉, 반야지혜(般若智慧)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공부는 앞서 말씀과 같이 순풍(順風)에 돛단배와 같습니다.
이 몸뚱이 다 빈 것이건 고행 좀 하면 무슨 상관 있겠는가. 내 몸뚱이 본래 빈 것인데 덜 먹이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생명이란 것은 본래로 빈 공체(空體) 것이기 때문에 좀 덜 먹고 더 먹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꼭 몇 칼로리를 먹어야 된다. 이렇게 우리가 있다는 것에 착(着)을 하니까 그런 것을 채우려고 막 먹는 것이지 본래가 비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우리 몸무게도 본래 없기 때문에 이대로 저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본래가 빈 것이기 때문에 본래 사실은 무게도 없는 것입니다. 본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무게가 없다고 봐야겠지요. 무게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도인(道人)들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하늘로 훌쩍 날라 갈 수가 있단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적으로 생각을 해도 신통(神通)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도 신통 그러면 그것은 재주나 부리는 것이지 참다운 도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함경이나 기타 부처님 경전을 보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나 신통 말씀이 하여튼 수 천 군데가 넘습니다. 성자의 말씀은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이 공 소식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있다고 집착하는 중생의 번뇌를 쳐부수기가 하도 어렵기 때문에 600부나되는 부처님 경전에서 공소식을, 이것도 비고 저것도 비고, 금강경(金剛經)만 보아도 아상(我相)인 나라는 상도 없고, 인상(人相)인 너라는 상도 없고, 중생상(衆生相)도 없고, 또 수자상(壽者相), 목숨이 짧다 길다도 없다고 설파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 목숨은 80년이다. 70년이다. 그렇지만 그런 연한(年限)도 역시 물질이 있다고 전제(前提)할 적에 그런 시간(時間)도 있는 것이지 물질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무슨 시간이 있겠습니까. 비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항시 느끼십시오. 느끼시고 마음이 괴롭고 지칠 때는 내 몸뚱이도 본래 빈 것이고, 생명은 본래 무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생명은 본래 꼭 칼로리만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저번에 신문을 보니까 인도에서 어느 수행자는 120일 동안 물만 먹고살았어요. 120일 동안 옆에 분들이 모두 증명을 해 놨습디다.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잠재력은 우리가 정말로 마음만 굳게 먹으면 부사의한 힘을 다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밖에는 아니다. 나는 꼭 얼마를 먹어야 된다. 하루 세끼 먹고 간식도 먹어야 내 체중을 유지한다. 고기는 얼마를 먹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빈 소식을 알 수가 없지요. 그렇게 믿으니까 그렇게 안 먹으면 허기가 지고 영양실조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제삼시교(第三時敎) - 중도교(中道敎)
소승(小乘)의 유집(有執)과 보살(菩薩)의 공집(空執)을 아울러 파(破)하기 위하여 비공비유(非空非有)의 중도(中道)를 명(明)함.
해심밀경(解深密經),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제삼시교는 삼시교 가운데 마지막 시교인데 중도교라고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다 비었다고만 해버리면 그때는 너무나 허망하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허망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한 것은 모두 비기는 비었는데 참다운 알맹이는 결국 부처입니다. 이른바 중도교란 말입니다.
천지 우주는 그냥 아무 것도 없이 빈 것이 아니라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성품, 하나님의 성품이 우주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이 섭리(攝理)하시고 부처님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잘 못 아시는 분들은 기독교는 비과학적이고 현대에는 맞지 않다. 그렇게 말하지만 현대와 같이 이렇게 개명(開明)한 시대에 18억 인구가 믿고 있습니다. 예수가 가신지 1900년 세월 동안에 무수한 사람들이 믿어 왔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순 소박하게 말씀해버렸기 때문에 그것이 이론적으로 체계가 별로 안 서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기가 곤란스러운 것이지 진리상으로 봐서는 모든 진리가 하나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어느 성자(聖者)의 말씀이나 다 존중하고 숭앙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다 그럴 때입니다.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이런 경전들은 천지 우주는 모두가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이다.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가르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아함경만 보신 분들은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소식만 말해 있으니까 꼭 그것만 집착해 가지고서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 반야심경, 금강경 같이 모두가 비었다고 가르치는 경만을 주로 보신 사람들은 모두는 비었으니까 허망하지 않는가. 허망한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부처님 공부를 하실 때는 꼭 이 중도사상(中道思想), 본래 부처님께서 조금도 에누리 없이 진리(眞理)를 우리한테 보여주신 그 도리를 가르친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이런 경들을 보셔야 우리 마음이 허무에 물들지 않고 마음의 번뇌만 끊어버리면 이대로 다 진여불성 중도실상이며 이 세상도 이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일 수가 있는 것이고, 우리 마음도 바로 안심(安心)하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 되어서 조금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시교를 부처님 비유담으로 삼수도하(三獸渡河)라 합니다.
삼수도하란 세 마리의 짐승이 냇물을 건넌단 말입니다. 토끼와 말과 코끼리 셋이 내(川)를 건너가는데, 토끼는 몸집이 가벼워서 냇물 위에 둥둥 떠서 방정맞게 건너간단 말입니다. 말은 덩치가 토끼보다는 크고 무게가 있으므로 잠기기도 하고 뜨기도 하면서 불안스럽게 건너갑니다.
그러나 코끼리는 덩치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뚜벅뚜벅 강 바닥에 발자국을 내면서 안전하게 건너갑니다.
그래서 유교는 모든 것을 중생의 상식 차원에서 '좋다, 궂다.' '있다, 없다' 이런 것만 따지는 마치 토끼가 내를 건너가는 격이고, 우주의 진리가 깊고 심심미묘한데 깊은 진리까지는 음미를 못하고 그냥 겉만 피상적으로 흘려 간단 말입니다.
그리고 말(馬)은 조금 덩치가 크므로 가끔 깊이 잠기기도 하지만 또 역시 바닥을 미처 음미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공교라. 다 비었다는 소식만 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본 것이 비었지 참으로는 진여불성으로 충만되어 있는 것입니다.
코끼리는 뚜벅뚜벅 진리의 바닥을 다 딛고 건너갑니다. 때문에 코끼리가 건너는 것을 중도교에 비유합니다.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그런 가르침은 모두가 중도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바쁘셔서 어느 세월에 이와 같은 경들을 다 보시겠습니까. 안 보신다 하더라도 이 중도교의 도리를 아시게 되면 보신 것이나 똑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하신 최후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의 가르침입니다.
첫 시간의 안심법문에서 말씀드린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의 본질이나 우주 만유의 본 바탕이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하신 것도 중도의 법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단한 법문 같지만 그 하나 가운데 상식을 초월하고 또 모두가 비었다는 허무주의를 초월하고 부처님이 하시고 싶은 그 말씀을 그대로 표현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신도님들이 오시면 반야심경을 드립니다. 반야심경을 드리는 이유가 뭐인고 하면 너무나 상식에만 끌려서 항시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일상적인 가르침에만 머물러 버린단 말입니다. 이른바 세속적인 '있다. 없다'하는 저속한데만 머물러 버립니다.
따라서 그것을 타파하려면 모두가 다 비었다. 반야심경에 있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이루어진 색온(色蘊)도 공이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온(四溫)도 공이다. 따라서 육진 경계인 색(色)도 공이요, 소리도 공이요, 냄새도 공이요, 맛도 공이요, 내 감촉도 공이요, 내 뜻으로 짓는 제법도 공이다.
이런 법문으로 해서 우리가 공 소식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또 반야심경만 봐 놓으면 그야말로 모두가 다 공인줄만 알고 참말로 진정한 알맹이는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으로 해서 우선 우리 마음의 허망한 상을 다 쳐부수고 그 다음에는 중도실상, 참다운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여불성 자리, 본래 부처님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를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보리방편문'을 드리곤 합니다. 저희가 많이 준비가 돼 있습니다. 한국서 인쇄를 해가지고 짊어지고 미국까지 건너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실 때 듬뿍듬뿍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반야심경' '보리방편문' 말입니다.
제법 공도리, 반야사상 또는 중도사상, 참다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공과 중도가 같이 어울려 있어야 참다운 반야바라밀이 됩니다. 우리가 법문을 할 때에 항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을 봉송하지 않습니까.
마하반야바라밀!
유식삼성(唯識三性)
1. 편계소집성(遍計所執性)…정유리무(情有理無)…실무망유(實無妄有)…유(有)
2. 의타기성(依他起性)…여환가유(如幻假有)…공(空)
3. 원성실성(圓成實性)…정무리유(情無理有)…실유망무(實有妄無)…중도(中道)
그 다음 법문은 유식삼성이라. 오직 유(唯)자, 알 식(識)자. 식 이것은 의식(意識)이란 식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식, 이것은 우리 의식만의 식이 아니라 의식보다도 더 깊은 이른바 말나식(末那識)이라. 그 다음 깊은 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그 다음 깊은 식은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그리고 모든 식의 근본 바닥은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 바탕은 다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불교는 여기까지 알고 보면 알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우리 지금 쓰고 있는 이 마음의 바닥은 '말나식'이라는 그런 마음인 것이고, 그 마음이 또 '아뢰야식'이라는 모든 종자를 갈무리하는 그 마음인 것이고, 그 바탕이 또 '암마라식'이라는 청정한 마음입니다. 또 그 바탕이 부처님이라. 이른바 불성(佛性)입니다.
그래서 유식(唯識)이라 할 때 이것은 다 통해서 천지 우주 모두가 다 오직 식(識)뿐이다. 이런 도리입니다.
이 때 유식은 물질이나 정신이나 어느 것이나 다 포함됩니다. 천지 우주가 모두가 다 오직 식뿐이라는 이런 뜻입니다.
유식삼성(唯識三性)이라.
모두가 식뿐인 것인데 이것도 역시 나누면 세 차원이 있습니다. 식을 다 아는 사람이 따지는 것과 우리 인간의 의식밖에 모르는 사람이 따지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에 앞서서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라.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우리 중생이 태어나고 죽고 하는 그렇게 흘러가는 세계가 삼계 아니겠습니까. 삼계도 역시 오직 마음 뿐입니다. 마음 잘못 먹으면 나쁜데 태어나고, 마음 잘먹으면 좋은데 태어나고, 그러나 실은 무생물이고 자연계고 모두가 다 오직 마음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단단한 금(金)이나 은(銀), 이런 금속은 유심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마십시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금이나 은도 역시 내내야 금의 원소, 은의 원소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들 역시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걸로 된 것이고 따라서 어느 것이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모두가 에너지뿐입니다. 장(場) 에너지의 본질 마음 즉, 유심(唯心)뿐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나와서 굉장히 편리합니다. 물리학이 모든 물질은 다 에너지다. 이렇게 부처님의 '색즉공'을 제대로 말해 있단 말입니다.
그 근본 바탕을 다 말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선 공도리를 말해 있습니다. 따라서 공도리만 알아도 굉장히 살기가 편합니다. 그냥 직속으로 가뿐하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우리 몸뚱이 간수하고 지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옷도 기왕이면 좋은 옷 입혀야 하고, 멋도 내주어야 되고, 음식도 영양 가치가 있어야 되고, 집도 살면서 이리저리 돌봐 주어야 되고, 저같이 다 포기하고 지내다 보면 자기 몸뚱이 별로 관심을 안 두면 참 편합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고, 지내다 보면 어느 분이 생각한다고 뭘 갔다주면 좀 먹어 놓으면 몸만 무겁고, 지금 우리 인간만이 음식에 너무나 곪아 빠져 있습니다. 천상(天上)에 올라가면 음식이 없습니다. 귀신도 냄새만 맡습니다.
우리 생각으로 인간이 다인 줄 알지만 인간은 저 지옥보다는 훨씬 높고 짐승보다 높고 아귀 귀신보다도 높다 하더라도 천상에 비해서는 저 밑이란 말입니다. 인간이 절대로 만물의 영장이 아닙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해서 만물의 영장이지 영혼의 차원에서 보면 인간보다 높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그런 높은 세계는 음식이 필요치가 않습니다.
색계는 올라가도 남녀이성도 없습니다. 어느 사람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남녀가 다 각각 쌍쌍인데 귀하게 살 것이지 중 돼서 뭘 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느 세계나 다 남녀 양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욕계 내에만 남녀가 있습니다. 색계 이상은 남녀가 없습니다. 하물며 극락에서는 어디 남녀가 있겠습니까.
극락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마음을 깨달은 성자만 지내는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다 부인해 버리지만 부처님 말씀은 사실은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욕계, 색계, 무색계 모두가 다 마음뿐입니다.
무색계에 올라가면 마음만 존재합니다. 모양도 없고, 색계는 욕심도 없고, 우리 몸은 훤히 빛나는 광명(光明)뿐입니다. 인간 세계만이 이와 같이 오염된 몸뚱이가 있습니다. 오염된 것을 많이 먹으므로 항시 오염될 수밖에 없겠지요.
최초에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몸에서도 광명이 나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비행자재(飛行自在)라. 천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가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지구에 내려와서 이것저것을 먹다보니 오염되고 무게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남녀 차이가 생기곤 했습니다. 애초에는 남녀 차이도 없었습니다. 먹다 보니까 신진대사(新陳代謝)할 필요 때문에 차근차근 남녀 성(性)이 구별된 것입니다. 색계 이상 올라가면 남녀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부나 수녀나 비구나 비구니가 그렇게 독신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남녀 양성이 꼭 결합해서 같이 부부가 되야 한다는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되어도 좋고 안되면 더욱 좋고 말입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그래서 천지 우주의 성품이 모두가 다 식으로 되고, 마음으로 되고 한 것인데 그것도 역시 차원 따라서 구별하면, 번뇌(煩惱)에 때묻은 우리 중생이 쓰는 마음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란 말입니다. 편(遍)을 '변'으로도 발음합니다만 음으로만 썼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 중생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서 모든 것을 두루 치우치게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변계(遍計)라는 것은 모든 것을 치우치게 이리저리 억측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갑(甲)이 보면 밉지도 않은데 을(乙)이 볼때는 밉단 말입니다. 별로 예쁘지 않은 사람도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가 보면 예쁘게 생각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모두가 치우치게 보는 것입니다. 치우치게 봐서 집착하는 성품을 가리켜서 편계소집성이라 합니다. 따라서 편계소집성. 이것은 중생들 차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사무의 실상을 못보고, 사물의 실상은 불성 아닙니까.
우리가 있다고 보는 것은 다 빈 것이고, 참다운 실상은 불성인데 진여불성에서 봐야 바로 보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바로 보지 못하니까 업장에 가리운대로 고집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좀 베풀어주면 좋은 것이고, 자기를 해치면 별로 안 좋고, 그래가지고 항시 꼼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변계소집성입니다.
이런 것은 따지고 보면 정유리무(情有理無)라.
우리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 이렇게 보이는 것이지 원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남을 미워할 때나 지나치게 좋아하실 때도 꼭 이런 것을 생각을 하십시오.
이것은 우리 중생의 망령된 잘 못 보는 그 마음에 있는 것이지, 즉 정(情)에 있는 것이지 원래 우주의 도리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인들이 남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정유리무의 범부 소견이라. 진리를 모르는 우리 범부의 하나의 견해에 불과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때그때 우리 스스로의 생활을 반조(返照)하고 돌이켜 봐서 바른 길을 나가기 위해서 하신 경책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와 같이 자기 스스로 잘못 봐서 집착하여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서 비로소 있다고 하는 것이지 진리에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다, 궂다 하는 이런 집착은 어두운 범부의 소견일 뿐입니다.
불교는 가장 심오한 하나의 철학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그리 생각하시고, 제가 아무리 쉽게 말씀드리려 해도 쉽게 말할 수도 없고, 특히 저는 말주변이 없기에,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옮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하면 또 말이 안되고, 그래서 제 말씀이 어렵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인생관적인 철학적인 문제이므로 해득을 각자 하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부처님 법은 우주의 보배입니다. 지금 세계의 석학들이 누구나가 말해 있습니다. 앞으로 세계 인류를 구제하고, 동서 양 진영이 화합하고, 21세기를 참답게 이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누구나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위대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철학에서는 역설하지 못한 가장 궁극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가르침, 이것이 이른바 중도(中道)입니다. 중도가 되어야 참다웁게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빌린 것이 되는 것이고 동시에 그래야만 세계의 문화 현상을 하나로 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가 잘못하면 국가간에 문화의 골이 깊어질 수가 있습니다.
의타기성(依他起性)
그 다음에는 좀 더 차원이 높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 즉,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성품이란 말입니다.
나라는 것도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지고 또 내가 미워하는 마음도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이 세상에 인연이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입니다.
그리고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여환가유(如幻假有)라. 마치 허깨비같이 가짜로 잠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나 너라는 존재나 태양계(太陽系)나 뭣이든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이것은 허깨비같이 가짜로 모양을 나툰 것입니다.
저번 신문에 보니까 수 억 광년의 은하계 속에서 별들이 충돌하여 하나의 빛으로 화해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 지구도 오랫동안 몇 백 억년 지나면 하나의 광명(光明)으로 화해 버리는 것입니다. 허망하단 말입니다.
소중한 내 몸뚱이나 그대 몸뚱이나 내 집이나 모두가 다 가짜로 잠시간 중생의 망식에 있어 보이는 것이지 실재로는 있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가짜로 잠시간 인연 따라서 존재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설사 집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원래 가짜로 있는 것 허망한 것이니까 무방하지 않겠는가. 집이 없어지면 모처럼 수행자(修行者)같이 내 공부 한 번 해 보겠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는 훌륭한 백작으로 여러 사람들을 많이 지도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라면 자기 집의 농노(農奴)를 다 해방시키고 토지(土地)를 다 나누어주고 싶은데 자기 아내가 반대한단 말입니다. 백작부인 입장에서는 식구도 많고 하므로 역시 반대할 만도 하지요. 그러나 톨스토이 자기는 도저히 합당하지 않습니다.
본래 무소유(無所有)가 아닌가. 나라는 것도 본래 없는데 내 소유가 어디가 있는가? 농토(農土)는 농민들이 짓는 것이지 왜 내가 가지고 있을 것인가? 이렇게 해서 항시 아내와 싸웠단 말입니다. 아내는 놓치자 않으려 하고 자기는 남한테 다 분배하여 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다 겨우 87세가 되어서 비로소 자기 아내한테 편지를 써 놓고 집을 나섰단 말입니다. '당신이 나한테 당부한 것은 당신 차원에서는 다 옳았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렇더라도 나는 진리(眞理)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죽음에 임박해서 정말로 무소유, 아무것도 없이 다 버리고 진리만 따라간다' 이렇게 써 놓고 오직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집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내한테 마지막 하직의 글을 남겨 놓고 집을 홀로 나와 눈보라 속을 헤매다 결국 쓰러져서 죽지 않았습니까? 톨스토이 역시 진리를 믿고 스스로 집을 나와서 하나의 수행자가 되어서 죽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불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기 마음속으로는 행복스러웠겠지요. 그 분한테는 죽음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위대한 분들은 그와 같이 다 통합니다. 어떠한 경우도 손해가 없습니다. 진리로 해서 인생의 무상(無常)을 느끼고, 자기 몸뚱이 아프면 아픈대로…
여러분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 염불삼매보왕론)을 보셨습니까?
보왕삼매론에 보면 아프면 아픈데서 배우고, 배신하면 배신당하는데서 배우고, 만사(萬事)에서 배웁니다.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허깨비같이 가짜로 잠시간 있는 전변무상(轉變無常)의 소지입니다.
모두가 변화해 마지않는 무상한 존재입니다.
너무 행복스러운 사람들은 무상을 모릅니다. 부모님 덕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은 무상을 모르기 때문에 항시 우쭐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에 나아가서 감투를 쓰게 되면 어쩔 줄 모르고 당황을 하지요. 그러나 시험에 떨어져도 보고 부모가 학비를 못 대줘서 고생도 해보고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구나 하고 허무를 좀 느끼고 무상을 알아차립니다.
어느 누구나 실패를 해봐야 무상을 느끼고 고생을 해봐야 인생을 좀 느낍니다. 자기 영혼이 보다 더 성숙되는 것입니다. 성숙이 되어야 비로소 진리에 눈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불행도 우리한테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서 우리 인간을 보다 더 영생해탈(永生解脫)로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되고 안되고 그런 것에 대해서 너무나 집착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최선만 다하면 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 어머니는 어머니의 도리, 자식은 자식의 도리, 기업하면 사업의 도리를 최선만 다하면 됩니다. 잘 되고 못 되고는 인연에 맡기시면 됩니다.
원성실성(圓成實性)
세 번째 가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이것 역시 앞서 진여연기(眞如緣起)나 중도(中道)에서처럼 원만하게 이루어진 참다운 우주의 실상(實相)입니다.
인연 따라서 된 것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이지만 그러나 우주의 참다운 모습은 다만 공인 것이 아니라 결국 원성실성입니다. 자비, 지혜, 행복, 능력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원만하게 갖춰진 그 자리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 생명(生命)은 그 자리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참다운 대승적인 신앙심(信仰心)은 나한테 모든 공덕(功德)이 다 갖춰져 있다. 이렇게 믿어야 대승적인 신앙이 됩니다. 그래야 참다운 용기(勇氣)도 나오고, 사업도 그때는 큰 사업을 할 수가 있겠지요. 장군이 되든 어느 분야로 나아가든 이와 같이 본래적인 영생불멸한 것이 나한테 갖추어진 무한의 가능성, 무한의 에너지다. 이것을 분명히 믿어야 큰 일을 합니다.
원성실성 이것이 우리의 본성(本性)입니다. 이것이 불성(佛性)입니다.
이것은 정무리유(情無理有)라. 원성실성 이것은 우리 망정으로는 없다고 보지만 진리에서는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불성이 지금 보입니까? 우리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서는 불성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망령된 마음에는 없지만 영원한 우주의 도리에서는 분명히 있습니다. 진여불성이나 하나님이나 우주의 도리에서는 있습니다.
원성실성은 정무리유의 진여실상의 묘체(妙諦)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또한 모든 존재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우리 생각이 창조(創造)의 신(神)이다.
화두(話頭)을 들고, 염불(念佛)을 하는 것도 역시 이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우주(宇宙)의 묘체(妙諦)에다가 마음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염불도 실상염불(實相念佛)이 됩니다. 화두를 들 때도 '이뭣고'라고 단순히 의심하는 것만이 이 뭣고?가 아닙니다. 우주의 본체가 무엇인가?
생명의 실상이 무엇인가? 그 자리를 분명히 의심해야 참다운 화두란 말입니다.
달마(達磨) 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이런 것들 모두가 본래는 원만(圓滿)실상을 우리한테 참구(參究) 의심케 하는 말입니다. 화두의 근본 목적 원인이 다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조선(黙照禪)은 화두 없이 수행하는 선(禪)이지만, 그저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 우주는 오직 부처님뿐이다' 이 자리를 비춰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基督敎)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mus 354 - 430)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총(恩寵)에 의해서만이 우리는 구제될 수 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영생불멸한 그 자리를 안 떠나야 우리는 구제를 받는 것입니다. 실유불성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란 자리를 떠나지 않아야 우리가 참다운 구제를 받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우리 본래 생명이요, 부처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을 떠나지 않는 것이 '오! 주여!' 하는 것이고,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기분이 사나울 때나 그렁저렁 생각이 기쁠 때나 곤란스러울 때나 이런 생각은 모두가 변계소집성입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 잘 못 보고서 고집하는 경우, 바로 그냥 '아차!' 하고 '이것도 공(空)이구나' 이렇게 해 가지고서 부정을 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염념참회(念念懺悔)라. 생각생각에 우리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생각 회개(悔改)하고서 염념상속(念念相續) 하나님, 부처님한테 우리 마음을 돌려야 됩니다.
현상적인 것은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것이고, 참다운 것은 죽으나 사나 언제나 우주가 다 파괴되든지 말든지 간에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 생명의 본 모습, 원성실성(圓成實性) 즉불(卽佛)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신도님들 오늘 저녁 바로 염불(念佛)을 하시더라도 그냥 염불이 아니라 불성 자리, 영생불멸하는 생명의 실상 자리에 마음을 두시고 염불을 하십시오.
잠자실 때도 실상 자리에 마음을 두시고 잠드시면 나쁜 꿈도 안 꾸어집니다. 그리고 잠자시는 동안도 우리 마음이 걸음걸음 차근차근 불성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은 창조(創造)의 신(神)입니다. 나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나빠지는 것이고 부처님 하나님을 생각하면 본래가 부처인지라 우리가 부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공부하시기 참 쉬운 것입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하셔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광명․광명열반
열반사덕(涅槃四德)
◉열반(涅槃 Nirvana) : 적멸(寂滅), 불생(不生), 무위(無爲), 안락(安樂), 해탈(解脫), 원적(圓寂), 영생(永生)
◉열반사덕(涅槃四德) : 상(常), 락(樂), 아(我), 정(淨)
1. 상덕(常德) : 상항불변(常恒不變)하여 생멸(生滅)이 없으며 수연화용(隨緣化用)이 부덕 (不德)함을 말함
2. 락덕(樂德) : 적멸무위(寂滅無爲)하여 언제나 안락무우(安樂無憂)함을 말함
3. 아덕(我德) : 대아(大我), 진아(眞我)의 자실(自實)함을 말하며 용(用)에 있어서 팔대자 재아(八大自在我)를 갖춤을 말함.
4. 정덕(淨德) : 일체구염(一切垢染)을 해탈(解脫)하여 어떠한 경계에도 오염(汚)되지 않음을 말함.
제가 말씀을 진행하는데 있어 광명이란 것을 좀 풀이를 해 드려야 다른 것을 이해하시기가 편리하실 것입니다.
'광명'이란 데에 보면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광명과 광명을 이렇게 두 번 되풀이 한 것은 우리가 느끼는 중생의 시각으로 보는 그런 광명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른바 청정 광명이라. 청정 광명은 청, 황, 적, 백이 아니요, 푸른색이라든가 또는 누런 색이라든가 붉은 색이나 흰색이나 이른바 상대 유한적인 광명이 아니란 뜻입니다.
물질도 아니며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또는 인과법도 아니니,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상대적인 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불타의 본원이며', 부처님과 일체 중생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한 번 더 읽습니다. 광명, 이것은 지금의 전기 같은 것도 광명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켤 수가 없을 것이고 이 마이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이 광명의 혜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광명은 전자가 진동을 해서 이루어지는 현상이지만 그렇게만 본다 하더라도 광명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 혜택을 줍니다.
사실 광명 없이는 우리는 곧 어두운 세계 아닙니까. 그런데 참다운 청정광명, 이것을 푸르고 누르고 붉고 또는 희고 하는 청, 황, 적, 백도 아니요, 우직 부처님이라 하는 우주의 순수생명이고 부처님의 본원이며, 일체중생 즉 사람이나 모든 존재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대승경인 범망경 전문에 나와 있는 법문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광명이라 하면 그냥 세간적인 광명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광명 이것은 세간적인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광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 후불 탱화를 보시면 부처님 정수리에서 빛이 나와서 그 빛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무량무변의 우주를 다 비춘단 말입니다.
후불 탱화에 나와 있는 부처님 정수리의 광명이란 것은 그냥 광명이 아닙니다. 청정한 광명이기 때문에 그 광명은 바로 우주를 다 비추는 것입니다. 우주를 비췄다가 다시 부처님에게로 돌아오는 그런 상직인 것입니다. 부처님만 그럴 깃인가? 우리 중생도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도 부처님 차원에서 볼 때는 똑같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도 자기 광명이 우주를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단 우리 스스로가 어두워서 못 볼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금바라화 꽃을 들고 대중에게 보이니 그 많은 대중이 아무도 그 뜻을 몰랐단 말입니다. 오직 공부를 많이 한 마하가섭 존자만이 그것을 보고 빙긋이 미소를 띄웠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심심미묘한 열반법을 그대에게 전하노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열반이란, 진여불성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참다운 성자가 미처 못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부처님께서 금바라와 꽃을 들고 계셨지만은 손만 보았지 꽃은 안보였던 것입니다.
마하가섭만이 '아 부처님께서 진리의 상징으로 저 꽃을 들어 보이시는구나.' 이렇게 알고 미소를 지으니까. '심심미묘한 열반법을 그대한테 전하노라.'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째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보였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안보이니까 좋다, 궂다, 말을 못하고 모두가 다 벙어리 같았단 말입니다.
그 꽃은 범천왕이 부처님께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범천이 보입니까. 눈에 보이는 세계만 따지는 분들은 범천이나 천상같은 말을 하면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말한 것이지 천상이 어디 있는 것인가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없습니다. 우리 눈이 까막눈인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중생 눈은 탐욕심이나 어리석은 마음이나 또는 분노하는 그런 삼독심에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순간 그만치 우리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욕심을 내면 그 순간 그만치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금생에도 우리는 나라는, 자기 몸뚱이가 소중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는 자기 가족이겠지요. 자기 몸뚱이라는 생각 또는 자기 가족이라는 생각 때문에 금생 내내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우리 눈이 어두워졌다 말입니다. 시력이 2.0이요 1.5요 하지만 그런 것은 물리적으로 눈을 잰 것이지 본래 눈의 시력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래 눈은 석가모니나 예수같이 되어야 본래 눈이란 말입니다. 그런 눈을 본래는 다 타고나는 것입니다. 다만 번뇌에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범천왕이 와서 부처님께 금색 바라화 꽃을 드렸지만은 일반 대중들은 보면서도 안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하가섭은 범천도 보이고 꽃도 보였기 때문에 범천이 부처님께 진리의 상징으로 꽃을 드려서 들고 계시는구나. 하고 부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며 미소를 지은 것입니다.
열반이라.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열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열반이라 하면 보통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열반이라고 생각들을 하는데, 그러나 죽음만을 열반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번뇌가 다 녹아버리고 나쁜 마음이 다 죽어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나쁜 마음이 다 없어져 버리면 성자가 되겠지요. 본래가 다 부처인지라. 그래서 적멸이라. 번뇌가 다 녹아버려서 조금도 나쁜 흔적이 없는, 조금도 번뇌의 움직임이 없는 아주 맑고 참다운 진리의 경계를 적멸이라 합니다.
우리가 금생에 죽으면 금생의 업장을 짊어지고 업장대로 태어나겠지요.
그러나 업장을 녹여버리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영생불멸하는 극락세계에서 영생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 해탈이라. 번뇌의 허물을 다 벗어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요새 우리가 자유를 부르짖고 자유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 하지 않습니까. 민주화도 자유를 위해서 부르짖지만 참다운 민주화, 참다운 자유는 자기의 번뇌를 다 해탈해 버려야 참다운 자유인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감옥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번뇌가 조금도 없다고 할 때는 바로 자유란 말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어서 왼만한 것은 자기 멋대로 다 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런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중생은 번뇌가 있는 한 어느 누구나가 참다운 자유인이 못되는 것입니다. 번뇌를 벗어버려야 참다운 자유인입니다. 번뇌를 벗어나려면 자기라는 생각, 자기라는 아상을 떠나야 합니다. 아상을 떠나야 욕심을 버리고 진심을 버리는 것인데, 자기라는 생각을 못 떠나면 나한테 좋은 것은 욕심부리고, 자기한테 싫은 것에는 분노심을 낸다 말입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우리 마음이 더욱 더 어두워집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번뇌를 벗어버리면 바로 거기가 극락인 것입니다. 위없는 행복이 극락 아니겠습니까. 그 자리는 죽지 않는 영생의 자리입니다.
우리 중생은 과거업으로 금생에 태어나고 금생의 업으로 다시 내생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생이 아닙니다. 항시 죽었다 살았다. 나고 죽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를 벗어버리면 아까 말씀대로 중생이 불쌍해서 일부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몸을 받아 올망정, 우리가 업장에 묶여서 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대체로 과거 전생에 잘 닦아서 금생에 중생이 불쌍하니까 오신 그런 분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평화스럽게 못 됩니다.
우리 한국인에게나 미국인에게나 누구한테나 제일 좋은 선물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제가 승려라 해서 아전인수격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명예도 필요 없고, 아무 것도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진리의 가르침이 많이 있지만은 불교의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에는 그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다른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역시 자연주의 철학자 탈레스(Thales)라는 철인은 물을 보고서 우주의 근본은 물이다. 이렇게 말하고 헤라클레이토스(Hearkleitos)는 우주의 본질은 불이다. 이렇게 말하고 엠페도클레스(Empedokles)는 우주의 본질은 흙기운이고 물기운, 바람기운이고 땅기운이라고 말했습니다. 각기 철인마다 견해가 다 달랐습니다.
또 유물론과 유신론이 있습니다. 유물론은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다인 것이다. 또 유신론은 물질이란 것은 결국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며 싸워 온 인류문화사를 다 수용해서 하나의 진리로 똘똘 뭉쳐서 명확하게 풀이 한 것이 부처님 진리입니다. 부처님 진리를 안다고 할 때는 자기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며 가정도 편하고 다 편한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 일원주의다. 이렇게 분명히 알아버리면 그때는 싸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상대적인 법이 있고, 이분법으로 나누어서 보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싫든 좋든간에 불교의 진리가 세상을 다 덮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일당 천입니다.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이 꼭 천 사람, 만 사람을 제도 하셔야 합니다. 그런 의무를 여러분들은 타고나신 것입니다. 학식은 둘째 문제입니다.
자기 행동이 바르면 말을 안해도 저절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심에 사무치면은 다 통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열반이라는 것은 진여불성을 말하는 것이고, 일체존재의 근본성품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번뇌가 다 가셔버린 자리이며 또는 다시 나쁜 갈래로 태어나지 않고 해탈해 버려서 참다운 자유인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극락이고 다시 위없는 행복입니다. 이 자리는 영생불멸의 자리입니다. 부처님같이 위대한 분은 덕이 하도 많아서 다 헤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열반의 덕이나 진여불성에 갖추어진 덕은 불가설 불가설(不可說 不可說)이라…
이는 위대한 성자가 몇 백 년, 몇 억 년을 헤아려도 그 영생불멸한 우리 마음자리인 진여불성에 갖추고 있는 덕을 다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갖추고 있는 덕은 이와 같은 덕입니다. 이러한 덕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캐내는 것보다 더 급하고도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른 것들은 그렇게 길지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젊으시니까 잘 모르겠지만 저같이 칠십을 넘어서면 금방금방입니다. 봄눈 녹듯이 금방이지요. 여러분들도 이윽고 그렇게 됩니다. 죽음의 물결 속에 잠시 흘러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생명을 절대로 헛되게 하지를 말으십시오. 부처가 꼭 되는 것이 우리 생명의 참된 의미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다 헛것입니다. 재산을 모으는 것도, 나와 나의 자손과 내 이웃들이 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돈도 모으고 절도 짓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정치란 것도, 남과 더불어서 부처가 되기 위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열반에 들어있는 덕이 한도 끝도 없는데, 우리 중생들에게 부처님께서 알아 듣기 쉽게 네 가지 차원으로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한도 끝도 없는 부처님의 무량공덕인데, 따라서 이 정도는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내 마음에 들어있는 부처님의 공덕이 한도 끝도 없는데, 간추리면 '상락아정'입니다. 이 항상 상(常)자의 뜻이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영생불멸한다는 뜻입니다.
현상적인 것은 무상하지만 우리 생명 자체, 근본적인 진여불성 자체는, 즉 열반은 영생한단 말입니다. 영생이라. 우리 생명이 허망하다고 생각하지 말으십시오. 우리 몸뚱이가 허망하고 물질이 허망한 것이지 우리 생명은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본래 없기 때문에…
예수만 영생한 것이 아니고 석가모니만 영생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가 다 영생합니다. 따라서 우리 본래 마음자리는 영생불멸하는 상(常)이고 또는 안락이라. 우리 마음자리는 영원한 행복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것이 락(樂)이라, 안락입니다. 그냥 우리 중생은 좋은 사람 만나면 기분이 좋고 물질이 많으면 좋다고들 하나, 그런 것은 모두 허망한 안락 아닙니가. 영원히 변치않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치않는 참다운 행복이란 말입니다. 완벽한 행복, 이것이 락(樂)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 아(我)자라. 이것은 거냥 작고 망련된 소아(小我)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대아(大我)라. 대아란 무엇인가?
대아는 바로 우주를 안다는 말입니다. 불경에 보면은 팔대 자재아라. 어려워서 안 내놨습니다마는 이 아(我) 가운데는 팔대자재아라. 우주를 마음대로 날을 수도 있고, 모두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다 알 수 있는 지혜를 갖추고 있는 아(我)란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지혜가 과거만 보겠습니까. 또는 미래만 보겠습니까. 과거나 미래나 다 볼 수 있단 말입니다. 불경에 보면은 우주에서 내리는 빗방울 수까지 헤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성자의 지혜란 것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무소부재요 무소불능이란 말입니다. 성자의 지혜는 능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원자력 같은 것도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은 유가 아니란 말입니다. 원자력도 내내야 근본자리에 가면 불성이란 말입니다. 원자력도 상당히 고성능일 것인데, 무한 성능이 우리 불성입니다. 따라서 그 무한 성능이 나한테 갖추어져 있단 말입니다.
성자들의 나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我)는 우리같은 보통 나가 아니라, 때가 다 가셔버린 참다운 나란 말입니다. 이 가운데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 우주를 다 알 수가 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며, 자기 몸뚱이를 공중으로 쏴 올릴 수도 있는 것이고, 삼매에 들면 자기 몸에서 불을 낼 수도 있고, 물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명대사가 일본에 갔을 때 가마솥에 불을 넣은 뜨거운 방에서 거처를 하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밑에는 쇠로 된 가마솥이기 때문에 금방 타서 죽겠지요. 그러나 사명당은 삼매에 들어서 얼어버리니까 방안에는 고드름이 달렸습니다. 사명당이 삼매(三昧)에 드는 사람이 못되었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사명당은 삼매에 들 수 있는 위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느 사람같으면 뜨거워 타서 죽었을 것인데, 삼매에 들어 얼음을 생각하니 전부가 다 얼음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힘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찮은 몸뚱아리,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이 몸뚱이, 우리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과거 전생에 이 몸이 있었습니까? 죽은 뒤에 이 몸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금생에 잠시간뿐이란 말입니다. 하찮은 이 몸뚱이 때문에 속아서 삽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중생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못박혀 돌아가신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성인들이 무슨 필요로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것인가. 성자라면 그 일들을 다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자가 자기 죽음 하나 마음대로 못하겠습니까. 다만 중생들에게 이 몸뚱이는 허망한 것이고, 몸뚱이는 어느 때 어떻게 되어도 무방하며 인연 따라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우리 참 생명은 영원한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또 일반 중생들의 죄를 위해서 그런 성자를 죽게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성인들을 죽게 해 놓으면 그때는 그 나라는 전체적으로 큰 해를 받습니다. 성자의 마음을 괴롭히기만 해도 큰 해를 받는 것인데, 여러분들이 선량한 행동을 하고 있는데 나쁜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음해해가 비방하면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해를 받습니다. 우리가 착실하고 훌륭한 행동을 하는데 그 사람들이 음해하고 비방하면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스스로 해를 받아서 잘못되고 맙니다.
그러나 선량한 입장에서 볼 때에 누구나가 잘 못 되어서는 안되겠지만은 그것은 자기 스스로 지어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민족도 역시 그 당시에 그리고 예수가 돌아가신 후에 굉장히 비참한 꼴을 많이 당했습니다. 따라서 나한테 갖추고 있는 능력이 빌딩이나 하나 짓고 하늘에 있는 별을 발견하고 하는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라, 한도 끝도 없는 힘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빌딩을 지었다든가, 무슨 책을 몇 권 냈다든가, 그런 것은 자랑거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가 되는 것만이 자기 삶의 의의를 다 하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우리가 부처를 이루는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면 손해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했을 때는 다른 사람의 성불을 위해서 공헌한 바가 되겠지요. 아무튼 나라고 하는 것은 조그마한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나요, 불경에 있는 말로하면 팔대자재아라.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지혜란 말입니다.
누구나가 다 갖추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 계발을 못해서 조그마한 나밖에 못쓰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뇌 가운데는 뇌세포가 백억인데 그 십분의 일밖에 못쓴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뇌세포 가운데 십분의 일밖에 못쓰고 죽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진여불성이라는 참다운 우리 마음은 뇌세포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에 들어 있는 정기이기 때문에 무한의 지혜입니다. '상락아정'을 꼭 깊이 외워두십시오.
마지막 정(淨) 이것은, 조금도 번뇌가 없는 청정무비하다는 말입니다. 본래 열반마음은 이와 같이 청정무비합니다. 조금도 때가 묻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살아서 때를 묻히고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음탕한 소설이라든가 또는 별로 좋지 않은 텔레비젼같은 그런 것이 나오면 바로 즉시 꺼버리십시오. 그런 걸로 해서는 우리한테 도움이 못 됩니다.
소중하고 맑은 우리 마음에다가 무엇 때문에 중생들의 죄스런 때를 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손해고 가정적인 손해고 나아가서는 우주적인 손해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 되면 그만치 우주를 오염시킵니다. 우리가 성을 내면은 그때는 자기 마음이 어두워지고, 그 성을 받는 상대방도 어두워지고 우리 공기도 그마만치 오염됩니다.
천재지변같은 것도 우리 마음하고 상관없다고 생각 말으십시오. 부처님 경전 보십시오. 사람들이 다 평화스럽게 진리를 지키면 천재지변도 별로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쁜 생각 많이 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욕심부리고 하면 그것이 우리 주변을 오염시킵니다. 오염시키면 그것이 지진이나 지변들을 일으키는 요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에이즈같은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잘 못 살고 악념(惡念)들이 깊으니까 에이즈 균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자의 깊이란 것은 우주에 두루 다 통하는 것입니다. 청정한 사람한테 무슨 필요로 에이즈가 걸리겠습니까. 우리가 바르게 살면 그런 균들은 우리 사회에 생길 수가 없습니다. 음탕하게 동성애고 뭣이고 그렇게 사니까 그런 균들이 생겨난다 말입니다. 우리한테 갖춰져 있는 본성인 덕, 이것이 상락아정. 무한한 공덕인데, 간추리면 영생불멸하고 또는 락(樂)이라, 위없이 완벽한 행복이고, 또는 아(我)라, 모두를 다 알 수 있고,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신통자재한 지혜를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1. 능시일신위다신(陵示一身爲多身) 2. 시일진신만대천계(示一塵身滿大千界) 3. 대신경거원도(大身輕擧遠到) 4. 현무량류상거일토(現無量類常居一土) 5. 제근호용(諸根互用) 6. 득일체무득상(得一切無得想) 7. 설일게의경무량겁(設一偈義經無量劫) 8. 신편제처유여허공(信遍諸處猶如虛空)
『열반경(涅槃經) 23』
◉ 팔도(八到) … 범부(凡夫)와 이승(二乘)이 미집(迷執)하는 팔종(八種)의 전도(轉倒)이다. 생멸무상(生滅無常)한 법(法)을 상락아정(常樂我淨)하고 집착하는 범부(凡夫)의 사도(四倒)와 실상(實相)열반(涅槃)의 법(法)을 무상(無常), 무락(無樂), 무아(無我), 부정(不淨)이라고 고집하는 이승(二乘)의 사도(四倒)를 말함.
이것을 경에 보면은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나중에 보십시오. 정(淨) 이것은 청정무비해서 조금도 때묻지 않은 맑고 풍요한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생들이 자꾸만 거꾸로 봅니다. 거꾸로 보기 때문에 팔전도(八轉倒)라. 반야심경에 보면 전도몽상이 있지요. 전도몽상은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구를 전(轉)자, 자빠질 도(倒)자. 거꾸로 본다 말입니다, 바로 못보고.
그런데 여기 있는 것은 본래가 상락아정이라는 소중한 보배가 갖춰져 있는 것인데.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못하니까 거꾸로 보이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는 것이 수도 없이 많지만은 그냥 이것도 간추려서 여덟 가지 유별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범부의 사전도(四轉倒)라. 범부의 네 가지 유별로 거꾸로 보는 것과 그 다음에는 이승(二乘)이라. 앞서 말씀드린 성문 연각들처럼 도는 좀 알았지마는 확실히는 모르는 사람들, 공(空)만 깨닫고 공의 참다운 중도를 깨닫지 못한 성문, 연각 즉 이승이 보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범부가 거꾸로 보는 네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은 범부 세간의 무상하고 항상이 없는, 유상(有相)한 것은 모두 무상한 것이고, 자기 몸도 무상하지만 재물도 감투도 다 무상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무상한 것이란 말입니다. 대통령을 지낸 이들도 그 자리에 있을 때는 좋았지만 청문회다 교도소다 모두 얼마나 곤욕들을 치뤘습니까.
우리 범부중생들이 사는 세간은 이처럼 무상하고 또는 무안락이라. 안락이 본래 없다 말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은 따지고 보면 다 고통뿐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뱃속에다 두어도 고생, 뱃속에서 나올 때 고생, 또는 병들어서 고생, 헤어져서 고생, 돈버느라 고생, 실패해서 고생…
인생개고(人生皆苦)라. 부처님 말씀 보면은 결국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고생이 아닌 것은 결국은 순간뿐입니다. 헤어지고 만나고, 좋은 사람과는 헤어져서 괴롭고, 살아서 헤어져도 괴롭고, 죽어서 이별하면 더욱 슬프고, 따지고 보면 다 고생뿐이고 안락한 것은 어느 한 순간뿐입니다. 그것도 역시 잠시간 안락하게 보일 뿐이지 참다운 안락은 없습니다. 중생 세계에서는 이와 같이 항시 무상하고 또 안락도 본래 없단 말입니다.
무상, 무아라.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 몸뚱이가 있는 것인데, 이 몸뚱이도 시시각각으로 신진대사를 해서 변화해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늙어서 주름살이 생기고 기미가 생기고 젊어서는 누구나 다 피부가 고운 법인데 나이 먹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고 할 것도 없고 청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몇 일만 목욕을 안해 보십시오. 그냥 냄새가 풍긴단 말입니다.
우리 몸도 무상하고 즐거움도 없고, 나라는 것도 없고, 또는 깨달을 것도 없고. 우리 중생생활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제법(諸法)을 우리가 거꾸로 잘 못 봐서 항상 변치 않고 안락스럽고 또는 영생하고, 참다운 내가 있고, 또는 청정하다고 우리가 고집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범부가 네 가지로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거꾸로 보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대체로 거꾸로 보고 삽니다. 바로 보면 결국은 인생개고(人生皆苦)라 그런 것인데, 일반 중생들은 인생개고를 바로 못 봐서 항시 오욕락이라. 자먹으려 학, 잠도 많이 자면 좋은 줄 알고, 또는 감투가 높으면 좋고, 재물도 많으면 좋고, 좋은 이성 만나려 하고 이러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런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허망한 것이지. 일반 중생은 이런 것을 보고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 분들은 그 자리에서 무상을 느껴야 됩니다. 물론 지금 사는 생활을 다 뿌리쳐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무상하구나. 허망하구나. 이렇게 느껴야 오류를 안 범하고 지나치게 집착을 않습니다.
음식도 너무 미식만 취하고 많이 먹으면 좋을 것이 없겠지요. 신문에 보면 외국사람들은 오분지 일이 비만증에 걸렸다 합니다. 대개 보면은 앞뒤로 퉁퉁해 가지고 절도 못합니다. 그렇게 자기 조절을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참 의지가 약합니다. 모두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먹었겠지요. 인간이란 참 불쌍하게들 삽니다. 바르게살기가 참 편한 것인데, 적게 먹고, 개운하게 먹으면 몸도 편하고, 배설도 적게 하고, 성인병도 안 걸리고 참 좋을 것인데 인간들이 스스로 화를 자초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들은 결국 재미도 없고 항상함도 없고 또 덧없는 이런 것들을 좋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것을 중생이 네 가지로 거꾸로 보는 범부사도(凡夫四倒)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승사도(二乘四倒)라. 공(空)을 조금 깨달아서 허망한 것은 좀 알고, 무상을 알았지만 참다운 중도를 모른단 말입니다. 무상하고 허망하니까 어느 것에나 집착할 것이 없고, 그런 것들은 다 쓸데없다는 것을 알았지마는 또 역시 그 사람들은 실상열반(實相涅槃)에 대해서는 미처 못 깨달았습니다.
열반은 원래 만덕을 갖춘 것인데, 성문이나 연각들은 공(空)만 좀 알았지 만덕을 갖춘 열반은 모릅니다. 열반에는 공덕이 한도 끝도 없는 그야말로 영생불멸하고 영원히 행복하고 또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완벽한 자기가 되는 것이고, 또 청정해서 조금도 오염이 없는 것이 본래의 자기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열반 공덕도 역시 무상하고, 또는 즐거움도 없고 참다운 대아(大我)도 없고, 또는 깨끗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허무주의자들은 불쌍합니다. 정말로 참다운 자기가 있고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이른바 이데오로기로 묶여서 그것만 지키다가 죽어버린단 말입니다. 스탈린이나 모태동이나 모두 생각하면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만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또 자기 사상에다 묶어 놓고서 말입니다. 그네들의 그 옹색한 이데올로기가 하마 파기 될까봐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매도합니다. 종교를 믿어버리면 그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어디에다 발붙일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북한 같은 체제는 다 종교를 싫어합니다.
지금은 하다하다 안되니까 조금씩 터놓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막아 놔도 오래 못 갑니다. 우주의 법도에 안 따르는 것은 결국은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것이, 영생불멸하는 성자를 믿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가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 가운데 행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때라도 혼연스럽게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찮은 몸뚱이 하나 바쳐서 진리가 빛난다고 생각할 때는 조금도 회한 없이 그냥 바치는 것입니다. 바치는 그 순간에 우리 생명은 한없이 성숙되는 것입니다. 요법(樂法) 비구는 진리를 참구해 마지않는 훌륭한 비구였습니다. 즐거울 락(樂)을 즐거울 '요'라고도 풀이합니다. 법을 간절히 구하는 비구가 과거에 있었습니다. 몇 십 년을 헤매며 진리를 구했지만 그때는 부처님이 안 나오신 때라 스승이 없어서 공부를 못 배우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 때 욕계천에서 제석천이 보니까 요법 비구가 위대한 사람인데 어디 가서 법문을 들을 곳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사람 모습을 취해 가지고 나타나서 요법 비구에게 하는 말이 "그대가 진정으로 진리를 구하는가?" 이렇게 물으니까. 신명을 아끼지 않고 법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은 그대에게 내가 지금 진리를 말할텐데, 그 진리를 그대의 피부를 벗겨서 종이로 하고 그대 피를 짜내서 먹물로 하고 뼈를 분질러서 붓으로 삼아 진리를 적을 수가 있겠는가?" 라고 물어보니,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칼로 자기 피부를 벗긴단 말입니다.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칼로 자기 피부를 벗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석천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저런 사람에게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치 마음자세가 진리를 배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칼로 자기 피부를 벗기니까 그 순간 공중에서 영생불멸하는 부처님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사람한테서 안배우더라도 정말로 위대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영원히 존재하는 진리로부터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어느 부처님에게 법문을 듣고 배웠겠습니까. 혼자서 깨달았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주 자체는 우주 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우리 생명을 어느 때라도 바친다 하는, 진리를 위해서는 주저 없이 바친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는 우리 마음은 진리를 지향해서 굉장히 성숙하는 것입니다. 제사불 당시 과거 전생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미륵불하고 제사불 회상에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가끔 이 설화를 비유합니다마는, 우리가 부처님에 대해서 진리를 흠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제사불께서 두 분을 보시니 미륵불 될 분이 훨씬 더 재주가 있고 총명해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불도 빨리 할 수가 있었겠지요.
둘을 제도를 해야겠는데 미륵불 될 분이 훨씬 더 재주가 있고 성불을 빨리 하게 보였지만, 미륵불이 장차 제도할 일반 중생들을 관찰해 보니까 굉장히 미련하다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륵불이 영리하더라도 제도할 중생들의 복이 저렇게 부족하니 제도하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부처님의 지혜란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훤히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전생의 석가모니를 가만히 보니까 그이는 미륵불만은 못해도 그 부처님이 장차 제도할 중생들은 아주 영리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미륵불보다 석가모니를 먼저 부처를 만들어서 빨리 보내야 되겠구나, 그래야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겠구나고 생각했습니다.
석가모니 될 분을 빨리 제도하기 위해 방편을 써서 내가 지금 산에 올라 갈 테니까 그대는 나를 따라서 산을 올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사불은 신통력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삼매에 들어 계셨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될 분은 아직 신통력이 없던지라 가시밭길을 찔리기도 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높은 산까지 올라 갔던 것입니다. 올라가서 부처님 계시는 곳을 우러러 보니까, 부처님께서 화광삼매라. 광명을 나투는 삼매에 들어 계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광명을 나투는 삼매에 들어 계시는데, 그 광명이 천지 우주를 훤히 비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 광명이 어떻게 황홀하였던지 자기를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그 찬란한 광명을 보고 환희심이 넘쳐서 한발을 든채로 이레 낮, 이레 밤을 그대로 부처님을 찬탄했습니다.
여러분들. 부처님을 찬탄한 게송시를 알으십니까?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은 세상에서 다시 비할 데가 없다 말입니다. 시방세계 좋은 것, 궂은 것들을 다 비춰봐도 부처님 같이 훌륭한 분은 없습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께 대한 최상의 찬탄을 올리면서 한발을 미쳐 내려놓지도 못하고 든 채로 이레 낫, 이레 밤 동안 합장하고 부처님을 찬탄했었던 것입니다. 그 경에 보면은 첨양불타라, 부처님을 우러러 보면서 목불잠타라. 눈을 잠깐도 깜박을 못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환희심을 내었는지 부처님을 우러러 보면서 눈도 깜빡 못하고서 칠주야 동안 찬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부처님을 흠모하고 찬탄한 갈앙심(渴仰心)으로, 구겁이라는 무량 세월을 앞당겨 성불했던 것입니다. 자기 몸을 잊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공덕이 그렇게 큽니다. 오 주여! 하는 그런 공덕 말입니다. 그런 공덕이 자기는 몰라도 우리의 성불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마음과 부처님 마음, 하나님 마음이 한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사무치면 그만큼 성불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굉장히 비약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 전생에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칠 주야 동안 한 발을 들고서 부처님을 찬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무한공덕을 갖춘 부처님 자리를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야 됩니다. 불법은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며 바로 우주의 것입니다. 그것은 또 내 생명이고 그대 생명이기도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불법을 지키는데 너무 소홀한 것 같아요. 우리가 온 힘을 기울여 지켜야 됩니다. 그러면 빨리 불국토가 되겠지요.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세상을 구할 것은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부처님 가르침 외에 다른 걸로는 구제가 안됩니다. 부처님 따로, 나 따로, 하나님 따로 있다는 생각으로 해서는 모두 각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 나와 둘이니 그때는 사람과 사람끼리도 응당 둘이 되고 셋도 되고 각각이 되겠지요. 나나 너나 모두가 한 생명의 부처님이기 때문에 본래가 하나란 말입니다. 이렇게 돼야 참다웁게 도덕이 섭니다. 제 아무리 삼강오륜을 말하고 별 짓을 다 한다 하더라도, 나 따로 있고 너 따로 있고 이럴 때는 항시 자기를 먼저 앞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참다운 도덕을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도덕은 자기 희생정신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것이고 이런 철학이 앞서야 참다운 도덕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런 철학은 부처님 가르침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육도 역시 교육철학이 바탕으로 돼야 합니다. 부처를 만드는 교육을 시켜야지 그냥 기능인, 직업인을 만드는 교육은 참다운 인간을 못 만듭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스승을 배반하겠지요. 우리 생명은 정말로 허망합니다. 교통사고로 오늘 죽을지, 병으로 내일 죽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생명이 붙어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우리는 부처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같이 닦고 같이 동참하고 말입니다. 이 열반사덕(涅槃四德)을 꼭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열반이란 것은 바로 우리 본심입니다. 또 진여불성이요,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무한 공덕입니다. 무한공덕을 한 번 생각하면 생각한 만치 정화가 되어갑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번 외면 외운만치 신장들이 우리를 굽어본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정말로 한량없는 자유와 행복을 누리시고 이 세상도 그와 같이 진리의 광명으로 빛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선(禪)․근본선(根本禪)
이 시간에는 주로 참선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선 공부는 우리가 가령 수영을 한다 할 때는 물에 들어가서 실지로 헤엄을 치는 법을 배워야 하듯이, 참선공부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우리가 닦아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실참실수(實參實修)라. 정말로 우리 몸으로 부딪혀서 참선을 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나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대강 이치로 체계가 서야 흐트러짐이 없고 또 능률도 빠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덮어놓고 공부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가 다 어느 분야에서나 세밀하게 밝혀 놓은 그런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들을 충분히 참구해서 우리의 부질없는 분별시비는 끊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많이 해 보신 분들은 짐작을 하시겠지만, 사실 맨 처음부터서 쑥쑥 잘되는 것은 없습니다. 참선의 가장 큰 두 가지 원수가 불교 전문 술어로 하면 도거(棹擧)와 혼침(昏沈)입니다.
도거(Auddhatya)란 이것저것 따지고 분별하는 것이고, 혼침(Styand)이란 앉으면 꾸벅꾸벅 졸아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졸아버리는 시간은 죽은 시간과 똑같아서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그야말로 참 맑고 청정해 본래 면목자리만 가지고 나가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서 참선을 좀 했다 하더라도 한도 끝도 없는 분별시비가 나온단 말입니다. 평소에 그렁저렁 생활을 할 때는 안나오다가도 정작 참선이라 해서 들어앉으며, 과거에 섭섭했던 일, 미워한 일, 좋은 일들이 자꾸만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면 머리나 몸이 가볍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습인(習忍)이라. 익힐 습자, 참을 인자, 오랫동안 공부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몸에 배여 습관성이 생깁니다.
처음에 참선공부 할 때 좀 안된다 해서 그냥 놓지 마십시오. 우리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란 것은 무한 공덕이라. 무한공덕이 들어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향해서 공부를 하다보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근기나 선근에 따라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습니다만 보통 차원에서는 이른바 경안심(輕安心)이라. 경안이라는 것도 불교전문 술어인데 여러분들께서는 외워 두십시오. 가벼울 경(輕)자, 편안할 안(安)자, 경안이라는 것은 몸도 마음도 가뿐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가뿐할 때는 다른 헛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는 경안이 서야 피로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른바 내 몸을 어느 정도 조복을 받는 것입니다. 보통으로 참선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한 십 년쯤 선방에서 고생 고생해야 경안이 좀 나오는 것 같아요. 좀 빠르고 느린 차이는 있으나, 몇 십 년 된 사람도 역시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참선에 들어가면 몇 십분도 못되어 끄덕끄덕 좁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 경안이 못 나온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 스님네들은 경험들도 많고 해서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만, 처음으로 참선을 배우는 일반 재가 불자님들은, 참선공부, 이것은 불도의 정문(頂門)이라. 부처님 가르침 이것이 정문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다른 가르침은 방편설도 많이 있고 여러 가지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하는 법문도 많지만은 참선 법문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바로 내 마음이 부처요, 마음 떠나서 부처를 구하면 이것은 사도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직통으로 들어가는 그런 직설법문이기 때문에 불도의 정문(頂門)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공부를 하던지간에 종당에는 우리가 참선을 해서 깨달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자라면 다 해야 되는 것이고,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참선을 해야 됩니다. 가사 기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깥에다 설정해지 않고 하나님이 바로 내 마음의 본체이고 우주의 본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라 안 계시는 데가 없다. 이렇게 법신불 차원에서 하나님을 보면서 참선을 해야 되겠지요. 참선을 불교인만 닦는 정문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어서 다른 종교의 우수한 점이라던가 발전적인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도 수용해야 합니다. 저 쪽 기독교 인구도 지금 17 - 8억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대립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부처님의 일통법문으로 인도해 가면서 같이 공부하는 쪽으로 나가야 할 것이고, 또 그네들이 나가는 공부도 역시 참선공부로 유도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을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의 본 뜻도 하나님이 밖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맑은 자는 행복할지어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요, 하는 대목들을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볼 때는 부처님 경전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고, 특히 법화경과 유사한 대목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어느 분야든 간에 다른 공부도 그렇겠지만 특히 참선공부는 마음을 활짝 열어야 됩니다. 앞서 시간에 배운바와 같이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모든 존재는 진여불성으로부터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양을 달리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항시 의심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진여불성 자리에서는 하나일 망정, 현상만 볼 때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고 나와 네가 분명 다르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지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현상만 보니까 다르다고 보는 것이지 본 성품자리, 본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혼연일체라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의 현상이요, 마음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으므로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현상적으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달리 했을 뿐 진여불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상만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바닷물이 바람 따라서 파도가 크고 작고 하더라도 작은 파도나 큰 파도나 똑같은 물 아닙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인연 따라서 어떻게 상황이 바꿔지던 간에 진여불성이라는 그 자리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너나 나나 모두가 같은 몸이요, 같은 몸이기 때문에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거기에서 참다운 자비가 나오고 참다운 도덕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강사가 아닙니다. 어찌 됐던 참선하는 선사이기 때문에 강의는 잘 못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들이 아시고 이해하시리가 믿습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대목들만 딱딱하게 일러주고 본인들이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참선하는 사람들의 방법인데, 여기는 미국인지라 또 미국의 풍토는 다르지 않습니까. 더러 타이르고 밝히고 해서 납득을 시켜야 하는 자리이므로, 특히 재가 불자님들은 그런 것을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참선한다고 해서 제 상식으로 해버리면 재미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 선(禪)이란 것은 특히 문자를 되도록 절감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편의상 말을 해야 하겠지요.
선(禪)
선(禪 : Dharma, Zen) 정(定 : Samadhi) … 선(禪)은 관(觀)을 위주(爲主)하고 정(定)은 지(止)를 위주(爲主)하나 합(合)하여 정혜균등(定慧均等)의 묘체(妙體)를 선정(禪定)이라 함 … 사유수(思惟修), 기악(棄惡), 정려(精慮), 공덕총림(功德叢林), 심일경성(心一境性), 현법락주(現法樂住) 등의 이름이 있음. 또한 선종(禪宗)의 선(禪)은 명(名)은 사유정려(思惟精慮)의 뜻을 취하나 그 체(體)는 열반묘심(涅槃妙心)으로서 바로 불심(佛心)을 의미함.
선(禪) 이것은 이른바 Zena, 우리 한국선은 세계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선은 말이 알려져서 그 사람들이 Zen 그러니까 일본 쪽에서도 선을 Zana라고들 발음합니다. 그리고 선과 정을 구분을 하는 분도 있고 구분 않고 합해서 선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선(禪)은 관(觀)을 위주로 하고, 관(觀) 이것은 관찰을 뜻하는 것입니다. 정(定 : samadhi)은 이른바 삼매에 든다고 하지요. 삼매란,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한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삼매입니다.
독서도 역시 독서만 열심히 하면 독서삼매라 하는 것이고, 여기서의 정은 그냥 나쁜 생각으로도 한 곳에 머무를 수가 있는 것인데, 나쁜 생각이 아니라 정념으로 한 생각에 머무는 것이 이른바 사마디(samadhi)란 말입니다. 정념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마음의 본래 성품자리, 본래 성품은 바로 진여불성이 아닙니까. 그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오로지 우리 마음을 머무르게 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사마디(samadhi)라고 합니다.
선은 그 자리를 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관조를 한다는 말입니다. 가사 실상관(實相觀)이라. 실상관은 우주법신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래서 선(禪)은 관찰을 위주로 하고 정(定)은 지(止)를 위주로 하나 합하여 정혜균등(定慧均等)의 묘체(妙體)를 정(定)이라고 합니다. 정혜균등이란 말을 참선 배우는 사람들은 꼭 외워 두셔야 됩니다. 정은 우리 마음이 오로지 한 곳에 머무는 것을 정(定)이라고 하고, 즉 고요한 것을 정이라 하고 또 혜(慧) 이것은 참다운 지혜,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그런 지혜(智慧)를 혜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지혜는 보통 지식적으로아는 지혜가 아니라 참다운 반야의 지혜,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가 여기 있는 정혜(定慧)의 혜에 해당합니다.
정(定)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념(正念)이라. 정념(正念)이 한 군데 모이는 것이 정(定)이란 말입니다. 정혜균등이란, 정과 혜가 평등하게 나가는 것이고, 고요한 것은 정이고 혜는 비춰보는 것인데 무얼 비춰보는고 하면은 실상(實相)을, 우리 불성을 비춰본단 말입니다. 이것이 가지런히 되어야 참선진도가 빨라집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본래 면목, 우리 불성 자체는 원래 정, 혜가 같이 구족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성이나 우주의 본성인 진여불성 자리는 정과 혜가 본래적으로 원만구족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 공부도 거기에 걸맞게끔 정, 혜가 가지런히 균등하게 나가야 이른바 개안이 빠르단 말입니다. 정에만 치우치고 혜에만 치우치더라도 공부가 안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부 진도가 더딘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중도를 추앙합니다. 중도란 것은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 아니라, 다 갖추고 있는 온전한 자리를 제대로 참구하는 것이 중도란 말입니다. 이른바 진여불성이 바로 중도인 것이고, 우리 본성이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할 때는 꼭 고요하니 우리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정(定)과 또는 우리 불성 자리를 비추어 보는 혜(慧)와 같이 아울러 나가야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그런데 관찰만 많이 하고 혜쪽으로만 치우쳐서 고요히 머무르지 않는다면 공부가 더디단 말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六組檀經) 부촉품에서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 말씀을 제가 드렸지요. 일상삼매 이것은 혜에 해당합니다. 일상삼매는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인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이라고 관찰하는 거싱고 그리고 일행삼매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일행삼매이고 정(定)에 해당한다 말입니다. 좀 어려운 법문이나 기본적으로 알아두시면 공부하실 때에 큰 도움이 되십니다. 일상삼매, 일행삼매, 정, 혜 또는 간단히 천태식으로 말하면 지관(止觀)이라. 그칠 지(止)자는 정(定)에 해당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우리 불심에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참다운 지혜 또는 조금도 번뇌가 없는 고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공부도 거기에 맞게 해야 우리 번뇌의 습관성을 빨리 녹이고서 참다운 진여불성을 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선정을 사유수(思惟修)라. 사유수란 것은 바르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바르게 생각을 해야지 그냥 덮어놓고 생각한다고 그것이 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만유란 것은 오직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이렇게 뚜렷히 생각해야 그것이 정사유(正思惟)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기악(棄惡)이라. 버릴 기, 모직 악. 악을 버린단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선공덕(禪功德)입니다. 사유수라는 것은 바른 생각을 관조함으로 해서 자연적으로 악심이나 나쁜 생각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은 정려(精慮)라. 고요할 정, 생각할 려. 고요히 조금도 삿된 생각없이 바르게 참다운 진리를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선정의 뜻 풀이입니다. 공덕총림은 무엇인고 하면, 공덕, 이것은 자기나 남이나 누구나간에 유익되게 하는 것이 공덕입니다. 총림 이것은 그야말로 수풀모양으로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숲처럼 무한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무한공덕이 거기에서 우러나온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하나의 참성공덕이 따르는 것입니다.
아까 기악, 악을 없애는 rjtedh 참선을 하면 차근차근 사람이 선량해져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져 가니가... 마땅히 진여불성 자리는 만능의 자리인 동시에 오직 하나의 생명자리이기 때문에 나쁜 마음이 생길 수가 없겠지요. 자타(自他)라는 구분도 역시 참선을 해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자기 모서리가 끊어져서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생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래가 무아이기 때문에 공덕총림 또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오직 마음이 하나로 묶인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나오지만은 마음이 정화가 되면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영원적인 그 맑은 생각, 부처님 마음같은 그런 생각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오직 부처님 경지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현법락주(現法樂住)라. 이것 역시 참선공덕입니다. 우리가 지금 재미있는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의 재미있는 것은 속락(俗樂)이라. 세속적인 오욕같은 것은 재미는 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허망무상한 안락인 것입니다. 그러나 법락(法樂)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안락이 아닙니다. 법락, 이것은 공부를 해서 원래 우리 불성에 갖추어져 있는 공덕을 얻으므로 참다운 안락이 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신통자재나 그런 것도 모두가 다 법락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겠지요. 현법락주라. 법락이 나온다는 말이고 아까 얘기한 경안이라.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환희심에 차서 닦아 나가는 것이 경안인데, 그것 역시 법락입니다. 그것이 견성오도(見性悟道)한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이 법락이 나타나는 것이 현법락주(現法樂住)인데 참선이라는 뜻에서 이런 등등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종(禪宗)의 선(禪)은 고요히 생각도 하고 사유(思惟)정려(精慮)하는 뜻을 취하고 있으나 그 체(體)는 열반묘심(涅槃妙心)이라. 열반묘심은 불심입니다. 일체종지의 근본자리. 본래면목자리인 불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선정이라고 할 때는 관찰도 하고 그렇지만 선종(禪宗)에서 선이라 할 때는 훌쩍 뛰어 넘어 이것 저것을 다 초월한 하나의 불심을 바로 선이라고 합니다.
불심만을 문제시하고 견성만을 문제시하는 그런 것이 선종(禪宗)의 선(禪)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의 교리내에서 보통 선정이라고 할 때와 선종에서 '선' 할 때는 차원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가 상충하지 않고 같이 화해가 되어 더불어서 발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불교내에서 부질없는 소모를 안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무슨무슨 종파가 오십 종파요, 일본도 지금 팔십 종파라 합니다. 더구나 미국은 종교박람회장 같아서 불교도 지금 별의 별 파가 다 들어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각축하고 다투는 마당에서는 우리가 굉장히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른 쪽을 이해도 하고 살피기도 해야겠지요. 제 입장도 그런 처지에 입각해서 근본선도 우리는 알아야 되겠고 도스리랑카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도 참고를 해야되고, 일본의 임제종이나, 화두를 참구하는 의미도 알아야 되겠으며, 또는 화두없이 잠자코 비춰보는 묵조선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간단히 윤곽만 살폈지마는 그런 것을 다 취급을 했습니다.
