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릉록 18-8 그저 뜻이나 따지는 사문이로구나
◈ 완릉록 18-8 그저 뜻이나 따지는 사문이로구나
하루는 새로 온 스님 다섯 명이 동시에 서로 보게 되었다. 그 중에서 한 스님만은 예배를 올리지 않고 그저 손으로 원상(圓相)을 그 리면서 서 있었다. 이것을 본 대사가 그에게 말씀하셨다. "한 마리의 훌륭한 사냥개라고 말하는 줄 아느냐?" "영양(羚羊)의 기운을 찾아왔습니다." "영양이란 기운이 없거늘 너는 어디서 찾겠느냐?" "영양의 발자욱을 찾아 왔습니다." "영양은 발자욱이 없거늘 너는 어디서 찾겠느냐?"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영양입니다." 이 말을 듣자 대사는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튿날 법좌에 올라 설법을 끝내고 물러나면서 물었다. "어제 영양을 찾던 스님은 앞으로 나오너라." 그 스님이 바로 나오자 대사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어제 너와 대화를 하다가 끝에 가서 미처 다하지 못한 말 이 있는데, 어떤가?" 그 스님이 말이 없자 대사께서 말을 이었다. "본분 납승(本分衲僧)인가 했더니,
그저 뜻이나 따지는 사문이로구나."
********원오당 한소리********
[하루는 새로 온 스님 다섯 명이 동시에 서로 보게 되었다. 그 중에서 한 스님만은 예배를 올리지 않고 그저 손으로 원상(圓相)을 그 리면서 서 있었다.]
이 법담이 이루어 지고 있는 곳은
배휴가 완릉관찰사로 재임시 개원사에 계실때
황벽스님이 중생들을 재접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원상(圓相)이란
혜충국사께서 누가 물으면 항상
손가락을 들어 일원상을 그렸다.
법성원융(法性圓融)의 뜻으로
모든 법의 성품은 서로가 서로를
쌍입쌍조(雙入雙照)하고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다는 뜻의
사사법계(事事法界)를 나타내는 뜻이다.
예배란 자기의 자성에서
스스로 귀의하여 주인공이 되겠다는 뜻으로
하심(下心)하고 몸을 나추어
서원을 밝히는 것인데
스스로 '나는 안다'
무엇을 아는가?
'나는 이미 법의 성품을 아니 더는 무엇을
알것이 있겠는가' 하면서 아만을 떨고 있다.
이를 본 황벽스님이
한 말씀 든진다.
[이것을 본 대사가 그에게 말씀하셨다. "한 마리의 훌륭한 사냥개라고 말하는 줄 아느냐?" "영양(羚羊)의 기운을 찾아왔습니다." "영양이란 기운이 없거늘 너는 어디서 찾겠느냐?" "영양의 발자욱을 찾아 왔습니다." "영양은 발자욱이 없거늘 너는 어디서 찾겠느냐?"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영양입니다." 이 말을 듣자 대사는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았다.]
여기서
대사가 말하는 한마리 훌륭한 사냥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참 자성인 자기 본향을 찾아가는 납승에게
진정한 깨달음의 기연을 줄 수 있는
선사를 만날수 있게 야생의 동물을
포수(선지식)가 있는 곳으로 몰아감으로
바로 길을 찾는 선승이냐고 뭍고 있다.
그런데
아직 형상에 집착을 놓지 못하고
선지식은 고고하고 그윽하고 향기롭고
보기만 해도 그냥 고개가 숙여지는
흰 수염을 휘날리는 도사로 알고 있는
이 행자는 이렇게 말한다.
'영양의 기운을 찾아왔습니다.'
영양이란 산에 사는 산양인데 절벽을 타고
아주 험한 산속에 사는 보기만 해도
기공이 많은 동물이라 아마도
기이하고 괴상한 형상의 흔히 말하는
도사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해서
찾아왔다고 한다.
이를 간파한 황벽스님이 또 한말씀 더 묻는다.
영양은 발자욱이 없거늘 ....
이 말씀은 진리는 형상이 없고
언설이 없는 것인데 무엇을 찾고 말고가 있느냐!
라고 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 학승의 말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영양입니다'
ㅎㅎㅎㅎㅎ
있는 것은 허망하지만 없는 것은 진실이다.
진리의 세계에 발도 못드려 놓을 작자같으니
뭐가 죽고 살고인 차별상을 논하느냐
모든 것을 간파하신 황벽스님은
그냥 쯧쯧쯧하면서 더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이런 학승에게 뭐라 더 말해 주어야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니 수행이 성숙되기를
기다리는 수 빆엔 .....
[이튿날 법좌에 올라 설법을 끝내고 물러나면서 물었다. "어제 영양을 찾던 스님은 앞으로 나오너라." 그 스님이 바로 나오자
대사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어제 너와 대화를 하다가 끝에 가서 미처 다하지 못한 말 이 있는데, 어떤가?"]
여기서
황벽선사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가.
다 하지 못한말이다.
진리는 언설이 아닌데 무슨 말로써
진리를 화현시킬 수 있느냐
어제 보니 아직 자네는
형상과 언설에 이끌려 일원상으로
모든 법을 다 얻었는 냥
법당에서 아만을 부리고
내가 뭍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마음속에 상상의 도인을 찾아 왔다는 둥
그런 말을 하는 그대가 진정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말해봐라!
그러니
학승이야 말로 무어라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또 이 많은 납승들 앞에 자기의
견처를 드러낼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으니 겉모습은 납승이나
학승이 모습을 드러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스님이 말이 없자 대사께서 말을 이었다. "본분 납승(本分衲僧)인가 했더니, 그저 뜻이나 따지는 사문이로구나."]
하신다.
이 감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차별적 마음의 작용이다.
형상과 언설을 떠나 있는 것이
진정한 진리인 자성인데
우리 주위에서 교설과 학설과 의론으로
불교카페에서 자기 자랑을 일삼으며
돌아치는 사문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문답도 아니고 탁마도 아니다.
진정 안다는 것은 자신(自神)이지
남이 아니다.
진정 소분이라도 아는 납자라면
그런 말을 하라고 해도
이미 차별상을 뛰어넘어
시시비비에 걸려 들지도 않고
잘 잘못을 따지지도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자기 심성을 어둡게 하고
견처를 세워서 자기가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안다.
이것만큼 어리석음이 더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은 나는 아직 아리송하다
그러나 이렇게 지껄이면 나보다 한 발 앞선
학인이 나와 한 말 해주면 또
문구나 학설을 배워서 그 사람을 따라 가겠다는
알음이를 키우는 지름길이자
스스로 자성을 어두운 곳으로 점 점 더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한 중생인가.
수행이 자기적이지도 못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회광반조도 아니고, 목적도 모르면서
남이 가니 나도 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보고
자동차를 몰고 나오는 사람과 같다.
그러나
그사람을 앞질렀다고 추월하는 순간
정작 나는 어디로 가는 지를 몰라
또 그자전거 탄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 사람이 보이면 또 달리는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자동차가 아무리 좋아도
목적지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가는 만큼 돌아와야 하니까.
나라는 이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면
오직 바른 안내자를 만나는 것이
시작이요 종점인 것이다.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주함도 없이 오직 자기의 자성을 찾아
회광반조 자성자각하시길!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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