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자신을 낮추면 행복이 찾아온다

장백산-1 2017. 7. 24. 02:56

자신을 낮추면 행복이 찾아온다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인 불교의 핵심은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입니다.

지혜와 자비가 양대 산맥을 이루는 종교가 불교요, 지혜와 자비가 두 바퀴가 되어 큰 수레, 大乘을 

막힘없이 잘 굴러 가게 하는 종교가 대승불교(大乘佛敎)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양족존

(兩足尊)’이라 칭합니다. 즉, 깨달은 사람은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다 갖춘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불자(佛子, 佛口所生者,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어떠한 존재일까요?

아버지를 닮기 위해, 아버지인 부처, 이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자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곧 자비와 지혜의 실천을 함께 갖춘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佛子입니다.


지혜가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인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계발하는 것이라면(上求菩提, 內求菩提),

자비는 ‘나’ 바깥의 세계 또는 대인관계를 원만히 이루어 내는 실천입니다(下化衆生, 外化衆生).

지혜가 자리(自利)에 초점을 맞춘 가르침이라면, 자비는 이타(利他)에 초점을 맞춘 가르침입니다.

자연히 自利인 智慧가 원만히 갖추어지면 利他인 자비 실천을 슬기롭게 發現시킬 수 있고,

利他行인 자비 실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지혜 자리의 삶이 크게 열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불교 궁극의 목표는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함께 갖추는 것(兩足尊)입니다. 하지만 지혜는 

개인의 수행이나 개인의 능력과 함께 하는 것이므로, 오늘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자비의 실천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것는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몸과 말과 뜻, 곧 신,구, 의

(身 口 意)라는 삼업(三業)즉, 생각 마음, 말, 행동이라는 세 가지 행위를 함으로써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흐뭇하고 고맙고 보탬이 되는 행동 생활을 하고 말을 하고 생각 마음을 쓰는 것이 자비의

실천입니다.


자비 실천은 마치 훈훈한 봄 기운과 같은 에너지입니다. 만물이 봄 기운을 받게 되면 얼음도 녹고 

풀도 돋아나고 꽃도 피어나듯이 자비 실천의 기운을 받으면 인생도 더불어 활력을 얻게 됩니다.

삭막하던 현실세계에 봄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자비심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부보는 자식에게 항상 사랑을 베풀고 잘못한 것을 너그럽게 이해하며 바른 길로 이끌고 큰 잘못까지도 

능히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정말 가난하고 못 배우고 불행하고 병들고 부족한 이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그들을 어루만져주고 

다독거려주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좋은 마음 한번 써주는 것이 자비 실천 입니다. 

그러나 힘 있는 내가 나보다 모자라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자비라고 생각하면그건 큰 오해입니다.

너는 ‘나보다 모자란다’, ‘부족하다’, ‘너는 돈이 없다’, ‘너는 인물이 못생겼잖아’, ‘너는 벼슬이 없고  

나보다 아래잖아’ 이러한 생각 마음이 있으면 올바른 자비 실천이 발현되지 못합니다. 베풀면 나에게 

큰 복이 돌아오고, 기분이 좋아지고, 득을 보기 때문에 베푼다는 식의 행위라면 어찌 자비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스스로를 자비로운 모습으로 포장하여 남에게 돋보이고자 하는 위선적인 행동 이라면 오히려 

그런 행위는 죄업이 될 뿐입니다. 진실로 자비심이 깊은 사람은 진실을 외면한 거짓 말, 거짓 행동,

거짓된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대합니다. 누구나 불성(佛性)

을 지닌 거룩한 분, 장차 부처가 되실 분으로 봅니다.


무학 대사가 이성계 태조에게 한 말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으로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로 보인다.”

는 말씀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고자 노력하여 부처님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미운 사람도 좋은 사람도 없고, 악한 사람도 없고 나착한 사람도 

없으며, 나보다 위나 아래에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분별이 없습니다. 이같은 바른 견해 이것이 바로 

8정도의 정견(正見)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은 八正道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가지가지의 

방편을 쓰신 것이 팔만대장경입니다.


