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는 크게 두 가지 마음이 있다 / 월호 스님]
첫째는 참마음이요, 둘째는 거짓 마음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평상시에 나다 남이다, 맞다 틀리다, 좋다 싫다고 시비 분별 비교 판단 구분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이런 마음은 모두가 거짓 마음에 불과하다. 본래마음, 참마음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맞다 틀리다, 나다 남아다, 좋다 싫다 등의 시비 분별 비교 판단 구분
하는 마음 이 거짓마음이 자신의 참마음인 줄로만 안다. 도적을 잘못알아 자식인 줄 아는 것과 같다.
거짓 마음이 할 줄 아는 게 딱 한가지 있다. 시비하고 분별하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선과 악을 분별하고 이익과 손해를 분별하며 나와 남을 분별하고 싫은 것 좋은 것을 분별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짜마음, 분별심은 과연 어디에 있다가 나오는 것일까?
능엄경에서는 이러한 거짓마음(가짜마음, 분별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다. 도적을 섬멸하기 위해
서는 도적들이 몰려있는 소굴을 알아야 도적을 소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마음(가짜마음,
분별심)은 안과 밖, 중간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가짜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거짓마음이 있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을까? 그 이유는 마음에 고정된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거짓마음을 두고 거짓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답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이것은 마치 허깨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꿈, 물거품, 그림자가, 이슬이, 번갯불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짓마음인 분별심, 가짜마음은 인연 따라, 조건, 상황 따라 느닷없이 생겼났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특성이 있는 까닭에 정하여진 처소가 있을 수 없다. 거짓마음, 분별심, 가짜마음은 존재 자체가 허망한
것이다. 이 허망한 거짓마음을 '나'라고 고집하여 ‘나’로 삼는 까닭에 윤회가 계속 거듭 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를 주고 받고, 받고 주면서 끊임없이 왔다가 가고 갔다가 오는 것이다. 결국 이 허망한 분별심
, 가짜마음, 거짓마음이야말로 윤회의 주체이며, 생멸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분별하는 마음, 분별심, 가짜마음, 거짓마음을 닦는다 말은 하지만, 사실 닦을 거짓마음이 없다.
거짓마음은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거짓마음을 닦을 수는 없는 법이다. 허공을 닦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거짓마음, 가짜마음, 분별심은 다만 쉬어줄 수 있을 뿐이다. 시시때때로 일
어나는 분별심, 가짜마음, 거짓마음을 쉬게해주는 것, 이야말로 참다운 마음공부이다. 그래서 ‘쉬는 것이
깨달음(歇卽菩提 헐즉보리)’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짜마음, 거짓마음, 분별심을 쉬게해주면, 본래마음(참마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것은
마치 바다에 치던 파도가 쉬면 본래의 바닷물이 드러나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본래의 맑고
잔잔한 바다물에는 세상 온갖 모습이 있는 그대로 찍힌다. 파란 하늘은 파랗게, 하얀 구름은 하얗게,
둥근 것은 둥글게, 모난 것은 모나게, 있는 그대로 비춰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각자 나름대
로의 분별심, 가짜마음, 거짓마음이라는 색안경, 고정관념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색안경을 벗어
버리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본래의 잔잔한 바닷물과 같은 이 본래마음(참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예컨대 어려서 섬진강을 바라보던
성품이나, 나이가 들어서 섬진강을 바라보는 성품이나 다를 바가 없다. 몸은 쭈그러져 늙었을지언정,
섬진강을 바라보는 성품 그 자체는 결코 쭈그러들거나 늙지 않았다. 또한 좌우를 돌아본다고 하자.
그럴 때 얼굴이나 눈은 좌우로 돌아볼지언정, 보는 근본성품 그 자체는 움직임이 없다.
소리를 듣는 근본성품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종소리를 듣는다 하자. 종을 치면 종소리가 생겨났다가
이윽고 사라진다. 하지만 종소리를 듣는 근본성품은 종소리와 함께 생겨나지도 않고 종소리와 함께 사라
지는 것이 아니다. 종소리는 생겨나고 사라짐이 있지만, 종소리를 듣는 근본성품은 생겨나고 사라짐이
없다. 나아가 몸은 잠이 들어도 이 근본성품은 결코 잠드는 법이 없다. 그러기에 꿈 속에서도 보고 듣고
다닐 수도 있는 것이다.
듣는 근본성품이나 보는 근본성품이나 모두 하나로서 본래마음, 참마음이다. 이러한 ‘본래마음 참 나’
로서의 근본성품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상주불멸(常住不滅)이다. 불거부래(不去不來)이다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항상하며, 즐겁고, 불성인 ‘나’가 있으며, 청정하다.[常樂我淨]
출처: BBS불교방송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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