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3-11 그대가 살아있는 文殊다
道流(도류)야
儞祇今聽法者(이지금청법자)가 不是儞四大(불시이사대)로대
能用儞四大(능용이사대)하나니 若能如是見得(약능여시견득)하면
便乃去住自由(변내거주자유)니라.
若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勿嫌底法(물혐저법)이라.
儞若愛聖(이약애성)하면
聖者聖之名(성자성지명)이니라.
有一般學人(유일반학인)이
向五臺山裏求文殊(향오대산리구문수)하나니
早錯了也(조착요야)라
五臺山無文殊(오대산무문수)니라.
儞欲識文殊麽(이욕식문수마)아
祇儞目前用處(지이목전용처)가 始終不異(시종불이)하며
處處不疑(처처불의)가 此箇是活文殊(차개시활문수)니라.
儞一念心無差別光(이일념심무차별광)이
處處總是眞普賢(처처총시진보현)이요
儞一念心自能解縛(이일념심자능해박)하야
隨處解脫(수처해탈)은
此是觀音三昧法(차시관음삼매법)이니라.
互爲主伴(호위주반)하야 出則一時出(출즉일시출)하나니
一卽三三卽一(일즉삼삼즉일)이라
如是解得(여시해득)하면 始好看敎(시호간교)니라.
* 강설 ; 무비스님
‘그대가 살아있는 文殊菩薩이다’,
이 대목이 임제록의 절정이다.
‘道流(도류)야 儞祇今聽法者(이지금청법자)가’, 그대들이 다만 지금 法門을 듣고 있는 그 者가,
‘不是儞四大(불시이사대)로대’, 그대의 四大肉身이 아니야.
그런데 ‘能用儞四大(능용이사대)하나니’, 그대들의 四大를 能히 使用한다.
어쨌든 법문을 듣는 그놈은 四大는 아니지만 四大로 이루어진 肉身을 또 活用을 해.
法門을 듣는 놈과 四大肉身 그 둘이 만나가지고 調和를 이루니까 그게 사람이야.
법문을 듣는 놈 그것만 떠돌아다니면 뭐라해? 鬼神이라 그러는 거죠.
그게 빠져 나가 버리면 뭐라? 송장이지 그건.
그래 그거 둘이 그게 調和를 제대로 이루었을 때 참 가장 價値 있는 存在인 거죠.
그래서 能用儞四大야.
법문을 듣는 놈 그것이 그대들의 四大육신을 能히 使用하나니,
‘若能如是見得(약능여시견득)하면’, 만약에 능히 이와 같이 본다면, 보아 깨우치면,
‘便是去住自由(변시거주자유)니라’, 곧 가고 오는 데 自由롭다.
저승에 가고 이승에 머물고 하는데서 自由롭다.
‘若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만약 산승 見處에다가 依持한다면,
‘勿嫌底法(물혐저법)이라’, 그 무엇도 배격해 내고 반대하고 싫어하고 할 일이 없다.
‘儞若愛聖(이약애성)하면’, 그대들이 만약에 聖人을 사랑할 것 같으면
‘聖者聖之名(성자성지명)이니라’, 聖人은 聖人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聖人일 뿐이야.
‘有一般學人(유일반학인)이’, 어떤 일반 학인이, 어떤 한 종류의 학인이 있어서,
‘向五臺山裏求文殊(향오대산리구문수)하나니’, 五臺山에 文殊菩薩이 계신다는 소리를 듣고
오대산을 향해서 문수보살을 求해서 일보일배 하면서 몇 년에 걸려서 그렇게 간다.
무착 문희 선사가 그랬죠.
‘早錯了也(조착요야)라’, 그렇게 하면 벌써 그건 어긋난 것이다.
‘五臺山無文殊(오대산무문수)니라’,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없다.
관음도량에 관세음보살 없다. 법당엔 부처가 없다 이 말이여.
‘儞欲識文殊麽(이욕식문수마)아’,그대가 진짜 문수보살을 알고 싶은가,
‘祇儞目前用處(지이목전용처)가’, 다만 그대들 지금 눈앞에서 作用하고 있는 그것,
‘始終不異(시종불이)하며’, 바로 作用하고 있는 그것이,
始終,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變함이 없는 그놈, 바로 그것이 主人公이야.