‘남편부처’, ‘부인부처’, ‘아기부처’, ‘시어머니부처’, ‘며느리부처’ 등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부처인데

이 세상 모든 것을 어찌 부처님 받들듯이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부처님께서 ‘배고프다’ 하면 

음식을 올릴 일이요, ‘아프다’고 하면 정성껏 돌볼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비 실천입니다.

  


그런데 중생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밉고 싫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내면세계에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자기가 지은 업장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의 내면세계가 미움의 요소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미워합니다.실로 세상을 살다보면 가까이에 미운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미운 사람이 또 생깁니다. ‘저 미운 놈! 다른 데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하다가 그 사람이 가고 나면 내 마음 자리에 또 다른 미운 놈이 들어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운 놈’을 쫓아버리기보다는 우선 먼저 내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미움’의 

요소를 자비심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미운 사람을 연민히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장차 부처될 분으로 알고 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떠한가요? 미운 놈을 연민의 마음으로 불쌍히 봐주기가 쉬운가요? 그 미운 사람을 부처님처럼 

보는 것이 쉬운가요? 보통 사람이라면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업식을 바꾸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미워하며 살아야 할까요?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이 하심

(下心)입니다. 下心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고 믿는 잘못된 생각인 망상을 본래의 내 자리에 내려

놓는 것입니다.


아상(我相)을 멈추게 하는 下心이라는 방편의 藥을 써야 합니다.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있지도 않은 나라는 아상을 과시하면서 상대를 깔보거나 무시하는 아상에서 비롯됩니다. 이 아상의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의식의 세계인 삼악도(三惡道)의 의식 세계는 깊어만 갑니다.

아상으로 인해서 남을 미워하고 무시하게 되면 지옥, 아귀,축생의 세계, 삼악도와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마음공부도 마찬가지요, 자비심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상이 치성하면 깨달음을 이루는 공부에 

진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상이 가득 차 있으면 본래의 깊은 자비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아상을 없애는 최상의 방법인 下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下心이 무엇인가? 나를 남의 발 아래에 둘 수 있는 마음입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있겠

다는 마음입니다. 가장 밑에 있으면서 일체 중생을 부처님처럼 받들며 살겠다는 마음 자세입니다.

이렇게 下心을 하는 이의 마음이 어찌 자비롭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맑게 깨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발심자경문』에도 “범유하심자 만복자귀의(凡有下心者 萬福自歸依)”라고 하여, “무릇 하심을 하는 

자에게 온갖 복이 저절로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아상이 무너지고 하심만 잘 되면 모든 존재를 차츰 

부처님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하심만 잘 되면 저절로 자비로워지고 만복(萬福)이 스스로 귀의합니다.

온갖 행복이 저절로 찾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남이 모두 잘 살고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행복한 곳으로 만들려면 하심을 하면서 자비를 

실천하면 됩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대자비의 실천과 하심을 통하여 그분들의 불국토를 이루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범부에게는 무연(無緣)의 대자비를 실천하기가 쉽지도 않고 남을 부처님처럼 떠받

드는 하심을 실천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면상무진공양구(面上無瞋供養具)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구리무진토묘향(口裡無瞋吐妙香) 성 안내는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심리무진시진보(心裡無瞋是眞寶) 성 안내는 그 마음이 진실한 보배로다

무염무구시진상(無染無垢是眞常) 물들지 않고 때 묻지 않은 이것이 항상하는 진실이네  


이 게송은 문수동자께서 당나라 무착 선사에게 일러준 가르침 입니다. 이 게송 속의 ‘성 안내는 그 얼굴’과

성 내지 않는 말 한마디’ 성내지 않는 마음 하나야말로 우리 인가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하고 가정과 사회 

국가를 행복한 사회로 바꾸어 놓는 첫걸음이 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혜인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