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릉록 17-2 참된 성품의 마음자리[眞性心地藏] 완릉록 보설
◈ 완릉록 17-2 참된 성품의 마음자리[眞性心地藏]
[깨달음이란 수행을 빌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自己 마음을 알아서 本來 自己性稟을 보는 것이요,
결코 달리 구하지 말라. 어떻게 自己의 마음을 아는 것인가? 지금 말하는 그것이 바로 너의 마음이니라.
마음이 만약 말하지 않고 작용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本體는 虛空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또한 方位와 處所도 없다.
마음은 그렇다고 그저 한결같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마음은 있으면서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祖師스님께서는
'참된 性稟의 마음자리[眞性心地藏]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지라 因緣에 呼應하여 衆生을 敎化하나니,
方便으로 그것을 智慧라 부른다'고 하셨다. 만약 因緣에 呼應하지 않을 때라도 마음이 있고 없음을 말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바로 呼應할 때라도 또한 종적이 흔적이 없느니라. 이미 이런 줄 알았을진댄 '없음' 가운데 쉬어 깃든다면
곧 모든 부처님의 길을 가는 것이니라.]
********원오당 한소리********
모든 衆生이 부처(佛)라고 밝히고 나서,
그럼 모두가 다 부처이면 뭐 더 바랄것도 없고, 무엇을 해서도 佛道를 이룰 것도 없다는 말씀인가?
오히려 昏沈만 더할 뿐이다. 그래서 다시 깨달음에 대하여 설하신다.
깨달음이란? 마음의 本體를 말하는데, 마음의 體는 法身이라고도 말하고, 심지(心地)라고도 말하며,
참性稟이라고도 말하며, 또한 祖師님들이 庭前栢樹子 몰현금 삼서근 권시궐 등 무엇이라고 이름하든 모두 다
이 마음의 本體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이 法身인 마음의 本體를 體得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眞正 이 法身은 얻을 수도, 구할수도, 그 어떤 수행을 해서든 안해서든 갈 수 없는 곳이며, 느낄 수도 없다.
그러니 깨달음이라는 말은 있으나 깨달음을 이루었다 成佛했다 하는 말은 단지 말일 뿐 부처도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러니 '석가도 몰랐는데 가섭이 어찌 알랴' 말하듯이 아무도 간 사람이 없고 심지어 석존깨서도 般涅槃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며, 유여열반(有餘涅磐)의 상태에서 法을 說하셨다. 그리고 몸을 버리고 나서야 온열반 卽, 무여열반(無餘열반)을 이루신 것이다.그러니 깨달으신 스님이라고 하는 말은 맞지않다. 그러나 입적후엔 깨달으신 스님이라고 해야 맞다. 그러나 성불(成佛)이라는 말은 써도 된다. 成佛이란 부처를 이룸이니 이미 태어날때부터 "성불하십시요"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로 태어나서 부처로 살아가고 있으나 부처인 줄을 모르고 살아가니 정신차려 부처같이 살아가라고
그래서 황벽스님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깨달음이란 수행을 빌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自己 마음을 알아서 自己의 本來性稟을 보는 것이니 결코 애써 달리 구하지 말라.]
卽, 깨달음이란 修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自己 마음을 알아서 自己의 本來性稟을 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本來 自己의 性稟 卽, 마음의 作用을 보아 法身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마음의 作用인 그 感覺을 通해 法身이 있음이 體得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見性成佛이라 本來 自己의 性稟을 보아
卽, 自己에게는 自性, 法에서는 法性, 全切로써는 性稟이 되는 것이니
自己의 마음의 作用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서 마음의 體인 法身, 心地가 있음을 體得하고 證得하는 것이다.
이 本來 自己의 性稟을 보는 것으로 參禪이 제일 좋은 方法이므로 實參을 통해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그 자체를
感覺하여 마음의 性稟을 아는 것이므로 밖으로 구하거나 무엇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마음하면 性稟이요 性稟하면 마음이니, 어떻게 마음을 알 수 있느냐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신다.
[어떻게 自己의 마음을 아는 것인가? 지금 말하는 그것이 바로 너의 마음이니라.]라고.
지금 말하는 그것이 바로 너의 마음이니라라고 하시는 말은 마음이 바로 境界이고 境界가 바로 마음이니 하는
말을 한다는 의미는, 마음의 體에서 性稟인 作用을 일으켜 입으로 말을 하여 形相화 된 것이니 이것이 全部
마음의 道요 마음인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것이다.
色은 마음의 本體가 形相으로 드러남이요 空은 마음의 本體이니 形相을 境界라 하니 境界가 바로 마음이요
마음이 바로 境界인 것이며, 色과 空은 相互 恒常 함께 드러나고 사라진다.
그러니 境界가 나타나면 마음도 나타나고 境界가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진다.
이것이 體用의 도리(道理)이며, 삼신불(三身佛)의 理致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부연하여 [만약 마음이 말하지 않고 作用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本體는 虛空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또한 方位와 處所도 없다.
그렇다고 마음은 그저 한결같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한결같이 마음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라고 하신 말씀은
마음을 空이라고 하니 아무것도 없이 텅~빈 것으로 알면 안된다는 말이다.
마음은 形相이 없어 텅~빈 것같지만, 온 宇宙와 三千大千世界가 모두 한 마음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있느니 없느니 따져서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마음은 있지만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으니
因緣이 드러나면 있고 因緣이 끊어지면 사라질 뿐 언제나 그대로 如如함으로 如來라고 이름하였듯이,
황벽스님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음은 있으면서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조사스님께서는 여기서 말씀하신
'참된 性稟의 마음자리[眞性心地藏]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지라
因緣에 呼應하여 衆生을 敎化하나니, 方便으로 그 眞性心地藏을 智慧라 부른다'고 하셨다.]
참된 성품의 마음자리(眞性心地藏)이라고 말씀한 것은
참된 성품이 法身의 性稟을 말하는 것이요 마음자리는 바로 法身인 마음의 體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法身인 마음의 體는 因緣따라 呼應하지 않을 때나 呼應할 때나
恒常 存在함으로 實存이라고도 말하고, 實體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이렇게 설하신다. 그렇다고 바로 호응할 때라도 또한 흔적이 없느니라.] 흔적 종적이 없다는 말은
[만약 마음이 인연에 호응하지 않을 때라도 있고 없음을 말할 수 없으며
바로 종적 흔적이 境界가 되는 것이니 없다고 하신 말이지만 그 境界가 바로 흔적이요,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보는 것이나 性稟을 보는 것은 다만 境界와 形相으로 보는 것이 바로 마음과 성품을 보는 것이며,
이 마음의 作用이 그대로 感覺이 되여지므로 性稟을 본다, 마음을 본다. 깨닫는다. 견성한다. 성불한다와 같이
다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황벽스님은 이렇게 일러 주신다.
[이미 이런 줄 알았을진댄 '없음' 가운데 쉬어 깃든다면 곧 모든 부처님의 길을 가는 것이니라.]
이미 위에서 말한 境界나 形相이나 性稟이나 다 마음의 本體를 보는 것임으로
境界와 形相이 없음 가운데서도 쉬어 깃든다면 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三昧에 들어 모든 것을 쉬지만 그 마음의 性稟과 感覺됨은 그대로 如如함으로
그 如如함 그대로가 바로 부처의 길인 佛道이고 聖道이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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