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발심 사홍서원

장백산-1 2014. 11. 13. 00:38

 

 

 

법상스님의 천수경 강의 제16강 - 발사홍서원|영상법문 녹취록

 

오늘 이제 發四弘誓願 부분입니다.

앞에 열가지 서원을 했고 마지막으로 총결 부분으로써 

총원을 마지막으로 네가지 큰 사홍서원을 말하는 겁니다.

네가지 넓고 광대한 서원 그래서 보통 우리가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 발원을 해야한다.

 

발사홍서원이 발원을 하는 겁니다.

발원을 하는데 네가지로 발원을 한다.

보살들은 또는 대승불교의 많은 수행자들이 우리 누구나 모든 사람들은

네가지 보편적으로 총괄적인 어떤 원력을 세워야한다. 하는

 

이 네가지 원력만 세워도 이 안에 모든 원력들이 다 포함되어 있죠.

원력을 세울 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개인적인 기도와 원력이 다른 점이

기도도 내가 바라는 거고 원하는 거거든요. 마음을 바라는 거예요.

 

불교는 마음법이라잖아요. 마음법 마음공부 이럽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말하는 一切唯心造 이렇게 한다 말이예요.

보통 일체유심조는 두가지 意味가 있을 수 있어요.

 

첫번째는 일체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 이렇게 한다 말이죠.

법구경에서도 법구경 첫번째 게송에 모든 것은 마음을 따라간다.

마음 나는 것에 달려있다. 얘기를 하는데

 

그 마음에는 두가지가 있단 말이죠.

 

첫번째는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원하는 게 있거나 바라는 게 있거나

그럴 때도 마음을 내면 그게 이루어 진다 하는 얘기입니다.

요즘에는 시크릿 같은데서 하는 얘기 하듯이 또는 초기 불교 아함경이나 그런데서 얘기하듯이

혹은 십선업을 지어라. 복덕을 많이 닦아라.불교에서 많은 설법을 하는 것이 전부다 이렇게

현상적인 차원에서 출세간적인 차원이 아니라  세간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느냐 이런 부분에서도 마음을 내면, 마음을 내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어떻게 마음을 내느냐 십선업을 짓고 악업을 짓지 않고 오계를 실천하고 그렇게 얘기를 했단 말이죠.

그러면 업을 어떻게 하면 업을 잘 지을 수 있는지. 그렇게 해서 내가 부자가 되고

세속적인 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한가지 설해 주는 것도 이제 마음인데요.

 

또 한가지 제가 강조했던 것이 出世間, 출세간의 원력을 세우고

내가 깨닫겠다는 하는 원력을 세울 때, 이 또한 일체유심조의 도리가 적용이 된다.

깨닫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修行을 하고 念佛을 하고 뭐를 하고 뭐를 하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가장 重要한 核心은 깨닫기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음을 내는 것 發心하는 것, 發心하는 것 

마음을 내서 내가 깨닫겠다 하는 이게 出世間의 發心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한번 깨달음을 얻겠다. 하는 발심을 내는것

그것 또한 마음을 탁 강하게 내면 강하게 발심만 하면

宇宙法界가 알아서 깨달음을 가져다 준다는 말이예요.

 

옛날부터 성인들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錯覺하는 것이 내가 깨달음을 찾아간다고 生覺 해서

修行이라는 어떤 原因을 지으면 結果인 깨달음이 올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錯覺했다는 거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깨달음은 내가 찾아가는 게 아니다. 깨달음이 나에게로 찾아온다.

이런 표현을 方便으로 썼는데요. 깨달음은 언제나 오고 있는 것이죠.

언제나 오고 있는데 내가 마음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깨달음이 나에게 오지 않았던 것이죠.

보이지 않았던 거죠. 깨달음은 언제나 딱 있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에 불과하죠.

 

그런데 내가 發心을 하게 될 때 간절히 간절히 내가 참성품을 봐야 되는데,

부처를 봐야 하는데 하고 간절히 발심을 하게 될 때 그 간절한 발심이 무르익고 무르익어서

그 간절함이 탁 그 法界를 그냥 내가 그동안 내가 만들어 왔던 虛妄한 妄想 分別로 가려왔던

이 꺼풀같은 것, 법계를 가려왔던 것을 탁 깨주는 순간이 온다는 거죠.

