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황벽(黃檗)의 일심(一心), 일진법계(一眞法界)

장백산-1 2016. 9. 2. 12:10

황벽(黃檗)의 일심(一心), 일진법계(一眞法界)

 

황벽(黃檗)의 어록을 통칭하여 『전심법요(傳心法要)』라 하는데, 전심법요라는 그 제목에 걸맞게 전심법요 내용의 대부분이 마음(心)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전심법요』는 마조계(馬祖系) 조사선(祖師禪)의 심성관(心性觀)에 관하여 가장 풍부한 해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 『전심법요』의 기록자가 선승(禪僧)이 아니고 배휴(裵休)라는 유학자(儒學者)이기 때문에 일반적(一般的)인 선어록(禪語錄)과는 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전심법요』에서 마음(心)에 관한 황벽의 설명들을 살펴보면 마음(心)을 대체로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하나는 ‘마음(心)이란 무엇인가’를 다양하게 설명했고, 하나는 ‘마음(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는가’를 여러 가지 방편(方便)을 사용해서 설명했다. ‘마음(心)이란 무엇인가’는 마음의 본질(本質)을 밝히는 심성관(心性觀)에 해당하고, ‘마음(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는가’는 마음을 깨닫는 방법에 관한 것으로서 공부하는 방법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심성(心性)에 관한 황벽의 말을 『전심법요』에서 찾아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일심법(一心法) : 모든 부처와 모든 중생은 오직 하나의 마음, 일심(一心)일 뿐 그 밖에 다른 법(法)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바로 중생이다(마음 부처 중생 이 셋 사이에는 차별이 없다.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다).

 

2.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안과 밖의 모든 대상 경계는 오직 마음(心)이 조작해내는 것이다. 

 

3. 청정심(淸淨心)과 염오심(染汚心) :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 늘 두루 밝게 비추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지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의식(意識)의 작용(作用)을 마음(心)이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뒤덮혀있는 까닭에 밝은 본체(本體)인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4. 즉금작용심(卽今作用心) :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고, 글을 쓰고, 글을 읽는 작용(作用)이 그대로 마음(心)의 작용이다. 만약 마음이 어떤 작용도 하지 않으면 마음의 본체(本體)는 허공(虛空)과 같아서 마음의 본체(本體)는 모양도 없고, 처소도 없다. 그래서 마음도 마음의 본체도 사람의 육안으로로는 볼 수가 없다.

 

5. 허공심(虛空心)과 일진법계(一眞法界) : 하나의 마음(일심/一心)은 마치 허공(虛空)과 같아서 없는 곳이 없으나, 생멸(生滅)․ 유무(有無)․ 형색(形色)을 벗어나 있으므로 생각이나 머리로 무엇이라고 헤아려 볼수도 없고,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또 허공(虛空)과 같은 하나의 마음(一心)은 오직 하나뿐인 진법계(眞法界)이다. 

 

1) 일심법(一心法) :『전심법요(傳心法要)』의 첫머리에서 황벽(黃檗)은 “모든 부처와 중생은 오직 일심법(一心法))일 뿐 다른 법(法)은 없다.”고 하여 일심법(一心法)을 천명한다. 그리고는 곧,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바로 중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조록(馬祖錄)』의 시중(示衆) 첫부분에서 마조가 곧바로 “마음이 바로 부처다(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말하고, 달마(達摩)가 중국에 와서 전한 말이 오직 일심법(一心法)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과 꼭 같다. 

 

황벽은 “달마대사가 중국에 온 이래로 오직 하나의 마음(일심/一心)만을 설했고 오직 하나의 법(一法)만을 전했다.”고 하여, 달마부터 중국 선종이 일심법(一心法)을 정통으로 이어 왔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일심법(一心法)의 내용이 바로 심즉시불(心卽是佛), 즉심시불(卽心是佛)인데, 황벽은 즉심시불(卽心是佛), 심즉시불(心卽是佛)을 다음과 같이 일승도(一乘道)라고도 한다.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성품에는 같고 다름이 없다. 만약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의 삼승(三乘)에 의거하면, 불성(佛性)이 있고 중생성(衆生性)이 있다고 말하므로, 드디어 삼승(三乘)의 인과(因果)가 있게 되어 부처의 성품이나 중생의 성품에 같고 다름이 있게되는 것이다. 만약 부처(佛)와 조사(祖師)가 서로 전함에 의거하면, 오직 일심(一心)만이 있을 뿐, 성품이 같거나 다름․ 원인과 결과 등은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직 일승(一乘)만이 있을 뿐 이승(二乘)도 없고 삼승(三乘)도 없다. 다만 석가모니 부처의 방편설법(方便說法)은 예외로 한다. ”이와 같이 일심법(一心法)은 황벽에 와서 다시 분명하게 천명되고 있다. 