근본선(根本禪)
◉ 근본선(根本禪)…구차제정(九次第定 : 사선(四禪),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
1. 사선(四禪)…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
2. 사공정(四空定)…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 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3. 멸진정(滅盡定)…성자(聖者)가 모든 심상(心想)을 다 없애고 적정(寂靜)하기를 바라고 닦 는 선정
근본선은 바로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어째서 구차제정이라 하는가 하면 사선정(四禪定)과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을 합하면 이것이 아홉이 되지 않습니까. 근본선 이것은 아함경을 근간으로 합니다. 아함경은 부처님 육성같은 경입니다. 부처님께서 초기에 참선하는 법은 모두가 다 근본선에 입각해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근본선으로 성도(成道)하셨고, 열반 드실 때도 열반경을 보면 근본선으로 해서 사선정과 사공정에 드시고, 멸진정에 들어 가셨다가 다시 또 내려오셔서 사선정에 들어가서 열반에 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근본선으로 공부를 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아함경을 보면은 '그대들이 철저한 계행을 지키고 그래서 초선에 들고 이선에 들고 삼선, 사선에 들어서 멸진정을 성취해서 아라한을 성취한다.'라는 말씀이 수십 군데 있습니다. 따라서 근본선에 대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선(四禪) 이것은 초선, 이선, 삼선, 사선. 등의 차원의 차이이기 때문에 사선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초선은 어떤 것인가. 대체로 윤곽을 좀 알아야 되겠지요.
초선 이것은 참선을 오래 해서 안정이 되어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우리 마음에 산란스런 생각이 들어가지 않고 이른바 삼매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가면 산란스러운 마음이 없어집니다. 이른바 무간정(無間定)이라. 다른 망상이 사이에 끼어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처음 앉으시면 다른 망상이 많이 나오지만 그것은 초기에 그럴 뿐입니다. 재가 불자님들은 주로 조석으로 오랫동안 앉으셔야 되겠지요. 그리고 평소에 장사를 하시든지 어디를 가시든지 간에, 미운 사람을 보더라도 우리가 연기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 성품은 다 부처인데 현상적으로 해서 남자고 여자고 그러는 것이지 본래는 다 부처가 아닌가.
누구를 만나도 부처같이 생각하고 부처같이 대접하도 보면 참선공부도 손해를 안봅니다. 우리 마음을 항시 하나로 추스리고 다스려야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집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참선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도 이것저것 생각하면 참선이 아닙니다. 마음이 내는 것이 모양이 내는 것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우리 생활에서 무엇을 하던지 부엌에서 공양을 짓던지 누구랑 얘기를 하든지간에 모두를 다 부처님 화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항시 생각을 하나로, 근본적인 자리로 돌리면 공부에 손해가 없이 참선이 진전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딴 생각이 안나온단 말입니다. 참다운 진리만 생각하고, 참다운 진리만이 옳은 것인데 그것이 확신이 됐는데, 다른 생각이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이른바 삼매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초선에 들어갑니다. 초선에 들어갈 때는 경에 보면은 우리 생리가 바꾸어집니다. 마음이 바꾸어짐에 따라서 우리 몸도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팔촉(八觸)이 발생하게 됩니다. 팔촉이라는 것은 몸이 어떤 때는 뜨겁고, 어떤 때는 춥고, 또는 몸이 공중에 뜨기고 하고 그런 저런 경험이 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생리가 바꾸어지는 증거입니다. 이른바 요새 도가(道家)식으로 말하면 환골탈태(換骨奪胎)란 말입니다. 우리가 그냥 생각할 때는 참선은 많이 하나 적게 하나 그대로 가만히 있는게 아닌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지 몸이야 그대로 가만히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몸과 생리가 바꿔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불교의 전문적인 말로 하면 소조사대(所造四大)라. 오염된 지수화풍 사대가 청정한 명정사대(明靜四大)로 바꿔진단 말입니다. 바꾸어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공덕입니다. 그것은 불경에 다 있습니다. 그렇게 바꾸어져서 육근청정이 되는 것입니다. 생리가 청정하게 되어야 초선에 들어갑니다. 초선에 들어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재가 불자님들이 참선을 좀 했다고 해서 나는 지금 초선인가 이선인가 이렇게 갑자기 생각을 마시고 공부를 끊임없이 하셔야 됩니다. 그냥 쉽게 누구나가 초선에 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공부가 좀 되어서 초선에 들어가도 그런저렁 해버리면 또 후퇴가 되겠지요. 공부란 것은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그렇게 지속을 시켜서 초선에 들어가면 그 삼매의 기운을 아주 소중하게 아껴서 보임(保任)을 해야 됩니다. 보임이라는 것은 공부하는 참선기운이 흩어질세라 소중하게 말도 가만가만히 하고, 행동도 조심하고, 서두르지 말고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부로 하면 선정 기운이 흩어져 버립니다.
따라서 음식도 조금씩 먹고, 될 수 있으면 말도 적게 하고, 말 많이 하면 그만큼 선정기운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정에 들어가려면 가급적 말도 않고 혼자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마는, 일단 사회생활을 하려면 그렇게 하기가 어렵겠지요. 그래서 재가불자님들도 평소에 그렇게 공부하시다가 일년에 한 두 번쯤은 내외 간에 함께 절에 오셔서 일주일이나 몇 일씩 오로지 공부하는 용맹정진의 기회를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본래대로 한 차원씩 올라갑니다. 차선공부,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어느 누구나 본래의 참 자기, 영생해탈의 열반경계, 참다운 행복을 바라는 이들은 누구나 꼭 가야할 길입니다. 게으름 부리면 못 가겠지요.
가고 안 가고는 본인한테 달렸겠지만, 우리가 인간인 한에는 꼭 가야 됩니다. 또 못 간다고 할 때는 끝없이 윤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선에 올라가면 정심(靜心)이라. 마음이 청정해서 욕계번뇌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초선까지는 아직 욕계번뇌의 종자가 좀 남아 있습니다. 평소에는 별로 생각이 안나오다가도 경계에 부딪히면 욕심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선에 들어가면 남녀의 음부도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선을 가르켜서 불교 전문 술어로 하면 구족지(具足地)라. 구족지가 무엇인고 하면은 계행을 참답게 지킬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선까지 못 들어가면 계행은 억지로 지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니 지키는 것입니다. 이선에 들어가면 음욕이 떨어져 버리니 그때는 다른 생각이 나올 수 없습니다. 계행이 원만히 갖춰지는 때입니다. 구족지라.
삼선에 들어가면 재미있기는 삼선이 제일 재미있다 그럽니다. 이 세상에서 삼선 들어간 재미같이 큰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삼선락이라. 그래서 아주 재미있고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광명이 훤히 비춰서 이것저것 다 알게 되고, 사선 들어가면 그때는 호흡이 끊어져 버립니다.
사선은 부동지(不動智)라. 사선에서는 호흡이 끊어집니다. 그때는 산란스런 마음이 조금도 안나옵니다. 이렇게 들어갔어도 아직은 견성은 못됩니다. 우리가 견성 그러면은 쉬운 것 같지만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 선방에서 공부하면서 보았지만 가벼운 사람들은 이런 근본선을 모르고 좀 재미있으면 그만 공부 다 배웠다고 말려도 튀어 나간단 말입니다. 공부를 더 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근본선을 우리가 꼭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 선정을 증명해 나가는 한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몰라 놓으면 환희심만 나면 그만 다 된 줄 압니다. 참선을 하고 있으면 기분 좋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닌 것인데 그러면 공부 다 되었다고 그만 뛰쳐나간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렇게 행동하면서 견성 했으니 무애행(無碍行)이라 아무렇게 행동해도 본래 청정이다 합니다.
그러나 이선만 올라가도 음욕이 끊어져 버려서 음탕한 생각도 안나고 음탕한 짓도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삼선은 그러한 정도가 더욱 더 증장 되고 사선은 호흡도 끊어져 버려서 참다운 삼매에 들지요. 그래서 부동정(不動定)이라 합니다. 선정중에서는 가장 고요한 것이지요. 그렇게 되었어도 역시 아직은 성자가 못됩니다.
그러다가 저 멸진정이라.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면 그때는 모든 번뇌를 모조리 끊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我)의 뿌리를, 자기라는 그 뿌리를 뽑아 버린단 말입니다.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해야 성자요, 도인입니다. 그래서 사공정(四空定) 이것은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라. 모두가 다 텅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광대무변한 세계를 관찰하는 그런 선정(禪定)이고, 식무변처(識無邊處)는 모두가 다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라 하는 하나의 마음의 그림자가 우주에 충만한 때고, 그 다음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공(空)도 아니요 식(識)도 아닌 알 수 없는 그러한 청정무비(淸淨無比)한 것이 충만해 있는 때고, 그 다음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생각이 전혀 없지도 않고 아주 미세한 생각, 극미(極微)한 생각만 남아 있는 때라. 이것이 비상비비상처입니다.
따라서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가도 아직은 성자가 못됩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스승을 찾아서 공부하실 때의 부처님의 일대기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부처님께서 거쳐가신 하나의 행로를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맨 처음에 발가바 선인, 고행을 위주로 하는 선인에게서 고행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지독한 고행을 다 했습니다. 하루에 씨앗 한 톨이나 보리 한 알을 드시면서, 하여튼 누가 따를 수 없는, 어느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고행을 다 했습니다. 그렇게 고행해서 발가바 선인이 올라간 선정에 들어갔습니다. 발가바 선인은 고행으로 해서 범천에 올라가는 공부를 했던 분입니다. 범천도 욕계가 아니라 색계입니다. 따라서 굉장히 청정한 곳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공부해 가지고 범천에 올라가는 선정에 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범천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범천 역시 영생의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의 천상이라는 제한된 곳에 올라간 것이지, 그것이 해탈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구하는 것은 생사 해탈인데 천상에만 올라가면 된다는 스승을 뿌리치고 그 당시에 제일 훌륭하다는 이른바 아라라카란에게 갔던 것입니다. 아라라카란은 이른바 무소유처라.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닦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발가바에게 범첨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배웠고, 석가모니께서는 본래 천재적인 분이라 쉽게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도 결국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지 이 또한 해탈의 법은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서도 떠나면서,
"스승이시여, 어디로 가면 더 높은 공부를 배우겠습니까? 당신보다 더 나은 분이 있으면 알려 주소서."라고 물으니까 아라라 선은이 "내 아들이 우까다인데 나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서 삼계에서는 제일 꼭대기 하늘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닦았으니 거기가서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소유처까지 올라간지 얼마 안되어서 바로 삼계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선정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생사해탈, 즉 말하자면 영생의 자리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 곳도 역시 복이 다하면 다시 떨어집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생사 해탈인데 천상에 올라 천상복만 받고 말 것인가?
그래서 다시 "스성이시여, 다른데 가서 해탈의 법을 구할 수 없겠나이까?"라고 물으니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더 큰 스승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대 보리수 아래로 가셔서 자기 스스로 무사도(無師道)라. 스승 없이 닦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밀교에서 보면 삼세제불이 다 경각하고 지켰다 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곳에서는 사람만 스승이겠지만 밀교보다 더 심오한 형이상학 쪽에서 볼 때는 우주에는 무량의 법신불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법신불의 경각(驚覺)을 받고서 무상대각을 성취했다고 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지금 계발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꼭 되어야 하고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면은 미쳐 가지도 못하고 갔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증상만(增上慢)이라는 허물을 범합니다.
일단은 내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또는 내 마음이 바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마음 깨달으면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라고 하더라도 금생에 나와서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느끼고 하는 그런 것이 우리한테 나쁜 습관과 습기로 남아 있고, 바로 전생에도 무수생 동안을 중생으로 윤회하는 과정에서 또 습기가 남아 있고, 그러기 때문에 불교말로 하면은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여러 생과 더불어서 묻어 나온 번뇌와, 그리고 금생에서 온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라. 금생에 나와서 다시 잘 못 배우고, 듣고, 느끼고 한 그런 번뇌들 때문에 우리가 번뇌의 습관성을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자가 되기는 꼭 되어야겠는데, 우리 마음은 본래 조금도 오염이 안된 불성이라 하더라도 나쁜 습관성이 거기에 배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려야 차근차근 정화가 됩니다. 근기가 수승한 분은 빨리 정화가 정화가 되고 근기가 더딘 분은 좀 더디게 되는 그 차이가 있는 것이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급한 사람들은 단박하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이사 빨리 되면 될수록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공부하다 보면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갖가지 경계가 많이 나옵니다. 부처같은 사람도 나오고, 평소에 모르던 것도 척척 알아지고 광명도 비추고 하면 한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공부가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인 행세하는 사람을 굉장히 많이 봤습니다. 그래 놓으면 참 딱합니다. 그러면 자기도 죄를 범하고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도 결국은 죄를 범합니다. 일맹인중맹(一盲引重盲)이라. 한 소경이 뭇 소경을 데려다가 함정에 빠뜨린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근본선,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육성으로 설하신 근본직설을 참고로 해서 우리 공부가 얼마만치 되어 있는가를 화엄경 십지보살이나 능엄경의 사십육지 등을 비추어 우리가 그런 위차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공부가 뛰어 넘으면 넘은 만큼 알아둬야 자기 경계를 정확히 점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증상만(增上慢)이라. 증상만이란 것은 미어 못 증(增)하고 증했다고 합니다. 못 통하고 통했다 하고, 증상만이 되면 성자를 기만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공부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근본선이 바로 구차제정(九次第定)입니다.
사선, 사공정, 멸진정, 근본선을 생각해 두셨다가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아함경을 보십시오. 지금 아함경 풀이가 꽤 많이 나와 있지만은 풀이를 하신 분들이 근본선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안두고 했기 때문에 근본선의 역서(譯書)를 별로 안해놨어요. 그러니까 중요한 점을 모두 놓쳐버리지요. 일본 사람들이 한 풀이도 봤는데 그것도 역서를 해야 할 것인데 역서를 안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참고로 들으시고, 아함경을 보시면은 근본선은, 사선, 사공정, 멸진정이라는 말씀을 그 안에서 누누히 하신 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출가를 한 것은 모두가 그 뜻이 어디 있는가 하면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계율이 청정해야 삼매에 빨리 들어갑니다. 계율이 부실하면 삼매에 못 들어 갑니다. 시라청정(尸羅淸淨)은 삼매현전(三昧現前)이라. 시라는 계율을 말하는 것인데 계율이 청정해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악행한 사람이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함경을 보면은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조그마한 나쁜 행동에도 마음으로 두려움을 품고 마음을 추스려서 초선에 들어가고, 이선 들어가고 삼선, 사선 들어가고 그렇게 하다가 멸진정에서 자기라는 아(我)를 몽땅 소멸하고서 이른바 견도, 아라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이란 것이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공부를 상당히 하신 분들도 혼돈을 느낍니다. 그래서 여러 재가 불자님들은 정확하게 윤곽을 잡으셔야 됩니다.
선,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바로 비춰보는 공부입니다. 정, 이것은 주로 고요한 쪽으로 바른 마음을 분별없이 나가는 것이고 그것을 합한 것이 바로 선정인데 선정을 보통 합해서 많이 씁니다. 참선 할 때에 가장 큰 원수가 무엇인고 하면은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분별시비하는 것과 꾸벅꾸벅 조는 것이란 말입니다. 선방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보면 다 압니다.
아무리 참선을 오래 했다 하더라도 꾸벅꾸벅 졸아버리면 그 사람은 참선을 잘못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한사코 자기의 신심과 원력을 다 발휘해서 꼭 이 꾸벅꾸벅 하는 혼침 즉, 졸리는 것과 또 분별시비하는 이른바 도거(掉擧)라, 마음이 항시 흔들리는 것 말입니다. 모두중생(毛頭衆生)이라, 바람이 안 불어도 터럭 끝이 항시 움직이고 있듯이, 우리 범부 마음은 다 그렇습니다. 항시 동요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다 잡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혼침없이 앉기는 단정히 앉아 제법 잘하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부터 분별시비하면 참선은 되지 않고 망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두 가지를 꼭 우리가 이겨내야 합니다. 꾸벅꾸벅 조는 것과 분별 시비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우리가 보조어록을 보더라도 정혜쌍수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육조단경에도 나오고 어느 성전에나 다 들어 있습니다. 정혜쌍수라. 정 이것은 마음을 고요하니 하나에 머물게 하고 혜는 바로 진여불성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우리가 훤히 비춰분다 말입니다. 이뭣고. 시심마(是甚麽)도 그냥 단순히 이뭣고가 아니라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 검고,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그런 것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은 이것이 무엇인가. 그 자리를 들어야지 덮어놓고 이뭣고만 한다고 선이 될 것입니까?
우리는 화두가 나올 때 의의를 알아야 됩니다.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도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가. 또는 부처가 무엇인가. 이런데 따라서 화두가 나왔단 말입니다. 따라서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자리를 분명히 들어야 화두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상대적으로 의심만 한다고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면목 자리가 진여불성이고, 진여불성자리는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한 생명의 실체이고 실상입니다. 따라서 이런 실상자리를 비추어 봐야 합니다. 우리 참선하는 사람들은 꼭 주의해야 합니다. 참선을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비춰보는 지혜란 말입니다. 단경에 보면은 반야관조(般若觀照)라. 그 반야관조란 말이 무슨 말인고 하면 반야의 지혜도 역시 우리 마음을 관조한다는 말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무엇인가. 가상과 가명을 떠나서 참다운 지혜로 해서 우리 본래 자리를 비춰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돼야 혼침과 분별시비가 줄어듭니다. 그냥 덮어놓고 아무 것도 없이 묵묵부답으로 앉아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부처님 명호도 모두가 다 그런 진여불성의 하나의 대명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혜균등이라. 정과 지혜가 균등하게 나가는 그야말로 신묘한 경지를 바로 선정이라 하고 그리고 선정의 이름을 다시 말하면 바르게 생각하는 정사유(正思惟)라. 그러므로 해서 우리한테 있는 악덕이 가신단 말입니다. 참선을 하면 저절로 선량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뒤에 참선공덕이 나옵니다만 마음이 거칠은 사람도 부드러워지고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그리고 정려(靜慮)라. 항시 자세가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가사 고요하지 못하고 서두르는 사람들은 자기 반성을 해야 됩니다. 서두르는 것은 마음이 항시 움직이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거일동이 사급취완(捨急取緩)이라. 버릴 사(捨)자, 급할 급(急)자, 급한 것을 버리고서 취완이라. 취할 취(取)자, 늘어질 완(緩)자. 급한 마음 버리고서 느릿느릿하니 그래야 우리가 실수를 안합니다. 급해서 그냥 서두르는 사람들은 결국 마음이 고요하게 못됩니다. 참선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또 그 공덕은 공덕총림이라. 거기에 따르는 공덕이 끝도 갓도 없이 많단 말입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도 그 공덕의 한 예지요. 지금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삼명육통 하면 그것은 하나의 신화가 아닌가, 신통은 외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부처님 경전에 삼명육통이란 말씀이 얼마나 나와 있습니까. 만약 그것이 외도의 말이라면 부처님께서 거짓말 하신거지요. 삼명육통이란 말이 다른 경전에서도 수 백 군데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 본래 불심은 그와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과거를 다 훤히 알고 미래도 다 알고 우주 만물을 다 무불통지(無不通知)하고 말입니다. 또는 누진통(漏盡通)이라. 일체번뇌를 다 깨버리는 그런 지혜와 또는 다른 사람 마음을 아는 타심통(他心通)이라. 우주에 있는 모든 음성을 헤아려서 듣는 천이통(天耳通)이라. 우주의 것을 다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이라. 또는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우리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신화나 기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우리한테는 상관없다고 생각 마십시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위대한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 등은봉스님, 그이는 마조스님 제자입니다. 등은봉 스님이 공부를 많이 하신 후 오대산에서, 내가 이제 나이도 많이 먹었으니까 열반에 들어야겠구나. 하고 암자에서 나섰는데 오대산 위에서 정부군과 반란군이 싸운단 말입니다. 그 싸우는 꼴이 아주 피비린내 나는 참극을 연출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해서 저들이 무지해서 저와 같이 업을 짓고 싸우다가 죽으면 다시 윤회하고 지옥도 가고 할 것인데, 어떻게든지 제도를 하려고 해도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이 누구 말을 듣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면 중놈이 허튼소리나 한다고 하겠지요. 그래서 주장자를 하늘로 휙 던졌단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몸을 솟아 하늘로 올라가서 그 주장자를 타고 싸우는 전장을 빙빙 돌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때는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광명도 비추었겠지요. 그러니까 싸우던 사람들이 그걸 보느라고 넋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수양을 하면 저렇게 위대한 힘이 나오는 것인데 우리가 뭣 때문에 싸울 것인가.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나 버렸단 말입니다. 그 등은봉 스님은 실존적인 인물입니다. 당나라 때니까 그렇게 멀지도 않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성 불성은 다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삼명육통을 우리가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의 습관성을 온전히 떼어버리지 못하니까 우리가 미처 못한단 말입니다.
물론 견성오도 했다고 해서 신통이 다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견성오도 했어도 신통 못하는 분들도 많지만은 그러나 견성오도한 분들은 앉아서 가만히 잠기면 신통은 저절로 다 나온다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면 말입니다. 다만 중생들이 불쌍하니까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삼매에 들지 않고 중생들한테 훌륭한 법문이나 들려 줄려고 그러는 것이지 그래서 같은 성자도 비증보살(悲增菩薩)이라. 자기가 수승하지 못하면 공부를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수승한 분들은 삼매를 초월해서 그와 같이 신통도 발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대에서는 여러분들이 아는 빈두로 존자도 신통을 하다가 부처님께 견책을 맞고 서구야니로 가 계시다가 나중에 옆에 사람들이 하도 빈두로 존자를 보고 싶다고들 하니까 부처님께서 허락해서 비로소 빈두로 존자가 천상에 있다가 다시 내려오자 부처님께서 말씀이 '너는 신통을 함부로 한 죄로 열반에 들지 말고 영원히 사바세계에 남아서 중생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시 우리 절집에서 모시고 있는 이른바 나반존자 독성이 바로 그 분 빈두로 존자입니다.
第一編 一人轉에 一人度(일인전에 일인도)
第一章 般若波羅密多心經(반야바라밀다심경)의 讀解(독해)
第二章 菩提方便門(보리방편문)
第一節 阿彌陀佛(아미타불)
第二節 因圓果滿(인원과만)
第三節 三身了別(삼신요별)
第四節 五智如來(오지여래)
第五節 妙有現象(묘유현상)
第六節 析空觀(석공관)
第七節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
第八節 阿뇩菩提(아누보리)의 實相解(실상해)
第九節 五輪成身觀(오륜성신관)
第十節 金剛三昧頌(금강삼매송)
第十一節 三輪但空頌(삼륜단공송)
第十二節 觀音字輪頌(관음자륜송)
第三章 觀音文字(관음문자)
第一節 觀音文字(관음문자) 公布(공포) 趣旨文(취지문)
第二節 父和音偈(부화음게) 母愛音偈(모애음게)
第三節 觀音字輪(관음자륜)
1, 十七字母(십칠자모)
2, 字輪化(자륜화)의 基數字(기수자)
3, 八十七字輪(팔십칠자륜)
第四節 基數妙偈(기수묘게)
第五節 文書往來(문서왕래)
第四章 釋尊(석존) 一代(일대)의 梗槪(경개)
第一節 룸비니 園(원)에서 誕生(탄생)
第二節 道(도)를 求(구)하사 仙林(선림)에 入(입)함
第三節 正覺(정각)을 大成(대성)함
第四節 五十年(오십년) 敎化(교화)의 行脚(행각)
第五節 追想(추상)
第五章 護法團(호법단) 四次(사차) 聲明書(성명서)
第六章 懸記(현기)
一, 流通(유통) 二, 思潮(사조)
三, 政治(정치) 四, 合流(합류)
五, 主義(주의) 六, 義務(의무)
第七章 卍德頌(만덕송)과 十如是(십여시)
第二編 解脫十六地(해탈십육지)
初, 三歸地(삼귀지) 二, 信願地(신원지)
三, 習忍地(습인지) 四, 加行地(가행지)
五, 金剛地(금강지) 六, 喜樂地(희락지)
七, 離垢地(이구지) 八, 發光地(발광지)
九, 精進地(정진지) 十, 禪定地(선정지)
十一, 現前地(현전지) 十二, 羅漢地(나한지)
十三, 支佛地(지불지) 十四, 菩薩地(보살지)
十五, 有餘地(유여지) 十六, 無餘地(무여지)
第三編 首楞嚴三昧圖訣(수릉엄삼매도결) 上篇(상편)
※ 首楞嚴三昧圖(수릉엄삼매도)의 縮圖(축도)
서문
第一章 首楞嚴(수릉엄)
第一節 一行(일행)과 一相(일상)
第二節 三昧(삼매)
第二章 般若波羅密(반야바라밀)
第一節 般若(반야)
第二節 波羅密(바라밀)
第三節 十波羅密(십바라밀)과 菩薩十地(보살십지)
第四節 十地(십지)의 廢立(폐립)
第五節 三毒(삼독) 六賊(육적)
第三章 四諦(사체)
第一節 八正道(팔정도)
第二節 十二因緣法(십이인연법)
第三節 六趣(육취<途(도)>)
第四章 金剛三昧(금강삼매)
第一節 獅子吼三昧(사자후삼매)
第二節 四輪(사륜)
第三節 析空觀(석공관)
第四節 四相(사상)
第五節 金剛界(금강계) 五部(오부)
第六節 五佛座(오불좌)
第七節 五智(오지)
第五章 佛性(불성)
第一節 三因佛性(삼인불성)과 五佛性(오불성)
第二節 佛性戒(불성계)
第六章 三身(삼신)과 四土(사토)
第一節 法身(법신)의 體性(체성)
第二節 四種(사종)의 五法身(오법신)
第三節 法身(법신)의 無相(무상)과 有相(유상)
第四節 法身(법신) 說法(설법)
第七章 本迹二門(본적이문)
第一節 本迹十妙(적문십묘)
第二節 境(경)
第三節 本門十妙(본문십묘)
第四節 本迹相攝(본적상섭)
第八章 十不二門(십불이문)
第一節 十無碍(십무애)
第二節 十無盡藏(십무진장)
第三節 地藏十輪(지장십륜)
第四節 十玄門(십현문)
第五節 玄門無碍十因(현문무애십인)
第六節 十無二(십무이)
第七節 十無依行(십무의행)
第九章 法界(법계)
第一節 四種法界(사종법계)와 入法界(입법계)의 三觀(삼광)
第二節 十法界(십법계)와 九界(구계)
第十章 十身(십신)
第十一章 眞如(진여)
第一節 三眞如(삼진여)와 七眞如(칠진여)
第二節 菩薩十地(보살십지) 所得(소득)의 十眞如(십진여)
第十二章 忍(인)
第一節 三忍(삼인)과 四忍(사인)
第二節 五忍(오인)과 十三觀門(십삼관문)
第三節 十忍(십인)과 十四忍(십사인)
第十三章 五十六位(오십육위)와 四滿成佛(사만성불)
第一節 加行(가행)의 四善根(사선근)
第二節 十信(십신)
第三節 十住(십주)
第四節 十行(십행)
第五節 十地心(십지심)
第六節 十廻向(십회향)과 等妙(등묘)
第十四章 三界(삼계)
第一節 四禪定(사선정)
第二節 滅盡定(멸진정)
第三節 兜率內院(도솔내원)
第十五章 須彌山(수미산)
第一節 須彌四層級
第二節 地獄(지옥)
第三節 四洲地獄(사주지옥)
第四節 轉法輪(전법륜)의 輪王曼茶羅(윤왕만다라) 四輪(사륜)
第十六章 曼茶羅(만다라)
第四編 宇宙(우주)의 本質(본질)과 形量(형량)
머리말
서문
卷 頭(數妙偈)
第一 列曜(열요)의 形態(형태)와 比量(비량)
1. 日(일)의 心空(심공)과 面隙(면극)은 月(월)이 地球(지구)를 抱出(포출)한 迹門(적문)이다.
2. 月頭(월두)의 尖相(첨상)은 日(일)로부터의 抽出相(추출상)으로서 月尻(월고)의 空洞(공동)은 地球(지구)가 剖判(부판)된 跡印(적인)이다.
3. 地球(지구)가 卵形(난형)임은 月(월)을 模擬(모의)한 때문이며, 地藏心珠(지장심주)는 先天(선천)의 遺物(유물)이다.
4. 地球(지구)와 日球(일구)
5. 月(월)의 求積(구적)
6. 日, 月, 地(일, 월, 지)의 比(비)
7. 日, 地(일, 지) 間(간) 距離(거리)
8. 月, 地(월, 지) 間(간) 距離(거리)
9. 月底(월저) 凹處(요처)의 淺深(천심) 및 그 容積(용적)
10. 地球(지구)의 軌道(궤도)와 公轉(공전)의 度數(도수)
11. 陽, 陰曆(양, 음력) 時分(시분)의 差(차) 및 一朔望間(일삭망간)에 있어서의 地球(지구)의 進度(진도)
12. 一朔望(일삭망) 間(간)에進(진)하는 月途(월도)의 길이
13. 月(월)의 十回(십회) 右轉(우전)에 佯(양)한 地球(지구)의 左轉(좌전) 回數(회수)
14. 地球(지구) 公轉(공전) 五回(오회)로서 日球(일구)가 一回(일회) 左旋(좌선)한다.
15. 恒星(항성) 亦是(역시) 旋廻(선회)한다.
16. 地球(지구)가 私轉(사전)하기 716回로서 空劫(공겁)이 된다.
17. 成, 住, 壞, 空(성, 주, 괴, 공) 四劫(사겁)의 期間(기간)
18. 住劫(주겁) 中(중) 過去(과거) 現在(현재) 未來(미래) 三劫(삼겁)의 期間(기간)
19. 우리<我(아)> 宇宙(우주)의 一圓(일원)
20. 日體(일체) 7倍(배)의 質量(질량)을 有(유)한 星霧系(성무계)
21. 月體(월체) 55倍(배)의 質量(질량)을 有(유)한 火星界(화성계)
22. 月體(월체) 9倍(배)의 質量(질량)을 有(유)한 月世界(월세계)
23. 月體(월체) 36倍(배)의 質量(질량)을 有(유)한 木星(목성)의 區宇(구우)
24. 月體(월체) 20倍(배)인 四大(사대) 金星(금성)과 地體(지체) 128倍(배)인 八位(팔위)의 金星(금성)
25. 地體(지체) 944倍(배)의 質量(질량)을 有(유)한 四七星宿界(사칠성수계)
26. 地體(지체) 8倍(배)인 地輪界(지륜계)
27. 列曜(열요) 空型(공형)의 樣相(양상)
28. 內宙(내주) 外宇(외우)와 銀河水(은하수)
29. 恒星(항성)과 遊星(유성)
30. 七曜(칠요)의 差別(차별)
31. 四大(사대) 客塵(객진)
32. 列曜(열요) 輪界(륜계)의 密度(밀도)
33. 輪界(륜계)와 光明(광명)
34. 左旋塵(좌선진)과 右旋塵(우선진)
35. 磁金塵(자금진)과 電金塵(전금진)
36. 宇宙(우주)의 原動力(원동력)
第二 地塵世界(지진세계)와 地球(지구)
37. 地下(지하)의 六級層(육급층)과 地上(지상)의 六輪圈(육륜권)
38. 地球(지구)의 解體(해체)
39. 地上(지상) 六輪圈(육륜권)의 體積(체적)
40. 輪圈(륜권) 別(별) 地塵(지진)의 分布(분포)
41. 輪圈(륜권) 別(별) 地塵(지진) 體積(체적)의 比率(비율)
42. 地輪界(지륜계)의 四大塵(사대진)과 冷, 熱量(냉, 열량)
43. 月下(월하) 十界(십계)의 相距(상거)와 地球(지구) 木星(목성) 間(간)의 連絡線(연락선)
44. 四七(사칠) 星宿界(성수계)의 質量(질량)
45. 四七(사칠) 星宿界(성수계) 質量(질량)의 差別(차별)
第三 水塵(수진) 世界(세계)와 日球(일구)
46. 日身(일신)의 八級(팔급) 分開(분개)
47. 日心(일심)에서 地軌(지궤)까지의 經由( 경우) 區宇(구우)
48. 日心(일심)에서 虛無界(허무계)까지의 距離
49. 日心(일심)에서 水星界(수성계)까지의 距離
50. 日心(일심)에서 假空界(가공계)까지의 距離
51. 宇宙(우주)의 極中(극중)에서 極邊(극변)까지의 距離(거리)
52. 日球(일구)의 解體(해체)
53. 水星界(수성계) 十八個階(십팔개계)의 區宇(구우)에 있는 全(전) 水星(수성)의 位數(위수)
54. 水星群(수성군)의 總體積(총체적)과 別體積(별체적)
55. 假空界(가공계) 四個級(사개급) 三十四個階別(삼십사개계별)의 總(총) 水塵量(수진량)
56. 眞空界(진공계)의 水塵量(수진량)과 星霧系(성무계)의 總(총) 質量(질량)
第四 火塵世界(화진세계)와 月曜(월요)
57.九個 (구개호)의 距離(거리)의 質量(질량)
58. 月世界(월세계)에서 木星(목성)의 區宇(구우)를 넘어 火星界(화성계)까지의 距離(거리)
59. 火星(화성) 內界(내계) 下(하) 二個層(이개층) 十三個段(심삽개단)의 火塵量(화진량)
60. 火星(화성) 外界(외계) 下(하) 二個層(이개층) 十三個段(심삽개단)의 火塵量(화진량)
61. 火星(화성) 內界(내계) 上(상) 三個層(삼개층) 十二個段(심이개단)의 區宇(구우)에 있어서의
火星(화성)의 位數(위수)
62. 火星(화성) 外界(외계) 上(상) 三個層(삼개층) 十二個段(심이개단)의 區宇(구우)에 있어서의
火星(화성)의 位數(위수)
63. 火星(화성)의 總別(총별) 體積(체적)과 總火塵量(총화진량)
64. 電子(전자)의 量(양)과 電波(전파)가 미치는 區域(구역)
第五 風塵世界(풍진세계)와 木星(목성)
65. 木星(목성) 區宇(구우) 下(하) 五個層(오개층)의 陰性火塵量(음성화진량)
66. 木星(목성) 區宇(구우) 上(상) 三個層(삼개층)에 있어서의 三品(삼품) 木星(목성)의 體積(체적)과 그
陰性(음성) 火塵(화진)
67. 日球(일구)의 冷量(냉량)과 引力量(인력량)
68. 星霧系(성무계)의 冷量(냉량)과 引力量(인력량)
69. 宇宙(우주)의 左旋塵(좌선진)에 말미암은 水平力量(수평력량)
70. 水星界(수성계)의 熱量(열량)과 運動量(운동량)
71. 月世界(월세계)의 熱量(열량)과 運動量(운동량)
72. 木星(목성) 區宇(구우)의 陰性(음성) 熱量(열량)과 靜力量(정력량)
73. 全(전) 宇宙(우주)에 있어서의 右旋(우선) 斥力量(척력량)
74. 全(전) 宇宙(우주)에 있어서의 左旋(좌선) 引力量(인력량)
75. 月(월)로 하여금 木星(목성)과 九線(구선)을 連繫(연계)시키는 地輪界(지륜계)의 引力量(인력량)과
冷量(냉량)
76. 地輪界(지륜계)의 陽性(양성) 火塵(화진)과 陰性(음성) 水塵(수진)의 分量(분량)
77. 地輪界(지륜계)의 風塵量(풍진량)과 冷熱(냉열)의 體積(체적)
78. 地輪界(지륜계)의 動力(동력)과 靜力(정력) 또는 右旋風力量(우선풍력량)과 斥力量(척력량)
79. 四七(사칠) 星宿界(성수계)의 冷量(냉량)과 引力量(인력량)
80. 四七(사칠) 星宿界(성수계)의 兩性(양성) 熱量(열량)과 風塵量(풍진량)
81. 四七(사칠) 星宿界(성수계)의 動力(동력)과 靜力(정력) 또는 風力量(풍력량)
第六 金塵世界(금진세계)와 金星(금성)
82. 四大金星(사대금성)과 八位金星(팔위금성)의 總別(총별) 體積(체적)
83. 列曜(열요) 또는 流質(유질) 根據(근거)의 全體積(전체적)
84. 宇宙(우주)의 金塵量(금진량)
85. 冷化(냉화) 金塵(금진)
86. 熱化(열화) 金塵(금진)
87. 中和(중화) 金塵(금진)
88. 冷力化(냉력화) 金塵(금진)
89. 熱力化(열력화) 金塵(금진)
90. 月(월)의 熱力(열력)으로 말미암은 土星界(토성계)의 冷光化(냉광화) 金塵(금진)
91. 日(일)의 冷力(냉력)에 由(유)한 土星界(토성계)의 熱光化(열광화) 金塵(금진)
92. 金星(금성) 또는 土星界(토성계)에 있어서의 日光(일광)과 月光(월광)의 比量(비량)
93. 에테르와 金塵(금진)
94. "이―자"와 金塵(금진)
95. 識力(식력)과 神力(신력)
96. 識光(식광)과 智光(지광)
97. 智力(지력)과 神通力(신통력)
98. 菩薩(보살) 十力(십력)과 如來(여래) 十力(십력)
99. 識神(식신)의 力量(역량)과 業力(업력)
100. 金塵(금진)과 大千世界(대천세계)
卷 末
金剛心論(금강심론)
수미산
광륜지
마음의 고향
원통불법의 요체
정통선의 향훈
第一編 一人轉에 一人度(일인전에 일인도)
第 一 章 般若波羅密多心經의 讀解(반야바라밀다심경의 독해)
心經(심경)은 本師(본사)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께서 舍利子(사리자)에 對(대)하신 修道法門(수도법문)이니라.
經文(경문)의 素讀(소독)이 一(일)이오 二(이)에 懸吐(현토)의 音讀(음독)과 三(삼)에 訓讀(훈독)이라
四(사)에 略解(약해)의 解讀(해독)만으로 了知(요지)하고
五(오)에 第二(제이 : 懸吐(현토)의 音讀(음독))와 第四(제사 : 略解(약해)의 解讀(해독))로 竝讀(병독)하다가
六(육)에 第三(제삼 : 訓讀(훈독))과 第四(제사 : 解讀(해독))로 合讀(합독)하니
七(칠)에 意讀(의독)만으로 終(종)하야八(팔)에 이를 悉皆(실개) 義釋(의석)할지라
九(구)에 觀解(관해)로 照了(조료)하고 十(십)에 黙照(묵조)할새
如實信(여실신)의 信滿(신만)으로써 法(법)에 住(주)하야 如實解(여실해)의 解滿(해만)으로써 實行(실행)하고 如實修行(여실수행)의 行滿(행만)으로써 實證(실증)하되 身證心悟(신증심오)의 證滿(증만)으로 成佛(성불)할진져
般若心經(반야심경)의 原文(원문) - 玄장法師詔譯(현장법사조역)
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관자재보살) 行深般若波羅密多時(행심반야바라밀다시) 照見五蘊皆空度(조견오온개공도) 一切苦厄(일체고액) 舍利子(사리자) 色不異空(색불이공) 空不異色(공불이색)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 受想行識(수상행식) 亦復如是(역부여시) 舍利子(사리자) 是諸法空相(시제법공상) 不生不滅(불생불멸) 不垢不淨(불구부정) 不增不減(부증불감) 是故(시고) 空中無色(공중무색) 無受想行識(무수상행식)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乃至無意識界(무안계내지무의식계) 無無明(무무명) 亦無無明盡(역무무명진) 乃至無老死(내지무노사) 亦無老死盡(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무고집멸도) 無智(무지) 亦無得(역무득) 以無所得故(이무소득고) 菩提薩陀(보리살타) 依般若波羅密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 心無罣碍(심무 가애) 無罣碍故(무괘애고) 無有恐怖(무유공포) 遠離顚倒夢想(원리전도몽상) 究竟涅槃(구경열반) 三世諸佛(삼세제불) 依般若波羅密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 得阿辱多羅三藐三菩提(득아누다라삼먁삼보리) 故知般若波羅密多(고지반야바라밀다) 是大神呪(시대신주) 是大明呪(시대명주) 是無上呪(시무상주) 是無等等呪(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능제일체고) 眞實不虛(진실불허) 故說般若波羅密多呪(고설반야바라밀다주) 卽說呪曰(즉설주왈) 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沙婆訶(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보디사바하)
般若心經(반야심경)의 懸吐(현토)
(般若波羅密多心經(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관자재)의 菩薩(보살)이 行深般若波羅密多時(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하야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이니
舍利子(사리자)야 色不異空(색불이공)이오 空不異色(공불이색)일새 色卽是空(색즉시공)이오 空卽是色(공즉시색)이라 受想行識(수상행식)도 亦復如是(역부여시)니
舍利子(사리자)야 是諸法空(시제법공)의 相(상)이 不生不滅(불생불멸)이며 不垢不淨(불구부정)이며 不增不減(부증불감)일새
是故(시고)로 空中(공중)에 無色(무색)이라 無受想行識(무수상행식)이니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요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이오 無眼界(무안계)요 乃至無意識界(내지무의식계)일새 無無明(무무명)이라 亦無無明盡(역무무명진)이며 乃至無老死(내지무노사)라 亦無老死盡(역무노사진)이며 無苦集滅道(무고집멸도)니 無智(무지)라 亦無得(역무득)하야 以無所得(이무소득)일새 故(고)로
菩提薩**(보리살타)- 依般若波羅密多(의반야바라밀다)니 故(고)로 心無**碍(심무괘애)요 無**碍故(무괘애고)로 無有恐怖(무유공포)라 遠離顚倒夢想(원리전도몽상) 하고 究竟涅槃(구경열반)하나니
三世諸佛(삼세제불)도 依般若波羅密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로 得阿**多羅三**三菩提(득아누다라삼먁삼보리)시니라
故知(고지)하라 般若波羅密多(반야바라밀다)가 是大神呪(시대신주)며 是大明呪(시대명주)며 是無上呪(시무상주)며 是無等等呪(시무등등주)니 能除一切苦(능제일체고)요 眞實不虛(진실불허)라
故(고)로 說般若波羅密多呪(설반야바라밀다주)일새 卽說呪曰(즉설주왈) 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沙婆訶(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보디사바하)라시니라
蓋明心而(개명심이) 見性(견성)이오 見性而(견성이) 悟道(오도)일새 先修後悟(선수후오)란 修(수)는 迷修(미수)요 先悟後修(선오후수)란 修(수)는 悟修(오수)니 修法(수법)에 있언 講經(강경)이나 誦呪(송주)나 參禪(참선)이나 觀法(관법)이나 그의 方法(방법)은 多少(다소) 差異(차이)가 有(유)하지만 迷(미), 悟(오)의 境(경)은 一也(일야)요 證(증)이란 身證(신증)이며 悟(오)란 心悟(심오)일새 身證心悟(신증심오)를 證悟(증오)라 云(운)하나니라
甲申春(갑신춘)
碧山閑人 撰(벽산한인 찬)
第 二 章 菩提方便門(보리방편문)
이의 菩提(보리)란 覺(각)의 義(의)로서 菩提方便門(보리방편문)은 見性悟道(견성오도)의 方便(방편)이라 定慧均持(정혜균지)의 心(심)을 一境(일경)에 住(주)하는 妙訣(묘결)이니 熟讀了義(숙독요의)한 후 寂靜(적정)에 處(처)하고 第一節(제일절)만 寫(사)하야 端坐正視(단좌정시)의 壁面(벽면)에 付(부)하야써 觀而(관이) 念之(염지)하되 觀(관)의 一相三昧(일상삼매)로 見性(견성)하고 念(염)의 一行三昧(일행삼매)로 悟道(오도)함
第一節 阿彌陀佛(아미타불)
心(심)은 虛空(허공)과 等(등)할새 片雲隻影(편운척영)이 無(무)한 廣大無邊(광대무변)의 虛空的(허공적) 心界(심계)를 觀(관)하면서 淸淨法身(청정법신)인달하야 毘盧遮那佛(비로자나불)을 念(염)하고 此(차) 虛空的(허공적) 心界(심계)에 超日月(초일월)의 金色光明(금색광명)을 帶(대)한 無垢(무구)의 淨水(정수)가 充滿(충만)한 海象的(해상적) 性海(성해)를 觀(관)하면서 圓滿報身(원만보신)인달하야 盧舍那佛(노사나불)을 念(염)하고 內(내)로 念起念滅(염기염멸)의 無色衆生(무색중생)과 外(외)로 日月星宿(일월성수) 山河大地(산하대지) 森羅萬象(삼라만상)의 無情衆生(무정중생)과 人畜乃至(인축내지) 蠢動含靈(준동함령)의 有情衆生(유정중생)과의 一切衆生(일체중생)을 性海無風(성해무풍) 金波自涌(금파자용)인 海中氵區(함중구)로 觀(관)하면서 千百億化身(천백억화신)인달하야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을 念(염)하고 다시 彼(피) 無量無邊(무량무변)의 淸空心界(청공심계)와 淨滿性海(정만성해)와 氵區相衆生(구상중생)을 空(공), 性(성), 相(상), 一如(일여)의 一合相(일합상)으로 通觀(통관)하면서 三身一佛(삼신일불)인달하야 阿(化)彌(報)陀(法)佛(아(화)미(보)타(법)불)을 常念(상념)하고 內外生滅相(내외생멸상)인 無數衆生(무수중생)의 無常諸行(무상제행)을 心隨萬境轉(심수만경전)인달하야 彌陀(미타)의 一大行相(일대행상)으로 思惟觀察(사유관찰)할지니라
第二節 因圓果滿(인원과만)
如斯(여사)히 間斷(간단)없이 專心全力(전심전력)하야 觀而念之(관이염지)하면 習忍(습인 : 修習安忍(수습안인))이 生(생)하면서 相似覺(상사각)을 成就(성취)하는 동시에 明得定(명득정)과 明增定(명증정)의 性忍位(성인위)인 性地(성지)를 거쳐 印順定(인순정)에서 비로소 道種忍(도종인)이 生(생)하고 純一無雜(순일무잡)의 一心支(일심지)인 無間定(무간정)에 入(입)하매 心(심)이 明鏡止水(명경지수)와 如(여)할지라
오직 加行功德(가행공덕)으로써 假觀的(가관적) 一相三昧(일상삼매)에서 見性的(견성적) 實相三昧(실상삼매)에 念修的(염수적) 一行三昧(일행삼매)에서 證道的(증도적) 普賢三昧(보현삼매)에 如此(여차)히 觀念(관념)에서 實證(실증)에로 思惟修得(사유수득)하나니 於是乎(어시호) 身證心悟(신증심오)로써 正覺(정각) 初步(초보)의 信忍(신인)을 成就(성취)하고 順忍(순인)으로써 金剛喩定(금강유정)에 住(주)하야 修者(수자)의 願力(원력)에 따라 隨分覺(수분각)으로써 無生忍(무생인)을 거쳐 寂滅忍(적멸인) 究竟覺(구경각)에 達(달)하는 것이 本覺境地(본각경지)인 涅槃岸(열반안)에 到(도)하는 捷徑(첩경)이니 勤策衆(근책중)은 如是觀(여시관)으로써 如是果(여시과)를 證(증)할진져
第三節 三身了別(삼신요별)
法身(법신)이란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인 體大(체대)요 眞(진)이며 報身(보신)이란 圓融無碍智(원융무애지)인 相大(상대)요 如(여)며 化身(화신)이란 隨緣不變識(수연불변식)인 用大(용대)요 如如(여여)니 一者(일자) 淨識(정식)이오 二者(이자) 染識(염식)으로서 染識(염식)이란 隨緣眞如(수연진여)요 淨識(정식)이란 不變眞如(불변진여)라
二名(이명)인 一眞如(일진여)가 隨緣如染(수연여염)하되 不變如淨(불변여정)하야 如染如淨(여염여정)인 如如相(여여상)의 如性(여성)이 곧 眞空(진공)인지라 非一(비일) 非二(비이) 亦非三(역비삼)이나 眞(法)如(報)(진(법)여(보))가 三界六途(化)(삼계육도(화))에서 隨緣異熟(수연이숙)할새 名(명)이 染識受用(염식수용)의 凡夫(범부)요 衆生(중생)이며 隨緣異熟(수연이숙)하되 眞性不變(진성불변)일새 名(명)이 淨識受用(정식수용)의 聖人(성인)이오 佛(불)이니
隨緣邊(수연변)의 染(염)이오 不變邊(불변변)의 淨(정)으로서 淨染如如(정염여여)의 如如相(여여상)이 化身(화신)이오 淨如染如(정여염여)의 一如性(일여성)이 報身(보신)이며 性相(성상)의 本空境地(본공경지)가 法身(법신)이라 法身邊(법신변)은 虛空(허공)과 如(여)하고 報身邊(보신변)은 滿海(만해)와 如(여)하고 化身邊(화신변)은 海中氵區(해중구)와 如(여)하나 實相(실상)은 非空非有(비공비유)요 眞佛(진불)은 亦非三身(역비삼신)이니 修者(수자)는 實義(실의)를 了解(요해)하고 言文(언문)은 放棄(방기)할지어다
第四節 五智如來(오지여래)
毘盧遮那(비로자나)를 光明遍照(광명변조) 盧舍那(노사나)를 淨滿(정만) 그리고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을 能仁寂黙覺(능인적묵각)이라 譯(역)하니 能仁(능인)의 良心(양심)을 가지고 寂靜(적정)에 處(처)하야 身口意(신구의)를 三緘(삼함)한 후 淨滿(정만)의 性海(성해)를 見證(견증)하고 究竟覺(구경각)을 成就(성취)함일 새 自身(자신)이 곧 大日(대일)이라 心(심)이 虛空(허공)과 等(등)하야 其(기) 體性(체성)이 無障無碍(무장무애)함으로 第一智名(제일지명)을 法界體性智(법계체성지)라 云(운)하고 其(기) 無碍光明(무애광명)이 如日遍照(여일변조)함으로 佛號(불호)를 大日如來(대일여래) 곧 毘盧遮那佛(비로자나불)이라 謂(위)하는 바 器界日(기계일)은 一小世界(일소세계)를 照明(조명)하되 有障有碍(유장유애)하나 心界日(심계일)은 大千沙界(대천사계)를 遍照(변조)하되 無障無碍(무장무애)함으로 大日(대일)이라 稱(칭)하며
心(심)이 虛空(허공)과 等(등)하되 但空(단공)이 않이오 風性的(풍성적) 一氣(일기)가 等量平滿(등량평만)함으로 第二智名(제이지명)을 平等性智(평등성지)라 云(운)하고 佛號(불호)를 不空如來(불공여래)라 謂(위)하며
一氣平滿(일기평만)한 等虛空(등허공)의 心界(심계)에 火性的(화성적) 智光慧焰(지광혜염)이 等量炯滿(등량형만)하야 明暗(명암)이 無(무)하되 能(능)히 起滅(기멸)을 示(시)하는 沙界(사계)의 差別相(차별상)을 通(통)하야 眞如(진여)의 隨緣不變性(수연불변성)을 觀察(관찰)할새 第三智名(제삼지명)을 妙觀察智(묘관찰지)라 云(운)하고 佛號(불호)를 彌陀如來(미타여래)라 謂(위)하며
無邊無量(무변무량)의 等虛空的(등허공적) 心界(심계)에 超日月(초일월)의 金色光明(금색광명)을 帶(대)한 水性的(수성적) 識水(식수)가 淨滿(정만)함으로 第四智名(제사지명)을 大圓鏡智(대원경지)라 云(운)하고 佛號(불호)를 阿**如來(아촉여래)라 謂(위)하며
彼(피) 淨光(정광)의 地性的(지성적) 金色(금색)에 主(주)로 四寶色(사보색)을 帶(대)하였으니 寂體(적체)엔 風性的(풍성적) 黑金色(흑금색)과 火性的(화성적) 赤金色(적금색)과 水性的(수성적) 白金色(백금색)과 地性的(지성적) 黃金色(황금색)이 純一混和(순일혼화)하야 紫磨金色(자마금색)의 一道光明(일도광명)이 常住不動(상주부동)하되 其(기) 照用(조용)엔 四寶色光明(사보색광명)이 各其性能(각기성능)의 無量功德(무량공덕)을 發揮(발휘)하야 交徹炳煥(교철병환)할새 正午當陽(정오당양)의 摩尼寶珠(마니보주)가 輝煌燦爛(휘황찬란)하야 無數寶光(무수보광)이 無邊爀曜(무변혁요)함과 如(여)함으로 第五智名(제오지명)을 成所作智(성소작지)라 云(운)하고 佛號(불호)를 寶生如來(보생여래)라 謂(위)하나니
第一智(제일지)는 法身(법신)의 總智(총지)요 其他(기타)는 別智(별지)라 第二(제이) 第三(제삼) 第四(제사)의 三智(삼지)는 報身(보신)의 能智(능지)요 第五智(제오지)는 化身(화신)의 所智(소지)인 바 別稱(별칭)하야 五智如來(오지여래)라 云(운)하고 總稱(총칭)하야 阿彌陀佛(아미타불)이라 謂(위)하니 諸佛中(제불중) 首班(수반)이오 彌陀(미타)의 妙觀察智印(묘관찰지인) △印(인)이 一切如來智印(일체여래지인)의 原形(원형)이니
阿字(아자)는 無(무)의 義(의)로서 化身(화신), 彌字(미자)는 滿(만)의 義(의)로서 報身(보신), 陀字(타자)는 法(법)의 義(의)로서 法身(법신)을 意味(의미)하야 本具三身(본구삼신)인 阿彌陀佛(아미타불)에 總該(총해)할새 法界體性(법계체성)인 一法身(일법신)에 平等性(평등성)으로 妙觀察(묘관찰)하는 大圓鏡的(대원경적) 能智報身(능지보신)과 成所作(성소작)의 所智化身(소지화신)을 兼(겸)하고 四智(사지)에 萬德(만덕)을 俱(구)하니라
第五節 妙有現象(묘유현상)
妙有(묘유)의 極致(극치)를 隣虛(인허)라 稱(칭)하는 바 이는 色(색)의 體用(체용)이 有(유)함이 아니오 오직 慧(혜)로써 겨우 分析(분석)하야 更(갱)히 不可分(불가분)의 究竟(구경)에 至(지)한 者(자)로서 眼見(안견)의 現量得(현량득)이 아니오 慧眼(혜안)의 所行(소행)일새
「正理論(정리론)」엔 假(가)의 極微(극미)라 云(운)하고 「光記(광기)」엔 極微(극미)의 微(미)라 名(명)하야 色聚(색취)의 微(미)에 對(대)한 實(실)의 極微(극미)라 云(운)하고 十色(십색 :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의 五境(오경)과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의 五根(오근))의 最極微分(최극미분)이라 謂(위)하나 隣虛(인허)란 非空非色(비공비색)일새 色邊(색변)의 便稱(편칭)인 「極微(극미)」의 名(명)을 附(부)하기 不可(불가)하고 隣虛(인허)의 七倍(칠배)인 色聚(색취)의 微(미)야말로 十色(십색)의 最極微分(최극미분)이 火聚(화취)하야 비로소 色(색)의 影子(영자)를 構成(구성)한 色(색)의 原始(원시)요 究竟(구경)일새 진실로 極微(극미)라 名(명)하기 可(가)하나 此(차) 亦是(역시) 色(색)의 體用(체용)이 有(유)함이 않이오 眼見所得(안견소득)의 現量體(현량체)가 않임므로 「正理論(정리론)」엔 亦是(역시) 隣虛(인허) 同樣(동양)인 假(가)의 極微(극미)라 云(운)하야 實色(실색)이 않임을 論(논)하였고 「光記(광기)」엔 隣虛(인허)가 實色(실색)임에 對(대)하야 이를 假(가)의 極微(극미)라 云(운)하고 「俱舍論(구사론)」엔 八事俱生(팔사구생)하야 隨一不滅(수일불멸)이라 論(논)하였는 바 色(색)이란 元來(원래) 假相(가상)으로서 色(색)의 實體(실체)가 別有(별유)함이 않이오 水(수)에 對(대)한 波(파) 그대로 水(수)일새
萬一(만일) 色(색)의 實體(실체)를 究明(구명)할진댄 그의 究竟(구경)이 空相(공상)인 圓成實(원성실)의 一相(일상)이라 色(색)이란 곧 實相(실상)의 陰的(음적) 妙有現象(묘유현상)으로서
隣虛(인허)란 妙有(묘유)의 極致(극치)인 非空非有(비공비유)의 境界(경계)라 慧眼所對(혜안소대)의 極致(극치)요 隣虛(인허)의 七倍(칠배)인 極微(극미)란 色(색)의 原始(원시)요 究竟(구경)일새니 法眼所對(법안소대)의 極致(극치)요 極微(극미)의 七倍(칠배)인 微塵(미진)이란 微(미)라고 單稱(단칭)함도 有(유)하니 이는 天眼所對(천안소대)의 極致(극치)요 微(미)의 七倍(칠배)인 金塵(금진)은 金中(금중)에서 往來(왕래)하되 無障無碍(무장무애)한 程度(정도)로서 肉眼所對(육안소대)의 極致(극치)니라
그리고 金塵(금진)의 七倍(칠배)를 水塵(수진), 水塵(수진)의 七倍(칠배)를 兎毛塵(토모진), 兎毛塵(토모진)의 七倍(칠배)를 羊毛塵(양모진), 羊毛塵(양모진)의 七倍(칠배)를 牛毛塵(우모진, 牛毛塵(우모진)의 七倍(칠배)를 隙遊塵(극유진) 또는 日光塵(일광진)이라고 稱(칭)하니 日光塵(일광진)은 壁間(벽간)이나 窓隙(창극)을 通(통)한 日光(일광)에 依(의)하야 浮遊(부유)함을 겨우 認得(인득)할 만한 程度(정도)인 塵埃(진애)의 單體(단체)를 名(명)한 者(자)로서 곧 極微(극미)의 八十二萬三千五百四十三(팔십이만삼천오백사십삼 : 七(칠)의 七乘冪數(칠승멱수))倍(배)에 當(당)할새
이를 推(추)하야 各位(각위)의 微量(미량)을 可(가)히 想像(상상)할지나 微(미)를 積(적)하야 小(소)에서 大(대)로 增(증)한다는 것이 않이라 要(요)컨대 迷人(미인)에 있어 色陰(색음)의 銷却(소각)하는 程度(정도)를 示(시)한 者(자)로서 四相(사상 : 我(아), 人(인), 衆生(중생), 壽者(수자))을 破(파)하기 爲(위)한 析空觀(석공관)을 成(성)함에 足(족)하니 修者(수자)는 이에 依(의)하야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을 了達(요달)한 후 般若波羅密多心經(반야바라밀다심경)을 徹底(철저)하고 또 그와 같이 修行(수행)하야써 究竟成就(구경성취)의 便宜(편의)를 得(득)하면 幸(행)인져
第六 析空觀(석공관)
修者(수자)는 먼저 日月星宿(일월성수) 山河大地(산하대지) 森羅萬象(삼라만상)과 人畜(인축) 乃至(내지) 蠢動含靈(준동함령)과의 一切衆生(일체중생)을 餘地(여지)없이 破壞(파괴)하야 日光塵化(일광진화)하고 漸進(점진)하야써 隣虛(인허)인 百尺竿頭(백척간두)에서도 오히려 一步(일보)를 前進(전진)하야 眞空(진공)의 境界(경계)에 至(지)할지니 加行(가행) 途中(도중)에 土雨(토우)와 같은 紅塵世界(홍진세계)가 直觀(직관)되거든 色碍(색애)의 **大(추대)한 障壁(장벽)을 突破(돌파)하고 隙遊塵化(극유진화)한 境界(경계)인 줄 斟酌(짐작)하고 黃昏天地(황혼천지)가 夢想(몽상)되거든 色陰(색음)이 牛毛塵化(우모진화)한 境界(경계)요 七色(칠색)이 現前(현전)하거든 色陰(색음)이 羊毛塵化(양모진화)한 各元素界(각원소계)인 줄 體得(체득)하고 月色(월색)과 같은 識光(식광)이 發(발)하거든 色陰(색음)이 兎毛塵化(토모진화)한 境界(경계)로서 곧 煖法(난법)의 相(상)이오 心月(심월)이 獨露(독로)하거든 色陰(색음)이 水塵化(수진화)한 色界頂天(색계정천)의 境界(경계)로서 곧 頂法(정법)의 相(상)이오 心月(심월)이 變(변)하야 紫磨金色體(자마금색체)인 等日輪(등일륜)의 金剛輪(금강륜)이 現露(현로)하거든 將登正覺(장등정각)의 前兆(전조)인 金剛座(금강좌)인 줄 是認(시인)하고 黑夜(흑야)에 白晝(백주)와 같이 智光(지광)이 發(발)하거든 天眼(천안)이 生(생)하야 阿**色(아누색)을 直見(직견)하는 境界(경계)요 光明(광명)을 帶(대)한 精細極微(정세극미)의 陽焰(양염)과 같은 境界(경계)가 現前(현전)하거든 色(색)의 究竟(구경)인줄 自認(자인)할 따름이오 前後(전후) 境界(경계)를 不可向人設(불가향인설)이며 이에서 다시 普賢(보현)의 眞境(진경)을 吟味(음미)할진져
그리고 萬象(만상)을 隙遊塵化(극유진화)한 成分(성분)에서 牛毛塵化(우모진화)한 分子(분자)로 分子(분자)에서 羊毛塵化(양모진화)한 各(각) 元素(원소)로 元素(원소)에서 다시 兎毛塵化(토모진화)한 電子(전자)로 水塵化(수진화)한 陽核(양핵)으로 이렇게 對照(대조)하야 假想(가상)인 原子核(원자핵)이란 곧 無間隔(무간격)의 金塵(금진)인 金剛輪(금강륜)이니
元素以下(원소이하) 分子(분자), 成分(성분), 物體(물체) 이와같이 萬物(만물) 곧 日月星宿(일월성수) 山河大地(산하대지) 等(등) 一切衆生(일체중생)이란 都是(도시) 歸空(귀공)함을 體得(체득)하야 元素(원소) 以下界(이하계)가 곧 虛空世界(허공세계)인 虛空輪(허공륜)이오 電子(전자) 곧 風輪(풍륜)이오 陽核(양핵)이 곧 水輪(수륜)이오 原子核(원자핵)이란 곧 金輪(금륜 : 金塵(금진)인 金剛輪(금강륜)의 略稱(약칭))인 줄 體認(체인)한 후 佛敎(불교)의 器世界觀(기세계관)에 있어 虛空輪上(허공륜상)에 風輪(풍륜)이 有(유)하고 風輪上(풍륜상)에 水輪(수륜)이 有(유)하고 水輪上(수륜상)에 金輪(금륜)이 有(유)하다는 四輪說(사륜설)을 立證(입증)하는 同時(동시)에 金輪(금륜)과 水輪(수륜)과의 界線(계선)이 佛說(불설) 水際(수제)에 當(당)하야 須彌山(수미산)의 下半(하반)이란 곧 水塵(수진) 以下(이하)요 上半(상반)이란 곧 金塵(금진)以上(이상)으로서 下半(하반)이 곧 欲界(욕계)요 上半(상반)이 곧 上二界(상이계 : 色界(색계), 無色界(무색계))일새 三界(삼계)란 곧 色陰(색음)의 銷却(소각)하는 程度(정도)에 따라 區別(구별)된 것이니 一念(일념)에 三界(삼계)를 超脫(초탈)하여 如來家(여래가)에 直到(직도)할지니라
第七節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색즉시공)이라 諸法空(제법공)의 實相(실상)을 證(증)함엔 一相三昧(일상삼매)로써 하고 空卽是色(공즉시색)이라 無碍心(무애심)의 無常行(무상행)을 證(증)함엔 一行三昧(일행삼매)로써 할지니 諸法(제법)을 **(청)에 譬(비)하고 實相(실상)을 鐵(철)에 喩(유)함은 一相三昧(일상삼매)를 修(수)하는 一例(일예)요 無碍心(무애심)을 摩尼寶珠(마니보주)에 譬(비)하고 無常行(무상행)을 無量寶光(무량보광)에 喩(유)함은 一行三昧(일행삼매)를 修(수)하는 一例(일예)일새 實相三昧(실상삼매)와 普賢三昧(보현삼매)란 各(각) 其(기) 果位(과위)인져
**(청)과 如(여)한 無明(무명)이오 鐵(철)과 如(여)한 實性(실성)일새 「證道歌(증도가)」의 所謂(소위) 無明(무명)의 實性(실성)이 卽(즉) 佛性(불성)이오 幻華(환화)인 寶光(보광)이오 空身(공신)인 寶珠(보주)일새 幻華(환화)의 空身(공신)이 卽(즉) 法身(법신)이라 實相三昧(실상삼매)란 見性(견성)의 境地(경지)요 普賢三昧(보현삼매)란 證道(증도)의 境地(경지)로서 依法修之(의법수지)에 行者必證(행자필증)이나 修者(수자)가 加行中(가행중) 如何(여하)한 善境(선경)에라도 着(착)하면 惡化(악화)하고 如何(여하)한 惡境(악경)에라도 不着(불착)하면 無妨(무방)하니 「凡所有相(범소유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니 若見諸相(약견제상)이 非相(비상)이면 卽見如來(즉견여래)니라」하신 四句偈(사구게)를 銘佩(명패)할지니라
그리고 頓超(돈초)엔 次第(차제)가 無(무)하나 間超(간초) 또는 漸修(점수)엔 次第(차제)가 不無(불무)하니 別途(별도)의 解脫十六地(해탈십육지)를 參考(참고)할진져
第八節 阿 菩提의 實相解(아누보리의 실상해)
阿**多羅三**三菩提(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唯佛一人(유불일인 : 오직 부처님만이 지니신)의 知慧(지혜)를 名(명)한 無上大道(무상대도)임을 示(시)하야써 無上正遍道(무상정변도) 또는 無上正遍智(무상정변지)라 舊譯(구역)하고 無上正等正覺(무상정등정각)이라 新譯(신역)하야 그 智德(지덕)만을 意譯(의역)하였을 뿐이오 그 智相(지상)의 解釋(해석)이 無(무)함은 遺憾(유감)이니라
그러나 阿**(아누)는 阿拏(아나) 또는 阿**(아노)라고도 云(운)하야 色界(색계)의 色法(색법)인 金塵以上(금진이상)의 極微(극미)라고도 譯(역)할새 「大日經疏(대일경소)」一(일)에 「言小分者(언소분자)를 梵云阿**(범운아누)이니 卽時(즉시) 七微合成(칠미합성)이라」云(운)하야 眞空(진공), 隣虛(인허), 極微(극미), 微(미)를 含蓄(함축)한 七微合成(칠미합성)의 金塵(금진)을 指稱(지칭)함이니
곧 阿**(아누)란 眞空(진공)의 體(체)에 妙有(묘유)의 四性(사성)과 四相(사상)을 具備(구비)한 金剛輪(금강륜)의 單體(단체)인 金塵(금진) 이상의 合稱(합칭)을 意味(의미)한 阿**色(아누색)이람이오
多羅(다라)는 咀**(저라)라고도 云(운)하야 眼(안)이라 眼瞳(안동)이라고도 譯(역)할새 「蘇婆呼經(소바호경)」下(하)에 多羅(다라)는 이에 妙目精(묘목정)이랐고 「不空**索心呪王經(불공견색심주왕경)」에 多羅(다라)는 周云(주운) 瞳子(동자)랐으며 「大日經疏(대일경소)」五(오)에 多羅(다라)는 是(시) 眼義(안의)랐으니 阿**多羅(아누다라)란 곧 凡夫(범부)의 眼見所得(안견소득)인 水塵(수진) 以下(이하)의 顯界(현계)가 本空(본공)한 地性(지성)의 最低層(최저층)인 金剛輪(금강륜) 곧 金塵(금진)을 證見(증견)하는 修行人(수행인)의 肉眼(육안)을 成就(성취)함에 따라 本格的(본격적) 微(미)의 阿**色(아누색)을 能見(능견)하는 天眼(천안)이 生(생)하야 極微(극미)의 色究竟天(색구경천)에 坐(좌)할새 賴耶(뢰야)의 諸法(제법)을 妙觀察(묘관찰)하는 法眼(법안)이 生(생)하면서 大界(대계)의 隣虛(인허) 境界(경계)를 通觀(통관)하는 慧眼(혜안)이 生(생)하고 一步(일보)를 前進(전진)하야 眞空圓明(진공원명)의 佛眼(불안)을 得(득)하니 妙有(묘유)의 一切法(일체법)에 圓通(원통)하는 空眼(공안)의 妙目精(묘목정)이 是(시)며
三**三菩提(삼먁삼보리) 三**三佛陀(삼먁삼불타)라고도 云(운)하야 正遍知一切法(정변지일체법)이라 譯(역)하니 곧 「智度論(지도론)」所說(소설)의 佛智(불지)인 一切種智(일체종지)가 是(시)니라
然卽(연즉) 이에 阿**多羅三**三菩提(아누다라삼먁삼보리)의 實相(실상)을 解譯(해역)하야써 이를 略(약)하면 五眼(오안)을 具備(구비)한 阿**多羅(아누다라)의 一切種智(일체종지)라 또는 空眼(공안)인 妙目精(묘목정)의 正見(정견)인 正定(정정)의 正智(정지)람이 緊(긴)하니 智相(지상)의 解譯(해역)이 經論(경론)에 闕(궐)한 바 아니니라
第九節 五輪成身觀(오륜성신관)
************ 이와같은 五輪成身圖(오륜성신도)를 一輪(일륜)으로 合作(합작)하야 ****으로 圖示(도시)할새 其(끼) 輪廓(윤곽)이 金剛鈴(금강령)과 同一(동일)하니라
五輪觀(오륜관)이란 地, 水, 火, 風, 空(지, 수, 화, 풍, 공)의 五大(오대)로써 自在(자재)를 得(득)하는 禪定(선정)의 名(명)으로서 곧 五智如來(오지여래)를 成就(성취)하는 法(법)인 바 前圖(전도)를 別觀(별과)의 對象(대상)으로 하고 後圖(후도)를 總觀(총관)의 對象(대상)으로 한오니
「大日經疏(대일경소)」十四(십사)에 「地輪正方(지륜정방) 水輪圓(수륜원) 火輪三角(화륜삼각) 風輪半月形(풍륜반월형) 最上虛空作一點(최상허공작일점)이라」云(운)하였음에 依(의)하야 後圖(후도) 中央(중앙)의 圓心一點(원심일점)으로써 ****의 團形(단형)을 代(대)할새
一乘觀(일승관)의 一輪(일륜)에서 五輪(오륜)을 別觀(별관)할 수 있고 또 五輪(오륜)이 卽(즉) 一輪(일륜)이라는 一乘(일승)의 理(리)를 總觀(총관)할 수 있는 同時(동시)에 五智如來(오지여래)를 五方(오방) 五佛(오불)로 配(배)할 배 않니라 곧 無方(무방) 一佛(일불)임을 體驗(체험)할 수 있으니 修者(수자)는 마땅히 이를 理會(리회)하야 自身(자신)이 五智(오지)로써 正覺(정각)을 成就(성취)할진져
그리고 別途(별도)의 「首楞嚴三昧圖訣(수릉엄삼매도결)」을 涉獵(섭렵)하야써 別葉(별엽)의 首楞嚴三昧圖(수릉엄삼매도)를 會得(회득)하고 이를 恒觀(항관) 常念(상념)하야 究竟成就(구경성취)의 便宜(편의)를 得(득)할지니라
癸未(계미) 冬(동)
碧山閒人(벽산한인) 撰(찬)
第十節 金剛三昧頌(금상삼매송)
<到彼岸(도피안)의 百十城數(백십성수)로 結句(결구)함>
一切(일체)의 諸菩薩(제보살)들이 將次正覺(장차정각)에 登(등)할새
위로地際(지제)를 窮(궁)하고 아래로金輪(금륜)에 據(거)한
周圍(주위)가 百餘步(백여보)라신 金剛(금강)을座(좌)한다시니
登正覺者(등정각자)의坐處(좌처)라 亦云道場(역운도량)이라시고
初修(초수)의小乘菩提(소승보리)나 中修(중수)의中乘菩提(중승보리)나
後修(후수)의大乘菩提(대승보리)나 三乘聖者末後心(삼승성자말후심)이
金剛三昧(금강삼매)라셨으니座(좌)란 立脚(입각)의見處(견처)요
三昧(삼매)란곧正思惟(정사유)라 見金剛(견금강)에立脚(입각)하야
道理(도리)를思惟(사유)하라신 佛世尊(불세존)의敎勅(교칙)일다
心生滅(심생멸)이滅已(멸이)하면 寂滅爲樂(적멸위락)이라심을
心(심)에銘佩(명패)하얐다가 寂靜心適處(정적심적처)를골라
心(심)을一境(일경)에住(주)하면 生滅心(생멸심)이滅(멸)해 버린
寂滅(적멸)의虛空<허공:空(공)>中(중)에서 妄(망)인 黑霧<흑무:風(풍)>만일다가
一分(일분)의開明(개명)을得(득)한 所謂明得定(소위명득정)이라는
煖法相<난법상:火(화)>를얻은뒤에 明增定相(명증정상)의頂位(정위)인
秋天(추천)의明月(명월)간고도 輕霧中(경무중)에隱(은)한 듯한
心月<심월:水(수)>이現於前(현어전)하니 愛月三昧對象(애월삼매대상)이오
五相成身法(오상성신법)에있어 一通達菩提心位(일통달보리심위)라
廣狹自在印順定(광협자재인순정)인 二修菩提心位(이수보리심위)에서
三成金剛心位(삼성금강심위)라는 無間定(무간정)에들어갈새
入無間(입무간)의刹那(찰나)에서 最貴(최귀)의紫磨金色(자마금색)인
日輪(일륜)과猶如(유여)하고도 寂寂寥寥(적적요요)한寂光(적광)의
金剛輪<금강륜:地(지)>을見證(견증)할새 動痒輕重冷煖澁滑(동양경중냉난삽활)
八觸(팔촉)들이生(생)하면서 空明定智喜樂解脫(공명정지희락해탈)
善心柔軟境界相應(선심유연경계상응) 十功德(십공덕)들이生(생)하니
密(밀)의金剛寶藏(금강보장)이라 第四成金剛身位(제사성금강신위)요
共乘(공승)의第四見地(제사견지)니 中乘(중승)의證寂滅地(증적멸지)며
菩薩乘(보살승)의金剛座(금강좌)요 聲聞乘(성문승)의預流果(예류과)라
仰山與道吾和尙(앙상여도오화상)의 當代稀有(당대희유)라喝破(갈파)한
果上涅槃(과상열반)이是(시)이며 智者曰初見性(지자왈초견성)일새
初修(초수)의金剛三昧(금강삼매)란 自己個性(자기개성)의菩提(보리)요
中修金剛輪三昧(중수금강륜삼매)란 一切衆生(일체중생)의輪照(윤조)요
後修如金剛三昧(후수여금강삼매)란 金剛(금강)의堅固(견고)함같은
大乘菩薩(대승보살)의菩提(보리)요 第五佛身圓滿位(제오불신원만위)라
前三位(전삼위)와後二位(후이위)를 揀別(간별)하야分齊(분제)하나
俗諦眞諦(속체진체)가一如(일여)며 內心空(내심공)과外界空(외계공)이
圓通(원통)한眞空中(진공중)에서 能造四大(능조사대)의慧性(혜성)과
所造四大(소조사대)의智相(지상)이 一圓球(일원구)가되야갖고
八角(팔각)의金剛盤(금강반)에서 彼此(피차)없이궁굴어야
眞所謂金剛三昧(진소위금강삼매)라 心(심)과物(물)이一如(일여)하다
空中(공중)에서起風(기풍)하고 風上(풍상)에서起火(기화)하고
火上(화상)에서起水(기수)하고 水上(수상)에서起地(기지)하니
內空(내공)에서의能造(능조)요 金<금:剛(강)>輪(륜)<原子核(원자핵)>所造(소조)의 水輪<수륜:陽核(양핵)>은
三陰五陽七動(삼음오양칠동)이라 그의七倍(칠배)인風輪<풍륜:電子(전자)>이
內含陰陽火性(내함음양화성)하야 動用(동용)이自在(자재)함일새
虛空輪<허공륜:元素以下(원소이하)에能轉(능전)하니 이器世間(기세간)이대로가
外空(외공)인虛空世界(허공세계)라 五輪成身禪慧圖(오륜성신선혜도)의
**이하 다섯줄은 그림처리**
金剛鈴(금강령)의骨(골)이되고 字輪(자륜)또한兼(겸)한지라
一乘觀(일승관)의對象(대상)일새 五輪別觀(오륜별관)뿐않이라
五智總觀原圖(오지총관원도)이니 智者(지자)는自證(자증)할진져
丁亥(정해) 元旦(원단) 碧山閒人(벽산한인) 作(작)
第十一節 三輪但空頌(삼륜단공송)
<煩惱(번뇌) 卽(즉) 菩提(보리)라 百八(백팔)로 結句(결구)함>
過去世(과거세)의羅漢(나한)들이 現代科學家(현대과학가)로태나
비록俗世(속세)에處(처)하나 晝(주)나夜(야)를不撤(불철)하고
析空(석공)하는버릇이란 宿世(숙세)부터行業(행업)이라
모든物質破壞(물질파괴)하야 析空(석공)함에從事(종사)할새
萬象(만상)은곧物體(물체)이라 物體(물체)를成分化(성분화)하고
成分(성분)을分子化(분자화)하야 物質組織(물질조직)을알고자
또元素(원소)로分析(분석)하니 科學體系(과학체계)가선지라
物理(물리)의原則(원칙)에따라 그法則(법칙)을立論(입론)하며
다시變則(변칙)을說明(설명)코 物理的原則(물리적원칙)인因(인)과
化學的變則(화학적변칙)인緣(연)에 依存(의존)한辨證(변증)으로써
物質不滅(물질불멸)을唱(창)하야 科學萬能(과학만능)이冠(관)하자
몸에이른벌레에게 먹힌다는獅子(사자)같이
科學大家(과학대가)의中(중)에서 科學自體論難(과학자체논란)하야
否認論(부인론)을提唱(제창)하고 斯界疑網解決(사계의망해결)할이
未久出現斷言(미구출현단언)하며 析空家好奇心(석공가호기심)인지
元素(원소)다시破壞(파괴)할새 形迹(형적)조차 찾지 못할
頑空(완공)의世界(세계)였구나 根本元素(근본원소)가空(공)이라
物質世間(물질세간)이대로가 虛空世界(허공세계)그대로다
다시이에意外(의외)에도 電子陽核發見(전자양핵발견)되니
虛空輪上風輪世界(허공륜상풍륜세계) 水輪世界(수륜세계)이 아닌가
原子核(원자핵)을發見(발견)코자 原子(원자)끼리相搏(상박)하니
威力(위력)만보일뿐으로 兩元(양원)이俱亡(구망)인지라
어허風輪(풍륜)도空(공)이요 水輪(수륜)도空(공)일세그려
電子(전자)의集合體(집합체)로서 內宙中央(내주중앙)의太陽(태양)과
外宇水星群星霧(외우수성군성무)와 互引勢力(호인세력)의中間(중간)인
地卵(지란)을引廻走(인회주)하는 風輪動力(풍륜동력)의月弁(월변)곧
地藏菩薩處胎事實(지장보살처태사실) 化身母胎(화신모태)인月(월)이나
陽核(양핵)의集合體(집합체)로서 化身母腹(화신모복)인日球(일구)나
家族(가족)같은水星群(수성군)과 火星群其他星宿(화성군기타성수)들
어느家産什物(가산집물)이나 娑婆世界(사바세계)의衆生(중생)은
無非兩元(무비양원)의果(과)일새 自然淘汰(자연도태)의壞劫(괴겁)엔
威力(위력)만남길뿐임을 現代人(현대인)이豫想(예상)한다
百八煩惱(백팔번뇌)에迎合(영합)한 元素數(원소수)가皆空(개공)일새
因緣法(인연법)도實空(실공)이라 이제는回小向大(회소향대)할
時節因緣(시절인연)은왔건만 原子核(원자핵)만發見(발견)되면
以土成金夢想(잍성금몽상)하나 金輪(금륜)이란離欲漢(이욕한)의
百八(백팔)의隨煩惱(수번뇌)들을 完全(완전)히斷盡(단진)할진져
火星(화성)에對(대)하여서는 往事(왕사)라毋論(무론)커니와
其他星宿(기타성수)의旅行(여행)도 이되풀이나않일가
또無色(무색)의透明體(투명체)인 太陽日球(태양일구)에對(대)하야
外色發見(외색발견코자하는 쓸데없는「스펙트럼(spectrum)」도
莫取(막취)의大禁物(대금물)이니 七色(칠색)은地輪界內(지륜계내)의
浮動(부동)된雜色(잡색)들이오 日球(일구)가非光源(비광원)이며
또는熱源(열원)도아니라 地卵(지란)이冷熱合成(냉열합성)의
兩元(양원)으로되었을새 太陽水體(태양수체)를對(대)하면
電熱光(전열곽)이自發(자발)하고 月弁火體(열변화체)를對(대)하면
陽冷光(양냉광)이自發(자발)하여 地(지)의半徑(반경)을延長(연장)한
地輪(지륜)이란界線(계선)에서 屈折全反射(굴절전반사)하거니
七曜(칠요)어느星宿(성수)든지 自己發光(자기발광)의光量(광량)은
地輪(지륜)같이脫線不許(탈선불허) 脫(탈)하면虛空似漆(허공사칠)임.