 

그래서 그냥 간절한 발심을 하면 간절한 발심을 통해서

내가 性稟이 안보이던 것이 그대로 다시 보이게 되는 우리도 그런게 많잖습니까?

안보이는데 평소에 안보이는데 마음하나 달리 먹었는데 갑자기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다가 어느날 부터 그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그러니까 지금은 성품을 그 깨달음의 성품이 부처가 지금 내 앞에 없었던 게 아니라

우리가 妄想 피우느라고 부처를 못 봤다고 말씀을 드렸죠.

 

이제 이런 비유가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예를 들어 제가 요즘에 목이 좀 안 좋잖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방송 녹화하러 갔더니 피디분이 목에 목캔디 같은 거 하나 주면서 방송 시작하기 직전에 요걸 먹고 하면

좀 괜찮을 거다 해서 먹어보고 한두번씩 이렇게 사탕을 최근에 먹어 봤는데

 

그 사탕을 먹으면서 딱 느낀 게 깨달음도 이와같을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사탕을 입에 넣고 이렇게 사탕의 맛을 보잖습니까?

그런데 사탕을 입에 분명히 넣었는데 처음에 사탕을 딱 먹었을 때는

아 허브향이 나는구나. 좋구나. 하고 음미하겠죠. 아 사탕맛이 이렇구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두번 세번 사탕을 먹고 나면 이미 아는 맛이잖아요?

그러니까 사탕을 입에 넣고 분명히 사탕은 먹고 있습니다. 사탕맛을 보고 있어요.

 

사탕맛을 보고 있는데 내가 딴 생각을 할 때는 사탕을 언제 먹었지도 모르고

사탕이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딴 거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른 거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사탕을 먹는지 안 먹는지 사탕을 분명히 입에 있는데 모르고 사라진다 말이죠. 이것과 똑같다 말이죠.

 

깨달음이 없어서 우리가 안보이는 게 아니라 내가 망상을 피우고 있을 때는

딴 거에 집중하고 있을 때 딴 생각에 집중하고 있을 때 이때는 사탕을 먹고 있지만 사탕맛을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딴거 하고 있느라고 사탕맛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사탕맛을 보려면 따로 내가 뭐 억지로 뭔가를 해야 되는 게 아니잖아요?

억지로 수행을 해야지 사탕맛을 보는 게 아니고

 

한 생각 딱 돌이켜서 망상을 하던 딴 데 막 집중하던 생각을 딱 돌이켜서 여기에 딱 집중하면

사탕맛을 알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언제나 사탕을 입에 물고 있으면서 사탕을 찾고 있었단 말이죠. ......... ?

 

그와 같은데 깨달음도 그와 같은데 깨달음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느냐

이게 修行法을 通해서 얻는 게 아니라 信心 또는 發心을 通해서

그러니까 법회할 때, 법회할 때 항상 반드시 들어가는 절차가 三歸依하고 四弘誓願이잖아요

법회 마지막에 항상 하는 게 사홍서원이잖아요 원력을 세우는.

법회하는 데 있어서 무조건 참선하는 거 아니잖아요

사홍서원은 恒常 하잖아요. 第一 重要하기 때문에. 第一 重要하기 때문에.

 

네가지 서원중에 첫번째 중요한 게 뭐냐면? 얘기하다 말았는데 기도를 하는 것과 발심하는 게 다른 점이

기도는 개인적인 원하는 거를 바라는 거고  원력은 원력속에 이타적인 마음이 들었을 때 원력이

그래서 이타적인 나혼자 깨닫겠다 아니라, 모두 함께  이타적인 원력이 들어가 있는 걸 원력이라고

 

그래서 사홍서원에서 첫번째 원력이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遍誓願度)

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겠다.

내가 발심을 하는 이유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나혼자 잘먹고 잘살겠다.

내가 한번 깨달아서 대단한 깨달은 자가 되어 봐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수행을 천날 만날 해봐야 그 이기적인 마음 조금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해도

공부를 해도 발심이 ? 발심이 가장 중요한 ?

 

그래서 내가 깨달음을 얻고 수행을 통해서 불교 공부를 통해서

이타적으로 일체 중생을 내가 구제 하겠다라는 그런 어떤 동체대비의 발심

그 발심이 먼저 되야지만 이것이 발원으로써의 어떤 요소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첫번째가 중생무변서원도 중생을 구제하겠다 하는 마음으로 수행도 하고

절에 와서 공부도 하고 하는거란 말이죠. 이걸 잘 원력을 세워야됩니다.