 

2)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심지법문(心地法門) : 일심법(一心法)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는 견해(見解)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또는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이다. 이 점도 황벽이 마조의 견해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관해 황벽이 하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예컨대, “마음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法)이 생기고(심생종종법생/心生種種法生), 마음이 사라지면 여러 가지 법도 사라진다(심멸종종법멸/心滅種種法滅). 그러므로 일체법(一切法) , 즉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전부 하나의 마음(일심/一心)에서 만들어지며, 나아가 지옥세계, 아귀세계, 축생세계, 아수라세계, 인간세계, 천상세계 라는육도(六道)의 윤회(輪廻)가 모두 하나의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과 같은 의미이다. 

 

또한 황벽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도 말한다.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함은, 이 세상 모든 것, 만법(萬法)이 모두 하나의 마음에 의지하여 드러나게 되므로 대상(對相) 경계(境界)가 나타나면 마음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대상 경계가 사라지면 마음도 없다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한 마음(淸淨心)위에 대상 경계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말아야 한다."

 

황벽이 말하는 심지법문(心地法門)은 『마조록』에서도 이미 언급되고 있는 내용인데, 남악회양(南嶽懷讓)이 마조에게 법(法)을 전할 때, 전하는 그 법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말하고, 또 시중(示衆)에서 마조는 일심법(一心法)을 말하면서 달마(達摩)가 『능가경(楞伽經)』을 인용하여 중생(衆生)의 심지(心地)를 확인시켰다고도 말하고 있다. 또 백장도 심지(心地)를 언급하고 있으며, 뒤에서 보겠지만 임제(臨濟)도 자신의 법(法)을 심지법(心地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써 보면 조사선(祖師禪)에서 말하는 심성설(心性說)을 심지법(心地法)이라고 부를 만한데, 황벽이 말하는 심지법(心地法)의 기본적인 의미는 위에서 살펴본대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3) 청정심(淸淨心)과 염오심(染汚心) : 황벽이 말하기를 하나의 마음(일심/一心)은 본래 깨끗하여 아무 모습이 없다고 한다. 하나의 마음이 아무 모습이 없다는 말을 달리 말하면 하나의 마음은 어떤 모습이라도 수용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마치 거울 자체에는 아무 모습이 없으므로 거울은 어떤 모습이든지 전부 다 비춰줄 수 있고, 허공(虛空)이 아무 모습이 없으므로 어떤 모습이든지 전부 감싸안을 수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심(淸淨心)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하나의 마음은 텅~비어서 아무 모습이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마음은텅~비었기 때문에 어떤 모습도 전부 다 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황벽의 말을 보자.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은 중생․ 부처․ 세계․ 산하․ 모양 있는 것․ 모양 없는 것과 더불어 시방세계(十方世界), 온 우주에 두루하여(충만해서)  일체(一切)가 아무 분별(分別)없이 하나로 평등(平等)하니 나다 너다 하는 분별(分別)하는 모양이 없다.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 영원히 세상을 늘 두루 밝게 비추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이같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見聞覺知) 작용(作用)만을 마음(心)이라고 여긴다. 보고(見), 듣고(聞), 느끼고(覺), 아는(知) 작용에 하나의 마음(一心)이 가려지는 까닭에 마음의 밝은 본체(本體), 즉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무심(無心)하면 마음의 밝은 본체, 즉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은 저절로 드러나니, 마치 태양이 허공에 떠올라 온 우주를 두루 비추면 다시 막힘이 없는 것과 같다."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 항상 시방세계(十方世界), 온 우주, 이 세상을 영원히 두루 밝게 비추는데도 사람들이 이 청정심(淸淨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견문각지(見聞覺知)를 통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상(相)에 가로막혀서 그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내용을 마음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견문각지(見聞覺知)에 가려진 하나의 마음이 염오심(染汚心), 즉 견문각지로 오염된 마음이다. 그러므로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염오심(染汚心) 즉 견문각지(見聞覺知)에 의하여 나타나는 상(相)을 마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 생각이 없어져야 본래의 청정심,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황벽은 이처럼 견문각지(見聞覺知)로 오염된 마음, 즉 염오심(染汚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일컬어 무심(無心)이라고 하는데, 이 무심(無心)이 곧 황벽의 수행법(修行法)이다.