世世生生(새새생생)의小乘(소승)인 三輪(삼륜)의但空(단공)을떠나
金剛輪(금강륜)의不但空(부단공)인 大乘門(대승문)에들지어다.
丁亥(정해) 人日(인일) 碧山閒人(벽산한인) 作(작)
第十二節 觀音字輪頌(관음자륜송)
<百四十(백사십)의 不共法數(불공법수)로 結句(결구)함>
娑婆世界(사바세계)는 陰性佛事(음성불사)라 衆生(중생)의 音聲(음성)을 觀察(관찰)하되 먼저貪嗔痴(탐진치)를 鑑別(감별)하고 引其性(인기성)하야 導之(도지)할지니 六無爲(육무위)의 八十一思惑(팔십일사혹)을 正音(정음)의 增補字數八十七(증보자수팔십칠) 觀音字輪(관음자륜)이 對治(대치)함일새 萬法(만법)이 根境而已(근경이이)인지라 心所有法(심소유법)이 四十六(사십육)이니 根音法數(근음법수)도 四十六(사십육)이라 眼耳鼻舌身意六識音(안이비설신의육식음)인 **그림처리**
迷悟間(미오간)의 見聞(견문)이 一也(일야)라 眼耳(안이) 主音(안이주음)이 各一(각일)씩이오
貪嗔痴(탐진치)의 鼻舌(비설)이 同(동)할새 鼻舌主音(비설주음)이 各三(각삼)씩이며 極微(극미)도 二十事俱成(이십사구성)일새 身主音(주음)이 二十(이십)을 成(성)하고 意主音(의주음)의 依數(의수)가 六(육)이라 互用音(호용음)의 正數(정수)도 六(육)이오 悟人分境(오인분경)이 四十一(사십일)일새 正(정)인 境音(경음)도 四十一(사십일)이라
一曰十一(일왈십일)의 色境音(색경음)이니 **그림처리**
**그림처리** 五根(오근)이 對五塵(대오진)의 貪音(탐음)은
**그림처리** **그림처리**
**그림처리** 色音(색음)의 半又間音(반우간음)이 痴(치)니
**그림처리** 八識數(팔식수)의八痴音(팔치음)이是(시)며
그리고五貪終音外(오탐종음외)에도 다시七極返數重終音(칠극반수중종음)인
**그림처리** 歸一(귀일)의一竝終音(일병종음)인그림처리라
**그림처리** 衆生啓蒙(중생계몽)인大方便(대방편)일새
一音響(일음향)에三身(삼신)을兼(겸)하니 音始直前(음시직전)과音終直後(음종직후)엔
虛空(허공)과等(등)한法身境(법신경)이오 千萬律動(천만율동)은化身境(화신경)이며
始終(시종)을通(통)함은報身境(보신경)임 먼저法身境(법신경)에安住(안주)하야
報化(보화)의境(경)을揀別(간별)할지라 延命十句觀音經(연명십구관음경)에云曰(운왈)
觀世音(관세음)하고南無佛(나무불)하라 本來(본래)부터佛(불)과因(인)이 있고
佛(불)과緣(연)이 있는衆生(중생)일새 佛法僧(불법승)에緣(연)있는 것이 곧
常樂我(상락아)의 淨緣四德(정연사덕)이니 朝(조)로 觀世音(관세음)함을 念(염)하고 暮(모)로 觀世音(관세음)함을 念(염)하면 念(염)과 念(염)이 心(심)에서 起(기)하야 念(염)과 念(염)이 不離心(불리심)하리라 觀自在世音(관자재세음)의 菩薩(보살)이란 自在世音(자재세음)을 能觀察(능관찰)하고 無能所(무능소)하야 歸依佛(귀의불)이니 有能所(유능소)면 卽是衆生(즉시중생)일새 自作凡夫(자작범부)라
生佛一如(생불일여)니 바로三寶(삼보)에 歸依(귀의)할지라 出家(출가)에 四種別(사종별)이 有(유)하니 心身(심신)의 俱出家(구출가)가 一(일)이오 心出家身不出家(심출가신불출가)가 二(이)며 身出家心不出家(신출가심불출가)가 三(삼)에 心身(심신)의 俱不出家(구불출가)가 四(사)라 百十句(백십구)의 金剛三昧頌(금강삼매송)은 먼저 見惑(견혹)을 斷盡(단진)한 後(후)에 思惑(사혹)을 斷盡(단진)할 準備(준비)일새 漸修(점수)의 位數(위수)가 五十五(오십오)라
各位(각위)의 入出(입출)이 各有(각유)하니 到彼岸(도피안)에 百十(백십)의 城數(성수)라
信解行證(신해행증) 四滿成佛(사만성불)이오
百八句(백팔구)의 三輪但空頌(삼륜단공송)은
먼저 但空界(단공계)를 離(리)하라는 科學萬能時代警策(과학만능시대경책)이라
依此入道(의차입도)하면 多幸(다행)이오 本文(본문)의觀音字輪頌(관음자륜송)이란
見惑(견혹)을斷(단)한後得智(후득지)로써 思惑(사혹)을斷(단)하는方便(방편)이라
唯佛一人(유불일인)이獨行(독행)하시고 衆生(중생)과不共行(불공행)하시는法(법)
百四十法(백사십법)에立脚(입각)하야써 衆生濟度(중생제도)의方便(방편)인同時(동시)
修道(수도)에또한必要(필요)하나니 衆生身中(중생신중)에流注(유주)하면서
衆生身(중생신)에染汚(염오)하지 않은 佛性(불성)곧眞實我(진실아)인自我(자아)가
世間自在音(세간자재음)을觀察(관찰)하고 還其本(환기본)하는 것이佛(불)이라
如此修行(여차수행)하야써見惑(견혹)을 頓斷(돈단)하고染(염)했든思惑(사혹)을
漸斷(점단)하는 것이修道(수도)일새 眼耳鼻舌身意六無爲行(안이비설신의육무위행)
前五三十(전오삼십)에無着無相(무착무상)인 淸淨無垢(청정무구)의三十二相(삼십이상)과
十(십)은滿數(만수)라染識(염식)의淨化(정화) 圓滿(원만)인八十種好(팔십종호)인지라
身緣心智(신연심지)의四(사)가淨(정)하야 法力(법력)이滿足(만족)한十力(십력)일새
說盡苦道說障道漏盡(설진고도설장도루진)의 一切智(일체지)인四無畏(사무외)이시니
三業不失防護三不護(삼업불실방호삼불호)와 一切(일체)의煩惱習(번뇌습)을斷(단)하심
無謀(무모)로써常不忘失(상불망실)일새 不放逸(불방일)과不喜(불희)의捨心(사심)인
三念處(삼념처)로써甲冑(갑주)를삼아 一切衆生(일체중생)을救濟(구제)하고자
不屈(불굴)의大悲願力(대비원력)을갖고 一切種智(일체종지)로突進(돌진)하시니
百四十數(백사십수)의不共法(불공법)이라 그리고西字(서자)를象徵(상징)하니
字形(자형)들과그의意義(의의)들을 綜合(종합)한統一(통일)을觀(관)이있어
方可謂之世界的文字(방가위세계적문자)라 表音表意(표음표의)의兼用(겸용)이되야
萬邦(만방)의語音(어음)은勿論(물론)이오 昆蟲及自然界(곤충급자연계)의소리도
모두다記錄(기록)할 수 있으며 各語族(각어족)과個別的語調(개별적어조)와
禽獸(금수)의소리라도들으면 그性質(성질)을鑑別(감별)하게되니
貪心多鳥類(탐심다조류)의貪音多(탐음다)와 猛獸(맹수)의本嗔音(본진음)**音多며
蟲類(충류)의痴音多(치음다)들을보고 所謂弱小少民(소위약소민)들色音多(색음다)와
財物吝嗇家(재물인색가)들貪音多(탐음다)와 好鬪 視家(호투예시가)들嗔音多(진음다)와
投機善政家(투기선정가)들痴音多(치음다)를 觀察(관찰)하야써參酌(참작)할지라
現下萬國(현하만국)의交互通話(교호통화)도 그리고世宗(세종)이送人(송인)하여
明國蒙韻學者黃瓚(명국몽음학자황찬)에게 問音(문음)하심보면알 것일다
根境和合(근경화합)의觀音字數(관음자수)가 五萬四千九十六(오만사천구십육)이되니
貪心多人(탐심다인)은不淨觀(부정관)이요 嗔心多人(진심다인)은 慈悲觀(자비관)이며 痴心多人(치심다인)은因緣觀(인연관)일새 認其性(인기성)하고自度(자도)할진져
丁亥(정해) 上元(상원) 碧山閒人(벽산한인) 作(작)
第一節 觀音文字(관음문자) 公布(공포)
第三章 觀音文字(관음문자)
趣旨文(취지문)
<漢字(한자) 廢止說(폐지설)에 對(대)한 管見(관견)>
漢文字(한문자)가 輸入(수입)된 以來(이래) 東方(동방) 文化史上(문화사상)에 劃期的(획기적) 事實(사실)을 주어 곧 朝鮮文字化(조선문자화)한지라 이를 廢止(폐지)함은 곧 朝鮮文化(조선문화)의 半減(반감)일새 반다시 準備(준비)가 있고 包容(포용)이 있어 보다 더 進展(진전)될 對策(대책)을 講究(강구)할지라 筆者(필자)가 敢(감)히 이에 留意(유의)하고 三十年間(삼십년간)의 硏鑽(연찬)을 거듭하야 可謂(가위) 東西文字(동서문자)를 統一(통일)한 字形(자형)과 意義(의의)를 雙具(쌍구)하고 四聲(사성)을 兼備(겸비)한 訓民正音(훈민정음) 本能(본능)을 發揮(발휘)하야써 「增補正音(증보정음) 觀音文字(관음문자)」라 新題(신제)하고 更新(갱신)의 譯經(역경) 一例(일예)와 著書(저서) 一例(일예)를 擧示(거시)한 別途(별도)의 그 結晶(결정)안 「一人傳(일인전)에 一人度(일인도)」람을 公布(공포)하오니 有志(유지) 諸彦(제언)은 깊이 吟味(음미)하신 後(후) 더구나 國民(국민)의 精神涵養(정신함양)에 相應(상응)됨을 企待(기대)하옵고 이만 그침
佛紀(불기) 二六五七年(이육오칠년) 丁亥(정해) 二月八日(이월팔일)
長城(장성) 白羊山(백양산) 雲門道場(운문도량) 法主(법주) 釋 金 陀(석 금 타)
序(서)
國語標準(국어표준)이 無(무)한 그대로 數千年(수천년)동안 各(각) 地方語(지방어)가 混和(혼화)하야 半自然的(반자연적) 國語化(국어화)를 未免(미면)이라 內的(내적)으로 地方(지방)의 「사투리」가 仍然附隨(잉연부수)할새 同一(동일) 語族(어족) 中(중)에서 各(각) 地方的(지방적) 分派(분파)가 生(생)한 細音(세음)이 되야 獨立的(독립적) 國語(국어) 統一(통일)이 末由(말유)한 千餘年間(천여년간) 漢文(한문)에 中毒(중독)하야 中國式(중국식)의 英雄風(영웅풍)에 伴(반)한 「졈쟌」만 늘뿐 않이라 間音(간음)많은 原音(원음)은 쫏코자 하나 正音的(정음적) 天性(천성)을 未逆(미역)하야 本(본) 國文(국문)이 實際(실제)에 있어 大衆層(대중층)의 發音(발음) 可能(가능)인 「극는듣를」讀法(독법)이 內在(내재)함에 隨從(수종)할 뿐으로서 젼쟌할수록 上字(상자) 音讀(음독)엔 能(능)하나 學者(학자)라야 可能(가능)할 「긱닌딛릴」讀法(독법)이 不能(불능)하야 下字(하자) 音讀(음독)엔 未達(미달)한 不規則(불규칙)의 言語(언어) 그대로 行世(행세)하다가 日政(일정)의 暴虐(포학)을 입어 小學(소학)부터 「********」橫列(횡렬) 字音(자음)이 廢止(폐지)되야 直接的(직접적) 間接的(간접적) 退縮(퇴축) 自沒(자몰)로 語音(어음)이 半失(반실)되였을새 可及的(가급적)의 이를 充當(충당)코자 一(일)은 間接(간접)의 漢字(한자)에서 還本(환본)하고 二(이)는 「긱닌딛릴」讀法(독법)의 學者(학자)에 訴(소)하야 「ㅣㅡ」의 合中音(합중음)인 「十」의 中心點(중심점) 「, 」를 査索(사색)하고 斯文亂賊(사문란적) 所述(소술)의 成俗(성속)인 國文讀法(국문독법)을 廢止(폐지)하야 「, 」音(음)을 찾는 同時(동시)에 自沒(자몰)을 防止(방지)하며 廢止(폐지) 已久(이구)의 ****等(등)은 不得已(부득이) 「개내대래」等(등)으로 代(대)하야써 有功人(유공인) 所著(소저) 「字典釋要(자전석요)」에 憑據(빙거)하되 加一點(가일점) 或(혹) 加二點(가이점) 等(등)의 符號(부호)란 文字(문자)의 資格(자격)을 不許(불허)하는 侮辱(모욕)일새 意主音(의주음)과 身主音(신주음)으로써 上(상) 去(거) 二聲外(이성외) 曳聲(예성)을 調節(조절)하야 半像形的字形(반상형적자형)과 初(초) 中(중) 終(종)의 音義(음의)를 觀察(관찰)하는 學者的(학자적) 考究(고구)에 訴(소)한 「觀音文字(관음문자)」인 小冊子(소책자)가 곧 國語讀本(국어독본)이오니 有志諸彦(유지제언)은 諒下(양하)하소서
丁亥(정해) 仲春(중춘) 上浣(상완)
碧山閒人(벽산한인) 釋金陀(석금타) 謹誌(근지)
第二節 父和音偈(부화음게) 母愛音偈(모애음게)
一, 父和音偈(부화음게)
**처리요망**
二, 母愛音偈(모애음게)
**처리요망**
第三節 觀音字輪(관음자륜)
一, 十七字母<십칠자모:理趣會十七尊位數(리취회십칠존위수)>
a, 六識 父音(육식 부음)
b, 十一色 母音(십일색 모음)
二, 字輪化(자륜화)의 基數字(기수자)
三, 87字輪<자륜:增補正音(증보정음) 觀音字輪(관음자륜) 87>
a, 46근음(根音)
b, 41경음(境音)
第四節 其數妙偈(기수묘게)
一是不空萬法起焉(일시불공만법기언) 滿十俱空非空而空(만십구공비공이공)
二假相應非本非迹(이가상응비본비적) 三法輾轉因果同時(삼법전전인과동시)
本具四大居常五位(본구사대거상오위) 四大互因二八成實(사대호인이팔성실)
七依一實六輪常轉(칠의일실육륜상전) 二四三三互爲因果(이사삼삼호위인과)
五位三法含藏一實(오위삼법함장일실) 九果八因包和常住(구과팔인포화상주)
胎藏十六隨緣比周(태장십육수연비주) 一地三水五火七風(일지삼수오화칠풍)
三五爲本一七示迹(삼오위본일칠시적) 七三滿數五一過半(칠삼만수오일과반)
滿者欲平過半生歪(만자욕평과반생외) 離垢一地十五金剛(이구일지십오금강)
左轉水地引同斥異(좌전수지인동척이) 右轉風火引異斥同(우전풍화인이척동)
地下風動水貪火嗔(지하풍동수탐화진) 緣起若存緣滅若亡(연기약존연멸약망)
隱性顯相二名一實(은성현상이명일실) 欲隱無內欲顯無外(욕은무내욕현무외)
第五節 文書來往(문서래왕)
一, 朝鮮語學會(조선어학회)에서 온 書信(서신)
운문도장 귀중 (답장)
보이어 주신 관음문자는 반가이 받았습니다 요사이 봄철 일기 따뜻하온대 귀사 제위가 모두 안녕하십니까? 본회도 고렴하옵신 덕택으로 아무일 없이 지냅니다
보내주신 관음문자는 거룩하신 연구의 결정이라 반가이 보관하고 참고하겠사오나 귀사에서 보내주신 의도를 자세히 알지 못하겠사오니 혹시 본회에 단순히 일부 기증하시는 것인지 또한 본 후에 도로 반송하여 달라는 뜻인지 아무 명시하신 편지가 없사와 궁금하옵기에 몇자 올리오니 미안하오나 답장하여 주시기를 앙망하나이다
四二八○ 四月十日(사월십일) 서울시 청진동 일팔팔번지
조 선 어 학 회
二, 朝鮮語學會(조선어학회)로 보내는 답장
朝鮮語學會(조선어학회) 館下(관하)
四(사)월 十(십)일附(부)의 答狀(답장)을 오늘에야 奉讀(봉독)하옵는 直時(직시)에 다시 또 이 글월을 올리나이다
물으신 意圖(의도)란 斯文(사문)의 硏究(연구) 깊으신 貴會員(귀회원) 僉位(첨위)가 先驅(선구)되실 것을 前提(전제)하고 大衆(대중)의 要求(요구)에 應(응)하야 設或(설혹) 漢字(한자)를 廢止(폐지)한다드라도 오히려 分派的(분파적)인 全(전) 語族(어족)의 統一(통일)을 先圖(선도)할 뿐 않이라 더욱 더 進展(진전)될 與否(여부)를 考察(고찰)들하시라는 同時(동시)에 物質(물질)의 極端(극단)인 原子爆彈(원자폭탄)이 告終宣布(고종선포)한 物質文明(물질문명)의 廢墟(폐허) 위에 朝鮮(조선)이 앞으로 精神文明(정신문명) 곧 心文明(심문명)을 指導(지도) 建設(건설)할 만한 自負(자부)로써 見性悟道(견성오도)를 勸獎(권장)하는 意味(의미)의 「一人傳(일인전)에 一人度(일인도)」람을 公布(공포)하옵고 指導的責任(지도적책임) 갖인 朝鮮大衆(조선대중)이 먼저 初見性(초견성)에 있어 信心牢固(신심뢰고)를 基準(기준) 삼아 百日(백일) 內外(내외)에 相應(상응)되는 境界(경계)이오니 國語統一(국어통일)에 當任(당임)하신 貴會員(귀회원)붙어 앞서 先導(선도)하심을 企待(기대)할 뿐입니다.
丁亥(정해) 양6월 1일 長城(장성) 白羊山(백양산) 雲門道場(운문도량)
第 四 章 釋尊 一代의 梗槪(석존 일대의 경개)
第一節 룸비니 園(원)에서 誕生(탄생)하심
印度國(인도국) 가비라성城(성)에 룸비니 園(원)이라는 別宮(별궁)이 있었는데 園(원)에는 蓮**(연당)이 있어 白蓮(백련)과 靑蓮(청련)이 交香(교향)하여 널리 芳香(방향)하니 花間(화간)에는 淨美(정미)한 白禽(백금)이 來舞(내무)하여 淸興(청흥)을 發(발)하고 香岡(향강)에는 無憂樹花(무우수화)가 滿開(만개)하야 豊富(풍부)한 花房(화방)을 垂(수)할새 樹間(수간)을 飛翔(비상)하는 奇禽(기금)의 異聲(이성)이 浪藉(낭자)한 中(중)에 淸趣幽雅(청취유아)한 內苑(내원)에서 侍女衆(시녀중)의 看護(간호)를 받으며 一步(일보) 二步(이보)를 愼重(신중)히 옮기시는 貴婦人(귀부인)이 나투시니 곧 가비라 城(성)의 淨飯王后(정반왕후)이신 마야夫人(부인)으로서 王子(왕자)의 誕生(탄생)이 迫近(박근)하신 重身(중신)을 安保(안보)하시기 爲(위)하사 이 宮(궁)에서 靜養(정양)하시니라
却說(각설) 天地(천지)에 芳香(방향)이 馥郁(복욱)한 今春(금춘) 四月(사월) 八日(팔일)의 慶事(경사)로다 天氣(천기)가 隱和(은화)한 이 룸비니園(원)에 不可思議(불가사의)한 瑞光(서광)이 照應(조응)함에 따라 異香(이향)이 遠聞(원문)하는지라 雪山(설산 : 히말라야 山)에서 閒寂(한적)히 冥想(명상)의 生活(생활)을 계속하던 아사다 仙人(선인)은 如斯(여사)히 奇瑞(기서)가 間有(간유)함에 驚異(경이)하는 同時(동시)에 반다시 聖太子誕生(성태자탄생)의 兆朕(조짐)인 줄 心點(심점)하고 仙弟(선제) 나라다를 帶同(대동)하야 王宮(왕궁)에 來訪(내방)하니 果然(과연)이라 太子(태자)이신 悉達多(실달다)는 이제 出世(출세)하셨도다
仙人(선인)은 仰日(앙일)의 炯顔(형안)이신 太子(태자)의 聖相(성상)을 보고는 含淚(함루)하여 王(왕)께 告(고)하되 太子(태자)게서 王位(왕위)에 오르시면 全世界(전세계)를 統治(통치)하실 聖主(성주)가 되실 터이나 太子(태자)께서는 반다시 出家(출가)하사 成佛(성불)하신 후 廣度衆生(광도중생)하실 것임을 言上(언상)하면서 自己(자기)는 年老(연노)하야 이렇듯 거룩하신 尊敎(존교)를 奉聞(봉문)할 수 없음을 悲感(비감)하니라
其(기) 後(후) 太子(태자)께서는 仙人(선인)의 豫言(예언)과 같이 世間(세간)의 太陽(태양)으로 出興(출흥)하사 全世界(전세계)를 照了(조료)하시니 滅後(멸후)j 二千五百餘年(이천오백여년)의 歲月(세월)이 지난 今日(금일)에도 오히려 崇仰(숭앙)하야 맞이 않는 三界(삼계)의 導師(도사)이싱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이 되셨으니 每年(매년0 四月(사월) 八日(파일)에는 世界(세계)를 通(통)하야 太子(태자)의 誕生(탄생)을 祝賀(축하)하느니라
特(특)히 我邦(아방)에서는 觀燈會(관등회)라 이름하야 家家(가가)에 八角(팔각)의 燈籠(등롱)을 달고 永久(영구) 不滅(불멸)을 象徵(상징)하는 光明(광명)을 仰見(앙견)하면서 聖誕(성탄)을 祝賀(축하)함이 恒例(항례)가 되었느니라
第二節 道(도)를 求(구)하사 仙林(선림)에 入(입)하심
誕生(탄생)하신 지 七日(칠일)만에 母后(모후) 마야夫人(부인)이 入寂(입적)하시니 姨母(이모) 바사바제가 代育(대육)하신 바 太子(태자)께서는 天資(천자) 聰明(총명)하사 成長(성장)하신 지 七歲(칠세)에 言語(언어)를 能通(능통)하실 뿐 않이라 算術(산술) 天文(천문) 弓術(궁술) 또는 馬術(마술)을 各其(각기) 優師(우사)에게서 受學(수학)하시되 때때로 人不及(인불급)의 質問(질문)에는 師授(사수)로도 勘當(감당)하지 못하였느니라
父王(부왕)께서는 太子(태자)의 聰明(총명)을 기뻐하면서도 일찍이 아사다 仙人(선인)의 觀相說(관상설)이 憶想(억상)될 때에는 將來(장래)를 念慮(염려)하사 種種(종종)의 對策(대책)을 講究(강구)하시나니 美(미)와 才德(재덕)을 兼備(겸비)한 야수다라王女(왕녀)를 納妃(납비)하야 華麗(화려)한 殿堂(전당)에 住(주)하시게 하는 한편 國政(국정) 干涉(간섭)을 許與(허여)하야 出家心(출가심)을 抑制(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太子(태자)는 城外(성외)에 出遊(출유)하실 때마다 혹은 老衰屈腰(노쇠굴요)의 人(인) 혹은 病苦難堪(병고난감)의 人(인) 혹은 葬送(장송)의 死人(사인)을 目睹(목도)하신 印象(인상)이 湮滅(인멸)하지 않고 人皆老(인개노) 人皆病(인개병) 人皆死(인개사)라 이를 免(면)할 수가 없을까 하는 痛感(통감)이 深化(심화)함에 따라 마음이 鬱鬱(울울)하신 그대로 歸宮(귀궁)하심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其(기) 後(후) 또 다시 城門(성문)을 나갔을 때 路上(노상)에서 一人(일인)의 修道行者(수도행자)를 보시고 그의 非凡(비범)함에 感心(감심)하사 出家(출가)의 理由(이유)를 물으시니 老病死(노병사)를 免(면)한 自由(자유)를 얻을 수 있고 慈悲心(자비심)을 일으켜 生類(생류)를 救(구)한다는 答(답)이 儼然(엄연)함에 太子(태자)께서는 深感(심감)하여 心言(심언)하사되 이에 人間(인간)의 眞實(진실)한 道(도)가 있다고 自信(자신)하시고 宮中(궁중)에 喜歸(희귀)하시니 王孫(왕손)인 라후라의 生慶(생경)이 있어 殿中(전중)의 喜風(희풍)이 溢庭(일정)하는지라 世嗣(세사)를 얻으신 太子(태자)께서는 出家(출가)의 決心(결심)이 더욱 堅固(견고)하시니라
때는 마츰 初夏(초하)의 月夜(월야)였다 出家(출가)의 時節(시절)은 正(정)히 只今(지금)이라 생각하시고 安眠(안면)하는 라우라와 야수다라妃(비)를 남기시고 홀로 愛馬(애마) 건척을 旅**(여공)삼아 疾風(질풍)과 같이 城門(성문)을 나가시어 雪山(설산)을 向(향)하실 따름이었다 太子(태자)는 途中(도중)에서 下馬(하마)하시고 착용하신 衣冠(의관)은 父王(부왕)과 妃(비)에 對(대)한 信標(신표)로 御者(어자) 차익에게 벗어 주시고 自手(자수)로 削髮(삭발)하신 후 仙人(선인)들이 多留(다유)하는 森林(삼림) 內(내)의 諸(제) 學者(학자)들을 歷訪(역방)하사 學道(학도)에 努力(노력)하시니라
第三節 正覺(정각)을 大成(대성)함
太子(태자)께서는 雪山(설산)의 山麓(산록)과 우루빈라林(림)에서 六年間(육년간)이나 難行苦行(난행고행)을 體驗(체험)하시면서 오직 一心(일심)으로 道(도)를 求(구)하셨다
그로 因(인)하여 色身(색신)이 瘦衰(수쇠)하고 眼深骨露(안심골로)가 그 極(극)에 達(달)하여 人(인)의 一見(일견)에 垂淚(수루)를 禁(금)할 수 없을 地境(지경)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覺(각)의 光明(광명)은 나투지 않았다
어느 날 近村(근촌)의 處女(처녀)가
「줄(絃 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줄이 너무 느슨하면 안 울린다」
라고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太子(태자)께서는 「아! 그렇다 나는 光明(광명)의 世界(세계)를 求(구)하고자 먼저 五慾(오욕)의 家(가)를 捨離(사리)하야 仙林(선림)에 入(입)하였다 그러나 煩惱(번뇌)는 아직도 斷盡(단진)하지 못한 채 求道(구도)의 決心(결심)만은 不斷(부단)히 계속되지만 色身(색신)의 苦惱(고뇌)가 그 極(극)에 達(달)함에 따라 心絃(심현)이 斷絶(단절)될 地境(지경)이다 이래서야 眞實(진실)한 道(도)를 求(구)할 수가 없다 五慾(오욕)에 捕捉(포착)된 享樂(향락)의 生活(생활)도 理體(리체)에 不當(부당)하려니와 이렇게 自强(자강)하야 色身(색신)을 損(손)하고 精神(정신)을 괴롭히는 極端(극단)한 苦行(고행)도 理體(리체)에 不當(부당)하다 迷(미)를 떠나고 覺(각)에 進(진)하는 道(도)는 二(이)의 極端(극단 : 享樂과 苦行)이 아닌 中道(중도)라야 된다」고 思惟(사유)하시고 「이제는 다만 色身(색신)을 早養(조양)하고 心身(심신)을 靜穩(정온)히 하야 中道(중도)를 發見(발견)할 만한 實(실안)을 開(개)할 따름이라」生覺(생각)하셨다
그리하야 太子(태자)께서는 먼저 尼連禪河(니련선하)에 入(입)하사 色身(색신)부터 淸洗(청세)하시고 須 多少女(수자다소녀)가 捧上(봉상)하는 乳**(유미)를 受(수)하사 元氣(원기)를 回復(회복)하신 後(후) 부다가야의 大菩提樹下(대보리수하)에 수바사제少年(소년)이 捧上(봉상)하는 吉祥草(길상초)를 敷座(부좌)하시고 「내 萬一(만일) 覺(각)을 얻지 못하는 限(한)에는 斷然(단연)코 此座(차좌)를 不起(불기)하리라」自誓(자서)하사 一心正念(일심정념)으로 凝心靜慮(응심정려)하셨다
이것을 본 欲界(욕계)의 大魔王(대마왕)은 이제야 말로 魔界(마계)에 큰 危機(위기)가 왔으니 끝까지 太子(태자)의 成道(성도)를 妨害(방해)해야 한다고 벼르며 먼저 三人(삼인)의 魔女(마녀)를 보내어 太子(태자)의 마음을 迷亂(미란)케 하였으나 太子(태자)는 心少不動(심소부동)이라 驚愕(경악)한 魔王(마왕)은 雷電風雨(뇌전풍우)로써 大地(대지)를 搖動(요동)하며 一億八千(일억팔천)의 軍勢(군세)를 叱咤(질타)하야 前後(전후) 左右(좌우)에서 突進(돌진)하면서 接近(접근)하되 이미 覺(각)의 座(좌)는 微動(미동)을 發見(발견)할 수 없는지라 하릴없이 座(좌)를 中心(중심)하야 光輪(광륜)의 漸增(점증)으로써 輝煌(휘황)케 할 따름이었다
모든 邪魔(사마)를 克服(극복)하시고 마음의 平和(평화)를 保持(보지)하신 太子(태자)의 마음에는 夜闇(야암)이 曉光(효광)에 代(대)함과 같이 迷雲(미운)이 奇麗(기려)하게 捲晴(권청)하고 慧光(혜광)이 朗然(낭연)히 照了(조료)하였다 그리하야 먼저 自己(자기)의 前世(전세)를 알으시고 나아가 一切生類(일체생류)의 生滅相(생멸상)을 周知(주지)하심에 따라 迷(미)의 根源(근원)과 惑(혹)의 斷除(단제)하는 方途(방도)를 大悟(대오)하사 光明(광명)이 輝曜(휘요)하는 大覺位(대각위)에 오르시고 圓淨(원정)하신 智慧(지혜)와 圓滿(원만)하신 慈悲(자비)를 具足(구족)하신 無上尊(무상존)의 佛陀(불타) 곧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이 되셨나니라 그 때 釋尊(석존)의 寶齡(보령)이 滿三十歲(만삼십세 三十五歲說도 傳함)에 當(당)하신 十二月八日(십이월팔일) 曉晨(효신)의 事實(사실)이었다 現在(현재) 慶州(경주) 石窟庵(석굴암)에 奉安(봉안)한 新羅時代(신라시대)의 大石像(대석상)은 實(실)로 此晨(차신)의 聖姿(성자)시니라
第四節 五十年 敎化의 行脚(오십년 교화의 행각)
釋尊(석존)께서는 數日間(수일간) 스스로 開明(개명)하신 大覺悟(대각오)의 歡喜(환희)를 自樂(자락)하시면서 어떻게 하면 이러한 道(도)를 傳(전)하야 迷惑(미혹)의 懊惱(오뇌)로 受苦(수고)하는 衆生(중생)을 濟度(제도)할까 하는 慈悲心(자비심)이 불길 같이 타오르셨다 그래서 다시 五週間(오주간)이나 菩提樹下(보리수하)에 그대로 앉아 계시며 이제 얻은 바 이 道(도)를 어떻게 說(설)하여야 衆生(중생)들이 解得(해득)할까 또는 이를 此世(차세)에 實行(실행)케 함에는 어이해야 될까 深思熟考(심사숙고)하시다가 畢竟(필경) 正覺(정각)하신 寶座(보좌)에서 뜨시사 敎化行脚(교화행각)을 始作(시작)하셨다
劈頭(벽두)에 먼저 苦行(고행)의 同**(동모)였던 五比丘(오비구)를를 베나레스의 郊外(교외)에 往訪(왕방)하사 「衆生(중생)은 밥을 爲(위)하야 業(업)을 作(작)하면서 老, 病(노, 병)의 苦(고)와 싸우다가 死厄(사액)이 當前(당전)할 뿐이다 그것은 歷劫(역겁)의 集因(집인)이 輪轉(윤전)하는 業力(업력) 때문이니 苦果(고과)의 集因(집인)인 迷惑(미혹)을 끊어 衆生(중생)의 四苦(사고 : 生老病死)를 離(이)한 自性佛(자성불)에 歸依(귀의)할지라 證理(증리)를 目的(목적)하고 斷惑(단혹)에 努力(노력)하는 것이 涅槃(열반)에 達(달)하는 道(도)니라」고 敎訓(교훈)하셨다
이를 聽受(청수)한 五人(오인)은 仙人(선인)의 行法(행법)을 卽時(즉시)에 捨離(사리)하고 佛道(불도)에 入(입)하니 베나레스商人(상인)의 子(자) 야사야도 出家(출가)함에 따라 그 父母(부모)와 愛妻(애처)와 友人(우인) 五十四人(오십사인)도 同入信仰(동입신앙)하였나니라
그리고 우루빈라村(촌)에 있는 迦葉波(가섭파) 三兄弟(삼형제)와 아울너 그의 千人(천인) 弟子(제자)도 敎化(교화)하시고 王舍城(왕사성)에서 마갈타國王(국왕)을 위하야 說法(설법)하시는 한편 舍利佛(사리불)과 目 連(목건련) 等(등)을 化導(화도)하시며 다시 故鄕(고향)인 가비라바소도에 歸鄕(귀향)하사 父王(부왕)을 爲始(위시)하야 그 一族(일족)을 敎化(교화)하실새 妃(비) 야수다라와 子(자) 라후라와 姨弟(이제) 난타와 從弟(종제) 아난 等(등)도 다 弟子(제자)가 되었나니라
그리하야 貴族(귀족)이나 賤民(천민)이나 沙門(사문)이나 惡漢(악한)이나 또는 學者(학자)나 農民(농민)이나 商人(상인)이나가 그 階級(계급)과 職業(직업)과 男女(남녀)의 差別(차별)이 없이 다 平等(평등)으로 同一敎訓(동일교훈)에 薰陶(훈도)되어 無上(무상)의 道(도)에 들었나니라
釋尊(석존)께서는 每年(매년) 夏節(하절)의 長霖期(장림기)에는 一處所(일처소)에 弟子(제자)들을 會集(회집)하사 道(도)를 專修(전수)케 하시다가 過期解制(과기해제)하면 諸方(제방)에 遊行(유행)하야 敎勅(교칙)을 廣布(광포)하는 바 到處(도처)에 國王(국왕) 大臣(대신)으로부터 貧婦(빈부) 乞人(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투어 歡迎(환영)할 뿐 아니라 精舍(정사)를 提供(제공)하고 衣食(의식)을 獻供(헌공)하면서 請敎願聞(청교원문)할새 轎者(교자)는 遜讓(손양)하고 悲者(비자)는 慰安(위안)하고 惱者(뇌자)는 得穩(득은)하며 狂者(광자)는 蘇醒(소성)하니 奉敎一聞(봉교일문)한 者(자)는 不死(불사)의 甘露(감로)를 得飮(득음)함 같이 新生命(신생명)을 蒙惠(몽혜)하야 永生(영생)의 涅槃(열반)에 向(향)케 되었나니라
그리하야 戰國(전국)이 平和(평화)하고 不言(불언) 禽獸(금수)도 相愛(상애)하도다 이와 같이 傳道(전도)에 專心(전심)하사 最後(최후)의 一刻(일각)에 이르기까지 傳敎(전교) 아니심이 없었나니라
第五節 追想(추상)
釋尊(석존)께서는 스스로 昏衢(혼구)의 燈燭(등촉)이 되셨으니 이제 回想(회상)하면 實(실)로 釋尊(석존)의 一生(일생)은 自心中(자심중)의 明淨(명정)하신 燈火(등화)를 大慈大悲(대자대비)하신 佛心(불심)으로써 世間(세간)의 人人(인인)에게 分與(분여)하셨나니 아니 只今(지금)도 오히려 行化(행화)하심이 分明(분명)하니라
그래서 釋尊(석존)의 敎訓(교훈)을 信受奉行(신수봉행)하는 사람들이 이 智慧(지혜)의 燈火(등화)를 奉戴(봉대)하야 나날이 受用(수용)하는 바 「내 不死(불사)의 道(도)를 說(설)하리라」하심은 實(실)로 사람마다의 燈心(등심)에 點火(점화)하심이니라
釋尊(석존)의 化身(화신)은 滅(멸)하신 지 이미 二千五百餘年(이천오백여년)의 歲月(세월)이 흘렀으나 釋尊(석존)의 智法身(지법신) 곧 永遠(영원)히 不滅(불멸)하는 그 智慧(지혜)의 燈火(등화)는 間斷(간단) 없이 傳(전)하고 傳(전)하여 더욱 더욱 無數(무수)한 人人心中(인인심중)에 輝曜(휘요)할새 이 光明(광명) 中(중)에서 우리는 釋尊(석존)의 尊且大(존차대)한 慈悲(자비)의 容姿(용자)를 拜察(배찰)하는 同時(동시)에 우리의 生命(생명)을 一切(일체) 有情(유정)의 生命(생명)과 大和(대화)한 中(중)에서 永生(영생)의 恩澤(은택)을 입는 바이다
丙戌 僧臘日(병술 승납일)
於 雲門庵 碧山閒人 撰譯(어 운문암 벽산한인 찬역)
第 五 章 護法團 四次 聲明書(호법단 사차 성명서)
本(본) 護法團(호법단)은 世界(세계) 四聖說(사성설)을 打破(타파)하는 同時(동시)에 菩薩十地(보살십지)를 基幹(기간)으로 하야 老子(노자)를 七地(칠지), 基督(기독)과 孔子(공자)를 五地(오지), 마호메트와 소크라테스를 四地(사지) 等(등) 在家菩薩位(재가보살위)에 按排(안배)하고 出家菩薩(출가보살)인 元曉(원효)와 震黙(진묵)이 八地(팔지), 普照(보조)와 西山(서산)이 四地(사지), 空海(공해 : 日本)가 三地(삼지)일새 同胞(동포)는 參酌(참작)하신 後(후) 因襲的(인습적)인 神聖的(신성적) 迷信觀念(미신관념)을 打破(타파)하시고 正道(정도)에 歸依(귀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道敎中(도교중) 道德經(도덕경)을 除(제)한 外(외)에 他(타)는 揀別(간별)하며 大倧敎(대종교)와 神道(신도)란 華嚴神(화엄신)을 信仰(신앙)의 對象(대상)으로 하는 時節(시절)까지 正道(정도)임을 保留(보류)하고 他(타)의 諸(제) 宗敎(종교)란 皆是非道(개시비도)임을 聲明(성명)합니다
乙酉 九月 十九日(을유 구월 십구일)
護法團長 釋 金 陀(호법단장 석 금 타)
第 六 章 懸記(현기)
一, 流通(유통)
世界(세계) 一圓(일원)의 半徑的(반경적)인 現在(현재)의 朝鮮人口(조선인구) 二千八百八十萬(이천팔백팔십만)의 倍數(배수)인 五千七百六十萬人(오천칠백육십만인)의 三乘聖衆(삼승성중)이 因緣(인연) 깊은 七個國人(칠개국인)으로 더불어 輪界的(윤계적)인 精神(정신)의 世界(세계)에 遍滿(변만)할새 後(후)에 刊行(간행)할 首楞嚴三昧圖(수릉엄삼매도)는 且置(차치)하고 이 「一人傳(일인전)에 一人度(일인도)」만으로써 法爾的(법이적)으로 菩薩聖衆(보살성중)인 一千八百八十萬人(일천팔백팔십만인) 外(외)에 爲先(위선) 緣覺(연각)과 聲聞(성문)의 二乘聖衆(이승성중)인 三千八百八十萬人(삼천팔백팔십만인)을 度(도)함
二, 思潮(사조)
法爾的(법이적)으로 萬法(만법)이 持雙(지쌍)일새 合法(합법)과 非合法(비합법)의 二大思潮(이대사조)가 流布(유포)함
三, 政治(정치)
法爾的(법이적)으로 天地(천지)를 統一(통일)함은 眞空(진공)이오 妙有(묘유)함은 地, 水, 火, 風(지, 수, 화, 풍) 四大(사대)일새 世界(세계)는 四大(사대)의 政治分野(정치분야)로써 組織(조직)됨
四, 合流(합류)
大衆的(대중적)으로 超凡入聖(초범입성)의 時代(시대)라 體, 相, 用(체, 상, 용)인 三大(삼대)의 分野(분야)가 本流(본류)에 合(합)함
五, 主義(주의)
開闢以來(개벽이래) 主(주)로 同軌(동궤)인 過去(과거)의 一千四佛(일천사불)과 未來(미래)의 一千九百九十六佛(일천구백구십육불)이며 從(종)으로 同轍(동철)인 無數億(무수억) 菩薩(보살)의 一貫的(일관적)인 護法主義(호법주의)를 主張(주장)하고
六, 義務(의무)
사람의 功德(공덕)됨이 迷情(미정)을 救(구)함보다 더함이 없으니 이의 「一人傳(일인전)에 一人度(일인도)」를 銘念(명념)할지어다 總報(총보)가 齊同(제동)한 世界同胞(세계동포)여! 同胞(동포)여! 同胞(동포)여!
丁亥 正月 念日(정해 정월 념일)
碧山閒人 釋 金 陀 告(벽산한인 석 금 타 고)
第 七 章 卍德頌과 十如是(만덕송과 십여시)
〈卍德頌〉
慈水悲火(자수비화) 無爲生起(무위생기) 喜風捨地(희풍사지) 十界俱現(십계구현)
四心無量(사심무량) 四界無邊(사계무변)
心無 碍(심무괘애) 實性圓融(실성원융) 涅槃妙心(열반묘심) 常樂我淨(상락아정)
隨緣異熟(수연이숙) 不隨異果(불수이과)
四攝卍德(사섭만덕) 性相一如(성상일여) 雖現此身(수현차신) 內外依正(내외의정)
心王安住(심왕안주) 同於虛空(동어허공)
〈十如是〉
如是相如是性如是體如是力如是作如是因如是緣如是果如是報本末究竟等……
※ 如字(여자)를 起點(기점)으로 하면 假諦(가제), 是字(시자)를 起點9기
점)으로 하면 空諦(공제), 相字(상자)를 起點(기점)으로 하면 中諦(중 제)가 됨
第 二 篇 解脫十六地(해탈십육지)
初, 三歸地(삼귀지)
一切(일체)의 佛陀(불타)는 佛寶(불보), 佛陀(불타)께옵서 說(설)하신 敎法(교법)은 法寶(법보), 그 敎法(교법)에 依(의)하야 修業(수업)하는 者(자)는 僧寶(승보)라 云(운)하니라 佛(불)이란 覺知(각지)의 義(의)요 法(법)이란 法軌(법궤)의 義(의)요 僧(승)이란 和合(화합)의 義(의)며 其性(기성)의 明淨(명정)함과 勢力(세력)의 偉大(위대)함이 最上(최상) 無比(무비)하야 能(능)히 世間(세간)을 莊嚴(장엄)하되 永久不變(영구불변)하야 世界(세계)에 希有(희유)한 故(고)라
三寶(삼보)에 六種(육종)의 義(의)가 有(유)하야
一(일)에 同體三寶(동체삼보)를 一體三寶(일체삼보) 또는 同相三寶(동상삼보)라고도 云(운)하니 三寶(삼보) 一一(일일)의 體(체)에 三寶(삼보)의 義(의)가 有(유)하야 佛(불)의 體上(체상)에 覺照(각조)의 義(의)가 有(유)함은 佛寶(불보), 軌則(궤칙)의 義(의)가 有(유)함은 法寶(법보), 違諍(위쟁)의 過(과)가 無(무)함은 僧寶(승보)며 乃至(내지) 僧(승)에 觀智(관지)가 有(유)함은 佛寶(불보), 軌則(궤칙)이 有(유)함은 法寶(법보) 和合(화합)함은 僧寶(승보)일새요
二(이)에 別相三寶(별상삼보)를 化相三寶(화상삼보) 또는 別體三寶(별체삼보)라고도 云(운)하니 諸佛(제불)의 三身(삼신)을 佛保(불보), 六度(육도)를 法寶(법보), 十聖(십성)을 僧寶(승보)라 云(운)함은 大乘三寶(대승삼보)며 丈六(장육)의 化身(화신)을 佛寶(불보), 四諦(사제), 十二因緣(십이인연)의 法(법)을 法寶(법보), 四果(사과), 緣覺(연각)을 僧寶(승보)라 云(운)함은 小乘三寶(소승삼보)요
三(삼)에 一乘三寶(일승삼보)란 究竟(구경)의 法身(법신)을 佛寶(불보), 一乘(일승)의 法(법)을 法寶(법보), 一乘(일승)의 菩薩衆(보살중)을 僧寶(승보)라 云(운)하니 이는 「勝**經(승만경)」「法華經(법화경)」等(등)의 義(의)요
四(사)에 三乘三寶(삼승삼보)란 三乘者(삼승자)를 爲(위)하사 現(현)하신 不(불)의 三身(삼신)을 佛寶(불보), 三乘(삼승)의 法(법)을 法寶(법보), 三乘(삼승)의 衆(중)을 僧寶(승보)라 云(운)함도 亦是(역시) 「勝**經(승만경)」과 「攝論(섭론)」等(등)의 義(의)요
五(오)에 眞實三寶(진실삼보)란 不(불)의 三身(삼신)을 佛寶(불보), 一切(일체) 無漏(무루)의 敎理行果(교리행과)를 法寶(법보), 見諦(견체) 以上(이상)의 三乘聖衆(삼승성중)을 僧寶(승보)라 云(운)함이오
六(육)에 住持三寶(주지삼보)란 佛滅後(불멸후) 世間(세간)에 住9주)하는 三寶(삼보)로서 木佛(목불), 畵像(화상) 等(등)을 佛寶(불보), 三藏(삼장)의 文句(문구)를 法寶(법보), 剃髮染衣(체발염의)를 僧寶(승보)라 云(운)함이니 一(일), 三(삼), 五(오)의 三種(삼종)은 大乘(대승)에 局限(국한)하고 二(이), 四(사), 六(육)의 三種(삼종)은 大小乘(대소승)에 通(통)하니라
비록 三歸戒(삼귀계)를 初受(초수)할지라도 解脫(해탈)을 目的(목적) 할진댄 반다시 大乘三寶(대승삼보)에 歸依(귀의)할진져
戒(계)란 入道方便(입도방편)이라 不可缺(불가결)이니 戒相(계상)으론 律儀(율의)를 攝(섭)하고 戒德(계덕)으론 大道(대도)에 通(통)할새 五戒(오계)는 戒經(계경)의 首位(수위)로서 爲先(위선) 第一(제일) 不殺生戒(불살생계)에 있어 無生(무생)의 理(리)를 證(증)하면 大乘(대승)이오 不然(불연)하면 小乘(소승)이니라
二, 信願地(신원지)
證前(증전)엔 迷信(미신)이오 證後(증후)엔 正信(정신)이니 願(원)도 迷信(미신)에 根據(근거)하면 俗人(속인)의 願(원)이오 正信(정신)에 立脚(입각)하면 道人(도인)의 願(원)이며 비록 正信(정신)의 發願(발원)이라도 小法(소법)에 止(지)하면 小乘(소승)이오 다시 大願(대원)을 發(발)하야 動搖(동요)가 無(무)하면 大乘(대승)이니 信(신)과 願(원)에 있어 其(기) 宜(의)를 得(득)하야 거듭 成就(성취)할지니라
聲聞十地(성문십지)에 있어 初受三歸地(초수삼귀지)가 곧 初(초) 三歸地(삼귀지)며 二(이) 信地(신지)와 三(삼) 信法地(신법지)가 곧 信願地(신원지)와 等(등)하나 信法(신법)에 있어 生滅四諦(생멸사제)에 局(국)하지 않고 無量四諦(무량사체) 또는 無作四諦(무작사제)를 信(신)하야 藏, 通, 別, 圓(장, 통, 별, 원)의 四敎義(사교의)를 會通(회통)하야 벌써 此地(차지)에서 會三歸一(회삼귀일)의 理(리)를 達(달)하고 究竟(구경) 成就(성취)를 目的(목적)하야 먼저 信心(신심)과 願力(원력)을 成就(성취)하니라
三, 習忍地(습인지)
伏忍(복인), 信忍(신인), 順忍(순인), 無生忍(무생인), 寂滅忍(적멸인) 等(등) 五忍(오인) 中(중) 前(전) 四忍(사인)에 各有(각유) 上, 中, 下(상, 중, 하) 三品(삼품)하고 後(후) 一忍(일인)에 有(유) 上, 下(상, 하) 二品(이품)하니 特(특)히 伏忍(복인)에 있어 上(상)을 道種忍(도종인), 中(중)을 性忍(성인), 下(하)를 習忍(습인)이라 稱(칭)하는 바 聲聞乘(성문승)의 四內凡夫地(사내범부지 : 五停心觀(오정심관)을 修하는 位)나 五(오) 學信戒地(학신계지 : 三學 成就의 位)에 屬(속)하고 緣覺乘(연각승)의 一(일) 苦行具足地(고행구족지 : 戒行을 修하는 位) 二(이) 自覺甚深十二因緣地(자각심심십이인연지 : 十二因緣의 觀法을 修하는 位) 三(삼) 覺了四聖諦地(각료사성제지 : 四諦觀을 修하는 位) 等(등)에 屬(속)하나 三(삼) 習忍地(습인지)란 小乘(소승)의 修法(수법)에 局(국)하지 않고 無量法門(무량법문)으로써 隨機應量(수기응량)하야 修習安忍(수습안인)을 成就(성취)함이니라
四, 加行地(가행지)
어느 修法(수법)이든지 得正(득정)하면 可(가)하니 習忍(습인)을 成就(성취)한 後(후) 依法(의법) 結制(결제)하고(冬安居가 絶好함) 經驗者(경험자)의 外護指導下(외호지도하)에서 一心不亂(일심불란)하야 三密(삼밀)을 守(수)하며 勇猛精進(용맹정진)으로써 間斷(간단)없이 加行(가행)하면 반다시 煖位(난위)에서 明得定(명득정), 頂位(정위)에서 明增定(명증정), 忍位(인위)에서 無間定(무간정)을 次第成就(차제성취)하나니 이를 五相成身位(오상성신위)에 配(배)하면 明得定(명득정)은 通達心(통달심)의 前相(전상)이오 明增定(명증정)은 곧 第一(제일) 通達菩提心位(통달보리심위)며 印順定(인순정)은 第二(제이) 修菩提心位(수보리심위)며 無間定(무간정)은 第三(제삼) 成金剛心位(성금강심위)니 곧 四禪(사선)을 通貫(통관)한 一心支(일심지)로서 그 極點(극점)이 滅盡定(멸진정)일새 無間道(무간도)의 直後(직후)가 解脫道(해탈도)니라
그리고 明得定(명득정)과 明增定(명증정)에서 性忍(성인)을 成就(성취)하나니 이가 共十地(공십지)의 第二(제이) 性地(성지)요 印順定(인순정)에서 道種忍(도종인)을 成就(성취)하나니 이가 共十地(공십지)의 第三(제삼) 八印地(팔인지)인 同時(동시)에 聲聞乘(성문승)의 第六(제육) 八印地(팔인지 : 聲聞 見道의 位)며 性忍과 道種印(도종인)이 아울너 緣覺乘(연각승)의 第四(제사) 甚深利智地(심심이지지 : 甚深의 無相地를 生하는 位)와 第五(제오) 八聖道地(팔성도지 : 八聖道를 修하는 位)와 第六(제육) 覺了法界虛空界衆生界地(각료법계허공계중생계지 : 이의 三界를 覺了하는 位)에 該當(해당)하니라
五, 金剛地(금강지)
菩薩(보살)이 將登正覺(장등정각)할새 皆坐(개좌) 金剛座(금강좌)라 說(설)하신 金剛座(금강좌)란 곧 金剛地(금강지)로서 五相成身位次(오상성신위차)의 第四(제사) 成金剛身位(성금강신위)니 解脫道(해탈도)에 第一步(제일보)를 印(인)한지라 共十地(공십지)의 第四(제사) 見地(견지)요 또 聲聞乘(성문승)의 第七(제칠) 須陀洹地(수다원지 : 預流果의 位)며 緣覺乘(연각승)의 第七(제칠) 證寂滅地(증적멸지 : 緣覺 見道의 位)인 同時(동시)에 第八(제팔) 六通地(육통지 : 六神通을 得하는 位)의 初步(초보)니 換言(환언)하면 五(오) 金剛地(금강지)란 地層(지층)의 最低(최저)인 金剛輪(금강륜)이 獨露(독로)한 境地(경지)로서 鍛鐵(단철)의 去**(거청)함 같고 籠鳥(농조)의 解脫(해탈)함 같이 生死網(생사망)을 出離(출리)하야 衆生身中(중생신중)의 金剛佛性(금강불성)을 見證(견증)한 者(자)니 진실로 本格的(본격적) 肉眼(육안)을 成就(성취)할새 漸次(점차)하야 天眼, 法眼, 慧眼, 佛眼(천안, 법안, 혜안, 불안)을 得(득)할지라 修者(수자)―此地(차지)를 成就(성취)하야사 비로소 金剛薩**(금강살타)라 名(명)하니라
六, 喜樂地(희락지)
三界(삼계)를 九地(구지)로 區分(구분)할새 欲界(욕계)는 五趣(오취)가 不同(부동)하나 同一(동일)의 散地(산지 : 欲界의 果報에 定心이 無함으로 써라)임으로 一地(일지)로 合(합)하고 色界(색계)와 無色界(무색계)를 各(각) 四地(사지)로 分(분)하야 一(일)에 欲界五趣地(욕계오취지)니 欲界內(욕계내)에 地獄, 餓鬼, 畜生, 人, 天(지옥, 아귀, 축생, 인, 천)의 五趣(오취 : 阿修羅는 天에 攝함)가 有(유)한바 이를 合(합)하야 一地(일지)를 成(성)한 者(자)며 二(이)에 離生喜樂地(이생희락지)니 欲界(욕계)의 生(생)을 離(이)함에 因(인)하야 喜受(희수)와 樂受(낙수)가 生(생)하는 地(지)로서 眼, 耳, 身, 意(안, 이, 신, 의)의 四識(사식)만이 有(유)하고 鼻, 舌(비, 설) 二識(이식)이 無(무)함으로 無分別(무분별)의 樂受(낙수)가 相應(상응)하야 意識(의식)에 有分別(유분별)의 喜受(희수)가 相應(상응)하니 곧 色界(색계)의 初禪天(초선천)이며 三(삼)에 定生喜樂地(정생희락지)니 初禪定(초선정)의 喜樂(희락)을 因(인)으로 하고 更(갱)의 勝妙(승묘)의 喜樂(희락)이 生(생)하는 地(지)로서 此地(차지) 已上(이상)엔 總(총)히 五識(오식 :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을 離(이)하고 但(단) 意識(의식)만이 有(유)함으로 或(혹) 喜受(희수)가 相應(상응)하고 或(혹) 樂受(락수)가 相應(상응)하니 곧 二禪天(이선천)이며 四(사)에 離喜妙樂地(이희묘락지)니 喜受(희수) 오히려 心(추심)이므로 二禪(이선)의 喜(희)를 離(이)하고 獨(독)히 靜妙無分別(정묘무분별)의 樂(락)에 住(주)하는 地(지)로서 곧 三禪天(삼선천)이며 五(오)에 捨念淸淨地(사념청정지)니 樂修(낙수) 오히려 粗心(조심)임으로 이를 離(이)하고 淸淨無爲(청정무위)한 捨受(사수)의 念(념)에 住(주)하는 地(지)로서 곧 四禪天(사선천)이며 (以上 四地의 色界임) 六(육)에 空無邊處地(공무변처지)니 色界(색계)의 色(색)을 厭(염)하야 空(공)을 思(사)하되 空(공)에 邊際(변제)가 無(무)한 觀解(관해)를 作(작)하는 者(자)가 生(생)하는 地(지)로서 卽(즉) 無色界(무색계)의 第一天(제일천)이며 七(칠)에 識無邊處地(식무변처지)니 前(전)의 外空(외공)을 厭(염)하야 內識(내식)을 思(사)하되 識(식)에 邊際(변제)가 無(무)한 觀解(관해)를 作(작)하는 者(자)가 生(생)하는 地(지)로서 卽(즉) 無色界(무색계)의 第二天(제이천)이며 八(팔)에 無所有處地(무소유처지)니 前(전)의 內識(내식)을 厭(염)하고 無所有(무소유)를 思(사)하되 無所有(무소유)의 觀解(관해)를 作(작)하는 者(자)가 生(생)하는 地(지)로서 卽(즉) 無色界(무색계)의 第三天(제삼천)이며 九(구)에 非想非非想處地(비상비비상처지)니 前地(전지)와 如(여)한 **相(추상)이 無(무, 非想)하고 極(극)히 微細(미세)한 想念(상념 : 非非想)이 有(유)하는 地(지)라 卽(즉) 無色界(무색계)의 第四天(제사천)으로서 三界(삼계) 中(중) 第一(제일)의 果報(과보)니라.
蓋(개) 無色界(무색계)를 識界(식계), 色界(색계)를 根界(근계), 欲界(욕계)를 境(경, 塵)界(계)로 區分(구분)할 수 있으나 各界(각계)가 各具(각구) 三界(삼계)하야 橫(횡)으론 區分(구분)할 수 없고 縱(종)으로 分位(분위)한다면 欲境界(욕경계)를 **塵三界(추진삼계), 色根界(색근계)를 細塵三界(세진삼계), 無色識界(무색식계)를 極微三界(극미삼계)라 稱(칭)할가, 何如間(하여간) 三界(삼계)란 根, 境, 識(근, 경, 식)의 別稱(별칭)으로서 相的(상적)으론 境(경)이오 性的(성적)으론 根(근)이며 分別的(분별적)으론 識(식)일새 五蘊(오온)이 各具(각구) 五蘊(오온)하야 區別(구별)키 難(난)하나 一如(일여)한 中(중)에 性相(성상)이 分明(분명)하니 了別(요별)이 不無(불무)니라
修者(수자)―金剛座(금강좌)에 坐(좌)하야 空無邊處(공무변처)를 觀念(관념)하면 離生喜樂地(이생희락지)에 到(도)하고 識無邊處(식무변처)를 觀念(관념)하면 定生喜樂地(정생희락지)에 無所有處(무소유처)를 觀念(관념)하면 離喜妙樂地(이희묘락지)에 非想非非想處(비상비비상처)에 住(주)하면 邪念淸淨地(사념청정지)에 到(도)할새 六(육) 喜樂地(희락지)란 離生喜樂(이생희락)과 定生喜樂(정생희락)이 生(생)하는 地(지)로서 聲聞乘(성문승)의 第八(제팔) 斯陀含地(사다함지, 一來果의 位)와 共十地(공십지)의 第五(제오) 薄地(박지)에 該當(해당)하고 五(오) 金剛地(금강지)와 六(육) 喜樂地(희락지)를 合(합)해서 菩薩乘(보살승)의 初(초) 歡喜地(환희지)에 當(당)하니라
七, 離坵地(이구지)
離喜妙樂(이희묘락)의 境界(경계)를 거쳐 捨念淸淨地(사념청정지)에 到(도)하는 地(지)니 聲聞乘(성문승)의 九(구) 阿那含地(아나함지, 不還果의 位)에 當(당)하고 菩薩乘(보살승)의 第二地(제이지)에 合(합)하며 共十地(공십지)의 第六(제육) 離欲地(이욕지)에 當(당)하니라
八, 發光地(발광지)
加行功德(가행공덕)으로 一時的(일시적)으로 三界(삼계)를 出離(출리)하매 心光(심광)이 發(발)하야 九次第定(구차제정)의 極位(극위)인 滅受相定(멸수상정 : 滅盡定(멸진정))을 비로소 吟味(음미)하는 地(지)니 菩薩乘(보살승)의 第三地(제삼지)에 合(합)하니라.
