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緣起[輪回〕의 主體는 무엇인가? 佛敎에서는 모든 存在는 인연(因緣)으로 생기(生起) 한다는 연기법(緣起法)으로 世上의 理致를 說明합니다. 이런 因緣關係를 밝히는 것을 연기론(緣起論)이라고 하는데, 緣起의 主體를 俱舍論에서는 業이라 하고, 唯識論에서는 아뢰야識이라 하며, 기신론에서는 眞如, 화엄경에서는 法界라 하는 등 그 주장하는 바가 各己 달랐습니다.
(1)업감연기론(業感緣起論) 소승불교의 논서(論書)인「구사론(俱舍論)」등에서 주장하는 연기론(緣起論)으로 緣起의 主體는 업(業)이라는 것입니다. 業은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데, 이 業이 緣起의 主體라는 것입니다.
(2)아뢰야식연기론(阿賴耶識緣起論) 아뢰야식연기론은 業感緣起論에 뒤이어 이를 補充하기 위하여 일어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위의 업감연기론에선 만유가 생성하는 연기의 주체를 업(業)이라고 하고 그 業으로 因하여 輪回를 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業이 도대체 어느 곳에 貯藏되었다가 그 과(果)를 招來하는 것인가? 이에서 찾아낸 것이 곧 아뢰야識인 것입니다. 따라서 業感緣起論에선 6識(眼식ㆍ耳식ㆍ鼻식ㆍ舌식ㆍ身식ㆍ意식) 밖엔 없던 것이 이에선 第7識 말나識과 第8識 아뢰야識을 添加하여 總8識이 되는 것입니다.
8식은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이 그것인데,이 중 안식에서부터 신식까지는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意識은 第6識, 말나識은 第7識, 아뢰야識은 第8識이라고 합니다.
① 전5식(前五識) : 각기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을 認識할 뿐입니다. 즉 색(色)을 認識하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알고 촉감을 느끼는 등 單純한 感覺作用을 할 뿐입니다.
② 의식(意識) : 앞의 것처럼 감각기관을 依持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認識한 것에 對해 比較ㆍ抽理ㆍ追憶 등의 作用을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가 어떤 소리를 들었다면 듣는 것만은 이식(耳識)이지만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가? 남자의 소리인가? 여자의 소리인가? 등을 經驗에 依해 分別 認識하는 것은 意識이 되는 것입니다.
以上의 前5識과 第6識의 特徵은 모두가 외경(外境)에 대한 認識이요 요별(了別)이기에 이들을 외향식(外向識)이라 합니다.
③ 말나식(末那識) : 末那는 범어 마나스(Manas)의 音譯인데 意譯하여 의(意)라고 합니다. 第6識인 意識과 混同될 우려가 있어서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末那識은 第8識을 소의처(所依處)로 하여 ꡐ아(我)다’,ꡐ법(法)이다’하고 執着ㆍ사량하는 사량식(思量識)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末那識(識)은 第6識과 第8識과의 中間에 있으면서 恒常 제8식을 對相으로 하여 그것이 바로 '나'의 主體라는 아집(我執)과 그것은 實在한다는 법집(法執)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第6識은 이런 末那識을 依持하여 여러 가지 對相을 認識함에 實在하는 듯 生覺합니다. 그러므로 結局 衆生은 이 아집(人執)과 법집(法執)에 依하여 모든 妄想이 생기고 惡業을 짓게 되어 生死의 輪回를 免치 못하는 것이니 我執과 法執을 끊으면 妄想도 사라지고 깨달음의 境地에 들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輪回도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④ 아뢰야식(阿賴耶識) : 아뢰야는 범어 알라야(Alaya)의 音譯으로 현장은 이를 쌓아둔다는 뜻으로 보아 함장(含藏)이라 번역하였고 진체(眞諦)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아 무몰(無沒)이라 번역한 바 있습니다.
