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장백산-1 2014. 12. 3.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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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수불 스님의 완릉록 선해 〈21〉
2013년 11월 22일 (금) 22:03:10

수불 스님 webmaster@hyunbul.com

  
▲ 그림 박구원

마음은 모양이 없기에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마음은 본래 머문 바  없기 때문에,

보살이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수 있다.

 

마음이 湛然하게 자기 집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떠돌기 때문에, 육도윤회하며 생사를

거듭하고 있다.

 한 마음 사라지면, 온갖 境界도 없어진다.

 

 

만약 因緣에 應하지 않을 때에도 그 마음이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因緣에 好應할 때에도 마음은 또한 종적이 없다.

 

마음은 作用할 때나 作用하지 않을 때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없다고도할 수 없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있다고 할 根據는 없으며, 또한 그러면서도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서 온갖 作用을 다하고 있기에 없다고도 할 수 없다. 分明 마음의 作用은 있는데 몰종적(沒?跡)으로 흔적이 없으니,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마음은 우리가 顚倒夢想에서 깨어나기 前에는 아무리 그 理致를 알아들어도 마침내 소화가 안 되어 마냥 더부룩하기만 한데, 일단 疑心의 뭉치가 한 번 터져나가면 말이 필요 없이 그냥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직 공부가 안 된 입장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란 生覺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事實을 빨리 간파해야 한다. 이럴 때 學人은 “그러면 사구(四句)와 백비(百非), 모든 것을 否定한 立場을 여의고 한마디 일러주십시오.” 하고 묻게 된다. 눈 밝은 禪知識이라면 풀을 쳐서 뱀을 試驗해보듯이 타초경사(打草驚蛇) 하여 相對方을 看把한다. 진짜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인지, 아니면 교학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인지를 담박에 가려내는 것이다. 만약 진짜 약이 오른 뱀이라면, 급소를 찔러서 한 방에 탁 터져나가게 만들어준다. 만일 眞正 根本에 대한 疑心으로 꽉 차있는 學人이라면, 바로 터지든지 아니면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의단(疑團)이 더욱 뭉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열리는 奇緣이 찾아오는 것은 時間 問題다.

 

이미 이런 줄 알아서 ‘없음’ 가운데 머물러 쉴 수 있다면, 곧 모든 부처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있다 없다는 立場을 넘어선 ‘없음’ 가운데 머물러 쉬는 것이 곧 머무름이 없는 ‘무주(無住)’다. 諸佛菩薩께서는 언제나 이곳에 계신다. 그곳은 바로 눈앞에 환히 드러나 있지만, 無明에 눈이 가려진 사람은 눈 뜬 장님이 되어 妄想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눈 뜬 장님에게는 天地가 어둠 속이지만, 다만 눈만 떠버리면 선 자리가 그대로 開明天地의 淨土다. 눈을 떠서 잠에서 깨어나느냐, 아니면 잠속에서 계속 악몽에 시달리느냐는 선택을 진실 되게 받아들일 때, 공부의 發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經에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머문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셨다.

 <金剛經>에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菩薩이 菩提心을 發한 다음 그 마음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여쭈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셨다. 육조 혜능스님께서도 이 ‘應無所住而生其心’ 구절에서 몰록 깨치셨다. 알고 보면, 우리들의 마음은 本來 머문 바가 없다. 本來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에, 菩薩이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이다. 事實 本來 머무는 바 없는 이 마음에 契合하면 그만이지, 새삼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려고 애쓰는 것은 부처님이나 조사의 뜻에 어긋난다. 無爲法을 알아듣고, 萬事를 내려놓고 바보 천치가 되어 시간 보낼 줄 아는 것이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수 있는 바른 마음工夫길이다.

 

모든 衆生이 生死를 輪廻하는 것은, 意識이 因緣을 쫒아 造作하고 마음이 六途를 떠돌며 가만있지 못하기 때문이니, 마침내 갖가지 苦痛을 받게 되는 것이다. 유마거사가 이르기를, ‘敎化하기 힘든 사람은 그 마음이 원숭이 같아서, 몇 가지 法으로 그 마음을 制禦한 다음에 비로소 조복시킨다.’고 하였다.

 

마음이 憺然하게 自己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서 떠돌기 때문에, 六途 輪廻하며 生死를 거듭하고 있다. 境界를 攀緣하여 한 生覺을 일으키면, 그로 因해 生覺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 일어나서 훌쩍 歲月을 헛되이 보낸다. 돌아보면 아득히 日長春夢인데, 백발이 성성하니 북망산이 가까운 것이다. 밖으로 오랫동안 이렇게 떠돌던 사람의 마음은 원숭이 같아서 조금도 제 자리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계속 對相을 기웃거리며 執着하게 된다. 그럴 땐 方便을

써서 먼저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원숭이같은 마음을 다스린 다음에 비로소 마음을 조복시키고,

本來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本地風光에서 安心立命 하게끔 이끄는 것이다.

 

마음공부에 입문하여 조금이라도 체험을 맛본 사람도 業力에 의해 때때로 뒤집어지기는 매한가지다. 여기 배휴 재상도 황벽스님을 만나자마자 무언가 맛을 보았지만, 아직도 業力에 依해 원숭이처럼 疑心 많은 마음이 묻고 또 물으면서 마음이 다스려지기까지 禪知識 곁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歲月을 보냈던 것이다. 모든 衆生들의 本來 마음이 淸淨하여 完全한 것은 一切가 平等하여 差別이 있을 수 없지만, 집을 떠나 밖으로 떠돈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은 業力 따라 差等이 나기 때문에 스스로 疑心이 끊어질 때까지는 묵묵히 精進에 精進을 거듭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 나면 갖가지 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法이 사라진다.’고

말한 것이다.

 한 마음이 일어나니까, 그에 따라 온갖 境界가 펼쳐지는 法이다. 마찬가지로 한 마음이 사라지면, 그에 따라 온갖 境界도 없어지는 法이다. 그러나 無念無想을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外道가 된다. 無念無想을 만들려는 그 마음이 本來  無念無想을 가리고 마음을 밖으로 찾아 나서게 하여 平地風波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여튼 말귀를 잘 알아먹어야 한다. 菩提自性이 本來淸淨 하다고 하니, 그 말을 딱 믿고 모든 허튼 수고를 내려놓으면 저절로 根本이 드러날 텐데, 다만 마음이 원숭이같이 가만있지를 못하고 天地四方을 쏘다니면서 온갖 좋다는 法을 다 배워 속에 더부룩이 쑤셔 넣고 消化도 못시키고 알음알이만 加重시키니 故鄕 돌아갈 날은 더욱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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