내가 좀 행복해 보겠다. 이런 마음이 아니고 이타적인 발심이 근원적인 원력이 되야한다.

 

두번째가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塵誓願斷)

번뇌가 무진하게 끊임 없지만 다 끊겠다.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라는 원력을 딱 세워서

내가 불도를 공부한다 말이예요. 불도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첫번째 와야 되는 것

제가 누차 말씀 드리는데 가장 첫번째로 와야 되는 게 번뇌를 끊겠다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원래 부처님 행위가 드러나 있는데 내가 번뇌 망상을 피우느라 부처를 못보고 있는 거니까

번뇌 때문에 부처가 부처로써 보이지가 않고 내가 중생이였던 이유가 이 하나 번뇌 때문에 그런다 말이죠.

 

번뇌가 생각으로 만들어 내는 번뇌? 그래서 번뇌가 일어나는 이유는 말씀드린 것처럼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심,

두가지 분별심, 중도에서 어긋나는 두가지 분별심에서 ? 그래서 번뇌 망상을 끊임없이...?

 

두번째 원력을 세우는 것이 번뇌를 다 끊겠다 하는 번뇌가 아무리 많이 튀어 나와도 번뇌가 무지 많아도 하루에

6만가지가 생각이 일어난다고 6만가지 번뇌가 일어난다.얼마나 번뇌 속에 싸여 있습니까? 그 번뇌를 보면서.........?

이런 원력을 세워야한다 말이죠. 이런 발원을 딱 세우면 번뇌가 끊어진다말이예요.....?

 

하나하나 전부 다 없애 번뇌를 하나하나 다 끊어 없애는 건 어렵다 말이예요.

그런데 원력을 세우면 발원을 세우면 발원의 힘이 나를 이끌고 가니

이 번뇌가 번뇌 망상이 나를 이끌고 가던 삶의 패턴이 발원의 힘으로

나를 끌고 가는 동시에 모든 게 한방에 끝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말이예요.

 

왜 가능한가면 그런 일이 있어요.

平常時에 내가 살아 가는 삶의 原動力이 我相을 增張하는 것,

내가 부자가 되는 것, 고등학생은 뭐겠어요. 시험 잘보는거 있죠, 대학교 가는 것, 공부 잘 하는 것,

수험생 부모님은 내 자식 시험 잘 보는 거겠죠. 남편들은 진급하는 것, 돈 버는 것 이런 거겠죠.

그것이 크게 봤을 때 아상을 확장하는 건데,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我相 擴張이 내 人生의 가장 根源的인 原動力이 되어 삶을 살았단 말이죠.

그런데 이거는 할 수 있거든요. 뭘 할 수 있느냐면 이거 마음 공부를 계속 하다보면 발심을 계속 해서 내다보면,

어느 순간 세상에서 내가 지금까지 목숨 걸고 살아왔던 돈, 명예, 자식, 권력, 시험, 성적 이게 시들해 지는...?

 

발심이 강해지기 시작하면 내가 깨달음을 이루어봐야 하겠다 하는 게

지금 간절해 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꾸준히 법당나오고 공부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 순간 발심이 불같이 확 달아오를 때가 있단 말이죠. 정말 이것이 내가 해야 되는 길이구나.

이런 마음이 딱 나기 시작하면요. 世上 그 무엇을 갖다 줘도 별 關心이 없어요.

 

돈도 벌고 자식 뒷바라지도 하고 일도 하고 열심히 세상일은 하죠.

일이 주워진 것은 열심히 하지만 그 일을 하면서도 그것도 최선을 다 하지만

하루 종일 끊어지지 않는 發心이 끊어지지 않는 내가 이것을 알아야 되겠다.

내가 발심을 이걸 내가 정말 잊으면 안된다하고 잊으면 안된다가 아니고, 그냥 저절로 意團獨露해서

내가 누군가를 깨달아야 되는데, 그걸 억지로 의심을 해라. 억지로 간화선의 화두를 줘서 의심하게 만든다.

억지로 해서 잘 안된다 말이죠.

 

어느 순간 발심을 계속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발심이 확 뜨거워져서

내가 그래 이것이 무엇인지를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야 말겠다. 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만 뜨면 그것만 딱 그 의심 그 답답함. 그 의심만 있는 거예요.