九, 精進地(정진지)
菩薩十地(보살십지)에서 十波羅密(십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十眞如(십진여)를 證(증)하니
歡喜地(환희지)에서 施波羅密(시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遍行眞如(변행진여 : 我, 法 二空(아, 법 이승)의 所顯(소현)으로서 諸法(제법)에 通行(통행)함으로)를 證(증)하며
離垢地(이구지)에서 戒波羅密(계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最勝眞如(최승진여 : 無邊(무변)의 德(덕)을 具足(구족)하야 一切法(일체법)에서 最勝(최승)함으로)를 證(증)하며
發光地(발광지)에서 忍辱波羅密(인욕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勝流眞如(승류진여 : 此(차) 眞如(진여) 所流(소류)의 敎法(교법)이 至極(지극)히 殊勝(수승)함으로)를 證(증)하며
慧地(염혜지)에서 精進波羅密(정진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無攝受眞如(무섭수진여 : 繫屬(계속)한 바 無(무)하야 我執(아집) 等)등)에 依(의)하고 또 取(취)하는 바 않임으로)를 證(증)하며
難勝地(난승지)에서 禪定(선정 : 精慮(정려))波羅密(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無別眞如(무별진여 : 差別(차별)의 類(유)가 無(무)하야 眼(안) 等(등)의 異類(이류)가 有(유)함과 如(여)함이 않임으로)를 證(증)하며
現前地(현전지)에서 般若波羅密(반야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無染淨眞如(무염정진여 : 本性(본성)이 無染(무염)한지라 後(후)에 다시 淨(정)해진다고 說(설)할 수 없음으로)를 證(증)하며
遠行地(원행지)에서 方便善巧(방편선교 : 回向方便善巧(회향방편선교)와 拔濟方便善巧(발제방편선교))波羅密(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法無別眞如(법무별진여 : 多數法(다수법)에 種種(종종)으로 安立(안립)하되 別異(별이)가 無(무)함으로)를 證(증)하며
不動地(부동지)에서 願(원 : 求菩提願(구보리원)과 利樂他願(이락타원))波羅密(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不增減眞如(부증감진여 : 增減(증감)의 執(집)을 離(이)하야 淨染(정염)에 따라 增減(증감)됨이 않임으로)를 證(증)하는 同時(동시)에 또 相土自在所依眞如(상토자재소의진여)를 證(증)할 수 있으니 이를 證得已(증득이)하면 身相(신상)을 現(현)하고 國土(국토)를 示(시)함에 自在(자재)하며
善彗地(선혜지)에서 力(력 : 修習力(수습력)과 思擇力(사택력))波羅密(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智(지 : 受用法樂地(수용법락지)와 成熟有情地(성숙유정지))自在所依眞如(자재소의진여)를 證(증)하니 이를 證得已(증득이)하면 無碍解(무애해)에 自在(자재)를 得(득)하며
法雲地(법운지)에서 智波羅密(지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業自在等所依眞如(업자재등소의진여)를 證得已(증득이)하면 普(보)히 一切 神通(일체 신통)의 作業多羅尼定門(작업다라니정문)에서 皆(개) 自在(자재)를 得(득)하니라
眞如性(진여성)은 實(실)로 差別(차별)이 無(무)하니 勝德(승덕)에 따라 十種(십종)을 假立(가립)하나니 菩薩初地(보살초지) 中(중)에서 이미 一切(일체)에 達(달)하야 能(능)히 證行(증행)할 수 있지만 아직 圓滿(원만)치 못함으로 圓滿(원만)하기 爲(위)함인져
解脫十六地(해탈십육지)에 있어 七, 八, 十一(칠, 팔, 십일)의 三地(삼지)는 菩薩(보살)十地(십지)의 二, 三, 六(이, 삼, 육)의 三地名(삼지명) 그대로, 九, 十(구, 십)의 二地(이지)는 十波羅密(십바라밀) 中(중) 四, 五(사, 오)의 冠詞(관사)를 引用(인용)하고 十二, 十三, 十四, 十五, 十六(십이, 십삼, 십사, 십오, 십육)의 五地(오지)는 瑜伽十七地(유가십칠지) 中(중) 十三(십삼) 聲聞地(성문지) 十四(십사) 獨覺地(독각지) 十五(십오) 菩薩地(보살지) 十六(십육) 有餘依地(유여의지) 十七(십칠) 無餘依地(무여의지) 等(등)과 共十地(공십지)의 七(칠) 聲聞地(성문지) 八(팔) 支拂地(지불지) 九(구) 菩薩地(보살지) 十(십) 佛地(불지) 等(등)을 參酌(참작)한 者(자)니 對照(대조)할진져
十, 禪定地(선정지)
菩薩乘(보살승)의 五(오) 難勝地(난승지)에 當(당)함
十一, 현전지(現前地)
菩薩乘(보살승)의 六(육) 現前地(현전지)에 合(합)함
十二, 羅漢地(나한지)
聲聞乘(성문승)의 極果(극과)인 十(십) 阿羅漢地(아라한지) 卽(즉) 無學果(무학과)의 位(위)와 緣覺乘(연각승)의 九(구) 徹和蜜地(철화밀지) 卽(즉) 無學果(무학과)를 證(증)하는 位(위)와 菩薩乘(보살승)의 七(칠) 遠行地(원행지)와 十共地(십공지)의 七(칠) 已辨地(이변지) 卽(즉) 阿羅漢果(아라한과)의 位(위)에 當(당)할새니라
十三, 支拂地(지불지)
緣覺乘(연각승)의 極果(극과)인 十(십) 習氣漸薄地(습기점박지)로서 習氣(습기)를 侵害(침해)하는 位(위)니 共十地(공십지)의 八(팔) 支拂地(지불지)에 合(합)하고 證理邊(증리변)으론 菩薩乘(보살승)의 八(팔) 不動地(부동지)에 當(당)하니라
十四, 菩薩地(보살지)
菩薩乘(보살승)의 九(구) 善彗地(선혜지)와 共十地(공십지)의 九(구) 菩薩地(보살지)에 合當(합당)하니라
十五, 有餘地(유여지)
瑜伽十七地(유가십칠지) 中(중) 第十六(제십육) 有餘依地(유여의지)의 略稱(약칭)으로서 菩薩乘(보살승)의 終地(종지)인 十(십) 法雲地(법운지)에 當(당)하고 共十地(공십지)론 九(구) 菩薩地(보살지)에 攝(섭)하며 또 等覺位(등각위)도 이에 含容(함용)되나 因位(인위)의 等覺(등각)이란 五十位(오십위)의 總代名詞(총대명사)라 云謂(운위)할 수 있음으로 이를 略(약)함
十六, 無餘地(무여지)
瑜伽十七地(유가십칠지)의 終位(종위)인 無餘依地(무여의지)의 略稱(약칭)으로서 共十地(공십지)의 十(십) 佛地(불지)에 當(당)하는 妙覺(묘각)의 位(위)니 四覺(사각) 中(중) 本覺(본각)을 除(제)하고 十六地(십육지)에 按配(안배)하면 이가 究竟覺(구경각)이오 四地(사지)까지가 相似覺(상사각) 五地(오지)부터 隨分覺(수분각)이며 五忍(오인)으로 按配(안배)하면 四地(사지)까지 伏忍(복인), 八地(팔지)까지 信忍(신인), 十一地(십일지)까지 順忍(순인), 十四地(십사지)까지 無生忍(무생인), 終二地(종이지)가 寂滅忍(적멸인)으로서 三地(삼지)까지가 下伏忍(하복인 : 習忍(습인)), 四(사) 加行地(가행지) 中(중) 明得定(명득정)과 明增定(명증정)이 中伏忍(중복인 : 性忍)), 印順定(인순정)이 上伏忍(상복인 : 道種忍)), 五, 六(오, 육) 合地(합지)가 下信忍(하신인), 七地(칠지)가 中信忍(중신인), 八地(팔지)가 上信忍(상신인), 九地(구지)가 下順忍(하순인), 十地(십지)가 中順忍(중순인), 十一地(십일지)가 上順忍(상순인), 十二地(십이지)가 下無生忍(하무생인), 十三地(십삼지)가 中無生忍(중무생인), 十四地(십사지)가 上無生忍(상무생인), 十五地(십오지)가 下寂滅忍(하적멸인), 十六地(십육지)가 上寂滅忍(상적멸인)인 바 이를 十四忍(십사인)이라고도 云(운)하고 上寂滅忍(상적멸인)을 除(제)하야 十三觀門(십삼관문)이라고도 謂(위)하나니
且 空, 性, 相(차 공, 성, 상) 三宗(삼종)은 元來(원래) 橫的(횡적)으로 揀別(간별)할 바 않이오, 縱的(종적)으로 그 程度(정도)를 各示(각시)한다면 伏, 信, 順(복, 신, 순) 等(등) 三忍(삼인)은 相宗(상종)이오 無生忍(무생인)은 性宗(성종)이며 寂滅忍(적멸인)은 空宗(공종)이니라 그리고 四加行位, 十信, 十住, 十行, 十廻向, 十地, 等覺, 妙覺 等(사가행위,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등) 諸位(제위)를 都合(도합)한 五十六位說(오십육위설), 等覺位(등각위)를 除(제)한 五十五位說(오십오위설), 四加行位(사가행위)를 除(제)한 五十二位(오십이위) 或(혹) 五十一位說(오십일위설), 十信位(십신위)를 外凡夫位(외범부위)라 하야 이를 除(제)한 四十二位(사십이위) 或(혹) 四十一位說(사십일위설) 等(등)이 有(유)하고 且(차) 十住, 十行, 十廻向(십주, 십행, 십회향)을 內凡夫位(내범부위) 或(혹) 三賢位(삼현위)라 云(운)하며 十地(십지)를 十聖位(십성위)라 謂(위)하는 三賢十聖說(삼현십성설), 初, 二, 三地(초, 이, 삼지)를 三賢位(삼현위), 四地(사지)를 入聖之門(입성지문), 五地(오지)부터 十地(십지)까지를 六聖位(육성위)라 云謂(운위)하는 三賢六聖說(삼현육성설) 等(등)이 有(유)하는 바 筆者(필자)는 五十五位說(오십오위설)과 三賢六聖說(삼현육성설)을 支持(지지)하는 同時(동시)에 五十五位(오십오위)를 漸次(점차)한 次第漸修說(차제점수설)을 打破(타파)하고 內(내)의 五十位(오십위) 에 있어 五位十重(오위십중) 또는 十位五重(십위오중)으로 縱橫(종횡) 觀察(관찰)하야 五蘊皆空(오온개공)을 證(증)하는 境地(경지)로서 곧 五智如來(오지여래)를 成就(성취)하는 方便(방편)이라 云(운)하오니
三界(삼계) 四大(사대)의 色陰(색음)을 걷고 諸法空(제법공)을 證(증)하면 비로소 正信(정신)이 生(생)할새 初信(초신)이오 受陰(수음)을 걷고 二無我(이무아)를 證(증)하면 初發心(초발심)의 歡喜地(환희지)에 住(주)할새 初發心住(초발심주)요 想陰(상음)을 걷고 分別心(분별심)을 除却(제각)하면 如來(여래)의 妙德(묘덕)으로써 十方(시방)에 隨順(수순)하야 歡喜(환희)로 行(행)할새 初歡喜行(초환희행)이오 行陰(행음)을 걷고 一切(일체)에 通(통)하면 一切衆生(일체중생)을 救護(구호)할새 初救護一切衆生廻向(초구호일체중생회향)이오 識陰(식음)을 걷고 처음으로 正覺(정각)에 登(등)하야 歡喜踊躍(환희용약)할새 初歡喜地(초환희지)며 且(차) 加行功德(가행공덕)으로써 初地(초지)를 成就(성취)하면 初信(초신)과 같은 信(신)이 生(생)하고 初住(초주)와 같은 地(지)에 住(주)하고 初行(초행)과 같이 行(행)하고 初廻向(초회향)과 같이 廻向(회향)하나니 餘皆(여개) 倣此(방차)할지오, 加之(가지)에 初, 二地(초, 이지)란 色陰(색음), 三, 四地(삼, 사지)란 受陰(수음), 五, 六地(오, 육지)란 想陰(상음), 七, 八地(칠, 팔지)란 行陰(행음), 九, 十地(구, 십지)란 識陰(식음)을 걷는 等(등)의 果位(과위)로서 加行(가행)이란 因位(인위)일새 勤策修行(근책수행)하야 此等(차등) 五十位(오십위)를 圓滿(원만) 成就(성취)하면 곧 妙覺(묘각)이라 名(명)하니 解脫十六地(해탈십육지)란 菩薩十地(보살십지)를 根幹(근간)으로 하고 聲聞十地(성문십지), 緣覺十地(연각십지), 三乘共十地(삼승공십지), 密敎十地(밀교십지), 瑜伽十七地(유가십칠지), 信, 住, 行, 廻向(신, 주, 행, 회향) 等(등) 四(사)의 十位(십위), 五相成身位(오상성신위), 五忍(오인), 十三觀門(십삼관문), 四加行道(사가행도) 等(등)을 枝葉(지엽)으로 하야 顯密(현밀)을 會通(회통)한지라 修者(수자) ― 初生三歸地(초생삼귀지)하고 乃至(내지) 十六生無餘地(십육생무여지)하야 究竟(구경) 成就(성취)할지니 正(정)히 十六生成佛說(십육생성불설)에 合(합)하니라
(聲聞(성문) + 緣覺(연각) + 菩薩(보살) = 解脫十四地(해탈십사지)까지)
甲申(갑신) 夏(하) 碧山閑人(벽산한인) 撰(찬)
第 二 篇 解脫十六地(해탈십육지)
初, 三歸地(삼귀지)
一切(일체)의 佛陀(불타)는 佛寶(불보), 佛陀(불타)께옵서 說(설)하신 敎法(교법)은 法寶(법보), 그 敎法(교법)에 依(의)하야 修業(수업)하는 者(자)는 僧寶(승보)라 云(운)하니라 佛(불)이란 覺知(각지)의 義(의)요 法(법)이란 法軌(법궤)의 義(의)요 僧(승)이란 和合(화합)의 義(의)며 其性(기성)의 明淨(명정)함과 勢力(세력)의 偉大(위대)함이 最上(최상) 無比(무비)하야 能(능)히 世間(세간)을 莊嚴(장엄)하되 永久不變(영구불변)하야 世界(세계)에 希有(희유)한 故(고)라
三寶(삼보)에 六種(육종)의 義(의)가 有(유)하야
一(일)에 同體三寶(동체삼보)를 一體三寶(일체삼보) 또는 同相三寶(동상삼보)라고도 云(운)하니 三寶(삼보) 一一(일일)의 體(체)에 三寶(삼보)의 義(의)가 有(유)하야 佛(불)의 體上(체상)에 覺照(각조)의 義(의)가 有(유)함은 佛寶(불보), 軌則(궤칙)의 義(의)가 有(유)함은 法寶(법보), 違諍(위쟁)의 過(과)가 無(무)함은 僧寶(승보)며 乃至(내지) 僧(승)에 觀智(관지)가 有(유)함은 佛寶(불보), 軌則(궤칙)이 有(유)함은 法寶(법보) 和合(화합)함은 僧寶(승보)일새요
二(이)에 別相三寶(별상삼보)를 化相三寶(화상삼보) 또는 別體三寶(별체삼보)라고도 云(운)하니 諸佛(제불)의 三身(삼신)을 佛保(불보), 六度(육도)를 法寶(법보), 十聖(십성)을 僧寶(승보)라 云(운)함은 大乘三寶(대승삼보)며 丈六(장육)의 化身(화신)을 佛寶(불보), 四諦(사제), 十二因緣(십이인연)의 法(법)을 法寶(법보), 四果(사과), 緣覺(연각)을 僧寶(승보)라 云(운)함은 小乘三寶(소승삼보)요
三(삼)에 一乘三寶(일승삼보)란 究竟(구경)의 法身(법신)을 佛寶(불보), 一乘(일승)의 法(법)을 法寶(법보), 一乘(일승)의 菩薩衆(보살중)을 僧寶(승보)라 云(운)하니 이는 「勝**經(승만경)」「法華經(법화경)」等(등)의 義(의)요
四(사)에 三乘三寶(삼승삼보)란 三乘者(삼승자)를 爲(위)하사 現(현)하신 不(불)의 三身(삼신)을 佛寶(불보), 三乘(삼승)의 法(법)을 法寶(법보), 三乘(삼승)의 衆(중)을 僧寶(승보)라 云(운)함도 亦是(역시) 「勝**經(승만경)」과 「攝論(섭론)」等(등)의 義(의)요
五(오)에 眞實三寶(진실삼보)란 不(불)의 三身(삼신)을 佛寶(불보), 一切(일체) 無漏(무루)의 敎理行果(교리행과)를 法寶(법보), 見諦(견체) 以上(이상)의 三乘聖衆(삼승성중)을 僧寶(승보)라 云(운)함이오
六(육)에 住持三寶(주지삼보)란 佛滅後(불멸후) 世間(세간)에 住9주)하는 三寶(삼보)로서 木佛(목불), 畵像(화상) 等(등)을 佛寶(불보), 三藏(삼장)의 文句(문구)를 法寶(법보), 剃髮染衣(체발염의)를 僧寶(승보)라 云(운)함이니 一(일), 三(삼), 五(오)의 三種(삼종)은 大乘(대승)에 局限(국한)하고 二(이), 四(사), 六(육)의 三種(삼종)은 大小乘(대소승)에 通(통)하니라
비록 三歸戒(삼귀계)를 初受(초수)할지라도 解脫(해탈)을 目的(목적) 할진댄 반다시 大乘三寶(대승삼보)에 歸依(귀의)할진져
戒(계)란 入道方便(입도방편)이라 不可缺(불가결)이니 戒相(계상)으론 律儀(율의)를 攝(섭)하고 戒德(계덕)으론 大道(대도)에 通(통)할새 五戒(오계)는 戒經(계경)의 首位(수위)로서 爲先(위선) 第一(제일) 不殺生戒(불살생계)에 있어 無生(무생)의 理(리)를 證(증)하면 大乘(대승)이오 不然(불연)하면 小乘(소승)이니라
二, 信願地(신원지)
證前(증전)엔 迷信(미신)이오 證後(증후)엔 正信(정신)이니 願(원)도 迷信(미신)에 根據(근거)하면 俗人(속인)의 願(원)이오 正信(정신)에 立脚(입각)하면 道人(도인)의 願(원)이며 비록 正信(정신)의 發願(발원)이라도 小法(소법)에 止(지)하면 小乘(소승)이오 다시 大願(대원)을 發(발)하야 動搖(동요)가 無(무)하면 大乘(대승)이니 信(신)과 願(원)에 있어 其(기) 宜(의)를 得(득)하야 거듭 成就(성취)할지니라
聲聞十地(성문십지)에 있어 初受三歸地(초수삼귀지)가 곧 初(초) 三歸地(삼귀지)며 二(이) 信地(신지)와 三(삼) 信法地(신법지)가 곧 信願地(신원지)와 等(등)하나 信法(신법)에 있어 生滅四諦(생멸사제)에 局(국)하지 않고 無量四諦(무량사체) 또는 無作四諦(무작사제)를 信(신)하야 藏, 通, 別, 圓(장, 통, 별, 원)의 四敎義(사교의)를 會通(회통)하야 벌써 此地(차지)에서 會三歸一(회삼귀일)의 理(리)를 達(달)하고 究竟(구경) 成就(성취)를 目的(목적)하야 먼저 信心(신심)과 願力(원력)을 成就(성취)하니라
三, 習忍地(습인지)
伏忍(복인), 信忍(신인), 順忍(순인), 無生忍(무생인), 寂滅忍(적멸인) 等(등) 五忍(오인) 中(중) 前(전) 四忍(사인)에 各有(각유) 上, 中, 下(상, 중, 하) 三品(삼품)하고 後(후) 一忍(일인)에 有(유) 上, 下(상, 하) 二品(이품)하니 特(특)히 伏忍(복인)에 있어 上(상)을 道種忍(도종인), 中(중)을 性忍(성인), 下(하)를 習忍(습인)이라 稱(칭)하는 바 聲聞乘(성문승)의 四內凡夫地(사내범부지 : 五停心觀(오정심관)을 修하는 位)나 五(오) 學信戒地(학신계지 : 三學 成就의 位)에 屬(속)하고 緣覺乘(연각승)의 一(일) 苦行具足地(고행구족지 : 戒行을 修하는 位) 二(이) 自覺甚深十二因緣地(자각심심십이인연지 : 十二因緣의 觀法을 修하는 位) 三(삼) 覺了四聖諦地(각료사성제지 : 四諦觀을 修하는 位) 等(등)에 屬(속)하나 三(삼) 習忍地(습인지)란 小乘(소승)의 修法(수법)에 局(국)하지 않고 無量法門(무량법문)으로써 隨機應量(수기응량)하야 修習安忍(수습안인)을 成就(성취)함이니라
四, 加行地(가행지)
어느 修法(수법)이든지 得正(득정)하면 可(가)하니 習忍(습인)을 成就(성취)한 後(후) 依法(의법) 結制(결제)하고(冬安居가 絶好함) 經驗者(경험자)의 外護指導下(외호지도하)에서 一心不亂(일심불란)하야 三密(삼밀)을 守(수)하며 勇猛精進(용맹정진)으로써 間斷(간단)없이 加行(가행)하면 반다시 煖位(난위)에서 明得定(명득정), 頂位(정위)에서 明增定(명증정), 忍位(인위)에서 無間定(무간정)을 次第成就(차제성취)하나니 이를 五相成身位(오상성신위)에 配(배)하면 明得定(명득정)은 通達心(통달심)의 前相(전상)이오 明增定(명증정)은 곧 第一(제일) 通達菩提心位(통달보리심위)며 印順定(인순정)은 第二(제이) 修菩提心位(수보리심위)며 無間定(무간정)은 第三(제삼) 成金剛心位(성금강심위)니 곧 四禪(사선)을 通貫(통관)한 一心支(일심지)로서 그 極點(극점)이 滅盡定(멸진정)일새 無間道(무간도)의 直後(직후)가 解脫道(해탈도)니라
그리고 明得定(명득정)과 明增定(명증정)에서 性忍(성인)을 成就(성취)하나니 이가 共十地(공십지)의 第二(제이) 性地(성지)요 印順定(인순정)에서 道種忍(도종인)을 成就(성취)하나니 이가 共十地(공십지)의 第三(제삼) 八印地(팔인지)인 同時(동시)에 聲聞乘(성문승)의 第六(제육) 八印地(팔인지 : 聲聞 見道의 位)며 性忍과 道種印(도종인)이 아울너 緣覺乘(연각승)의 第四(제사) 甚深利智地(심심이지지 : 甚深의 無相地를 生하는 位)와 第五(제오) 八聖道地(팔성도지 : 八聖道를 修하는 位)와 第六(제육) 覺了法界虛空界衆生界地(각료법계허공계중생계지 : 이의 三界를 覺了하는 位)에 該當(해당)하니라
五, 金剛地(금강지)
菩薩(보살)이 將登正覺(장등정각)할새 皆坐(개좌) 金剛座(금강좌)라 說(설)하신 金剛座(금강좌)란 곧 金剛地(금강지)로서 五相成身位次(오상성신위차)의 第四(제사) 成金剛身位(성금강신위)니 解脫道(해탈도)에 第一步(제일보)를 印(인)한지라 共十地(공십지)의 第四(제사) 見地(견지)요 또 聲聞乘(성문승)의 第七(제칠) 須陀洹地(수다원지 : 預流果의 位)며 緣覺乘(연각승)의 第七(제칠) 證寂滅地(증적멸지 : 緣覺 見道의 位)인 同時(동시)에 第八(제팔) 六通地(육통지 : 六神通을 得하는 位)의 初步(초보)니 換言(환언)하면 五(오) 金剛地(금강지)란 地層(지층)의 最低(최저)인 金剛輪(금강륜)이 獨露(독로)한 境地(경지)로서 鍛鐵(단철)의 去**(거청)함 같고 籠鳥(농조)의 解脫(해탈)함 같이 生死網(생사망)을 出離(출리)하야 衆生身中(중생신중)의 金剛佛性(금강불성)을 見證(견증)한 者(자)니 진실로 本格的(본격적) 肉眼(육안)을 成就(성취)할새 漸次(점차)하야 天眼, 法眼, 慧眼, 佛眼(천안, 법안, 혜안, 불안)을 得(득)할지라 修者(수자)―此地(차지)를 成就(성취)하야사 비로소 金剛薩**(금강살타)라 名(명)하니라
六, 喜樂地(희락지)
三界(삼계)를 九地(구지)로 區分(구분)할새 欲界(욕계)는 五趣(오취)가 不同(부동)하나 同一(동일)의 散地(산지 : 欲界의 果報에 定心이 無함으로 써라)임으로 一地(일지)로 合(합)하고 色界(색계)와 無色界(무색계)를 各(각) 四地(사지)로 分(분)하야 一(일)에 欲界五趣地(욕계오취지)니 欲界內(욕계내)에 地獄, 餓鬼, 畜生, 人, 天(지옥, 아귀, 축생, 인, 천)의 五趣(오취 : 阿修羅는 天에 攝함)가 有(유)한바 이를 合(합)하야 一地(일지)를 成(성)한 者(자)며 二(이)에 離生喜樂地(이생희락지)니 欲界(욕계)의 生(생)을 離(이)함에 因(인)하야 喜受(희수)와 樂受(낙수)가 生(생)하는 地(지)로서 眼, 耳, 身, 意(안, 이, 신, 의)의 四識(사식)만이 有(유)하고 鼻, 舌(비, 설) 二識(이식)이 無(무)함으로 無分別(무분별)의 樂受(낙수)가 相應(상응)하야 意識(의식)에 有分別(유분별)의 喜受(희수)가 相應(상응)하니 곧 色界(색계)의 初禪天(초선천)이며 三(삼)에 定生喜樂地(정생희락지)니 初禪定(초선정)의 喜樂(희락)을 因(인)으로 하고 更(갱)의 勝妙(승묘)의 喜樂(희락)이 生(생)하는 地(지)로서 此地(차지) 已上(이상)엔 總(총)히 五識(오식 :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을 離(이)하고 但(단) 意識(의식)만이 有(유)함으로 或(혹) 喜受(희수)가 相應(상응)하고 或(혹) 樂受(락수)가 相應(상응)하니 곧 二禪天(이선천)이며 四(사)에 離喜妙樂地(이희묘락지)니 喜受(희수) 오히려 心(추심)이므로 二禪(이선)의 喜(희)를 離(이)하고 獨(독)히 靜妙無分別(정묘무분별)의 樂(락)에 住(주)하는 地(지)로서 곧 三禪天(삼선천)이며 五(오)에 捨念淸淨地(사념청정지)니 樂修(낙수) 오히려 粗心(조심)임으로 이를 離(이)하고 淸淨無爲(청정무위)한 捨受(사수)의 念(념)에 住(주)하는 地(지)로서 곧 四禪天(사선천)이며 (以上 四地의 色界임) 六(육)에 空無邊處地(공무변처지)니 色界(색계)의 色(색)을 厭(염)하야 空(공)을 思(사)하되 空(공)에 邊際(변제)가 無(무)한 觀解(관해)를 作(작)하는 者(자)가 生(생)하는 地(지)로서 卽(즉) 無色界(무색계)의 第一天(제일천)이며 七(칠)에 識無邊處地(식무변처지)니 前(전)의 外空(외공)을 厭(염)하야 內識(내식)을 思(사)하되 識(식)에 邊際(변제)가 無(무)한 觀解(관해)를 作(작)하는 者(자)가 生(생)하는 地(지)로서 卽(즉) 無色界(무색계)의 第二天(제이천)이며 八(팔)에 無所有處地(무소유처지)니 前(전)의 內識(내식)을 厭(염)하고 無所有(무소유)를 思(사)하되 無所有(무소유)의 觀解(관해)를 作(작)하는 者(자)가 生(생)하는 地(지)로서 卽(즉) 無色界(무색계)의 第三天(제삼천)이며 九(구)에 非想非非想處地(비상비비상처지)니 前地(전지)와 如(여)한 **相(추상)이 無(무, 非想)하고 極(극)히 微細(미세)한 想念(상념 : 非非想)이 有(유)하는 地(지)라 卽(즉) 無色界(무색계)의 第四天(제사천)으로서 三界(삼계) 中(중) 第一(제일)의 果報(과보)니라.
蓋(개) 無色界(무색계)를 識界(식계), 色界(색계)를 根界(근계), 欲界(욕계)를 境(경, 塵)界(계)로 區分(구분)할 수 있으나 各界(각계)가 各具(각구) 三界(삼계)하야 橫(횡)으론 區分(구분)할 수 없고 縱(종)으로 分位(분위)한다면 欲境界(욕경계)를 **塵三界(추진삼계), 色根界(색근계)를 細塵三界(세진삼계), 無色識界(무색식계)를 極微三界(극미삼계)라 稱(칭)할가, 何如間(하여간) 三界(삼계)란 根, 境, 識(근, 경, 식)의 別稱(별칭)으로서 相的(상적)으론 境(경)이오 性的(성적)으론 根(근)이며 分別的(분별적)으론 識(식)일새 五蘊(오온)이 各具(각구) 五蘊(오온)하야 區別(구별)키 難(난)하나 一如(일여)한 中(중)에 性相(성상)이 分明(분명)하니 了別(요별)이 不無(불무)니라
修者(수자)―金剛座(금강좌)에 坐(좌)하야 空無邊處(공무변처)를 觀念(관념)하면 離生喜樂地(이생희락지)에 到(도)하고 識無邊處(식무변처)를 觀念(관념)하면 定生喜樂地(정생희락지)에 無所有處(무소유처)를 觀念(관념)하면 離喜妙樂地(이희묘락지)에 非想非非想處(비상비비상처)에 住(주)하면 邪念淸淨地(사념청정지)에 到(도)할새 六(육) 喜樂地(희락지)란 離生喜樂(이생희락)과 定生喜樂(정생희락)이 生(생)하는 地(지)로서 聲聞乘(성문승)의 第八(제팔) 斯陀含地(사다함지, 一來果의 位)와 共十地(공십지)의 第五(제오) 薄地(박지)에 該當(해당)하고 五(오) 金剛地(금강지)와 六(육) 喜樂地(희락지)를 合(합)해서 菩薩乘(보살승)의 初(초) 歡喜地(환희지)에 當(당)하니라
七, 離坵地(이구지)
離喜妙樂(이희묘락)의 境界(경계)를 거쳐 捨念淸淨地(사념청정지)에 到(도)하는 地(지)니 聲聞乘(성문승)의 九(구) 阿那含地(아나함지, 不還果의 位)에 當(당)하고 菩薩乘(보살승)의 第二地(제이지)에 合(합)하며 共十地(공십지)의 第六(제육) 離欲地(이욕지)에 當(당)하니라
八, 發光地(발광지)
加行功德(가행공덕)으로 一時的(일시적)으로 三界(삼계)를 出離(출리)하매 心光(심광)이 發(발)하야 九次第定(구차제정)의 極位(극위)인 滅受相定(멸수상정 : 滅盡定(멸진정))을 비로소 吟味(음미)하는 地(지)니 菩薩乘(보살승)의 第三地(제삼지)에 合(합)하니라.
九, 精進地(정진지)
菩薩十地(보살십지)에서 十波羅密(십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十眞如(십진여)를 證(증)하니
歡喜地(환희지)에서 施波羅密(시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遍行眞如(변행진여 : 我, 法 二空(아, 법 이승)의 所顯(소현)으로서 諸法(제법)에 通行(통행)함으로)를 證(증)하며
離垢地(이구지)에서 戒波羅密(계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最勝眞如(최승진여 : 無邊(무변)의 德(덕)을 具足(구족)하야 一切法(일체법)에서 最勝(최승)함으로)를 證(증)하며
發光地(발광지)에서 忍辱波羅密(인욕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勝流眞如(승류진여 : 此(차) 眞如(진여) 所流(소류)의 敎法(교법)이 至極(지극)히 殊勝(수승)함으로)를 證(증)하며
慧地(염혜지)에서 精進波羅密(정진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無攝受眞如(무섭수진여 : 繫屬(계속)한 바 無(무)하야 我執(아집) 等)등)에 依(의)하고 또 取(취)하는 바 않임으로)를 證(증)하며
難勝地(난승지)에서 禪定(선정 : 精慮(정려))波羅密(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無別眞如(무별진여 : 差別(차별)의 類(유)가 無(무)하야 眼(안) 等(등)의 異類(이류)가 有(유)함과 如(여)함이 않임으로)를 證(증)하며
現前地(현전지)에서 般若波羅密(반야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無染淨眞如(무염정진여 : 本性(본성)이 無染(무염)한지라 後(후)에 다시 淨(정)해진다고 說(설)할 수 없음으로)를 證(증)하며
遠行地(원행지)에서 方便善巧(방편선교 : 回向方便善巧(회향방편선교)와 拔濟方便善巧(발제방편선교))波羅密(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法無別眞如(법무별진여 : 多數法(다수법)에 種種(종종)으로 安立(안립)하되 別異(별이)가 無(무)함으로)를 證(증)하며
不動地(부동지)에서 願(원 : 求菩提願(구보리원)과 利樂他願(이락타원))波羅密(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不增減眞如(부증감진여 : 增減(증감)의 執(집)을 離(이)하야 淨染(정염)에 따라 增減(증감)됨이 않임으로)를 證(증)하는 同時(동시)에 또 相土自在所依眞如(상토자재소의진여)를 證(증)할 수 있으니 이를 證得已(증득이)하면 身相(신상)을 現(현)하고 國土(국토)를 示(시)함에 自在(자재)하며
善彗地(선혜지)에서 力(력 : 修習力(수습력)과 思擇力(사택력))波羅密(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智(지 : 受用法樂地(수용법락지)와 成熟有情地(성숙유정지))自在所依眞如(자재소의진여)를 證(증)하니 이를 證得已(증득이)하면 無碍解(무애해)에 自在(자재)를 得(득)하며
法雲地(법운지)에서 智波羅密(지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業自在等所依眞如(업자재등소의진여)를 證得已(증득이)하면 普(보)히 一切 神通(일체 신통)의 作業多羅尼定門(작업다라니정문)에서 皆(개) 自在(자재)를 得(득)하니라
眞如性(진여성)은 實(실)로 差別(차별)이 無(무)하니 勝德(승덕)에 따라 十種(십종)을 假立(가립)하나니 菩薩初地(보살초지) 中(중)에서 이미 一切(일체)에 達(달)하야 能(능)히 證行(증행)할 수 있지만 아직 圓滿(원만)치 못함으로 圓滿(원만)하기 爲(위)함인져
解脫十六地(해탈십육지)에 있어 七, 八, 十一(칠, 팔, 십일)의 三地(삼지)는 菩薩(보살)十地(십지)의 二, 三, 六(이, 삼, 육)의 三地名(삼지명) 그대로, 九, 十(구, 십)의 二地(이지)는 十波羅密(십바라밀) 中(중) 四, 五(사, 오)의 冠詞(관사)를 引用(인용)하고 十二, 十三, 十四, 十五, 十六(십이, 십삼, 십사, 십오, 십육)의 五地(오지)는 瑜伽十七地(유가십칠지) 中(중) 十三(십삼) 聲聞地(성문지) 十四(십사) 獨覺地(독각지) 十五(십오) 菩薩地(보살지) 十六(십육) 有餘依地(유여의지) 十七(십칠) 無餘依地(무여의지) 等(등)과 共十地(공십지)의 七(칠) 聲聞地(성문지) 八(팔) 支拂地(지불지) 九(구) 菩薩地(보살지) 十(십) 佛地(불지) 等(등)을 參酌(참작)한 者(자)니 對照(대조)할진져
十, 禪定地(선정지)
菩薩乘(보살승)의 五(오) 難勝地(난승지)에 當(당)함
十一, 현전지(現前地)
菩薩乘(보살승)의 六(육) 現前地(현전지)에 合(합)함
十二, 羅漢地(나한지)
聲聞乘(성문승)의 極果(극과)인 十(십) 阿羅漢地(아라한지) 卽(즉) 無學果(무학과)의 位(위)와 緣覺乘(연각승)의 九(구) 徹和蜜地(철화밀지) 卽(즉) 無學果(무학과)를 證(증)하는 位(위)와 菩薩乘(보살승)의 七(칠) 遠行地(원행지)와 十共地(십공지)의 七(칠) 已辨地(이변지) 卽(즉) 阿羅漢果(아라한과)의 位(위)에 當(당)할새니라
十三, 支拂地(지불지)
緣覺乘(연각승)의 極果(극과)인 十(십) 習氣漸薄地(습기점박지)로서 習氣(습기)를 侵害(침해)하는 位(위)니 共十地(공십지)의 八(팔) 支拂地(지불지)에 合(합)하고 證理邊(증리변)으론 菩薩乘(보살승)의 八(팔) 不動地(부동지)에 當(당)하니라
十四, 菩薩地(보살지)
菩薩乘(보살승)의 九(구) 善彗地(선혜지)와 共十地(공십지)의 九(구) 菩薩地(보살지)에 合當(합당)하니라
十五, 有餘地(유여지)
瑜伽十七地(유가십칠지) 中(중) 第十六(제십육) 有餘依地(유여의지)의 略稱(약칭)으로서 菩薩乘(보살승)의 終地(종지)인 十(십) 法雲地(법운지)에 當(당)하고 共十地(공십지)론 九(구) 菩薩地(보살지)에 攝(섭)하며 또 等覺位(등각위)도 이에 含容(함용)되나 因位(인위)의 等覺(등각)이란 五十位(오십위)의 總代名詞(총대명사)라 云謂(운위)할 수 있음으로 이를 略(약)함
十六, 無餘地(무여지)
瑜伽十七地(유가십칠지)의 終位(종위)인 無餘依地(무여의지)의 略稱(약칭)으로서 共十地(공십지)의 十(십) 佛地(불지)에 當(당)하는 妙覺(묘각)의 位(위)니 四覺(사각) 中(중) 本覺(본각)을 除(제)하고 十六地(십육지)에 按配(안배)하면 이가 究竟覺(구경각)이오 四地(사지)까지가 相似覺(상사각) 五地(오지)부터 隨分覺(수분각)이며 五忍(오인)으로 按配(안배)하면 四地(사지)까지 伏忍(복인), 八地(팔지)까지 信忍(신인), 十一地(십일지)까지 順忍(순인), 十四地(십사지)까지 無生忍(무생인), 終二地(종이지)가 寂滅忍(적멸인)으로서 三地(삼지)까지가 下伏忍(하복인 : 習忍(습인)), 四(사) 加行地(가행지) 中(중) 明得定(명득정)과 明增定(명증정)이 中伏忍(중복인 : 性忍)), 印順定(인순정)이 上伏忍(상복인 : 道種忍)), 五, 六(오, 육) 合地(합지)가 下信忍(하신인), 七地(칠지)가 中信忍(중신인), 八地(팔지)가 上信忍(상신인), 九地(구지)가 下順忍(하순인), 十地(십지)가 中順忍(중순인), 十一地(십일지)가 上順忍(상순인), 十二地(십이지)가 下無生忍(하무생인), 十三地(십삼지)가 中無生忍(중무생인), 十四地(십사지)가 上無生忍(상무생인), 十五地(십오지)가 下寂滅忍(하적멸인), 十六地(십육지)가 上寂滅忍(상적멸인)인 바 이를 十四忍(십사인)이라고도 云(운)하고 上寂滅忍(상적멸인)을 除(제)하야 十三觀門(십삼관문)이라고도 謂(위)하나니
且 空, 性, 相(차 공, 성, 상) 三宗(삼종)은 元來(원래) 橫的(횡적)으로 揀別(간별)할 바 않이오, 縱的(종적)으로 그 程度(정도)를 各示(각시)한다면 伏, 信, 順(복, 신, 순) 等(등) 三忍(삼인)은 相宗(상종)이오 無生忍(무생인)은 性宗(성종)이며 寂滅忍(적멸인)은 空宗(공종)이니라 그리고 四加行位, 十信, 十住, 十行, 十廻向, 十地, 等覺, 妙覺 等(사가행위,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등) 諸位(제위)를 都合(도합)한 五十六位說(오십육위설), 等覺位(등각위)를 除(제)한 五十五位說(오십오위설), 四加行位(사가행위)를 除(제)한 五十二位(오십이위) 或(혹) 五十一位說(오십일위설), 十信位(십신위)를 外凡夫位(외범부위)라 하야 이를 除(제)한 四十二位(사십이위) 或(혹) 四十一位說(사십일위설) 等(등)이 有(유)하고 且(차) 十住, 十行, 十廻向(십주, 십행, 십회향)을 內凡夫位(내범부위) 或(혹) 三賢位(삼현위)라 云(운)하며 十地(십지)를 十聖位(십성위)라 謂(위)하는 三賢十聖說(삼현십성설), 初, 二, 三地(초, 이, 삼지)를 三賢位(삼현위), 四地(사지)를 入聖之門(입성지문), 五地(오지)부터 十地(십지)까지를 六聖位(육성위)라 云謂(운위)하는 三賢六聖說(삼현육성설) 等(등)이 有(유)하는 바 筆者(필자)는 五十五位說(오십오위설)과 三賢六聖說(삼현육성설)을 支持(지지)하는 同時(동시)에 五十五位(오십오위)를 漸次(점차)한 次第漸修說(차제점수설)을 打破(타파)하고 內(내)의 五十位(오십위) 에 있어 五位十重(오위십중) 또는 十位五重(십위오중)으로 縱橫(종횡) 觀察(관찰)하야 五蘊皆空(오온개공)을 證(증)하는 境地(경지)로서 곧 五智如來(오지여래)를 成就(성취)하는 方便(방편)이라 云(운)하오니
三界(삼계) 四大(사대)의 色陰(색음)을 걷고 諸法空(제법공)을 證(증)하면 비로소 正信(정신)이 生(생)할새 初信(초신)이오 受陰(수음)을 걷고 二無我(이무아)를 證(증)하면 初發心(초발심)의 歡喜地(환희지)에 住(주)할새 初發心住(초발심주)요 想陰(상음)을 걷고 分別心(분별심)을 除却(제각)하면 如來(여래)의 妙德(묘덕)으로써 十方(시방)에 隨順(수순)하야 歡喜(환희)로 行(행)할새 初歡喜行(초환희행)이오 行陰(행음)을 걷고 一切(일체)에 通(통)하면 一切衆生(일체중생)을 救護(구호)할새 初救護一切衆生廻向(초구호일체중생회향)이오 識陰(식음)을 걷고 처음으로 正覺(정각)에 登(등)하야 歡喜踊躍(환희용약)할새 初歡喜地(초환희지)며 且(차) 加行功德(가행공덕)으로써 初地(초지)를 成就(성취)하면 初信(초신)과 같은 信(신)이 生(생)하고 初住(초주)와 같은 地(지)에 住(주)하고 初行(초행)과 같이 行(행)하고 初廻向(초회향)과 같이 廻向(회향)하나니 餘皆(여개) 倣此(방차)할지오, 加之(가지)에 初, 二地(초, 이지)란 色陰(색음), 三, 四地(삼, 사지)란 受陰(수음), 五, 六地(오, 육지)란 想陰(상음), 七, 八地(칠, 팔지)란 行陰(행음), 九, 十地(구, 십지)란 識陰(식음)을 걷는 等(등)의 果位(과위)로서 加行(가행)이란 因位(인위)일새 勤策修行(근책수행)하야 此等(차등) 五十位(오십위)를 圓滿(원만) 成就(성취)하면 곧 妙覺(묘각)이라 名(명)하니 解脫十六地(해탈십육지)란 菩薩十地(보살십지)를 根幹(근간)으로 하고 聲聞十地(성문십지), 緣覺十地(연각십지), 三乘共十地(삼승공십지), 密敎十地(밀교십지), 瑜伽十七地(유가십칠지), 信, 住, 行, 廻向(신, 주, 행, 회향) 等(등) 四(사)의 十位(십위), 五相成身位(오상성신위), 五忍(오인), 十三觀門(십삼관문), 四加行道(사가행도) 等(등)을 枝葉(지엽)으로 하야 顯密(현밀)을 會通(회통)한지라 修者(수자) ― 初生三歸地(초생삼귀지)하고 乃至(내지) 十六生無餘地(십육생무여지)하야 究竟(구경) 成就(성취)할지니 正(정)히 十六生成佛說(십육생성불설)에 合(합)하니라
(聲聞(성문) + 緣覺(연각) + 菩薩(보살) = 解脫十四地(해탈십사지)까지)
甲申(갑신) 夏(하) 碧山閑人(벽산한인) 撰(찬)
第 三 篇 首楞嚴三昧圖訣 上篇
本訣(본결)은 心(심)으로 爲宗(위종)일새 空(공)으로 爲體(위체)요 性相(성상)으로 爲用(위용)이라 此(차)에 基(기)하야 圖示(도시)한 首楞嚴三昧(수릉엄삼매)의 境界圖(경계도)를 了解(요해)케 함인져
序分(서분)의 名句文(명구문)
「諸行(제행)」二字(이자)는 名(명)이오 「諸行無常(제행무상)」四字(사자)는 句(구)며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十六字(십육자)는 文(문)일새 自性(자성)의 體(체)를 詮(전)함이 名(명)이오 義(의)를 顯(현)함이 句(구)며 體用齊示(체용제시)의 文字(문자)가 文(문)이니 本編(본편)은 首楞嚴三昧圖(수릉엄삼매도)에 擧示(거시)한 佛祖(불조)의 若干(약간) 名句(명구)를 原文(원문) 或(혹)은 찬文(찬문)으로써 引證(인증)하야 本訣(본결)의 序分(서분)에 代(대)함이니라
第 一 章 首楞嚴(수릉엄)
「首楞嚴三昧經(수능엄삼매경)」中(중)에 「菩薩(보살)이 得(득) 首楞嚴三昧(수릉엄삼매)하면 能以三千大天世界(능이삼천대천세계)로 入芥子中(입개자중)하야 令諸山河日月星宿(영제산하일월성수)로 悉現(실현)케 하되 如故而不迫**(여고이불박책)하야 示諸衆生(시제중생)하나니 首楞嚴三昧(수릉엄삼매)의 不可思議勢力(불가사의세력)이 如是(여시)라」시고 「智度論(지도론)」四十七(사십칠)에 「首楞嚴三昧者(수릉엄삼매자)는 秦言(진언) 健相(건상)이니 分別知諸三昧行相多少淺深(분별지제삼매행상다소천심)함이 如大將知諸兵力多少(여대장지제병력다소)라」하고 「復次(부차) 菩薩(보살)이 得此三昧(득차삼매)하면 諸煩惱魔及魔人(제번뇌마급마인)이 無能壞者(무능괴자)하나니 譬如(비여) 轉輪聖王主兵寶將(전륜성왕주병보장)의 所往至處(소왕지처)에 無能壞伏(무능괴복)」이랐으며 「玄應音義(현응음의)」二十三(이십삼)에 「首楞此云健行定(차운건행정)이오 亦言(역언) 健相(건상)인바 舊云首楞嚴也(구운수릉엄야)」랐고 「涅槃經(열반경)」二十七(이십칠)에 「首楞嚴者(수릉엄자)는 名一切事竟(명일체사경)이니 嚴者(엄자)는 名堅(명견)이라 一切畢竟而得堅固(일체필경이득견고)함을 名首楞嚴(명수릉엄)일새 以是故(이시고)로 言首楞嚴定(언수능엄정)이며 名爲佛性(명위불성)이니 首楞嚴三昧者-有五種名(수릉엄삼매자-유오종명)하야 一者(일자) 首楞嚴三昧(수릉엄삼매)요 二者(이자) 般若波羅密(반야바라밀)이오 三者(삼자) 金剛三昧(금강삼매)요 四者(사자) 獅子吼三昧(사자후삼매)요 五者(오자) 佛性(불성)이라 隨其所作處處(수기소작처처)에 得名(득명)이라」시니 首楞嚴(수릉엄)이란 新云(신운) 首楞伽摩(수릉가마)로서 健相(건상)이라 健行(건행)이라 一切事竟(일체사경)이라 譯(역)한 佛所得(불소득)의 三昧名(삼매명)인바 健相(건상)이란 佛德(불덕)이 堅固(견고)하사 諸魔(제마)가 能壞(능괴)치 못함일새요 健行(건행)이란 諸佛修行(제불수행)이 如金剛般若行(여금강반야행)임으로 써요 一切事竟(일체사경)이란 佛德(불덕)의 究竟(구경)을 云(운)함이니 換言(환언)하면 一實相(일실상)인 一相(일상)이오 一相(일상)인 健相(건상)일새 곧 首楞嚴(수릉엄)이란 먼저 觀念的(관념 ? 一相三昧(일상삼매)로써 健相(건상)인 實相(실상)을 見證(견증)하고 健行(건행)인 般若一行(반야일행)으로써 理事(리사)를 契合(계합)하되 如金剛(여금강)의 堅固(견고)를 得(득)하야 卽理卽事(즉리즉사)인 一切事(일체사)에 通達究竟(통달구경)함이니라
第 一 節 一行과 一相(일행과 일상)
「三藏法數(삼장법수)」四(사)에 「一行三昧者(일행삼매자)는 惟專一行(유전일행)하야 修習正定也(수습정정야)」랐고 「文殊般若經(문수반야경)」下(하)에 「法界(법계)는 一相(일상)이니 繫緣法界(계연법계)함이 是名一行三昧(시명일행삼매)라」시고 「入一行三昧者(입일행삼매자)는 盡知恒沙諸佛法界(진지항사제불법계)-無差別相(무차별상)이라」하사 「善男子 善如人(선남자 선여인)이 欲入一行三昧(욕입일행삼매)인댄 應處空閒(응처공한)하야 捨諸亂意(사제란의)하고 不取相貌(불취상모)하며 繫心一佛(계심일불)하야 專稱名字(전칭명자)하면서 隨佛方所(수불방소)하야 端身正向(단신정향)하되 能於一佛(능어일불)이 念念相續(염념상속)하면 卽時(즉시) 念中(염중)에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능견과거미래현재제불)이라」시니 「起信論(기신론)」에 「依是三昧故(의시삼매고)로 則知法界一相(즉지법계일상)일새 謂一切諸佛(위일체제불)의 法身與衆生身(법신여중생신)이 平等無二(평등무이)라 卽名一行三昧(즉명일행삼매)니 當知(당지)하라 眞如(진여)-是三昧根本(시삼매근본)」이랐고 「六祖壇經(육조단경)」에 「若於一切處(약어일체처)의 行住坐臥(행주좌와)에 純一直心(순일직심)이 不動道場(부동도량)하면 直成淨土(직성정토)니 此名一行三昧(차명일행삼매)」랐고 「若於一切處(약어일체처)하되 而不住相(이부주상)하고 於彼相中(어피상중)하되 不生憎愛(불생증애)하며 亦無取捨(역무취사)하고 不念利益成壞等事(불념이익성괴등사)하야 安閒恬靜(안한염정)하면 虛融澹泊(허융담박)일새-此一相三昧(차일상삼매)」랐으며 「維摩經(유마경)」弟子品(제자품)에 「不壞於身(불괘어신)하고 而隨一相(이수일상)」이라심의 註(주)에 肇曰(조왈)「萬物(만물)이 齊旨(제지)라 是非同觀(시비동관)이 一相也(일상야)니라 然則(연즉) 身卽一相(신즉일상)이어니 豈待壞身滅體而後(기대괴신멸체이후)에 謂之一相乎(위지일상호)아」하였고 「法華經(법화경)」譬喩品(비유품)에 「是皆一相(시개일상)인 一種(일종)임을 聖所稱嘆(성소칭탄)이라」시고 「文句(문구)」七上(칠상)에 「一相者(일상자)는 衆生之心(중생지심)이라 同一眞如相(동일진여상)일새 是一地也(시일지야)요 一味者(일미자)는 一乘之法(일승지법)이니 同詮一里(동전일리)라 是一雨也(시일우야)」랐고 「法華經義疎(법화경의소)」八(팔)에 「一相(일상)이란 謂一實相(위일실상)이라 合一地也(합일지야)요 一味(일미)란 謂一智(위일지)의 味(미)라 合上一雨也(합상일우야)」랐고 「智度論(지도론)」二十七(이십칠)에 「一相(일상)이란 所謂(소위) 無相(무상)」이랐으니
換言(환언)하면 一相(일상)이란 觀的(관적)이요 一行(일행)이란 念的(념적)이다 假令(가령) 無邊虛空(무변허공)에 淨水(정수)가 充滿(충만)한데 一切(일체)는 泡沫(포말)이라 觀(관)함은 一相三昧(일상삼매)요 念(념)함은 一行三昧(일행삼매)며 無數衆生(무수중생)의 無常諸行(무상제행)을 彌陀(미타)의 一大行相(일대행상)이라 觀(관)함은 一相三昧(일상삼매)요 念(념)함은 一行三昧(일행삼매)다 그리하야 一相三昧(일상삼매)와 一行三昧(일행삼매)의 根本(근본)은 一(일)이오 根本(근본)을 求索(구색)하는 方法(방법)은 限(한)이 없다
一切(일체)를 水銀(수은)의 算珠(산주)로, 形形(형형)의 氷塊(빙괴)로, 色色(색색)의 畵幅(화폭)으로, 幻師(환사)의 幻術(환술)로, 鍮物(유물)의 飯床器(반상기)로, 鉢盂內(발우내)의 白飯(백반)으로, 虛空(허공)의 浮雲(부운)으로, 鐵物(철물)의 酸**(산청)으로, 陽炎(양염)으로, 水月(수월)로, 또는 其他(기타)의 種種千萬(종종천만)에서 오직 合法的(합법적)임을 隨緣決擇(수연결택)하고 그 話頭(화두)의 一境(일경)에 心(심)을 住(주)하야써 觀而念之(관이염지)하면 假觀的(가관적) 一相三昧(일상삼매)가 因(인)이 되야 果(과)의 實相(실상)을 見(견)하고 念修的(념수적) 一行三昧(일행삼매)가 因(인)이 되야 果(과)의 普賢境(보현경)을 證(증)하니라
第 二 節 三昧(삼매)
三昧(삼매)란 三摩提(삼마제) 또는 三摩帝(삼마제)라고도 云(운)하고 心(심)을 一處(일처)에 住(주)하야 不動(부동)함일새 定(정)이라, 所觀(소관)의 法(법)을 正受(정수)함일새 正受(정수)라, 暴心(폭심)으르 調伏(조복)하고 曲心(곡심)을 調直(조직)하야써 散心(산심)을 調定(조정)함일새 調直定(조직정)이라, 心行(심행)을 正法(정법)에 合(합)하는 依處(의처)일새 正心行處(정심행처)라 緣慮(연려)를 息止(식지)하고 心念(심념)을 凝結(응결)함일새 息慮凝心(식려응심)이라, 心(심)을 平等保持(평등보지)함일새 等持(등지)라, 定中(정중)에 法樂(법락)을 現(현)함일새 現法樂住(현법락주)라, 또 利他的(이타적)으로 보아 諸佛諸菩薩(제불제보살)이 有情界(유정계)에 入(입)하사 平等護念(평등호념)하심일새 等念(등념)이라고도 譯(역)하는 바 要(요)컨대 正三昧(정삼매)란 合法的(합법적)인 一話頭(일화두)를 誠心(성심)으로써 思惟觀察(사유관찰)하되 勤續不絶(근속부절)이 必要(필요)하니라
第 二 章 般若波羅密(반야바라밀)
般若波羅密(반야바라밀)이란 六波羅密(육바라밀)이나 十波羅密(십바라밀) 中(중) 第六(제육)의 共稱(공칭)으로서 諸波羅密(제바라밀) 中(중) 最爲第一(최위제일)일새 六波羅密(육바라밀)이란 곧 六根, 六境, 六識(육근, 육경, 육식)의 諸法(제법)이 本空(본공)한 그의 實相智(실상지)로써 到彼岸(도피안)함이오 十波羅密(십바라밀)이란 곧 十(십)은 滿數(만수)라 彼(피) 實相智(실상지)의 般若行(반야행)이 成滿(성만)하여야 事究竟(사구경)함이니 各其(각기) 次第(차제)를 觀示(관시)하야써 般若(반야)의 用(용)을 大別(대별)함이니라
第 一 節 般若(반야)
般若(반야)를 班若(반야), 波若(바야), 鉢若(발야), 般羅若(반라야), 鉢羅枳孃(반라기양), 般賴若(반뢰야), 鉢腎孃(발신양), 波羅孃(바라양)이라고도 云(운)하고 慧(혜)라, 智慧(지혜)라, 明(명)이라 譯(역)하는 바 一切(이체) 虛妄相(허망상)을 離(이)한 般若(반야)의 實性(실성) 곧 衆生(중생)에게 本具(본구)한 所證(소증)의 理體(리체)를 實相般若(실상반야)라 하고 實相(실상)을 觀照(관조)하는 實智(실지)를 方便般若(방편반야) 또는 文字般若(문자반야)라 하야 已上(이상)을 三般若(삼반야)라 하고 般若(반야)의 眞智(진지)는 所緣(소연)인 一體諸法(일체제법)이 境界(경계)가 됨일새 四(사)에 境界般若(경계반야), 五(오)에 煖, 頂, 忍, 世第一法(난, 정, 인, 세제일법) 等(등)의 諸智(제지) 及(급) 戒, 定, 慧, 解脫, 解脫知見(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 等(등)이 觀照般若(관조반야)인 同時(동시)에 慧性(혜성)의 眷屬(권속)이 됨일새 此(차)를 眷屬般若(권속반야)라하야 都合(도합) 五種般若(오종반야)라 稱(칭)하는 바 體(체)는 一(일)이오 用(용)은 無數(무수)니라
第 二 節 波羅密(바라밀)
波羅密(바라밀)은 波羅密多(바라밀다) 또는 播****多(파라미다)라고도 云(운)하는 菩薩大行(보살대행)의 名稱(명칭)이니 有住相(유주상)의 善行(선행)보다 無住相(무주상)의 大行(대행)임으로 써라 菩薩(보살)의 大行(대행)은 能(능)히 一切(일체) 自行化他(자행화타)의 事(사)에 究竟(구경)함일새 事究竟(사구경)인져 此(차) 大行(대행)을 乘(승)하고 能(능)히 生死(생사)의 此岸(차안)에서 涅槃(열반)의 彼岸(피안)에 到(도)함일새 到彼岸(도피안)이라 此(차) 大行(대행)을 因(인)하야 能(능)히 諸法(제법)의 廣遠(광원)을 度(도)함일새 度無極(도무극) 또는 度(도)라 譯(역)하야 財施, 無畏施, 法施(재시, 무외시, 법시)의 大行(대행)을 布施(보시)j 또는 檀波羅密(단바라밀)이라 하고 在家, 出家, 小乘, 大乘(재가, 출가, 소승, 대승)의 一切(일체) 戒律(계율)을 能持(능지)하는 大行(대행)을 持戒(지계) 또는 尸波羅密(시바라밀)이라 하고 一切(일체) 有情(유정)의 罵辱, 擊打(매욕, 격타) 等(등) 또는 非情(비정)의 寒, 熱, 飢, 渴(한, 열, 기, 갈) 等(등)을 能(능)히 忍受(인수)하는 大行(대행)을 忍辱(인욕) 또는 **提波羅密(찬제바라밀)이라 하고 身心(신심)을 精勵(정려)하야 前後(전후)의 五波羅密(오바라밀)을 進修(진수)하는 大行(대행)을 精進(정진) 또는 毘梨耶波羅密(비리야바라밀)이라 하고 眞理(진리)를 思惟(사유)하야써 證前(증전)엔 散亂心(산란심)을 定止(정지)하는 要法(요법)이 되고 證後(증후)엔 入定(입정)의 大行(대행)이 될새 此(차)를 禪定(선정) 또는 禪波羅密(선바라밀)이라 하고 비로소 斷惑證理(단혹증리)하면 入道(입도)요 入道後(입도후) 諸法(제법)에 通達(통달)하면 大行(대행)일새 此(차)를 智慧(지혜) 또는 般若波羅密(반야바라밀)이라 하 니 此(차) 六大行(육대행)을 兼具(겸구)한 菩薩(보살)이 自利利他(자리이타)를 成滿(성만)하야 涅槃岸(열반안)에 到(도)하나니 名(명)이 究竟(구경)이니라
第 三 節 十波羅密(십바라밀)과 菩薩十地(보살십지)
初(초)엔 菩薩(보살)이 이미 貪心(탐심) 三分二(삼분이)를 除(제)하고 見惑(견혹)을 破(파)할새 비로소 聖性(성성)을 得(득)하야 我, 法(아, 법) 二空(이공)의 理(리)를 證(증)하고 大歡喜(대환희)를 生(생)하니 歡喜地(환희지)요 同時(동시)에 一切(일체)를 救護(구호)하야써 無住相(무주상)의 布施(보시)를 行(행)하고 此(차)에 基(기)하야 涅槃岸(열반안)에 到(도)할새 檀波羅密(단바라밀)을 成就(성취)함이오
二(이)엔 殘餘(잔여) 一分(일분)의 貪心(탐심)을 除(제)함에 따라 일찍히 見惑(견혹)에 基(기)하였든 思惑(사혹)을 除(제)하는 同時(동시)에 戒波羅密(계바라밀)을 成就(성취)할새 毁犯(훼범)의 垢(구)를 離(이)한 身(신)으로 하야금 思念(사념)이 淸淨(청정)하니 離垢地(이구지)요
三(삼)엔 嗔心(진심)을 抑制(억제)하고 忍辱波羅密(인욕바라밀)을 成就(성취)하야써 諦察法忍(체찰법인)을 得(득)하니 智慧-顯發(지혜-현발)할새 發光地(발광지)요
四(사)엔 精進波羅密(정진바라밀)을 成就(성취)하니 慧性(혜성)으로 하야금 熾盛(치성)케 할새 **慧地(염혜지)요
五(오)엔 嗔心(진심)의 根本(근본)이 除去(제거)되는 同時(동시)에 禪定波羅密(선정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理事(리사)를 契合(계합)하야써 眞俗二智(진속이지)의 相應(상응)을 成功(성공)함에 따라 塵沙惑(진사혹)을 除(제)하게 되니 極難勝地(극난승지)요
六(육)엔 何等(하등)의 貪嗔(탐진) 二心(이심)이 已盡(이진)함에 따라 慧波羅密(혜바라밀)을 成就(성취)하니 最勝智(최승지)를 發(발)하야 染淨(염정)이 無(무)한 一眞法界(일진법계)의 行相(행상)이 現前(현전)할새 現前地(현전지)요
七(칠)엔 貪嗔已盡(탐진이진)에 따라 一分(일분)의 痴心(치심)이 除去(제거)되니 大悲心(대비심)을 發(발)하야 方便波羅密(방편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二乘(이승)의 自度(자도)를 遠離(원리)할새 遠行地(원행지)요
八(팔)엔 이미 二乘(이승)을 遠離(원리)하고 菩薩(보살)의 大願(대원)을 發(발)한지라 此地(차지)에서 願波羅密(원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無相觀(무상관)을 作(작)하야 任運無功用(임운무공용)을 相續(상속)할 뿐이니 不動地(부동지)요
九(구)엔 力波羅密(력바라밀)을 成就(성취)하고 十力(십력)을 具足(구족)하야써 一切處(일체처)에서 可度(가도)와 不可度(불가도)를 知(지)하야 能(능)히 說法(설법)할새 善彗地(선혜지)요
十(십)엔 障道無明(장도무명)의 根本(근본)을 斷盡(단진)하고 受用法樂智(수용법락지)와 成熟有情智(성숙유정지)로써 智波羅密(지바라밀)을 成就(성취)할새 無邊(무변)의 功德(공덕)을 具足(구족)하야 無邊(무변)의 功德水(공덕수)를 出生(출생)함이 大雲(대운)이 淸淨(청정)의 重水(중수)를 生(생)함과 如(여)함일새 法雲地(법운지)니 後(후)의 四波羅密(사바라밀)이란 第六(제육)을 開(개)하야 十地(십지)에 配對(배대)한 者(자)니라
第 四 節 十地(십지)의 廢立(폐립)
歡喜地(환희지) 等(등)의 十地(십지)에 廢, 立(폐, 립)의 二門(이문)이 有(유)하니 그의 廢門(폐문)엔 三劫外(삼겁외)에 十地(십지)를 不立(불립)하고 三劫(삼겁)의 妄執(망집)을 斷(단)하야 十地(십지)를 究竟(구경)함일새 「秘藏記(비장기)」等(등)의 所說(소설)이오 立門(립문)엔 「大日經疏(대일경소)」에 三劫(삼겁)의 三妄執(삼망집)을 斷盡(단진)한 後(후)의 十地(십지)를 立(립)하야 開發金剛寶藏位(개발금강보장위)랐으니 此(차)의 廢, 立(폐, 립) 二門(이문)이 有(유)한 所以(소이)는 十地(십지)에 淺深(천심)이 有(유)함으로 써라
「大日經疏(대일경소)」二(이)에 一者(일자) 淺略釋(천략석)이오 二者深秘釋(이자심비석)이라 云云(운운)하야 此(차)의 淺深十地(천심십지)에 開合(개합) 兩門(양문)을 立(립)하였으니
一(일)엔 淺略(천략)의 十地(십지)를 合(합)하야 地前(지전)에 置(치)하고 深秘(심비)의 十地(십지)를 開(개)하야 開發金剛寶藏位(개발금강보장위)람이오
二(이)엔 深秘(심비)의 十地(십지)를 合(합)하야 佛果(불과)로 하고 淺略(천략)의 十地(십지)를 開(개)하야 三妄心(삼망심)의 斷位(단위)람이니 「大日經(대일경)」所說(소설)의 三劫十地(삼겁십지)란 此(차)의 二意(이의)를 包含(포함)함일새 淺略(천략)의 十地(십지)를 地前(지전)에 合置(합치)하고 深秘(심비)의 十地(십지)를 地上(지상)에 開立(개립)함은 諸疏家(제소가)의 許多(허다) 合從說(합종설)이오 三劫十地(삼겁십지)의 建立(건립)이 多少(다소) 不同(부동)하나 惑(혹)을 約(약)하야 三劫(삼겁)으로 하고 位(위)를 約(약)하야 十地(십지)로 함은 오직 「秘藏記(비장기)」의 所說(소설)이니라
그리고 達磨大師(달마대사)의 「觀心論(관심론)」에도 三劫(삼겁)을 三惑(삼혹)에 約(약)하고 六波羅密(육바라밀)을 六處(육처)에 約(약)함이 有(유)하나 密證顯釋(밀증현석)이 同時(동시)에 竝行(병행)하니라
第 五 節 三毒六賊(삼독육적)
「觀心論(관심론)」에 「又問曰(우문왈) 上說(상설) 眞如佛性(진여불성)의 一切功德(일체공덕)은 因覺爲根(인각위근)이라시니 未審(미심)커이다 無名之에心(무명지심)의 一切諸惡(일체제악)은 以何爲根(이하위근)잇고 答曰(답왈) 無明之心(무명지심) 雖有八萬四千煩惱(수유팔만사천번뇌)인 情欲(정욕)의 恒沙衆惡(항사중악)이 無量無邊(무량무변)이나 取要言之(취요언지)컨대 皆因三毒(개인삼독)하야 以爲根本(이위근본)하나니 其(기) 三毒者(삼독자)는 卽(즉) 貪嗔痴也(탐진치야)라 此三毒心(차삼독심)이 自然(자연) 本來(본래) 具有(구유)하야 一體諸惡(일체제악)의 猶如大樹根(유여대수근)일새 雖是一(수시일)이나 所生枝葉(소생지엽)이 其數(기수) 無邊(무변)하야 彼(피) 三毒根(삼독근)인 一一根中(일일근중)에 生諸惡業(생제악업)함이 百千萬倍(백천만배)라도 過於前(과어전)하야 不可爲喩(불가위유)니라」「如是三毒(여시삼독)이 於一本體(어일본체)하야 自爲三毒(자위삼독)하고 若應現六根(약응현육근)할새 亦名六賊(역명육적)이니 六賊者(육적자)는 卽(즉) 六識也(육식야)라 由此六識(유차육식)이 出入諸根(출입제근)하야 貪着萬境然(탐착만경연)하고 成惡業(성악업)하야 障眞如體故(장진여체고)로 名六賊(명육적)이니 由此三毒及以六賊(차유삼독급이육적)하야 惑亂身心(혹란신심)할새 沈淪生死(침륜생사)하고 輪廻六趣(윤회육취)하야 受諸苦惱(수제고뇌)함이 猶如江河(유여강하)로다 因小泉原(인소천원)의 涓流不絶(연류부절)하야 乃能彌漫(내능미만)하고 波濤萬里(파도만리)하나니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斷其根源(단기근원)하면 則衆流(즉중류)-皆息(개식)일새 求解脫者(구해탈자)도 能轉三毒(능전삼독)하야 爲三聚淨戒(삼취정계)하고 能轉六賊(능전육적)하야 爲六波羅密(위육바라밀)하면 自然永離(자연영리) 一切諸苦(일체제고)리라」시니라
第 三 章 四諦(사체)
四諦(사제)는 四眞諦(사진제)라고도 云(운)하니 聖者所見(성자소견)의 眞理(진리)임으로 써라
一(일)에 苦諦(고체)란 三界六趣(삼계육취)의 苦報(고보)니 迷(미)의 果(과)요
二(이)에 集諦(집체)란 貪, 嗔(탐, 진) 等(등)의 煩惱(번뇌)와 善惡(선악)의 諸業(제업)으로서 此二(차이)가 能(능)히 三界六趣(삼계육취)의 苦報(고보)를 集起(집기)함으로 迷(미)의 因(인)이오
三(삼)에 滅諦(멸체)란 곧 涅槃(열반)으로서 涅槃(열반)이란 惑業(혹업)을 滅(멸)하고 生死(생사)의 苦(고)를 離(이)한 眞空寂滅(진공적멸)의 境界(경계)니 悟(오)의 果(과)요
四(사)에 道諦(도체)란 곧 八正道(팔정도)로서 能(능)히 涅槃(열반)에 通(통)하는 道(도)이니 悟(오)의 因(인)이니라
此(차) 中(중) 初二(초이)는 流轉(유전)의 因果(인과)이니 곧 世間(세간)의 因果(인과)요 後二(후이)는 還滅(환멸)의 因果(인과)니 곧 出世間(출세간)의 因果(인과)로서 四(사)를 모두 諦(제)라 함은 그 眞理(진리)가 實至極(실지극)함으로써요 二者(이자) 共(공)히 果位(과위)를 앞세우고 因位(인위)를 뒤에 둠은 果(과)는 보기가 쉽고 因(인)은 알기 어려우므로 苦果(고과)를 먼저 보여 이를 厭離(염리)케 한 후 其(기) 因(인)을 斷滅(단멸)케 하며 또는 涅槃(열반)의 妙果(묘과)를 먼저 들어 願樂(원요)케 한 후 其(기) 道(도)를 修行(수행)케 하심이니 佛(불)께서 菩提樹下(보리수하)를 起(기)하사 鹿野苑(녹야원)에 到(도)하시고 五比丘(오비구)를 爲(위)하야 이 法(법)을 如說(여설)하셨음으로 佛轉法輪(불전법륜)의 初(초)라 謂(위)하나니 修者(수자)는 依此修道(의차수도)하야 隨宜證滅(수의증멸)할지니라 第 一 節 八正道(팔정도)
