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리] 道란? 7. 비사량처(非思量處)에 계합하라.
이 본심(本心)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생각으로 미칠 수 없는 자리다.
이런 자리를
말로서 알려 하고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생각을 가지고 알려고 하면,
마치 둥근 구멍에
네모진 기둥을 맞추려는 것과 같아서 맞지 않는다.
둥근 구멍에는 둥근 기둥이라야 맞는 것이다.
일체 사량(思量:생각)이 끊어진
비사량처(非思量處:생각 끊어진 곳)를
사량분별을 가지고 들어가려 하니 무리(無理)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놓아야
비로소 비사량처(非思量處:생각 끊어진 곳)에 계합(契合)될 것이다.
비사량(非思量)이라 하니
아무 생각도 일으킬 수 없는 목석(木石)같이 생각하여
멍하게 있어서도 안된다.
사량(思量)이 아닌 곳에 뚜렷이 영지(靈知)가 있는 것이다.
이 한 마음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아니기에 공적(空寂)이라 하고
목석과 다르기에 영지(靈知)라 했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속에 망상분별(妄想分別)을 쉬었기에
마음이 고요(空寂)하고 동시에 영지가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니,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원만(圓滿)하다.
그러나 미(迷)한 사람은
마음속에 망상분별(妄想分別)을 쉬지 못했기에
마음이 어지럽고(散亂) 동시에 혼매(昏昧)하여,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으로 공적과 영지가 둘 다 결(缺)한 것이다.
공적과 영지라 하지만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자체(自體)가 공적하면서 영지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본심(本心)을 항상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생활(生活)에 공기(空氣)는
일분(一分), 일초(一秒)도 여의고는 살 수 없는 소중(所重)한 것이나,
너무 흔하고, 너무나 가까이 있는 바람에
공기의 존재(存在)를 모르고 있듯이,
우리의 본심도 어느 장소(一切處:일체처)나,
어느 시간 일체시(一切時:일체시)에도,
또 망상분별(妄想分別)로 작용(作用)을 했든, 아니했든
우리의 생활(生活)에 있어서 일분, 일초도 여읜 일 없이
항상(恒常) 같이 하고 있으나
이 본심(本心)을 아는 이가 매우 드물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분주(散亂)하여
그 생각을 쫓고, 쫓기느라고
항상(恒常) 같이 하고 있는 본심(本心)을
미처 살펴보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러니 본심(本心)을 보려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어지러운 생각부터 쉬어야 한다.
어떤 물건을 관찰(觀察)할 때,
만일 마음속에 생각이
복잡(複雜)하거나,
들떠 있으면
세밀(細密)히 관찰되지 않는다.
세밀히 관찰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고,
조용한 것이다.
또 기둥시계(時計)의 일초, 일초,
초(秒)를 새기는 추소리가 낮이나 밤이나 크기가 같지만,
낮에는 잘 안 들리고, 밤에는 잘 들리는 것은
낮에는
환경(環境)의 소음(騷音)에 가려서
잘 들리지 않는 것이고,
밤에는
낮보다도 소음이 적고 조용하기 때문에
잘 들리는 것이다.
낮이나 밤이나
소리에는 차이(差異)가 원래 없는 것이다.
***스스로 부처임을 자각하소서***
화곡산 화엄정사에서 원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