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없다(12)-하나임과 다양함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역설처럼 보입니다 나는 없다 / 바로보기
2013/08/17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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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임과 다양함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역설처럼 보입니다 |
이 工夫는 아주 微妙하지만 簡單한 것을 계속 가리킬 뿐입니다. 우리는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眞正 살아있지 않습니다. 앎이라는 死體를 더듬고 있지요. 스스로는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삶은 死體들 사이에 있습니다.
世上을 알아가기 始作하면서 우리는 점점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갔고, 이제는 이 패턴이 너무나 몸에 익어서 밝음이 무엇인지,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體感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工夫는 살아있는 삶으로 穩存하는 일입니다. 每瞬間 생생하게 깨어있는 의식으로 있으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죽은 삶을 살지말라고 일깨우고 있습니다.
드러나는 境界들 現象들이 實在한다고 믿고 그 믿음의 바탕 위에 虛想의 집을 짓고, 差異와 差別 속에서 衝突합니다. 드러나는 因緣과 精神的 나태함이 結合하여 沙上樓閣의 世界를 眞實이라 믿고 混沌과 不安과 執着과 회피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꿈 같은 현실인 꿈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執着하고 苦痛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지요? 꿈은 결코 끝나는 法이 없습니다. 다만 꿈이 꿈임을 깨달을 수는 있지요. 지금 현실로 펼쳐지고 있는 일이 모두 꿈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꿈임을 알면 그게 무슨 꿈이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한바탕 요란한 꿈에 지나지않으니까요. 꿈에서 깨어난다고 말은 하지만, 깨달았다고 꿈이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家族과 살아야 하고 일터로 나가야 하고 自身의 役割을 해야하지만, 어떠한 것도 實다운 게 없어서 일을 하되 하는 일이 없고, 살아가되 삶이 따로 存在하지 않습니다. 죽은 시체들과 어우러져 살지만 그게 죽은 것임을 잘 알기에 그것을 결코 두려워하거나 執着하지 않습니다. (모양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이미 時間의 産物이고 그것으로서 自性이 없는 것이기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움직이고 있는 죽음들을 보십시오!)
<般若心經>에 나오지요. '無老死亦無老死盡' 늙어 죽음도 없지만 늙어죽음이 다함도 없다. 늙어 죽되 늙어 죽음이 아닌 것이지요. 모양으로는 늙어 죽음으로 드러나지만, 그러한 것들이 實在하는 게 아니지요. 差異와 差別로 드러나지만 差異와 差別이 實在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온통 하나의 참나일 뿐입니다.
자, 그러면 무엇이 꿈속에서 꿈인 줄 아는 일일까요? 어떻게 해야 앎의 死體들 속에서 생생히 깨어있을까요? 어떤 것이 늙어 죽음도 없고 늙어 죽음이 다함도 없는 것일까요?
살아있다면 지금 살아있는 것입니다. 過去와 未來에 살아있을 수는 없지요. '살아있다' 할 때 分明 이것 自體로도 살아있음을 證明하고 있습니다. '살아있음'의 뜻을 取하여 그 속으로 빨려들지 않는다면요. '살아있음' 아니, 그냥 '살'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게 살아있음입니다. 기미만 드러나도 살아있음의 자리지요. 살아있음을 찾으려고 애쓰지 마세요. 이미 살아있으니까요. 그냥 '살' 할 때 살아있음이 確認되지 않나요?
"에이, 이것도 다 生覺이지 않아요? 確認도 生覺이 아니면 不可能하잖아요?" 당신은 당신의 살아있음을 누구에게, 특히 自身에게조차 說明할 필요도, 證明할 의무도 없습니다. 그냥 살아있음에 있는 것이지요. 정말 이게 確認인가? 이게 맞나? 하는 게 바로 死體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거예요. 그냥 늘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살아있는 자리. 늘 생생히 깨어있는 자리. 쉴새없이 나고 사라지는 자리. 지금 여기에 있는 게 確認이자 살아있음 自體이지요.
그러니 살아있음 自體이면 무슨 말을 해도 살아있음이지요. 疑問이 들어도 그것이고 神通한 答辨이 떠올라도 그것이지 다른 일이 일어난 게 아닌 거예요. 모든 것이 꿈속의 일처럼 일어나지만 일어나는 여기에 있으면 모든 것이 그냥 꿈일 뿐인 것이지요.
"差異들은 아주 明白히 드러나는 反面 하나임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임과 다양함many-ness이 同時에 존재한다는 事實은 逆說처럼 보입니다. 이 역설을 넘어서는 길은 差異가 반드시 分離를 뜻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둘은 다르지만 分離된 것은 아닙니다. "
따로 따로 分別해서 보는 것에 익숙한 우리는 '하나임과 다양함'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앎은 分離를 前提로 하고 分離된 것들 各各의 뜻을 擔保해야 成立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임과 다양함'이 하나라고 하면 말은 되지만 뜻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이면서 다양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이 工夫는 理解 次元, 앎 次元의 工夫가 아닙니다. 즉각즉각 '지금 여기'에 參與하는 일이지요.
무엇이 하나이면서 다양한 것인가요? "아침 산바람이 제법 시원합니다."
무엇이 하나이면서 다양한 것인가요? "그래도 낮더위는 여전합니다."
드러나는 現象은 가지각색입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하나일 뿐입니다. 바로 즉각즉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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