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속에서
01 달력, 달력 그리고 달력
여기까지 봤을 때 고대에 만들어진 것 가운데 달력만큼 지금까지도 그 형태에 변화가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것도 거의 없다. 그래서 달력의 개정과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역사라는 재미보다는 따분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말하자면 달력의 역사는 타성과 단조로움, 실패한 개혁의
이야기다. 달력은 역사가 아니지만, 역사가 아니라는 그 사실 때문에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주목받는 다른 문화사의 경우를 보면 단추와 속옷의 형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데, 달력은 왜
고대 중부 이탈리아의 농경사회부터 현재의 세계화된 후기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_13쪽
02 로마의 달력, 태양 또는 달
달은 누구나 큰 비용을 들이거나 힘들이지 않고 그 모양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적인 시계다. 하지만
이 시계를 이용해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기는 어렵다(하루나 이틀 정도 어긋날 수 있다). 그래도 약속을 준비
할 수는 있다. 달이 꽉 찰 때마다 열리는 월례 행사를 위해서는 그 어떤 신문도 필요 없다. 이런 행사는
철기시대의 이탈리아반도와 서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달과 비교했을 때 태양은 요구하는 것들이
더 많다. 즉 태양의 운행과 아침이나 저녁노을 즈음에 뜨고 지는 별들을 관찰하는 데에는 필요한 것이 더
많다는 말이다. 예컨대 제도화된 기억이나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갖춰졌다고 해서
그 결과가 그렇게 정확한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낮이 다시 길어진다는 주장은 몇 주일이 지나서야 마침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태양에 따른 역법을 사용하려면 그 결정을 관철시킬 수 있는 권력이 필요하다.
이때 자신을 단순히 시간 번역자인 것처럼 꾸미는 것이 시간 제작자의 술책이다. 곧, 천문학적인 시간 기호에
대한 지시를 통해 사회적인 시간 표준이 합법화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시간 정하기 혹은 시간 구성에
관해서가 아니라 시간 측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_39~40쪽
03 시간의 전문가들, 농부와 선원 그리고 수도사 천문학이 여러 수도원에서 장려되었지만, 시간을 알 수 있는
더 실용적인 방법을 찾으라는 압력이 커졌다. 물과 모래 외에도 이슬람 문화에서처럼 양초를 사용해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도 있었다. 13세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종과 연결할 수 있는 기계적인 톱니바퀴 방식의 시계가
보급되었지만, 시간을 비교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한 시계의 타종은 도시적인 발명이었다. 이런 과정은 고도로
발전한 이탈리아 북부의 경제 중심지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것은 또한 공공장소에서만 볼 수
있고, 타종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계와 관련된다. 똑같은 길이의 시각을 나타내는 시계의 시간은 자연에
의지하는 농부나 선원 그리고 수도사를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조정의 도구로서 등장했다.
문자로 된 달력도 마찬가지다._60~61쪽
04 시간을 법으로 규정하다
공공 달력의 규정은 공적으로 통제되는 기관, 즉 법정이나 정치적 집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프랑스공화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공공 기관에 의존해야 했다. 여기에 근대사회의 전형적인 기관으로
학교가 추가된다. 달력 규정을 새롭게 이해하는 움직임은 고대 로마 후기에야 비로소 기독교의 일요일 규정과
함께 로마력에 도입된다. 그때부터 보편적인 휴무일과 기독교 예배가 주요 기관으로서의 법정과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법정이 맡았던 역할이 교회적인 성격을 띤 영역으로 이행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경제가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노동운동과 노조활동의 성과인 토요일 휴무의
의미는 경제 우위의 상황이 적용된 달력에서 이해할 수 있다. 토요일 휴무는 비교적 새로운 성과물로 20세기
후반에 관철되었다. 또한 기계 작동 시간이나 상점 개점 시간에 관한 토론을 통해 사회가 달력에 관해 논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독일 분데스리그가 축구 경기를 일요일 오전에 해도 되는지, 아니면 예배를 방해하지 않도록
일요일 오후에 해야 하는지 논의했던 일은 1970~80년대 서독의 법 발전 과정에 속하는 사건이었다.
이 일은 현재의 상황에 비춰보면 진부해 보인다._75쪽
05 인간과 신의 시간
나쁜 징조가 신성한 곳에 나타나면, 예컨대 신전에 번개가 내리치면 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 희생물을 바쳐야 했다.
한 신전에서 여러 신을 모신다면 신관은 모든 신의 숭배상을 모실 수 있도록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나누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렇게 해서 오해의 여지없이 분명한 선이 그어졌다. 이런 구분은 축제일에도 적용되었다.
