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비평] 정의란 무엇인가?
신승환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한다면, 구약성경은 끊임없이 정의에 대해 외치고, 삶과 사회에 정의를 요구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사회가 부패하여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고통 받을 때면 어김없이 예언자들이 나타나 정의를 외친다. 이들의 예언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기를 촉구하는 외침이지만, 그 뒤에는 인간의 삶과 생명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 예언자의 외침은 사랑을 위한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다. 정의와 사랑은 결국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며, 사람의 삶이 올바르게 이루어지기를 촉구하는 부르짖음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와 사랑은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외침이면서, 인간에게 인간다운 삶을 촉구하는 절대적 가르침이며 계명이다. 그것을 지키는 일은 그 시대에만이 아니라, 지금 · 이곳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의 의무이며 목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땅에서 2010년이란 시간을 보내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이 60만 부를 훌쩍 넘어서는 판매 실적을 올렸음은 결코 간단한 사실이 아니다. 신학과 철학 책이 1,000권을 팔지 못하는 현실에서 아무리 다른 이유를 찾더라도, 그것이 이 시대의 징표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의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정의를 논의한 수많은 책에 비해 샌델의 책이 지니는 미덕은 미국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수많은 사례를 중심으로 정의와 윤리의 문제를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전통적 철학에서 이루어졌던 정의와 윤리 개념을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 시장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정리하고 있다. 이로써 고전적 의미의 정의 개념인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이란 명제를 넘어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의 정의와 정당함이라는 문제로 논의를 확대한다.
사실 정의 개념은 분배 개념을 넘어 사회와 국가, 곧 공동체적 관계와 덕목을 떠나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정의는 사회학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윤리학이며 나아가 존재론에까지 연결되는 매듭이 되는 개념인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샌델은 먼저 정의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이해하는 공리주의의 주장을 살펴본 뒤 그 한계를 비판한다. 이어 지난 300년 이래 일반화되고, 후기 산업사회에 이르러 경제 제일주의와 시장 자유주의로 과잉 작동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의 개념에 대해 논의한다. 과연 자유지상주의적 정의 개념은 정당한가? 이 질문은 미국 사회의 모든 면을 추종하고, 그 사회를 전범으로 여기는 우리에게도 매우 절실한 문제일 것이다.
과연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사유재산과 개인의 경제 자유, 시장의 자유는 결코 침해할 수 없는 권리일까.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은 물론, 정부조차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에 매몰되어, 지켜야 할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공동선에 대해 무지한 우리 사회에서, 이 문제는 샌델의 문제제기보다 더 심각하고 절박하게 논의되고 해결되어야 할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샌델은 이 문제와 연관하여 공동선의 개념에 기반한 공동체주의를 옹호하고 있다. 정의는 공동체의 몫과 선,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을 지키는 데 자리한다는 것이다.
자연법에 근거한 보편성이 요구된다
그런데 샌델이 말하는 공동선,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은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자본의 삶과 미국 중심의 가치는 아닐까. 그래서 질문은 다시금 공동선이 자리한 지평, 정의를 지켜가는 사람들의 윤리적 문제로 확대된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에 선행하는 존재론적 이해와 그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 결단을 문제 삼지 않을 때 맹목적 논의에 그치게 될 뿐이다. 예를 들어 샌델의 정의 개념에서 자연법에 대한 이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최소한의 정의를 위한 한 공동체의 법체계는 보편적 인간성과 생명 존중이란 자연법에 어긋날 때 타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법을 영원법과 자연법, 인정법과 신법(lex divina)으로 구분하면서, 실정법은 물론 자연법조차 신법에 근거할 때 정당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러한 관점까지는 아닐지라도 정의 개념을 논의하려면 자연법에 근거한 최소한의 보편성이 요구되며, 그럴 때 정의 개념은 정당하게 이해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 실정법이나 정의 개념이 어떤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문제는 샌델이 논의하는 소득에 따른 차별과세, 낙태와 줄기세포, 동성간 결혼, 안락사, 대리모 논쟁 등의 민감한 사례에서 곧바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주제에서는 다만 정의에 관한 철학이 아니라 윤리학은 물론 생명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 결정까지 문제로 드러나게 된다.
개인의 자유와 정의, 이웃과의 연대와 타인에 대한 존중, 국가에 대한 판단과 공동체 내에서 진리를 도출할 수 있는 합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논의는 개인의 실존적 층위와 존재론적 층위에 이르는 문제 전반에 관계된다. 여기서 보듯이 정의에 대한 철학과 윤리학은 거듭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 결단에 관계된다. 칸트가 말했듯이 윤리학은 형이상학적 근거 정립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샌델의 논의가 지니는 한계가 자리한다. 그는 공리주의 철학자들, 벤담이나 밀은 물론, 칸트와 롤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까지 거론하며,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의 진리를 합리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의 합의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여기서 의미 있는 논의는 도덕의 동기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정언명령을 제시한 칸트의 견해일 것이다. 그 논의는 인간과 생명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윤리 이해와 잘 상응한다.
비록 칸트가 윤리학의 최종 근거로 신에 대한 논의를 배제한 점에서 차이를 지니지만, 롤스의 평등적 자유지상주의, 또는 공리주의나 다른 시장 자유주의자들에 비해서는 현저히 인간과 생명 자체를 근거로 제시하는 형이상학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무규범성과 맹목성을 넘어서
공동체의 정의가 다만 공동체의 건전한 시민의 합리적 판단과 공유하는 가치에 있다면 그것을 진정한 정의라 말할 수 있을까.샌델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미덕 논의를 통해 각자에게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데서 정의의 기준을 찾고 있다. 이 점에서 신자유주의가 폭주하는 현대 사회에서 맹목적인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후의 삶과 그를 위한 정의 개념은 어디서 주어질 것인가.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100주년에 발표된 회칙 “백주년”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 자본주의가 승리한 사회체계”에서 시장과 기업 경제를 비롯한 경제의 자유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해친다면 그러한 자본주의는 부정적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과잉이야말로 공동선에 기반한 정의의 가장 큰 적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된 정의 개념은 결국 의사규범에 지나지 않는 자본주의의 무규범성과 맹목성을 넘어서는 데서 올바르게 자리할 것이다.
샌델의 말처럼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이기에, 최선의 삶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그것이 결코 지상에서의 경제적 풍요나 행복에 자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아닌가. 물론 샌델 역시 오바마의 연설을 원용하면서, 정의로운 삶과 사회를 위해 “종교적 담론이란 영역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대답을 제외하고서 윤리와 정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낙태, 안락사 등과 관련된 정의의 질문은 인간과 생명에 대한 근원적 결단을 문제로 드러내고, 그에 대한 답을 재촉한다. 샌델은 다만 “시민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존중”할 때 정의의 근본적 의미가 설정된다고 말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사회윤리와 정의 개념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법과 공동선 개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을 해방하고 구원하고자 하느님이 정하신 법을 지킴으로써 인간에게 참생명과 참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정의는 근본적으로 인간다운 삶과 인간생명의 존중에 기반할 때만이 타당한 정의로 자리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정의는 성경에서 보듯이 끊임없이 정의를 지키고, 하느님의 왕국이 정의에 의해 다스려지기를 촉구하시는 그 말씀에 근거한다. 무지와 정의가 함께 자리한 적은 없다.
정의를 위해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할 때 불의가 싹트는 것이다.
신승환 스테파노 - 가톨릭 대학교 철학과 교수.
[경향잡지, 2011년 1월호]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글쓴이 : 실비아메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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