 

4) 즉금작용심(卽今作用心) : 황벽이 일심법(一心法)과 심지법문(心地法門)을 통해서 말하는 마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허공(虛空)처럼 모양이 없는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고, 다른 하나는 견문각지(見聞覺知)라는 식작용(識作用)으로 드러나는 모양이 있는 마음이다. 청정한 마음(청정심/淸淨心)이 마음의 본체라면 견문각지하는 식작용은 마음의 작용, 심용(心用)이다. 

 

그렇다면 견문각지(見聞覺知), 즉 육식(六識 :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으로 경험되지 않는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을 어떻게 하나의 마음이라고 알아차릴 수가 있는가? 이 의문에 대한 황벽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하나의 마음(一心)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말을 하는 그 작용이 바로 그대의 하나의 마음(一心)이다. 만약 말을 하지도 않고 또 어떤 작용(作用)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본체(本體)는 허공(虛空)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동서남북 방위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에 대해 말을 할 때에도 모양이 없다고만 말할 수는 없고 모양이 있으나 육안으로는 모양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로 오염된 마음, 즉 염오심(染汚心)를 통해서 나타나는 상(相)을 마음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착각이다. 그러나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작용(作用) 즉 상(相)을 나타내는 작용은 상(相)으로 파악할 수는 없으나, 상(相)을 드러내는 보다 근원적인 그 무엇으로서 분명히 진실(眞實)한 것이다. 견문각지하는 작용을 통하여 나타나는 상(相)은 견문각지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러한 상(相)을 만드는 견문각지라는 작용(作用)이 있음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또 견문각지를 하는 작용(作用)은 모습은 없지만 끊임 없이 계속되는 항상(恒常)한 것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상(相)은 견문각지하는 작용(作用)에 따라서 찰나찰나 순간순간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을 견문각지하는 작용(作用)을 통해서 알아차릴 수가 있다는 말이다. 

 

만약 견문각지 하는 작용(作用)이 없다면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 심체(心體)는 마치 허공(虛空)처럼 모양도 없고 처소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마음이 없다고 할 수는 없고 다만 하나의 마음이 인식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마음이 인식되기 위해서는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는 작용(作用)을 통해야 한다. 이처럼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작용을 통하여 그 작용의 배후에 있는 하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곧 염오심(染汚心)이 투영되어 나타나는 상(相)을 통하여 상(相, 모양)이 아닌 비상(非相)인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을 알아차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황벽은 하나의 마음이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작용(作用)을 통하여 식(識)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마음은 파악될 수가 없다고 한다. 견문각지로 작용을 하지 않는 하나의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방위도 없으므로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서(端緖)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고 다만 파악되지 않을 뿐이다.하나의  마음의 이러한 성격은 허공(虛空)의 성격, 즉 허공성(虛空性)과 꼭 같다. 그래서 황벽은 하나의 마음을 주로 허공(虛空)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처럼 하나의 마음을 허공과 같다고 하는 것은 황벽(黃檗)의 심성설(心性說)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이제 허공(虛空)과 같은 마음, 즉 허공심(虛空心)에 관해서 살펴보자.

 

5) 허공심(虛空心)과 일진법계(一眞法界) : 위에서 말한 것처럼 황벽(黃檗)의 심성설(心性說)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하나의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황벽의 심성관(心性觀)을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허공과 같은 하나의 마음, 즉 허공심(虛空心)을 잘 파악해야 한다. 황벽이 마음을 허공(虛空)이라는 방편(方便)에 비유하는 데에는, 허공(虛空)의 몇 가지 특징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 즉 하나의 마음을 깨달으려면 어떤 견해(見解)를 갖고 파악하는 것이 옳은지를 일깨우는 것이다.