금지 사항을 어기면 속죄물을 신에게 바쳤다. 다른 관점에서도 명백한 선이 이 두 차원에서 그어졌다. 두 신이
차지하는 지역은 직접적으로 맞닿지 않았고, 좁기는 했지만 실제적인 경계선이 필요했다. 똑같은 것이 축제일에도
적용되었다. 로마공화정의 달력에는 여러 신들의 축제일이 연달아 나오지 않는다. 축제일 사이에는 어떤 신에게도
속하지 않는 날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언제나 고수되었다. 로마의 하루는 적어도 종교적인 계산에서 볼 때
자정에서 자정까지 흘러간다고 플리니우스가 《박물지》에 적고 있지만, 당시의 시계 기술을 고려해보면
하루가 바뀌는 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_80~81쪽
06 변화 속의 축제
제정기의 축제 일정표를 사용한 사람들은 로마의 전통적인 축제일에 옛 공화정 시대 고대 도시 로마에서
만들어진 축제를 열었다. 이때 발생하는 원래 축제와의 차이는 조정되었는데,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며칠에 걸쳐 로마에서 진행되는 경기를 넵투날리아 축제(초막草幕짓기와 야외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
연결된 로마의 축제)와 비슷하게 거행했다. 귀디졸로에서 도시 로마의 디아나 신전을 봉헌하는 의례는
불카날리아의 특이한 번제燔祭와 별로 다르지 않게 거행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神과 神을 위한 祝祭日은
祭式的인 미묘함보다 쉽게 전달된다._104쪽
07 달력을 둘러싼 역사
풀비우스의 벽화 달력은 넓은 평면 달력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막 시작된 로마 작가들의 역사 연구와
서술은 연대기의 구성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로마의 역사를 많은 지역과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 도시를
위해 그리스인들이 개발했던 정확한 연대기에 끼워넣는 일이었다. 기원전 3세기 말의 역사가 파비우스
픽토르와 그의 초기 후계자들은 무엇보다도 대칭적인 시대를 구성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로마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그리스 도시 역사의 핵심적인 사건들과 시간적으로 동일하게
놓고, 기타 사건들과는 연도를 대략적으로 맞추는 것을 통해 정당화했던 것이다._135~136쪽
08 달력으로 역사를 쓰다
책 달력에서 한 장짜리 목판화 달력은 오랫동안 시장에서 거래되었는데, 각 달이 한 쪽이나 두 쪽을
차지하는 방식은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페이지가 연속적이고 임의적으로 짜인 달력 형태 역시
빈번히 존재했다. 각 달이 한 쪽을 차지하는 방식이 잘 지켜진 경우는 고대의 전통에 따라 해당 달을
사치스럽게 표현한 호화 필사본에서 나타난다. 후자의 경우 전해오는 달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354년 연대기>의 사본이다. 여기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아래서 발견된 커다란 달력 그림이
추가되는데, 이 그림은 높이가 170센티미터에 넓이가 280센티미터이며, 각 달의 텍스트 칸은 45
센티미터에 이른다. 여기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아래서 발견된 커다란 달력 그림이 추가되는데,
이 그림은 높이가 170센티미터에 넓이가 280센티미터이며, 각 달의 텍스트 칸은 45센티미터에 이른다.
모자이크들은 비슷하면서도 더 오래된 형태를 보여준다. <354년 연대기>가 15세기 후반 이래로 점점
더 많이 복사되었다는 사실은 고대의 달력이 좀 더 광범위한 흐름 속에서 수용되었음을 뜻한다._189쪽
09 달력에 숨어 있는 정치
아우구스투스의 목적은 달력의 날짜를 가능한 많이 그리고 강제로 차지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날짜 배치에
대한 전략은 아주 분명하다. 대부분의 신전 봉헌은 9월 23일에 행해졌고, 아우구스투스의 생일 그리고 또
다른 봉헌과 승리에 따른 축제는 8월에 거행되었다. 1월 30일 리비아의 생일은 기원전 9년에 아라 파키스
아우구스타이(Ara Pacis Augustae,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옮긴이)의 봉헌을 통해 페리아이로 상향
조정되었다. 특정한 날에 추가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어떤 사건의 중요성을 높이는
방법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헬레니즘시대에 지배자 숭배를 구성하는 원칙으로 증명되었다.
