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송) 天上天下無如佛~ /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다, 사람 사람이 本來로부터 太平하다 /
(게송) 諸法從本來~ / ‘모든 것이 本來로 生死가 없는 眞理다’
〇대관절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나오셔서 무슨 노래를 항상 부르셨을까?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다, 사람 사람이 본래로부터 태평하다.
〇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생활 속에서 수행을 쌓아나가면,
「原來 내가 生死가 없는 存在이고 眞理의 存在」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〇모든 부처님께서 이 世上에 出現하신 目的은 ‘너희들 모두가 다 原來 부처님이다. 진여(眞如)다’는 眞實을
우리에게 가르켜 주어서 그것을 깨달아서 生과 死를 解脫하게 해주기 위해서 이 世上에 오신 것입니다.
〇우리는 다 自己부처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自己가 自己의 부처를 찾는 것」바로 그것이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고, 그것이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〇석가모니 부처님은 삼천 년 전에 열반(涅槃)하셨지만, 우리가 이 法에 의해서 ‘이뭣고?’를 통해서
자성(自性)을 찾는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부처님을 親見하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675)-03년 부처님오신날(03.05.08) 법문.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요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로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하니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로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요.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부처님과 같은 분이 안 계시다.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로다. 시방세계에 부처님께 견줄 만한 분이 없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하되. 내가 온 세간(世間)을 다 둘러보아도,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다. 부처님과 같은 분은 계시지 않다.
이 게송(偈頌)은 무량억겁 前에 백겁(百劫) 수행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하실 때,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석가모니부처님이-그때는 菩薩로 수행하실 때인데, 그 때 저사불(底沙佛)이라고 하는 부처님 밑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그 釋迦菩薩께서 底沙佛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로 인해서-칠일칠야
(七日七夜) 동안을 한 발을 들은 채 그 底沙佛의 거룩하고 위대하신 모습을 찬양하야, 그 功德으로
구겁(九劫)을 超越해 가지고 미륵보살보다도 먼저 성불(成佛)을 하신 因緣이 있는 偈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할 때마다,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릴 때마다
이 偈頌을 읊으로써 부처님의 모든 위대함을 찬양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째서 부처님은 이렇게 거룩하시고, 機會있을 때마다 우리는 부처님의 거룩함을 이렇게
찬양을 하느냐 하면, 부처님께서는 王宮에 태어나시고 그 왕궁의 富貴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出家하셔
서 見性成佛을 하셨습니다. ‘견성성불을 하셨다’란 말은 대관절 무엇을 깨달아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에 팔만사천의 한량없는 법문(法門)이 들어있습니다마는,
오늘 산승(山僧)은 그 가장 要點만을 간략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과연 일생 동안을
무슨 마음으로 사셨으며, 무슨 설법을 초점을 두고 하셨으며, 평생 동안 무슨 노래를 부르셨을까?
관타야불망(觀他也不妄)이요. 모든 것을 보실 때, 모든 중생과 모든 것을 다 보실 때
‘망령(妄靈)되지 않다.[不妄]’ 관타야불망(觀他也不妄)이요. 관자역무생(觀自亦無生)이다.
당신 스스로는 어떻게 당신을 보셨을까? ‘생겨남이 없다.[無生]’이라고 그렇게 보셨어요.
‘妄靈되지 아니하다[不妄]’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眞實이요, 모두가 眞如佛性이고,
모두가 眞理다 그 말씀이다, 스스로를 보실 때는 無生으로 보셨다 그말이거든.
보통 우리 衆生이 볼 때는 「부처님께서 왕궁에 태어나셔서 그래가지고 出家하셔서 苦行을 하시고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 衆生의 눈으로는 그렇게 보지마는, 부처님 自身은 ‘생겨남이 없다[無生]’고
그렇게 스스로를 보신 것입니다, 일생 동안 우리 중생들도 좋아하는 노래가 있어서 기쁠 때도 노래를
부르고, 슬플 때도 노래를 부르고, 혼자도 부르고 여러 사람이 모이면 다 같이 노래를 부릅니다.
어떤 儀式이 있을 때도 노래를 부릅니다.