 

황벽이 하나의 마음(一心)을 허공(虛空)이라는 방편(方便)에 비유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전해주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의 마음은 허공(虛空)처럼 무한(無限)하다. 하나의 마음은 생멸(生滅)․ 유무(有無)․ 형상(形相)․ 신구(新舊)․ 대소(大小) 등 모든 사량분별과 언어의 상대적 한계를 벗어나 있다.

 

  ② 하나의 마음은 허공(虛空)처럼 모양이 없으므로 사량분별(思量分別)로써는 알 수가 없다. 하나의 마음을 알고자 생각을 움직여 사량하고 분별을 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곧 관념(觀念)의 상(相)을 만드는 것으로 사량하고 분별하는 의식이 꾸며내는 모양일 뿐이고, 허공과 같은 하나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생각으로써 허공과 같은 하나의 마음을 파악할 수는 없다. 

 

  ③ 하나의 마음은 허공(虛空)처럼 모양이 없으므로 어디에도 막히지 않고 장애됨이 없다. 하나의 마음은 허공처럼 무형상이고 청정(淸淨)해서 어떤 의식(意識)과 어떤 경계(境界)에서도 장애됨이 없다. 중생은 눈앞의 허깨비 같은 허망한 경계(境界)와 의식(意識)에 집착해 스스로 장애를 일으키지만, 하나의 마음은 본래가 허공(虛空)과 같으므로 그 무엇에도 장애를 받지 않는다. 온갖 관념의 의식(意識)이 출몰하더라도 하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이나 부처의 마음이나 마음은 똑같은 하나의 마음이다.

 

  ④ 허공(虛空)과 같은 하나의 마음을 알아차리려면 모든 분별의식(分別意識)의 상(相)을 버리고 집착을 없애야 한다.

 

  ⑤ 허공(虛空)과 같은 하나의 마음은 다른 말로 영각성(靈覺性)이다.

 

  ⑥ 허공(虛空)과 같은 하나의 마음은 유일(唯一)한 진법계(眞法界), 즉 일진법계(一眞法界)이다. 허공(虛空)은 없는 곳이 없다. 허공(虛空)은 영겁에 항상해서 있지 않는 때가 없다. 생멸하고 변화하는 삼라만상과 일체의 작용은 허공(虛空)과 함께 이루어 진다. 그러나 허공(虛空)은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삼라만상과 일체의 견문각지하는 작용은 허공(虛空) 속에서 생겨나고 허공(虛空) 속에서 사라지지만 허공(虛空)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허공(虛空)은 어떠한 모양도 없기 때문이다. 우주만물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 우주만물은 생멸하고 변화하는 속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허공(虛空)은 생멸하고 변화하는 속에 있지 않으므로 허공(虛空)에는 시간이 없다. 모양을 가진 우주만물은 서로 사이의 관계에 의하여 어느 정도의 크기로 어디에 있다는 크기와 위치와 방위가 있다. 

 

그러나 모양이 없는 허공(虛空)은 관계를 맺을 만한 그 무엇도 없으므로 크기도, 위치도, 방위도 없다. 허공(虛空)은 텅~비어서 아무 모양도 없지만, 모양이 있는 우주만물은 허공(虛空) 속에서 생겨나서, 허공(虛空) 속에서 변화하여, 허공(虛空) 속으로 사라지므로 허공(虛空)이 우주만물의 근원(根源), 즉 우주만물의 어머니이다. 우주만물은 허공(虛空) 속에서 생겨나고, 허공(虛空) 속으로 사라지고, 허공(虛空)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우주만물은 허공(虛空)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주만물은 허공(虛空)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양이 있는 우주만물이 곧 허공(虛空)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즉 허공(虛空)과 우주만물의 관계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관계이다. 

 

비록 허공(虛空)과 우주만물의 관계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관계이지만, 허공(虛空)의 본질(本質), 본바탕은 아무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모양을 갖춘 우주만물의 측면에서는 허공(虛空)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우주만물이 없으면 허공(虛空)을 허공(虛空)이라고 할 수도 없다. 허공(虛空)이라는 이름은 우주만물에 상대하여 붙인 임시방편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주만물이 있으면 허공(虛空)도 있고 우주만물이 없으면 허공(虛空)도 없다. 즉 우주만물과 허공(虛空)은 이름은 둘이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우주만물과 허공(虛空)이 하나이므로, 우주만물이 그대로 허공(虛空)이고 허공(虛空)이 그대로 우주만물이다. 