내란을 겪은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그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기원전 45년 2월 15일에 문다Munda에서의
승리(에스파냐 문다 평원에서 카이사르의 민중파가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와 싸워서 이겼다-옮긴이)를
전달하는 전령의 도착을 그냥 우연에 맡기지 않았던 것 같다. 전령들은 내란의 종결을 담은 소식을 가지고
파릴리아의 前夜, 卽 로마의 建國日 直前에 도착했다. 이로써 카이사르의 존재와 승리가 신화적 인물인
로마 建立者 로물루스에 근접하게 되었다._213~214쪽
10 머릿속의 달력
일주일 단위의 리듬은 종교적 사회화의 기본 리듬이 됨으로써 그 위력을 얻었다. 이는 먼저 유대인에게,
다음으로는 유대인 집단에서 나온 기독교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들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의 다수로부터
점진적으로 벗어나는 상황은 시간적인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집회일이 해당 주의 7일째 날(일요일을
첫날로 잡을 때 유대인의 안식일인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의 7일-옮긴이), 즉 안식일에서
첫째 날인 일요일로 옮겨간 것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 온종일 행해지는 행사가 아니라 노동이 없는 쉬는
시간인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공동예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일요일법을 제정할
때까지 안식일에 비견되는 상징적이면서 정체성을 부여하는 기능이나 그리스도의 수난사와 관련된
깊은 의미가 일요일에 주어지지는 않았다._240쪽
11 달력과 시간 속에 담긴 의미
1900년의 세기 전환을 공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날짜에 관한 논쟁으로 특징지어졌다.
1899년 12월 16일자〈빈 신자유신문Neue Freie Presse Wien〉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섣달 그믐날 밤이 다가올수록, 20세기가 1900년 1월 1일 아니면 1901년에 시작되는지에 대한 논쟁이
점점 더 격렬해지고 복잡해졌다. 의견 차이로 두 진영으로 나뉘었고, 양 진영 모두 자신의 입장을 완고하게
주장했다. 다음 세기를 그 이듬해로 정하려는 진영은 연대 계산법에 따랐고, 다음 해의 첫날을 20세기가
시작하는 첫해로 결정하려는 진영은 감정에 따른 결정이었다. 1900년을 20세기의 시작으로 삼은 것은
독일과 영국의 우체국에서 발행된 100주년 기념우표였다. 그 밖에 빌헬름 2세가 혼자 1900년 1월 1일을
공식적으로 축하했다. … 100년 뒤에 이 물음은 더 이상 논의거리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미국의 시간
비평가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옮긴이)가 말했듯이 교양에 대한
대중문화의 최종적인 승리가 아니라, 시간 계산을 비연대기적으로 처리한 데 그 의미가 있다._259쪽
12 달력이 정치를 바꾸다
오랜 전통에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달력의 직접적인 모델은 율리우스력으로, 달의 수와 그 길이, 윤년 등은
개혁의 결과물이었다. 기원전 1세기 중반의 로마력은 한 해의 자연스러운 진행에 날짜를 의도적으로 일치
시킨 것으로 봐서 상당히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윤달을 삽입하거나 조정해 기한을 연장하는
방법은 로마의 국내 정치가 위태로운 국면일 때 주로 이용되었는데, 그때마다 필요한 효과를 성공적으로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것은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10월 동방에서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귀향 후 세 번째 집정관 취임을 앞두고 민회의 선거를
치르는 가운데 행정과 부채 문제를 풀기 위해 정치 영역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개력 작업 역시 이 개혁에
포함되었는데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지배력에 맞춰 달력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_269쪽
13 시계 없이 네 번째 1000년으로
달력은 한번도 지역적인 독점을 누린 적이 없다. 물론 지배적일 수 있다. 로마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교회
시나고그와 관련된 카타콤의 비석에 율리우스력으로 날짜를 기입했다. 시칠리아 섬 타우로메니온의 로마
식민지 거주자들은 제정기에도 그리스의 태음태양력으로 일정을 기록했다. 한편으로 달력은 대립을 일으킬
수도 있다. 태양력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사이에 퍼져
있었다. 분명히 로마의 태양년이 먼저 전반적으로 퍼졌고, 이로 인해 유대인 사이에서 태음태양력의 보호와
독점이 이뤄졌다. 현재도 이와 유사한 상황을 찾을 수 있다. 자신들의 축제력을 회귀선과 분점에 맞추는
새로운 이교도 집단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분화와 복잡한 조직, 상이한 역할 속에서 개인이 맡은
다양한 의무 등으로 인해 가족, 집단, 조직을 위한 개별적인 달력이 만들어진다._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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