始終不異하며
‘處處不疑(처처불의)가’,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놈에 대해서는 疑心할 바가 없어.
이거는 꽃인지 조화인지 이게 의심이 가지만 그 사실, 꽃인가 아니면 이게 조화인가 라고
의심하는 그 當事者 그 놈은 疑心할 여지가 없는 것이야.
處處不疑라, 하~ 내가 여기에다가 ‘여기가 임제록의 절정이다’ 이렇게 해 놨어.
處處不疑라, ‘此箇是活文殊(차개시활문수)니라’, 이 놈이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문수보살이다.
보살 중에는 지혜제일이니까 문수가 왕이잖아요. 이것이 진짜 살아있는 문수여.
우리 프로는 최소한도 이건 알고 있어야 돼요. 아마추어들에게 根機 따라서 對機說法할 때는
‘관음기도 하시오’, ‘지장기도 하시오’ 그렇게 方便을 쓰지만 우리는 진짜 프로야.
프로는
이 根本 밑바탕을 환히 알고 있어야 된다고.
우리 프로들의 본색은
이러한 事實을 환히 꿰뚫고 있어야 된다 이겁니다.
프로는 아마추어하고
달라야 되는 거죠.
始終不異하며 處處不疑, 의심할 바 없는
그 놈이, ‘此箇是活文殊(차개시활문수)니라’,
문수보살이 진짜 있는가 없는가, 의심하는 것은 좋다 이거야.
하지만 疑心하는 當體 그 놈은 疑心할 바가 없는 거여.
그게 處處不疑입니다.
그놈에 대해서는 疑心할 바가 없다는 事實이에요.
그놈이야말로 진짜 活文殊다, 살아 있는 文殊다, 참 대단하잖아요.
‘儞一念心無差別光(이일념심무차별광)이’, 그대들의 한 生覺 마음에 差別이 없는 빛은,
‘處處總是眞普賢(처처총시진보현)이요’, 곳곳에 모두 다 이것이 참다운 보현보살이고,
‘儞一念心自能解縛(이일념심자능해박)하야’, 그대들 한 生覺 마음에 저절로 능히 속박을 벗어난 것,
속박을 벗어난 그것이야말로 벗어나서 ‘隨處解脫(수처해탈)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것은 解脫돼 있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감옥 안에 또 감옥 짓고, 그 안에 짓고,이래서 천겹 만겹으로 지어가지고
그 안에다가 쇠고랑 채우고 목에 칼 씌우고 아무리 그렇게 묶어 놔도 그놈은 해탈이야.
그놈은
묶이지가 않아. 그놈은 도대체가 묶이는 존재가 아니라구요.
그놈은 隨處解脫이잖아요.
어디에도 그놈은 묶을 수가 없는 거고.
‘此是觀音三昧法(차시관음삼매법)이니라’, 이놈이 觀世音菩薩이지.
이놈 보다 더 영험 있는 관세음보살이 어디 있어요.
티벳트에 포탈라 궁전에 무슨 관세음보살이 계신다고? 아무리 가서 관세음보살 불러 봐봐.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그놈밖에 더 영험있는 관세음보살이 또 있는가.
거기까지 찾아가는 그놈 외에 또 다른 어떤 영험 있는 관세음보살이 있는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는 그놈이 진짜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고 살아있는 문수보살이여.
그래서 우리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불러서
잠자고 있는 내 마음속에 나의 관세음을 두드려 깨우는 것이야.
하도 잠이 곤하게 들으니까 그렇게 관세음보살…
말로 하는 게 부족해서 목탁을 냅다 치면서 관세음보살 불러도
내 마음 속에 관세음보살 이게 잠에서 안 깨는 거야. 이놈이 도대체 잠에서 깰 줄을 몰라.
이놈이 얼마나 잠이 깊이 들었는지. 죽진 않았는데 워낙 곤하게 잠 들어가지고 안 깨는 거야.
임제 以後에 이런 이야기한 사람 아무도 없어. 겁이 나서 못하지 이거.
‘互爲主伴(호위주반)하야’, 서로서로 主人이 되고 벗이 돼.
