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 완릉록 17-11 虛空界가 한~마음의 本體이니라.

장백산-1 2014. 12. 24. 01:43

 

 

 

 

◈ 완릉록 17-11   虛空界가  한~마음의 本體이니라.

 

 

비록 그대가 자그마한 道里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한낱 마음으로 헤아리는 法일 뿐이요,

우리 宗門의 선도(禪道)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달마스님께서 面壁하신 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견처(見處)가 없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마음의 作用을 잊는 것은 부처님의 道이나, 分別 妄想을 피우는 것은 마구니의 境界이다'라고 하였다.
이 性稟은 네가 迷惑했을 때도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그렇다고 네가 깨쳤을 때에도 역시 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니라.
天眞스런 自性은 本來 迷惑할 일도 깨칠 일도 없으며,

온 十方의 虛空界가 바로 한~마음의 本體이니라.
그러니 네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어찌 虛空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

 

 

********원오당 한소리********

 

깨달음? 이라고 하니 마음에 없던 어떤 새로운 무엇이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무엇을 얻고 구하고 깨달아 지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흔히들 깨닫고 보니 하늘에 천개의 해가 뜬것처럼 밝다는둥, 옹달샘 물을 먹은 것처럼 온 몸이 날아갈듯

하다는 둥, 깨닫고 나니 세상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둥 등의 말하는 소리를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느낌마저 心地에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現象이 설령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느낌 현상 그것을 이미 내가 느끼고 알았다면 마음의 作用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한 마음이 일으나면 法이되고, 그 形相이 드러나면 功德藏이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느낌이나 알아차림이나 깨달음이라고 하는 말이나 모두 다 일어나는 것을
내 스스로 느끼는 瞬間 이것은 全部 내 마음의 作用인 報身이며
形相을 보았다면
그것은 마음의 功德藏인 化身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의 作用으로서 누구나 할것 없이 이보다 더한 것도
現實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生覺으로 지을 수 있고 마음으로 想像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벽스님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그대가 자그마한 道理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한낱 마음으로 헤아리는 法일 뿐이요,"]
우리 종문의 선도(禪道)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럼 우리 종문의 선도(禪道)는 무엇일까?
우리 宗門이란? 
석가모니의 심법(心法)이 이신전심(以心傳心)'으로 傳해 내려와
황벽스님한테 까지 전해진 일심법(一心法)이며 여래선(如來禪)이며, 격외별전(格外別傳)인
조사선(祖師禪)을 말하는 것이다.

 

'법시불언(法是佛言) 선시불심(禪是佛心)'이라.
佛法이란, 부처님이 說한 말씀인 經典을 중심으로 宗敎的 形態를 取한 것이 바로 현교(現敎)이며,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秘密리에 以心傳心으로 傳한 格外 消息 卽, 宗敎外로 傳해진 일심법(一心法)이
선(禪)이요. 밀교(密敎)인 것이다. 祖師禪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을 전한 것이니
선도(禪道)에서는 마음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工夫의 재료로 삼지 않는 것이요
그 어떤 行爲的이나 宜式的 造作이 없이 바로 마음을 들어 수행하는 것이다.
달마스님이 전 할 때만 해도 여래선(如來禪)이라고 하다가, 馬祖스님이 주창하고 불교에서 禪을 分離하여

叢琳을 만든 백장선사 그리고 그 제자인 황벽선사와 임제스님 때에 이르러 禪의 體係와 禪이 정식 禪佛敎로
認證되면서 조사선(祖師禪)이라 稱하게 되였다.

여기서 황벽스님은 달마스님이 전해준 如來禪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달마스님께서 면벽하신 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견처(見處)가 없도록 하신 것이다."]

 

 

달마스님이 法을 傳하지도 않고, 오직 少林寺에 들어앉아 9년동안 面壁한 것을 두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禪定에 들었다느니 參禪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眞理는 보여 줄 수도 없고, 느끼게 할 수도 없고, 감각할 수도 없다.

眞理는 오직 스스로 느낌으로 알아가는 것이다.
眞理를 스스로 느낌으로 알아가는 그 目的이 어디에 있는가? 안심입명(安心入命)에 있다.