 

그러나 우주만물(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것)과 허공(虛空)은 제각각 이름도 다르고 뜻도 다르다. 결국 명칭과 뜻에 따라 분별(分別)해서 보면 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것, 우주만물)이 있고 허공(虛空)이 있어서 각각이 다르지만, 명칭과 뜻을 떠나 만법과 허공(虛空)의 본질(本質)을 알고 나면 만법과 허공(虛空)은 '같은 하나'로서 만법이니 허공(虛空)이니 분별을 하는 명칭은 불필요하다. 마음을 비유하여 설명하면 바로 허공(虛空)과 같다. 허공(虛空)과 하나의 마음이 다른 점이 있다면 허공(虛空)은 삼라만상과 허공(虛空) 자신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의 마음은 삼라만상과 마음 자신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마음은 우주삼라만상을 인식(認識)하고 깨달음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황벽은 하나의 마음을 다른 말로 영각성(靈覺性)이라고도 한다.

 

"영각성(靈覺性)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수명이 허공(虛空)과 같으므로 영각성(靈覺性)은 생겨난 적도 없고 사라진 적도 없고, 있었던 적도 없고없 없었던 적도 없고, 더러운 적도 없고, 깨끗한 적도 없고, 시끄러운 적도 없고 고요한 적도 없고, 어린 적도 없고 늙은 적도 없고, 방위나 장소도 없고, 안과 밖도 없고, 숫자로 셀 수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색이나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기 때문에, 영각성(靈覺性)은 어디서 찾을 수도 없고, 구할 수도 없고, 지혜로써 알 수도 없고, 언어로써 표현할 수도 없고, 경계를 통하여 알 수도 없고, 노력하여 도달할 수도 없다. 모든 불보살, 우주만물, 살아 꿈틀거리는 중생 일체(一切가 영각성(靈覺性)을 가지고 있다."

 

영각성(靈覺性)이 우주삼라만상만물(만법)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세우고 우주삼라만상만물(만법)의 일부(一部)로서의 자기(自己)를 확인하면 이것을 자아(自我)라고 한다. 이러한 자아(自我)는 이른바 중생(衆生)의 마음, 즉 중생심(衆生心)/분별심(分別心) 으로 우주삼라만상만물(만법)이 영각성(靈覺性)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어버리고 거꾸로 영각성(靈覺性)이 우주삼라만상만물의 일부(一部)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중생의 마음(중생심), 즉 분별심(分別心)을 뒤집혀진 마음, 전도(顚倒)된 마음이라고도 하고 속고 있는 마음, 미혹(迷惑)한 마음이라고도 한다. 우주삼라만상만물이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허공과 같은 마음 자체를 돌이켜 볼 때, 다른 말로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할 때 으를 깨달음이라 하고, 깨달아서 허공(虛空)과 같은 하나의 마음(心)의 본체(本體)를 알아차리게 되면 부처(佛)라 이름한다. 

 

그런데 마음의 본체는 허공(虛空)과 같아서 아무 모양이 없으므로 인식(認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습 있는 만법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는 하나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래서 느낌 감각이나 알음알이(知解)로는 하나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하나의 마음이 인식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하나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는가? 하나의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만법을 인식하는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을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이다.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 스스로는 아무 모양이 없으므로 인식의 객체가 될 수는 없으나, 만법을 인식하는 작용은 있으므로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와 같은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 스스로에 대한 확인을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 스스로와 하나가 된다(계합/契合된다)고 한다. 

 

하나의 마음의 본체(本體), 즉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은 허공(虛空)과 같아서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인식하는 작용을 통해서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 스스로를 확인하는 길 뿐이다. 하나의 마음을 허공(虛空)에 비유한다면 허공(虛空)과 그 작용인 만법의 관계가, 하나의 마음에서는 인식 주관인 마음과 인식 객관인 경계(境界)와의 관계가 된다. 경계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모두 18경계(境界) 혹은 오온(五蘊) 등 만법(萬法)을 말한다. 즉 감각적인 것이든, 의식(意識)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현상이든 인식되는 모든 것을 일컬어 경계(境界)라 한다. 

