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노병사의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모든 관념(相)에서 벗어나라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다스리고 수행하고 마음을 공부해나가야 되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먼저 ‘최상의 깨달음(아뇩다라삼막삼보리, 무상정등정각 無上正等正覺)을 터득하고야 말겠다.’라는 이 말은 최상의 깨달음이 아니라,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괴로움(고통), 이 근원적(根源的)인 괴로움(고 苦) 이걸 난 해결하고야 말겠다. 생(生) 노(老) 병(病) 사(死)라는 근원적(根源的)인 괴로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의 인생, 삶, 세상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지 않겠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잠깐의 행복, 잠깐의 달콤함, 이건 말 그대로 잠깐이 아니겠는가. 장례식장이나 병원에 한 번만 갔다 와도 죽은 사람이나 병실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고서 아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죽는 일이나 병실에 누워있는 그런 일이 설마 나에게 뭐 오겠나 다들 그 렇게 생각을 하지만 그게 내일이 될지, 당장의 일이 될지 누가 어찌 알겠습니까? 난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 나는 건강하고 나는 아직은 뭐 아무 문제없어.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나중에 마음공부해도 늦지 않아 이런단 말이지요. 지금 방금 이 얘기하면서 제가 소름이 확 끼쳤어요. 야, 병실에 누워있는 일, 죽는 일이 늦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일일까요? 정말 얼마나 허망한 일일까요?
사람들이 각자가 얼마나 살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리고 사실은 여러분 연세에, 제 나이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이 마음공부를 하는 거 결코 빠른 나이가 전혀 아니거든요. 하루 이틀에 끝을 낼 수 있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 지금 당장 정말 열심히 하지 않으면 이번 생에 다 끝내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마음공부 한다고 해도 지금도 늦은 거거든요. 야, 이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라는 마음가짐으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가 어찌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뭐 경전에 비유로 나오듯이 방편(方便)으로 쓰는 말이지만 뭐 지옥(地獄)에서 수억 겁을 보낼지, 축생으로 보낼지, 뭐 어디 가서 뭔, 뭐 어떻게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생(生) 노(老) 병(病) 사(死)라는 근원적인 괴로움, 이 괴로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근원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영원히 행복해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런 발심(發心)을 한 수행자는, ‘내가 최상의 깨달음을 터득하겠다,’ 라는 생노병사라는 근원적인 괴로움을 난 해결하고야 말겠다.’ 라는 그런 마음을 바라고 그런 마음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이렇게 마음을 내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滅道)에 들게 하리라." 일체중생 속에는 나라고 하는 이 중생도 들어있는 것이지요 ‘나’라는 중생도. ‘나’라고 하는 중생을 멸도(滅道)에 들게 하는 것이 곧바로 일체 중생을 멸도(滅道)에 들게 하는 겁니다. 즉, 내가 깨닫는 것이 곧장 일체 중생이 멸도(滅道)에 들게되는 겁니다. 분명하게 결단코 나와 네가 너와 나가 따로따로 없다.
왜 이렇게 얘기를 했느냐면 일체 중생을 멸도(滅道)에 들게 하리라는 마음, 깨닫게 하리라는 마음을 낸다라는 것은 이런 발심(發心 마음을 냄)의 목적이 나를 향하지 않은 발심이지요. 즉, 발심의 목적이 일체 중생을 향한다는 말이지요. 발심이 그렇게 되었을 때,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여기고 믿는 생각 망상(妄想)인 아상(我相), 이 허망하고 헛된 환상(幻想)인 아상(我相)을 내려놓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기어이 끝끝내 한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 아상(我相)이라는 문턱이거든요.
生老病死라는 근원적(根源的)인 괴로움을 해결하겠다는 발심(發心), 즉 깨달음에 대한 발심은 많이 하는데 스님들께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해도 해도 안 된다 안 된다 하는 분들이 딱 마지막에 걸려있는 부분이 뭐냐 하면 ‘내가 깨달아야 한다. ’ 내가 깨달아야 한다는 아상(我相), 생각이 있으니까 아상(我相)인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生老病死라는 근원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겠는 발심, 아상(我相)인 내가 깨달아야 되겠다는 허망하고 헛된 생각(妄想)이 있는 거예요.