例를 들어서 이놈이 實踐行으로 나오면 普賢菩薩이야,
智慧로서 아주 좋은 判斷과 分別力을 가지면 文殊菩薩이고,
고통 받는 중생들이 눈에 밟혀서 도와주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놈이 菩薩行으로 나오면 그거는 觀世音菩薩이고.
互爲主伴이야, 서로서로 주인이 되고 벗이 되어서,
‘出則一時出(출즉일시출)하나니’, 즉 밖으로 나가면 일시에 나가,
내가 말을 할 때 여기에서 觀世音菩薩 普賢菩薩 文殊菩薩이 다 나와서 지금 말하고 있는 거여.
여러분들 다 나와서 말 듣고 있고. 그 세 보살이 다 여러분들한테서 나와서 내 말 듣고 있는 거여.
‘一卽三三卽一(일즉삼삼즉일)이라’, 하나가 곧 셋이고 셋이 곧 하나다.
文殊 普賢 觀音이 바로 내 한 마음이고
내 한 마음이 文殊도 되었다가 普賢도 되었다가 觀音도 되었다가 하는 것이야.
世上에 이런 法이 어디 있어요. 어디서 이런 理致를 들을 수 있습니까!!!.
‘如是解得(여시해득)하면’, 이와 같이 이해를 해서 깨우칠거 같으면,
‘始好看敎(시호간교)니라’, 비로소 經을 제대로 잘 배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始好看敎, 경을 잘 보는 사람이다. 이렇게 봐야 看經者慧眼通透(간경자혜안통투)지.
안 그러고 글자만 쫓아가면 이건 看經者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거지. 참 대단하죠.
茶馬高道 방송 보니까 그러대.
저기 어디 청해서에서 걸어가는가 어쨌든 멀리서 그렇게 몇 달을
얼음밭, 눈밭, 그 험한 산을 셋은 절하고 한 사람은 수레에다 먹고 자고 할 거 실어서 끌고 가고,
네 사람이 한 조가 돼 가지고 그렇게 가는 거, 본래 KBS에서 찍었는데
우리 불교 TV에도 그것을 방영을 했죠. 그것을 보고 나서 느낀 게 커요.
그 세 사람이 그렇게 포탈라 궁까지 다 가 가지고 거기 가서 또 십만 배인가 하는 거야.
그러니까 제자리에서 그 평평한 땅에서 십만 배는 누워서 떡먹기야.
그 가파른 길, 자갈길, 바위길 그리고 얼음과 눈이 쌓여있는 그 길을 일보일배한 것에 비하면
평평한 땅이 됐든 시멘트 바닥이 됐든지간에 거기서 십만 배 하는 거는 아무 것도 아니야.
거기 가서 십만 배를 하고는 마지막에 모두 어디로 가느냐.
한 사람은 중이 되고 한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고 한 사람은 동충하초 캐러간다.
집이 가난하니까 돈을 좀 벌어가서 먹고 살려고 동충하초 캐러 간다. 거기에 法門 다 된 거야.
이게 사람의 삶이다, 사람이 사는 일이다,
그 삶에다가 부처라고 이름을 붙이든 무슨보살이라고 이름을 붙이든
기도라고 이름을 붙이든 용맹정진이라고 이름을 붙이든 일보일배라고 이름을 붙이든
그건 다 사람이 사는 모습일 뿐이다. 사람이 사는 거. 동충하초
캐러 간다니까.
몇 달 걸려서 그 어려운 일보일배를 하면서
포탈라 궁까지 가서 또 십만 배를 그렇게 하고 나서...
그 사람들이 生覺하는 成佛이여, 成佛의 境地라.
平生所願 거의 다 이룬 거예요.
티벳 사람들은 그것이 平生 第一 큰 所願이니까.
성불하고 싶어 하는 사람 성불하듯이 그것이 제일 큰 소원인데 큰 소원 다 이루었다 이거여.
이루고 나서 뭐하느냐? 다시
出家해서 스님이 된 사람은 남아 있고 한 사람은 동충하초 캐러 간다.
참 그런 데서 내가 느낌이 아주 많았고 이러한 임제스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욱 確信을 갖게 된 것입니다.
- 해솔님이 올린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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