마음이 便安에 들어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이 便安하면 무엇이든 편안함 이상은 없다.

 

 

오직 괴로움과 苦痛과 怨望과 시기 질투 등 마음의 모든 일들은 스스로 自己 見處를 드러냄으로 인해서
일어나고 부딛쳐서 發生하는 것이 根本 原因이 되여 그 原因으로 自己를 자랑하고 願하는 것을 얻으려는

貪心이 생겨남으로 그것이 바로 自己의 見處가 되어 일어난다. 그러니 그 見處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마음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고 세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 했다. 말은 自己의 見處를 밝히는 門이된다.
모든 問題는 바로 아는것이 病이되어 입에서 뱉음으로 부딪치고 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沈默은 金이다'라고 하였듯이 내가 見處를 가지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見處를 가지고 있어도 使用하지 않으면 무작(無作)이니 아무 問題가 생기지 않듯이
달마스님도 정중동(靜中動)으로
모든 것을 알지만 그 아는 것을 어떻게 相對方에게 傳해지토록

하는냐를 靜 속에서 活發發하게 움직임을 보여준 것이다(開示).  그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말하기를 '마음의 作用을 잊는 것은 부처님의 道이나, 分別 妄想은 마구니의 境界이다'고 하였다."]

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생(生)이요 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그 한 마음 일으킨 것이 化身이 되여 形相으로 드러나 고통속으로 빠져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生을 죽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온갖 方便을 만들고 또 만들어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그 苦痛이 바로 우리의 삶이요 중생의 고통인 것이다.

 

그래서 法身佛, 毘盧遮那佛의 世界인 心地에 便安히 住하는 것을 涅槃이라고 하듯이.
便安함에 들어 있는 그 마음 狀態가
바로 最高 最昇의 幸福이요 極樂인 것이다.

그래서 分別하는 마음이 바로 見處이며, 想像이 妄想이므로, 煩惱 妄想이 바로 마구니의 境界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심지(心地)인 華藏世界가 自身에게는 自性이 되는 그 참性稟을 이렇게 설명하신다.
["이 性稟은 네가 迷惑했을 때라도 결코 잃지 않으며, 그렇다고 네가 깨쳤을 때에도 역시 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니라. 天眞스런 自性은 本來 迷惑할 것도 깨칠 것도 없으며."]라고 말씀하시어, 天眞佛 自性은 般若心經에서

不生不滅이요 不垢不淨이요 不增不減이라고 하였듯이, 마음의 作用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져도

언제나 그렇게 있었으며, 설령 깨쳤을 때에도 역시 무엇이 새롭게 생겨나서 變하거나 形相으로 드러나지 않고
텅~빈 虛空처럼 그대로 恒一하여 상주불멸(常住不滅)인 채로 變함이 없다.

 

그러니 迷惑할 때나 깨쳤을 때나 언제나 저 虛空은 變함이 없듯이
그대의 天眞佛 自性 또한 虛空처럼 그렇다는 것을 표현하여 
["온 十方의 虛空界가 바로 나의 한 마음의 本體이니라"]라고 말씀
하신다.
心法界가 아무리 넓다 해도 그것은 내 마음 안의 心法界이고,

아무리 心法界가 無限히 있다 해도 내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니

이 虛空界 안에 모든 森羅萬象과 頭頭物物이 自己 性稟을 펼쳐 내고 있음으로
그 어떠한 마음의 지음이나 마음의 공덕장 報身은 다 한 마음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황벽스님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니 네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어찌 虛空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라고,
흔히들 '
아무리 벗어나려해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라고 하듯이
有爲的 見解나 마음의 作用  또한 虛空界같은 한 마음을 벗어나서는 일어날 수 없음을 설파하시는 말씀이다.

마음 便安히 살려면 見處를 짓지말라! 그래야 해도 함이 없고, 안해도 그대로인 저 虛空界를 觀하여
마음의 心地, 本來마음의 當處를 헤아려 불 수 밖에! 
오직 상주불변(常住不變)의 自性의 性稟을 밝혀 가시길!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