一(일)에 正見(정견)이란 苦, 集, 滅, 道(고, 집, 멸, 도) 四諦(사체)의 理(리)를 見(견)하야 分明(분명)할새 無漏(무루)의 慧(혜)를 體(체)로 하니 이것이 八正道(팔정도)의 本體(본체)요
二(이)에 正思惟(정사유)란 四諦(사체)의 理(Fl)를 旣見(기견)하고 오히려 思惟籌量(사유주량)하야 眞理增長(진리증장)함이니 無漏心(무루심)의 心所(심소 : 心王 所有의 別作用法)로써 體(체)를 삼음이오
三(삼)에 正語(정어)란 眞智(진지)로써 口業(구업)을 닦아서 一切非理(일체비리)의 말을 짓지 않음이니 無漏(무루)의 戒(계)로써 體(체)를 삼음이오
四(사)에 正業(정업)이란 眞智(진지)로써 身(신)의 一切邪業(일체사업)을 除(제)하야 淸淨(청정)의 身業(신업)에 住(주)함이니 無漏(무루)의 戒(계)로써 體(체)를 삼음이오
五(오)에 正命(정명)이란 身, 口, 意(신, 구, 의)의 三業(삼업)을 淸淨(청정)히 하되 正法(정법)에 順(순)하야 活命(활명)하고 五邪命(오사명 : 天文, 地理, 四柱, 相, 占)을 遠離(원리)함이니 無漏(무루)의 戒(계)로써 體(체)를 삼음이오
六(육)에 正精進(정정진)이란 眞智(진지)를 發用(발용)하야 涅槃(열반)의 道(도)를 强修(강수)함이니 無漏(무루)의 勤(근)으로써 體(체)를 삼음이오
七(칠)에 正念(정념)이란 眞理(진리)로써 正道(정도)를 億念(억념)할 뿐으로써 邪念(사념)이 無(무)함이니 無漏(무루)의 念(념)으로써 體(체)를 삼음이오
八(팔)에 正定(정정)이란 眞智(진지)로써 無漏淸淨(무루청정)한 禪定(선정)에 入(입)함을 말함이니 無漏(무루)의 定(정)으로써 體(체)를 삼으니라
此(차) 八法(팔법)이 邪非(사비)를 다 떠나므로 正(정)이라 하고 能(능)히 涅槃岸(열반안)에 이르는 通路(통로)이므로 道(도)라 하느니라
모두 有漏(유루)가 아닌 無漏(무루)로서 見道位(견도위)의 行法(행법)인 바 正見(정견)의 一(일)은 八正道(팔정도) 中(중) 主體(주체)이므로 道(도)요 나머지 七(칠)은 道分(도분)이요 道支(도지)니라 第 二 節 十二因緣(십이인연)
十二因緣(십이인연)은 **支佛(벽지불)의 觀法(관법)으로서 新譯(신역)으로는 十二緣起(십이연기)요 舊譯(구역)으로는 十二因緣(십이인연)이며 또는 因緣觀(인연관)이라 支佛觀(지불관)이라고도 하니라
이는 衆生(중생)이 三世(삼세)에 涉(섭)하야 六途(육도)에 輪廻(윤회)하는 次第緣起(차제연기)를 說(설)한 것으로서
一(일)에 無明(무명)이란 過去世(과거세)의 無始煩惱(무시번뇌)요
二(이)에 行(행)이란 過去世(과거세)의 煩惱(번뇌)에 依(의)하야 지은 善惡(선악)의 行業(행업)이오
三(삼)에 識(식)이란 過去世(과거세)의 業(업)에 依(의)하야 受(수)한 現在(현재) 受胎(수태)의 一念(일념)이오
四(사)에 名色(명색)이란 胎中(태중)에서 心身(심신)이 發育(발육)하는 位(위)를 말함이니 名(명)이란 곧 心法(심법)으로서 心法(심법)이란 體(체)로써 現示(현시)하기 어렵고 다만 名(명)으로써 詮義(전의)할 바이므로 名(명)이라 하고 色(색)이란 곧 眼(안) 等(등)의 身(신)이오
五(오)에 六處(육처)란 六根(육근)이니 六根(육근)이 具足(구족)하야 將次(장차) 出胎(출태)하고자 하는 位(위)요
六(육)에 觸(촉)이란 二~三歲之間((이~삼세지간)에서 事物(사물)에 對(대)하야 아직 苦樂(고락)을 識別(식별)할 수는 없고 다만 物(물)에 觸(촉)하고자 하는 位(위)요
七(칠)에 受(수)란 六~七歲(육~칠세) 이후에 事物(사물)에 對(대)하야 苦樂(고락)을 식별하고 此(차)를 感受(감수)하는 位(위)요
八(팔)에 愛(애)란 十四~五歲(십사~오세) 이후에 種種(종종)의 强盛(강성)한 愛慾(애욕)을 生(생)하는 位(위)요
九(구)에 取(취)란 成人(성인) 이후에 愛慾(애욕)이 尤盛(우성)함에 따라 諸境(제경)에 馳驅(치구)하야 所欲(소욕)을 取求(취구)하는 位(위)요
十(십)에 有(유)란 愛取(애취)의 煩惱(번뇌)에 依(의)하야 種種(종종)의 業(업)을 지어 當來(당래)의 果(과)를 定(정)하는 位(위)니 有(유)란 곧 業(업)으로서 業(업)이 能(능)히 當來(당래)의 果(과)를 含有(함유)함으로 有(유)라 이름함이오
十一(십일)에 生(생)이란 現在(현재)의 業(업)에 依(의)하야 未來(미래)의 生(생)을 받는 位(위)요
十二(십이)에 老死(노사)란 來世(래세)에서 老死(노사)하는 位(위)니 이 中(중)에서 「無明(무명)과 行(행)」의 二(이)는 곧 惑, 業(혹, 업)의 二(이)로서 過去世(과거세)의 因(인)에 屬(속)하고 「識, 名色, 六處, 觸, 受(식, 명색, 육처, 촉, 수)」의 五(오)는 過去(과거) 惑業(혹업)의 因(인)에 緣(연)하야 받은 現在(현재)의 果(과)에 屬(속)할새 이는 過現一重因果(과현일중인과)이며 또한 「愛, 取(애, 취)」의 二(이)는 現在(현재)의 惑(혹)이요 「有(유)」란 現在(현재)의 業(업)이라 이 惑業(혹업)의 現在因(현재인)에 緣(연)하야 未來(미래)의 生(생)과 老死(노사)의 果(과)를 感(감)할새 이는 現未一重因果(현미일중인과)라 하나니 此(차) 兩重(양중)의 因果(인과)에 依(의)하야 輪廻(윤회)가 無窮(무궁)함을 알지니라
現在(현재)의 惑(혹 : 愛, 取) 業(업 : 有)이 이미 現在(현재)의 苦果(고과 : 識, 名色, 六處, 觸, 受)에서 生(생)하였음을 볼진대 過去(과거)의 惑業(혹업)도 역시 過去(과거)의 苦果(고과)에서 生(생)하였음을 알 것이며 이미 現在(현재)의 苦果(고과 : 識 내지 受)가 現在(현재)의 業(업 : 有)을 生(생)함을 볼진대 역시 未來(미래)의 苦果(고과 : 生, 老死)가 未來(미래)의 業(업)을 生(생)할 것임을 알지니라
그러므로 이를 推究(추구)하면 過去(과거)의 惑業(혹업)은 過去(과거)의 苦果(고과)에서 來(래)하고 未來(미래)의 苦果(고과)는 未來(미래)의 惑業(혹업)을 生(생)하야 過去(과거)에 始(시)가 無(무)하고 未來(미래)에 終(종)이 無(무)하니 이를 無始無終(무시무종)의 生死輪廻(생사윤회)라 하는 바 **支佛(벽지불)은 이를 觀(관)하야 一(일)은 生死(생사)를 싫어하고 一(일)은 常實(상실)의 我體(아체)가 없음을 知(지)함으로써 드디어 惑業(혹업)을 끊고 涅槃(열반)을 證(증)하나니 이 中(중)에서 因(인)과 緣(연)을 分別(분별)하면 行(행)과 有(유)와의 二支(이지)는 因(인)이오 無明, 愛, 取(무명, 애, 취)의 三支(삼지)는 緣(연)이며 餘(여)의 七支(칠지)는 果(과)이나 果(과)는 도리어 惑業(혹업)의 因(인)을 일으키는 緣(연)이 됨으로 이를 緣中(연중)에 攝(섭)하고 別(별)로 果(과)의 名(명)을 두지 않고 因緣觀(인연관)이라 單稱(단칭)하느니라
第 三 節 六趣(途) (육취(도))
迷(미)한 衆生(중생)이 業因(업인)의 差別(차별)에 依(의)하야 趣向(취향)하는 바 六處(육처)가 있어 六趣(육취)라 或(혹)은 六途(육도)라 말하니
一(일)에 地獄趣(지옥취)란 八寒, 八熱(팔한, 팔열) 等(등)의 苦處(고처)로서 地下(지하)에 있으므로 地獄(지옥)이라 名(명)하며
二(이)에 餓鬼趣(아귀취)란 飯死(반사)를 恒求(항구)하는 鬼類(귀류)의 生處(생처)니 人趣(인취)와 雜處(잡처)하나 不可見(불가견)이며
三(삼)에 畜生趣(축생취)란 傍生趣(방생취)라고도 이르는 바 禽獸(금수)의 生處(생처)로서 人界(인계)와 依處(의처)가 許多(허다)히 同一(동일)하야 眼前可見(안전가견)이며
四(사)에 阿修羅趣(아수라취)란 恒常(항상) 嗔心(진심)을 품고 戰鬪(전투)를 좋아하는 大力神(대력신)의 生處(생처)로서 深山幽谷(심산유곡)을 依處(의처)로 하야 人(인)과 隔離(격리)하며
五(오)에 人趣(인취)란 人類(인류)의 生處(생처)로서 閻浮提(염부제) 等(등)의 四大洲(사대주)에 分(분)하야 報(보)에 따라 依處(의처)를 區別(구별)하고 오직 通力(통력)으로써 相通(상통)하며
六(육)에 天趣(천취)란 몸에 光明(광명)이 있고 또한 자연히 快樂(쾌락)을 받는 衆生(중생)을 天(천)이라 名(명)하는 바 欲界(욕계)에 六處(육처)가 있어 六欲天(육욕천)이라 하며 또한 色界(색계)와 無色界(무색계)가 다 其(기)의 生處(생처)니라
第 四 章 金剛三昧(금강삼매)
三乘(삼승)의 行人(행인)이 最後(최후)에 一切(일체)의 煩惱(번뇌)를 斷(단)하고 各其(각기) 究竟(구경)의 果(과)를 得(득)하는 三昧(삼매)를 金剛三昧(금강삼매)라, 如金剛三昧(여금강삼매)라, 金剛喩定(금강유정)이라, 金剛定(금강정)이라, 云(운)하고 또 金剛三昧(금강삼매)를 **支佛菩提(벽지불보리)라 後(후)에 如金剛三昧(여금강삼매)를 佛無上菩提(불무상보리)라 論(논)함도 有(유)하니 金剛(금강)이 能(능)히 一切(일체)에 無碍(무애)함과 如(여)히 能(능)히 一切諸法(일체제법)에 通達(통달)함으로써라
「涅槃經(열반경)」二十四(이십사)에 「菩薩摩訶薩(보살마하살)이 修大涅槃(수대열반)하야 得(득) 金剛三昧(금강삼매)하고 安住此中(안주차중)하야 悉能破散(실능파산) 一切諸法(일체제법)이라」시고
「智度論(지도론)」四十七(사십칠)에 「金剛三昧者(금강삼매자)는 譬如(비여) 金剛(금강)이 無物不陷(무물불함)일새 此三昧(차삼매)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於諸法(어제법)에 無不通達(무불통달)하고 令諸三昧(영제삼매)로 各得其用(각득기용)이라」며 또 「如金剛三昧者(여금강삼매자)는 能破一切諸煩惱結使(능파일체제번뇌결사)하야 無有遺餘(무유유여)니 譬如釋帝桓因(비여석제환인)이 手執金剛(수집금강)하고 破阿修羅軍(파아수라군)인달하야 卽時(즉시) 學人(학인) 末後(말후)의 心(심)일새 終是心(종시심)의 次第三種菩提(차제삼종보리)니 聲聞菩提(성문보리)와 **支佛菩提(벽지불보리)와 佛無上菩提(불무상보리)」랐고
「首楞嚴經(수능엄경)」六(육)에 「是諸大衆(시제대중)이 得未曾有(득미증유)하야 一切(일체)로 普獲金剛三昧(보획금강삼매)라」시고
「智度論(지도론)」三十四(삼십사)에 「地(지)란 皆是衆生虛**業(개시중생허광업)의 因緣報(인연보)라 故(고)로 有(유)할새 是故(시고)로 不能擧菩薩(불능거보살)이니라 欲成佛時(욕성불시)에 實相智慧身(실상지혜신)이 是時坐處(시시좌처)-變位金剛(변위금강)하나니 有人言(유인언)하되 土在金輪上(토재금륜상)하고 金輪(금륜)은 在金剛上(재금강상)하야 從金剛際(종금강제)로 出如蓮花臺(출여연화대)하야 直上持菩薩坐處(직상지보살좌처)라 令不陷沒(영불함몰)일새 以是故(이시고)로 此道場坐處(차도량좌처)-名爲金剛(명위금강)」이랐고
「西域記(서역기)」 八(팔)에 「菩提樹垣正中(보리수원정중)에 有金剛座(유금강좌)하니 昔賢劫初(석현겁초)에 與天地(여천지)로 俱起(구기)하야 據三千大天世界之中(거삼천대천세계지중)하되 下極金輪(하극금륜)하고 上侵地際(상침지제)하야 金剛所成(금강소성)이오 周百餘步(주백여보)라 賢劫千佛(현겁천불)이 座之而入金剛定(좌지이입금강정)일새 故曰金剛座焉(고왈금강좌언)하나니 證聖道所(증성도소)를 亦曰道場(역왈도량)」이랐고
「俱舍論(구사론)」十一(십일)엔 「唯此洲中(유차주중)에 有金剛座(유금강좌)하니 上窮地際(상궁지제)하고 下據金輪(하거금륜)이라 一切菩薩(일체보살)이 將登正覺(장등정각)할새 皆坐此座上(개좌차좌상)하야 起金剛喩定(기금강유정)」이랐으니
金剛三昧(금강삼매)란 먼저 金輪(금륜)을 見(견)하야 本格的(본격적) 肉眼(육안)을 得(득)한 後(후) 金剛界(금강계)의 天眼(천안)과 金剛輪(금강륜)의 法眼(법안)과 金剛智(금강지)의 慧眼(혜안)을 內證(내증)하야써 大寂室三昧(대적실삼매)로써 最後(회후)의 佛眼(불안)을 成就(성취)할지니라
第 一 節 獅子吼三昧(사자후삼매)
金輪(금륜) 以上(이상)을 金剛界(금강계)라 하니 大日如來(대일여래)의 智德(지덕)을 開示(개시)한 部門(부문)으로서 如來(여래) 內證(내증)의 智德(지덕)은 其(기) 體(체)가 堅固(견고)하야 一切(일체)의 煩惱(번뇌)를 破(최파)하는 勝用(승용)이 有(유)함으로써라
金輪(금륜)이란 娑婆世界(사바세계) 一切衆生(일체중생)의 身根(신근)인 同時(동시)에 有情(유정) 無情(무정)의 四大色身(사대색신)의 實相(실상)이라 普賢色身三昧(보현색신삼매)의 根本(근본)이오 金剛輪三昧(금강륜삼매)의 對象(대상)이라 金毛數(금모수)와 等(등)한 一切衆生(일체중생)의 實色(실색)이오 法身(법신)인 獅子本身(사자본신)일새 金毛獅子(금모사자)요 獅子一吼(사자일후)에 百獸死息格(백수사식격)으로 一切(일체)가 實相(실상)에 歸(귀)하고 衆生(중생)의 假相(가상)이 隱沒(은몰)할새 獅子吼三昧(사자후삼매)니라
第 二 節 四輪(사륜)
有情(유정)의 業力(업력)으로써 最下(최하)의 虛空輪(허공륜)에 依止(의지)하야 風輪(풍륜)을 生(생)하니 其廣(광)이 無數(무수)요 厚(후)가 十六億踰繕那(십육억유선나)라 如是(여시)히 風輪(풍륜)의 體(체)가 緊密(긴밀)하니 復是何物(부시하물)고 此(차)가 大地四輪中(대지사륜중)의 風輪(풍륜)이오 또한 有情(유정)의 業力(업력)으로 大雲雨(대운우)를 起(기)하야 風物上(풍물상)에 注(주)하니 積水輪(적수륜)을 成(성)하는지라 此(차)가 水輪(수륜)이오 有情(유정)의 業力(업력)으로 別風(별풍)을 起(기)하야 此(차) 水(수)를 搏擊(박격)할새 上結(상결)하야 金(금)을 成(성)하니 此(차)가 金輪(금륜)이라 此(차)는 佛說(불설)의 虛空輪上(허공륜상)에 風輪(풍륜)이 有(유)하고 風輪上(풍륜상)에 水輪(수륜)이 有(유)하고 水輪上(수륜상)에 金輪(금륜)이 有(유)하고 金輪上(금륜상)에 九山八海(구산팔해)가 有(유)하다신 初(초)의 四輪(사륜)에 對(대)한 俱舍論世間品(구사론세간품)의 所說(소설)이니 參酌(참작)할지어다
要(요)컨대 天地日月星宿(천지일월성수)와 山河大地(산하대지)의 森羅萬象(삼라만상)과 蠢動含靈(준동함령)의 一切衆生身(일체중생신)인 地性(지성)을 먼저 分析(분석)하자 科學者(과학자)는 말하되 一切(일체)의 物體(물체)란 成分(성분)의 集積(집적)이라 하야 成分(성분)이란 分子(분자)의 微合(미합)이오 分子(분자)란 各元素(각원소)의 因緣體(인연체)라 한다 그리하야 다시 元素(원소)를 破壞(파괴)할새 形跡(형적)도 없어지는 同時(동시)에 電子(전자)와 陽核(양핵)이란 原子(원자)만 發見(발견)될 뿐이다 또 原子(원자)의 核體(핵체)는 무엇이냐 하야 假稱(가칭)의 原子核(원자핵)을 求(구)하나 未發見(미발견)이다 보라 이미 釋尊(석존)께서 이를 밝히시고 諸菩薩(제보살)이 敷演(부연)한 바다 諸法從緣生(제법종연생)이오 亦從因緣滅(역종인연멸)이라신 因緣法(인연법)의 媒介體(매개체)가 곧 元素(원소)였다 科學者(과학자)는 一切(일체)가 歸空(귀공)함을 立證(입증)했다 그러나 아직 正道(정도)는 모른다
그리하야 有情(유정) 無情(무정)의 一切衆生所依(일체중생소의)의 顯界(현계) 이대로 虛空輪(허공륜)이오 虛空輪上(허공륜상)의 風輪(풍륜)이란 곧 電子(전자)요 風輪上(풍륜상)의 水輪(수륜)이란 곧 陽核(양핵)이니라 그리고 水輪上(수륜상)의 金輪(금륜)이란 곧 求(구)하는 바의 原子核(원자핵)이다 原子核(원자핵)인 金輪(금륜)은 오직 肉眼(육안)의 實性(실성)을 回復(회복)하여야 見證(견증)한다 天下衆生(천하중생)의 肉眼(육안)이란 假性(가성)이니만큼 그의 實性(실성)을 求(구)하는 것이 先決問題(선결문제)니라
第 三 節 析空觀(석공관)
地, 水, 火, 風(지, 수, 화, 풍) 四大的(사대적)의 其(기) 性(성)은 空大(공대)와 合(합)하되 其(기) 相(상)은 地性的(지성적)으로 幻化(환화)하야 衆生(중생)의 心體(심체)를 陰蔽(음폐)하고 水性的(수성적) 貪心(탐심)과 火性的(화성적) 嗔心(진심)이 아울너 地性的(지성적) 痴心(치심)이 되야 風性的(풍성적)으로 顯現(현현)하니 要(요)는 먼저 地性(지성)을 分析(분석)하야써 四大相(사대상)을 破(파)하고 空性(공성)에 住(주)함이 入道(입도)의 初步(초보)일새
天地日月星宿(천지일월성수)와 山河大地(산하대지)의 森羅萬象(삼라만상)과 人畜(인축) 乃至(내지) 蠢動含靈(준동함령)과의 一切衆生身(일체중생신)을 餘地(여지) 없이 破壞(파괴)하야 隙遊塵(극유진) 程度(정도)의 成分化(성분화)하고 다시 그의 七分一(칠분일)인 兎毛塵(토모진)의 電子化(전자화)하고 그 七分一(칠분일)인 水塵(수진)의 陽核化(양핵화)하야 顯界(현계)인 欲界塵(욕계진)을 獅子奮迅格(사자분신격)으로 脫落(탈락)하고 그 七分一(칠분일)인 金塵(금진)의 原子核化(원자핵화)하고 그 七分一(칠분일)인 微(미)의 識粒化(식립화)하고 그 七分一(칠분일)인 極微(극미)의 色究竟化(색구경화)하고 그 七分一(칠분일)인 隣虛(인허)의 染心根化(염심근화)하야 色界塵(색계진)과 無色界(무색계)의 染分(염분)을 淨化(정화)하고 오히려 進一步(진일보)하야 眞空界(진공계)에 轉入(전입)한 後(후) 다시금 三界(삼계)의 實相(실상)을 正觀(정관)하야 그의 妙有(묘유)를 觀察(관찰)할새 果(과)의 眞空妙有觀(진공묘유관)이오 因(인)의 析空觀(석공관)이니라
第 四 節 四相(사상)
「金剛般若波羅密經(금강반야바라밀경)」에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卽非菩薩(즉비보살)이라」시고 또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身相(가이신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不可以身相(불가이신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所說身相(여래소설신상)은 卽非身相(즉비신상)이니이다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대 凡所有相(범소유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니 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이면 卽見如來(즉견여래)니라」심의 「六祖解曰(육조해왈) 衆生(중생)과 佛性(불성)이 本無有異(본무유이)언만 緣有四相(연유사상)하야 不入餘涅槃(불입여열반)하나니 有四相(유사상)하면 卽是衆生(즉시중생)이오 無四相(무사상)하면 卽是佛(즉시불)이라 迷(미)하면 卽佛(즉불)이 是衆生(시중생)이오 悟(오)하면 卽衆生(즉중생)이 是佛(시불)이니라 迷人(미인)은 恃有財寶學問族姓(시유재보학문족성)하야 輕慢一切人(경만일체인)이 名我相(명아상)이오 雖行仁義禮智信(수행인의예지신)이니 不合敬爾(불합경이)라함이 名人相(명인상)이오 好事(호사)는 歸己(귀기)하고 惡事(악사)는 施人(시인)함이 名衆生相(명중생상)이오 對境(대경)하야 取捨分別(취사분별)함이 名壽者相(명수자상)이니 是謂凡夫四相(시위범부사상)이오 修行人(수행인)도 亦有四相(역유사상)할새 心有能所(심유능소)하야 輕慢衆生(경만중생)이 名我相(명아상)이오 自恃持戒(자시지계)하야 輕破戒者(경파계자)-名人相(명인상)이오 厭三途苦(염삼도고)하야 願生諸天(원생제천)이 是衆生相(시중생상)이오 心愛長年而勤修福業(심애장년이근수복업)하야 諸執不忘(제집불망)이 是壽者相(시수자상)이니 有四相(유사상)하면 卽是衆生(즉시중생)이오 無四相(무사상)하면 卽是佛(즉시불)」이랐고
또 「色身(색신)은 卽有相(즉유상)이오 法身(법신)은 卽無相(즉무상)이니 色身者(색신자)는 四大和合(사대화합)하야 父母所生(부모소생)이라 肉眼所見(육안소견)이어니와 法身者(법신자)는 無有形段(무유형단)하야 非有靑黃赤白(비유청황적백)일새 無一切相貌(무일체상모)하야 非肉眼能見(비육안능견)이오 慧眼(혜안)으로 乃能見之(내능견지)니 凡夫(범부)는 但見色身如來(단견색신여래)하고 不見法身如來(불견법신여래)하나니 法身(법신)은 量等虛空(양등허공)이라 是故(시고)로 佛(불)-問須菩提(문수보리)하사대 可以身相(가이신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하시니 須菩提(수보리)-知凡夫(지범부)의 但見色身如來(단견색신여래)하고 不見法身如來(불견법신여래)인 故(고)로 言不也(언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不可以身相(불가이신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니이다 하니 色身(색신)은 是相(시상)이오 法身(법신)은 是性(시성)이라 一切善惡(일체선악)이 盡由法身(진유법신)이오 不由色身(불유색신)이니 法身(법신)이 若作惡(약작악)하면 色身(색신)이 不生善處(불생선처)요 法身(법신)이 作善(작선)하면 샌新(색신)이 不墮惡處(불타악처)니 凡夫(범부)는 唯見色身(유견색신)하고 不見法身(불견법신)일새 不能行無住相布施(불능행무주상보시)며 物證於一切處(불능어일체처)에 行平等行(행평등행)하며 不能普敬一切衆生(불능보경일체중생)이어니와 見法身者(견법신자)는 卽能行無住相布施(즉능행무주상보시)하며 卽能普敬一切衆生(즉능보경일체중생)하며 卽能修般若波羅密(즉능수반야바라밀)하야 方信一切衆生(방신일체중생)의 同一眞性(동일진성)이 本來淸淨(본래청정)하야 無有垢穢(무유구예)할새 具足恒沙妙用(구족항사묘용)하나니라 如來(여래) 欲顯法身故(욕현법신고)로 說一切諸相(설일체제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니 若悟一切諸相(약오일체제상)이 虛妄不實(허망부실)하면 卽見如來無相之理也(즉견여래무상지리야)라」하시니라
第 五 節 金剛界五部(금강계오부)
金剛界(금강계)란 始覺上轉(시각상전)의 法門(법문)으로서 在迷(재미)의 九識(구식)을 轉(전)하야 五種(오종)의 果智(과지)를 成就(성취)함일새 五部(오부)에 分類(분류)하니
一(일)에 蓮華部(연화부)란 衆生(중생)의 心中(심중)에 本有(본유)인 淨菩提心淸淨(정보리심청정)의 理(리)가 有(유)하야 六途生死(육도생사)의 泥中(이중)에 在(재)하되 不染不垢(불염불구)함이 蓮華(연화)가 泥中(이중)에 處(처)하되 不染不垢(불염불구)함과 如(여)할새요
二(이)에 金剛部(금강부)란 衆生自心(중생자심)의 理所(리소)에 또 本有(본유)의 智(지)가 有(유)하야 生死(생사)의 泥中(이중)에 無數劫(무수겁)을 經(경)하되 不朽(불후) 不壞(불괴)함이 金剛(금강)이 長久(장구)히 泥中(이중)에 埋沒(매몰)하되 不朽不壞(불후불괴)함과 如(여)할새요
三(삼)에 佛部(불부)란 已上(이상)의 理智(리지)가 本有(본유)하나 凡夫位(범부위)에선 不顯(불현)하고 果位(과위)에 入(입)하야사 理智(리지)가 顯現(현현)하야 覺道(각도)가 圓滿(원만)함으로써요
四(사)에 寶部(보부)란 佛(불)의 自證部(자증부)로서 萬德(만덕)이 圓滿(원만)하야 福德(복덕)이 無邊(무변)함으로써요
五(오)에 **磨部(갈마부)란 佛(불)의 化他部(화타부)로서 **磨(갈마)란 作業(작업)이라 譯(역)하니 佛(불)이 衆生(중생)을 爲(위)하사 悲愍(비민)을 垂(수)하시고 一切(일체)의 事業(사업)을 辨成(변성)하심으로써니
初二(초이)는 佛部中(불부중)에 在纏(재전)의 因德(인덕)이오 第三(제삼)은 理智(리지)가 具足(구족)한 出纏(출전)의 果位(과위)며 後二(후이)는 佛部中(불부중)에서 二利圓滿(이리원만)을 別開(별개)함이니라
第 六 節 五佛座(오불좌)
一(일)에 大日(대일)의 獅子座(사자좌)니 獅子(사자)가 諸獸(제수)의 王(왕)으로서 諸獸(제수) 中(중)에서 遊行(유행)하되 無畏(무외)함이 毘盧遮那佛(비로자나불)이 諸法(제법)의 王(왕)으로서 諸法(제법)의 中(중)에서 無碍自在(무애자재)하심으로써 獅子(사자)를 座(좌)로 하심이오
二(이)에 阿**(아촉)의 象座(상좌)니 義訣(의결)에 云(운)하되 象(상)의 力用(역용)은 諸獸(제수) 中(중) 此(차)에 過(과)한 者(자)-無(무)할새 그 堅力無碍(견력무애)를 表幟(표치)함과 兎, 馬, 象(토, 마, 상)의 三獸(삼수)가 河水(하수)를 渡(도)함에 象王(상왕)이 獨(독)히 其底(기저)를 極(극)하야 諸獸(제수) 中(중)에 其力(기력)의 最大(최대)함이 金剛部(금강부) **破(최파)의 德用(덕용)에 相應(상응)함이오
三(삼)에 寶生(보생)의 馬座(마좌)니 義訣(의결)에 云(운)하되 世間(세간)에 尊貴吉祥(존귀길상)한 者(자)-馬(마)보다 先(선)함이 無(무)하고 또 馬(마)에 慧用(혜용)이 有(유)하야 世間(세간)에서 寶(보)로 할새 寶生佛(보생불)의 灌頂法王(관정법왕)이 此(차)로써 座(좌)로 함이오
四(사)에 阿彌陀(아미타)의 孔雀座(공작좌)니 義訣(의결)에 云(운)하되 世間(세간)에서 孔雀(공작)을 瑞禽(서금)이라 云(운)하니 此(차) 禽(금)의 麗狀(여상)이 種種(종종)의 色(색)을 具(구)하고 明慧(명혜)가 有(유)하야 時宜(시의)에 善應(선응)할새 阿彌陀(아미타)의 轉法輪王(전법륜왕)이 此(차)로써 座(좌)로 함이오
五(오)에 不空成就(불공성취)의 迦樓羅座(가루라좌)니 義訣(의결)에 云(운)하되 此(차) 鳥(조)의 威力(위력)이 能(능)히 諸龍(제룡)을 降伏(항복)하야 諸龍(제룡) 所居(소거)의 四大海(사대해) 中(중) 迦樓羅所向(가루라소향)의 處(처)에 龍(용)이 곧 降伏(항복)할새 不空佛(불공불)의 **磨王(갈마왕)이 此(차)로써 座(좌)로 함이니 一切(일체) 人天(인천)의 諸龍(제룡)을 攝引(섭인)하야써 菩提(보리)의 彼岸(피안)에 到(도)케 함이니라
第 七 節 五智(오지)
顯敎(현교)에선 八識(팔식)을 轉(전)하야 四智(사지)를 成(성)한 究竟(구경)의 報身如來(보신여래)를 立(립)하고 密敎(밀교)에서는 四智(사지)에 第九識所轉(제구식소전)의 法界體性智(법계체성지)를 加(가)하야 五智(오지)로 하고 金剛界(금강계) 智法身(지법신)의 大日如來(대일여래)를 立(립)하니
一(일)에 法界體性智(법계체성지)란 菴摩羅識(암마라식)을 轉(전)한 바로서 法界(법계)란 淨識差別(정식차별)의 義(의)일새 諸法(제법)을 差別(차별)한 其數(기수) 無量(무량)의 法界體性(법계체성)이 곧 六大(육대)라 六大法界(육대법계)의 三昧(삼매)에 住(주)함을 法界體性智(법계체성지)라 名(명)하고 方便究竟(방편구경)의 德(덕)을 主(주)하며
二(이)에 大圓鏡智(대원경지)란 阿賴耶識(아뢰야식)을 轉(전)한 바로서 法界(법계)의 萬象(만상)을 顯現(현현)함이 大圓鏡(대원경)과 如(여)한 智(지)며
三(삼)에 平等性智(평등성지)란 末那識(말나식)을 轉(전)한 바로서 諸法平等(제법평등)의 作用(작용)을 成(성)한 智(지)며
四(사)에 妙觀察智(묘관찰지)란 意識(의식)을 轉(전)한 者(자)로서 諸法(제법)을 妙分別(묘분별)하야 衆機(중기)를 觀察(관찰)하고 說法斷疑(설법단의)하는 智(지)며
五(오)에 成所作智(성소작지)란 眼識(안식) 等(등)의 五識(오식)을 轉(전)한 바로서 自利利他(자리이타)의 妙業(묘업)을 成就(성취)한 者(자)라
此(차) 五智(오지)는 一身所具(일신소구)의 智德(지덕)이지만 衆生(중생)을 引攝(인섭)코자 本體(본체)에서 四方(사방)의 四智(사지) 四佛(사불)을 出生(출생)할새 法界體性智(법계체성지)는 本位(본위)에 住(주)한 中央(중앙)의 大日如來(대일여래)라 하고 大圓鏡智(대원경지)에 由(유)한 東方(동방)의 阿 如來(아촉여래)는 發菩提心(발보리심)의 德(덕)을 主(주)하며 平等性智(평등성지)에 由(유)한 南方(남방)의 寶生如來(보생여래)는 修行(수행)의 德(덕)을 主(주)하며 妙觀察智(묘관찰지)에 由(유)한 西方(서방)의 阿彌陀如來(아미타여래)는 成菩提(성보리)의 德(덕)을 主(주)하며 成所作智(성소작지)에 由(유)한 北方(북방)의 不空成就如來(불공성취여래)는 入涅槃(입열반)의 德(덕)을 主(주)한다 하나 此(차)는 一種(일종)의 下轉法門(하전법문)에 屬(속)하고 上轉(상전)할 時(시)엔 中央(중앙)이 涅槃位(열반위)요 北方(북방)이 菩提位(보리위)요 西方(서방)이 修行位(수행위)요 東方(동방)이 發心位(발심위)요 南方(남방)이 方便位(방편위)니 四方(사방)이란 顯界(현계)를 指(지)함이 않이오 密界(밀계)를 指(지)함이라
北南(북남)은 上下(상하)요 西東(서동)은 左右(좌우)일새 東勝身洲(동승신주)에서 發心(발심)하고 西牛貨洲(서우화주)에서 修行(수행)하고 北單越洲(북단월주)에서 成菩提(성보리)하고 中央(중앙)의 涅槃位(열반위)에 住(주)하야 南贍部洲(남섬부주)의 衆生(중생)을 方便(방편)dmfhTJ 救濟(구제)할지니 法界體性智(법계체성지)의 大日(대일)이 中央(중앙)에 位(위)함은 前(전)과 同一(동일)하되 四方(사방)의 配當(배당)은 異(이)하니라
平等性智(평등성지)의 不空如來(불공여래)니 北上(북상)에, 成所作智(성소작지)의 寶生如來(보생여래)니 南下(남하)에, 大圓鏡智(대원경지)의 阿**如來(아촉여래)니 右東(우동)에, 妙觀察智(묘관찰지)의 阿彌陀如來(아미타여래)니 左西(좌서)에, 位(위)하고 胎藏界(태장계)의 五大(오대)를 此(차)에 配(배)하면 中央(중앙)에 空大(공대), 北方(북방)에 風大(풍대), 西方(서방)에 火大(화대), 東方(동방)에 水大(수대), 南方(남방)에 地大(지대)가 當(당)하니라
然則(연즉) 五智(오지)란 곧 地, 水, 火, 風, 空(지, 수, 화, 풍, 공)의 五輪觀(오륜관)으로써 먼저 自在(자재)를 得(득)한 後(후) 前四大(전사대)의 色蘊(색온)이 本空(본공)한 實相(실상)에 立脚(입각)하고 色蘊(색온)에 根據(근거)한 受, 想, 行, 識(수, 상, 행, 식) 四溫(사온)의 染垢(염구)도 亦空(역공)한 實相智(실상지)인 淨心(정심)의 識大(식대)와 아울너 眞空妙有(진공묘유)의 六大(육대)로써 法界體性智(법계체성지)를 成就(성취)하고 凡夫(범부)의 八識(팔식)을 轉(전)하야 菩薩(보살)의 四智(사지)를 成(성)할새 五智如來(오지여래)라 稱(칭)하나니라
第 五 章 佛 性(불성)
不生不滅(불생불멸)인 法性(법성)의 妙理(묘리)를 理佛性(리불성)이라 名(명)하고 大圓鏡智(대원경지) 等(등) 四智(사지)의 種子(종자)를 行佛性(행불성)이라 名(명)하는 바 此(차) 中(중)에 理佛性(리불성)은 一切(일체) 有情(유정)이 皆具(개구)로되 行佛性(행불성)은 具(구)와 不具(불구)의 別(별)이 有(유)하니 不具(불구)는 永不成佛(영불성불)함이오 佛性(불성)을 三(삼)에 分(분)하야 論(논)함도 有(유)하니
一(일)에 自性住佛佛性(자성주불불성)이란 一切衆生(일체중생)의 本具(본구)한 眞如(진여)-自性(자성)에 常住(상주)하야 不變不改(불변불개)함이오
二(이)에 引出佛性(인출불성)이란 衆生(중생)이 禪定(선정)을 修習(수습)하야써 本具(본구) 智慧(지혜)의 佛性(불성)을 引出(인출)함이오
三(삼)에 至德果佛性(지덕과불성)이란 修因(수인)이 滿足(만족)하야 果位(과위)에 至(지)할 時(시)에 本有(본유)의 佛性(불성)이 了了顯現(요료현현)함일새
佛(불)이란 覺悟(각오)의 義(의)로서 一切衆生(일체중생)이 悉有(실유) 覺性(각성)이라 名(명)하니 性(성)이란 不改(불개)의 義(의)로서 因果(인과)를 通(통)하야 自性(자성)의 不改(불개)함이라 因麥(인맥)과 果麥(과맥)의 其(기) 性(성)이 不改(불개)함과 如(여)하니 性(성)에 對(대)하야 佛性(불성)이오 相(상)에 對(대)하야 如來(여래)니라
第 一 節 三因佛性(삼인불성)과 五佛性(오불성)
「涅槃經(열반경)」의 所說(소설)이니 一切(일체)의 邪非(사비)를 離(이)한 中正(중정)의 眞如(진여)에 依(의)하야 法身(법신)의 果德(과덕)을 成就(성취)할새 正因佛性(정인불성)이라 名(명)하고 眞如(진여)의 理(리)를 照了(조료)하는 智慧(지혜)에 依(의)하야 般若(반야)의 果德(과덕)을 成就(성취)할새 了因佛性(요인불성)이라 名(명)하고 了因(요인)을 緣助(연조)하야써 正因(정인)을 開發(개발)케 하는 一切(일체)의 善根功德(선근공덕)에 依(의)하야 解脫(해탈)의 德(덕)을 成就(성취)할새 緣因佛性(연인불성)이라 名(명)하야 已上(이상)을 三因佛性(삼인불성)이라 云(운)하며 後二(후이)를 加(가)하야 五佛性(오불성)이라 謂(위)함도 有(유)하니 四(사)에 果佛性(과불성)이란 菩提(보리)의 果(과)로서 正覺(정각)의 智(지)를 菩提(보리)라 云(운)함일새요 五(오)에 果果佛性(과과불성)이란 大涅槃(대열반)으로서 菩提(보리)의 智(지)로써 涅槃(열반)의 理(리)를 顯(현)함일새니라
第 二 節 佛性戒(불성계)
「梵網經(범망경)」所說(소설)의 大乘戒(대승계)로서 佛性戒(불성계)를 佛戒(불계)라, 佛乘戒(불승계)라고도 云(운)하니 一切衆生(일체중생)의 本具(본구)한 佛性(불성)이 淸淨無垢(청정무구)하야 一切(일체)의 諸過(제과)를 離(이)할새 此(차) 佛性(불성)을 體(체)하야써 佛果(불과)에 至(지)함으로써요 諸佛(제불)이 住(주)하는 一實相(일실상)의 淨戒(정계)임으로써니 大乘戒(대승계)의 都名(도명)이니라
「梵網經(범망경)」下(하)에 「一切衆生(일체중생)이 皆有佛性(개유불성)이니 一切(일체)의 意(의)와 識(식)과 色(색)과 心(심)의 是情(시정) 是心(시심)이 皆入佛性戒中(개입불성개중)이라」시고 또 「一切(일체)의 有心者(유심자)-皆應攝佛戒(개응섭불개)니 衆生(중생)이 受佛戒(수불계)하면 卽入諸佛位(즉입제불위)라」시며 「大日經疏(대일경소)」十七(십칠)에 「佛(불)은 離一切相(이일체상)하고 而住淨戒(이주정계)하실새 所謂(소위) 離諸相(이제상)의 一相一味(일상일미)라 若能如是(약능여시)의 離一切相(이일체상)코 而住於戒(이주어계)하면 此戒(차계)가 卽是佛戒(즉시불계)」하니라
第 六 章 三身(삼신)과 四土(사토)
三身(삼신)이란 佛(불)의 三身(삼신)을 云(운)함이니 法, 報, 應(법, 보, 응) 三身(삼신)은 其名(기명)을 「法華論(법화론)」에서 取(취)한 台家所立(태가소립)으로써 眞(진)을 開(개)하고 應(응)을 合(합)한 三身(삼신)일새
一(일)에 法身(법신)이란 中道本有(중도본유)의 理體(리체)요
二(이)에 報身(보신)이란 因行功德(인행공덕)의 報(보)로써 顯發(현발)한 佛(불)의 實智(실지)라 此(차)를 二分(이분)하야 內證(내증)의 法樂(법락)을 受用(수용)하는 身(신)을 自受用報身(자수용보신)이라 名(명)하고 初地(초지) 已上(이상)의 菩薩(보살)에 應現(응현)되는 報身(보신)을 他受用報身(타수용보신)이라 名(명)하니 此(차)는 次(차)의 勝應身(승응신)과 同體異名(동체이명)이오
三(삼)에 應身(응신)이란 應化身(응화신)이라고도 云(운)하니 理智不二(리지불이)의 妙體(묘체)로부터 衆生(중생)을 化導(화도)하기 위하야 種種(종종)으로 應現(응현)하는 身(신)이라 此(차) 亦(역) 二分(이분)하야 初地(초지) 已上(이상)에 應現(응현)됨을 勝應身(승응신)이라 名(명)하니 卽上(즉상)의 他受用報身(타수용보신)이오 地前(지전)의 二乘(이승) 及(급) 凡夫(범부)에 應現(응현)됨을 劣應身(열응신)이라 名(명)하니 釋迦如來(석가여래)의 丈六身(장육신)이 卽是(즉시)라
此(차)의 三身(삼신) 中(중) 法身如來(법신여래)를 毘盧遮那(비로자나)라 名(명)하니 遍一切處(변일체처)라 譯(역)하고 報身如來(보신여래)를 盧舍那(노사나)라 名(명)하니 淨滿(정만) 또는 光明遍照(광명변조)라 譯(역)하고 應身如來(응신여래)를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이라 名(명)하니, 能仁寂黙覺(능인적묵각) 또는 度沃焦(도옥초)라 譯(역)하고 此(차) 三身(삼신)을 彼宗所立(피종소립)의 四土(사토)에 配分(배분)하면 法身(법신)은 寂光土(적광토)에, 報身(보신)은 實報土(실보토)에, 勝應身(승응신)은 方便土(방편토)에, 劣應身(열응신)은 同居土(동거토)에 處(처)하니라
自性, 受用, 變化(자성, 수용, 변화) 三身(삼신)은 其(기) 名(명)을 「佛地論(불지론)」에서 取(취)한 法相宗(법상종)의 所立(소립)으로서 此亦(차역) 眞(진)을 開(개)하고 應(응)을 合(합)한 三身(삼신)이니
一(일)에 自性身(자성신)이란 곧 上(상)의 法身(법신)이오
二(이)에 受用身(수용신)이란 二分(이분)하야 唯佛與佛(유불여불)의 境界(경계)로서 佛自身(불자신)만이 受用(수용)하는 法樂(법락)의 佛身(불신)을 自受用身(자수용신)이라 名(명)하니 此(차)는 大圓鏡智(대원경지)의 所變(소변)이오 또 初地(초지) 已上(이상)의 菩薩(보살)로 하야금 感見受用(감견수용)하는 法樂(법락)의 佛身(불신)을 他受用身(타수용신)이라 名(명)하니 上(상)의 勝應身(승응신)인 同時(동시)에 平等性智(평등성지)의 所現(소현)이오
三(삼)에 變化身(변화신)이란 初地(초지) 已前(이전)의 菩薩(보살) 또는 二乘(이승) 凡夫(범부0 及(급) 諸聚(제취)의 衆生(중생)에 對(대)하야 感見(감견)케 하는 種種(종종)의 變化身(변화신)인 同時(동시)에 成所作智(성소작지)의 所現(소현)이오 上(상)의 劣應身(열응신)이니라
法, 應, 化(법, 응, 화) 三身(삼신)은 「最勝王經(최승왕경)」所說(소설)로서 眞(진)을 合(합)하고 應(응)을 開(개)한 三山(삼신)이니 自性身(자성신)과 自受用身(자수용신)을 合(합)하야 法身(법신)이라 云(운)하고 應化身(응화신)을 開(개)하야 他受用身(타수용신)을 應身(응신), 變化身(변호신)을 化身(화신)이라 謂(위)하니라
그리고 法, 報, 化(법, 보, 화) 三身(삼신)은 大小乘(대소승)이 通用(통용)하나 其(기) 名(명)은 通(통)하고 其(기) 義(의)는 別(별)하야 大乘(대승)은 已上(이상) 諸義(제의)를 攝(섭)하되 小乘(소승)은 戒, 定, 慧, 解脫, 解脫知見(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 五品(오품)의 功德(공덕)을 法身(법신)이라 하고 王宮所生(왕궁소생)인 相好(상호)의 形(형)을 報身(보신)이라 하며 ****(미후) 等(등)으로 化現(화현)함을 化身(화신)이라 云(운)하나니라.
第 一 節 法身(법신)의 體性(체성)
法身(법신)의 體性(체성)을 論(논)함에 諸家(제가)가 不同(부동)하니
小乘(소승)은 理性(리성)을 不論(불론)하고 다만 戒, 定, 慧, 解脫, 解脫知見(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 五品(오품)의 功德(공덕)으로써 法身(법신)이라 하고 此(차)를 五分法身(오분법신)이라 稱(칭)하며
大乘(대승)의 諸家(제가)인 三論宗(삼론종)은 實相(실상)으로써 法身(법신)이라 하니 實相(실상)이란 諸法空(제법공)의 空理(공리)로서 眞空無相(진공무상)이 法身(법신)의 體性(체성)일새 無邊(무변)의 身相(신상)을 現(현)한다 함이오
法相宗(법상종)은 法身(법신)을 二種(이종)에 分(분)하야 一(일)은 三身總具(삼신총구)의 法身(법신)이오 一(일)은 三身(삼신) 中(중)의 法身(법신)이라 總相(총상)의 法身(법신)이란 淸淨法界(청정법계)의 眞如(진여)와 有爲, 無爲(유위, 무위)에 대한 四智(사지) 等(등)의 五法(오법)을 法身(법신)이라 함이오 別相(별상)의 法身(법신)이란 오직 無爲(무위)의 眞如(진여)를 法身(법신)이라 함이니 前(전)에 云(운)함과 如(여)하며
華嚴, 天台(화엄, 천태) 等(등)의 一乘宗(일승종)은 法身(법신)에 該攝(해섭)과 分相(분상)의 二門(이문)을 立(립)한 것이나 分相門(분상문)의 三身(삼신) 中(중)에서 所證(소증)의 理(리)를 法身(법신)이라 하고 能證(능증)의 智(지)를 報身(보신)이라 함이 法相宗(법상종)과 同一(동일)하나 其(기) 理論(이론)에 있어 法相宗(법상종)과 如(여)히 凝然眞常(응연진상)의 眞如(진여)가 않이오 華嚴(화엄)의 「萬有(만유)를 總該(총해)한 一眞法界(일진법계)」람과 天台(천태)의 「諸法(제법)을 圓融(원융)한 諸法實相(제법실상)」이람은 空理(공리)인 三論家(삼론가)의 云謂(운위)하는 實相(실상)이 않이오 또 法相宗(법상종)과 如(여)히 法身(법신)의 理(리)는 無爲(무위)요 報身(보신)의 智(지)는 有爲(유위)라 하야 無爲, 有爲(무위, 유위)의 性相(성상)이 各別(각별)하다고 云謂(운위)함이 않이라 眞如(진여)의 法(법)이 隨緣(수연)하야 萬德(만덕)의 智相(지상)을 現(현)함일새 理智(리지)가 本(본) 不二(불이)요 法性(법성)의 體(체)에 스사로 能照(능조)의 智用(지용)을 兼具(겸구)함일새 理, 智(리, 지)가 本(본) 一體(일체)라 理, 智(리, 지)가 共(공)히 無爲常住(무위상주)의 法爾(법이)요 無作(무작)이나 能照, 所照(능조, 소조)와 能緣, 所緣(능연, 소연)의 義相(의상)에 의하야 法, 報(법, 보)의 二身(이신)을 分(분)할 뿐이라며
眞言宗(진언종)은 地, 水, 火, 風, 空, 識(지, 수, 화, 풍, 공, 식)의 六大(육대)를 法身(법신)이라 云(운)하고 此(차) 六大(육대)는 事法(사법)이니만큼 法身(법신)에 本來(본래) 色相(색상)을 具(구)하고 人格(인격)을 有(유)함이 顯敎(현교)의 報化佛(보화불)과 如(여)하야 六大(육대)는 無碍涉人(무애섭인)할새 差別(차별)하기 難(난)하나 前(전) 五大(오대)를 自性身(자성신)인 理法身(리법신) 곧 胎藏界(태장계)의 大日(대일)이라 하고 第六(제육)의 識大(식대)를 自受用身(자수용신)인 智法身(지법신) 곧 金剛界(금강계)의 大日(대일)이라 하나니라
第 二 節 四種(사종)의 五法身(오법신)
一(일)은 「菩薩瓔珞經(보살영락경)」의 所說(소설)일새 其(기) 一(일)엔 如如智法身(영지법신)이니 如如(여여)의 理(리를 證(증)한 實智(실지)요 二(이)엔 功德法身(공덕법신)이니 十力, 四無畏(십력, 사무외) 等(등) 一切(일체)의 功德(공덕)이오 三(삼)엔 自法身(자법신)이니 地上菩薩(지상보살)에 應現(응현)하는 應身(응신)으로서 天台(천태)의 勝應身(승응신)이오 法相(법상)의 報身(보신) 中(중) 他受用身(타수용신)이며 四(사)엔 變化法身(변화법신)이니 台家(태가)의 劣應身(열응신)이오 法相家(법상가)의 變化身(변화신)이며 五(오)엔 虛空法身(허공법신)이니 諸相(제상)을 離(이)한 如如(여여)의 理(리)라 此(차) 中(중) 如如智法身(여여지법신)과 功德法身(공덕법신)이란 報身(보신)으로서 報德(보덕)을 智慧(지혜)와 功德(공덕)의 二(이)에 分(분)함이오 自法身(자법신)과 變化法身(변화법신)이란 應身(응신)으로서 應德(응덕)을 地上(지상)과 地前(지전)의 勝劣(승열)에 分(분)함이오 虛空法身(허공법신)이란 곧 法身(법신)인 바 總(총)히 法身(법신)이라 名(명)함은 皆是(개시) 法身(법신)의 德相(덕상)임으로써라
二(이)는 「分別聖位經偈(분별성위경게)」에 自性(자성) 及(급) 受用(수용)과 變化(변화) 竝(병) 等流(등류)의 佛德(불덕)이 三十六(삼십육)이오 皆同自性身(개동자성신)하야 竝法界身故(병법계신고)로 成三十七也(성삼십칠야)라심과 「禮懺經(예참경)」에 自性身(자성신) 外(외)에 法界身(법계신)을 別立(별립)하심의 證文(증문)에 의하야 四身(사신)의 外(외)에 法界身(법계신)이 有(유)함을 知(지)하고 此(차)를 解釋(해석)한 「五輪九字明秘釋(로윤구자명비석)」에 의한 密敎(밀교)의 所立(소립)일새 一(일)엔 自性法身(자성법신)이니 理智(리지)를 具足(구족)한 諸佛(제불)의 眞身(진신)이오 二(이)엔 受用身(수용신)이니 自受用(자수용)과 他受用(타수용)을 兼(겸)한 法身(법신)이오 三(삼)엔 變化法身(변화법신)이니 法爾(법이)의 劣應身(열응신)이오 四(사)엔 等流法身(등류법신)이니 法爾(법이)의 暫現速隱(잠현속은)과 九界隨類(구계수류)의 等流身(등류신)이오 五(오)엔 法界身(법계신)이니 곧 虛空法身(허공법신)이며
三(삼)은 「華嚴宗(화엄종)」의 所立(소립)일새 一(일)엔 法性生身(법성생신)이니 其(기) 生(생)을 論(논)컨대 如來(여래)의 身(신)은 法性(법성)에서 出生(출생)함일새요 二(이)엔 功德法身(공덕법신)이니 其(기) 德目(덕목)을 推察(추찰)컨대 如來所成(여래소성)의 萬德(만덕)일새요 三(삼)엔 變化法身(변화법신)이니 其(기) 機(기)에 對(대)한 應變(응변)을 論(논)하건대 感而不形者(감이불형자)-無(무)하고 機而不應者(감이불응자)-無(무)할새요 四(사)엔 實相法身(실상법신)이니 其(기) 妙(묘)를 言(언)컨대 不可思議(불가사의)일새요 五(오)엔 虛空法身(허공법신)이니 其(기) 大(대)를 稱(칭)컨대 虛空(허공)에 彌滿(미만)하야 萬有(만유)를 包括(포괄)할새라
四(사)는 「小乘(소승)」의 所立(소립)일새 곧 五種法身(오종법신)이 是(시)니라
第 三 節 法身(법신)의 無相(무상)과 有相(유상)
「涅槃經(열반경)」三十一(삼십일)에 「是故(시고)로 涅槃(열반)은 無相(무상)이니 善男子(선남자)야 無十相故(무십상고)라 何等爲十(하등위십)고 所謂(소위) 色相, 聲相, 香相, 味相, 觸相, 生, 住, 壞相, 男相, 女相(색상, 성상, 향상, 미상, 촉상, 생, 주, 괴상, 남상, 여상)이 是名(시명) 十相(십상)이라」시니 곧 娑婆世界(사바세계)의 一切(일체) 虛妄相(허망상)을 離(이)한 諸法空(제법공)의 一實相(일실상)을 云(운)하심에 依(의)하야 法身(법신)은 無色 無形(무색 무형)이라 하고 色相(색상) 莊嚴(장엄)이 無(무)하다 하나
台家(태가)는 이를 別敎(별고) 已下(이하)의 說(설)이라 貶(폄)하고 圓敎(원교)의 極意(극의)에 依(의)하면 法身(법신)이 결코 無相(무상)이 않이요 法性(법성)의 體理(체리)에 依, 正, 心(의, 정, 심)을 具(구)한지라 眞空無相(진공무상)이 顯現(현현)하야 依, 正(의, 정)의 二法(이법)도 究竟(구경)이 淸淨(청정)하다 云(운)하고
「法華經(법화경)」方便品(방편품)에 「是法(시법)이 住法位(주법위)일새 世間相(세간상)이 常住(상주)라」심과 同提婆品(동제바품)에「微妙(미묘)의 淨法身(정법신)에 具相三十二(구상삼십이)라」심과
「涅槃經(열반경)」 陳如品(교진여품)에 「色是無相(색시무상)이나 因滅是色(인멸시색)하야 獲得解脫(획득해탈)의 常住色(상주색)이라」심과 「仁王經(인왕경)」觀空品(관공품)에 「法性(법성)의 五陰(오음)인 受, 想, 行, 識(수, 상, 행, 식)이 常, 樂, 我, 淨(상, 락, 아, 정)이라」심을 引證(인증)하였으며
四明尊者(사명존자)도 「妙種**(묘종초)」의 中(중)에 此等(차등)의 文(문)을 引(인)하야 寂光有相(적광유상)의 旨(지)를 顯(현)한바 一家(일가)의 妙旨(묘지)에 深符(심부)하는 同時(동시)에 「萬一(만일) 祖書(조서) 中(중)에 理性(이성)을 指(지)하야 無相寂滅(무상적멸)이라 云(운)함이 有(유)함은 理性(이성)엔 染碍(염애)의 相(상)이 無(무)할새 此(차) 情相(정상)을 遮(차)하는 遮情門(차정문)의 一端(일단)이니 染碍(염애)의 情相(정상)이 旣亡(기망)함에 따라 性具(성구)의 妙相(묘상)이 彌顯(미현)됨을 當知(당지)」하랐으니
要(요)컨대 無相說(무상설)은 「凡所有相皆是虛妄(범소유상개시허망)이라」심에 依(의)한 諸法空(제법공)에 偏(편)하고 有相說(유상설)은 「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라」심에 依(의)한 實相(실상)에 偏(편)함이 不無(불무)하니 修者(수자)는 自證摘發(자증적발)할지어다
第 四 節 法身說法(법신설법)
法身說法(법신설법)은 密敎(밀교)의 常談(상담)이오 法身無說(법신무설)은 顯敎(현교)의 通途(통도)로 하는 바 오직 台家(태가)에서 法身有說(법신유설)을 主張(주장)하야 「法身說法(법신설법)-一切(일체)의 德(덕)을 具(구)한지라 엇지 說法(설법)의 義(의)가 無(무)하랴」云(운)하고 法身說法(법신설법)으로써 一宗(일종)의 眉目(미목)으로 하야 顯密(현밀)이 分敎(분교)하였으니 佛(불)의 三身(삼신) 中(중) 法身(법신)이 佛(불)의 眞身(진신)이오 報, 應(보, 응) 二身(이신)은 爲他現身(위타현신)이라 衆生(중생)의 機緣(기연)에 應(응)한 隨他意(수타의)의 法(법)일새 爲他現(위타현)의 報, 應(보, 응) 二身(이신)이 法(법)을 說(설)하고 法身(법신)이란 眞如法性(진여법성)의 理體(리체)라 寂滅無相(적멸무상)일 뿐이오 說法(설법)의 義(의)가 無(무)하다 함은 顯敎(현교)의 主張(주장)이오
密敎(밀교)의 主張(주장)은 「諸法(제법)을 具(구)한 性, 相(성, 상)이 常爾(상이)라 人, 法(인, 법)이 不二(불이)일새 엇지 法身(법신)의 自說(자설)을 妨(방)하랴 他機(타기)에 投(투)하는 隨他意(수타의)의 敎門(교문)이 않이오 自性身(자성신)의 自說(자설)일새 十界(십계)가 悉皆(실개) 自性(자성)에 住(주)하는 位(위)인지라 誰(수)가 能化(능화)며 所化(소화)뇨 各者(각자) 內證(내증)의 法門(법문)을 演(연)함으로써 說法(설법)이라 云(운)함이니 오직 自證說法(자증설법)과 加持說法(가지설법)이 有(유)할 뿐이라」하니라
修者(수자)는 오직 「淨名疏(정명소)」에 「法身(법신)이 無緣(무연)에도 冥資(명자)하야 一切(일체)를 無說而說(무설이설)이시니 卽是法身說法(법신설법)」이람과 「四明敎行錄(사명교행록)」四(사)에 「當知(당지)하라 刹刹塵塵(찰찰진진)이 俱說俱聽(구설구청)하야 說聽(설청)을 同時(동시)하니 妙哉(묘재)라 此境(차경)이여 不可以言想(불가이언상)으로 求(구)며 不可以凡情(불가이범정)으로 測(측)이랴 是大總相法門(시대총상법문)으로서 寂而常照(적이상조)의 法身(법신) 冥資之境也(명자지경야)」람을 再吟味(재음미)할진져
第 七 章 本迹二門(본적이문)
初地(초지) 已上(이상)의 法身菩薩(법신보살)이나 佛(불)이 自己(자기)의 實身(실신)에서 許多(허다)의 應化(응화)를 變作(변작)하야써 衆生(중생)을 化導(화도)하는 妙德(묘덕)을 具(구)한 그 實身(실신)을 本地(본지)라 云(운)하고 化身(화신)을 垂跡(수적)이라 謂(위)하니 地(지)란 能生(능생)의 義(의)로서 利物(이물)하기 爲(위)하야 本身(본신)에서 萬化(만화)를 垂(수)함일새
能現(능현)의 本(본)을 本地(본지)라 하고 所現(소현)의 末(말)을 垂跡(수적)이라 名(명)하는 바 本(본)에서 迹(적)에 由(유)하야 本(본)을 知(지)하는 一佛(일불)과 十菩薩(십보살)의 妙德(묘덕)이니라
그런데 此(차) 本迹(본적)에 就(취)하야 台家(태가)는 本高迹下(본고적하), 本下迹高(본하적고), 本迹俱下(본적구하)의 四句(사구)로써 高下(고하)를 分別(분별)하니 初地菩薩(초지보살)이 二地(이지)의 身(신)을 現(현)하거나 或(혹)은 八相成道(팔상성도)의 相(상)을 示(시)함과 如(여)함은 本下迹高(본하적고)이며 佛(불)이 法身(법신)에서 化身(화신)을 垂(수)하고 觀音菩薩(관음보살)이 三十三身(삼십삼신)을 現(현)함과 如(여)함이 本高迹下(본고적하)일새 此(차)를 通途(통도)하고 法華經(법화경)을 釋(석)함에 本地門(본지문)과 垂迹門(수적문)의 二門(이문)으로써 大判(대판)하나니 一經(일경) 二十八品(이십팔품) 中(중) 前(전) 十四品(십사품)은 迹門(적문)의 序, 正, 流通(서, 정, 유통)의 三分(삼분)이오 後(후) 十四品(십사품)은 本門(본문)의 三分(삼분)인바
迹門(적문)의 法華(법화)는 釋迦如來(석가여래)께서 成道後(성도후) 法華會座(법화회자)에 至(지)하기까지 四十餘年間(사십여년간)에 있어 諸經(제경)의 說法(설법)에 就(취)하야 「三乘法(삼승법)은 方便(방편)이오 一乘法(일승법)은 眞實(진실)이라」云(운)하사 所說(소설)의 敎理上(교리상)에 開權顯實(개권현실)하심이오
本門(본문)의 法華(법화)는 釋迦(석가)의 身(신)에 就(취)하야 王宮(왕궁)에 生(생)하고 伽倻(가야)에 成道(성도)하야 于今(우금)에 至(지)하기까지의 此身(차신)은 我(아)의 實身(실신)이 않이라 我(아)는 久遠實成(구원실성)의 法身(법신)으로서 衆生(중생)을 濟度(제도)하기 爲(위)하야 一時(일시) 垂迹(수적)하고 伽倻成道(가야성도)한 應身(응신)을 現(현)하였을 뿐이라 하사 自己(자기)의 身相(신상)에 있어 開迹顯本(개적현본)하신지라 以此見之(이차견지)컨대 法華(법화) 已前(이전)부터 法華上(법화상) 開權顯實(개권현실)의 說法(설법)에 至(지)하기까지 悉皆(실개) 垂迹身(수적신)의 垂迹說(수적설)이시오 後半(후반)이 本門(본문) 法華(법화)일새
此(차) 本迹(본적)의 義(의)는 佛身上(불신상)의 眞, 應(진, 응) 二身(이신) 곧 法, 應(법, 응) 二身(이신)의 關係(관계)로서 法華(법화) 已前(이전)에도 諸(제) 大乘經(대승경)에 此(차) 義(의)-**滿(미만)하나 다만 大乘菩薩(대승보살)에 限(한)한 對說(대설) 뿐이오 아직 二乘(이승) 凡夫(범부)에 對(대)하신 說明(설명)은 않이였으나 二乘, 凡夫(이승, 범부)에 對(대)해서도 開說(개설) 證明(증명)하심은 本門法花(본문법화)의 所說(소설)뿐이니라
菩薩(보살)의 授記(수기) 作佛(작불)은 已前(이전)의 諸經(제경)에도 不少(불소)하였으나 聲聞(성문)의 授記(수기)는 迹門法花(적문법화)가 根本(근본)이 될지나 三昧(삼매) 境界(경계)가 多少(다소) 差異(차이)할 뿐이오 諸經(제경)이 同一說(동일설)이니라
그러나 一相(일상) 一行(일행)인 一說(일설)의 實相(실상)이란 不可思議(불가사의)로서 無量(무량)의 說法(설법)을 要(요)하나 因果(인과) 自他(자타)를 總論(총론)함에 本, 迹(본, 적)의 二種(이종)이 有(유)하야 各其(깍기) 十不可思議(십불가사의) 곧 十妙(십묘)를 具(구)하니라
第 一 節 迹門十妙(적문십묘)
一(일)에 境妙(경묘)란 卽(즉) 理境(리경)으로서 十如等(십여등)의 境(경)이니 心佛及衆生(심불급중생) 是三無差別(시삼무차별)의 不可思議(불가사의)라 經(경)에 「唯佛與佛乃能窮盡諸法實相(유불여불내능궁진제법실상)이라」시는 同時(동시)에 「所謂(소위) 諸法(제법)인 如是相(여시상) 如是性(여시성) 等(등)이라」云(운)하심이 是(시)니라 此(차)에 六境(육경)이 亦有(역유)하니 一(일)에 十如(십여)의 境(경), 二(이)에 十二因緣(십이인연)의 境(경), 三(삼)에 四諦(사체)의 境(경), 四(사)에 二諦(이체)의 境(경), 五(오)에 三諦(삼체)의 境(경), 六(육)에 一諦(일체)의 境(꼉)이오
二(이)에 智妙(지묘)란 智(지)는 卽(즉) 境(경)을 全知(전지)하야 起(기)하는 智(지)로서 境妙(경묘)로써일새 智亦隨(지역수)라 函蓋相應(함개상응)의 不可思議(불가사의)니 經(경)에 「我所得智慧(아소득지혜) 微妙最第一(미묘최제일)이라」云(운)하심이 是(시)요
三(삼)에 行妙(행묘)란 行(행)은 곧 所修(소수)의 行(행)으로서 妙智(묘지)의 行(행)을 引導(인도)할새 亦隨(역수)하는 行不可思議(행불가사의)니 經(경)에 「行此諸道已 (행차제도이) 道場得成果(도량득성과)라」云(운)하심이 是(시)요
四(사)에 位妙(위묘)란 位(위)는 곧 諸行所歷(제행소력)의 位次(위차)라 十住(십주) 乃至(내지) 十地(십지)가 是(시)로서 行妙(행묘)로써일새 所證(소증)의 位(위) 亦(역) 隨(수)인 位不可思議(위불가사의)니 經(경)에 「乘是實乘遊於四方(승시실승유어사방)이라」云(운)하심이 是(시)요
五(오)에 三法妙(삼법묘)란 三法(삼법)은 곧 眞性, 觀照, 資成(진성, 관조, 자성)의 三法(삼법)으로서 眞性(진성)은 是(시) 理(리)요 觀照(관조)는 是(시) 慧(혜)며 資成(자성)은 是(시) 定(정)이니 此(차) 三法(삼법)은 佛(불)의 所證(소증)이라 妙不可思議(묘불가사의)요
六(육)에 感應妙(감응묘)란 感(감)은 衆生(중생)이오 應(응)은 佛(불)이라 衆生(중생)이 能(능)히 圓機(원기)로써 佛(불)을 感(감)하고 佛(불)은 곧 妙應(묘응)으로써 應(응)할새 水(수)가 上昇(상승)하지 않고 月(월)이 下降(하강)치 않은 그대로 一月(일월)이 衆水(중수)에 普賢(보현)함과 如(여)한 妙不可思議(묘불가사의)니 經(경)에 「一切衆生(일체중생) 皆是吾子(개시오자)라」云(운)하심이 是(시)요
七(칠)에 神通妙(신통묘)란 如來無謨(여래무모)의 應(응)이 善權(선권)인 方便(방편)인지라 機宜(기의)에 稱適(칭적)하야 變現(변현)이 自在(자재)하니 是(시)이 妙不可思議(묘불가사의)라 經(경)에 「今佛世尊(금불세존) 入于三昧(입우삼매) 是不可思議(시불가사의) 現希有事(현희유사)라」하심이 是(시)요
八(팔)에 說法妙(설법묘)란 大, 小乘(대, 소승) 偏, 圓(편, 운)의 法(법)을 說(설)하사 咸皆(함개) 衆生(중생)으로 하야금 佛(불)의 知見(지견)에 悟入(오입)케 하심이 妙不可思議(묘불가사의)라 經(경)에 「如來能種種分別巧說諸法(여래능종종분별교설제법) 言辭柔軟(언사유연) 悅可衆心(열가중심)이라」심이 是(시)요
九(구)에 眷屬妙(권속묘)란 佛(불)의 出世(출세)에 따라 十方(시방)의 諸大菩薩(제대보살)이 皆來贊輔(개래찬보)함이라 或(혹)은 神通(신통)으로써 來生(래생)하고 或(혹)은 宿願(숙원)으로써 來生(래생)하며 或(혹)은 應現(응현)으로써 來生(래생)하야 皆名眷屬(개명권속)하니 妙不可思議(묘불가사의)요
十(십)에 利益妙(이익묘)란 佛(불)이 法(법)을 說(설)하사 一切衆生(일체중생)으로 하야금 咸皆(함개) 本城(본성)을 開悟(개오)케 하야써 佛(불)의 知見(지견)에 入(입)케 하심이 時雨(시우)가 普洽(보흡)하야 大地(대지)가 利益(이익)을 蒙(몽)함과 같으니 是(시)가 妙不可思議(묘불가사의)니라
第 二 節 境(경)
「金光明經(금광명경)」에 「唯有如如(유유여여) 如如智(여여지) 是名法身(시명법신)이라」심의 如如(여여)란 理(리)요 곧 境(경)이라 그리하야 如如(여여)의 理法身(리법신)이 胎藏界(태장계)의 大日如來(대일여래)요 如如(여여)의 智法身(지법신)이 金剛界(금강계)의 大日如來(대일여래)라
그리고 枝末無明(지말무명)인 色, 聲, 香, 味, 觸, 法(색, 성, 향, 미, 촉, 법)의 六境(육경)과 根本無明(근본무명)인 眼, 耳, 鼻, 舌, 身, 意(안, 이, 비, 설, 신, 의)의 六根(육근)과 此(차)의 地, 水, 火, 風(지, 수, 화, 풍) 四大假合(사대가합)인 色蘊(색온)에 根據(근거)한 彼(피) 六識(육식)인 受, 想, 行, 識(수, 상, 행, 식)四溫(사온)은 實相(실상)의 空華(공화)인 同時(동시)에 그대로 如如(여여)의 境(경)이오 相(상)일새 그의 本因(본인)인 如如(여여)의 性理(성리)를 推究(추구)하고 또 實證(실증)해야 한다
蓋(개) 如是相, 如是性, 如是體, 如是力, 如是作, 如是因, 如是緣, 如是果, 如是報, 本末究竟(여시상, 여시성, 여시체, 여시력, 여시작, 여시인, 여시연, 여시과, 여시보, 본말구경) 等(등) 法華經(법화경) 所說(소설)이신 十如(십여)의 境(경)은 實證後(실증후) 悟(오)의 境(경)이오
無明, 行, 識, 名色, 六處,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무명, 행, 식, 명색, 육처,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等(등) 十二因緣支(십이인연지)란 衆生(중생)의 三世(삼세)에 涉(섭)한 六途輪廻(육도윤회)의 次第緣起(차제연기)인 바 此(차)를 觀察(관찰)하야 入涅槃(입열반)을 求(구)하는 緣覺(연각)의 境(경)이오