 

이와 같은 경계는 모두 하나의 마음의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고 사라진다. 즉 모든 경계는 하나의 마음과 함께 생겨나고 하나의 마음과 함께 사라진다. 하나의 마음 자체는 모양 없으므로 생겨나거나 사라지지도 않으니 시간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크기도 위치도 방위도 없으므로 공간으로 규정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시간(時間)이니 공간(空間)이니 하는 실체가 없는 허망한 개념(槪念)이야말로 하나의 마음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감각적 대상과 의식적 관념은 하나의 마음의 작용으로 분별을 하는 마음과 더불어 생겨나는 것이다. 

 

감각적인 형태이든 관념적인 형태이든 형태를 지니고 인식되는 모든 것들은 경계(境界)이다. 이들 경계의 생멸 변화에 의하여 시간이 정해지고, 이들 경계의 크기와 위치에 따라서 공간이 정해진다. 따라서 시간이 니 공간이니 하는 개념(槪念)은 하나의 마음의 작용을 통해 나타나는 경계이다. 그런데 경계는 감각적인 형태이든 개념적인 형태이든 형태를 가진 인식의 대상이지만, 하나의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이 어떠한 모양도 없으므로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식되느냐 마느냐 하는 면에서 보면 경계와 하나의 마음은 같지 않다. 그러므로 경계를 인식하는 것처럼 하나의 마음을 인식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하나의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 곧 주관이 주관 스스로의 의식작용(意識作用)을 돌이켜 봄으로써, 즉 회광반조(廻光返照)함으로써 하나의 마음,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 스스로를 확인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마음의 본체(本體)가 허공(虛空)과 같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하나의 마음의 작용을 통해 하나의 마음,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 스스로를 확인하고서 하는 말이다. 

 

여기에 수행인의 어려움이 있다. 모든 경계를 버리고 마음을 텅 비운다는 것은 아직도 텅~빈 마음을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의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다면 어디에 있는 경계를 다른 어디로 버려서 마음을 텅~비울 것인가? 허공(虛空)이 아닌 곳이 어디며, 붙잡고 비울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을 뿐이라면, 잡거나 놓거나 비우거나 채울 곳이 따로 없다. 수행인이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스스로 마음이라고 자인하며 잡고 있는 것을 놓기 어렵다. 그것을 놓으면 마치 허무 속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잡고 있는 것은 허공(虛空)인 하나의 마음,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 아니라, 스스로 분별(分別)을 해낸 경계일 뿐이다. 

 

허공(虛空)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는가? 허공(虛空)은 붙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계합(契合)하여 하나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인이 스스로 마음이라고 여겨 잡고 있는 것을 놓고 허무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는 허공(虛空)과 하나가 되며, 이 순간 허무는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하나의 마음이요 하나의 법계가 된다. 다시 말하면 허공(虛空)과 같은 하나의 마음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가 아니라 식작용을 하는 주관으로서 깨달음을 이루는 주체가 되는 법신(法身)이며, 동시에 식내용을 담고 있는 법계(法界)이다.

 

"부처의 법신(法身)은 마치 허공(虛空)과 같다. 라고 하는 말은 바로 법신이 곧 허공(虛空)이요 허공(虛空)이 곧 법신임을 알려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법신이 허공(虛空)이라는 장소에 두루 퍼져있으며 허공(虛空) 속에 법신이 품어져 있다고 말하니, 법신이 바로 허공(虛空)이고 허공(虛空)이 바로 법신임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만약 허공(虛空)이 있다고 단정하여 말하면 허공(虛空)은 법신이 아니며, 법신이 있다고 단정하여 말하면 법신은 허공(虛空)이 아니다. 다만 허공(虛空)이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않으면 허공(虛空)이 바로 법신이며, 법신이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않으면 법신이 바로 허공(虛空)이다. 

