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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무정이 우리를 돕는다
대학시절 미국에 배낭여행을 갔다가 하루는 워싱턴에서 무작정 교외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여행지가 아닌 그저 무작정 현지인들의 속살 안으로 파고들어 보자는 생각이었지요. 한 겨울 버스 안에서 한참을 잠들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인적이 드문 시골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후다닥 버스에서 내렸더니 해는 저물고 뱃속에서는 꼬르륵 신호가 왔습니다. 배는 고프고,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고, 한 겨울이라 몸은 얼어오고, 가까이 여관이나 숙소 그림자는 하나도 안 보이고, 불빛 있는 쪽으로 몇 발자국을 걸었더니 도로 가 식당 안에서 행복한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따뜻하고도 정겹게 맛깔스런 음식을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족 생각도 나고, 외롭고, 또 어찌 해야 할지 방법은 없고, 이런 상황을 스스로 선택해 놓고도 답 없는 상황에서 난감해 하고 있던 중이었지요.
걷다 보면 무슨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그저 막연히 걸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교차로가 하나 보이고, 그 한 켠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지요. 그 흔해빠진,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전화부스가 그 순간 반짝이며 내 눈에 들어온 이유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우주법계가 베풀어 놓은 나를 돕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마치 알기라도 했다는 듯 나도 모르게 무심코 전화부스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보통 전화부스에는 영어로 된 전화번호부 책이 두툼하게 한 권 메달려 있곤 했지요. 추위나 녹일 겸 전화 부스 안에 앉아 의미 없이 전화번호부를 뒤척이는데 이게 웬 일인지, 그 책 뒤에 한글로 된 한인 전화번호부가 무슨 부록처럼 달랑거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뒤척였지만 도대체 이 많은 워싱턴 주변 한인 전화번호부의 수많은 사람들 이름과 상호명에서 어디로 전화를 걸어야 할지 난감했지요. 그런데 한참을 살펴보았더니 그 뒤쪽으로 한인 종교시설들 전화번호가 나와 있었고, 절 이름도 보였습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중 한 곳의 사찰을 찍어 그저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주지스님께서 전화를 받으셨고, 한참을 그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으시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그 ‘잠시’를 믿고 몇 십 분을 꼼짝 않고 벌벌 떨며 기다리다가 거의 포기를 하고 있던 차에 스님께서 도착을 하셨습니다.
제게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얼마나 반갑고 기쁘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 날은 마침 구정, 설 전날이던 터라 절에 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따뜻하게 단잠을 자고, 그 다음날에는 구정이라 절에 오신 신도님들과 떡국도 얻어 먹고 행복한 에피소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런 뜻밖의 도움들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차원적이고도 무한한 자비의 손길이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다는 아이디어는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지 모릅니다.
히말라야가 아니라, 아프리카나 극지방에 있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여행을 떠날지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우주법계라고 하는,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숲과 나무와 동물 친구들이, 또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자연과 우주가 있지 않습니까.
그 뿐 아니라, 불교 경전에서도 자주 등장하듯이 천상세계 천신들의 도움도 있을 수 있고, 화엄성중님과 신장님들 나아가 불보살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활짝 열린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그 모든 다차원적인 자비로운 도움을 언제든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삶의 여행자인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대지가 나를 품어 기르고 있습니다. 가슴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향해 우리는 다만 두려움 없이 당당한 걸음을 내딛으면 됩니다.
이 우주에는 눈에 보이는 질서 그 이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크고 깊은 법계의 질서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질서에만 귀 기울이고 살 것인지, 아니면 그 이면에 깊은 뜨락에 자리한 법계의 투명한 질서에 나를 내맡기고 자유롭게 삶을 저어갈 것인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부디, 저 세월호에도 다차원적인 신비로운 온갖 도움의 손길들이 스며들 수 있기를 기도드려 봅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 방송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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