衆生(중생)의 生, 老, 病, 死(생, 로, 병, 사) 四苦(사고)를 主(주)로 한 諸苦果(제고과)의 集因(집인)을 斷(단)하고 修道證滅(수도증멸)하는 苦, 集, 滅, 道(고, 집, 멸, 도) 四諦(사체)란 此(차)의 觀法(관법)을 修(수)하야 諸法空(제법공)을 證(증)하는 聲聞(성문)의 境(경)이오
色法(색법)이 空(공)일새 心法(심법)도 假(가)라 幻相, 假名(환상, 가명)을 離(이)한 諸法實相(제법실상)의 中道(중도)에 安住(안주)함은 空, 假, 中(공, 가, 중) 三諦(삼체)의 境(경)이오
衆生(중생)의 業力(업력)으로 空(공)에 依(의)하야 有(유)라 執着(집착)하는 俗諦(속체)를 離脫(이탈)하고 中道實相(중도실상)의 眞諦(진체)에 着眼(착안)함은 眞, 俗(진, 속) 二諦(이체)의 境(경)이오
一諦(일체)의 境(경)이란 眞諦(진체)의 一境(일경)으로서 以上(이상) 五境(오경)은 實相(실상)을 目的(목적)한 迷(미)의 境(경)이니라
그러나 迷悟(미오)의 差(차)가 有(유)할 뿐이오 境(경)의 異(이)함이 않일새 境(경)의 如如理(여여리)를 證(증)하고 悟(오)의 如如智(여여지)가 生(생)하면 本迹(본적)의 全妙(전묘)를 把握(파악)할지니라
第 三 節 本門十妙(본문십묘)
一(일)에 本因(본인)이란 本初(본초)에 菩提心(보리심)을 發(발)하고 菩薩道(보살도)를 修(수)한 所修(소수)의 因(인)이오 또 本具(본구)의 因(인)으로서 經(경)에 「我本行菩薩道時(아본행보살도시) 所成壽命今猶不盡(소성수명금유부진)이라」심이 是(시)요
二(이)에 本果(본과)란 本初所行圓妙(본초소행원묘)의 因(인) 그대로 契得(계득)하야 常, 樂, 我, 淨(상, 락, 아, 정)을 究竟(구경)할새니 乃是本具(내시본구)의 果(과)로서 經(경)에 「我成佛已來甚大久遠(아성불이래심대구원)이라」심이 是(시)요
三(사)에 國土(국토)란 娑婆卽寂光土(사바즉적광토)라 本因(본인) 本果(본과)를 本具(본구)한 寂光土(적광토)일새 經(경)에 「自從是來(자종시래) 我常在(아상재) 此娑婆世界(차사바세계) 說法敎化(설법교화)라」심이 是(시)요
四(사)에 感應(감응)이란 能感, 所應(능감, 소응)의 寂體照用(적체조용)이 本具(본구)하야 如鏡對物(여경대물)일새 經(경)에 「若有衆生(약유중생) 來至我所(래지아소) 我以佛眼(아이불안) 觀其信等(관기신등) 諸根利鈍(제근이둔)이라」심이 是(시)요
五(오)에 神通(신통)이란 이미 諸根(제근)을 觀察(관찰)할새 本具(본구)의 慈悲(자비) 그대로 可度(가도)의 衆生(중생)에 通(통)하야 그로 하야금 神秘(신비)의 境(경)에 入(입)케 하실새 經(경)에 「如來秘密神通力(여래비밀신통력)이라」심과 「示己身他身(시기신자신) 示己事他事(시기사타사)라」심이 是(시)요
六(육)에 說法(설법)이란 佛(불)은 常住道場(상주도량)하시고 常轉法輪(상전법륜)하실새 四辯(사변 : 法, 義, 辭, 樂說無碍辯)을 本具(본구)하사 其(기) 機(기)에 照應(조응)할새 衆生(중생)이 各得其所(각득기소)라 經(경)에 「此等我所化令發大道心(차등아소화령발대도심)하고 今皆住不退(금개주불퇴)라」심이 是(시)요
七(칠)에 眷屬(권속)이란 本地(본지)는 一切衆生(일체중생)의 廻向處(회향처)요 歸依處(귀의처)일새 九界(구계)의 衆生(중생)이란 곧 其子(기자)요 眷屬(권속)이라 經(경)에 「此諸菩薩下方空中住(차제보살하방공중주) 此等是我子我則其父(차등시아자아즉기부)라」심이 是(시)요
八(팔)에 涅槃(열반)이란 水的實我(수적실아)와 波的應化(파적응화)일새 有緣旣度(유연기도)에 皆取入滅(개취입멸)이라 經(경)에 「然今(연금) 非實滅度(비실멸도) 而便唱言(이변창언) 當取滅度(당취멸도)라」심이 是(시)요
九(구)에 壽命(수명)이란 入滅(입멸)에 伴(반)한 壽命長短(수명장단)이나 化佛(화불) 그대로 本佛(본불)의 權現(권현)일새 經(경)에 「處處有說(처처유설) 名字不同(명자부동) 年紀大小(연기대소)라」심이 是(시)요
十(십)에 利益(이익)이란 本願(본원)이 通應(통응)하야 有緣眷屬(유연권속)을 饒益(요익)할새 經(경)에 「皆令得歡喜(개령득환희)라」심인져
第 四 節 本迹相攝(본적상섭)
迹中(적중)엔 因(인)을 開(개)하고 果(과)를 合(합)하니 곧 習果(습과)와 報果(보과)를 合(합)하야 三法妙(삼법묘)라 하고 本中(본중)엔 因(인)을 合(합)하야 果(과)를 開(개)하니 곧 習果(습과)를 開(개)하야 報果(보과)를 出(출)하니 國土妙(국토묘)가 是(시)라 또 迹中(적중)엔 境, 智, 行, 位(경, 지, 행, 위)를 明示(명시)하였으나 本中(본중)엔 此(차)를 通(통)하야 因妙(인묘)라 하고 果妙(과묘)는 곧 迹中(적중)의 三法妙(삼법묘)며 感應, 神通, 說法, 眷屬(감응, 신통, 설법, 권속)의 四妙(사묘)는 本, 迹(본, 적)이 相同(상동)하니라
그리고 本中(본중)에 涅槃, 壽命(열반, 수명)의 二妙(이묘)를 開(개)함은 釋迦佛(석가불)이 法華會(법화회)에 在(재)하사 入滅(입멸)을 未遂(미수)하셨으나 久遠(구원)의 諸佛(제불)이싱 迦葉, 燈明佛(가섭, 등명불) 等(등)이 皆旣法華會(개기법화회)에서 入滅(입멸)을 說破(설파)하셨을새 本佛(본불)도 必是(필시) 入滅(입멸)하심을 前提(전제)로 하야 開出(개출)함이오 迹中(적중)에 此(차) 義(의)가 無(무)함은 釋迦佛(석가불)이 비록 入滅(입멸)을 唱言(창언)하시고 未遂(미수)하셨음으로써이나 最後(최후)의 利益妙(이익묘)와 彼此(피차) 相同(상동)하니라
第 八 章 十不二門(십불이문)
荊溪(형계) 湛然尊者(잠연존자)의 所明(소명)인 「法華玄義(법화현의)」에 本迹十妙(본적십묘)를 釋(석)하야 十種(십종)의 不二門(불이문)을 立(립)하고 此(차)를 一念(일념)의 心(심)에 歸結(귀결)하야써 觀法(관법)의 大綱(대강)을 示(시)하고 그 深意(심의)를 發(발)하였으니 그의 本迹(본적) 十妙(십묘)와 十不二門(십불이문)의 相攝(상섭)을 對照圖示(대조도시)하면 左(좌)와 如(여)하니라
一(일)에 色心(색심)이란 色(색)은 有形質碍(유형질애)의 法(법)으로서 知覺(지각)의 用(용)이 無(무)하나 心(심)은 形質(형질)이 無(무)하되 知覺緣慮(지각연려)의 用(용)이 有(유)한 者(자)요
二(이)에 內外(내외)란 外(외)는 衆生(중생)이나 諸佛(제불)의 依報(의보)며 內(내)는 오직 自己(자기)의 心法(심법)이오
三(삼)에 修證(수증)이란 修(수)는 修治造作(수치조작)의 功(공)이며 證(증)은 本有不改(본유불개)의 體性(체성)을 證(증)함이오
四(사)에 因果(인과)란 因(인)은 能生(능생)의 行(행)이며 果(과)는 所生(소생)의 德(덕)이오
五(오)에 染淨(염정)이란 染(염)은 無明(무명)의 用(용)이며 淨(정)은 法性(법성)의 用(용)이오
六(육)에 依正(의정)이란 二報(이보)의 依正(의정)이니 依報(의보)는 衆生(중생) 所依(소의)의 國土(국토)와 資具(자구) 等(등)이며 正報(정보)는 能依(능의)의 心身(심신)이오
七(칠)에 自他(자타)란 三法(삼법)에 就(취)하야 論(논)컨대 他(타)는 自己(자기)에 對(대)한 佛法(불법)과 衆生法(중생법)이며 自(자)는 二法(이법)에 對(대)한 心法(심법)이오
八(팔)에 三業(삼업)이란 身業(신업)은 身(신)의 發動(발동)이며 口業(구업)은 口(구)의 發動(발동)이며 意業(의업)은 意(의)의 發動(발동)이오
九(구)에 權實(권실)이란 權(권)은 九界(구계)와 七方便(칠방편)의 法(법)이며 實(실)은 佛界圓實(불계원실)의 法(법)이오
十(십)에 受潤(수윤)이란 譬喩(비유)의 名(명)으로서 受(수)는 領納(영납)의 義(의)니 五乘差別的(오승차별적) 能受(능수)의 根機(근기)며 潤(윤)은 沾潤(첨윤)의 義(의)니 如來(여래) 所說(소설)이신 能潤(능윤)의 法雨(법우)라
此(차)의 十皆 不二(불이)라 名(명)함은 法華(법화) 已前(이전)은 色, 心(색, 심) 等(등)에 對(대)하신 說法(설법)이 一一(일일)히 隔異(격이)함으로 二(이)라 名(명)하나 法華(법화)에 至(지)하얀 一一(일일) 隔異的偏權(격이적편권)의 法(법) 그대로 實相(실상)의 理(리)를 開顯(개현)하신지라 諸法實相(제법실상)은 平等一如(평등일여)의 一法(일법)으로서 隔然不融(격연불융)의 法(법)이 無(무)할새 總(총)히 不二(불이)라 名(명)하니라
第 一 節 十無碍(십무애)
一(일)에 用周無碍(용주무애)란 佛(불)이 刹塵(찰진) 等(등)의 處(처)에서 法界身雲(법계신운)을 現(현)하야 無邊(무변)의 業用(업용)을 起(기)함이오
二(이)에 相遍無碍(상변무애)란 佛(불)이 十方一切世界(시방일체세계) 無量(무량)의 佛刹(불찰)에서 種種(종종)히 神變(신변)하야 皆是如來(개시여래) 示現受生(시현수생)의 相(상)이 有(유)하되 相(상)을 現(현)함에 隨(수)하야 衆相(중상)이 皆具(개구)할새 萬德(만덕)이 斯圓(사원)함이오
三(삼)에 寂用無碍(적용무애)란 佛(불)은 三昧(삼매)에 常住(상주)하사 爲寂不妨(위적불방)이실새 利物化用(이물화용)이시라 卽定卽用(즉정즉용)에 無碍自在(무애자재)함이오
四(사)에 依起無碍(의기무애)란 佛(불)은 寂用(적용)에 無心(무심)하시되 能(능)히 海印三昧(해인삼매)의 力(력)에 依(의)하사 無碍(무애)의 用(용)을 起(기)하심이오
五(오)에 眞應無碍(진응무애)란 眞(진)은 곧 遮那眞身(자나진신)이오 應(응)은 곧 應身釋迦(응신석가)라 眞身(진신)은 是體(시체)요 應身(응신)은 是用(시용)이니 體全而起用(체전이기용)이라 用卽是體(용즉시체)일새 釋迦(석가)와 遮那(자나)가 圓融自在(원융자재)하야 本無二體(본무이체)함이오
六(육)에 分圓無碍(분원무애)란 分(분)은 곧 支分(지분)이오 圓(원)은 곧 全身(전신)이라 支分(지분)이 全身(전신)을 不碍(불애)하고 全身(전신)이 支分(지분)을 不碍(불애)할새 遮那(자나) 一一(일일)의 身分(신분)인 手足眼耳乃至(수족안이내지) 一毛(이모)라도 皆是(개시) 遮那(자나)의 全身(전신)임으로써요
七(칠)에 因果無碍(인과무애)란 佛(불)은 昔(석)에 菩薩(보살)의 行(행)을 修(수)하실새 波羅密(바라밀)의 因(인)을 修(수)하야 波羅密(바라밀)의 果(과)를 證(증)하신지라 所受(소수)의 報身(보신)과 所成(소성)의 事業(사업)도 亦是(역시) 十方一切(시방일체)의 菩薩身靈(보살신령)을 現(현)함이 自在無碍(자재무애)함이오
八(팔)에 依正無碍(의정무애)란 依(의)는 依報(의보)라 곧 佛所依(불소의)의 國土(국토)요 正(정)은 正報(정보)니 곧 佛能依(불능의)의 色身(색신)일새 依正(의정)이 相入(상입)하야 二智無碍(이지무애)함이오
九(구)에 潛入無碍(잠입무애)란 佛智(불지)가 衆生(중생)의 心內(심내)에 潛入(잠입)함이 如來藏(여래장)이라 衆生(중생)을 作(작)하되 自性(자성)을 不失(불실)함이 大海(대해)의 水(수)가 風(풍)에 依(의)하야 波(파)를 作(작)하되 濕性(습성)을 不失(불실)함과 如(여)함이오
十(십)에 圓通無碍(원통무애)란 佛(불)은 大法界(대법계)를 融通(융통)하야 其(기) 身(신)을 作(작)하되 理(리)론 不具(불구)함이 無(무)하고 事(사)론 不攝(불섭)함이 無(무)할새 一多(일다), 依正(의정), 人法(인법), 因果(인과)가 彼此(피차) 無碍(무애)함이니 「華嚴演義秒(화엄연의초)」三(삼)의 所說(소설)이니라
第 二 節 十無盡藏(십무진장)
一(일)에 信藏(신장)이란 菩薩(보살)의 淨信(정신)이 堅固(견고)하야 諸法空(제법공)을 解(해)하는 心(심)이 退轉(퇴전)치 않을새 如來家(여래가)에 生(생)하야 信解(신해)를 增長(증장)하는지라 一切(일체)의 佛法(불법)을 聞持(문지)하고 衆生(중생)을 爲(위)하야 所聞(소문)을 悉皆(실개)히 信解(신해)케 함으로써요
二(이)에 戒藏(계장)이란 菩薩(보살)이 三世諸佛(삼세제불)의 無盡淨戒(무진정계)를 奉持(봉지)하야 具足圓滿(구족원만)할새 毁犯(훼범)이 無(무)한지라 衆生(중생)이 顚倒(전도)하야 破戒(파계)함을 念慮(염려)하고 菩提(보리)를 成就(성취)하야써 眞實(진실)의 法(법)을 說(설)함에 따라 一切(일체)의 顚倒(전도)를 遠離(원리)케 하야 此(차)의 淨戒(정게)를 同護共持(동호공지)케 하리람으로써요
三(삼)에 **藏(참장)이란 菩薩(보살)이 過去(과거)를 憶念(억념)할새 **天愧地(참천괴지)를 不知(부지)하고 諸眷屬(제권속)에 對(대)하야 衆惡(중악)을 造(조)한바 今(금)에야 諸佛(제불)이 知(지)하심을 覺得(각득)함에 따라 **心(참심)이 生(생)하는지라 此(차)를 發露懺悔(발로참회)하고 梵行(범행)을 修行(수행)하야 菩提(보리)를 證得(증득)하고 衆生(중생)을 爲(위)하야 眞實(진실)의 法(법)을 說(설)하야 **(참)을 修(수)케함으로써요
四(사)에 愧藏(괴장)이란 菩薩(보살)이 往昔(왕석)을 自愧(자괴)하야써 五欲(오욕)을 爲(위)하야 衆生(중생)에게 惡法(악법)을 敢行(감행)한 垢穢(구예)의 身(신)임을 感(감)하는 同時(동시)에 諸佛(제불)이 知(지)하심을 覺得(각득)함에 따라 愧心(괴심)이 生(생)하는지라 이를 發露懺悔(발로참회)하고 梵行(범행)을 修行(수행)하야 速(속)히 菩提(보리)를 證得(증득)하고 衆生(중생)에게 眞實(진실)의 法(법)을 說(설)하야 各自(각자)의 愧心(괴심)이 亦生(역생)케 함으로써요
五(오)에 聞藏(문장)이란 菩薩(보살)이 世間(세간) 出世間(출세간)의 一切諸法(일체제법)을 聞(문)하고 諸佛, 菩薩, 緣覺, 聲聞(제불, 보살, 연각, 성문)의 出現(출현)과 入滅(입멸)을 悉皆(실개) 能知(능지)하는지라 衆生(중생)은 多聞(다문)이 無(무)하야 此(차)의 一切法(일체법)을 不知(부지)할새 此(차)를 念慮(염려)하고 맛당히 多聞藏(다문장)을 持(지)하야 菩提(보리)를 證得(증득)하고 衆生(중생)을 爲(위)하야 眞實(진실)의 法(법)을 說(설)하리람으로써요
六(육)에 施藏(시장)이란 菩薩(보살)의 稟性(품성)이 仁慈(인자)하야 一切(일체) 布施(보시)를 常行(상행)할새 一念(일념)의 悔恨心(회한심)이 無(무)한지라 果報(과보)의 勝劣(승열)을 不求(불구)하고 다만 法界衆生(법계중생)을 利益(이익)케 할 뿐일새요
七(칠)에 慧藏(혜장)이란 菩薩(보살)이 智慧(지혜)를 具足(구족)하야 世間, 出世間(세간, 출세간)의 一切諸法(일체제법)을 知(지)하는지라 業報(업보)에 從(종)하야 造(조)하는 바의 諸法(제법)은 悉皆(실개)히 虛僞(허위)요 堅固(견고)가 않이라 衆生(중생)으로 하야금 그 實性(실성)을 知(지)케 하고자 廣爲演說(광위연설)할 智慧(지혜)를 含藏(함장)함일새요
八(팔)에 念藏(염장)이란 菩薩(보살)은 痴惑(치혹)을 捨離(사리)한 淨念(정념)을 具足(구족)한지라 能(능)히 一生(일생) 乃至(내지) 百千生(백천생)의 成住壞空(성주괴공)인 一劫(일겁)乃至(내지) 無數劫(무수겁)에 있어 一切諸佛(일체제불)이 出世(출세)하심을 憶知(억지)할새 諸佛(제불)의 名號(명호)와 授記(수기)와 修多羅(수다라) 等(등)의 十二部經(십이부경)을 說(설)하고 또 衆會(중회)의 根性(근성)을 悉(실) 能(능)히 憶念(억념)함일새요
九(구)에 持藏(지장)이란 菩薩(보살)이 大威力(대위력)을 具(구)할새 諸佛所說(제불소설)의 修多羅法(수다라법)인 文句(문구)와 義理(의리)를 一生(일생)에 受持(수지)할 뿐 않이라 乃至(내지) 無數生(무수생)에 受持(수지)하되 諸佛(제불)의 名號(명호)와 劫數(겁수)와 授記(수기)와 修多羅(수다라) 等(등) 無盡無量(무진무량)의 諸法門(제법문)을 悉皆(실개) 受持(수지)함일새요
十(십)에 辯藏(변장)이란 菩薩(보살)이 大辯才(대변재)를 具(구)한지라 衆生(중생)을 爲(위)하야 諸法(제법)을 廣爲演說(광위연설)하고 一文一句(일문일구)라도 그 義理(의리)의 無盡(무진)을 廣開(광개)하야써 衆生(중생)의 根機(근기)에 따라 滿足(만족)을 與(여)함일새니 「法華經(법화경)」二十(이십)에 詳說(상설)하시니라
第 三 節 地藏十輪(지장십륜)
地藏十輪(지장십륜)이란 곧 如來(여래)의 十力(십력)인 바 「地藏十輪經(지장십륜경)」十輪品(십륜품)의 說(설)엔 「轉法輪王(전법륜왕)이 十種(십종)의 智力(지력)으로써 國土(국토)의 人民(인민)을 勸諭(권유)하고 또 懲戒(징계)하야써 自國土(자국토)로 하야금 安樂(안락)을 增長(증장)하며 能(능)히 一切(일체) 怨敵(원적)을 伏從(복종)케 하야 種種福利(종종복리)를 得(득)함으로써 此(차)를 十王輪(시왕륜)이라 名」할새 如來(여래)께서도 十種(십종)의 智力(지력)을 成就(성취)하사 一切衆生(일체중생) 中(중)에서 大梵輪(대범륜)을 轉(전)하실새 此(차)를 十種(십종)의 佛輪(불륜)이라 名(명)하나니 地藏十輪(지장십륜)이란 곧 名句(명구) 그대로 解(해)하야 地性內(지성내)에 含藏(함장)한 十輪(십륜)을 證得(증득)하라신 密意(밀의)를 了知(요지)할지니라
第 四 節 十玄門(십현문)
一(일)에 同時具足相應門(동시구족상응문)이란 十方三世(시방삼세)의 一切諸法(일체제법)은 緣起(연기)義疏以緣(소이연)으로서 同一時(동일시)에 具足圓滿(구족원만)하야 彼此(피차)가 照應顯現(조응현현)할새 一切諸法(일체제법)이 同一時(동일시)의 同一處(동일처)에 一大緣起(일대연기)가 具足相應(구족상응)할새니 唐經(당경) 妙嚴品(묘엄품)에 「一切法門(일체법문)의 無盡海(무진해)가 同會一法道場中(동회일법도량중)이라」심이 是(시)요
二(이)에 廣挾自在無碍門(광협자재무애문)이란 一法(일법)이 一切法(일체법)을 緣起(연기)할새 力用(역용)의 際限(제한)이 無(무)함을 廣(광)이라 名(명)하고, 그러나 一法(일법)의 分限(분한)을 守(수)하야 本位(본위)를 不壞(불괴)할새 狹(협)이라 이름하니 分卽無分(분즉무분)이오 無分卽分(무분즉분)이라 緣起法(연기법)이란 如此(여차)히 一法(일법)에 分(분)과 無分(무분)의 二義(이의)를 具(구)하되 互相不妨(호상불방)할새요
三(삼)에 一多相容不同門(일다상용부동문)이란 上(상)의 廣狹無碍門(광협무애문)에 依(의)하건대 一(일)의 勢分(세분)이 他(타)의 一切法(일체법)에 入(입)하고 一切法(일체법)의 勢分(세분)이 自(자)의 一(일)에 入(입)하나 一多(일다)의 本位(본위)를 不失(불실)할새니 唐經(당경) 盧舍那佛品(노사나불품)에 「以一國土(이일국토)로 滿十方(만시방)하고 十方(시방)이 入一(입일)하나 亦無餘(역무여)하야 世界(세계)의 本相(본상)도 亦不壞(역불괴)니 無比功德(무비공덕)인 故(고)로 能爾(능이)라」심이 是(시)요
四(사)에 諸法相卽自在門(제법상즉자재문)이란 上(상)의 一多相容門(일다상용문)에 依(의)하건대 一法(일법)의 勢力(세력)이 一切法(일체법)에 入(입)할 時(시)엔 곧 一切法(일체법) 中(중)의 一法(일법)이라 一切法(일체법)의 外(외)에 一法(일법)의 體(체)가 更無(갱무)하고 一切法(일체법)이 一法(일법)에 入(입)할 時(시)엔 一切法(일체법)을 一法(일법)에 全收(전수)한지라 能同(능동)의 一切法(일체법)은 虛體(허체)요 所同(소동)의 一法(일법)은 有體(유체)일새 一虛一實(일허일실)이 相卽(상즉)이니 二鏡相照(이경상조)에 虛實(허실)이 和融(화융)함과 如(여)하니 晋經(진경) 十住品(십주품)에 「一卽是多(일즉시다)요 多卽是一(다즉시일)이라」심이 是(시)요
五(오)에 隱密顯了俱成門(은밀현료구성문)이란 上(상)의 義門(의문)에 의하건데 一法(일법)이 一切法(일체법)에 卽(즉)할 時(시)엔 一切法(일체법)은 顯(현)하고 一法(일법)은 隱(은)하며 一切法(일체법)이 一法(일법)에 卽(즉)할 時(시)엔 一法(일법)은 顯(현)하고 一切法(일체법)은 隱(은)하야 顯(현)과 隱(은)의 二相(이상)이 同時(동시)에 俱成(구성)할새니 晋經(진경) 賢首品(현수품)에 「或(혹) 東方(동방)에서 見入正受(견입정수)하고 或(혹) 西方(서방)에서 見三昧起(견삼매기)하야 於眼根中(어안근중)에 入正受(입정수)요 於色法中(어색법중)에 三昧起(삼매기)라」심이 是(시)요
六(육)에 微細相容安立門(미세상용안립문)이란 上來(상래) 第二門(제이문)의 義(의)로써 如何)여하)한 微細(미세)의 中(중)이라도 一切諸法(일체제법)을 含容(함용)하야 頭頭物物(두두물물)의 悉皆(실개) 顯現(현현)함이 鏡中(경중)에 萬像(만상)을 映現(영현)함과 如(여)하니 微細(미세)란 곧 一毛一塵(일모일진)을 云(운)함이라 晋經(진경) 毘盧遮那品(비로자나품)에 「一毛孔中(일모공중)에 無量佛刹(무량불찰)이 莊嚴淸淨(장엄청정)하야 曠然安立(광연안립)이라」심이 是(시)요
七(칠)에 因陀羅網法界門(인다라망법계문)이란 因陀羅網(인다라망)은 帝釋天(제석천)의 宮殿(궁전)에 懸(현)한 珠網(주망)으로서 珠珠(주주)의 各各(각각)이 一切(일체)의 珠影(주영)이오 또 諸珠(제주)의 影像(영상)이 一切(일체)의 珠影(주영)을 重現(중현)할새 各各(각각) 二重(이중)의 影現(영현)이라 如此(여차)히 重重映現(중중영현)이 無盡無窮(무진무궁)이니 諸法(제법)의 一一(일일)에 卽入(즉입)함도 亦如是(역여시)하야 上(상)의 微細相容(미세상용)은 一重(일중)의 卽入(즉입)뿐이오 아직 重重無盡(중중무진)의 卽入(즉입)은 않이나 今(금)에 譬喩(비유)로써 其義(기의)를 明示(명시)함이오
八(팔)에 託事顯法生解門(탁사현법생해문)이란 上來所明(상래소명)의 第七門(제칠문)에서 一切法(일체법)이 重重無盡(중중무진)으로 緣起(연기)한 塵塵(진진)의 法(법)과 法(법)이 塵是(진시) 事事無碍法界(사사무애법계)임을 知(지)할새 一事(일사) 一塵(일진)에 就(취)하야 無碍法界(무애법계)의 法門(법문)을 顯(현)할지니 곧 一切(일체)의 寄顯表示(기현표시)한 法門(법문)이 皆是(개시) 此(차)에 攝(섭)함이오
九(구)에 十世融法異成門(십세융법이성문)이란 上(상)의 八門(팔문)은 圓融無碍(원융무애)의 相(상)을 橫示(횡시)함에 對(대)한 縱示(종시)의 法門(법문)으로서 十世(십세)란 過現未三世(과현미삼세)에 各具三世(각구삼세)할새 九世(구세)요 九世(구세)가 相卽互入(상즉호입)할새 一(일)의 總世(총세)라 總別(총별)을 合(합)한 十世(십세)니 十世隔然(십세격연)의 法(법)이 同時(동시)에 具足顯現(구족현현)할새 融法(융법)이며 異成(이성)이란 別異(별이)의 法(법)이 同時(동시)에 成就(성취)할새니 晋經(진경) 初發心功德品(초발심공덕품)초발심공덕품)에 「知(지)하라 無量劫(무량겁)이 是一念(시일념)이오 知(지)하라 一念(일념)이 卽是無量劫(즉시무량겁)이라」심이 是(시)요
十(십)에 主伴圓明具德門(주반원명구덕문)이란 이미 縱橫(정횡)의 一大緣起(일대연기)인 萬法(만법)의 法法(법법)이 交徹(교철)하야 一法(일법)에 他(타)가 隨伴蓮帶(수반연대)함일새 主(주)의 一法(일법)에 他(타)의 餘法(여법)이 集中(집중)함이라 一例(일례)를 示(시)하면 一佛(일불)이 主(주)가 되야 說法(설법)하면 他(타)의 一切佛(일체불)은 伴(반)이 되고 他佛(타불)이 說法(설법)함에도 亦如是(역여시)하니 緣起(연기)의 法(법)은 互爲主伴(호위주반)을 約束(약속)함과 如(여)한지라 一法(일법)에 一切功德(일체공덕)을 圓滿成就(원만성취)하였을새 圓明具德(원명구덕)이니 「探玄記(탐현기)」一(일)과 「華嚴玄談(화엄현담)」六(육)에 詳說(상설)하였나니라
第 五 節 玄門無碍十因(현문무애십인)
一(일)엔 唯心所現故(유심소현고)니 諸法(제법)의 本源(본원)에 있어 別種(별종)이 各有(각유)함이 않이라 唯一(유일)인 如來藏心(여래장심)에서 緣起(연기)한 差別(차별)의 法(법)일새 彼此(피차) 必然(필연)인 和融(화융)의 理(리)가 有(유)함이요
二(이)엔 法無定性故(법무정성고)니 諸法(제법)은 如來藏心(여래장심)의 緣起法(연기법)이라 本來(본래)에 諸法(제법)의 自性(자성)이 無(무)할새 彼此(피차) 和融(화융)의 理(리)가 有(유)함이오
三(삼)엔 緣起相由故(연기상유고)니 緣起(연기)의 法(법)은 單獨(단독)히 保體(보체)함을 不得(부득)하고 반다시 相由(상유)하야 其(기) 體(체)를 僅成(근성)할새 和融(화융)의 理(리)가 有(유)함이오
四(사)엔 法性融通故(법성융통고)니 法性(법성)은 本來(본래)에 融通(융통)항 性(성)일새 性(성)과 如(여)히 事(사)도 亦是(역시) 融通(융통)한 必然(필연)의 理(리)가 有(유)함이오
五(오)엔 如幻夢故(여환몽고)니 諸法(제법)은 虛假無實(허가무실)한 幻夢(환몽)과 如(여)할새 和融(화융)의 理(리)가 有(유)함이오
六(육)엔 如影像故(여영상고)니 諸法(제법)이 一心界(일심계)에서 緣起(연기)하야 存在(존재)한 其形(기형)이 鏡中(경중)의 影像(영상)과 如(여)할새 和融(화융)의 理(리)가 有(유)함이라 以上(이상)의 六因(육인)은 諸法(제법) 自爾(자이)의 德相(덕상)에 就(취)함이오 已下(이하)는 業用(업용)의 無碍(무애)에 就(취)한 因由(인유)를 說(설)함이라
七(칠)엔 因無限固(인무한고)니 菩薩(보살)이 因中(인중)에서 無限(무한)의 因(인)을 修(수)할새 果(과)에 至(지)하야 必然(필연)인 無碍(무애)의 業用(업용)을 得(득)할새요
八(팔)엔 佛證窮故(불증궁고)니 佛(불)은 眞性(진성)을 證窮(증궁)할새 眞性(진성)과 如(여)히 業用(업용)도 無碍(무애)함이오
九(구)엔 深定用故(심정용고)니 深妙(심묘)의 禪定力(선정력)으로써임일새 業用(업용)의 無碍(무애)를 得(득)함이오
十(십)엔 神通解脫故(신통해탈고)니 不思議(부사의)의 神通力(신통력)은 物(물)의 羈絆(기반)을 離(이)하야 自由自在(자유자재)할새 業用(업용)의 無碍(무애)를 得(득)함이니 「火焰玄談(화엄현담)」六(육)에 詳說(상설)하니라
第 六 節 十無二(십무이)
諸佛世尊(제불세존) 十種(십종)의 無二行自在法(무이행자재법)이 有(유)하니
一(이)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善說授記(수기)의 言說(언설)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二(이)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衆生(중생)의 心念(심념)에 隨順(수순)하사 其意(기의)로 하야금 滿足(만족)케 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三(삼)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三世一切(삼세일체)의 諸佛(제불)과 그 所化(소화)의 一切衆生(일체중생)과 그 體性(체성)이 平等(평등)함을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四(사)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世法(세법)과 諸佛(제불)의 法性(법성)에 差別(차별)이 無(무)함을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五(오)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三世諸佛(삼세제불) 所有(소유)의 善根(선근)이란 同一善根(동일선근)임을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六(육)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現生(현생)에 一切諸法(일체제법)을 覺(각)하고 其義(기의)를 演說(연설)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七(칠)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過去未來諸佛(과거미래제불)의 慧(혜)를 現在(현재)에 具足(구족)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八(팔)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三世一切(삼세일체)의 刹那(찰나)를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九(구)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三世一切(삼세일체)의 佛刹(불찰)이 一佛刹(일불찰)의 中(중)에 入(입)함을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十(십)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의 說法(설법) 그대로 一佛(일불)의 說法(설법)이심을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니 「宗鏡錄(종경록)」九十九(구십구)에 詳說(상설)하니라
第 七 節 十無依行(십무의행)
行法(행법)에 依(의)하야 功德(공덕)과 善根(선근)이 生(생)하는 바 不然(불연)하고 或(혹)은 邪見(사견)에 緣(연)하야 惡緣(악연)에 依(의)하고 그 行法(행법)이 功德(공덕)과 善根(선근)의 所依止(소의지) 않임에 十種(십종)이 有(유)하니 一(일)은 意業不壞(의업불괴)와 加行壞(가행괴)요 二(이)는 加行不壞(가행불괴)와 意業壞(의업괴)요 三(삼)은 加行, 意業(가행, 의업)의 共壞(공괴)요 四(사)는 戒壞(계괴)와 見不壞(견불괴)요 五(오)는 見壞(견괴)와 戒不壞(계불괴)요 六(육)은 戒, 見(계, 견)의 共壞(공괴)요 七(칠)은 加行, 意業, 見, 戒(가행, 의업, 견, 계)의 共不壞(공불괴)가 惡友力(악우력)에 依支(의지)함이오 八(팔)은 善友力(선우력)l에 依支(의지)하나 愚鈍(우둔)함이오 九(구)는 種種(종종)의 財寶(재보) 衆具(중구)엔 無厭足(무염족)이나 追求迷亂(추구미란)함이오 十(십)은 衆病(중병) 逼近(핍근)에 呪術(주술)과 祠祀(사사)로써 對(대)함이니라<大集地藏十輪經五(대집지장십륜경오)>
第 八 章 十不二門(십불이문)
荊溪(형계) 湛然尊者(잠연존자)의 所明(소명)인 「法華玄義(법화현의)」에 本迹十妙(본적십묘)를 釋(석)하야 十種(십종)의 不二門(불이문)을 立(립)하고 此(차)를 一念(일념)의 心(심)에 歸結(귀결)하야써 觀法(관법)의 大綱(대강)을 示(시)하고 그 深意(심의)를 發(발)하였으니 그의 本迹(본적) 十妙(십묘)와 十不二門(십불이문)의 相攝(상섭)을 對照圖示(대조도시)하면 左(좌)와 如(여)하니라
一(일)에 色心(색심)이란 色(색)은 有形質碍(유형질애)의 法(법)으로서 知覺(지각)의 用(용)이 無(무)하나 心(심)은 形質(형질)이 無(무)하되 知覺緣慮(지각연려)의 用(용)이 有(유)한 者(자)요
二(이)에 內外(내외)란 外(외)는 衆生(중생)이나 諸佛(제불)의 依報(의보)며 內(내)는 오직 自己(자기)의 心法(심법)이오
三(삼)에 修證(수증)이란 修(수)는 修治造作(수치조작)의 功(공)이며 證(증)은 本有不改(본유불개)의 體性(체성)을 證(증)함이오
四(사)에 因果(인과)란 因(인)은 能生(능생)의 行(행)이며 果(과)는 所生(소생)의 德(덕)이오
五(오)에 染淨(염정)이란 染(염)은 無明(무명)의 用(용)이며 淨(정)은 法性(법성)의 用(용)이오
六(육)에 依正(의정)이란 二報(이보)의 依正(의정)이니 依報(의보)는 衆生(중생) 所依(소의)의 國土(국토)와 資具(자구) 等(등)이며 正報(정보)는 能依(능의)의 心身(심신)이오
七(칠)에 自他(자타)란 三法(삼법)에 就(취)하야 論(논)컨대 他(타)는 自己(자기)에 對(대)한 佛法(불법)과 衆生法(중생법)이며 自(자)는 二法(이법)에 對(대)한 心法(심법)이오
八(팔)에 三業(삼업)이란 身業(신업)은 身(신)의 發動(발동)이며 口業(구업)은 口(구)의 發動(발동)이며 意業(의업)은 意(의)의 發動(발동)이오
九(구)에 權實(권실)이란 權(권)은 九界(구계)와 七方便(칠방편)의 法(법)이며 實(실)은 佛界圓實(불계원실)의 法(법)이오
十(십)에 受潤(수윤)이란 譬喩(비유)의 名(명)으로서 受(수)는 領納(영납)의 義(의)니 五乘差別的(오승차별적) 能受(능수)의 根機(근기)며 潤(윤)은 沾潤(첨윤)의 義(의)니 如來(여래) 所說(소설)이신 能潤(능윤)의 法雨(법우)라
此(차)의 十皆 不二(불이)라 名(명)함은 法華(법화) 已前(이전)은 色, 心(색, 심) 等(등)에 對(대)하신 說法(설법)이 一一(일일)히 隔異(격이)함으로 二(이)라 名(명)하나 法華(법화)에 至(지)하얀 一一(일일) 隔異的偏權(격이적편권)의 法(법) 그대로 實相(실상)의 理(리)를 開顯(개현)하신지라 諸法實相(제법실상)은 平等一如(평등일여)의 一法(일법)으로서 隔然不融(격연불융)의 法(법)이 無(무)할새 總(총)히 不二(불이)라 名(명)하니라
第 一 節 十無碍(십무애)
一(일)에 用周無碍(용주무애)란 佛(불)이 刹塵(찰진) 等(등)의 處(처)에서 法界身雲(법계신운)을 現(현)하야 無邊(무변)의 業用(업용)을 起(기)함이오
二(이)에 相遍無碍(상변무애)란 佛(불)이 十方一切世界(시방일체세계) 無量(무량)의 佛刹(불찰)에서 種種(종종)히 神變(신변)하야 皆是如來(개시여래) 示現受生(시현수생)의 相(상)이 有(유)하되 相(상)을 現(현)함에 隨(수)하야 衆相(중상)이 皆具(개구)할새 萬德(만덕)이 斯圓(사원)함이오
三(삼)에 寂用無碍(적용무애)란 佛(불)은 三昧(삼매)에 常住(상주)하사 爲寂不妨(위적불방)이실새 利物化用(이물화용)이시라 卽定卽用(즉정즉용)에 無碍自在(무애자재)함이오
四(사)에 依起無碍(의기무애)란 佛(불)은 寂用(적용)에 無心(무심)하시되 能(능)히 海印三昧(해인삼매)의 力(력)에 依(의)하사 無碍(무애)의 用(용)을 起(기)하심이오
五(오)에 眞應無碍(진응무애)란 眞(진)은 곧 遮那眞身(자나진신)이오 應(응)은 곧 應身釋迦(응신석가)라 眞身(진신)은 是體(시체)요 應身(응신)은 是用(시용)이니 體全而起用(체전이기용)이라 用卽是體(용즉시체)일새 釋迦(석가)와 遮那(자나)가 圓融自在(원융자재)하야 本無二體(본무이체)함이오
六(육)에 分圓無碍(분원무애)란 分(분)은 곧 支分(지분)이오 圓(원)은 곧 全身(전신)이라 支分(지분)이 全身(전신)을 不碍(불애)하고 全身(전신)이 支分(지분)을 不碍(불애)할새 遮那(자나) 一一(일일)의 身分(신분)인 手足眼耳乃至(수족안이내지) 一毛(이모)라도 皆是(개시) 遮那(자나)의 全身(전신)임으로써요
七(칠)에 因果無碍(인과무애)란 佛(불)은 昔(석)에 菩薩(보살)의 行(행)을 修(수)하실새 波羅密(바라밀)의 因(인)을 修(수)하야 波羅密(바라밀)의 果(과)를 證(증)하신지라 所受(소수)의 報身(보신)과 所成(소성)의 事業(사업)도 亦是(역시) 十方一切(시방일체)의 菩薩身靈(보살신령)을 現(현)함이 自在無碍(자재무애)함이오
八(팔)에 依正無碍(의정무애)란 依(의)는 依報(의보)라 곧 佛所依(불소의)의 國土(국토)요 正(정)은 正報(정보)니 곧 佛能依(불능의)의 色身(색신)일새 依正(의정)이 相入(상입)하야 二智無碍(이지무애)함이오
九(구)에 潛入無碍(잠입무애)란 佛智(불지)가 衆生(중생)의 心內(심내)에 潛入(잠입)함이 如來藏(여래장)이라 衆生(중생)을 作(작)하되 自性(자성)을 不失(불실)함이 大海(대해)의 水(수)가 風(풍)에 依(의)하야 波(파)를 作(작)하되 濕性(습성)을 不失(불실)함과 如(여)함이오
十(십)에 圓通無碍(원통무애)란 佛(불)은 大法界(대법계)를 融通(융통)하야 其(기) 身(신)을 作(작)하되 理(리)론 不具(불구)함이 無(무)하고 事(사)론 不攝(불섭)함이 無(무)할새 一多(일다), 依正(의정), 人法(인법), 因果(인과)가 彼此(피차) 無碍(무애)함이니 「華嚴演義秒(화엄연의초)」三(삼)의 所說(소설)이니라
第 二 節 十無盡藏(십무진장)
一(일)에 信藏(신장)이란 菩薩(보살)의 淨信(정신)이 堅固(견고)하야 諸法空(제법공)을 解(해)하는 心(심)이 退轉(퇴전)치 않을새 如來家(여래가)에 生(생)하야 信解(신해)를 增長(증장)하는지라 一切(일체)의 佛法(불법)을 聞持(문지)하고 衆生(중생)을 爲(위)하야 所聞(소문)을 悉皆(실개)히 信解(신해)케 함으로써요
二(이)에 戒藏(계장)이란 菩薩(보살)이 三世諸佛(삼세제불)의 無盡淨戒(무진정계)를 奉持(봉지)하야 具足圓滿(구족원만)할새 毁犯(훼범)이 無(무)한지라 衆生(중생)이 顚倒(전도)하야 破戒(파계)함을 念慮(염려)하고 菩提(보리)를 成就(성취)하야써 眞實(진실)의 法(법)을 說(설)함에 따라 一切(일체)의 顚倒(전도)를 遠離(원리)케 하야 此(차)의 淨戒(정게)를 同護共持(동호공지)케 하리람으로써요
三(삼)에 **藏(참장)이란 菩薩(보살)이 過去(과거)를 憶念(억념)할새 **天愧地(참천괴지)를 不知(부지)하고 諸眷屬(제권속)에 對(대)하야 衆惡(중악)을 造(조)한바 今(금)에야 諸佛(제불)이 知(지)하심을 覺得(각득)함에 따라 **心(참심)이 生(생)하는지라 此(차)를 發露懺悔(발로참회)하고 梵行(범행)을 修行(수행)하야 菩提(보리)를 證得(증득)하고 衆生(중생)을 爲(위)하야 眞實(진실)의 法(법)을 說(설)하야 **(참)을 修(수)케함으로써요
四(사)에 愧藏(괴장)이란 菩薩(보살)이 往昔(왕석)을 自愧(자괴)하야써 五欲(오욕)을 爲(위)하야 衆生(중생)에게 惡法(악법)을 敢行(감행)한 垢穢(구예)의 身(신)임을 感(감)하는 同時(동시)에 諸佛(제불)이 知(지)하심을 覺得(각득)함에 따라 愧心(괴심)이 生(생)하는지라 이를 發露懺悔(발로참회)하고 梵行(범행)을 修行(수행)하야 速(속)히 菩提(보리)를 證得(증득)하고 衆生(중생)에게 眞實(진실)의 法(법)을 說(설)하야 各自(각자)의 愧心(괴심)이 亦生(역생)케 함으로써요
五(오)에 聞藏(문장)이란 菩薩(보살)이 世間(세간) 出世間(출세간)의 一切諸法(일체제법)을 聞(문)하고 諸佛, 菩薩, 緣覺, 聲聞(제불, 보살, 연각, 성문)의 出現(출현)과 入滅(입멸)을 悉皆(실개) 能知(능지)하는지라 衆生(중생)은 多聞(다문)이 無(무)하야 此(차)의 一切法(일체법)을 不知(부지)할새 此(차)를 念慮(염려)하고 맛당히 多聞藏(다문장)을 持(지)하야 菩提(보리)를 證得(증득)하고 衆生(중생)을 爲(위)하야 眞實(진실)의 法(법)을 說(설)하리람으로써요
六(육)에 施藏(시장)이란 菩薩(보살)의 稟性(품성)이 仁慈(인자)하야 一切(일체) 布施(보시)를 常行(상행)할새 一念(일념)의 悔恨心(회한심)이 無(무)한지라 果報(과보)의 勝劣(승열)을 不求(불구)하고 다만 法界衆生(법계중생)을 利益(이익)케 할 뿐일새요
七(칠)에 慧藏(혜장)이란 菩薩(보살)이 智慧(지혜)를 具足(구족)하야 世間, 出世間(세간, 출세간)의 一切諸法(일체제법)을 知(지)하는지라 業報(업보)에 從(종)하야 造(조)하는 바의 諸法(제법)은 悉皆(실개)히 虛僞(허위)요 堅固(견고)가 않이라 衆生(중생)으로 하야금 그 實性(실성)을 知(지)케 하고자 廣爲演說(광위연설)할 智慧(지혜)를 含藏(함장)함일새요
八(팔)에 念藏(염장)이란 菩薩(보살)은 痴惑(치혹)을 捨離(사리)한 淨念(정념)을 具足(구족)한지라 能(능)히 一生(일생) 乃至(내지) 百千生(백천생)의 成住壞空(성주괴공)인 一劫(일겁)乃至(내지) 無數劫(무수겁)에 있어 一切諸佛(일체제불)이 出世(출세)하심을 憶知(억지)할새 諸佛(제불)의 名號(명호)와 授記(수기)와 修多羅(수다라) 等(등)의 十二部經(십이부경)을 說(설)하고 또 衆會(중회)의 根性(근성)을 悉(실) 能(능)히 憶念(억념)함일새요
九(구)에 持藏(지장)이란 菩薩(보살)이 大威力(대위력)을 具(구)할새 諸佛所說(제불소설)의 修多羅法(수다라법)인 文句(문구)와 義理(의리)를 一生(일생)에 受持(수지)할 뿐 않이라 乃至(내지) 無數生(무수생)에 受持(수지)하되 諸佛(제불)의 名號(명호)와 劫數(겁수)와 授記(수기)와 修多羅(수다라) 等(등) 無盡無量(무진무량)의 諸法門(제법문)을 悉皆(실개) 受持(수지)함일새요
十(십)에 辯藏(변장)이란 菩薩(보살)이 大辯才(대변재)를 具(구)한지라 衆生(중생)을 爲(위)하야 諸法(제법)을 廣爲演說(광위연설)하고 一文一句(일문일구)라도 그 義理(의리)의 無盡(무진)을 廣開(광개)하야써 衆生(중생)의 根機(근기)에 따라 滿足(만족)을 與(여)함일새니 「法華經(법화경)」二十(이십)에 詳說(상설)하시니라
第 三 節 地藏十輪(지장십륜)
地藏十輪(지장십륜)이란 곧 如來(여래)의 十力(십력)인 바 「地藏十輪經(지장십륜경)」十輪品(십륜품)의 說(설)엔 「轉法輪王(전법륜왕)이 十種(십종)의 智力(지력)으로써 國土(국토)의 人民(인민)을 勸諭(권유)하고 또 懲戒(징계)하야써 自國土(자국토)로 하야금 安樂(안락)을 增長(증장)하며 能(능)히 一切(일체) 怨敵(원적)을 伏從(복종)케 하야 種種福利(종종복리)를 得(득)함으로써 此(차)를 十王輪(시왕륜)이라 名」할새 如來(여래)께서도 十種(십종)의 智力(지력)을 成就(성취)하사 一切衆生(일체중생) 中(중)에서 大梵輪(대범륜)을 轉(전)하실새 此(차)를 十種(십종)의 佛輪(불륜)이라 名(명)하나니 地藏十輪(지장십륜)이란 곧 名句(명구) 그대로 解(해)하야 地性內(지성내)에 含藏(함장)한 十輪(십륜)을 證得(증득)하라신 密意(밀의)를 了知(요지)할지니라
第 四 節 十玄門(십현문)
一(일)에 同時具足相應門(동시구족상응문)이란 十方三世(시방삼세)의 一切諸法(일체제법)은 緣起(연기)義疏以緣(소이연)으로서 同一時(동일시)에 具足圓滿(구족원만)하야 彼此(피차)가 照應顯現(조응현현)할새 一切諸法(일체제법)이 同一時(동일시)의 同一處(동일처)에 一大緣起(일대연기)가 具足相應(구족상응)할새니 唐經(당경) 妙嚴品(묘엄품)에 「一切法門(일체법문)의 無盡海(무진해)가 同會一法道場中(동회일법도량중)이라」심이 是(시)요
二(이)에 廣挾自在無碍門(광협자재무애문)이란 一法(일법)이 一切法(일체법)을 緣起(연기)할새 力用(역용)의 際限(제한)이 無(무)함을 廣(광)이라 名(명)하고, 그러나 一法(일법)의 分限(분한)을 守(수)하야 本位(본위)를 不壞(불괴)할새 狹(협)이라 이름하니 分卽無分(분즉무분)이오 無分卽分(무분즉분)이라 緣起法(연기법)이란 如此(여차)히 一法(일법)에 分(분)과 無分(무분)의 二義(이의)를 具(구)하되 互相不妨(호상불방)할새요
三(삼)에 一多相容不同門(일다상용부동문)이란 上(상)의 廣狹無碍門(광협무애문)에 依(의)하건대 一(일)의 勢分(세분)이 他(타)의 一切法(일체법)에 入(입)하고 一切法(일체법)의 勢分(세분)이 自(자)의 一(일)에 入(입)하나 一多(일다)의 本位(본위)를 不失(불실)할새니 唐經(당경) 盧舍那佛品(노사나불품)에 「以一國土(이일국토)로 滿十方(만시방)하고 十方(시방)이 入一(입일)하나 亦無餘(역무여)하야 世界(세계)의 本相(본상)도 亦不壞(역불괴)니 無比功德(무비공덕)인 故(고)로 能爾(능이)라」심이 是(시)요
四(사)에 諸法相卽自在門(제법상즉자재문)이란 上(상)의 一多相容門(일다상용문)에 依(의)하건대 一法(일법)의 勢力(세력)이 一切法(일체법)에 入(입)할 時(시)엔 곧 一切法(일체법) 中(중)의 一法(일법)이라 一切法(일체법)의 外(외)에 一法(일법)의 體(체)가 更無(갱무)하고 一切法(일체법)이 一法(일법)에 入(입)할 時(시)엔 一切法(일체법)을 一法(일법)에 全收(전수)한지라 能同(능동)의 一切法(일체법)은 虛體(허체)요 所同(소동)의 一法(일법)은 有體(유체)일새 一虛一實(일허일실)이 相卽(상즉)이니 二鏡相照(이경상조)에 虛實(허실)이 和融(화융)함과 如(여)하니 晋經(진경) 十住品(십주품)에 「一卽是多(일즉시다)요 多卽是一(다즉시일)이라」심이 是(시)요
五(오)에 隱密顯了俱成門(은밀현료구성문)이란 上(상)의 義門(의문)에 의하건데 一法(일법)이 一切法(일체법)에 卽(즉)할 時(시)엔 一切法(일체법)은 顯(현)하고 一法(일법)은 隱(은)하며 一切法(일체법)이 一法(일법)에 卽(즉)할 時(시)엔 一法(일법)은 顯(현)하고 一切法(일체법)은 隱(은)하야 顯(현)과 隱(은)의 二相(이상)이 同時(동시)에 俱成(구성)할새니 晋經(진경) 賢首品(현수품)에 「或(혹) 東方(동방)에서 見入正受(견입정수)하고 或(혹) 西方(서방)에서 見三昧起(견삼매기)하야 於眼根中(어안근중)에 入正受(입정수)요 於色法中(어색법중)에 三昧起(삼매기)라」심이 是(시)요
六(육)에 微細相容安立門(미세상용안립문)이란 上來(상래) 第二門(제이문)의 義(의)로써 如何)여하)한 微細(미세)의 中(중)이라도 一切諸法(일체제법)을 含容(함용)하야 頭頭物物(두두물물)의 悉皆(실개) 顯現(현현)함이 鏡中(경중)에 萬像(만상)을 映現(영현)함과 如(여)하니 微細(미세)란 곧 一毛一塵(일모일진)을 云(운)함이라 晋經(진경) 毘盧遮那品(비로자나품)에 「一毛孔中(일모공중)에 無量佛刹(무량불찰)이 莊嚴淸淨(장엄청정)하야 曠然安立(광연안립)이라」심이 是(시)요
七(칠)에 因陀羅網法界門(인다라망법계문)이란 因陀羅網(인다라망)은 帝釋天(제석천)의 宮殿(궁전)에 懸(현)한 珠網(주망)으로서 珠珠(주주)의 各各(각각)이 一切(일체)의 珠影(주영)이오 또 諸珠(제주)의 影像(영상)이 一切(일체)의 珠影(주영)을 重現(중현)할새 各各(각각) 二重(이중)의 影現(영현)이라 如此(여차)히 重重映現(중중영현)이 無盡無窮(무진무궁)이니 諸法(제법)의 一一(일일)에 卽入(즉입)함도 亦如是(역여시)하야 上(상)의 微細相容(미세상용)은 一重(일중)의 卽入(즉입)뿐이오 아직 重重無盡(중중무진)의 卽入(즉입)은 않이나 今(금)에 譬喩(비유)로써 其義(기의)를 明示(명시)함이오
八(팔)에 託事顯法生解門(탁사현법생해문)이란 上來所明(상래소명)의 第七門(제칠문)에서 一切法(일체법)이 重重無盡(중중무진)으로 緣起(연기)한 塵塵(진진)의 法(법)과 法(법)이 塵是(진시) 事事無碍法界(사사무애법계)임을 知(지)할새 一事(일사) 一塵(일진)에 就(취)하야 無碍法界(무애법계)의 法門(법문)을 顯(현)할지니 곧 一切(일체)의 寄顯表示(기현표시)한 法門(법문)이 皆是(개시) 此(차)에 攝(섭)함이오
九(구)에 十世融法異成門(십세융법이성문)이란 上(상)의 八門(팔문)은 圓融無碍(원융무애)의 相(상)을 橫示(횡시)함에 對(대)한 縱示(종시)의 法門(법문)으로서 十世(십세)란 過現未三世(과현미삼세)에 各具三世(각구삼세)할새 九世(구세)요 九世(구세)가 相卽互入(상즉호입)할새 一(일)의 總世(총세)라 總別(총별)을 合(합)한 十世(십세)니 十世隔然(십세격연)의 法(법)이 同時(동시)에 具足顯現(구족현현)할새 融法(융법)이며 異成(이성)이란 別異(별이)의 法(법)이 同時(동시)에 成就(성취)할새니 晋經(진경) 初發心功德品(초발심공덕품)초발심공덕품)에 「知(지)하라 無量劫(무량겁)이 是一念(시일념)이오 知(지)하라 一念(일념)이 卽是無量劫(즉시무량겁)이라」심이 是(시)요
十(십)에 主伴圓明具德門(주반원명구덕문)이란 이미 縱橫(정횡)의 一大緣起(일대연기)인 萬法(만법)의 法法(법법)이 交徹(교철)하야 一法(일법)에 他(타)가 隨伴蓮帶(수반연대)함일새 主(주)의 一法(일법)에 他(타)의 餘法(여법)이 集中(집중)함이라 一例(일례)를 示(시)하면 一佛(일불)이 主(주)가 되야 說法(설법)하면 他(타)의 一切佛(일체불)은 伴(반)이 되고 他佛(타불)이 說法(설법)함에도 亦如是(역여시)하니 緣起(연기)의 法(법)은 互爲主伴(호위주반)을 約束(약속)함과 如(여)한지라 一法(일법)에 一切功德(일체공덕)을 圓滿成就(원만성취)하였을새 圓明具德(원명구덕)이니 「探玄記(탐현기)」一(일)과 「華嚴玄談(화엄현담)」六(육)에 詳說(상설)하였나니라
第 五 節 玄門無碍十因(현문무애십인)
一(일)엔 唯心所現故(유심소현고)니 諸法(제법)의 本源(본원)에 있어 別種(별종)이 各有(각유)함이 않이라 唯一(유일)인 如來藏心(여래장심)에서 緣起(연기)한 差別(차별)의 法(법)일새 彼此(피차) 必然(필연)인 和融(화융)의 理(리)가 有(유)함이요
二(이)엔 法無定性故(법무정성고)니 諸法(제법)은 如來藏心(여래장심)의 緣起法(연기법)이라 本來(본래)에 諸法(제법)의 自性(자성)이 無(무)할새 彼此(피차) 和融(화융)의 理(리)가 有(유)함이오
三(삼)엔 緣起相由故(연기상유고)니 緣起(연기)의 法(법)은 單獨(단독)히 保體(보체)함을 不得(부득)하고 반다시 相由(상유)하야 其(기) 體(체)를 僅成(근성)할새 和融(화융)의 理(리)가 有(유)함이오
四(사)엔 法性融通故(법성융통고)니 法性(법성)은 本來(본래)에 融通(융통)항 性(성)일새 性(성)과 如(여)히 事(사)도 亦是(역시) 融通(융통)한 必然(필연)의 理(리)가 有(유)함이오
五(오)엔 如幻夢故(여환몽고)니 諸法(제법)은 虛假無實(허가무실)한 幻夢(환몽)과 如(여)할새 和融(화융)의 理(리)가 有(유)함이오
六(육)엔 如影像故(여영상고)니 諸法(제법)이 一心界(일심계)에서 緣起(연기)하야 存在(존재)한 其形(기형)이 鏡中(경중)의 影像(영상)과 如(여)할새 和融(화융)의 理(리)가 有(유)함이라 以上(이상)의 六因(육인)은 諸法(제법) 自爾(자이)의 德相(덕상)에 就(취)함이오 已下(이하)는 業用(업용)의 無碍(무애)에 就(취)한 因由(인유)를 說(설)함이라
七(칠)엔 因無限固(인무한고)니 菩薩(보살)이 因中(인중)에서 無限(무한)의 因(인)을 修(수)할새 果(과)에 至(지)하야 必然(필연)인 無碍(무애)의 業用(업용)을 得(득)할새요
八(팔)엔 佛證窮故(불증궁고)니 佛(불)은 眞性(진성)을 證窮(증궁)할새 眞性(진성)과 如(여)히 業用(업용)도 無碍(무애)함이오
九(구)엔 深定用故(심정용고)니 深妙(심묘)의 禪定力(선정력)으로써임일새 業用(업용)의 無碍(무애)를 得(득)함이오
十(십)엔 神通解脫故(신통해탈고)니 不思議(부사의)의 神通力(신통력)은 物(물)의 羈絆(기반)을 離(이)하야 自由自在(자유자재)할새 業用(업용)의 無碍(무애)를 得(득)함이니 「火焰玄談(화엄현담)」六(육)에 詳說(상설)하니라
第 六 節 十無二(십무이)
諸佛世尊(제불세존) 十種(십종)의 無二行自在法(무이행자재법)이 有(유)하니
一(이)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善說授記(수기)의 言說(언설)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二(이)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衆生(중생)의 心念(심념)에 隨順(수순)하사 其意(기의)로 하야금 滿足(만족)케 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三(삼)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三世一切(삼세일체)의 諸佛(제불)과 그 所化(소화)의 一切衆生(일체중생)과 그 體性(체성)이 平等(평등)함을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四(사)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世法(세법)과 諸佛(제불)의 法性(법성)에 差別(차별)이 無(무)함을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五(오)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三世諸佛(삼세제불) 所有(소유)의 善根(선근)이란 同一善根(동일선근)임을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六(육)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現生(현생)에 一切諸法(일체제법)을 覺(각)하고 其義(기의)를 演說(연설)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七(칠)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過去未來諸佛(과거미래제불)의 慧(혜)를 現在(현재)에 具足(구족)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八(팔)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三世一切(삼세일체)의 刹那(찰나)를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九(구)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三世一切(삼세일체)의 佛刹(불찰)이 一佛刹(일불찰)의 中(중)에 入(입)함을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오
十(십)엔 一切諸佛(일체제불)이 悉能(실능)히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의 說法(설법) 그대로 一佛(일불)의 說法(설법)이심을 知(지)하심이 決定無二(결정무이)함이니 「宗鏡錄(종경록)」九十九(구십구)에 詳說(상설)하니라
第 七 節 十無依行(십무의행)
行法(행법)에 依(의)하야 功德(공덕)과 善根(선근)이 生(생)하는 바 不然(불연)하고 或(혹)은 邪見(사견)에 緣(연)하야 惡緣(악연)에 依(의)하고 그 行法(행법)이 功德(공덕)과 善根(선근)의 所依止(소의지) 않임에 十種(십종)이 有(유)하니 一(일)은 意業不壞(의업불괴)와 加行壞(가행괴)요 二(이)는 加行不壞(가행불괴)와 意業壞(의업괴)요 三(삼)은 加行, 意業(가행, 의업)의 共壞(공괴)요 四(사)는 戒壞(계괴)와 見不壞(견불괴)요 五(오)는 見壞(견괴)와 戒不壞(계불괴)요 六(육)은 戒, 見(계, 견)의 共壞(공괴)요 七(칠)은 加行, 意業, 見, 戒(가행, 의업, 견, 계)의 共不壞(공불괴)가 惡友力(악우력)에 依支(의지)함이오 八(팔)은 善友力(선우력)l에 依支(의지)하나 愚鈍(우둔)함이오 九(구)는 種種(종종)의 財寶(재보) 衆具(중구)엔 無厭足(무염족)이나 追求迷亂(추구미란)함이오 十(십)은 衆病(중병) 逼近(핍근)에 呪術(주술)과 祠祀(사사)로써 對(대)함이니라<大集地藏十輪經五(대집지장십륜경오)>
第 十 章 十 身(십신)
「華嚴經(화엄경)」에 二種(이종)의 十身(십신)을 說(설)하셨으니 一(일)은 融三世間十身(융삼세간십신)이오 二(이)는 佛具(불구)의 十身(십신)이니
一(일)에 衆生身(중생신)이란 六途(육도)의 衆生(중생)이오 二(이)에 國土身(국토신)이란 六途衆生(육도중생)의 依處(의처)요 三(삼)에 業報身(업보신)이란 上(상)의 二身(이신)을 生(생)한 業因(업인)일새 以上(이상)의 三身(삼신)은 染分(염분)에 屬(속)하고 四(사)에 聲聞身(성문신)이란 諦觀(체관) 等(등)으로써 涅槃(열반)을 求(꾸)하는 者(자)요 五(오)에 獨覺身(독각신)이란 參禪(참선) 等(등)으로써 獨覺自修(독각자수)하는 者(자)요 六(육)에 菩薩身(보살신)이란 六度等(육도등)으로써 菩提(보리)를 求(구)하는 者(자)요 七(칠)에 如來身(여래신)이란 因圓果滿(인원과만)의 妙覺佛身(묘각불신)이오 八(팔)에 智身(지신)이란 佛身所具(불신소구)인 能證(능증)의 實智(실지)요 九(구)에 法身(법신)이란 佛身所具(불신소구)인 所證(소증)의 眞理(진리)일새 以上(이상) 六身(육신)은 淨分(정분)에 屬(속)하고 十(십)에 虛空身(허공신)이란 染淨(염정) 二分(이분)의 相(상)을 離(이)한 染淨(염정)의 所依(소의)인 周遍法界(주변법계)로서 無形量(무형량)의 實體(실체)라 諸相(제상)이 離(이)함을 表(표)하야 虛空(허공)이라 云(운)함은 融三世間十身(융삼세간십신)인바
此(차) 十身(십신)의 第二(제이)인 國土身(국토신)은 곧 國土世間(국토세간)의 根本(근본)이오 第一(제일)인 衆生身(중생신)과 第三(제삼)인 業報身(업보신) 乃至(내지) 第六 菩薩身(보살신)은 衆生世間(중생세간)이오 後(후)의 四身(사신)은 正覺世間(정각세간)일새 此(차) 十身(십신)은 三世間(삼세간)을 融攝(융섭)한 毘盧正覺(비로정각)의 體(체)임으로 融三世間(융삼세간)의 十身(십신)이라 云(운)하고 또 此(차) 十身(십신)은 毘盧遮那佛(비로자나불)의 覺體(각체)임을 解知(해지)하는 所知(소지)의 境(경)임으로 解境(해경)의 十身(십신)이라고도 云(운)하며 此(차) 十身中(십신중)의 第七(제칠) 如來身(여래신) 上(상)에 十身(십신)을 立(립)하야 佛具(불구)의 十身(십신)이라 云(운)하는 바 此(차) 十身(십신)에 就(취)하야 經中(경중) 三處(삼처)에 說(설)하신 名字(명자)가 稍異(초이)하나 舊經二十六(구경이십육)의 所說(소설)에 據(거)하건대
一(일)에 菩提身(보리신)이란 後(후)에 正覺佛(정각불)이라 云(운)하야 梵漢(범한)이 相異(상이)할 뿐으로써 八相成道(팔상성도)의 正覺(정각)을 示現(시현)하신 佛身(불신)이라 世間(세간)에 住(주)하시되 涅槃(열반)에 不着(불착)하시고 生死(생사)에도 不着(불착)하시며 無着(무착)의 道(도)에 乘(승)하사 正覺(정각)을 大成(때성)하셨으므로 無着佛(무착불)이라 正覺佛(정각불)이라고도 云(운)하나 其意(기의)는 同(동)하고
二(이)에 願身(원신)이란 後云(후운)의 願佛(원불)로서 兜率天(도솔천)에 生(생)하신 願佛身(원불신)이오
三(삼)에 化身(화신)이란 後云(후운)의 化佛(화불) 또는 涅槃佛(열반불)로서 王宮(왕궁)에 生(생)하신 化身(화신)인바 化(화)란 涅槃(열반)을 必示(필시)함으로써요
四(사)에 住持身(주지신)이란 後云(후운)의 住持佛(주지불) 또는 持佛(지불)로서 滅後(멸후)엔 法身舍利(법신사리)로써 佛法(불법)을 住持(주지)함이오
五(오)에 相好莊嚴身(상호장엄신)이란 後云(후운)의 業報佛(업보불)로서 無邊(무변)의 相好(상호)로써 莊嚴(장엄)하는 佛身(불신)인 바 此(차)는 곧 萬行(만행)의 業因(업인)에 應酬(응수)한 功德(공덕)인 業報(업보)의 佛身(불신)이오
六(육)에 勢力身(세력신)이란 後云(후운)의 心佛(심불)로서 佛(불)의 慈心(자심)으로써 一切(일체)를 攝伏(섭복)하심일새요
七(칠)에 如意身(여의신)이란 新譯(신역)의 意生身(의생신)이오 後云(후운)의 如意佛(여의불)로서 地前(지전) 地上(지상)의 菩薩(보살)에 對(대)하사 如意(여의) 現示(현시)하시는 佛身(불신)이오
八(팔)에 福德身(복덕신)이란 後云(후운)의 三昧佛(삼매불)로서 三昧(삼매)에 常住(상주)하심이니 三昧(삼매)는 곧 最上(최상)의 福德(복덕)임으로써요
九(구)에 智身(지신)이란 後云(후운)의 性佛(성불)로서 四智(사지) 等(등) 本有(본유)의 性德(성덕)을 具(구)하심으로써요
十(십)에 法身(법신)이란 後云(후운)의 法界佛(법계불)로서 智身(지신) 所了(소료)의 本性(본성)인 바
此(차)를 法, 應, 化(법, 응, 화) 三身(삼신)에 配(배)하면 法身(법신)과 智身(지신)은 法身(법신)이요 勢力身, 如意身, 住持身, 菩提身(세력신, 여의신, 주지신, 보리신)은 應身(응신)이요 化身, 相好莊嚴身, 願身, 福德身(화신, 상호장엄신, 원신, 복덕신)은 化身(화신)이며 또 此屍身(십신)을 上(상)의 解境十身(해경십신)에 對(대)하야 行境十身(행경십신)이라 云(운)하니 修行(수행)하야써 感得(감득)하는 佛(불)의 十身(십신)임으로써니라
