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이해할 때가 있을 것이다
황암(黃岩) 영석사(靈石寺)의 신고범(新古帆)은 처음에 호구(虎丘)에서 동주(東州) 스님을 찾아뵙고
일찍이 장약(藏鑰;장경각 담당)을 맡았다. 다음에 홍복(鴻福)에서 축원(竺元) 스님을 찾아뵈었다.
어느 날 저녁 방장(方丈)에 올라가서 축원스님께 法門을 請하고는 말했다. “저는 ‘개에게는 佛性이
없다’는 話頭를 들고 있는데,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하였으니 화상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그러자 축원
스님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밤이 깊었으니 물러가거라!”
고범은 방으로 돌아와 축원 스님을 욕 하며, “나를 위해 말해주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화를
낸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이를 축원 스님에게 이야기하자 스님은 “그가 훗날 스스로
理解할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범이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곧바로 확연하게 깨쳤다.
- 산암잡록(山菴雜錄)에서
예부터 ‘부처는 활등처럼 말씀하시고 조사는 활줄처럼 말씀하신다(諸佛說弓 祖師說絃)’고 했습니다.
가르침을 베푸는데 있어 석가모니 부처님은 慈愛롭게 상대의 根機에 맞춰 설명도 하고 완곡하게 비
유도 들어 말씀하시지만, 祖師 스님은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킵니다.
(直指人心 見性成佛)
마음이나 마음의 성품은 결코 어떤 생각이나 이해나 헤아림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 이러한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서는 낯설고 어렵게 느끼거나, 때로는 당혹감과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因緣만 맞는다면 공부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고 단박에 깨달을 수 있는 지름길,
경절문(徑截門)이 直指人心입니다.
그 대단했던 임제 스님 역시 황벽(黃蘗) 스님에게 佛法, 眞理, 宇宙大道, 깨달음, 佛性의 분명한 뜻을
세 차례나 물었는데 세 번 모두 다짜고짜 몽둥이로 맞기만 하였습니다. 도무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임제 스님은 황벽 스님 곁을 떠나 대우 스님을 찾아갔다가 “황벽 스님이 그렇게 노파심으로 애를 썼
거늘….” 하는 대우 스님의 말을 듣고 그때서야 황벽 스님의 뜻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대로가 佛法, 眞理, 宇宙大道, 깨달음, 佛性, 本來面目, 본래의 나,
근원의 나, 진짜 나인데 또 다시 佛法의 분명한 뜻을 묻는 것은, 본래의 자기이면서 내가 누구냐 묻는
바보나 미치광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화역 스님이 몽둥이로 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대만 때려도 分明한 이 事實을 황벽 스님은 세 차례에 걸쳐 60대나 때렸다고 하니 진실로 노파심
간절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범 스님처럼 話頭를 들고 들어갈 곳을 찾고 있다면,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울 가는 길을 묻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개에게는 佛性이 없다’, ‘무(無)!’를 놓아두고 다시 들어갈 곳을 찾는
것이나, 임제 스님이 佛法의 분명한 뜻을 묻는 것이나,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 몽둥이를 맞아
야 할 어리석은 짓입니다.
축원 스님은 고범 스님의 어리석음을 사나운 목소리로 단칼에 잘라 주었지만 아직 눈이 어두운 고범
스님은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훗날 스스로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이란 말을 전해 듣고서야
비로소 축원 스님의 뜻에 契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축원 스님의 노파심 또한 황벽 스님 못지않습
니다.
이렇게 말해 줘도 이것, 이 하나, 지금 여기 이 자리를 모르겠다면 훗날 스스로 이해할 때가 있을 것
입니다.
-몽지님-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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