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글:구영식, 편집:김준수]
▲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자료사진). |
ⓒ 남소연 |
"광장의 촛불집회 그 자체에 민주주의의 상상력을 묶어 두려는 것, 대중을 선거와 정당, 의회와 같은 정치의 세계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것, 그것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정당의 발견>, 170쪽, 2015년)
2008년 당시 광우병 촛불집회를 두고 "위대한 시민", "대중의 놀라운 창발성" 등의 찬사가 쏟아졌지만, 박 학교장은 이러한 찬사들을 "과장된 해석과 신화화, 이데올로기화"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은 촛불집회를 신화화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중략) 촛불집회에 대한 여러 해석들은 마치 촛불집회를 누가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지를 경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실제 현실의 여러 측면이 획일화되고 과장되고, 나아가서는 신화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향이 커졌다."(<정당의 발견>, 161~162쪽, 2015년)
박 학교장의 결론은 "운동이 정치를 대신할 수는 없다"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최근 7차례 총 759만 명(주최 측 추산)이 참가했고, 대통령 탄핵안 국회 통과까지 이끌어낸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를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촛불집회는 왜 '대사건'인가?"
프랑스 역사학자인 페르낭 브로델은 역사('역사적 시간')를 사건사(단기지속), 국면사, 구조사(장기지속)로 나누었다. 페르낭 브로델은 '장기지속'(longue duree)이 우리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봤다.
14일 오후 3시 정치발전소 사무실에서 만난 박상훈 학교장은 이러한 페르낭 브로델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를 "장기적 파동을 갖는 대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언뜻 보면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과장된 해석과 신화화, 이데올로기화"라고 비판했던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평가처럼 느껴진다.
그는 "모든 행위가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어서 옛날 역사학자들도 장기적인 문제를 가리키는 사건과 작은 사건을 구분했다"라며 "우리가 만들어낸 사건 가운데 지나가는 것도 있고,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그 범위가 좁은 것도 있고,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되는 '대사건'이 있다"라고 설명해 나갔다.
▲ 박근혜 탄핵 후 첫 주말집회 박근혜 대통령 탄핵 가결 후 첫 주말인 10일 오후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정권 끝장내는 날' 촛불집회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
ⓒ 사진공동취재단 |
그는 "8년 전 촛불집회는 '대사건'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라며 "반면 이번 촛불집회는 히스토리 모멘트(history moment), 즉 역사적 전환기를 상상하게 하는 대사건이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먼저 쿠데타나 혁명이 아니고도 헌정 중단 위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이것(헌정 중단 위기)이 사회적 대혼란을 동반한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굉장히 평화롭게 수용됐다. 그동안 통치자들이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국정운영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고 얘기해왔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다."
"굉장히 특이한 경험"은 더 있었다. 그는 "민주화처럼 체제 변동을 가져오는 변화가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사람이 원하는 결과를 상당히 성취하는 경험을 갖게 됐다"라며 "앞선 2008년 촛불은 불만 표출로 기능했지만 이번에는 시민들이 열정과 의지를 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정한 정치적 성과를 나누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앞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 수 있지만 그것이 촛불집회의 끝은 아니다. 촛불을 든 사람이 광장을 떠난다고 해서 그것이 촛불집회의 끝은 아니다. 그래서 대사건이다."
"5% 대 95%의 싸움이었다"
박 학교장이 "대사건"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촛불집회가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집권연합 안에서 벌어진 내부갈등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그의 1차적 진단이다.
"우리 사회 안에서 중요한 자원을 우월한 위치에서 공유하는 파워블록(power bloc), 집권연합, 권력연합이 있다. 그런데 그 집권연합 안에서 박근혜 대통령, 친박(친박근혜)과 그들을 뺀 나머지 다른 보수가 갈등했다. 과거에는 '조중동'이 촛불집회를 경시하거나 비판하고, 여당도 집회를 반대하는 양상이었다. 그래서 보통 촛불집회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 여야의 갈등을 동반하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만 빼고 나머지가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5% 대 95%의 싸움이었다."
그는 "이것은 굉장히 특이한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보수 대 진보' 혹은 '여당 대 야당' 등의 갈등 구도가 아니라 "국가와 시민 사이의 갈등" 같은 갈등 구도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어 그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라며 촛불집회가 커진 또 다른 이유를 설명했다.
"사람들은 드라마틱한 사건이 일어난 그 시점만 생각한다. 우병우 민정수석과 <조선일보>의 싸움, JTBC의 최순실 태블릿PC 공개 등이 촛불로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촛불집회가 그렇게 시작된 것은 맞다. 하지만 빠른 시간 촛불집회가 확산되고, 평화적으로 상황을 관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은 '여소야대'라는 20대 총선 결과에 있다."
