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邊身菩薩이란 곧 如來이기 때문에 응당 보지 못한다.]
모든 불보살의 명호에는 그 뜻에 따라 지어진 명호일 것이다
無邊身이란 어느 쪽이든
有無 高低 長短의 한 변에 떨어짐이 없는 보살이란 뜻이다.
그러니 양변(兩邊)을 벗어나 一味平等한 境地를 일러 여여(如如)한 境地 즉 如來라는 것이니
無邊身菩薩이면 이미 如來인데 如來가 어찌 如來의 정수리를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이어가신다.
[다만 너희에게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부처라는 변견(邊見)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중생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중생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있다[有]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있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없다[無]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없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범부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범부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나아가
성인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성인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만 모든 견해만 없으면 그대로가 곧 가이 없는 몸[無邊身]이니라.]
부처라는 견해에 도 중생이라는 견해에도 있다는 견해에도
없다는 견해에도 범부라는 견해에도 어떤 견해를 일체 짖지 않아서
변견에 떨어지지 말아야 하며 나아가
성인이라는 견해마져 짓지 않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양변을 떠나 平等性智에 이르러야 만이
그대로가 곧 가이 없는 몸인 무변신(無邊身)이며 곧 如來라고 하신다.
[그러나 무엇인가 보는 곳이 있으면 곧 외도라고 부른다.
外道란 모든 見解를 즐기고 菩薩은 모든 見解에 있어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如來란 곧 모든 法이 여여(如如)하다는 뜻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미륵도 또한 그러하고 모든 성현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무엇인가 보는 곳이 있으면이란 兩邊이며 差別相이고 分別心인 것이다.
그래서 작위(作爲)가 있으면 바로 外道라고 하시면서
外道란 작위와 견해를 즐기고
菩薩은 모든 작위와 견해에 흔들리지 않고
如來란 法에 如如하여 있는 그대로이며
과거현재 미래의 모든 성현과 미륵부처도 다 그 如如함으로
그 어떤 作爲와 指向이 없음을 일러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如如하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다.
如來의 정수리는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뚜렷이 보는 것도 없으므로,
뚜렷하다는 邊見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 몸은 텅~빈 虛空으로 하염 없으신 것이다.
숫자로써 헤아리는 범주에 속하지도 않지만,
다만 方便으로 虛空에 비유할 뿐이니라.]
如如는 원래 그렇게 恒常함으로 生死가 없으며 差別과 分別이 없다.
어떠한 邊見에 떨어짐도 없고 常住不滅한 것이니 부처님 몸도 하염이 없으신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方便으로 虛空에 비유할 뿐인 것이지 허공이라 하면 또한 허공이란 邊에 떨어진다.
그러니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일 뿐인 것이다.
[' 如來는 圓滿하기가 太虛空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며' 한가로이 일삼을 것이 없다.
다른 경계를 억지로 끌어들여 설명하려 하지 말 것이니,
설명하려 들면 벌써 식[識]이 이뤄지고 만다.]
如來는 원래 그렇게 되어있었고 과거현재 미래를 상통하여 항일한 것이며,
변하거나 멸하지도 않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니 ‘원만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며' 한가로이 일삼을 것이 없다라고 하시어
무위(無爲)이며 무작(無作)인 것이다
그럼으로 이 如來를 설명하려고 어떤 名稱이나 槪念이나 比維를 들어도
다 그것은 아닌 것이며 설명하려고 한다면 이미 식심(識心)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은 意識의 바다에 잠겨서 나부끼는 쑥대처럼 흘러 도네'라고 하였다.]
그럼으로 이 如如를 일러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한다고 하시면서
圓成實性이란 原來의 佛性이며, 텅~빈 바탕 마음의 體를 일러 하는 말인 것이다.
이 圓成實性인 體는 意識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가운데 함께 하면서도 들어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意識도 아님을 들어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저 말하기를
'나는 알았으며 배워서 얻었으며, 깨달았으며, 해탈하였으며, 도의 이치를 얻었노라'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강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지만 약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질 않는다면
이런 견해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그러니 이 如如는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요 깨달아서 아는 것도 아니며 벗어나서 되는 것도 아니니
스스로 미혹하여 알았다느니 얻었다느니 도의 이치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전부 하나같이 識心의 意識에서 하는 소리이지
如來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말일 뿐인 것이니,
어찌 이것이 어디에 쓸모가 있을 것이며
더욱이 生死를 벗어나는 境地에 있어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신다.
깊이 思惟해야 할 것이로다.
[내 너에게 말하노니, 한가하여 스스로 일 없도록 하여 쓸데없이 마음을 쓰지 말라.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나니, 오직 모든 견해를 쉴지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정연히 일러주신다.
어떤 마음이던 견해를 지으면 다 작위와 지향이 있는 것이니,
오직 모든 見解를 쉬는 것이 곧 修道이며 修行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안으로 봄[內見]과 밖으로 봄[外見]이 모두 잘못이며
부처의 道와 마구니의 道가 모두 나쁜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문수보살이 잠깐 두 見解를 일으켰다가
그만 두 철위산 地獄으로 떨어진 것이다.]