뭘 해도 딴 일을 그대로 하더라도 틈만 나면 그 뭔가 모를 이걸 내가 풀어야 되는데 숙제같은 어떤 일을 열심히

계속해서 내 안에 날 내 인생에 하루하루 원동력 그런데 의심을 동반하는 거 외에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딱 바뀌는 순간이 있단 말이죠.

 

그렇게 되면 내 삶을 끌 움직이게 하는 原動力이 我相에서 이제 發心으로 바꿔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그것이 무르익고 무르익고 했을 때 어느 순간

이 번뇌를 탁 깨부셔 없애야 되는게 아니라 어느 한 생각 번뇌가 탁 없어지는 그 순간이 온다는 거죠.

그게 견성의 순간이라고 하는거죠.

그래서 두번째 우리들이 세워야 되는 원력은  바로 이 번뇌를 내가 끊겠다라는 원력을 세우는 겁니다.

 

세번째가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이 무량할지라도 법문을 내가 다 배우겠다.법문을 들어야지 분별이 끊어질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인류 역사를 보더라도 혼자서 그냥 깨달은 경우는 아예 없지는 않지만 아주 극히 드문 경우죠.

 

그런데 몇몇 극히 드문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그들 또한 이생에 그냥 갑자기

그렇게 혼자 잘나서 탁 깨달은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죠.

전생부터 닦아오고 닦아오니까 이생에 혼자서 탁 깨달을 수 있는 시절인연을 만날 수 있죠.

 

대부분의 경우는 스승이 없으면 불가능에 가깝죠. 불교경전을 스승으로 삼든 혼자 탁 깨달은 스님들을 보면

혼자 깨달았다기 보다는 경전을 그만큼 꾸준히 공부했고, 그래서 공부할 때 스승을 딱 내가 찾는 것이 공부의

가장 빠른 방법이다. 또 法을 의지해 가지고 가는 것이 또 다른 방법입니다. 自燈明, 法燈明 하는 것, 그렇게 해서

법문이 무량하게 많지만 이 법을 가르쳐 주는 법문은 무량하게 많습니다. 정말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해보면

이렇게 많은 선지식 이렇게 많은 부처님께서 이렇게 지혜가 뭐라는 것을 탁 보여주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그 眞理를 딱 직바로 보여주는 가르침일수록 중생들은 바로 모르고 재미가 없고 관심도 없고 그렇게 여긴다 말이죠.

 

그런데 마음이 딱 發心이 마음이 탁 하나가 되어서 이거 공부에 대한 눈을 탁 뜨게 되면

그 경전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하죠. 정말 이렇게 우리의 공부를 가르켜줬던 이 놀라운 가르침들이

옛날에 삼장법사가 그 어렵고 어려운 길을 거치고 거쳐가지고 인도까지 가서 경전하나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그 위험한 길을 찾아간 이유가 있더라구요. 眞理를 탁 깨달은, 깨달은 분들이 써놓은 그 경전의 말씀을 내가

탁 구할 수 있다는 게 누군들 찾아가지 않겠습니까.

 

발심을 하면 그 원동력이 된다 말이죠.

그래서 법문은 무량하지만 이 정말 제대로 된 법문을 이런 지식만 늘리는 그런 법문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 법문 경전 이런 법문들은 그야말로 나를 깨달음에 귀의할 수 있는 법문이란 말이죠.

그래서 법문이 무량하더라도 이것을 내가 다 왜 배우느냐 알음알이를 늘리겠다가 아니라,

알음알이를 하나하나 깨주는 게 법문의 역할입니다.

 

이 번뇌가 무량, 무진하지만 번뇌 이 많은 거 하나하나 깨주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知識을 늘리는 것이 法門이 아니고 그건 知識이죠.

법문은 수많은 지식과 번뇌를 깨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고

그래서 법문은 많지만 내가 공부하겠다라는 원력을 세우는 겁니다.

 

그 다음에 불도무상서원성(成)

불도라는 것이 이제 부처님법 진리 내가 부처가 되겠다. 하는 것을 얘기하죠.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높다 한들 무상 아무리 더 높은 것이 없는 최고의 높다 한들

내가 이 높은 곳을 부처님도 석가모니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었는데,

조사 스님들도 다 깨달음을 얻었는데, 나는 왜 못 깨닫겠느냐. 우리는 그 생각을 하거든요.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었죠. ? 나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말이죠.

