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마음읽기] 늘 또 다른 내일이 온다

장백산-1 2018. 1. 31. 17:33

[마음읽기] 늘 또 다른 내일이 온다

입력 2018.01.31. 01:28 수정 2018.01.31. 06:51


무료한 반복과 새로움이 뒤섞인 것이 일상투박한 돌 안의 옥처럼 일상 속에도 보석 있어

        문태준 시인
얼마 전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을 봤다. 미국 뉴저지 주의 작은 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일상에 관한 얘기인데, 도시의 이름과 운전사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같다. 패터슨은 아침 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차고지에 가서 23번 버스를 몰고 나오면서 패터슨의 일은 시작된다. 패터슨의 버스는 종이 울리는 성당을 지나가고, 공원을 지나간다. 버스는 동일한 노선을 궤도 돌듯 운행한다.

버스를 운전하는 일과의 중간 중간에 잠깐씩 짬을 내서 패터슨은 시를 짓는다. 그가 하루 동안 만난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과 그의 내부에서 생겨난 세세한 감정들에 대해 그만의 글쓰기로 기록을 한다. 패터슨이 처음 쓴 시구는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언제나 손이 닿는 곳에 둔다’라는 문장이었다. 격렬하게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을 성냥에 빗대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면서 쓴 시 같았다.

패터슨의 아내 로라는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패터슨에게 매일 같은 질문을 한다. “오늘은 어땠어”라고. 그러면 패터슨은 “똑같았어”라고 답한다. 아내가 다시 “시는 좀 썼어”라고 묻고, 패터슨은 “응. 조금”이라고 대답한다.

패터슨의 하루는 일정한 시간표가 있다. 그의 일과는 애완견 마빈과 산책을 하고 동네 단골 술집에 들러 맥주 한 잔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패터슨의 일상은 단순하게 구성되고 반복된다. 그의 직장 동료도 지루하고 힘든 일상을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직장 동료는 패터슨에게 불평을 쏟아놓는다. “내가 이러고 산다. 고양이는 당뇨에 걸려 약값이 장난 아니다”라고 투덜거린다. 패터슨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은 비밀 노트에 그만의 시를 쓰는 것. 패터슨은 그의 버스에 탄 승객들에 관해 쓴다. 야근을 앞둔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붕붕거리는 담소와 음탕한 농담을 주고받는 사내들에 대해서 쓴다. 시를 짓는 일로 인해 패터슨이 만난 차창 바깥의 풍경도 죽은, 얼어붙은 풍경이 아니라 움직이는, 생동감 있는 풍경으로 거듭난다.

이 영화는 일상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했다. 내게도 일상은 그럭저럭 지내는 것이었다. 일상을 산다는 것은 마치 누군가의 피로한 몸을 내가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일상에는 반복되는 것의 무료함과 새롭게 일어나는 것의 설렘이 한군데 뒤섞여 있다는 생각을 했다. 위태롭고 안정적인 일이 일상을 함께 구성한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여러 모양과 빛깔의 크고 작은 모래알들이 모여 해변의 모래톱을 이루듯이.

[일러스트=김회룡]

일상은 색색의 천 조각을 이어서 만든 조각보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의 일상이 똑같은 것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지금껏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불규칙하게 일어나고도 있다. 예정된 것들만 일어나지도 않는다. 반쯤은 다른 세계인 것이다. 패터슨이 “늘 또 다른 내일이 온다. 아직까지는”이라고 중얼거렸듯이.

독일의 시인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는 시 ‘마술지팡이’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모든 사물들 속에는 노래가 잠들어 있다/ 이들은 그곳에서 줄곧 꿈만 꾸고 있어/ 그러다가 세상은 노래하기 시작한다네/ 네가 한 마디 주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가 만나는 사물들 속에는 달콤한 노래가 충만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문을 던지기만 하면 사물 속에 잠들어 있는 노래를 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추운 바람 속에, 손수건만한 겨울 햇살에, 털외투를 입은 이웃들의 표정에,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에, 사무실의 나란한 책상과 캐비닛 속에, 병을 앓는 환자들의 병실에, 허기가 붐비는 저녁의 국밥집에 어떤 노래가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고유한 음성의 삶의 노래가 잠들어 있으므로 어느 것 하나 어설프게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일상은 특별하게 보이게 된다. 투박한 돌 속에 푸른 옥이 들어 있다고 했던가. 우리가 무덤덤하게, 예사롭게 여기는 일상 속에도 보석이 들어 있는 셈이다.

영화 막바지에 애완견 마빈은 패터슨의 비밀 노트를 물어뜯어 산산조각으로 찢어놓는다. 패터슨이 창작한 시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우연히 만난 한 일본 시인은 시를 몽땅 잃고 실의에 빠진 패터슨에게 공책 한 권을 건네준다. “가끔은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물하죠”라는 격려의 말과 함께.

일상을 고역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는 “텅 빈 페이지”와 같아서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볼 일이다. 텅 빈 페이지에 어떤 기록을 남길지는 우리의 몫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패터슨의 말대로 늘 또 다른 내일이 온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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