그는 "20대 총선에서 야당이 분열했는데도 여당이 수도권에서 패배했고, 여당-보수가 강세인 강남지역에서 여당 기반이 빠졌다"라며 "야당이 분열하고도 승리했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라고 분석했다.
그는 "(20대 총선 이후) 외견상으로는 친박이 새누리당의 지도권을 가졌지만 그때부터 친박과 친박적 정치관은 보수 안에서조차 소외되기 시작했다"라고 지적했다. '여소야대'를 만든 20대 총선을 거치면서 집권연합 안에서 '친박의 고립'이 시작됐고, 이것 때문에 촛불집회가 확산되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대의제를 활용하는 정치적 시민의 출현"
박 학교장은 "이번 촛불집회는 시작부터 정치적이었다"라며 "시민들이 '정치인들 뭐하냐?', '정당들 뭐하냐?'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정치의 역할을 호명해주었고, 정당도 촛불집회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라고 말했다. '반정치적'이었던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일부에서 직접민주주의를 얘기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정치가 제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정치를 손에 들었다. 대의제민주주의를 다양한 수단으로 유용하게 쓰고 실험했다."
그는 "8년 전 촛불집회 때에는 지식인들이 촛불집회를 과도하게 이상화하면서 선거나 대의제에 희망을 갖지 말라고 했다"라며 "하지만 그 이후 8년은 선거나 대의제를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고, 그것이 20대 총선의 결과로 나타났다"라고 분석했다.
"선거나 대의제의 수단을 가지고 대통령의 책임(탄핵안 처리)을 물었다. 기본권과 저항권을 허용하는 정치의 수단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이번 촛불집회의 새로운 점이다. 보수정부 9년을 헛되이 보낸 것이 아니다. 보수정부 경험을 통해서 대의제가 민주주의를 위한 자연스러운 무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어 그는 "8년 전에는 정치가 필요 없었고, 대의제와 선거, 정당은 정치인들만의 놀잇감이라고 생각해 그들을 믿지 말라고 했다"라며 "하지만 이제는 '정치는 우리의 일부잖아, 원래 그것은 우리 것인데 우리가 활용하는 게 뭐가 문제냐' 이렇게 엄청나게 달라졌다"라고 진단했다. 또한 "이것은 어마어마한 차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8년 전 반정치적 열정으로 가득 찼던 촛불집회와 달리 이번에는 처음부터 정치적 집회였고, 정치라는 민주주의 수단을 쓰는 정치적 시민이 출현했다"라며 "시민사회적 관점의 시민이 아니라 '민주정치의 주인은 우리다'라는 관점의 정치적 시민이 출현한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자료사진). |
ⓒ 남소연 |
"입법부와 헌법, 온건 다당제의 발견"
박 학교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굉장히 빠르게 처리된 것도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탄핵안 가결을 통해 대통령 중심제로부터 의회중심제로 이행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을 시작했다"라며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가장 적법하면서 권위있는 방법이 입법부의 탄핵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자기 의지에 의해 사임하는 것보다 입법부(국회)에서 탄핵하는 것이 민주적 처벌이고, 3권 분립에 합당하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얘기다. 그냥 '물러가라'는 권위주의 담론이 아니다. 대통령에게 문제가 있다면 탄핵되어야 하고, 그것을 입법부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권의 중심은 입법부이고, 제1권력기관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입법부의 발견'이다."
그는 "그동안 헌법이 우리 것이라는 느낌이 없었고, 법률전문가나 지식인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했다"라며 "하지만 이번 탄핵안 가결 과정에서 사람들이 헌법을 자유자재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헌법의 발견'이라고 할 수도 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87년 (직선제) 헌법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시민들이 익숙하게 쓰지 못했다. 그랬는데 이번 촛불집회와 탄핵이 87년 헌법에 시민적 생기를 불어넣었다. '헌법을 이렇게 저렇게 활용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시민적 무기로 헌법이 주목받은 것은 큰 변화이고 중요한 일이다."
특히 그는 20대 총선에서 야당이 두 개 이상 등장했다는 점에 특별히 주목했다. 그는 "야당이 두 개 이상이라는 것을 '재난적'이라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지만 야당이 늘어난 결과가 보수의 분열과 약화를 동반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거대 여당에 맞서기 위해 야당은 합쳐져야 한다'며 야권연합, 야권연대가 많이 제기됐다. 그런데 야권이 무리하게 연대하기보다는 야권이 2.5개가 되는 것이 정치발전을 가속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야당이 복수여도 결과는 나쁘지 않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그는 "결국 20대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고, 보수 안에서 친박이 도덕적, 정치적 정당성을 크게 상실하면서 촛불집회가 대사건으로 등장했다"라며 "그런 과정을 거쳐 촛불집회는 국가(박근혜-친박) 대 나머지 시민의 싸움이 됐다"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입법부와 헌법의 발견에 이어) '온건 다당제'도 주목해야 한다"라며 "한국사회에서 양당제가 불가피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이번에 야3당이 탄핵을 종결한 것을 감안하면 온건 다당제도 받아들 수 있게 됐다"라며 "2.5개 정당(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이 만들어내는 물리적 효과를 경험했다"라고 말했다.