대관절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나오셔서 무슨 노래를 恒常 부르셨을까?(出世歌何事)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다, 사람 사람이 本來로부터 太平하다.‘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사람 사람마다 太平하다.’ ‘태평(太平)하다’고 하는 뜻은,
모든 苦痛이 없으며 슬픔이 없으며 아무 근심걱정 할 것 없고, 恒常 幸福하고 恒常 넉넉하고
恒常 즐겁기 때문에 恒常 幸福 넉넉 즐거운 마음 상태를 ‘太平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現實的으로 우리에게는 生老病死가 있고 興亡成衰가 있고 喜怒哀樂이 있어서
정말로 幸福 넉넉 즐거운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自己가 本來 부처(佛)고, 本來 毘盧遮那 法身佛과 똑같은 同一한 存在임을 알지를 못하고, 오히려
‘自己는 衆生이고, 衆生은 生老病死 속에서 苦痛을 받게 되어있다.’ 그렇게 錯覺을 하고 살기 때문에,
本來 不足함이 없고 本來 生死가 없는 存在이면서도 生老病死의 輪廻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이 「生老病死 없는 도리(道理)」를 말씀을 하셨지마는 衆生이 理解를
못하기 때문에, ‘原來 人生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을 없애야 우리가 涅槃에 드는데 괴로움의
原因이 뭣이냐? 貪瞋癡 三毒心 無明때문에 生老病死가 있는 것이고, 苦痛이 있는 것이고, 眞理 속에서
眞理와 永遠히 함께 하면서도 眞理를 모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차츰차츰 段階的으로 말씀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依持해서 日常生活 속에서 修行을 쌓아나가다 보면,
「原來 내가 生老病死가 없는 存在이고 眞理의 存在」라고 하는 眞實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法門을 說하시다가, 最後에 法華經을 說하실 때 부처님은 무슨 揭誦을 읊으셨냐 하면은,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로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다.
諸法은 宇宙法界 森羅萬象을 제법(諸法)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宇宙萬物 모든 것은 從本來로 本來부터 常自寂滅相이다 - 恒常 그대로 寂滅相, 涅槃相이다.
寂滅相, 涅槃相은 ‘生老病死가 없다’ 는 그말이여.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하면, 佛子가 生老病死가 없는 이 道理를 깨달으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다, 그 道理를 깨달으면 바로 그것이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來世라고 하니까 이 몸뚱이 80年, 90年 살다 죽은 뒤에 成佛한다 그렇게 解說한 것은 最上乘法에
입각해서 解釋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本來로 生老病死가 없는 眞理다’고 하는 眞實을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음이 바로 부처님 境地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는데, 般若心經에도 不生不滅이란 말이 있고,
經典마다 ‘生老病死는 本來 없다’고 하는 많은 法門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에게는 生 老 病 死가 있고 苦痛이 있고 슬픔과 괴로움이 있느냐 하면은?
比喩를 들어서 물이라 하는 것은 섭씨 零度 以下로 내려가면 얼음이 됩니다. 固體가 됩니다.
얼음을 끓여서 100度가 되면 蒸氣로 變해서 氣體가 됩니다. 물로 되었을 때나 얼음으로
되었을 때나 증기로 있을 때나 물의 본성(本性)인 습성(濕性)은 變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그때 狀況 따라서 모양(色/相)만 다를 뿐이지 물이 本來 가지고 있는 그 물의 本性,
濕性은 어떠한 모습으로 變하지 않고 그 本性 自體는 언제나 고대로 있는 것입니다.