절대 우리가 뭐랄까 우리가 삼가야 될 어리석음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나 나나 그 佛性에서는 本性에서는 하나 다를 게 없다 말이죠.

그 우리의 존귀한 우리의 위대한 우리의 그 어떤 아름다운 본래 성품의 그 장엄한 이런 것들은

한치도 요만큼도 부처님에 대해서 보다 작지 않다 말이죠.

 

내 스스로 단 하나 차이점이 뭐냐하면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어서 스스로 부처라고 하지만,

우리는 내 스스로 부처인데 내스스로 나는 부처가 아니고  나는 못난 놈이고 나는 부처님과 비교 할 수가 없다.

어떻게 나와 부처를 비교할 수가 있나 나는 못난 사람이고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라고 스스로 규정 지은 게 나고,

그 스스로 규정 짓지 않은 분이 부처고 조사인 거 뿐이다. 나와 부처 조사는 하나도 다를 게 없단 말이죠.

 

우리가 지금까지 妄想을 피운거예요. 나는 불도를 이룰 수 없다. 나는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나는 열시간 스무시간 참선도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깨닫겠느냐 그거는 ? 아니라고 말씀드렸죠.

제가 말씀드린게 아니고 역대 조사스님들이 다 그랬다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뭐하나 뒤질 게 없습니다. 조사스님이나 부처님보다 뭐하나 뒤질 게 없어요.

부처님은 6년 고행을 했는데 나는 6년 고행을 못하는데 6년 고행을

석가모니부처님이 쉽게 말해서 심하게 얘기하면 좋게 얘기하면 과정이였지만, 심하게 얘기하면 헛고생이였다고

스스로 얘기 하시잖아요. 스스로, 자기가 잘못된 거 였구나. 내가 돌고 돌고 돌아가지고 내가 바른법으로 왔구나.

부처님이 6년 고행이라는 거는 ? 禪定主義도 갔었고, 苦行主義도 갔었고, 혼자서도 苦行을 하고 그랬단 말이죠.

 

그 당시에 있는 수없이 많은 修行法은 다 해봤단 말이예요. 그런데 결국 딱 우유죽을 받아 먹었다는 거는 뭐예요.

그동안 세상이 가르쳐 준 것은 다 가짜였구나. 진짜가 아니였구나라는 거를  누가 가르쳐 줄 사람이 없잖아요.

깨달은 사람이 없으니까, 그 때는 그러니까 석가모니부처님이 6년을 돌아온 겁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직접 실천해 보고 탁 가르쳐 줬으니까, 6년을 허비할 필요가 없어요.

 

다시말해서 우리는 6년 걸려서 고행주의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다 말이예요.

즉 우리도 부처님처럼 막 선방에 가서 몇달을 있어야 되고, 고행을 해야되고, 참선을 몇시간 동안 해야되고

이런 고행주의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다 말이예요. 삼천배 해야되고 이런 고행주의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어요.

부처님은 그건 하지 말라고 탁 답을 줬는데 지금도 한국불교는 고행주의에 빠져 있어요.

그것이 수행인거 마냥,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때요. 나는 기존에는 옛날에는 나는 저렇게 치열하게 수행을 하지 못하니까, 나는 참 부처가 되기 힘들겠다. 이렇게 생각했단 말이예요. 그거는 아니라는 것을 석가모니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다 얘기했단 말이예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부처님법을 딱 공부해보니까, 내가 부처님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다만 나는 몰랐는데 나는 안돼 하는 생각이 있는 거고, 부처님은 그런 생각이 없던 분이고

 

그러니까 이런 망상만 피우지 않으면 이자리에서 불도를 깨칠 수 있단 말이예요. 여러분들도.

여기 계신 분들도 깨칠 수 있단 말이죠. 이생에서도 가능하다 말이예요.

이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건 몇생 세세생생 가도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어요.

내가 지금 한 생각을 딱 내서 반드시 가능하다. 이생에 내가 깨닫겠다. 어떻게 압니까

제가 멀지 않아 딱 부처가 돼서 아니면 우리중에 누군가가 딱 부처가 돼서 

부처가 된다는 말은 탁 깨달음을 얻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의 그 자리에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부처님과 같이 걸림없는

탁월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누군가가 나타나면 좋지 않을까요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뭐냐면 사실은 그런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단 말이죠. 있단 말이죠.