結局 아뢰야識이란 말은 우리가 時時刻刻 行하는 業은 그에 따른 種子를 남기니 이 種子는 아뢰야識에 貯藏되어 없어지지 않음이라 倉庫에 物件을 貯藏해 두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명명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身口意의 모든 行爲는 그 낱낱의 行動마다 勢力的인 種子가 아뢰야識 가운데 貯藏되었다가 뒷날 어느 때인가 因緣을 만나 다시 모든 世界를 展開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뢰야識도 因緣으로 생기는 것이라 生滅的인 것엔 틀림 없으나 無始이래로부터 아득한 未來를 向하여 끊임없이 현현(顯現)하되 第7識의 活動에 依하여 自體 안에 간직해 두었던 善惡을 展開시키니, 이렇게 展開되기 始作한 善惡의 種子는 다시 第5識의 善惡業의 훈습력(薰習力)에 依해 다시 展開되어 三界 六途 등의 世界를 展開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뢰야識에 貯藏한 種子가 현행(現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阿賴耶識은 生死輪回가 거듭되는 미계(迷界)의 主體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아뢰야識이 오계(悟界)에는 없는 것이란 말이 아닙니다. 悟界에도 비록 種子는 모두 무루(無漏)의 것이어서 바탕은 다르다 할지라도 그 展開 方法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뢰야識은 미오(迷悟) 모든 世界의 根源이요 本體인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3界가 한 마음이요 萬法은 오직 식(識)이다(三界一心 萬法唯識)”이라던가, “3계는 오직 마음뿐 마음밖에 법이 따로 없다(三界一心 心外無別法)”이란 말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이 道理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뢰야識의 장(藏)이란 말엔 3가지의 뜻이 있다고 하니, 능장(能藏)은 모든 만유(萬有)를 내는 直接的인 原因인 善惡의 種子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에서 이르는 것이요, 소장(所藏)은 第8識엔 다른 第7識에 依하여 염법(染法)의 種子가 훈습(薰習)되어 간직된다는 뜻에서 이르는 것이요, 집장(執藏)은 第8識은 無始이래로 없어지지 않고 常住함으로 第7識에 依해 自我로써 執着되는 識이란 뜻에서 이르는 말입니다.
(3)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 위의 아뢰야識緣起論에서 宇宙萬有의 緣起의 主體를 아뢰야識이라 하였는데, 이렇게 놓고 보아도 거기엔 事實 問題가 있습니다. 卽 우리들이 恒常하는 善惡의 모든 行爲의 種子가 貯藏되는 곳이 아뢰야識이요, 이런 種子가 다시 중연(衆緣)을 만나 宇宙萬有를 變現한다고 하면 結局 아뢰야識 그것은 生滅變化하는 것이요, 生滅變化하는 無常한 것이라면 참(眞)이 아니라 거짓(妄)임이 틀림없으며, 또한 이렇게 보면 그것은 相對的인 考察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實로 宇宙萬有를 변현(變現)하는 緣起의 主體라고 한다면, 그것은 生滅變化하는 無常한 것이 아니라 常住不變하는 것이야 할 것이요 거짓된 것(妄)이 아니라 참된 것(眞)이어야 할 것이요, 同時에 그것은 現象을 超越한 普遍 絶對的인 不變의 本體라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眞如緣起論은 이러한 論理的 要請에 依하여 緣起의 主體를 불변(不變)의 진여(眞如)라고 본 緣起論입니다.