안으로 보는 것이나 밖으로 보는 것이나 다 作爲와 指向일 것이다.
그러니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나
마구니의 도가 다른 것이 아니라 다 작위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마음이던 무엇이든 指向하는 바가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며.
문수보살은 지혜의 상징인 보살이나 잠깐동안 중생을 구제하여야 한다거나
중생을 이끌어 지혜방편을 베풀어야 한다는 한 生覺을 일으키다
바로 地獄인 철위산으로 떨어진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니 무엇이던 함의 法은 다 虛妄한 것임을 일께우고 계신 것이다.
[문수보살은 참된 지혜의 상징이고 보현보살은 방편적인 지혜의 상징이다.
방편과 참됨이 서로서로 작용을 하여 끝내는 방편과 참됨 그것마저도 사라지고
오로지 한 마음뿐인 것이다.]
문수와 보현은 오직 報身佛과 化身佛인 것이다. 즉 마음의 作用이며, 功德藏인 것이다.
마음의 텅~빈 바탕 本體에서 본다면 마음의 作用과 功德藏은 다 結局은 虛妄함으로
돌아감으로 그 어떤 마음의 작용도 공덕장도 因緣法에 의하여 사라지고 마는 것임으로
오로지 한 마음만이 진실 여상하다고 하신다.
[마음은 결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닌데,
부처의 견해를 갖기만 하면 바로 중생의 견해를 내게 되느니라. ]
그러니 마음을 보고 부처라 하거나 중생이라 하거나
다 이것은 偏見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
텅~빈 바탕 마음 자체는 虛空性인데 어찌 이름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어떤 見解를 갖기만 하면, 작위가 되여 差別心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가리켜서 중생의 見解라고 하시는 것이다.
[있다는 견해[有見], 없다는 견해[無見],
영원불변하다는 견해[常見], 단멸한다는 견해[斷見]가 바로
두 철위산 지옥을 이룬다.]
그럼으로 있다는 견해나, 없다는 견해, 또는 永遠하다는 견해나,
아주 아무 것도 없어서 斷滅이라고 하는 견해 역시 다 편견이어서
이런 편견들이 모여 철위산 지옥을 이룬다고 하시면서, 어떤 견해를 짓던
다 地獄業을 짓는 것이라고 경계하신다.
[이처럼 견해와 장애를 받기 때문에 역대의 조사들께서
일체 중생의 본래 몸과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바로 가리키신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견해이든 내어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국집하고 집착하여
차별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안타까이 여기시어
본래 몸과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가리키신다고
정련해도 일러 주신다.
[이것은 닦아서 되는것도 아니고 점차적인 단계를 밟아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밝음이나 어두움에 속하지도 않아서, 밝음이 아니기 때문에 밝음도 없으며
어둠이 아니기 때문에 어두움도 없다.
그러므로 밝음 없음[無明]도 없으며 또한 밝음 없음이 다함[無明盡]도 없다.]
이 본래 마음인 本來心은 그 어떤 수행이나 점차적인 수도를 하여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렇게 밝아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차별적 분별심을 내지 않으면 지금 그대로의 마음인 것이며,
이것이 바로 부처인 것이다.
그 부처를 보고 밝다느니 어둡다는 말을 붙이면 그 형상이 되여 틀어 지는 것이다.
그 마음에는 밝음도 어둠도 어둠이 다함도 없다 라고 하시어 부처님께서
般若心經에서 무무명 역무무명진(無無明 亦無無明盡)이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말인 것이다.
[우리 선가의 종문에 들어와서는 누구든지 뜻을 간절하게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것을 이름하여 法이라 하고 法을 보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며,
부처와 法이 모두 함께 없는 것을 승(僧)이라 부르며, 하릴없는 중이라 부르며,
또한 한몸의 삼보[一 三 ]라 하느니라.]
그럼으로 선가의 종문에서는 간절함만을 원하며 이 간절함을 이름하여 法이라 하며
法을 보기 때문에 부처라고 한다고 하시면서 부처와 法이 모두 함께 없는 것을 僧이라 稱하며,
할 일 없는 무사인(無事人)을 일러 중이라 하며,
이 三寶를 통칭하여 '한 몸의 삼보(一三)'이라 한다고 하고 계신다.
[대저 法을 구하는 이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아서 마땅히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하느니라.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랄 것도 없으며,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이랄 것도 없으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승(僧)이랄 것도 없느니라."]
法은 구하는 자는 ,부처(佛)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나아가 대중이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여 구하지 말아서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래야만 부처에 집착하지 않음으로 부처(佛)랄 것도 없고,
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에 法이랄 것도 없고,
대중에게 집착하지 않기에 僧이랄 것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승(僧)이랄 것도 없다고 말슴하신다.
佛 法 僧 이 모두는 다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