衆生으로 있을 때나, 富者로 있으나, 가난뱅이로 있으나, 罪를 지어서 형무소에 가서 있거나 또는
더 무거운 罪를 지어가지고 地獄에 가서 있거나 또는 業에 따라서 畜生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거나,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그 本性은 부처님으로 있을 때나, 祖師로 있을 때나, 貧富貴賤 어떤 모습으로
있을 때나 똑같은 平等한 本性입니다. 우리는 그 眞實을 깨닫지를 못해서 各各 다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가지고 잘난 사람은 잘난체 하고, 못난 사람은 기가 죽고, 부자는 부자라고 목에다 힘을 주고,
權力가 있으면 권력이 있다고 남을 업신여기고 그 권력을 휘두르고, 그러다 부정(不正)을 하다가
잘못되면 또 다시 감옥에도 가고 그러한 興亡成衰와 生老病死의 輪廻와 喜怒哀樂 속에서 우리는
無量劫을 오늘 날까지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있다하더라도 우리 속에는 부처님과 똑같은 眞如佛性 卽, 비로자나法身佛이
우리 속에는 살아계십니다. 모든 부처님이 이 世上에 出現하신 目的은 ‘너희들 모두가 原來 부처(佛),
진여(眞如)다.’하는 眞實을 우리에게 가르켜 주어가지고 그 事實을 깨달아서 永遠히 生老病死를 解脫
시키기 위해서 이 世上에 오신 것입니다. 그 眞實을 確實히 믿고 그 眞實을 우리가 具現하기 위해서,
우리 自身을 그 眞理, 佛, 眞如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참선을 하고 根機에 따라서 經을 工夫하거나,
呪力을 하거나, 念佛을 하거나, 여러 가지 方法이 있습니다마는, 有識 無識하고를 떠나서 막론하고
누구라도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이 世上 모든 것은 本來 生老病死가 없다는 眞理, 그 道'를 닦을
수 있는 가장 좋은 方法이 ‘이뭣고?’ 참선법(參禪法)입니다.
宗派에 따라서 各己 自己가 믿는 經典에 依據해서 여러 가지로 說法을 하고 敎化를 하고 있지마는,
우리 용화사에서는, 일어나는 生覺,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서는 온갖 生覺이 일어납니다. 좋은 生覺도
일어나고 나쁜 生覺도 일어나고, 슬픈 生覺도 일어나고 고통스러운 生覺도 일어나지마는, 일어나는
그 生覺을 발판으로 해서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 ‘한 生覺’에 自己의 本來마음
을 찾는 工夫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것은 따로 때와 場所가 따로 필요가 없고, 언제든지
어디서라도 나를 찾는 - 나의 부처님을 찾는 길인 것입니다. '이뭣고?' 이것이 바로 오늘 山僧이 이
法床에 올라와서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話頭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부처님(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自己가 自己의 부처(佛)를 찾는 것」
바로 그것이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고, 그것이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오늘 석가모니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서 많은 말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罪 있는 사람은 監獄에서도 ‘이뭣고?’를 하고, 富者도 ‘이뭣고?’를 하고, 또 높은 權位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뭣고?’를 하고, 自己가 自身을 찾다 보면 自己의 참마음(本性)을 깨달아서
참마음 卽, 眞理와 自己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을 겁니다.
자꾸 하다 보면 자꾸 잊어버리고, ‘이뭣고?’를 하지마는 妄想 煩惱가 일어날 것입니다마는 그 妄想이
어디서 일어났냐 하면 우리의 根源 本質인 眞如佛性에서 그런 波濤같은 妄想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原來 물은 깨끗하고 고요하지마는 바람이 불므로 인해서 물결이 일어나. 물결이 일어났어도 내내
그 물결이 물인 것이고, 그 물은 原來 本性인 濕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파도를 없애고
물을 찾지 말고, 파도에 즉해서 ‘이뭣고?’를 찾으면 眞如佛性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妄想과 煩惱를
버리고 眞如佛性을 찾지 말고, 거기에서 ‘이뭣고?’로 들어가면 가장 빨리 부처님을 親見하게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三千年 前에 涅槃하셨지만, 우리가 이 法에 依持해서 ‘이뭣고?’를
通해서 자성(自性)을 찾는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부처님을 親見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파일에 많은 신도분들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이 모이셨고
또 精誠을 표하고 所願을 빌기 위해서 많은 燈불을 켰습니다마는, 燈불을 켜면서도 ‘이뭣고?’를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에도 ‘이뭣고?’를 하시고, 家庭에 돌아가시면 여러 가지 問題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모든 問題를 ‘이뭣고?’ - 自己가 自己의 眞性, 自性을 찾는 거기에서 모든 問題를 解決하려고 하신다면,
問題는 根本的으로 解決될 것이고, 가정 분위기도 좋아질 것이고, 사회도 그것으로 인해서 좋아질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 사람이 이렇게 한다면 부정부패도 없어질 것이고, 대한민국이 정말 살기 좋은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고, 온 세계도 극락세계(極樂世界)로 變하는 길은 오직 自己가 自己의 眞如佛性을 찾는 여기에
있다고 산승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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