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 karma, 카르마)란?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업(業) 덩어리 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업을 소멸하거나 닦아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업’이리는 그 말처럼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도 드문데 말이지요.
자 그러면 業이란 무엇일까요? 인간들이 삶을 살면서 자기 뜻대로 일이 잘 안 풀릴 때 뭐라 그럽니까.
“나는 왜 이리 전생에 지은 業이 많은 것일까?” “업장(業障)이 얼마나 두꺼워서 이리도 일이 안풀리는
것일까” 라는 식의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대체 業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業이라는 말의 語原이 본래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業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
인데 이 카르마라는 말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땅으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漢文으로 번역되는 과정
에서 바로 업(業)字를 사용하게 됐어요. 業을 가장 알기 쉽게 얘기하면, 내가 하는 일, 내가 하는 행위, 즉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행위하는 모든 생각 마음, 말, 행동 그 자체가 業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하는 일을 물을 때 뭐라고 묻습니까. “네 직업(職業)이 무엇이냐?” 그러지요.
이 질문도 결국은 상대가 현재 하는 일 즉 業을 묻는 것입니다. 내 직업은 상업이다, 농업이다, 공무원이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직업도 業이지요. 그러나 직업 이전에 했던 일거수일투족, 이르킨 생각 마음, 말, 행동
모든 행위 자체가 業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와 달리 分別인 善과 惡, 是와 非(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나와 너, 삶과 죽음,
높고 낮음, 크고 작음, 가고 옴, 시작과 끝, 건강과 병듦,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좋아함과 싫어함 등의 온갖
分別心을 누가 미리 만들어 설정해 놓은 개념, 관념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누가 미리 만들어 놓은 관념
개념도 아닌데 사람들 앞에 선과 악과 시와 비, 미와 추(醜) 등등의 분별하는 마음 생각이 왜 일어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을 하시겠습니까?
선과 악, 옳음과 틀림, 미와 추 등으로 分別하는 原因은 인간의 마음에서 일으키는 분별심, 생각입니다.
분별심, 생각이 일어나는 바탕 마음, 이 바탕 마음이 모든 분별의 원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선과 악으로
분별되고 갈라질까요. 악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이 바로 죄가 되는 순간이요, 그 다음에 착한 생각, 어진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이 바로 복이 되는 순간입니다.
아예 분별심, 생각 자체를 쉬어버리면 죄도 없고 복도 없어요. 텅~빈 바탕 마음에서 일어난 분별심,생각,
좋고 나쁘다는 분별심, 생각 등 분별심, 생각 자체를 ‘사업(思業)’ 이라 말합니다. 이 思業은 꺼 버리면 業이
되질 않는데, 분별심, 생각을 마음속으로 결정지어 버리면 ‘작위업(作爲業)’ 즉 ‘사업’ 이라고 말합니다.
또 결정지어진 온갖 분별심,생각(意業)을 인간의 육신이 온갖 行動으로 옮기는 것을 ‘행위업(行爲業)’ 즉
‘사이업(思已業)’이라 합니다. 생각 분별심 마음으로 짓는 意業(思業), 온갖 말로 짓는 口業, 온갖 신체적인
행동으로 짓는 行業을 통칭해 業이라 말 하는 것입니다. 이 삶, 인생, 현실세계, 현상세계에서 내가 하는
모든 행위, 즉 몸으로 짓는 업, 말로 짓는 업, 분별심 생각 마음 뜻으로 짓는 업이 모두 다 業입니다.
일생동안 사람들이 지은 身業, 口業, 意業의 業은 끝이 없지요. 사람은 의도적 의지적으로 생각하고 분별
하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한 모든 행위, 즉 업의 주체이고 업의 상속자이며, 업은 사람들 각자가 태어날 모태
이자 친구이며 피난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는 행위(업), 즉, 생각, 말, 행동이 그 사람을 높거나
낮게 하기도 하고 그리고 거룩하거나 천박하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窮極的)으로 자아(自我, 나라고 여기는 고정된 실체)는 實在하지 않지만 무시무종으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파동하는 에너지 운동의 저변에 잠재된 業力의 흐름 때문에 生과 死가 있
다고 여기는 인간의 분별심, 생각이라는 굴레 감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의식의 윤회는 끝이 없습니다.
허망한 환상에 불과한 삶과 죽음이 있다고 여기는 분별심, 생각이라는 굴레, 생사윤회라는 고통 두려움의
감옥, 그 고통과 공포의 조건(業)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는 방법, 즉 해탈을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스스로의
노력과 체험을 통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노
력,수행을 지속적으로 실생활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올바른 노력, 마음집중, 마음챙김으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되,
‘싫다, 좋다’, 이쁘다 밉다, 옳다 그르다, 삶과 죽음, 가고 옴, 아프다 건강하다, 시작과 끝, 너와 나 등으로
분리 구분하는 分別心, 分別意識, 자아의식, 에고의식, 생각을 자주 쉬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하거나
증오하는’ 분별심이 약화되면 될 수록 욕망의 사슬도 느슨해지고 말이나 행동하는 반경도 그만큼 자유
스러워져, 탐진치(貪瞋痴, 욕심부리는 마음, 분노하고 원망하는 마음, 시기 질투하는 어리석은 마음) 삼독
심(三毒心)에서 벗어나 무한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해탈 열반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하고 화내고 욕심내는 분별심, 생각, 마음의 부스러기 때문에 이 세상과 동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긍정하는 마음으로 나를 낮추고 남을 배려하면서 매일 ‘나무아미타불’을 수만 번 염송하면 마음이 움직이
게 되고 공덕이 쌓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업장을 소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염불을 해 보십시오. 염불은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지장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주님,
하나님, 삼신할머니, 옴마니반메훔 등 어떤 이름이라도 괞찮습니다. 돈 들어가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밑져봐
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염불은 현상의 나와 본질의 내가 합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입니다. 단 1초를 염불하더
라도 지극정성의 마음으로 다른 생각 딴 마음 분별심 일으키지 말고 본질의 나를 생각하고 명호를 불러 보세
요. 그 1초가 바로 극락입니다. 또한 1초가 다시 1초로 거듭나면 그것이 바로 염불 삼매의 상태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10만독, 20만독을 하는 것보다 지극정성으로 1초를 염불하는 것이 더 공덕이 클 수 있습니
다. 염불은 얼마나 많이 하느냐보다 얼마나 정성을 들이며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염불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은 염불 수행이라 하지만 정말 쉽게 일상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염불입니다. 밥 할 때나 설거지 할 때나
청소 할 때나 지하철을 탈 때도 한마음으로 염불을 해 보십시오. 태양이 있는 한 햇빛이 비추는 것이 불변
의 진리이듯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면 몸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금강석 같이 단단해지고 건강해 집
니다.
입으로 소리내어 칭명 염불을 하는 것도 좋은 수행이지만 마음속으로 칭명을 하는 것도 염불 수행의 좋은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꾸준히 염불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매일 아침 저녁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등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을 1만번씩만 해 보십시오. 생활이
확 달라질 것입니다. 아침에 염불을 하기 위해서 저녁에 일찍 자야 할 것이고 일찍 자기 위해서는 그 전에
하루 일과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더 알차게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염불 공덕도 쌓고 스스
로 생활에 변화를 가져와 매일매일 생생하게 숨쉬며 살아있는 참된 불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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