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조주세발(趙州洗鉢) / 외부의 노예도 내부의 노예도 되지 말라

장백산-1 2013. 7. 9. 16:56

 

 

 

 

 

 

[불교와 철학] [철학자 강신주의 무문관과 철학] 23. 조주세발(趙州洗鉢) |불교와 철학

갠지스 | | 조회 0 |추천 0 | 2013.07.09. 09:43 http://cafe.daum.net/okryunam/IAGQ/391

[철학자 강신주의 무문관과 철학] 23.

조주세발(趙州洗鉢)

外部의 奴隸도 되지 말고 內部의 노예도 되지 말라

생각 끊겠다는 마음 또한 집착
 內外部 向한 生覺 모두 끊어야

 執着이 없이 깨인 마음이라야
 當當한 主人公도 될 수 있다


어느 스님이 말했다. “저는 최근 이 사찰에 들어왔습니다. 스승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그러자 조주(趙州)는 말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그 스님은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그럼 발우나 씻게.” 그 瞬間 그 스님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 무문관(無門關) 7칙 / 조주세발(趙州洗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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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김승연 화백


얼마 전 遇然한 機會에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1988년 출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흔히 바이올린의 女帝라고 불리는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1963년 출생)로부터 能力을 認定받은 바이올리니스트이지요. 무터는 그녀를 “가장 愛着이 가는 연주자”라고 부를 정도로 愛情과 關心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최예은은 저와 집필실을 함께 쓰고 있는 선생님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들린 겁니다. 그녀는 통통 튀는 듯 自信感 있는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습니다. 제 房에서도 도란도란 인터뷰 소리가 들리더군요. 소파에 편히 누워 책을 보고 있던 저의 귀에는 최예은이 들려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들어왔습니다.

 

그건 뮌헨 大學 그녀의 스승과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날 최예은이 연주를 하고 있는데, 그의 스승이 말했다고 합니다. “演奏가 잘못된 部分이 있는 것 아니니?”

갑작스런 스승의 指適으로 그녀는 당혹했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그녀는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生覺해도 잘못 演奏된 部分이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스승이 잘못된 部分이 있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수긍했다고 합니다.

 

다시 演奏가 진행되자, 스승은 다시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예은아, 정말 네 演奏에 잘못된 部分이 있었다고 生覺하니?” 이렇게 간곡하게 물어보니, 어떻게 제자가 自身의 속내를 계속 스승에게 감출 수가 있었겠습니까.

 

 “선생님, 사실 저는 잘못 演奏했다고는 生覺이 들지 않았어요.” 바로 이것입니다. 스승은 제자를 떠본 것입니다. 스승은 音樂에서 정말로 重要한 것은 음악을 對하는 진지한 姿勢와 當當한 態度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스승은 “선생님, 저는 제대로 연주했는데요”라는 대답을 기다렸던 겁니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를 아끼는 스승의 마음이 感動的으로 다가옵니다. 自身이 演奏하던 音樂에 제대로 直面했다면, 演奏者는 그 누구 앞에서 當當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스승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럴 때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한 사람의 當當한 연주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승의 시험은 애잔한 느낌을 줍니다. 이제 자신의 품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生覺이 없다면, 그러니까 이제 自身처럼 獨立的인 演奏者로 成長했다는 判斷이 들지 않았다면, 스승은 자신의 제자를 떠보려고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애잔하다는 겁니다. 제자가 성장해서 더 이상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스승은 뿌듯하기도 하고 同時에 서글프기도 할 테니까 말입니다.


2. 假面 뒤 얼굴도 맨얼굴 아닌 假面

  ‘無門關’의 일곱 번째 關門은 自己 삶의 主人公이 되려고 조주(趙州, 778~897)를 찾아온 어느 스님의 깨달음을 얻는 過程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문관’을 보면 그 스님은 조주에게 묻습니다. “저는 최근 이 사찰에 들어왔습니다. 스승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그렇지만 조주의 가르침과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조주록(趙州錄)’을 보면 조주에게 던지 스님의 質問은 조금 다릅니다. 아니 正確히 말해 ‘무문관’의 일곱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데 더 분명한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명 스님은 조주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봅니다.

“어떤 것이 배우는 사람의 자기입니까(如何是學人自己)?” 여기서 배우는 사람, 즉 학인(學人)은 무명 스님 자신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스스로 主人에 이른 스승처럼 스스로 主人이 되는 方法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기에, 스님은 學人이라고 스스로 부른 것입니다.