第 十一 章 眞 如(진여)
眞如(진여)란 梵音(범음)의 部多多他多(부다다타다)로서 「金剛經(금강경)」의 梵本(범본)에 眞如性(진여성)이라 譯(역)하니 眞(진)이란 眞實(진실)의 義(의)요 如(여)란 如常(여상)의 義(의)라
諸法(제법)의 體性(체성)이 虛妄(허망)을 離(이)한 眞實(진실)임으로써 眞(진)이오 眞性(진성)이 常住(상주)하야 不變不改(불변불개)임으로써 如(여)니 或(혹)은 圓成實性(원성실성)이라 法性(법성)이라 實相(실상)이라 佛性(불성)이라, 如來藏(여래장)이라, 法界(법계)라, 法身(법신)이라,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이라고도 云(운)하나 同體異名(동체이명)인 바 「起信論(기신론)」에 所謂(소위) 眞生未分(진생미분)의 一心(일심)인 一眞如(일진여)가 是(시)요 二眞如(이진여)라 함은 多種(다종)이 有(유)하니
一(일)엔 隨緣眞如(수연진여)와 不變眞如(불변진여)로서 無明(무명)의 緣(연)에 隨(수)하야 九界(구계)의 妄法(망법)을 起(기)할새 隨緣眞如(수연진여)요 隨緣(수연)하야 妄法(망법)을 成(성)하되 그 眞性(진성)은 不變(불변)할새 不變眞如(불변진여)라 隨緣(수연)의 義邊(의변)으론 眞如(진여)가 곧 萬法(만법)이오 不變(불변)의 義邊(의변)으론 萬法(만법)이 곧 眞如(진여)람이니 華嚴宗敎(화엄종교)와 天台別敎(천태별교) 已上(이상)의 所談(소담)이오
二(이)엔 空眞如(공진여)와 不空眞如(불공진여)로서 眞如(진여)의 染法(염법)을 離(이)함이 明鏡(명경)과 如(여)할새 空眞如(공진여)요 眞如(진여)의 淨法(정법)에 一切(일체)를 具(구)함이 明鏡(명경)에 萬像(만상)을 現(현)함과 如(여)할새 不空眞如(불공진여)람이니 「起信論(기신론)」等(등)의 所說(소설)이오
三(삼)엔 淸淨眞如(청정진여)와 染淨眞如(염정진여)로서 此(차)는 上(상)의 隨緣眞如(수연진여)와 不變眞如(불변진여)람의 異名(이명)이니 「釋摩訶衍論(석마하연론)」三(삼)에 出(출)함이오
四(사)엔 有垢眞如(유구진여)와 無垢眞如(무구진여)로서 衆生所具(중생소구)의 眞如(진여)를 有垢(유구)라 云(운)하고 諸佛所顯(제불소현)의 眞如(진여)를 無垢(무구)라 謂(위)함이니 「大乘止觀(대승지관)」二(이)에 說(설)함이오
五(오)엔 在纏眞如(재전진여)와 出纏眞如(출전진여)로서 此(차)는 上(상)의 有垢眞如(유구진여)와 無垢眞如(무구진여)람의 異名(이명)이니 「起信論疏(기신론소)」에 出(출)함이오
六(육)엔 生空眞如(생공진여)와 法空眞如(법공진여)로서 人我(인아)를 空(공)한 所顯(소현)의 眞如(진여)를 生空(생공)이라 云(운)하고 法我(법아)를 空(공)한 所顯(소현)의 眞如(진여)를 法空(법공)이라 謂(위)함이니 「唯識論(유식론)」의 所說(소설)이오
七(칠)엔 依言眞如(의언진여)와 離言眞如(이언진여)로서 眞如(진여)의 體(체)가 本來(본래)에 言辭(언사)의 相(상)과 心念(심념)의 相(상)을 離(이)하였을새 離言眞如(이언진여)요 假名(가명)의 言說(언설)에 依(의)하야 其相(기상)을 顯(현)할새 依言眞如(의언진여)니 亦是(역시) 「起信論(기신론)」의 所說(소설)이오
八(팔)엔 安立眞如(안립진여)와 非安立眞如(비안립진여)로서 此(차)는 前(전)의 依言眞如(의언진여)와 離言眞如(이언진여)람의 異名(이명)이니 「探玄記(탐현기)」等(등)의 所說(소설)이오
九(구)엔 相待眞如(상대진여)와 絶待眞如(절대진여)로서 此(차)는 上(상)의 安立眞如와 非安立眞如(비안립진여)의 異名(이명)이니 「華嚴大疏 (화엄대소초)」의 所說(소설)이니라
第 一 節 三眞如(삼진여)와 七眞如(칠진여)
一(일)에 無相眞如(무상진여)란 遍計所執(변계소집)의 虛相(허상)이 無(무)한 諸法(제법)의실相(실상)을 云(운)함이오
二(이)에 無生眞如(무생진여)란 實生(실생)이 無(무)한 諸法(제법)의 因緣生(인연생)을 云(운)함이오
三(삼)에 無性眞如(무성진여)란 妄情所執(망정소집)의 實性(실성)이 無(무)한 言亡慮絶(언망려절)을 云(운)함이니 此(차)의 三眞如(삼진여)는 「唯識論(유식론)」所說(소설)의 三無性(삼무성)에 依(의)하야 立(립)함이며
一(일)에 善法眞如(선법진여)란 眞如(진여)가 隨緣(수연)하야 善法(선법)을 成(성)한 眞如(진여)요
二(이)에 不善法眞如(불선법진여)란 眞如(진여)가 隨緣(수연)하야 不善法(불선법)을 成(성)한 眞如(진여)요
三(삼)에 無記法眞如(무기법진여)란 眞如(진여)가 隨緣(수연)하야 無記法(무기법)을 成(성)한 眞如(진여)니 此(차)의 三眞如(삼진여)는 「雜集論(잡집론)」에 出(출)하니라
그리고 「解深密經(해심밀경)」分別瑜伽品(분별유가품)과 「唯識論(유식론)」八(팔)에 七眞如(칠진여)를 說(설)하니 一(일)에 流轉眞如(유전진여)란 有爲法流轉(유위법유전)의 實性(실성)이오
二(이)에 實相眞如(실상진여)란 二無我境(이무아경)의 實性(실성)이오
三(삼)에 唯識眞如(유식진여)란 染淨法(염정법) 唯識(유식)의 實性(실성)
四(사)에 安立眞如(안립진여)란 苦諦(고체)의 實性(실성)이오
五(오)에 邪行眞如(사행진여)란 集諦(집체)의 實性(실성)이오
六(육)에 淸淨眞如(청정진여)란 滅諦(멸체)의 實性(실성)이오
七(칠)에 正行眞如(정행진여)란 道諦(도체)의 實性(실성)인 바 流轉, 安立, 邪行(유전, 안립, 사행)의 三眞如(삼진여)는 佛(불)에게 不當(부당)하고 實相, 唯識, 淸淨(실상, 유식, 청정)의 三眞如(삼진여)는 根本智(근본지)의 境(경)이며 餘(여)의 四眞如(사진여)는 後得智(후득지)의 境(경)이라 詮門(전문)에 要約(요약)한 義說(의설)로서 七眞如(칠진여)를 說(설)하나 詮(전)을 廢(폐)하고 如(여)의 體(체)를 論(논)하면 七卽一如(칠즉일여)니라
第 二 節 菩薩十地所得(보살십지소득)의 十眞如(십진여)
一(일)에 遍行眞如(변행진여)란 我法二空(아법이공)의 所顯(소현)으로서 一法(일법)에 諸法(제법)이 含藏(함장)할새 遍行(편행)않임이 없음으로써요
二(이)에 最勝眞如(최승진여)란 無邊(무변)의 德(덕)을 具足(구족)하야 一切法(일체법)에서 最勝(최승)함으로써요
三(삼)에 勝流眞如(승류진여)란 此(차) 眞如(진여) 所流(소류)의 敎法(교법)이 至極(지극)히 殊勝(수승)함으로써요
四(사)에 無攝受眞如(무섭수진여)란 我執(아집) 等(등)의 繫屬(계속)이 無(무)함으로써요
五(오)에 無別眞如(무별진여)란 眼(안) 等(등) 異類(이류)의 差別(차별)이 無(무)함으로써요
六(육)에 無染淨眞如(무염정진여)란 本性(본성)이 元來(원래) 無染(무염)할새 다시 洗淨(세정)할 수 없음으로써요
七(칠)에 法無別眞如(법무별진여)란 諸法(제법)이 種種(종종) 安立(안립)하되 其(기) 性(성)에 있어 別異(별이)가 無(무)함으로써요
八(팔)에 不增減眞如(부증감진여)란 淨染(정염)에 隨(수)한 增減(증감)의 執(집)을 離(이)함으로써니 此(차)의 又名(우명)인 相土自在所依眞如(상토자재소의진여)를 證得已(증득이)하면 身相(신상)을 現(현)하고 國土(국토)를 現(현)함에 自在(자재)를 得(득)함으로써요
九(구)에 智自在所依眞如(지자재소의진여)란 此(차) 眞如(진여)를 證得已(증득이)하면 無碍解(무애해)의 自在(자재)를 得(득)함으로써요
十(십)에 業自在等所依眞如(업자재등소의진여)란 此眞如(차진여)를 證得已(증득이)하면 一切(일체) 神通(신통)의 作業多羅尼定門(작업다라니정문)에서 皆(개) 自在(자재)를 普得(보득)함으로써라
眞如(진여)의 性(성)은 實無差別(실무차별)이지만 勝德(승덕)에 隨(수)하야 十種(십종)을 立(립)하니라
台家(태가)는 此(차)를 別敎(별교)의 十地(십지) 所得(소득)이라 云(운)하고 法華(법화) 所說(소설)의 唯佛與佛(내능궁진) 乃能窮盡(유불여불) 諸法實相(제법실상) 如是等(여시등)의 十如是(십여시)를 圓敎(원교)의 十眞如(십진여)라 稱(칭)하야 十如是(십여시)와 十眞如(십진여)란 名義(명의)가 相同(상동)하다 云(운)하고 此(차)를 無作(무작)의 無作(무작)이라 謂(위)하나 十眞如(십진여)는 身證(신증)의 境界(경계)요 十如是(십여시)는 悟道(오도)의 境界(경계)니라
그리고 一(일)에 眞如(진여) 二(이)에 法界(법계) 三(삼)에 法性(법성) 四(사)에 不虛妄說(불허망설) 五(오)에 不變異性(불변이성) 六(육)에 平等性(평등성) 七(칠)에 離生性(이생성) 八(팔)에 法定(법정) 九(구)에 法住(법주) 十(십)에 實際(실제) 十一(십일)에 虛空界(허공계) 十二(십이)에 不思議界(부사의계) 等(등)을 十二眞如(십이진여)라 或(혹)은 十二無爲(십이무위)라, 十二空(십이공)이라名(명)하니 此(차)는 身證心悟(신증심오)인 證悟(증오)의 境界(경계)니라
第 十二 章 忍(인)
「瑜伽論(유가론)」에 「云何名忍(운하명인)고 自無憤勃(자무분발)하야 不報他怨(불보타원)일새 故名忍(고명인)」이랐고 「唯識論(유식론)」九(구)에 「忍(인)이란 以無嗔(이무진)으로 精進(정진)하야 審慧(심혜)하되 及彼(급피) 所起(소기)의 三業(삼업)에 處性(처성)」하랐고 「大乘義章(대승의장)」九(구)에 「慧心(혜심)의 安法(안법)함이 名之爲忍(명지위인)」이랐고 同十一(동십일)에 「於法(어법)의 實相(실상)에 安住(안주)함이 爲忍(위인)」이랐으니 道理(도리)에 安住(안주)하야써 心(심)을 不動(부동)함이 忍(인)일새 道理(도리)를 體(체)하야 不嗔不惱(불진불뇌)함이 二忍中(이인중)의 衆生忍(중생인)이오 그 無生(무생)의 法理(법리)에 安住(안주)하야 心(심)을 不動(부동)함이 無生法忍(무생법인)이며 또 疾病(질병)이나 水火(수화)나 刀杖(도장)이나 이 衆苦(중고)가 逼迫(핍박)하되 法(법)에 住(주)하야 此(차)를 安忍(안인)하고 恬然不動(염연부동)함이 前(전)의 衆生忍(중생인)인 同時(동시)에 安受苦忍(안수고인)이오 法(법)을 觀察(관찰)하야 心(심)을 實相(실상)의 理(리)에 安住(안주)함이 前(전)의 無生法忍(무생법인)인 同時(동시)에 觀察法忍(관찰법인)이며 彼(피) 衆生忍(중생인) 安受苦忍(안수고인)에 二忍(이인)이 또 有(유)하니 人(인)의 恭敬, 供養(공경, 공양)에 於(어)하되 能忍(능인)하야 執着(집착)하지 않음이 一(일)이오 人(인)의 嗔罵, 打害(진매, 타해)에 於(어)하되 嗔恨(진한)이 不生(불생)함이 其(기) 二(이)며 無生法忍(무생법인)인 觀察法忍(관찰법인) 二忍(이인)이 亦有(역유)하니 一(일)은 非心法(비심법)의 寒熱(한열) 風雨(풍우) 飢渴(기갈) 老病死(노병사) 等(등)에 於(어)하되 能忍(은닝)하야 惱怨(뇌원)이 無(무)함이오 二(이)는 心法(심법)인 嗔 憂愁(진에우수) 等(등)의 諸煩惱(제번뇌)에 於(어)하되 厭棄(염기)가 無(무)함이니라
그러나 忍辱(인욕)에 限(한)하고 法(법)을 不知(부지)하면 凡夫(범부)요 觀法而不能忍(관법이불능인)하면 小乘(소승)이며 能忍而安住不動(능인이안주부동)하면 大乘(대승)인 同時(동시)에 方可謂之(방가위지)의 忍(인)이니라
第 一 節 三忍(삼인)과 四忍(사인)
三忍(삼인)에 種種(종종)이 有(유)하나 此(차)는 「無量壽經(무량수령)」第四十八願(제사십팔원)에 聲聞者(성문지)의 得三法忍願(득삼법인원)을 擧(거)하사 第一法忍, 第二法忍, 第三法忍(제일법인, 제이법인, 제삼법인)이라 言(언)하실 따름이오 其(기) 名(명)을 不擧(불거)하실새 此(차)에 就(취)하야 諸解(제해)가 不同(부동)하니 「法位(법위)」는 云(운)하되 「此(차)는 仁王經(인왕경)에 說(설)하신 五忍(오인)의 初三(초삼)으로서 곧 伏忍, 信忍, 順忍(복인, 신인, 순인)」이랐고 「憬興(경흥)」은 云(운)하되 「此(차)는 伏忍(복인) 中(중)의 下, 中, 上(하, 중, 상) 三忍(삼인)」이랐고 「玄一(현일)」은 云(운)하되 「此는 下說(하설)의 音響忍, 柔順忍, 無生忍(음향인, 유순인, 무생인)의 三(삼)」이랐으니 亦是(역시) 「無量壽經(무량수경)」에 「往生極樂(왕생극락)의 人(인)은 七寶樹林(칠보수림)의 音聲(음성)을 聞(문)하고 三種(삼종)의 忍(인)을 得(득)한다」하사
一(일)에 音響忍(음향인)이란 音響(음향)에 由(유)하야 眞理(진리)를 悟得(오득)함이오
二(이)에 柔順忍(유순인)이란 悟理(오리)의 慧心(혜심) 그대로 眞理(진리)에 隨順(수순)할 따름임이오
三(삼)에 無生法忍(무생법인)이란 無生(무생)의 實性(실성)을 證(증)하고 諸相(제상)을 離(이)하는 悟道(오도)의 至極(지극)이며
「思益經(사익경)」四(사) 忍法品(인법품)에 「菩薩(보살)의 四法(사법)이 有(유)하야 毁禁(훼금)의 罪(죄)를 出(출)한다」시고 菩薩四忍(보살사인)을 說(설)하시니
一(일)에 得無生忍(득무생인)이란 一切諸法(일체제법)의 自性(자성)이 空寂(공적)하야 本來(본래)에 不生(불생)함일새요
二(이)에 得無滅法忍(득무멸법인)이란 一切諸法(일체제법)이 元來無生(원래무생)이라 亦是(역시) 無滅(무멸)일새요
三(삼)에 得因緣忍(득인연인)이란 一切諸法(일체제법)이 皆是(개시) 因緣(인연)의 和合(화합)에 依(의)하야 生(생)할 따름일새 自性(자성)이 無(무)함으로써요
四(사)에 得無住忍(득무주인)이란 諸法(제법)이 住着(주착)이 無(무)함을 無住(무주)람일새 菩薩(보살)이 此(차)의 四忍(사인)을 證(증)하면 能(능)히 毁犯(훼범) 禁戒(금계)의 罪(죄)를 超出(초출)한다심이니 곧 實相懺悔(실상참회)니라
第 二 節 五忍(오인)과 十三觀門(십삼관문)
舊譯(구역) 「仁王經(인왕경)」敎化品(교화품)에 「佛言大王(불언대왕)하사 五忍(오인)이 是(시) 菩薩(보살)의 法(법)이니 伏忍(복인)의 上, 中, 下(상, 중, 하)와 信忍(신인)의 上, 中, 下(상, 중, 하)와 順忍(순인)의 上, 中, 下(상, 중, 하)와 無生忍(무생인)의 上, 中, 下(상, 중, 하)와 寂滅忍(적멸인)의 上, 下(상, 하)를 名爲諸佛菩薩(명위제불보살)의 修般若波羅密(수반야바라밀)이라」시고 同(동) 受持品(수지품)에 「大牟尼(대모니)께서 言(언)하사대 有修行十三觀門(유수행십삼관문)의 諸善男子(제선남자)가 爲大法王(위대법왕)이라 從習忍(종습인)으로 至金剛頂(지금강정)이 皆爲法師(개위법사)일새 依持(의지)하라 建立(건립)하니 汝等(여등) 大衆(대중)은 應如佛供養而供養之(응여불공양이불공지)하라 應持百萬億天(응지백만억천)이 香(향)과 妙華(묘화)하야 而以奉上(이이봉상)이라」시고 同(동) 嘉祥疏(가상소)에 「伏忍(복인)의 上, 中, 下(상, 중, 하) 者(자)는 習忍(습인)이 下(하)요 性忍(성인)이 中(중)이오 道種忍(도종인)이 上(상)이라 在三賢位(재삼현위)요 信忍(신인)의 上, 中, 下者(상, 중, 하자)는 初地(초지)가 下(하)요 二地(이지)가 中(중)이오 三地(삼지)가 上(상)이며 順忍(순인)의 上, 中, 下者(상, 중, 하자)는 四地(사지)가 下(하)요 五地(오지)가 中(중)이오 六地(육지)가 上(상)이며 無生忍(무생인)의 上, 中, 下者(상, 중, 하자)는 七地(칠지)가 下(하)요 八地(팔지)가 中(중)이오 九地(구지)가 上(상)이며 寂滅忍(적멸인)의 上下者(상하자)는 十地(십지)가 下(하)요 佛地(불지)가 上(상)」이랐으니
一(일)에 伏忍(복인)이란 習忍, 性忍, 道種忍(습인, 성인, 도종인)의 三賢位(삼현위)에 在(재)한 菩薩(보살)이 아직 煩惱(번뇌)의 種子(종자)는 未斷(미단)이나 此(차)를 制伏(제복)하야 不起(불기)케 하는 忍(인)이오
二(이)에 信忍(신인)이란 初地(초지)부터 三地(삼지)까지에서 貪惑(탐혹)을 斷盡(단진)하고 眞性(진성)을 見(견)하야 正信(정신)을 얻는 忍(인)이오
三(삼)에 順忍(순인)이란 四地(사지)부터 六地(육지)까지에서 嗔惑(진혹)을 斷盡(단진)하고 菩提(보리)의 道(도)에 順(순)하야 無生(무생)의 果(과)에 趣向(취향)하는 忍(인)이오
四(사)에 無生忍(무생인)이란 七地(칠지)부터 九地(구지)까지에서 痴惑(치혹)을 斷盡(단진)하고 諸法無生(제법무생)의 理(리)에 悟入(오입)한 忍(인)이오
五(오)에 寂滅忍(적멸인)이란 十地(십지)와 妙覺(묘각)에서 涅槃(열반)의 寂滅(적멸)에 究竟(구경)한 忍(인)이라 忍(인)은 忍可(인가) 또는 安忍(안인)의 義(의)로서 其(기) 理(리)를 決定(결정)하고 不動(부동)함일새 十三觀門(십삼관문)이란 上(상)의 十四忍(십사인) 中(중), 上(상) 寂滅忍(적멸인)의 妙覺位(묘각위)를 除(제)한 十三忍(십삼인)의 修法(수법)이라 十三觀門(십삼관문)으로써 修(수)하는 者(자)를 大法王(대법왕)이라 云(운)하시고 如佛供養(여불공양)하라시니라
第 三 節 十忍(십인)과 十四忍(십사인)
一(일)에 音響忍(음향인)이란 上(상)의 音響忍(음향인)이오
二(이)에 順忍(순인)이란 上(상)의 柔順忍(유순인)이오
三(삼)에 無生忍(무생인)이란 上(상)의 無生忍(무생인)이오
四(사)에 如幻忍(여환인)이란 諸法(제법)이 因緣(인연)에 依(의)하야 生(생)함일새 그 實性(실성)의 無(무)함이 幻化性(환화성)의 空寂(공적)함과 猶如(유여)한 양 了達(요달)하고 此(차)를 信忍(신인)함이오
五(오)에 如焰忍(여염인)이란 一切(일체)의 境界(경계)가 陽焰(양염)의 本性(본성)이 空寂(공적)함과 如(여)한양 了達(요달)하고 此(차)를 信忍(신인)함이오
六(육)에 如夢忍(여몽인)이란 一切(일체)의 妄心(망심)은 夢境(몽경)의 眞實(진실)이 無(무)함과 如(여)한양 了達(요달)하고 此(차)를 信忍(신인)함이오
七(칠)에 如響忍(여향인)이란 一切(일체) 世間(세간)의 言語(언어) 音聲(음성)은 因緣和合(인연화합)에 依(의)하야 生(생)할새 谷響(곡향)의 眞實(진실)이 無(무)함과 如(여)한 양 了達(요달)하고 此(차)를 信忍(신인)함이오
八(팔)에 如影忍(여영인)이란 色身(색신)은 五陰(오음)의 積集(적집)에 의하야 成(성)할새 本體(본체)의 無(무)함이 影(영)과 如(여)한양 了達(요달)하고 此(차)를 信忍(신인)함이오
九(구)에 如化忍(여화인)이란 世間(세간)의 諸法(제법)은 無而忽有(무이홀유)하고 有而還無(유이환무)하야 體(체)의 眞實(진실)이 無(무)하기 化事(화사)와 如(여)한 양 了達(요달)하고 此(차)를 信忍(신인)함이오
十(십)에 如空忍(여공인)이란 世間(세간) 出世間(출세간) 種種(종종)의 諸法(제법)은 虛空(허공)에 色相(색상)이 無(무)함과 如(여)한 양 了達(요달)하고 此(차)를 信忍(신인)함이니
已上(이상) 十忍(십인)은 「華嚴經(화엄경) 指掌(지장)」과 「三藏法數(삼장법수)」에 論(논)함이오 三賢十聖(삼현십성)을 十三忍(십삼인)이라 云(운)하시고 이에 正覺忍(정각인)을 加(가)하사 十四忍(십사인)이라 하심은 「仁王經(인왕경)」十(십)에 說(설)하시니라
第 十三 章 五十六位(오십육위)와 四滿成佛(사만성불)
菩薩乘(보살승)의 階位(계위)에 있어 諸經論(제경론)의 所說(소설)이 種種不同(종종부동)하니 「大日經(대일경)」엔 十住(십주)의 十位(십위) 또 十地(십지)를 說(설)하시고 「勝天王般若經(승천왕반야경)」엔 十地(십지)의 十位(십위)만을 說(설)하시고 「金光明經(금광명경)」엔 十地(십지)와 妙覺(묘각)의 十一位(십일위)를 說(설)하시고 「仁王般若經(인왕반야경)」엔 十信, 十住, 十行, 十廻向, 十地, 妙覺(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묘각)의 五十一位(오십일위)를 說(설)하시고 一部(일부)의 「華嚴經(화엄경)」과 「菩薩瓔珞經(보살영락경)」等(등)엔 等覺(등각)을 加(가)하사 五十二位(오십이위)를 說(설)하시고 「首 嚴經(수릉엄경)」엔 煖, 頂, 忍, 世第一(난, 정, 인, 세제일)의 四善根(사선근)을 加(가)하사 五十六位(오십육위)를 說(설)하심에 對(대)하야 「唯識論(유식론)」엔 十住, 十行, 十廻向, 十地, 妙覺(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묘각)의 四十一位(사십일위)를 說明(설명)하고 「智度論(지도론)」엔 此(차)에 等覺(등각)을 加(가)하야 四十二位(사십이위)를 說明(설명)한바 已上(이상)의 諸位(제위)에 就(취)하야 凡, 聖(범, 성)을 分別(분별)하면 「大日經(대일경)」所說(소설)의 十位中(십위중) 初三位(초삼위)는 凡位(범위)요 後七位(후칠위)는 賢聖位(현성위)며 「勝天王般若經(승천왕반야경)」의 十位(십위)와 「金光明經(금광명경)」의 十一位(십일위)는 皆是(개시) 聖位(성위)며 「智度論(지도론)」所說(소설)의 十位(십위) 中(중) 初二位(초이위)는 凡位(범위)요 後八位(팔위)는 賢聖位(현성위)며 「唯識論(유식론)」所說(소설)의 四十一位中(사십일위중) 十住, 十行, 十廻向(십주, 십행, 십회향)의 三十(삼십)은 賢位(현위)요 十地(십지) 妙覺(묘각)은 聖位(성위)니 此(차)는 곧 天台別敎(천태별교)와 華嚴宗敎(화엄종교)의 乘位(승위)에 合(합)하나 萬一(만일) 二宗(이종) 圓敎(원교)의 乘位(승위)에 依(의)하면 悉皆(실개) 聖位(성위)라 「智度論(지도론)」所說(소설)의 四十二位(사십이위)도 此(차)에 準(준)하야 知(지)할지오 「華嚴, 瓔珞(화엄, 영락)」等(등)의 五十二位中(오십이위중) 初(초) 十信(십신)은 凡位(범위)요 住, 行, 廻向(주, 행, 회향) 三位(삼위)는 別敎(별교)와 終敎(종교)에선 賢位(현위)요 圓敎(원교)에선 聖位(성위)라며 十地, 等, 妙(십지, 등, 묘)의 十二位(십이위)는 二敎(이교)나 圓敎(원교)나 聖位(성위)랄새 五十六位(오십육위)도 此(차)에 準(준)하야 知(지)할지라
要(요)컨대 諸說(제설)이 差異(차이)함은 곧 修, 證(수, 증)에 先後(선후)함이니 次(차)를 參酌(참작)하야
먼저 修, 證(수, 증)의 圓義(원의) 吟味(음미)에 努力(노력)할지오 十廻向(십회향)을 十地(십지)에 前後(전후)함은 因果(인과)의 差(차)가 有(유)할 뿐이니라
第 一 節 加行(가행)의 四善根(사선근)
煖(난)이란 色陰(색음)의 區宇(구우)를 打開(타개)하는 前相(전상)이오 頂(정)이란 欲界頂天(욕계정천)인 緣慮(연려)의 質多心相(질다심상)을 披雲見月格(피운견월격)으로 直見(직견)하는 法相(법상)이오 忍(인)이란 此(차) 位(위)에서 欲界(욕계)의 假相(가상)은 虛空(허공)과 如(여)함을 了達(요달)하야 此(차)를 信忍(신인)함이오 世第一(세제일)이란 欲界世間(욕계세간)의 頂法(정법)에 安住(안주)하고 動搖(동요)가 無(무)하야 世間(세간)에 第一法(제일법)일새이니
俱舍宗(구사종)에선 四諦觀(사체관)으로써 十六行相(십육행상)을 觀察(관찰)하고 成實宗(성실종)에선 無常觀(무상관)으로써 五蘊(오온)을 觀察(관찰)하야 相似(상사)의 涅槃智(열반지)가 生(생)함을 四品(사품)에 分(분)하야 下(하)를 煖法(난법), 中(중)을 頂法(정법), 上(상)을 忍法(인법), 上上(상상)을 世第一法(세제일법)이라 名(명)하고 法相大乘(법상대승)은 初(초)의 明得定(명득정)을 煖法(난법), 明增定(명증정)을 頂法(정법), 印順定(인순정)을 忍法(인법), 無間定(무간정)을 世第一法(세제일법)이라 稱(칭)하며 또 聲聞, 獨覺, 佛(성문, 독각, 불) 三乘(삼승)에 三品(삼품)의 四善根(사선근)이 有(유)하니 聲聞(성문)과 部行獨覺(부행독각)은 煖, 頂(난, 정) 二善根(이선근) 已生(이생)의 位(위)에서 正覺位(정각위)에 轉入(전입)하나니 彼(피)는 萬一(만일) 成佛前(성불전)에 忍(인)을 得(득)하면 不可(불가)할새 此(차)는 惡趣(악취)를 已脫(이탈)하야 利物化生(이물화생)이 不能(불능)함으로써라 然則(연즉) 煖, 頂, 忍(난, 정, 인)의 三法(삼법)은 利生(이생)의 化用(화용)을 不要(불요)하는 獨覺(독각)을 轉成(전성)하며 麟角獨覺(인각독각)과 佛(불)은 煖(난) 等(등)의 善根(선근)에서 成菩提(성보리)에 至(지)하기까지 一座(일좌)를 不離(불리)할새 四善根(사선근)에 轉退(전퇴)할 理(리)가 無(무)하니라
第 二 節 十 信(십신)
佛(불)의 敎法(교법)에 入(입)코자 하는 者(자)는 먼저 十信(십신)으로써 하는 바 證前(증전)엔 迷信(미신)이오 證後(증후)엔 正信(정신)이라 信位(신위)에서 벌써 凡聖(범성)이 區別(구별)되니 注意(주의)할지어다
一(일)에 信心(신심)이란 一切(일체)의 妄想(망상)을 滅盡(멸진)하고 中道純眞(중도순진)함을 云(운)함이오
二(이)에 念心(념심)이란 眞信(진신)이 明了(명료)하야 一切(일체)에 圓通(원통)할새 幾多(기다)의 生死(생사)를 經(경)하드라도 現生(현생)의 一念(일념)을 遺忘(유망)하지 않음이오
三(삼)에 精進心(정진심)이란 妙圓純眞(묘원순진)의 精明(정명)으로써 眞淨(진정)에 進趣(진취)함이오
四(사)에 慧心(혜심)이란 心(심)의 精(정)이 現前(현전)할새 純眞(순진)의 智慧(지혜)가 自然(자연) 發起(발기)함이오
五(오)에 定心(정심)이란 智明(지명)을 執持(집지)할새 周遍(주변)이 湛寂(담적)하야 心(심)을 一境(일경)에 常凝(상응)함이오
六(육)에 不退心(불퇴심)이란 定光(정광)이 發明(발명)할새 明性(명성)에 深入(심입)하야 오직 有進無退(유진무퇴)함이오
七(칠)에 護法心(호법심)이란 心(심)이 進(진)하야 安然(안연)할새 一切(일체) 佛法(불법)을 保持(보지)하고 十方如來(시방여래)와 氣分交涉(기분교섭)함이오
八(팔)에 廻向心(회향심)이란 覺明(각명)을 保持(보지)할새 能(능)히 妙力(묘력)으로써 佛光(불광) 廻照(회조)를 感(감)하고 佛(불)에 向(향)하야 安住(안주)함이오
九(구)에 戒心(계심)이란 心光(심광)이 密廻(밀회)할새 無爲(무위)에 安住(안주)하야 遺失(유실)이 無(무)함이오
十(십)에 願心(원심)이란 戒(계)에 住(주)하야 自在(자재)할새 十方(시방)에 遊(유)하되 悉皆(실개) 願(원)에 隨(수)함이니라
第 三 節 十 住(십주)
住(주)란 如法解(여법해)에 立脚(입각)함이니
一(일)에 發心住(발심주)란 信心(신심)의 用(용)을 涉入(섭입)한 圓成一心(원성일심)의 位(위)요
二(이)에 治地住(치지주)란 心(심)이 明淨(명정)함이 琉璃(유리) 內(내)에 精金(정금)을 現(현)함과 如(여)히 前(전)의 妙心(묘심)으로써 履治(이치)하는 境地(경지)를 云(운)함이오
三(삼)에 修行住(수행주)란 前(전)의 地(지)를 涉知(섭지)하야 明了(명료)할새 十方(시방)에 遊履(유리)하되 留碍(유애)가 없음이오
四(사)에 生貴住(생귀주)란 佛(불)의 氣分(기분)을 受(수)하야 彼此(피차)에 冥通(명통)할새 비로소 如來種(여래종)에 入(입)함이오
五(오)에 方便具足住(방편구족주)란 自利(자리)와 利他(이타)의 方便(방편)을 具足(구족)할새 如來行動(여래행동)함이오
六(육)에 正心住(정심주)란 行動(행동)에 限(한)할배 않이라 心相(심상)도 佛(불)과 同一(동일)함이오
七(칠)에 不退住(불퇴주)란 身心(신심)이 合一(합일)하야 日日(일일) 增長(증장)함이오
八(팔)에 童眞住(동진주)란 佛具(불구)의 十身(십신)을 一時(일시) 具足(구족)함이오
九(구)에 法王子住(법왕자주)란 生貴住(생귀주)까지를 入聖胎(입성태)라 云(운)하고 童眞住(동진주)까지를 長養聖胎(장양성태)라 謂(위)하고 此(차) 住(주)에선 相形(상형)이 具足(구족)하야 비로소 出胎(출태)할새요
十(십)에 灌頂住(관정주)란 菩薩(보살)이 이미 佛子(불자)가 되야 能(능)히 佛事(불사)를 行(행)함에 佛(불)이 智水(지수)로써 灌頂(관정)함이니 刹帝利(찰제리) 王子(왕자)의 受職灌頂(수직관정)과 如(여)함이니라
第 四 節 十 行(십행)
一(일)에 歡喜行(환희행)이란 佛子(불자)가 된 菩薩(보살)이 如來(여래)의 妙德(묘덕)으로써 十方(시방)에 隨順(수순)할새요
二(이)에 饒益行(요익행)이란 一切衆生(일체중생)을 利益(이익)케 할새요
三(삼)에 無嗔恨行(무진한행)이란 自覺(자각)과 覺他(각타)에 違逆(위역)이 無(무)함으로써니 또는 無 恨(무에한)이라 無違逆(무위역)이라고도 云(운)함이오
四(사)에 無盡行(무진행)이란 衆生(중생)의 機類(기류)에 隨(수)하야 其(기) 身(신)을 現(현)하되 三世(삼세)가 平等(평등)하야 十方(시방)에 通達(통달)할새 利他(이타)의 行(행)이 無盡(무진)함이오
五(오)에 離痴亂行(이치란행)이란 種種(종종)의 法門(법문)이 不同(부동)하드라도 一切(일체)가 合同(합동)하야 差誤(차오)가 無(무)함이오
六(육)에 善現行(선현행)이란 이미 痴亂(치란)을 離(이)할새 能(능)히 同類中(동류중)에 異相(이상)을 現(현)하고 一一의 異相(이상)에 同一相(동일상)을 現(현)하야 同異(동이)가 圓融(원융)함이오
七(칠)에 無着行(무착행)이란 十方虛空(시방허공)에 微塵(미진)을 滿足(만족)하고 一一塵中(일일진중)에 十方界(시방계)를 現(현)하되 塵界(진계)에 留碍(유애)가 無(무)함이오
八(팔)에 尊重行(존중행)이란 難得行(난득행)이라고도 云(운)하니 前(전)의 種種(종종) 現行(현행)은 오직 般若(반야)이 觀照(관조)하는 力(력)일새 六度(육도) 中(중) 特(특)히 般若波羅密(반야바라밀)을 尊重(존중)함이오
九(구)에 善法行(선법행)이란 圓融(원융)의 德(덕)으로써 能(능)히 十方(시방) 諸佛(제불)의 軌則(궤칙)을 現成(현성)함이오
十(십)에 眞實行(진실행)이란 前(전)의 圓融德相(원융덕상)은 一一(일일)히 皆是(개시) 淸淨無漏(청정무루)로서 一眞無爲(일진무위)의 實性(실성)일새 本來(본래)부터 如常(여상)할새니라
第 五 節 十地心(십지심)
菩薩(보살)의 十地(십지)는 이미 二章(이장) 三節(삼절)에 略述(약술)한 배라 此(차)엔 그의 異名(이명)인 十地心(십지심)의 名數(명수)만 列擧(열거)하니 一(일)에 初地(초지)의 四無量心(사무량심)은 種子(종자)요 二(이)에 二地(이지)의 十善心(십선심)은 芽(아)요 三(삼)에 三地(삼지)의 明光心(명광심)은 苞(포)요 四(사)에 四地(사지)의 焰慧心(염혜심)은 葉(엽)이오 五(오)에 五地(오지)의 大勝心(대승심)은 花(화)요 六(육)에 六地(육지)의 現前心(현전심)은 果(과)요 七(칠)에 七地(칠지)의 無生心(무생심)은 受用種子(수용종자)요 八(팔)에 八地(팔지)의 不思議心(부사의심)은 爲無畏依(위무외의)라 果中之果(과중지과)요 九(구)에 九地(구지)의 慧光心(혜광심)은 有進求佛慧生(유진구불혜생)이라 最勝心(최승심)이오 十(십)에 十地(십지)의 受位心(수위심)은 곧 決定心(결정심)인 바 此(차)의 二心(이심)은 第八心中(제팔심중)에서 開出(개출)하였으나 一一地中(일일지중)에 此(차)의 十心(십심)이 亦在(역재)하니 此(차)는 「瓔珞本業經(영락본업경)」上(상)과 「大日經疏(대일경소)」三(삼)에 詳說(상설)하였나니라
第 六 節 十廻向(십회향)과 等妙(등묘)
一(일)은 救護一切衆生廻向(구호일체중생회향)이오 二(이)는 不壞廻向(불괴회향)이오 三(삼)은 等一切佛廻向(등일체불회향)이오 四(사)는 至一切處廻向(등일체처회향)이오 五(오)는 無盡功德廻向(무진공덕회향)이오 六(육)은 入一切平等廻向(입일체평등회향)이오 七(칠)은 隨順衆生廻向(수순중생회향)이오 八(팔)은 眞如相廻向(진여상회향)이오 九(구)는 無縛無着廻向(무박무착회향)이오 十(십)은 法界無量廻向(법계무량회향)으로서 十信, 十住, 十行(십신, 십주, 십행)이 因(인)이 되고 十地(십지)가 果(과)가 될 時(시)엔 此(차)의 因(인)이 果(과)에 對(대)한 十廻向(십회향)이오 十地(십지)까지 因位(인위)가 될 時(시)엔 妙覺(묘각)에 對(대)한 十廻向(십회향)일새 十住(십주) 或(혹) 十地(십지)의 十位(십위)만에 約(약)하심은 其(기) 意(의)에 있어 十信, 十住, 十行, 十廻向, 十地(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五種(오종)의 十位(십위)요 十位(십위)를 五十六(오십육)에 開(개)하심은 十重(십중)의 五位(오위)에 前後(전후)를 加(가)하심인 바 其後(기후)에 異說(이설)의 煩(번)을 要(요)함은 先修後證(선수후증)에 立脚(입각)함이니라
그리고 等覺位(등각위)를 加減하심은 等覺(등각)의 境界(경계)를 別示(별시)하실 時(시)엔 加(가)하시고 諸位(제위)의 隨分覺(수분각)이 될 時(시)엔 減(감)하시고 因位(인위)에 對(대)하사 別示(별시)를 必要(필요)로 하실 時(시)엔 加(가)하신 바 修者(수자)는 맛당히 修證(수증)의 圓義(원의)를 吟味(음미)하는 同時(동시)에 十(십)의 位妙(위묘)를 諦察(체찰)할지니라
第 十四 章 三 界(삼계)
凡夫(범부)가 生死往來(생사왕래)하는 世界(세계)를 三(삼)에 分(분)하니
一(일)에 欲界(욕계)란 淫慾(음욕)과 食慾(식욕)을 主(주)로 하고 諸欲(제욕)을 從(종)으로 한 有情(유정)의 世界(세계)로서 上(상)은 六欲天(육욕천)으로부터 中(중)은 人界(인계)의 四大洲(사대주)를 經(경)하야 無間地獄(무간지옥)에 至(지)하기까지를 云(운)함이오
二(이)에 色界(색계)란 色(색)은 質碍(질애)의 義(의)으로서 有形(유형)의 物質(물질)을 云(운)함이니 此(차) 界(계)는 欲界(욕계)의 上(상)에 在(재)하야 **, 食(음, 식) 二欲(이욕)을 主(주)로 한 諸欲(제욕)을 離(이)한 有情(유정)의 世界(세계)로서 身體(신체)나 依處(의처)나 物質的(물질적) 物(물)은 總(총)히 殊妙精好(수묘정호)할새니 此(차) 色界(색계)를 禪定(선정)의 淺深**妙(천심추묘)에 由(유)하야 四級(사급)의 四禪天(사선천)이라 或(혹)은 靜慮(정려)라 云(운)하고 此中(차중)에서 或(혹)은 十六天(십육천)을 立(립)하며 或(혹)은 十七天(십칠천)을 立(립)하며 或(혹)은 十八天(십팔천)을 立(립)함이오
三(삼)에 無色界(무색계)란 物質的(물질적)의 色(색)이 都無(도무)할새 身體(신체)나 依處(의처)가 無(무)하고 오직 心識(심식)으로써 深妙(심묘)한 禪定(선정)에 住(주)할 따름이라 다만 果報(과보)가 色界(색계)보다 勝(승)한 義(의)에 就(취)하야 其(기) 上(상)에 在(재)하다심이니 此(차)에 亦是(역시) 四天(사천)이 有(유)하야 或(혹)은 四無色(사무색)이라 四空處(사공처)라 云(운)하는바
要(요)컨대 三界(삼계)란 色陰(색음)을 銷却(소각)하는 三品(삼품)의 程度(정도)를 示(시)한 者(자)로서 枝末無明(지말무명)인 六境(육경)이 欲界(욕계)요 根本無明(근본무명)인 六根(육근)이 色界(색계)요 受, 想, 行, 識(수, 상, 행, 식)의 染識(염식)인 六識(육식)이 無色界(무색계)라 六境, 六根, 六識(육경, 육근, 육식)의 十八天(십팔천)으로 色界(색계)를 無色界(무색계)까지 延長(연장)함이 法合(법합)하니 **大(추대)한 欲界(욕계)와 細微(세미)한 無色界(무색계)는 色界(색계)에 立脚(입각)한 禪定(선정)으로써 分明(분명)히 自證劃定(자증획정)할지오 同時(동시)에 欲界(욕계)의 四大的假想(사대적가상)인 六境(육경)이 虛妄不實(허망부실)함을 信忍(신인)한 四善根(사선근)이 信位(신위)에서 그의 實相(실싱)을 證(증)하고 此(차) 地(지)에 住(주)하야 解行一如(해행일여)로써 受, 想, 行, 識(수, 상, 행, 식) 四陰(사음)의 滅盡(멸진)에 따라 常, 樂, 我, 淨(상, 락, 아, 정)을 成就(성취)할새 名(명)이 四滿成佛(사만성불)의 妙覺(묘각)인 바 解悟(해오)에 있언 一念(일념)에 三界(삼계)를 超越(초월)할 수 있으나 證悟(증오)에 있언 界分(계분)이 本有(본유)하니 三界(삼계)를 圖示(도시)하면 如左(여좌)하니라
第 一 節 四善根(사선근)
前(전)의 四善根(사선근)이란 곧 地, 水, 火, 風(지, 수, 화, 풍) 四大(사대)의 顯界(현계)인 色蘊(색온)을 打成一片(타성일편)하는 境界(경계)요
四禪定(사선정)이란 密界(밀계)의 그 實色(실색)을 證見(증견)하는 同時(동시)에 受, 想, 行, 識(수, 상, 행, 식) 四蘊(사온)의 四禪(사선)으로써 常, 樂, 我, 淨(상, 락, 아, 정) 四德(사덕)의 四定(사정)에 轉入(전입)하는 境界(경계)니 곧 四無色(사무색)의 境界一相(경계일상)을 觀察(관찰)함은 四禪(사선)이오 그의 思惟(사유)로써 一行(일행)함은 四定(사정)이라
空無邊處(공무변처)를 觀(관)하고 念(념)하야 色界(색계)의 金塵相(금진상)을 見(견)하고 欲界(욕계)의 虛妄相(허망상)을 一掃(일소)한 涅槃界(열반계)의 淨德(정덕)을 證(증)함은 初禪定(초선정)이오
識無邊處(식무변처)를 觀(관)하고 念(념)하야 微塵(미진)의 阿**色(아누색)을 見(견)하는 同時(동시)에 水性的(수성적) 受陰(수음)을 걷고 淨心(정심)의 我德(아덕)을 證(증)함은 二禪定(이선정)이오
無所有處(무소유처)를 觀(관)하고 念(념)하야 色究竟(색구경)의 極微相(극미상)을 見(견)하는 同時(동시)에 火性的(화성적) 想陰(상음)을 轉(전)하야 一道光明(일도광명)의 常德(상덕)을 證(증)함은 三禪定(삼선정)이오
非想非非想處(비상비비상처)를 觀(관)하고 念(념)하야 微微(미미)의 隣虛相(인허상)을 見(견)하는 同時(동시)에 風性的(풍성적) 行陰(행음)을 轉(전)하는 樂德(낙덕)을 證(증)함은 四禪定(사선정)일새 四禪定(사선정)이란 곧 娑婆(사바) 卽(즉) 寂光土(적광토)임을 見(견)하고 娑婆世界(사바세계) 그대로 極樂世界(극락세계)임을 證(증)함이니라
그리하야 欲界(욕계)의 惑網(혹망)을 超脫(초탈)하고 色界(색계)에 生(생)할새 諸功德(제공덕)을 生(생)하는 依地根本(의지근본)이 되는지라 四禪定(사선정)을 本禪(본선)이라고도 稱(칭)하니 身(신)에 動, 痒, 輕, 重, 冷, 煖, 澁, 滑(동, 양, 경, 중, 냉, 난, 삽, 활)의 八觸(팔촉)이 生(생)하고 心(심)에 空, 明, 定, 智, 善心, 柔軟, 喜, 樂, 解脫, 境界相應(공, 명, 정, 지, 선심, 유연, 희, 락, 해탈, 경계상응)의 十功德(십공덕)이 生(생)함은 初禪定(초선정)에 入(입)한 證相(증상)이며 初禪(초선)부터 鼻, 舌(비, 설) 二識(이식)이 無(무)하고 二禪(이선)부턴 五識(오식)을 모두 離(이)하고 다만 意識(의식)만 有(유)하니 或(혹)은 眼, 耳, 身(안, 이, 신) 三識(삼식)의 喜受(희수)가 有(유)하야 意識(의식)과 相應(상응)하고 意識(의식)의 樂受(락수)가 有(유)하야 三識(삼식)과 相應(상응)하는 바 으植(의식)의 喜悅(희열)이 **大(추대)할새 喜受(희수)요 樂受(락수)가 않이로되 三禪(삼선)엔 亦是(역시) 意識(의식)만이 有(유)하야 樂, 捨(락, 사) 二受(이수)가 相應(상응)하되 怡悅(이열)의 相(상)이 至極淨妙(지극정묘)할새 樂受(락수)며 四禪(사선)엔 亦是(역시) 意識(의식)뿐이오 오직 捨受(사수)와 相應(상응)할 뿐이니라
그리고 相(상)에 있어 四禪(사선)에 각각 三級(삼급)씩 有(유)하고 性(성)에 있어 四級(사급) 乃至(내지) 八級(팔급)을 言(언)하는 바 天(천)이란 密界(밀계)의 地相(지상)으로서 色界(색계) 十二天(십이천)에 無色界(무색계)의 淨梵地(정범지)를 加(가)하야 色界(색계)라 總稱(총칭)함도 有(유)하니 곧 禪定(선정)의 次序(차서)니라
그런데 四大(사대)의 實色(실색)인 줄 是認(시인)할 뿐이오 四大(사대)의 虛相(허상)을 離(이)한 實相(실상)임을 感得(감득)못함은 凡夫(범부)의 所見(소견)일새요 四陰(사음)을 四德(사덕)으로 轉換(전환) 못함은 外道(외도)의 淺見(천견)일새 다만 根機(근기)에 있을 따름이오 三界(삼계)에 있지 않음을 了知(요지)하는 同時(동시)에 四禪定(사선정)을 外道禪(외도선)이라 貶(폄)하고 近來(근래)의 死禪(사선) 곧 無記定(무기정)이나 妄想定(망상정)인 邪定(사정)의 修行(수행)을 能事(능사)로 自認(자인)하는 啞羊僧(아양승)을 警戒(경계)하노라
四禪定(사선정)이란 三乘聖者(삼승성자)의 供修(공수)하는 根本禪(근본선)임을 再吟味(재음미)하기 바라며 滅盡定(멸진정)을 거쳐 究竟成就(구경성취)할지니라
第 二 節 滅盡定(멸진정)
「大乘義章(대승의장)」二(이)에 「滅盡定者(멸진정자)는 謂諸聖人(위제성인)이 患心勞慮(환심노려)하야 暫滅心識(잠멸심식)함이니 得一有爲(득일유위)의 非色心法(비색심법)하야 領補心處(영보심처)함을 名(명) 滅盡定(멸진정)」이랐고 同九(동구)에 「滅受想者(멸수상자)는 偏對受想二陰(편대수상이음)하야 彰名(창명)함이라 想絶受亡(상절수망)이 名(명) 滅受想(멸수상)이오 滅盡定者(멸진정자)는 通對一切(통대일체)의 一心心數法(일심심수법)하야 以彰名也(이창명야)니 心及心法(심급심법)의 一切俱亡(일체구망)이 名爲滅盡(명위멸진)」이랐으며 「俱舍論(구사론)」五(오)에 如說(여설)컨대 「復有別法(부유별법)하니 能令心心所(능령심심소)로 滅(멸)함을 名無想定(명무상정)이오 如是(여시)히 復有別法(부유별법)하니 能令心心所(능령심심소)로 滅(멸)함일새 名滅盡定(명멸진정)」이랐고 同述記(동술기) 七本(칠본)에 「彼心心所(피심심소)의 滅(멸)을 名滅定(명멸정)이오 恒行(항행)인 染汚(염오)의 心(심) 等(등)이 滅故(멸고)로 卽此亦名(즉차역명) 滅受想定(멸수상정)이라」하야 滅盡定(멸진정)을 滅受想定(멸수상정)이라고도 名(명)하고 六識(육식)의 心心所(심심소)를 滅盡(멸진)하는 禪定(선정)의 名(명)으로서 그 加行方便(가행방편)에 特(특)히 受(수)의 心所(심소)와 想(상)의 心所(심소)를 厭忌(염기)하야 此(차)를 滅(멸)함일새 加行(가행)에 從(종)한 滅受想定(멸수상정)이오 不還果(불환과) 以上(이상)의 聖者(성자)가 涅槃(열반)에 假入(가입)하는 想(상)을 起(기)하야 此(차)의 定(정)에 入(입)함일새 極長(극장)이 七日(칠일)이라 滅盡定(멸진정)인 양 解(해)하나
換言(환언)하면 滅盡定(멸진정)이란 色陰(색음)을 滅盡(멸진)함에 따라 受, 想, 行, 識(수, 상, 행, 식) 四陰(사음)의 染心(염심)을 滅盡(멸진)하는 三昧(삼매)의 名(명)이니 初, 二地(초, 이지)에서 色陰(색음)을 三, 四地(삼, 사지)에서 受陰(수음)을 五, 六地(오, 육지)에서 想陰(상음)을 七, 八地(칠, 팔지)에서 行陰(행음)을 九, 十地(구, 십지)에서 識陰(식음)을 上下品(상하품)의 十重(십중) 五位(오위)로 滅盡(멸진)함이오 또는 十信位(십신위)에서 色陰(색음)을 十住位(십주위)에서 受陰(수음)을 十行位(십행위)에서 想陰(상음)을 十廻向位(십회향위)에서 行陰(행음)을 十地位(십지위)에서 識陰(식음)을 五重(오중) 十位(십위)로 滅盡(멸진)함이니 十重(십중) 五位(오위)론 十住位(십주위)부터 五重(오중) 十位(십위)론 三地(삼지)부터 次第(차제)로 滅盡(멸진)함이니라
곧 先修後證(선수후증)과 先證後修(선증후수)의 別(별)은 姑捨(고사)하고 色蘊(색온) 또는 此(차)에 染汚(염오)한 四蘊(사온)의 染心(염심)을 滅盡(멸진)하고 淨心(정심)에 住(주)하야 常樂(상락)의 一(일) 大人我(대인아)를 成就(성취)하는 滅盡三昧(멸진삼매)의 名(명)이니라
그리하야 四禪, 四定(사선, 사정)에 此(차)를 加(가)하고 九次第定(구차제정)이라 稱(칭)하는 바 四禪, 四定(사선, 사정)은 三乘聖者(삼승성자)와 外道(외도)가 共修(공수)하나 第九(제구)의 滅盡定(멸진정)은 聖者(성자)에 限(한)하는 同時(동시)에 外道(외도)는 法相(법상)에만 限(한)하고 正道(정도)에 不在(부재)하며 根機(근기)에 따라 次第漸修(차제점수) 또는 間超(간초)와 頓超(돈초)의 別(별)이 有(유)하니라
第 三 節 兜率內院(도솔내원)
兜率(도솔)이란 上足(상족)이라, 妙足(묘족)이라, 知足(지족)이라, 喜足(희족)이라, 譯(역)하는 바 欲界(욕계)의 夜摩天(야마천)과 樂變化天(낙변화천)의 中間(중간)에 在(재)한 第四重(제사중)의 天處(천처)로서 內外處(내외처)에 分(분)하야 그 內院(내원)을 彌勒菩薩(미륵보살)의 淨土(정토)라 云(운)하고 外院(외원)을 天衆(천중)의 欲樂處(욕락처)라 謂(위)할새 兜率內院(도솔내원)이란 菩薩(보살) 最後身(최후신)의 住處(주처)라 釋迦如來(석가여래)께서도 菩薩身(보살신)의 最後(최후)에 此處(차처)에 住(주)하시다가 此(차) 生(생)을 終(종)하시고 人間(인간)에 下生(하생)하사 成道(성도)하신지라 只今(지금) 彌勒菩薩(미륵보살)의 最後身(최후신)이 住(주)하시는 淨土(정토)인바 彼天(피천)에서 四千歲間(사천세간) 此(차)에 住(주)하신 後(후) 人間(인간)에 下生(하생)하사 龍華樹下(용화수하)에서 成佛(성불)하시니 彼天(피천)의 四千歲(사천세)는 人間(인간)의 五十六億七千萬歲(오십육억칠천만세)에 當(당)한다 說(설)하셨나니라
그리고 「普曜經(보요경)」一(일)엔 「其(기) 兜率天(도솔천)에 有大天宮(유대천궁)하니 名曰(명왈) 高幢(고당)이라 廣長(광장)이 二千五百六十里(이천오백육십리)인 바 菩薩(보살)이 常坐(상좌)하고 爲諸天人(위제천인)하야 敷演經典(부연경전)이라」시고 「彌勒上生經(미륵상생경)」엔 「爾時(이시) 此宮(차궁)에 有一大神(유일대신)하니 名(명) **度跋提(로도발제)라 卽從座起(즉종좌가)하야 遍禮十方佛(변례시방불)하고 發弘誓願(발홍서원)하되 若我福德(약아복덕)이 應爲彌勒菩薩(응위미륵보살)의 造善法堂(조선법당)하야 令我額上(영아액상)에서 自然出珠(자연출주)하게 하소서 旣發願已(기발원이)에 額上(액상)에서 自然(자연)히 出(출) 五百寶珠(오백보주)라」하시고 「乃至(내지) 化爲四十九重(화위사십구중)의 微妙寶宮(미묘보궁)이라」說(설)하신 密意(밀의)를 把握(파악)할지니라
그리하야 「金剛頂經(금강정경)」一(일)에 「往詣須彌盧頂(왕예수미로정)의 金剛摩尼寶峰樓閣(금강마니보봉루각)이라」심과 「攝眞實經(섭진실경)」에 「時(시)의 薄伽梵(박가범)이 住妙高山頂(주묘고산정)의 三十三天帝釋天宮中(삼십삼천제석천궁중) 摩尼最勝樓閣(마니최승루각)하실새 三世諸佛(삼세제불)의 常說處(상설처)라」신 極義(극의)를 觀破(관파)하고 修行(수행)의 一步(일보)를 進(진)함이 緊(긴)하니라
第 十五 章 須彌山(수미산)
須彌(수미)란 妙高(묘고)라, 妙光(묘광)이라, 安明(안명)이라, 善積(선적)이라, 善高(선고)라, 譯(역)하는 바 器世界(기세계)의 最下(최하)에 風輪(풍륜), 其上(기상)에 水輪(수륜), 其上(기상)에 金輪(금륜)이 有(유)하고 其上(기상)에 九山八海(구산팔해)가 有(유)하니 持雙, 持軸, 擔木, 善見, 馬耳, 象鼻, 持邊, 須彌(지쌍, 지축, 담목, 선견, 마이, 상비, 지변, 수미)의 八山八海(팔산팔해)와 鐵圍山(철위산)과아울너 九山八海(구산팔해)요 九山八海(구산팔해)의 中心(중심)이 須彌山(수미산)인데 入水(입수)하기 八萬由旬(팔만유순)이오 出水(출수)하기 八萬由旬(팔만유순)인 그 頂上(정상)이 帝釋天(제석천)의 所居(소거)요 그 半腹(반복)이 四大王天(사대왕천)의 所居(소거)로서 그 周圍(주위)에 七香海(칠향해)와 七金山(칠금산)이 有(유)하고 第七金山(제칠금산)의 外(외)에 鹹海(함해)가 有(유)하야 그 外圍(외위)가 鐵圍山(철위산)이며 鹹海(함해)의 四方(사방)에 贍富部洲(섬부주) 等(등) 四大洲(사대주)가 有(유)하니라
그리고 須彌山(수미산)의 水上高(수상고)가 三百三十六萬里(삼백삼십육만리)람과 四寶合成(사보합성)이람의 說(설)이 有(유)하니 「註維摩經(주유마경)」一(일)에 「肇曰(조왈) 須彌山(수미산)은 곧 帝釋天所住(제석천소주)의 金剛山也(금강산야)요 秦言(진언) 妙高(묘고)니 處大海之中(처대해지중)하야 水(수)의 上(상)이 方高三百三十六萬里(방고삼백삼십육만리)」랐고 「勝**寶窟中本(승만보굴중본)」에 「須彌(수미)는 此言(차언) 妙高(묘고)요 亦名(역명) 安明(안명)이오 亦言(역언) 善積(선적)인 바 林公(임공)의 須彌留(수미류)는 此言(차언) 善高(선고)니 三百三十六萬里(삼백삼십육만리)」랐고 「西域記(서역기)」一(일)에 「蘇迷盧山(소미로산)은 唐言(당언) 妙高山(묘고산)이니 舊曰(구왈) 須彌(수미)와 又曰(우왈) 須順婁(수후루)는 皆(개) 訛略也(와략야)요 四寶(사보)가 合成(합성)하야 在大海中(재대해중)」이랐고 「慧琳音義(혜림음의)」一(일)에 「或云(혹운) 須彌山(수미산)과 彌樓山(미루산)은 皆(개) 梵音(범음)의 聲轉不正也(성전부정야)요 正云(정운)의 蘇迷**(소미로)란 唐云(당운) 妙高山(묘고산)이니 四寶所成故(사보소성고)로 曰妙(왈묘)요 出過衆山(출과중산)이라 曰高(왈고)요 或云(혹운) 妙光山(묘광산)이란 以(이) 四色寶(사색보)의 光明(광명)이 各異照世故(각이조세고)로 名妙光也(명묘광야)」랐나니라
第 一 節 須彌四層(수미사층)
蘇迷**山(소미로산)에 四(사)의 層級(층급)이 有(유)하니 水際(수제)로부터 第一層(제일층)을 盡(진)하기까지 十千踰繕那(십천유선나)의 量(양)이 有(유)한지라 如是(여시)히 乃至(내지) 第四(제사)의 層(층)을 盡(진)하기까지 亦然(역연)한바 此(차)의 四層級(사층급)은 妙高山(묘고산)의 側傍(측방)에서 出(출)하야 그 下半(하반)을 圍繞(위요)하니 最初(최초)의 層級(층급)은 出水(출수)하기 十六千(십육천)이오 第二, 第三, 第四(제이, 제삼, 제사)의 層級(층급)은 그 次第(차제)와 如(여)히 八千, 四千, 二千(팔천, 사천, 이천)이라 그에 藥叉神(약차신)이 有(유)하니 堅手(견수)라 名(명)함은 初層級(초층급)에 住(주)하고 持 (지만)이라 名(명)함은 第二層級(제이층급)에 住(주)하고 恒**(항교)라 名(명)함은 第三層級(제삼층급)에 住(주)할새 此(차)의 三(삼)은 皆是(개시) 四大天王(사대천왕) 所屬(소속)의 大衆(대중)이오 第四(제사)의 層級(층급)은 四大天王(사대천왕)과 及其(급기) 諸(제) 眷屬(권속)이 共居(공거)함이라
妙高山(묘고산) 四外(사외)의 層級(층급)에 四大王衆(사대왕중)과 그 眷屬(권속)이 居(거)함과 如(여)히 持雙(지쌍) 持軸(지축) 等(등)의 七金山(칠금산)에도 天衆(천중)이 亦居(역거)하는지라 皆是(개시) 四大王所部(사대왕소부)의 封邑(봉읍)이오 地(지)에 依(의)하야 住(주)함으로써 四大王衆天(사대왕중천)이라 名(명)하니 欲界天(욕계천) 中(중)에서 此(차) 天(천)이 最廣(최광)하니라 此(차)는 「俱舍論(구사론)」十一(십일)과 「正法念經(정법념경)」二十二(이십이) 乃至(내지) 二十四(이십사)에 詳說(상설)하셨나니라
第 二 節 地 獄(지옥)
須彌山(수미산) 下半(하반)의 傍係(방계)에 八寒地獄(팔한지옥)과 八熱地獄(팔열지옥)이 橫竪(횡수)로 次第(차제)하였고 八熱地獄(팔열지옥)에 各各(각각) 十六(십육)의 遊增地獄(유증지옥)이 有(유)하니 一大地獄(일대지옥)의 四門(사문)에 各各(각각) ****增(당외증)과 屍糞增(시분증)과 烈河增(열하증)의 四處(사처)가 有(유)할새 合(합)하여 十六處(십육처)요 八大地獄(팔대지옥)의 十六遊增(십육유증)을 都合(도합)하야 一百二十八(일백이십팔)의 遊增地獄(유증지옥)이 有(유)하니라
그리하야 八寒地獄(팔한지옥)이란 一(일)에 **部陀(알부타)는 **(포)하 譯(역)하니 極寒(극한)이 逼身(핍신)할새 身上(신상)에 **(포)를 生(생)함이오 二(이)에 尼刺部陀(니자부타)는 鮑(포포)라 譯(역)하니 嚴寒(엄한)이 逼身(핍신)할새 身分**裂(신분포열)함이오 三(삼)에 **吃陀(알찰타)와 四(사)에 ****婆(확확바)와 五(오)에 虎虎婆(호호바)의 三(삼)은 逼寒(핍한)되야 口中(구중)에서 如斯(여사)한 異聲(이성)을 發(발)함이오 六(육)에 縕鉢羅(온발라)는 靑蓮華(청련화)라 譯(역)하니 嚴寒(엄한)이 逼迫(핍박)하야 身分折裂(신분절렬)함이 靑蓮華(청련화)와 如(여)함이오 七(칠)에 鉢特摩(발특마)는 紅蓮華(홍련화)라 譯(역)하니 身分折裂(신분절렬)함이 紅蓮華(홍련화)와 如(여)함이오 八(팔)에 摩訶鉢特摩(마하발특마)는 大紅蓮華(대홍련화)라 譯(역)하니 身分折裂(신분절렬)함이 大紅蓮華(대홍련화)와 如(여)함이며
八熱地獄(팔열지옥)이란 一(일)에 等活地獄(등활지옥)은 有情衆生(유정중생)이 種種(종종)의 所刺磨禱(소자마도)에 遇(우)하되 凉風(양풍)이 暫吹(잠취)하면 蘇甦(소소)하야 如前(여전)함이오 二(이)에 黑繩地獄(흑승지옥)은 먼저 黑繩(흑승)으로써 支體(지체)를 秤量(칭량)한 後(후)에 斬鋸(참거)함일새요 三(삼)에 衆合地獄(중합지옥)은 衆多(중다)의 苦具(고구)가 俱來(구래)하야 逼身(핍신)하되 衆合相害(중합상해)함일새요 四(사)에 號叫地獄(호규지옥)은 衆苦(중고)가 逼迫(핍박)할새 奇異(기이)히 悲號(비호)하고 怨叫(원규)의 聲(성)을 發(발)함일새요 五(오)에 大叫地獄(대규지옥)은 劇苦(극고)가 逼迫(핍박)할새 延(연)하야 大哭聲(대곡성)을 發(발)함일새요 六(육)에 炎熱地獄(염열지옥)은 火炎(화염)이 起身(기신)하야 周圍(주위)에 熾盛(치성)할새 苦熱(고열)에 難堪(난감)함일새요 七(칠)에 大熱地獄(대열지옥)은 呼吸(호흡)이 大熱(대열)로 化(화)함일새요 八(팔)에 無間地獄(무간지옥)은 受苦(수고)할뿐이오 捨苦(사고)의 時間(시간)이 無(무)함일새니라
第 三 節 四洲地獄(사주지옥)
須彌山(수미산) 四方(사방)의 鹹海(함해)에 四大洲(사대주)가 有(유)하니
一(일)에 南贍部洲(남섬부주) 或(혹) 南閻浮提(남염부제)란 林(림)이나 或(혹)은 菓(과)로써 立名(입명)함이오
二(이)에 東勝身洲(동승신주) 或(혹) 東弗婆提(동불바제)란 身形(신형)이 殊勝(수승)할새 勝身(승신)이라고도 名(명)함이오
三(삼)에 西牛貨洲(서우화주) 或(혹) 西瞿陀尼(서구타니)란 牛(우)를 貿易(무역)함일새요
四(사)에 北瞿盧洲(북구로주) 或(혹) 北鬱單越(북울단월)이란 四洲中(사주중)에 國土(국토)가 最勝(최승)할새 勝處(승처)라고도 譯名(역명)하는 바 此(차) 四洲(사주)에 地獄(지옥)을 按配(안배)하면 東勝身洲(동승신주)와 西牛貨洲(서우화주)엔 邊地獄(변지옥)만 有(유)하고 正地獄(정지옥)은 無(무)하며 南贍部洲(남섬부주)엔 正, 邊(정, 변)의 兩地獄(양지옥)이 俱有(구유)하고 北瞿盧洲(북구로주)엔 兩地獄(양지옥)이 俱無(구무)하니라
第 四 節 轉法輪(전법륜)의 輪王曼茶羅四輪(윤왕만다라사륜)
轉法輪(전법륜)의 四輪(사륜)과 轉輪王(전륜왕)의 四輪(사륜)과 曼茶羅(만다라)이 四輪(사륜)을 別示(별시)하면
一(일)에 金剛輪(금강륜)이란 東方(동방) 阿 佛(아촉불)의 法輪(법륜)이오 二(이)에 寶輪(보륜)이란 南方(남방) 寶生佛(보생불)의 法輪(법륜)이오 三(삼)에 法輪(법륜)이란 西方(서방) 阿彌陀佛(아미타불)의 法輪(법륜)이오 四(사)에 **磨輪(갈마륜)이란 北方(북방) 不空成就佛(불공성취불)의 法輪(법륜)이니 此(차)는 轉法輪(전법륜)의 四輪(사륜)이며
一(일)에 金輪(금륜)이란 金輪王(금륜왕)의 四洲(사주), 二(이)에 銀輪(은륜)이란 銀輪王(은륜왕)의 西, 東, 南(서, 동, 남) 三洲(삼주), 三(삼)에 銅輪(동륜)이란 銅輪王(동륜왕)의 東, 南(동, 남) 二洲(이주), 四(사)에 鐵輪王(철륜왕)의 南贍部(남섬부) 一洲(일주) 等(등)을 領有(영유)한 標幟(표치)니 此(차)는 轉輪王(전륜왕)의 輪寶(윤보)며
一(일)에 本尊(본존)이 黃色(황색)일새 地輪曼茶羅(지륜만다라)에 住(주)하니 方形(방형)의 金輪(금륜)이오 二(이)에 本尊(본존)이 白色(백색)일새 水輪曼茶羅(수륜만다라)에 住(주)하니 圓形(원형)의 水輪(수륜)이오 三(삼)에 本尊(본존)이 赤色(적색)일새 火輪曼茶羅(화륜만다라)에 住(주)하니 三角形(삼각형)의 火輪(화륜)이오 四(사)에 本尊(본존)이 黑色(흑색)일새 風輪曼茶羅(풍륜만다라)에 住(주)하니 半月形(반월형)의 風輪(풍륜)이라 此(차)는 四種(사종)의 曼茶羅(만다라)니 輪圓具足(윤원구족)의 義(의)니라
第 十六 章 曼茶羅(만다라)
曼茶羅(만다라)란 舊譯(구역)엔 壇(단)이라 또는 道場(도량)이라 譯(역)하니 此(차)는 體(체)에 就(취)한 正意(정의)요 新譯(신역)엔 輪圓具足(윤원구족)이라 또는 聚集(취집)이라 譯(역)하니 此(차)는 義(의)에 就(취)한 本義(본의)라
곧 方圓(방원)의 土壇(토단)을 築(축)하고 諸尊(제존)을 此(차)에 安置(안치)하야 齋供(재공)함은 此(차) 曼茶羅(만다라)의 本體(본체)로써 壇中(단중)에 諸尊(제존)의 諸德(제덕)을 聚集(취집)하야 一大法門(일대법문)을 成(성)하니 **, 輞, 輻(곡, 망, 폭)의 三(삼)이 具足圓滿(구족원만)하야 車輪(거륜)을 成(성)함과 如(여)함이 곧 曼茶羅(만다라)의 義(의)으로서 常稱(상칭)의 曼茶羅(만다라)란 此(차)를 圖畵(도화)한 바니 四種曼茶羅(사종만다라) 中(중) 大曼茶羅(대만다라)에 該當(해당)한 大曼茶羅(대만다라)니라
一(일)에 大曼茶羅(대만다라)란 諸尊(제존)을 總集(총집)한 壇場(단장)과 及其(급기) 諸尊(제존)의 形體(형체)와 竝其壇場(병기단장)의 全體(전체) 또는 諸尊(제존)의 一一(일일)을 圖畵(도화)한 者(자)니 곧 曼茶羅(만다라)의 總體(총체)일새 大(대)요 大(대)란 五大(오대)의 義(의)요 또 廣大(광대)의 義(의)라 他(타)의 三種(삼종)도 五大所成(오대소성)이지만 特(특)히 總體(총체)인 廣大(광대)의 義邊(의변)을 取(취)하야 大(대)라 名(명)함이오
二(이)에 三昧耶曼茶羅(삼매야만다라)란 諸尊(제존)의 手(수)에 執持(집지)한 器杖(기장)과 印契(인계)를 繪 (회화)한 者(자)니 三昧耶(삼매야)란 本誓(본서)의 義(의)로서 諸尊(제존)의 本誓(본서)를 標幟(표치)하야 天魔(천마)는 勿論(물론)이오 諸尊(제존)의 自身(자신)도 此(차)를 違越(위월)하기 不能(불능)한 誓約(서약)의 標幟(표치)임으로써요
三(삼)에 法曼茶羅(법만다라)란 諸尊(제존)의 種子(종자)를 書畵(서화)한 眞言(진언)과 一切經(일체경)의 文字(문자)와 義理(의리)임으로써요
四(사)에 **磨曼茶羅(갈마만다라)란 **磨(갈마)는 作業(작업)의 義(의)로서 곧 鑄造(주조)의 形像(형상)이니 諸尊(제존)의 威儀(위의)와 作業(작업)을 泥塑(니소) 等(등)으로 鑄造(주조)함이니 此(차) 四曼(사만) 中(중) 初(초)의 一(일)은 總體(총체)요 後(후)의 三(삼)은 別德(별덕)이라
「秘藏記 (비장기초)」二(이)에 「此(차) 四曼(사만)을 四(사)의 智印(지인)」이랐고 「諸部要目(제부요목)」에 「一切(일체)의 印契(인계)는 一切(일체)의 法要(법요)니 四智印(사지인)으로 攝盡(섭진)할새 大智印(대지인)이란 五相(오상)으로 成本尊(성본존)의 瑜伽(유가)하고 三昧耶印(삼매야인)이란 以(이) 二手(이수)로 和合(화합)하야 金剛縛(금강박)을 發生(발생)한 成印(성인)이오 法智印(법지인)이란 本尊(본존)의 種子(종자)인 法身(법신)의 三摩地(삼마지)인 一切契經(일체계경)의 文義(문의)요 **磨印(갈마인)이란 以(이) 二金剛拳(이금강권)으로 如執持器杖(여집지기장)의 標幟(표치)니 如身(여신)의 威儀形(위의형)」이랐고 「秘藏記本(비장기본)」에 「四種曼茶羅(사종만다라)의 一(일)인 大曼茶羅(대만다라)는 五大也(오대야)니 謂(위) 繪像形體(회상형체) 等也(등야)요 二(이)인 三昧耶曼茶羅(삼매야만다라)는 諸尊(제존)의 所執持器杖(소집지기장)의 印契(인계)요 三(삼)인 法曼茶羅(법만다라)는 種子也(종자야)요 四(사)인 **磨曼茶羅(갈마만다라)는 威儀也(위의야)」랐으니 瑜伽師(유가사)는 맛당히 參酌(참작)할지어다
그리고 理體(리체)의 胎藏界曼茶羅(태장계만다라)와 智德(지덕)의 金剛界曼茶羅(금강계만다라)와 胎, 金(태, 금) 兩部(양부)의 二重曼茶羅(이중만다라)와 世尊(세존)의 一切支分(일체지분)이 皆悉出現如來之身(개실출현여래지신)이라신 支分生曼茶羅(지분생만다라)와 娑婆卽寂光土(사바즉적광토)인 淨土曼茶羅(정토만다라)와 十法界(십법계)의 十界曼茶羅(십계만다라) 等(등)의 境界(경계)를 自證了別(자증요별)할지어다.