 

허공(虛空)과 법신이 달리 모양이 없으며, 부처와 중생도 달리 모양이 없으며, 생사와 열반도 달리 모양이 없으며, 번뇌와 보리도 달리 모양이 없으니, 모든 모양을 벗어나야 부처이기 때문이다.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지만, 마음과 경계 둘 모두를 잊어야 참 법(法)이다. 경계를 잊는 것은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사람이 마음을 잊지 못하는 것은, 텅 비어서 부여잡을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떨어질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지만, 공(空)이 본래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참 법계(일진법계/一眞法界)일 따름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지만 단순히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것이 아니라 법신이요 법계이기 때문에 중생(衆生)을 말하고, 부처(佛)를 말하며, 마음(心)을 말하고, 경계(境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계를 놓아버리고 하나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허무(虛無) 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만법이 생동하는 일진법계(一眞法界)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나누어 말하면 허공(虛空)과 같은 하나의 마음의 본체(本體)가 식작용(識作用)을 하여 만법(萬法)이라는 식(識)의 세계가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의 마음의 본체(本體), 식작용(識作用), 식(識) 이 3자는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따라서 깨달아 하나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 3자의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매이지 않고 자재(自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때문에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으로써 보면, 하나의 마음이란 본래 일진법계(一眞法界)일 뿐인데, 그것을 분석하고 설명하고 이해하려 하면, 허공(虛空)과 같은 본체(本體) 및 만상(萬相)을 생성하는 작용(作用)으로 나누어 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하나의 마음을 분석하여 이해하는 것이 곧 범부가 하나의 마음을 대상화하여 이해하는 것이라면, 아무런 분석 없이 일진법계(一眞法界)와 그대로 계합(契合)하여 스스로가 바로 일진법계(一眞法界)임을 자각(自覺)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마음을 대상화시켜 마음의 본체(體)와 마음의 작용(用)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리적(義理的) 이해를 위한 편의상의 불완전한 논의일 뿐이고, 하나의 마음을 전체로서 그대로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주체적인 계합(契合)의 길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기본적으로 황벽이 사용하는 하나의 마음(심/心)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허공(虛空)과 같은 마음인 모양이 없는 심체(心體) 혹은 본심(本心)으로서 청정심(淸淨心)이고, 다른 하나는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우주삼라만상만물(宇宙森羅萬象萬物)인 모양이 있는 의식(意識)으로서의 마음인 염오심(染汚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 두 측면으로 나누기 이전의 마음인 일심(一心) 혹은 일진법계(一眞法界) 혹은 영각성(靈覺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다. 『전심법요』에서 황벽은 마음의 이 세 측면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심(心)이라는 한 글자로써 나타내고 있으므로, 그 ‘심(心)' 자(字)가 문맥에 따라서 무형상의 본심(本心)을 말하는 것인지, 유형상의 의식을 말하는 것인지, 일심(一心)을 말하는 것인지를 잘 구분하여 읽어야 한다.

 

예컨대, 생멸(生滅)․ 유무(有無)․ 형상(形相)에 속하지 않고 사량분별로써 알 수 없는 허공(虛空)과 같은 마음(心)이라고 할 때에는 청정심(淸淨心)을 말하는 것이고,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작용을 통하여 드러나는 육식(六識)․십팔계(十八界)의 마음(心) 혹은 무심(無心)이 곧 도(道)라고 할 경우의 마음(心)은 염오심(染汚心)에 해당한다. 그리고 일심(一心) 혹은 일진법계(一眞法界)라고 할 경우의 마음은 청정심(淸淨心)과 염오심(染汚心)을 나누어 보지 않고 오직 하나의 마음(一心)이라는 전체적 측면을 말한다. 청정심(淸淨心)을 심체(心體)라 하고, 염오심(染汚心)을 심용(心用)이라 하면 일심(一心)이나 일진법계(一眞法界)는 체용무이(體用無二)의 전체(全切)를 말하는 것이다.

 

앞절에서 보았다시피, 상대법(相對法)을 쌍으로 대응시켜서 하나의 중도(中道)에로 회귀시키는 설법(說法)은 마조에게도 있었다. 마조의 경우는 생멸심(生滅心)과 진여심(眞如心), 중생심(衆生心)과 불심(佛心)을 대응시켜서 하나의 마음, 즉 일심(一心)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혜능의 대법론(對法論)에서는 생멸심(生滅心)과 진여심(眞如心) 또는 중생심(衆生心)과 불심(佛心)이라는 상대법(相對法)이 일자성(一自性)으로 회귀되었지만, 마조와 황벽에게는 일심(一心)으로 회귀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이미 언급했듯이 조사선의 일반적 특징으로서의 심일원(心一元)을 나타내고 있다.

 

- 황벽(黃檗)의 일진법계/ 작성자 인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