그렇다면 眞如는 과연 어떻게 緣起하는가? 언뜻 生覺하면 眞如는 참되고 不生不滅한 宇宙萬有의 本體라, 이런 眞如가 生滅變化하는 現象界의 萬有를 緣起시킨다는 것은 論理的으로 모순이 있지 않나 하는 疑問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大乘起信論에서는 眞如엔 不變하는 面과, 수연(隨緣)하는 面과의 2면(二面)이 있다고 하여 그 緣起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으니, 그 本體는 絶對 不變이지만 現象的인 面으로 볼 땐 연(緣)을 따라 生滅變化한다고 합니다. 卽 眞如는 그 本性을 變치 않고 緣을 따라 온갖 差別現象을 나타낸다는 것이니, 비유하면 金으로 팔찌 반지 귀걸이 목걸이 등 여러 가지를 만들어 諸各己 現象은 다르지만 金으로서의 제 바탕은 한결같이 不變인 것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眞如는 具體的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眞如는 凡夫들의 마음(衆生心)이 眞如이니, 이것이 곧 緣起의 主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2면(二面)이 있으니, 그것을 各各 심진여(心眞如)와 심생멸(心生滅)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심진여(心眞如)라는 것은 衆生心의 바탕으로서 不變하는 眞如의 本體的인 面을 나타내는 말이요, 심생멸(心生滅)이란 것은 眞如의 모양(相)과 活動(用)이 있는 수연(隨緣)하는 生滅的인 面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眞如엔 이 2면(二面)이 있어 本體는 恒常 不變 無差別한 것이지만 現象은 위의 금(金)의 例와 같이 生滅變化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眞如는 곧 衆生心으로 이에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의 2면(二面)이 同時에 存在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모순같이도 느껴지나, 그러나 이는 本體와 現象이 따로 없다는 것을 想起할 땐 하나도 異常할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本體를 떠나서 現象이 있을 수 없고 現象을 떠나서 本體가 있을 수 없으니 이런 關係를 일러“하나도 아니요 그렇다고 또한 둘도 아니다(不一不異).”라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과 波濤를 區別하면 하나가 아니다(不一). 그러나 결국 물과 波濤는 결코 別個로 存在할 수 없는(不異) 것과도 같다 하겠습니다.
(4)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 업감연기론(業感緣起論)에선 業을, 아뢰야식연기론(阿賴耶識緣起論)에선 아뢰야識을,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에선 眞如를 各各 우리가 살고 있는 宇宙萬有의 緣起의 第一原理로 하고 있습니다. 卽 業ㆍ阿賴耶識ㆍ眞如 等이 第1原理가 되어 우리의 世界가 展開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위의 연기론은 어디까지나 연기의 제1원리를 규명하는 立場에서 또는 本體的인 面과 現象的인 面을 나누어 보는 立場에서 說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돌려 宇宙萬有가 展開되어 있는 現實的인 모습을 직관(直觀)할 땐 山河大地 그 모든 것이 次例를 찾을 수 없이 서로 서로 끝없는 關係를 가지고 어떤 秩序와 調和 속에서 連結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緣起의 定義, 卽“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말씀을 되새겨 보더라도, 이 世上의 天地萬物은 서로서로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고 과(果)가 되면서 끝없이 生成變化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宇宙萬物은 그 어느 것도 홀로 생겨났다가 홀로 없어지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또한 이런 모든 緣起하는 것이 어떤 本體를 떠나 있는 別個의 現象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연기실상(緣起實相)을 사무쳐 보아 本體的인 實象의 面과 現象的인 緣起의 面을 區分하지 않고 일관(一貫)하여 緣起論으로 發展시킨 것이 華嚴經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화엄종(華嚴宗)에서 말하는 所謂 法界緣起論, 다른 말로 무진연기론(無盡緣起論)인 것입니다.
당나라 법장이 지은「화엄경채현기(華嚴經採玄記)」에 보면 法界라는 말을 해석함에 法은 自性을 가져 남이 알게 하는 것이란 뜻을 가진 말이고, 界는‘原因이 된다’,‘性稟을 變치 않는다’,‘나누어 區別 짓는다’ 등의 뜻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법계(法界)란 一切의 모든 存在가 各己 그 領域을 지켜 서로 엇갈리거나 뒤섞임이 없이 雜多한 가운데서도 秩序를 가지고 整然하게 調和를 유지해 가면서 緣起하고 있는 宇宙萬法의 世界를 가리키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法界緣起說은 곧 이러한 宇宙萬法은 어느 하나의 原因으로서 緣起된 것이 아니요, 宇宙萬法 그대로가 서로 서로 因果 關係를 維持하면서 存在하고 있다는 宙宇萬法 그대로의 現實的인 모습에서 緣起의 實相을 밝힌 것입니다.
출처 :불국정토구현회 원문보기▶ 글쓴이 : 다정불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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