뿐만 아니라 聖者(성자)의 法號(법호)나 또는 經題(경제)와 어떠한 三昧名(삼매명)이라도 一聞(일문)에 便了(편료)하니라
首楞嚴三昧圖訣(수능엄삼매도결) 上(상) 終(종)
丙戌(병술) 春(춘) 於(어) 雲門庵(운문암) 碧山閒人(벽산한인) 撰(찬)
第 四 篇 宇宙(우주)의 本質(본질)과 形量(형량)
金陀(금타) 和尙(화상)께서 著述(저술)한 바, 未曾有(미증유)의 宇宙論(우주론)은 단순한 思辨的(사변적)인 所産(소산)이 아닐 뿐 아니라, 經驗(경험) 科學的(과학적)인 試圖(시도)와는 그 次元(챠원)을 달리한 純粹(순수) 直觀的(직관적) 玄妙(현묘)한 禪定(선정)을 通(통)한 洞察(통찰)이기 때문에, 그 內容(내용)에 있어 現行(현행) 天文學(천문학)과 懸隔(현격)한 差異(차이)가 있음은 도리어 當然(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現代天文學(현대천문학) 또한 아직도 暗中摸索(암중모색)의 領域(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實情(실정)이니, 設使(설사) 金陀(금타) 和尙(화상)의 天文說(천문설)이 하나의 假說(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너무나 巨創(거창)하고 合理的(합리적)인 體系(체계)를 어느 뉘라서 敢(감)히 否定(부정)할 수가 있을 것인가?
또한, 和尙(화상)의 宇宙論(우주론)은 어디까지나 佛說(불설)에 그 根?(근저)를 두었으며, 佛敎(불교) 宇宙觀(우주관)인 三千大天世界(삼천대천세계) 곧 10億(억) 宇宙(우주)에 關(관)한 初有(초유)의 體系化(체계화)임을 감안할 때, 참으로 貴重(귀중)한 佛敎(불교) 文獻(문헌)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特(특)히 佛敎人(불교인)으로서는 佛敎(불교) 宇宙觀(우주관)에 對(대)한 깊은 考慮(고려)없이 다만 一知半解(일지반해)한 天文常識(천문상식)만으로 淺薄(천박)한 批判(비판)을 함부로 한다면, 도리어 訪佛毁法(방불훼법)의 허물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和尙(화상)의 宇宙論(우주론)이 저으기 難解(난해)한 것은 天文學(천문학) 本來(본래)의 性格上(성격상) 어쩔 수 없을 뿐 아니라, 本(본) 著述(저술)이 具體的(구체적)인 註解(주해)가 없는 原理(원리)만의 論述(논술)이기 때문에 不得已(부득이)한 일이니, 모름지기 眞摯(진지)한 求道人(구도인)의 姿勢(자세)로 熟讀(숙독) 吟味(음미)한다면, 반드시 貴重(귀중)한 助道(조도)의 資糧(자량)이 될 것을 確信(확신)하는 바이다.
後學(후학) 淸華(청화) 合掌(합장)
序 文
一微(일미)를 誤見(오견)하면 妄想(망상)이 되고, 正見(정견)하면 眞覺(진각)이 된다. 一切(일체) 萬事(만사)가 自己(자기)의 見解(견해)에 依(의)하여 眞妄(진망)이 揀別(간별)될 뿐 一微(일미)나 一切(일체)에 本來(본래) 眞妄(진망)이 없으며 器世間(기세간 : 現象界) 이대로가 一眞法界(일진법계)로서 一切衆生(일체중생)이 一佛(일불)의 化身(화신)이며, 個別的(개별적) 化身(화신)이 바로 本身(본신)의 佛(불)임을 忘却(망각)하고, 顚倒妄想(전도망상)하여 迷惑人(미혹인)이 되고 스스로 凡夫(범부)라 이름하나 一大人(일대인)에게는 聖凡(성범)이 없다.
만약 사람이 三世(삼세)의 一切(일체)가 佛(불)임을 了知(요지)하고자 하면, 마땅히 法界性(법계성)을 觀(관)할지니, 一切(일체)가 唯心(유심)의 所造(소조)니라.<若人欲了知(약인욕료지)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함은 華嚴偈(화엄게)이다. 法界性(법계성)을 見(견)하고 그 以下(이하)는 色法(색법)으로써 全揀(전간)하며, 以上(이상)은 心法(심법)으로 全收(전수)하니, 色卽是空(색즉시공)이요 空卽是色(공즉시색)이라, 空(공)이란 色?(색애)가 없는 不但空(부단공)인 眞空(진공)을 말하며, 色(색)이란 質?(질애)이면서 그림자와 같이 眞空體(진공체)의 妙用(묘용)인 假相(가상)을 말하므로, 卽體(즉체) 卽用(즉용)으로서 性?相(성?상)이 一如(일여)이며, 卽心卽佛(즉심즉불)이므로, 三世(삼세) 一切(일체)가 普賢境(보현경)이다.
그러나, 迷惑人(미혹인)은 大日心體(대일심체)가 質?的(질애적) 그림자에 가리워, 眞智(진지)의 證明(증명)이 없이 妄見(망견)을 세워서 眞理(진리)라고 생각하며, 主客(주객)이 顚倒(전도)한 事實(사실)마저 否認(부인)한다.
이에, 몇가지 例(예)를 들면, 熱(열)이 地輪界<地球(지구)와 地球(지구)의 半徑(반경)을 倍增(배증)한 球狀(구상)의 虛空身(허공신)을 云(운)함> 自身(자신)의 熱(열)임을 모르고, 熱源(열원)이 太陽(태양)에 있다고 하며, 光明(광명) 또한 地球(지구) 自我(자아)의 光明(광명)임을 모르고 太陽(태양)이 光源(광원)이라 한다. 그리고, 月(월)은 太陽(태양)의 反映體(반영체)라 한다.
그러나, 輓近(만근) 飛行術(비행술)이 發達(발달)하자, 태양을 향하여 上昇(상승)할수록 冷氣(냉기)가 다가오고, 또한 어둠을 느끼며, 달밤에는 溫氣(온기)가 느껴지는 事實(사실)은 무슨 理由(이유)인가? 또는 月(월)의 上弦(상현)과 下弦(하현)이 地球(지구)의 그림자에 가리운 表徵(표징)이라 하는데 과연 의문이 없을 것인가?
現代(현대) 科學(과학) 文明(문명)을 자랑하면서, 아직도 銀河水(은하수)가 무엇임을 分明(분명)히 알지 못하며, 日月星宿(일월성수)가 어째서 虛空(허공)에 浮遊(부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左轉(좌전) 또는 右轉(우전)하지 아니치 못할 理由(애ㅣ유)가 那邊(나변)에 있는지, 이에 對(대)한 解明(해명)이 曖昧(애매)하며, 曆年一時(역년일시)가 365日(일)과 6時ㅔ 未滿(미만)임을 經驗(경험)하면서, 太陽(태양)과 地球(지구)의 距離(거리)와는 無關(무관)한 事實(사실)이라 생각하고, 굳이 地球(지구) 半徑(반경)의 23440倍(배)라 말하며, 빛<光(광)>이 太陽(태양)에서 地球(지구)까지 旅行(여행)하는 데, 8分(분) 20秒(초) 걸린다고 한다. 아무튼 數字(수자)는 形式科學(형식과학)에 屬(속)하나 要(요)는 主觀點(주관점)이 어디에 있느냐가 問題(문제)이다.
二十世紀(이십세기) 文明(문명)이 여지껏 宇宙(우주)를 解剖(해부)하지 못하며, 肉眼(육안)의 實性(실성)을 回復(회복)한 天眼(천안)에 依(의)해서만 發見(발견)할 수 있는, 陽核(양핵)의 七分一(칠분일)에 該當(해당)하는 金塵(금진), 곧 原子核(원자핵)의 本質(본질)을 分析科學(분석과학)에 依(의)하여 發見(발견)하려고 虛勞(허로)를 費(비)함은, 正眼(정안)이 있는 者(자) 입을 삼가고 있을 수 없으니, 正見(정견) 있는 人士(인사)는 채찍을 들고 일어서라! 그리고 聖人(성인)들이 認定(인정)한 바, 長久(장구)한 歲月(세월)을 두고, 뼈가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된 精神文明(정신문명)을 登場(등장)시켜라!
本說(본설) 宇宙(우주)의 本質<본질(法界性)>과 形量<형량(行相(행상)>인 片言(편언) 隻句(척구)가 萬(만)에 一(일)이라도 正道(정도)를 指示(지시)하는 助道的(조도적) 資糧(자량)이 될 수 있다면, 幸甚(행심)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本說(본설)을 六節(육적)로 大別(대별)하고 百項(백항)으로 小分(소분)하였으나, 一貫(일관)된 道理(도리)로 始終(시종)하였으며, 더욱이 胎藏界(태장계)의 數値(수치)로써 一律的(일률적)으로 計算(계산)한 數字(수자)이므로, 百(백) 中(중) 그 一(일)을 認定(인정)할 때, 百(백)을 또한 否認(부인)할 수 없을 것이므로, 贅言(최언)이면서 이를 附言(부언)하는 바이다.
壬午(임오) 6月(월) 9日(일)
於(어) 井邑(정읍) 內藏山(내장산) 碧蓮禪院(벽련선원) 釋 金 陀 識
卷 頭
數 妙 偈
一是不空萬法起焉(일시불공만법기언)---- 滿十俱空非空而空(만십구공비공이공)
二假相應非本非迹(이가상응비본비적)---- 三法輾轉因果同時(삼법전전인과동시)
本具四大居常五位(본구사대거상오위)---- 四大互因二八成實(사대호인이팔성실)
七依一實六輪常轉(칠의일실육륜상전)---- 二四三三互爲因果(이사삼삼호위인과)
五位三法含藏一實(오위삼법함장일실)---- 九果八因包和常住(구과팔인포화상주)
胎藏十六隨緣比周(태장십육수연비주)---- 一地三水五火七風(일지삼수오화칠풍)
三五爲本一七示迹(삼오위본일칠시적)---- 七三滿數五一過半(칠삼만수오일과반)
滿者欲平過半生歪(만자욕평과반생**)---- 離垢一地十五金剛(이구일지십오금강)
等體金塵遍滿十方(등체금진변만시방)---- 一切萬有隨器分資(일체만유수기분자)
雖現此身內外正依(수현차신내외정의)---- 地水火風四界攝持(지수화풍사계섭지)
金塵合空性相難分(금진합공성상난분)-----細根?境隱顯左右(세근추경은현좌우)
金塵一七便成水塵(금진일칠편성수진)---- 三七陰火五七陽性(삼칠음화오칠양성)
七七起風又七化土(칠칠기풍우칠화토)---- 地塵五分四水一火(지진오분사수일화)
左轉水地引同斥異(좌전수지인동척이)---- 右轉風火引異斥同(우전풍화인이척동)
地下風動水貪火嗔(지하풍동수탐화진)---- 緣起若存緣滅若亡(연기약존연멸약망)
隱性顯相二名一實(은성현상이명일실)---- 欲隱無內欲顯無外(욕은무내욕현무외)
제1. 列曜의 형태와 比量
1. 日<일:太陽(태양)>의 心空(심공)과 面隙(면극)은 月(월)이 地球(지구)를 抱出(포출)한 迹門(적문)이다.
日面(일면)에 黑點(흑점)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은 地球(지구) 36倍(배)의 容積(용적)의 空隙(공극)으로서 凹版(요판)의 龍型(용형)과 類似(유사)하고 또한 中心(중심)에는 地球(지구) 180倍(매) 容積(용적)의 空間(공간)이있어서 立人像(입인상)의 鑄型(주형)에 類似(유사)한데 이는 地球(지구) 216倍大(배대)의 月(월)이 地球(지구)를 안(抱:포)고 나온 空跡(공적)으로서 空跡(공적)의 가 日心(일심)이 되고 이 面門(면문)이 되어버린 形業(형업)이다. 그리고 日球(일구)는 地球(지구)의 27000倍大(배대)의 體積(체적)이 有(유)하므로 先天(선천)의 日球(일구) 一圓(일원)의 半徑(반경) 1080 中(중) 36이 地球(지구), 180이 月身(월신)의 輪廓(윤곽)이 되므로 地球(지구)는1, 月(월)은 5, 日(일)은 24의 比率(비율)이 되며 따라서 全半徑(전반경)의 는 日身(일신), 은 月身(월신)과 地球(지구)가 되고 月?地(월?지) 合相半徑(합상반경)의 는 月身(월신)이며 은 地球(지구)가 된다. 그러므로 後天(후천)의 半徑(반경) 36이 亦是(역시) 地球(지구), 216이 月體(월체), 1080 그대로가 日球(일구)가 되며 日(일)의 心空(심공)과 面隙(면극)은 月體(월체)의 와 卽(즉) 月(월)과 地球(지구)와의 半徑(반경)이 되므로, 地球(지구)의 斷面績(단면적) 또는 表面積(표면적)의 62倍(배)가 月(월)의 그것이고 302倍(배)가 一句(일구)의 그것이며, 體積(체적)은, 地球(지구)의 63倍(배)가 月(월)이 되고 303倍(배)가 日(일)이 된다. 그리고 日(일) 半徑(반경)이 月(월) 半徑(반경)의 5倍(배)가 되므로 平面(평면)은 月(월)의 52倍(배)가 日(일)이며 立體(입체)는 月(월)의 53倍(배)가 日(일)이 되므로 各其(각기) 半徑(반경)을 示(시)한 以上(이상) 鎖論(쇄론)할 나위도 없이 了認(요인)할 수 있을 것이다.
要(요)컨대, 地兒(지아)가 月胎(월태)에 싸여(包:포) 日腹(일복)에서 分娩(분만)된 生有(생유)와 中有(중유)에 있어서의 三位(삼위)의 比量(비량)이다.
2. 月頭(월두)의 尖相(첨상)은 日(일)로부터의 抽出相(추출상)으로서 月尻(월고)의 空洞(공동)은 地球(지구)가 剖判(부판)된 跡印(적인)이다.
月面(월면)에 구름이 낀 것처럼 보이는 것은 地球(지구)가 月(월)에서 最後(최후) 剖判(부판)한 形跡(형적)으로서 所謂(소위) 地球(지구)의 鑄形(주형)이므로 空洞(공동)의 壁面(벽면)은 地球面(지구면)과 凹凸(요철) 相反(상반)하여 空洞(공동)의 凸處(철처)는 地球(지구)의江?海(강?해)가 되고 凹處(요처)는 山岳(산악)이 되므로 그 容積(용적)은 地球(지구)의 體積(체적)과 相等(상등)하고 空洞(공동)의 最深處(최심처)가 4, 最淺處(최천처)가 , 平均(평균) 깊이가 2이 된다. 그리고, 凹處(요처)의 面積(면적)은 全面(전면)의 約 에 該當(해당)하며 凹處(요처)와 凹處(요처) 아닌 곳과의 比(비)는 1:4가 되어 瓢簞形(표단형 : 표주박)이 되며 背上(배상)의 狀態(상태)는 錐形(추형)인데 그 形貌(형모)가 衲弁(납변 : 고깔)과 相等(상등)하다. 그리고 縱斷面(종단면)은 三角形(삼각형), 橫斷面(횡단면)은 遞差(체차)를 有(유)한 圓形(원형)으로서, 月底(월저)의 直徑(직경)은 月頭先(월두선) 直徑(직경)의 10倍(배)가 되고 底半徑(저반경)은 日半徑(일반경)의 이며 上半徑(상반경)은 이 되므로 그 尖相(첨상)을 想像(상상)하기에 足(족)하다.
月半徑(월반경) 216이란 이를 平均(평균)한 것이며 月底半徑(월저반경)과 等(등)한 月半高(월반고)인 360의 과 가 力點(역점)이 되어 木星(목성)과 地球(지구)사이의 力線(역선)을 죄어 맴과 同時(동시)에 力點(역점)을 半徑(반경)으로 한 力帶(역대)의 길이가, 月(월) 自體(자체)의 廻轉(회전)에 따른 月途(월도)에 있어서의 準尺(준척)이 되므로 그것이 錐?(추유)의 形(형)임은 前後(전후)가 合致(합치)하며 비록 斥力(척력)이 强(강)한 月(월)이라 할지라도 引性(인성)이 풍부한 日身(일신)에서 長期間(장기간)을 要(요)하여 抽出(추출)된 形貌(형모) 자체가 月(월)의 火性(화성)임을 象徵(상징)하고 水性(수성)인 日球(일구)의 圓相(원상)과 配對(배대)한다.
3. 地球(지구)가 卵形(난형)임은 月(월)을 模擬(모의)한 때문이며, 地藏心珠(지장심주)는 先天(선천)의 遺物(유물)이다.
地球(지구)의 南極(남극)은 月(월)의 胎中(태중)에 있을 때 尖端(첨단)인 上方(상방)을 向(향)한 곳이며 北極(북극)은 地球(지구)가 下垂(하수)해서 膨滿(팽만)된 것이므로 南極(남극)은 北極(북극)에 比(비)하여 尖削的(첨삭적)으로서 火體(화체)를 象徵(상징)하고 北極(북극)은 南極(남극)에 比(비)하여 平滿的(평만적)으로서 水體(수체)를 象徵(상징)한다. 그리고 南北(남북)의 經(경)이 길고 東西(동서)의 緯(위)가 짧으므로 이것이 卵形(란형)이 되며 縱徑(종경)의 比(비) 9와 橫徑(횡경)의 比 8로 이루어진 楕圓形(타원형)이다.
따라서 8과 9와의 積數(적수) 72로써 平均(평균) 直徑(직경)으로 하고 半徑(반경) 36의 根數(근수) 6이 地藏心珠(지장심주)의 半徑(반경)이 되며, 30의 地身(지신), 180의 月身(월신), 864의 日身(일신)으로 하여금 抱擁(포옹)된 先天(선천)의 唯一心珠(유일심주)이다. 그리고 그 62이 地半徑(지반경), 63이 月平均半徑(월평균반경), 63×5가 日半徑(일반경)이 되며, 日半徑(일반경)의 10倍(배 : 滿數<만수>), 月平均半徑(월평균반경)의 10倍(배), 地半徑(지반경)의 10倍(배)를 伸張(신장)한 先天(선천) 半徑(반경)의 滿數(만수)에서 地藏心珠(지장심주)의 法力點(법력점)인 과 地球(지구)의 力點(역점)인 地半徑(지반경)의 과 月體(월체)의 力點(역점)인 月平均半徑(월평균반경)의 을 끌어 당긴 길이가 內宙(내주)의 半徑(반경)이 되고 等距離(등거리)의 길이를 外宇(외우)로 延長(연장)함이 宇宙(우주)의 半徑(반경)이 되어 大界(대계)의 輪廓(윤곽)이 定(정)해짐과 同時(동시)에 地?月?日(지?월?일)의 三大(삼대)를 이루고 列曜(열요)가 그 分(분)을 守(수)한다. 그리고 地藏心珠(지장심주)의 63인 地球(지구) 體積(체적)의 1080倍(배)의 地塵(지진)이 土星世界(토성세계) : 八位金星<팔위금성>을 包含<포함>)를 構成(구성)하고, 地球(지구) 體積(체적)의 63인 月體(월체), 9倍(배)의 火塵(화진)이 月世界(월세계)가 되며, 月體(월체) 55倍(배)의 火塵(화진)이 火星世界(화성세계)가 되고, 月體(월체)의 20倍(배)가 四大(사대) 金星(금성)이 되며,月體(월체) 36倍(배)의 陰性(음성) 火塵(화진)이 木星(목성)의 區宇(구우)가 되는데, 이를 合(합)하면 月體(월체)의 125倍(배)인 日球(일구) 一個(일개)의 體積(체적)에 相當(상당)하며, 다시 日球(일구) 7倍(배)의 水塵(수진)이 星霧界(성무계)가 되므로 地藏心珠(지장심주)의 半徑(반경)인 6은 實(실)로 宇宙(우주) 總力量(총역량)의 根數(근수)다. 그리고 地球(지구) 體積(체적)의 에 相當(상당)한 體積(체적)이 地球(지구)의 中心(중심)에 眞空(진공)이 되어 있으므로 이를 地藏心珠(지장심주)라 稱(칭)하며 眞空(진공)이란 다만(但) 空(공)이 아닌 때문이다.
4. 地球(지구)와 日球(일구)
⒜ 9×8 = 72 = 36×2 地球(지구)의 平均直徑(평균직경)
⒝ 36 = 62 地球(지구)의 平均半徑(평균반경)
⒞ 36× = = 226 地球(지구)의 平均周圍(평균주위)
⒟ 362× = = 4073 地球(지구)의 平均斷面績(평균단면적)
⒠ 4073×4 = = 16292 地球(지구)의 表面積(표면적)
⒡ 362× = = 195510 地球(지구)의 體積(체적)
⒢ 63×5 = 1080 日球(일구)의 半徑(반경)
⒣ 1080×2 = 2160 日球(일구)의 直徑(직경)
⒤ 2160× = = 6788 日球(일구)의 周圍(주위)
⒥ 10802× = = 3665828 日球(일구)의 斷面績(단면적)
⒦ 3665828×4 = 14663314 日球(일구)의 表面積(표면적)
⒧ 10803× = = 5278793142 日球(일구)의 體積(체적)
⒨ (月의 체적)× = = 35191954 日心(일심) 空間(공간)의 容積(용적)
⒩ × = = 7038390 日面空隙(일면공극)의 容積(용적)
⒪ 2160<日球(일구)의 直徑(직경)> ÷ 72<地球(지구)의 平均直徑(평균직경)> = 30倍
⒫ <日球(일구)의 周圍(우쥐)> ÷ <地球(지구)의 周圍(주위)> = 30倍
⒬ <日球(일구)의 斷面績(단면적)> ÷ <地球(지구)의 平均斷面績(평균단면적)= 900倍
⒭ <日球(일구)의 表面積(표면적)> ÷ <地球(지구)의 表面積(표면적)> = 900倍
⒮ <日球(일구)의 表隙容積(표극용적) ÷ <地球(지구)의 體積(체적)> = 36倍
⒯ <日球(일구)의 裏空容積(이공용적) ÷ <地球(지구)의 體積(체적) = 180倍
⒰ <日球(일구)의 體積(체적)> ÷ <地球(지구)의 體積(체적)> = 27000倍
5. 月(월)의 求積(구적)
⒜ 62 = 36 月(월)의 上底半徑(상저반경)
⒝ 36 × 2 = 72 月(월)의 上底直徑(상저직경)
⒞ 36 ×10 360 月(월)의 下底半徑(하저반경)
⒟ 360 ×2 = 720 月(월)의 下底直徑(하저직경)
⒠ 63 = 216 月(월)의 平均半徑(평균반경)
⒡ 216 ×2 = 432 月(월)의 平均直徑(평균직경)
⒢ 360 × + = 月(월)의 力帶半徑(력대반경)
⒣ × 2 = 541 月(월)의 力帶直徑(력대직경)
⒤ 72 × = = 226 月頭(월두)의 周圍(주위)
⒥ 720 × = = 2262 月底(월저)의 周圍(주위)
⒦ 432 × = = 1357 月(월)의 平均周圍(평균주위)
⒧ 541 × = = 1700 月體力帶(월체력대)의 길이
⒨ 4322 × = = 146633 月(월)의 平均斷面績(평균단면적)
⒩ 146633 × 4 = 586532 月(월)의 表面積(표면적)
⒪ 3602 × = = 407314 月底(월저)의 面積(면적)
⒫ 2163 × = = 42230345 月(월)의 體積(체적)
6. 日?月?地(일?월?지)의 比(비)
⒜ 2160<日球(일구)의 直徑(직경)> ÷ 432<月(월)의 平均直徑(평균직경)> = 5倍(배)
⒝ <日球(일구)의 周圍(주위)> ÷ <月(월)의 平均周圍(평균주위)> = 5倍(배)
⒞ <日球(일구)의 斷面績(단면적)> ÷ <月(월)의 平均斷面績(평균단면적)> = 25倍(배)
⒟ <日球(일구)의 表面積(표면적)> ÷ <月(월)의 體積(체적)> = 25倍(배)
⒠ <日球(일구)의 體積(체적)> ÷ <月(월)의 體積(체적)> 125倍(배)
⒡ 432<月(월)의 平均直徑(평균직경)> ÷ 72<地球(지구)의 平均直徑(평균직경)> = 6倍(배)
⒢ <月(월)의 平均周圍(평균주위)> ÷ <地球(지구)의 平均周圍(평균주위)> = 6倍(배)
⒣ <月(월)의 底面(저면) 周圍(주위)> ÷ <地球(지구)의 平均周圍(평균주위)> = 10倍(배)
⒤ <月(월)의 平均斷面績(평균단면적)> ÷ <地球(지구)의 平均斷面績(평균단면적)> = 36倍(배)
⒥ <月(월)의 底面積(저면적)> ÷ <地球(지구)의 平均斷面績(평균단면적)> = 100倍(배)
⒦ <月(월)의 表面積(표면적)> ÷ <地球(지구)의 表面積(표면적)> = 36倍(배)
⒧ <月(월)의 體積(체적)> ÷ <地球(지구)의 體積(체적)> = 216倍(배)
7. 日?地(일?지) 間(간) 距離(거리)
⒜ 1080(日半徑 : 일반경) × 10 + 216(月平均半徑 : 월평균반경) × 10 + 36(地球半徑 : 지구반경) ×10 = 13320 日地間(일지간)의 伸滿距離(신만거리)
⒝ 216(月平半 : 월평반) × <月力(월력)의 比(비)> + 36(地半 : 지반) × <地力(지력)의 比(비)> + <地藏心珠(지장심주)의 法力點(법력점)> = 171 <月(월)의 力(력)과 地球(지구)의 力(력)에 依(의)하여 引縮(인축)된 距離(거리)>
⒞ 216<月平半(월평반)> × <月力(월력)의 補比(보비)> + 36<地半(지반) × <地力(지력)의 補比(보비)> = 81 日球(일구)의 引力(인력)에 依(의)하여 短縮(단축)되고 또는 法力(법력)에 依(의)하여 伸長(신장)할 수 있는 增減限度(증감한도)의 距離(거리)
⒟ 13320<日地間(일지간)의 伸滿距離(신만거리)> - 171<月(월) 또는 地球(지구)의 力(력)에 引縮(인축)된 距離(거리)> = 13148 日地力點間(일지력점간)의 平均(평균) 距離(거리)
⒠ 13148<日地力點間(일지력점간)의 平均距離(평균거리)> + 81<日地間伸長限度(일지간신장한도)의 距離(거리)> = 13239 日地間(일지간)이 最遠(최원)이 되었을 때의 距離<거리 : 大寒節(대한절)>
⒡ 13148<日地力點間(일지력점간)의 平均距離(평균거리)> - 81<日地間(일지간) 短縮限度(단축한도)의 距離(거리)> = 13067 日?地(일?지) 間(간)이 最近(최근)이 되었을 때의 距離<거리 : 大暑節(대서절)>
⒢ 13148<日地力點間(일지력점간)의 平均距離(평균거리)> - 1080<日半徑(일반경)> - 36<地半徑(지반경)> = 12032 日?地(일?지) 兩面間(양면간)의 平均距離(평균거리)
8. 月?地(월?지) 間(간) 距離(거리)
⒜ 13148<日?地力點間(일?지력점간)의 平均距離(평균거리) × <地藏心珠法力(지장심주법력)의 比(비)> = 2191 月?地(월?지) 間(간)의 距離(거리) <地球(지구)의 中心(중심)에서 月體力點(월체력점)까지의 距離(거리)>로서 何時(하시)도 變動(변동)이 없음.
⒝ 13148<日?地力點間(일?지력점간)의 平均距離(평균거리)> × <地藏心柱法力(지장심주법력)의 補比(보비)> = 10957 日月間(일월간) 最近(최근)이 될 때의 距離(거리)
⒞ 13148<日地力點間(일지력점간)의 平均距離(평균거리) + 2191<月地間(월지간)의 距離(거리)> = 15340 日月間(일월간) 最遠(최원)이 될 때의 距離(거리)
⒟ 2191<月地間(월지간)의 距離(거리)> ÷ 36<地半(지반)> = 60倍(배)
⒠ 10957<日月間(일월간 最近距離(최근거리)> ÷ 216<月平半(월평반)> = 50倍(배)
⒡ 15340<日月間(일월간) 最遠距離(최원거리)> ÷ 216<月平半(월평반)> = 71倍(배)
⒢ 22191<地球(지구)의 中心(중심)에서 月體力點(월체력점)까지의 距離(거리)> + 270<月體(월체)의 力點(역점)에서 月(월)의 中心(중심)까지의 距離(거리)> = 2462 地球(지구)의 中心(중심)에서 月(월)의 中心(중심)까지의 距離(거리)
⒣ 2462<地月中心間(지월중심간)의 距離(거리)> - 360<月體(월체)의 半高(반고)> - 36<地半徑(지반경)> = 2066 地面(지면)에서 月面(월면)까지의 距離(거리)
9. 月底(월저) 凹處(요처)의 淺深(천심) 및 그 容積(용적)
⒜ 2191<地心(지심)에서 月體力點(월체역점)까지의 距離(거리)> - 36<地半(지반)> = 月(월)의 力點(역점)에서 地面(지면)까지의 距離(거리), 또는 月(월)의 力點(역점)에서 地半(지반)의 길이를 延長(연장)한 點(점)에서 地心(지심)까지의 距離(거리)
⒝ 63 × 10 = 2160 月底(월저)에 洞穴(동혈)이 없을 경우 月(월)의 力點(역점)에서 地面(지면)까지의 距離(거리) 또는 月(월)의 力點(역점)에서 31을 延長(연장)한 假力點(가역점)에서 地心(지심)까지의 距離(거리)
⒞ 2160<月底(월저)에 洞穴(동혈)이 없을 경우 假力點(가역점)에서 地心(지심)까지의 距離(거리)> - 2155<月(월)의 力點(역점)에서 地面(지면)까지의 距離(거리)> = 4 月底(월저) 洞穴(동혈)의 最深處(최심처)로서 地?月(지?월) 剖判(부판) 當時(당시)의 最後分界(최후분계)이며 成劫(성겁) 初期(초기)에는 地球(지구)가 日?月(일?월)의 最中(최중)에 內包(내포)되어 있었으나, 漸次(점차) 露出(노출)됨에 따라 月體(월체) 斥性(척성)과의 臨界線(임계선)을 보인 最後(최후)의 限界(한계)가 되는 跡印(적인)의 最深處(최심처)다.
⒟ <月底凹處(월저요처)의 最深處(최심처)> × <月體(월체) 成滿(성만)의 比(비)> = 洞穴(동혈)의 最淺處(최천처)
⒠ ÷ 2 = 洞穴(동혈)의 平均(평균) 깊이
⒡ <地球(지구)의 體積(체적)으로서 이것이 洞穴(동혈)의 容積(용적)> ÷ <平均(평균)깊이)> = 月面(월면)에 구름 낀 것처럼 보이는 洞穴(동혈)의 表張面積(표장면적)
⒢ <月底(월저)의 全面積(전면적)> - <洞穴(동혈)의 表張面積(표장면적)> = 月底(월저)의 凹處(요처)가 아닌 面積(면적)으로서 洞穴(동혈) 表張面積(표장면적)의 約(약) 4倍(배)이다.
10. 地球(지구)의 軌道(궤도)와 公轉(공전)의 度數(도수)
⒜ <日地間(일지간)의 平均距離(평균거리)로서 이것이 地球軌道(지구궤도)의 內輪(내륜) 卽(즉) 內宙(내주)의 半徑(반경)> × 2 = 內宙(내주)의 直徑(직경)으로서 우리 宇宙(우주)의 半徑(반경)과 等(등)하며 內宙半徑(내주반경)의 길이를 外宇(외우)에 延長(연장)시킨 것이다.
⒝ <地球(지구) 軌道(궤도) 內輪(내륜)> × <圓周率(원주율)> = = 이것이 內宙(내주)와 外宇(외우)와의 分界線(분계선)인 地球(지구) 軌道(궤도)의 길이다.
⒞ <地球(지구) 軌道(궤도)의 길이) ÷ <地球(지구)의 平均周圍(평균주위)> = = 地球(지구) 軌道(궤도) 一周(일주)의 私轉回數(사전회수)로서 이것이 太陽曆(태양력)의 日時(일시)
⒟ <日(일) 地心間(지심간)의 平均(평균) 距離(거리)> ÷ 36(地半徑(반경) =
⒠ <日(일) 地間(지간)의 距離(거리)> ÷ 6<地藏心珠(지장심주)의 半徑(반경)> =
⒡ <日月間(일월간) 最近(최근)의 距離(거리)> ÷ = 日地間(일지간)의 距離(거리)에 對(대)한 地球(지구) 半徑(반경)의 倍數(배수)인 (d)와 (e)는 地球公轉度數(지구공전도수)의 輪合(윤합)을 證(증)한다. 從來(종래) 日地間(일지간)의 距離(거리)가 地半徑(지반경)의 23440倍(배)라 함과 같은 云云(운우)의 說(설)은 道理(도리)에 不合理(불합리)하므로 太陽曆(태양력)의 日數(일수)가 23440個日(개일)이 될 때까지 保留(보류)할 問題(문제)이다.
11. 陽?陰曆(양?음력) 時分(시분)의 差(차) 및 一朔望間(일삭망간)에 있어서의 地球(지구)의 進度(진도)
⒜ <陽曆(양력)의 日時(일시)> × <日球(일구)의 黑龍身(흑룡신)에 대한 地球(지구)의 比(비)> = 10.1457047325∞ 陽曆(양력)에 대한 陰曆(음력)의 差(차)
⒝ ???<陽曆(양력)의 日時(일시)> × <日球(일구)의 黑龍身(흑룡신)에 대한 地球(지구)의 補比(보비)> = 355.0996656378∞ 陰曆(음력)의 日時(일시)
⒞ <地軌(지궤)의 길이) × <黑龍身(흑룡신)에 대한 地球(지구)의 補比(보비)> × <陰曆(음력) 全朔望(전삭망)에 대한 一朔望間(일삭망간)의 比(비)> = = 一朔望 間(일삭망 간)에 있어서의 地球(지구)의 進度(진도)
12. 一朔望(일삭망) 間(간)에進(진)하는 月途(월도)의 길이
⒜ <地(지) 月(월) 間(간)의 距離(거리)> × 2 = 이것이 地球(지구)를 繁?(번궐)로 하여 月(월)이 引廻(인회)하는 輪廓(윤곽)의 直徑(직경)으로서 月(월) 活動(활동) 區字(구자)의 幅(폭)이다.
⒝ × <勾股(구고)에 대한 弦(현)의 比(비)> = = 對角 直徑(대각 직경)
⒞ <對角直線(대각직선)> × <半圓率(반원율)> = = 이것이 地軌(지궤)를 心棒(심봉)으로 하여 月(월)이 螺旋形(나선형)으로 前右間方(전우간방)을 向(향)하여 曲進(곡진)하는 孤線(고선)의 길이로서 一朔望(일삭망) 間(간)에 進(진)하는 月途(월도)의 길이이다.
13. 月(월)의 十回(십회) 右轉(우전)에 佯(양)한 地球(지구)의 左轉(좌전) 回數(회수)
⒜ <一朔望(일삭망) 間(간)에 進(진)하는 月途(월도)의 길이) ÷ <月體力帶(월체력대)의 길이> = = 5.001∞ 이것이 一朔間(일삭간)에 있어서의 月(월)의 右轉(우전) 回數(회수)이며 5回强(회강)으로서 朔(삭)이 되고 10回强(회강)으로서 望(망)이 된다. 또한 2.5回(회)와 7.5回(회)로서는 潮減(조감)을 보게 된다.
⒝ <一朔望間(일삭망간)에 있어서의 地球(지구)의 進度(진도)> ÷ <地球(지구)의 平均周圍(평균주위)> = = 14.7958194015∞ 이것이 月體右轉(월체우전) 5回强(회강)에 대하나 地球(지구)의 左轉回數(좌전회수)로서 卽一朔望間(즉일삭망간)의 平均日時(평균일시)다.
⒞ 14.79581940157<一朔望間(일삭망간)의 平均日時(평균일시)> × 2 = 29.5916388031∞ 一朔一望(일삭일망)의 平均(평균) 月令(월령)으로서 이것이 月體(월체) 十回强右轉(십회강우전)에 伴(반)한 地球(지구)의 左轉(좌전) 回數(회수)다.
14. 地球(지구) 公轉(공전) 五回(오회)로서 日球(일구)가 一回(일회) 左旋(좌선)한다.
⒜ <日球(일구)의 周圍(주위)> × = 地球一回(지구일회)의 公轉(공전)에 대한 日球左旋(일구좌선)의 度數(도수)로서 月(월)의 平均周圍(평균주위)의 길이와 等(등)함.
⒝ 81<日(일) 地(지) 間(간) 伸縮限度(신축한도)의 距離(거리)> × <日球(일구) 圓心應變(원심응변) 限度(한도)의 比(비)> = 1.653∞ 日球(일구) 圓心應變限度(원심응변한도)의 距離(거리)로서 의 限度內(한도내)에서 珠心點(주심점)을 바꾸는데 이것이 日球一回左旋(일구일회좌선)에 있어서의 限度(한도)이다.
⒞ <日球(일구)의 周圍(주위)> × 5 = = 水星界(수성계) 第一階(제일계)의 水星(수성)이 그 內周(내주)를 一周(일주)함에 대하여 日球(일구)가 5回(회) 左旋(좌선)하는 延度數(연도수)로서 月(월) 平均(평균) 周圍(주위)의 25倍(배) 延長(연장)한 것과 相等(상등)하며 地球(지구)의 25回(회) 公轉(공전)을 要(요)한다.
15. 恒星(항성) 亦是(역시) 旋廻(선회)한다.
⒜ <日球(일구)의 中心(중심)에서 水星界(수성계) 第一階(제일계)의 內周邊際(내주변제)까지의 距離(거리)> × = 日球(일구)의 5回左旋(회좌선)에 대하여 第一階(제일계)의 水星(수성)이 此(차) 內周(내주)의 길이인 軌道(궤도)를 一周(일주)한다.
⒝ <日球(일구)의 中心(중심)에서 水星界(수성계) 第二階(제이계)의 內周邊際(내주변제)까지의 距離(거리)> × = 第一階(제일계)의 水星(수성)이 그 軌道(궤도)인 內周(내주)를 五回(오회) 旋廻(선회)하면 第二階(제이계)의 軌道(궤도)인 그 內周(내주)의 길이를 一周(일주)한다. 이와 같이 下階(하계)의 水星(수성)이 5周(주)할 때마다 上階(상계)의 水星(수성)이 一周(일주)하면서 段段(단단)히 올라가서 第十四階(제십사계)의 水星(수성)이 3回(회) 廻周(회주)할 時間(시간)이 經過(경과)하면 空劫(공겁)의 最期(최기)가 된다.
16. 地球(지구)가 私轉(사전)하기 716回로서 空劫(공겁)이 된다.
⒜ 716 = 33232930569601 이것이 成劫(성겁)의 初期(초기)에서 大千世界(대천세계)가 全部(전부) 空(공)이 될 때까지의 地球(지구) 私轉(사전)을 要(요)하는 回數(회수)로서 卽(즉) 成?住?壞?空(성?주?괴?공) 四劫(사겁) 期間(기간)의 日時(일시)이다.
⒝ 33232930569601<四劫(사겁) 期間(기간)의 日時(일시)> ÷ <陽曆(양력) 一年間(일년간) 日時(일시)> = 年(년)
⒞ 515 × 3 = 91552734375 星霧系(성무계)의 恒星(항성)인 水星界(수성계) 第十四階(제십사계)의 水星(수성)이 그 軌道(궤도)인 內周(내주)를 旋回(선회)하기 3回(회)를 要(요)하는 年數(년수)이다.
⒟ 91552734375<成劫(성겁) 初期(초기)에서 空劫(공겁) 最期(최기)까지의 年數(년수)> - <成劫(성겁)으로부터 온전히 空(공)이 될 때까지의 年數(년수)> = 大千世界(대천세계)가 온전히 空(공)이 되어 次期成劫(차기성겁)까지 經過(경과)하는 期間(기간)의 年數(년수)
17. 成?住?壞?空(성?주?괴?공) 四劫(사겁)의 期間(기간)
⒜ 710 = 282475249 成劫(성겁) 初期(초기)부터 成劫(성겁) 終期(종기)까지의 日數(일수)로서 이를 成劫(성겁) 十期(십기)라 한다.
⒝ 714 - 710 = 677940597600 住劫(주겁) 四期(사기)의 日數(일수)
⒞ 715 - 714 = 4069338437094 壞劫(괴겁) 一期(일기)의 日數(일수)
⒟ 716 - 715 = 28485369059658 空劫(공겁) 一期(일기)의 日數(일수)
⒠ 282475249<成劫十期(성겁십기)의 日數(일수)> ÷ <陽曆(양력) 一年間(일년간) 日數(일수)> = 年(년)
⒡ 677940597600<住劫(주겁) 四期(사기)의 日數(일수)> ÷ = 年(년)
⒢ 4069338437094<壞劫(괴겁) 一期(일기)의 日數(일수)> ÷ = 年(년)
⒣ 28485369059658<空劫(공겁) 一期(일기)의 日數(일수)> ÷ = 年(년)
⒤ <四劫(사겁) 十六期間(십육기간)의 年數(년수)> + <次期(차기) 成劫(성겁)까지 經過期間(경과기간)의 年數(년수)> = 91552734375年(년)
18. 住劫(주겁) 中(중) 過去(과거) 現在(현재) 未來(미래) 三劫(삼겁)의 期間(기간)
⒜ 712 - 710 = 13558811952 過去(과거) 莊嚴劫(장엄겁)의 日數(일수)로서 年(년)
⒝ 713 - 712 = 83047723206 現在(현재)의 賢劫(현겁) 日數(일수)로서 年(년)
⒞ 714 - 713 = 581334062442 未來(미래) 星宿劫(성수겁)의 日數(일수)로서 年(년)
19. 우리<我(아)> 宇宙(우주)의 一圓(일원)
⒜ <日?地間(일?지간)의 距離(거리)로서 地球(지구) 軌道(궤도)의 內輪(내륜) 곧 內宙(내주)의 半徑(반경)> × 2 = = 內宙半徑(내주반경)의 等距離(등거리)를 外宙(외주)에 延長(연장)한 距離(거리)이므로 이것이 我宇宙一圓(아우주일원)의 半徑(반경)이 된다.
⒝ <宇宙(우주)의 半徑(반경)> × 2 = = 宇宙(우주)의 直徑(직경)
⒞ <宇宙(우주)의 直徑(직경)> × = = 宇宙(우주)의 周圍(주위)
⒟ = = 宇宙(우주)의 斷面績(단면적)
⒠ = = 宇宙(우주)의 表面積(표면적)
⒡ = = 이것이 我宇宙(아우주)의 全體積(전체적)으로서 一切萬有(일체만유)의 束索(속색)이다.
⒢ <宇宙(우주)의 直徑(직경)> ÷ 72<地球直徑(지구직경)> = 倍(배)
⒣ <宇宙(우주)의 周圍(주위)> ÷ <地球(지구)의 周圍(주위)> = 倍(배)
⒤ <宇宙(우주)의 斷面績(단면적)> ÷ <地球(지구)의 斷面績(단면적)> = 倍(배)
⒥ <宇宙(우주)의 표면적)> ÷ <地球(지구)의 表面積(표면적)> = 倍(배)
⒦ <宇宙(우주)의 體積(체적)> ÷ <地球(지구)의 體積(체적)> = 倍(배)
⒧ <宇宙(우주)의 直徑(직경)> ÷ 432<月(월)의 平均直徑(평균직경) = 倍(배)
⒨ <宇宙(우주)의 斷面績(단면적)> ÷ <月(월)의 平均斷面績(평균단면적)> = 倍(배)
⒩ <宇宙(우주)의 표면적)> ÷ <月(월)의 表面積(표면적)> = 倍(배)
⒪ <宇宙(우주)의 體積(체적)> ÷ <月(월)의 體積(체적)> = 倍(배)
⒫ <宇宙(우주)의 直徑(직경)> ÷ 720<月(월)의 底面直徑(저면직경)> = 倍(배)
⒬ <宇宙(우주)의 周圍(주위)> ÷ <月(월)의 底面周圍(저면주위)> = 倍(배)
⒭ <宇宙(우주)의 斷面績(단면적)> ÷ <月(월)의 底面積(저면 ? = 倍(배)
⒮ <宇宙(우주)의 直徑(직경)> ÷ 2160<日球(일구)의 直徑(직경)> = 倍(배)
⒯ <宇宙(우주)의 周圍(주위)> ÷ <日球(일구)의 周圍(주위)> = 倍(배)
⒰ <宇宙(우주)의 斷面績(단면적)> ÷ <日球(일구)의 斷面績(단면적)> = 倍(배)
⒱ <宇宙(우주)의 表面積(표면적)> ÷ <日球(일구)의 表面積(표면적)> = 倍(배)
⒲ <宇宙(우주)의 體積(체적)> ÷ <日球(일구)의 體積(체적)> = 倍(배)
20. 日體(일체) 7倍(배)의 質量(질량)을 有(유)한 星霧系(성무계)
日球(일구)는 宇宙(우주)의 中央(중앙)에 處(처)하고, 星霧系(성무계)는 邊方(변방)의 外壘(외루)가 된다. 그리고, 日體(일체) 7倍(배)의 質量(질량)으로써, 極邊(극변)에 沿(연)하여 日球(일구)의 半徑(반경)에 相當(상당)한 距離(거리)의 두께(厚:후)를 갇는다. 이를 三分(삼분)하면, 極邊(극변)으로부터 216은 質身(질신)이 滅盡(멸진)한 곳이므로 滅盡界(멸진계) 또는 眞空界(진공계)라 云(운)하고, 그 다음의 432는 日身(일신) 두께(厚:후)의 인 內輪身(내륜신)의 7倍(배)에 相當(상당)한 水塵(수진)이 充墳(충분)되어 있을 뿐 星體(성체)가 없으므로 無星界(무성계) 또는 假空界(가공계)라 하고, 그 다음의 432는 日球表輪身(일구표륜신)의 7倍(배)에 相當(상당)한 水塵(수진)이 成體(성체)하여 同界(동계) 水星群(수성군)의 全體積(전체적)이 되며, 通(통) 十八階(십팔계) 四級別(사급별) 5548788位(위)의 水星(수성)이 配布(배포)되어 있어, 그 形(형)이 모두 日球(일구)와 같으며, 個別(개별) 體積(체적)의 는 心空(심공)이 되고, 은 面隙(면극)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日球(일구)와 같이 水塵體(수진체)의 左旋球(좌선구)이므로 引力(인력)이 豊富(풍부)하고 日球(일구)와 相俟(상사)하여 서로 牽制(견제)하므로 列曜(열요) 또는 萬物(만물)이 그 있을 바를 得(득)하여 安立(안립)하고 日球(일구) 도한 中央(중앙)에 處(처)할 수 있게 됨은 邊方(변방)이 一致(일치)하여 서로 牽制(견제)하는 힘의 釣合(조합)에 依(의)한 것이며, 內宙(내주)와 外宇(외우)와의 界線(계선)인 地球(지구)의 軌道(궤도)는 日球(일구)와 水星間(수성간)에 서로의 牽引力(견인력)에 依(의)한 釣合線(조합선)이므로, 右旋(우선)의 月體(월체) 또는 火星(화성)의 斥力(척력)과 相俟(상사)하여 地球(지구)가 左轉(좌전)하지 않을 수 없는 事實(사실)이 된다.
21. 月體(월체) 55倍(배)의 質量(질량)을 有(유)한 火星界(화성계)
, , , , , , 等(등) 六品(육품)의 火星(화성) 264960位(위)의 全(전) 體積(체적)이 月體(월체)의 39倍(배)에 相當(상당)하며 모두가 各個(각개) 體積(체적)의 이 下方(하방)에 空洞(공동)이 開(개)하고 또한 錐形(추형)이 되어 月體(월체)를 닮았으며, 月體(월체)와 같이 右旋(우선) 右向(우향)의 火塵體(화진체)이므로 斥力(척력)이 豊富(풍부)하고, 日球(일구) 또는 水星群(수성군)의 左旋(좌선) 引力(인력)과 相俟(상사)하여 宇宙(우주)의 風塵(풍진)이 動(동)하므로 地球(지구) 또한 廻轉(회전)한다.
左旋(좌선)하는 水塵體(수진체) 等(등)이 서로 牽引(견인)하는 釣合(조합)에 依(의)하여 風塵(풍진)이 動(동)하는 空間(공간) 同樣(동양)의 地軌(지궤)를 中心(중심)으로 하고, 右旋(우선) 右向(우향)하는 火塵體(화진체)가 斥力(척력)을 發(발)하여 水平線上(수평선상)에 기울음(歪:왜)을 生(생)하므로 此(차) 기울음에 依(의)하여 水平的(수평적) 作用(작용)이 相起(상기)하여 뒷 整理(정리)를 다함과 同時(동시)에 浮萍(부평)과 相等(상등)한 地球(지구)는 그 波紋(파문)의 渦(와)에 말려서 所謂(소위) 私轉(사전)이 되고, 月(월) 또는 火星群(화성군)의 前進(전진)에 依(의)하여 地軌(지궤) 線上(선상)에 公轉(공전)이란 齒車(치거)의 跡(적)이 찍혀지면서 中心(중심) 塔(탑)인 日球(일구)를 軸(축)으로 하여 內宙(내주) 外宇(외우)의 界線(계선)을 밟아 돌게 되므로 火塵體(화진체)의 强力(강력)한 程度(정도)를 推察(추찰)할 수가 있다.
그리고, 火星界(화성계) 5個層(개층) 中(중) 上(상) 3個層(개층)이 火星群(화성군)이 依據(의거)하는 곳이며 下(하) 2個層(개층)이 月體16倍(배)의 火塵(화진)이 잠겨 있는데 共(공)히 內宙(내주) 外宇(외우)의 界線(계선)을 넘을 수 없으나 그 軌(궤)는 月(월)과 함께 하므로 火星界(화성계)는 內界(내계)와 外界(외계)가 自然(자연)히 揀別(간별)된다.
또한 上記(상기) 六品(육품)의 火星(화성) 亦是(역시) 前(전) 三品(삼품)은 內界(내계)의 3個層(개층)을 所依(소의)로 하며 火塵(화진) 또한 內界(내계)는 下(하) 1層(층)에 月體(월체)의 1倍(배), 2層(층)은 2倍(배)이며, 外界(외계)의 下(하) 1層(층)은 月體(월체)의 6倍(배), 2層(층)은 7倍(배)가 된다.
22. 月體(월체) 9倍(배)의 質量(질량)을 有(유)한 月世界(월세계)
月(월)의 中心點(중심점)으로부터 1080을 半徑(반경)으로 한 區宇(구우)를 月世界(월세계)라 하며, 此(차) 두께(厚:후)에서 月體(월체)의 半高(반고)인 360을 控除(공제)한 720의 사이에 8個段(개단)이 있는데 等距離(등거리)의 一段(일단)마다 月體(월체) 一個(일개)에 相當(상당)한 火塵(화진)이 月體(월체)를 떠나지 않고 內外界(내외계)를 通(통)하여 그 行動(행동)을 月(월)과 함께 하므로 此(차)를 月輪身(월륜신)이라 하며, 이에 月區(월구)를 넣어서 9段(단)이 있으므로 月下(월하) 十界(십계)에 對(대)하여 月上(월상) 九?(구호)라고 한다.
23. 月體(월체) 36倍(배)의 質量(질량)을 有(유)한 木星(목성)의 區宇(구우)
月上(월상) 九?(구호)에 接(접)하여 亦是(역시) 1080의 두께(厚:후)인 木星(목성)의 區宇(구우)가 있으며, 遊星(유성) 全界(전계)를 一團(일단)이 되게 하는 功能(공능)의 主人公(주인공)인 主星(주성) 一位(일위)는 月(월) 體積(체적)의 6倍(배)를 有(유)하나, 月體(월체)와 相反(상반)해서 左旋體(좌선체)임과 同時(동시)에 陰性(음성) 火塵(화진)의 菱形體(능형체)이므로 各(각) 尖端(첨단)은 陰極(음극)이 되고 下方(하방) 一角(일각)은 陽極(양극)인 月頭(월두)의 尖端(첨단)을 相對(상대)로 하여 서로 吸引(흡인)하며 背方(배방)의 三個角(삼개각)은 後方(후방) 三個(삼개) 木星(목성) 때문에 同性(동성) 相排斥(상배척)되어 左旋(좌선) 右轉(우전)됨과 同時(동시)에 第三層(제삼층) 九位(구위)의 木星(목성)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中層(중층) 三位(삼위) 木星(목성) 때문에 上(상) 下層(하층)의 十位(십위) 木星(목성)이 左旋(좌선) 右轉(우전)됨에 따라 月體(월체)와 火星(화성)의 右旋(우선) 右轉(우전)에 馬力(마력)을 加(가)하게 된다. 더욱이 同(동) 區宇(구우)의 火塵(화진) 亦是(역시) 陰性(음성)이므로 上方(상방) 火星界(화성계)를 끌어 들이는 데 助力(조력)하여 月(월)로 하여금 土星界(토성계)와 그 力線(력선)을 끌어당겨 遊星(유성) 全界(전계)가 一團(일단)이 된다.
그리고 第二層(제이층) 三位(삼위)의 木星(목성)은 各各(각각) 月體(월체)의 倍(배)이고 第三層(제삼층)의 九位(구위)는 倍(배)이며 同區(동구) 8個層中(개층중) 下(하) 5個層(개층)의 質量(질량)은 順次(순차)와 如(여)히 1, 2, 3, 4, 5倍(배)이므로 合(합)하여 月體(월체)의 15倍(배)가 되고 主星(주성) 一位(일위)와 從星(종성) 十二位(십이위)의 體積(체적)은 月體(월체)의 21倍(배)이며 모두 合(합)하여 36倍(배)가 된다.
24. 月體(월체) 20倍(배)인 四大(사대) 金星(금성)과 地體(지체) 128倍(배)인 八位(팔위)의 金星(금성)
25. 地體(지체) 944倍(배)의 質量(질량)을 有(유)한 四七星宿界(사칠성수계)
26. 地體(지체) 8倍(배)인 地輪界(지륜계)
27. 列曜(열요) 空型(공형)의 樣相(양상)
28. 內宙(내주) 外宇(외우)와 銀河水(은하수)
29. 恒星(항성)과 遊星(유성)
30. 七曜(칠요)의 差別(차별)
31. 四大(사대) 客塵(객진)
32. 列曜(열요) 輪界(륜계)의 密度(밀도)
33. 輪界(륜계)와 光明(광명)
34. 左旋塵(좌선진)과 右旋塵(우선진)
35. 磁金塵(자금진)과 電金塵(전금진)
36. 宇宙(우주)의 原動力(원동력)
第二 地塵世界(지진세계)와 地球(지구)
37. 地下(지하)의 六級層(육급층)과 地上(지상)의 六輪圈(육륜권)
38. 地球(지구)의 解體(해체)
39. 地上(지상) 六輪圈(육륜권)의 體積(체적)
40. 輪圈(륜권) 別(별) 地塵(지진)의 分布(분포)
41. 輪圈(륜권) 別(별) 地塵(지진) 體積(체적)의 比率(비율)
42. 地輪界(지륜계)의 四大塵(사대진)과 冷, 熱量(냉, 열량)
43. 月下(월하) 十界(십계)의 相距(상거)와 地球(지구) 木星(목성) 間(간)의 連絡線(연락선)
44. 四七(사칠) 星宿界(성수계)의 質量(질량)
45. 四七(사칠) 星宿界(성수계) 質量(질량)의 差別(차별)
第三 水塵(수진) 世界(세계)와 日球(일구)
46. 日身(일신)의 八級(팔급) 分開(분개)
47. 日心(일심)에서 地軌(지궤)까지의 經由( 경우) 區宇(구우)
48. 日心(일심)에서 虛無界(허무계)까지의 距離
49. 日心(일심)에서 水星界(수성계)까지의 距離
50. 日心(일심)에서 假空界(가공계)까지의 距離
51. 宇宙(우주)의 極中(극중)에서 極邊(극변)까지의 距離(거리)
52. 日球(일구)의 解體(해체)
53. 水星界(수성계) 十八個階(십팔개계)의 區宇(구우)에 있는 全(전) 水星(수성)의 位數(위수)
54. 水星群(수성군)의 總體積(총체적)과 別體積(별체적)
55. 假空界(가공계) 四個級(사개급) 三十四個階別(삼십사개계별)의 總(총) 水塵量(수진량)
56. 眞空界(진공계)의 水塵量(수진량)과 星霧系(성무계)의 總(총) 質量(질량)
第四 火塵世界(화진세계)와 月曜(월요)
57.九個 (구개호)의 距離(거리)의 質量(질량)
58. 月世界(월세계)에서 木星(목성)의 區宇(구우)를 넘어 火星界(화성계)까지의 距離(거리)
59. 火星(화성) 內界(내계) 下(하) 二個層(이개층) 十三個段(심삽개단)의 火塵量(화진량)
60. 火星(화성) 外界(외계) 下(하) 二個層(이개층) 十三個段(심삽개단)의 火塵量(화진량)
61. 火星(화성) 內界(내계) 上(상) 三個層(삼개층) 十二個段(심이개단)의 區宇(구우)에 있어서의
火星(화성)의 位數(위수)
62. 火星(화성) 外界(외계) 上(상) 三個層(삼개층) 十二個段(심이개단)의 區宇(구우)에 있어서의
火星(화성)의 位數(위수)
63. 火星(화성)의 總別(총별) 體積(체적)과 總火塵量(총화진량)
64. 電子(전자)의 量(양)과 電波(전파)가 미치는 區域(구역)
第五 風塵世界(풍진세계)와 木星(목성)
65. 木星(목성) 區宇(구우) 下(하) 五個層(오개층)의 陰性火塵量(음성화진량)
66. 木星(목성) 區宇(구우) 上(상) 三個層(삼개층)에 있어서의 三品(삼품) 木星(목성)의 體積(체적)과 그
陰性(음성) 火塵(화진)
67. 日球(일구)의 冷量(냉량)과 引力量(인력량)
68. 星霧系(성무계)의 冷量(냉량)과 引力量(인력량)
69. 宇宙(우주)의 左旋塵(좌선진)에 말미암은 水平力量(수평력량)
70. 水星界(수성계)의 熱量(열량)과 運動量(운동량)
71. 月世界(월세계)의 熱量(열량)과 運動量(운동량)
72. 木星(목성) 區宇(구우)의 陰性(음성) 熱量(열량)과 靜力量(정력량)
73. 全(전) 宇宙(우주)에 있어서의 右旋(우선) 斥力量(척력량)
74. 全(전) 宇宙(우주)에 있어서의 左旋(좌선) 引力量(인력량)
75. 月(월)로 하여금 木星(목성)과 九線(구선)을 連繫(연계)시키는 地輪界(지륜계)의 引力量(인력량)과
冷量(냉량)
76. 地輪界(지륜계)의 陽性(양성) 火塵(화진)과 陰性(음성) 水塵(수진)의 分量(분량)
77. 地輪界(지륜계)의 風塵量(풍진량)과 冷熱(냉열)의 體積(체적)
78. 地輪界(지륜계)의 動力(동력)과 靜力(정력) 또는 右旋風力量(우선풍력량)과 斥力量(척력량)
79. 四七(사칠) 星宿界(성수계)의 冷量(냉량)과 引力量(인력량)
80. 四七(사칠) 星宿界(성수계)의 兩性(양성) 熱量(열량)과 風塵量(풍진량)
81. 四七(사칠) 星宿界(성수계)의 動力(동력)과 靜力(정력) 또는 風力量(풍력량)
第六 金塵世界(금진세계)와 金星(금성)
82. 四大金星(사대금성)과 八位金星(팔위금성)의 總別(총별) 體積(체적)
83. 列曜(열요) 또는 流質(유질) 根據(근거)의 全體積(전체적)
84. 宇宙(우주)의 金塵量(금진량)
85. 冷化(냉화) 金塵(금진)
86. 熱化(열화) 金塵(금진)
87. 中和(중화) 金塵(금진)
88. 冷力化(냉력화) 金塵(금진)
89. 熱力化(열력화) 金塵(금진)
90. 月(월)의 熱力(열력)으로 말미암은 土星界(토성계)의 冷光化(냉광화) 金塵(금진)
91. 日(일)의 冷力(냉력)에 由(유)한 土星界(토성계)의 熱光化(열광화) 金塵(금진)
92. 金星(금성) 또는 土星界(토성계)에 있어서의 日光(일광)과 月光(월광)의 比量(비량)
93. 에테르와 金塵(금진)
94. "이―자"와 金塵(금진)
95. 識力(식력)과 神力(신력)
96. 識光(식광)과 智光(지광)
97. 智力(지력)과 神通力(신통력)
98. 菩薩(보살) 十力(십력)과 如來(여래) 十力(십력)
99. 識神(식신)의 力量(역량)과 業力(업력)
100. 金塵(금진)과 大千世界(대천세계)
卷 末
金剛心論(금강심론)
수미산
광륜지
마음의 고향
원통불법의 요체
정통선의 향훈
성철스님 법문
一切法佛生 一切法佛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일체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만약 이렇게 알고 있으면 모든 부처가 항시 나타나 있다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이 법이(不生不滅)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 불멸이다.
普照塵勞業惑門憲是普賢眞法界 - 菩薩戒 序文
넓게 비치는 진로업혹문(중생의 나쁜 모든 짓)이 모두 보현보살의 진법계다
* 一百五十讚佛訟 - 인도 <나지르제타> 스님
은심과부재 배덕기심원 존관원극경 유여극중은
- 베푼은혜 천지보다 깊어도 그걸 배반하고 깊은 원수 맺는다.
부처님은 그 원수를 가장 큰 은혜로 본다
원어존전해 원어존천진 피앙구불과 불이피위온
- 원수는 부처님을 해롭게 해도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상대는 부처님 허물만 보는데 부처님은 그를 은혜로 갚는다.
* 즉 深怨害者深愛護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불교의 근본자세)
實相無垢常淸淨 모든 만법의 참모습은 때가 없이 항상 청정하니,
貴賤老幼事如佛 귀하나 천하나 늙으나 젊으나 모두 부처님같이 섬기고
極重罪人極尊敬 중한 죄인이라도 받들어 모셔야하며
深怨害者深愛護 나를 해롭게 하는 이를 부모같이 모셔야 한다.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가 항상 나타나 있다.
三界火宅이요 四生苦海라 -
호화코 부귀코야 맹산군만 하련마는
백년이 못다하여 무덤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요.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을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을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려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니다.
항우가 유방에게 咳下에서 대패하고 오강에서 자결하며
우미인(궁녀) 앞에서 부른 노래 -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천하를 덮어도
時不利兮騅不逝 때가 이롭지 못하니 천리마도 앞을 달리지 않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 천리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거나
虞兮虞兮奈若何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나는 장차 어찌할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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