내가 발심이 부족하니까 안 보일 뿐이지. 발심이 부족하니까,그러니까 발심을 딱 내게 되면

내가 그런 인연을 만나게 된다. 내 도반중에 누군가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그런 인연을 만나서 나도 이생에 같이 깨달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이건 뭐에 따르냐면 發心의 有無입니다. 발심의 유무, 이렇게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제가 도반 하나가 있는데 저도 저 스스로 발심을 딱 했기 때문에 그래 끝장을 보자!! 이생에 끝장을 보자!!

이번 생에 딱 내가 결말을 보겠다. 다음생까지 가지 않겠다. 이런 저안에서 확실한 원력을 세웠기 때문에

저는 확신을 지금까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 확고부동한 분명한 내가 이런 발심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발심이 있으니까 발심이 딱 끝나는 그 자리가 되었을 때 부처님도 제일 먼저 누구를 찾아 갔어요?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을 찾아 가지 않습니까? 제가 나중에 모르죠. 나중에 공부하던 분들에게 야 진짜 부처가 되자. 할지. 또 제가 아니고 여러분중의 누군가가 될지. 알 수가 없단 말이예요.

 

여러분 속으로 아이 스님은 그럴 수 있겠죠. 우리는 아니죠. 내가 어떻게 부처가 되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바로

망상이다. 여러분들이 깨달음을 딱 얻으시면 저를 구제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웃으시는 것 자체가 벌써 망상을 피우고 있다는 얘기죠. 나는 아니다. 이분법이거든요. 둘로 나누는,

스님은 가능한데 저는 안됩니다. 부처님은 가능했고 저는 안됩니다. 그런 얘기를 하면 비웃는다 말이예요.

저는 어떻게 되냐고. 지금처럼. 그게 지금까지 망상피웠던 거. 그걸 없애라는 겁니다.

 

가능하다. 불도무상서원성 불도가 아무리 무상 높을 상자입니다.

불도가 아무리 위에 있든 아무리 높은들 내가 성취하겠다. 이러한 발원이 있어야합니다.

아이 대장부가 대장부는 남자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대장부. 대장부가 수행자가

그 정도의 발심이 없어서 어떻게 절에 나옵니까 그 정도의 배짱이 없어서 어떻게 이 공부를 하겠어요.

 

되고 안되고는 그 때 문제고 그러다 안되면 말고죠. 이생에서 깨닫겠다 했는데 안되면 그만이고,

그러나 발심을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은 엄청 차이가 납니다.

 

여기서 달나라를 우주선 타고 출발을 했어요. 나는 發心을 했고 이 사람은 안 했어요.

여기서 별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달나라에 가서는 천차만별로 차이가 납니다.

5년후, 10년후의 여러분의 發心이 저절로 무르익는다 말이예요.

發心만 하면 發心이라는 씨앗만 심으면 발심을 한 사람은 비옥한 토양이

주변에 비옥한 토양을 저절로 宇宙法界가 만들어 줍니다. 토양까지 내가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發心만 세우면 됩니다. 目標를 딱 定하고 가겠다라는 發心만 내면 된다니까요.

나머지는 宇宙法界가 알아서 해줍니다. 왜? 우주법계는 발심한 사람을 딱 주목하니까,

이게 중요한 이야기예요. 내가 그걸 이루겠다.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루겠다는 발심만 강하게 세우면 우리는 그걸로 할 일 다 한거예요.

그런 나머지는 우주법계가 나를 돕기 시작한다 말이죠. 정말이예요.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서 나에게 딱 맞는 스승을 보내주고, 딱 맞는 책을 보내주고 딱 맞는 법문을 보내주고

딱 맞는 도반들을 보내주고 ? 발심밖에 없고 나머지는 법계에 맡기면 법계게 알아서 해준다.

 

그래서 불도가 아직까지 아무리 높아도 석가모니부처님도 했는데 나는 왜 못하나.

역대 조사스님이 했으면 나는 왜 못하나 할수 있다. 하고 공부를 해야지만 이렇게 해도 될까 말까인데

나는 안되지 하고 마음을 내면 할 수가 없겠죠. 發心을 해 주시기를 바라는 뜻으로

그런데 發心을 하는 것은 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