"야당이 하나였으면 어땠을까? 나는 탄핵안이 가결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탄핵 국면은 야 3당 체제의 성과다. 야 3당 체제여서 탄핵안이 빠르게 처리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는 "강한 여당과 보수를 견제하기 위해서 야당은 하나여야 하고, 그 하나의 야당을 통해 민주대연합을 실현해야 승리한다는 가정은 구시대적이다"라며 "이제 그 가정을 확실하게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촛불집회의 확실한 교훈이다"라고 강조했다. "야권연대, 야권연합, 하나의 야당론은 페기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강한 청와대는 민주주의 시대에 맞지 않아"
특히 박 학교장은 내년 대선의 중요한 의제로서 '청와대 개혁론'을 제기했다. 그는 "내년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대통령 권력은 줄어야 한다"라며 "특히 청와대 권력을 민주화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대선후보나 대통령이 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개혁의 중심으로서 강한 청와대를 주장했고, 노무현 정부 내내 청와대가 커졌다. 이렇게 청와대를 강화시킨 것이 지금의 문제를 가져온 측면이 있다. 강한 청와대를 만들어 개혁하자는 개혁론은 적절한 개혁론이 될 수 없고, 민주주의 시대에 맞지 않다. 이것은 촛불집회에서 확인된 것이고, 촛불집회의 보이지 않는 명령이다."
이어 그는 "지금 청와대는 과도하게 크다, 이렇게 많은 보좌진이 필요하지 않다"라며 "대통령이 내각을 통해 지휘하면 충분하다"라고 강조했다.
"집사인력을 이렇게 많이 가질 필요가 없다. 장관 밑에 있는 행정기구, 인력이 어마어마하다. 대통령이 장관을 통해 일했다면 훨씬 더 잘 개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경호원에 둘러싸여 하늘로 올라가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차단된다. 그러면 대통령이 시민생활의 숨결을 느낄 수 없다."
그는 "'강한 청와대 개혁론'은 구악이 너무 크기 때문에 비상한 개혁을 해야 한다는 논리 위에 서 있다"라며 "하지만 비상한 개혁론은 성과도 없었고, 구체제적인 국가운영만 강화시켰다"라고 꼬집었다.
"선한 의지를 가진 대통령이라면 결과도 좋을 것이라며 강한 청와대 개혁론을 얘기한다. 하지만 체제는 '민주주의'인데 '선한 군주'로 개혁하는 것은 부정적 효과가 크다. 대통령이 제대로 일하려면 집권당을 기반으로 책임정치를 해야 한다. 대통령은 내각을 제대로 지휘해 정부를 운영해야 한다."
그는 "프레지던트(president)는 '사회 보는 사람'인데 '대통령'(大統領)이라고 이름 붙이고 어마어마한 권력을 줬다"라며 "청와대가 '군주정'의 구조처럼 돼 버렸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민정수석은 검사출신이 아니라 변협에서 추천받고, 수석의 내각 관할권도 없애야 한다"라며 "이렇게 대통령(청와대) 권력을 투명한 굴레에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라고 거듭 청와대 개혁론을 주장했다.
"야 3당 체제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 야 3당 대표, 탄핵 가결 이후 첫 회동 김동철 국민의당 비대위원장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지난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야3당 대표 회동에 참석해 손을 맞잡고 있다. |
ⓒ 남소연 |
"야 3당 체제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대선 일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야 3당이 중심이 돼서 국정조사, 특검, 헌재의 탄핵 인용 등까지 관리해야 한다. 시민들이 야 3당 외에 정치적 권위를 준 곳은 없다. 탄핵이 정리되고 대선 일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새누리당의 정치적 시민권을 인정할 수 없다."
그는 "황교안 체제를 야당이 접수해서 야당이 관리하는 비상책임내각 형태로 운영하기를 바랐다"라며 "그렇게 했다면 내각제를 실험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생겼을 것이다"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야당이 내각을 움직인다면 과도기적으로라도 사회개혁과제가 확실하게 자리잡을 수 있다"라며 "야 3당 체제가 탄핵안 처리까지는 잘했는데 지금이라도 이러한 역할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문했다.
이어 그는 "황교안 체제가 국정 관리 이상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도록 해서도 안된다"라며 "야 3당이 내각을 포함한 황교안 체제를 잘 다루어서 야 3당이 합의하는 선에서 정부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탄핵안 처리 국면을 주도한 야 3당 체제가 탄핵안 처리 이후 국면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본선 결과를 지배한다"라며 "야 3당이 책임있는 과도기 관리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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