여기서 무명 스님의 질문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 단지 한 걸음만 不足하다는 事實이 分明해집니다. 이 스님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自己), 그러니까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는다면, 그래서 그 맨얼굴에 잃지 말고 당당하게 삶을 영위한다면, 그 순간 자신은 부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에는 무명 스님의 치열한 努力이 선연하게 들어옵니다.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스님은 자신의 假面을 하나하나 벗겨갔던 겁니다. 한 장의 껍질을 벗기는 瞬間, 스님은 기대했을 겁니다. 이제 자신의 맨얼굴,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의 얼굴에 이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양파껍질 한 장을 벗기자 새로운 양파껍질을 만나는 것처럼, 假面을 벗자마자 맨얼굴이 아니라 또다른 假面에 直面했던 겁니다.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년 출생)의 ‘그 해 가을’이란 시 말미에 나오는 구절과도 같은 절망감이었을 겁니다.

“假面 뒤의 얼굴은 假面이었다.”

무명 스님이 경험했던 자기의 맨얼굴을 찾으려는 집요한 노력과 반복되는 절망감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여러분은 자신을 이 스님이 느끼고 있는 절망감 속에 던져 넣어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어떤 것이 배우는 사람의 自己입니까?”라는 질문의 절실함이 우리 가슴에 들어올 테니까 말입니다.

 

조주의 對答이 무명 스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救援의 밧줄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絶實함에서만 可能할 겁니다. 自身의 맨얼굴을 찾으려고 內面을 파고드는 치열한 노력을 비웃듯이, 혹은 우리의 절실함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주는 말합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內面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무명 스님을 조주는 한 마디의 말로 바깥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스님은 맨얼굴을 찾으려는 오래된 執着에서 벗어나서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3.佛法에 執着하는 것도 執着이다

조주는 간파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무명 스님이 本來面目에 執着하고 있다는 事實을 말입니다. 이미 혜능(慧能, 638~713)도 말하지 않았던가요. “모든 것들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면 生覺을 끊어야 한다고 하지마라. 이것은 곧 佛法에 束縛된 것이다.” 慧能의 에피소드와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는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慧能도 自由를 찾으려는 제자들에게 警告하고 있었던 겁니다.

마음을 양파 껍질처럼 벗겨서 除去하려는 것 自體가 一種의 執着이라고 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 즉 佛法은 執着을 除去하는 方法입니다. 그렇지만 佛法에 執着하는 것 自體도 執着일 수밖에 없습니다. 疾病을 고치는 약에 執着하면 약물중독에 빠질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重要한 것은 內面이냐 外面이냐가 아닙니다. 核心은 執着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外部 事物이나 事件에 執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同時에 우리는 自身의 內面에도 執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혜능뿐만 아니라 조주가 품고 있었던 속내였던 겁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라는 조주의 질문으로 無意識的이나마 무명 스님은 맨얼굴에 執着하지 않게 된 겁니다. 當然하지요.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瞬間, 어떻게 그가 자신의 맨얼굴에 執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의 뇌리에는 조주의 질문과 아침에 먹었던 죽만이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아직 危險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執着은 그대로이고 단지 執着의 對相만이 바뀐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당연히 무명 스님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마조(馬祖, 709~788)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 그는 조주가 말한 아침 죽에서 마조의 가르침을 連結했을 겁니다. 영민한 조주가 이것을 놓칠 리가 없지요. 다시 마조의 가르침에 執着하다고 느꼈을 때, 조주는 무명 스님의 새로운 執着마저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럼 발우나 씻게.” 이미 먹었기에 머릿속에만 存在하는 아침 죽이나 혹은 이미 죽은 마조의 가르침에 執着하는 마음마저 날려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內面에 沒入하는 것도 막고, 外面에 빠져드는 것도 막으려는 것입니다. 內面이든 外面이든 執着하지 않아야 우리 마음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활발발(活潑潑)’하게 깨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훌륭한 연주자는 관중의 視線과 評價 때문에 演奏를 亡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에 當當하게 직면할 뿐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의 스승이 젊은 제자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것 아닐까요. 그녀를 스승이나 관중의 奴隸가 아니라 自身이 演奏하는 音樂의 當當한 主人公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무엇인가에 執着하는 瞬間, 아니면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意識하는 瞬間, 우리는 主人公이 될 수가 없습니다. 本來面目이란 가르침에 執着해서 內面에 침잠하는 것이나, 아니면 平常心이란 가르침에 執着하여 外部로 치닫는 것은 우리를 主人公으로 만드는 데 障碍만 될 뿐입니다.

外部의 奴隸도 되지 말고 內面의 奴隸도 되지 말라는 조주의 애정이 최예은의 스승에게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셈입니다. 죽을 먹든 발우를 씻든 프로코피에프를 연주하든 슈베르트를 연주하든, 重要한 것은 어느 것에도 執着하지 않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修行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럴 때 무명 스님이든 최예은이든 아니면 우리든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출처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