허망하고 헛된 생각, 망상(妄想), 환상(幻想)에 불과한 나라고 하는 아상(我相), 내가 깨달아야 한다는 그 마지막 한 생각 이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여겨서 믿는 생각, 아상(我相)이 있다 보니까 내가 깨달아야 한다는 그 분별심(分別心), 나라는 것과 너라는 것이 서로 따로따로 있다고 여기는 분별심(分別心)이 남아있는 동안은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근원적(根源的)인 괴로움을 해결하겠다는 발심(發心), 즉 깨달음에 대한 발심(發心)이 올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다 라는 허망하고 헛된 망령된 생각, 망상(妄想), 환상(幻想)에 불과한 아상(我相)이 남아있으면 아상(我相)인 '내'가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근원적(根源的) 괴로움을 해결하겠다는 발심(發心), 즉 깨닫겠다는 이런 마음을 내는 거(발심 發心) 자체가 벌써 깨달음과는 어긋나는 생각 마음이지요. ‘실체가 없는 나’라는 아상(我相)을 지금도 아직 붙잡고 있는 거니까.
그래서 그 아상(我相)을 쥐고서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근원적(根源的)인 괴로움을 해결하겠다는 발심(發心), 내가 깨닫겠다라는 발심(發心)을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거지요. 일체 중생을 마땅히 멸도(滅道)에, 깨달음에 들게 하리라는 발심(發心), 즉 모든 사람들이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근원적(根源的)인 괴로움을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발심(發心) 그 마음에는 이제 ‘나’라고 하는 허망하고 헛된 생각, 망상(妄想), 환상(幻想)에 불과한 아상(我相)이 개입되지 않은 발심(發心)이예요. 발심(發心)한 목적 자체가 나를 위한, 나의 멸도(滅道), 나의 깨달음이 아닌 일체 중생을 위한, 일체 중생의 멸도(滅道), 일체 중생의 깨달음 즉, 일체 중생이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근원적(根源的)인 괴로움을 해결하도록 하니까.
그런데 중생들은 나와 너를 나와 이 세상을 분별해서 나누고 있으니까. 그 중생들에게 ‘나’라는 아상(我相)에 구속당하지 못하게 하는 방편(方便)으로, 일체 중생이 생노병사라는 근원적인 괴로움을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발심(發心) 이러한 방편(方便)을 사용한 것이지요. 아상(我相)인 내가 나를 멸도(滅道)에 들게 하리라 라는 마음을 서원(誓願)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멸도(滅道), 깨달음에 들게 하리라.
그러면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향해서. 지금까지 살아 온 모든 사람들의 삶의 방식 자체가 삶의 길 자체가 나만를 위한 삶이잖아요. 내가 어떻게 되면 좋으냐,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 질 것이냐. 내가 어떻게 하면 성공할 것이냐 등등... 나 - 만을 위하던 삶을 사는 것, 그것은 어떤 과보(果報)를 받느냐면, 나만을 위했던 내 인생이 이제 내가 나만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만큼 이제 나에게 과보(果報)는 오겠지요.
그런데 일체 중생을 향한 마음으로 발심(發心)의 방향을 바꾸었을 때는 일체 중생이 곧 ‘나’거든요. 그런데 내가 나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나’라는 비좁은 제한된 속에만 갇혀있기 때문에 이게 아상(我相)이고 아집(我執)이고 이기적(利己的)인 마음이기 때문에 아주 작은 공덕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일체 중생을 향해서 내가 복을 짓는다면 나 아닌 타인, 내 옆에 있는 누군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전해주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그 사람을 도와주고 그 사람을 물질적으로 힘든 사람을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또 부처님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법(法, 가르침)을 알려주고 또 힘들고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그 힘들고 고통 받는 마음을 없애주고 이게 이제 무외시(無畏施: 남을 여러 가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줌)거든요. 그 사람이 힘들어하고 두려워 하고 걱정하는 게 무엇일까를 보고, 그것을 내가 없애주는 마음 그런 무외시(無畏施)의 베풂, 재시(財施 : 남에게 재물을 베풂), 법시(法施 : 남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베풂) 이러한 어떤 베풂을 실천하는 마음을 내게 될 때, 더욱 더 직접적인 나를 위한 복은 짓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참, 그 뭐와도 같으냐면 내가 나를 위해서 복을 짓는 것은 나무를 살리려고 하는데 나무 이파리를, 마~악 이파리에다 물을 주면서 이파리를 잘 닦고 갈고 닦고 이파리를 마~악, 이렇게 매일 애지중지 물과 양분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겉으로 지금 당장은 예뻐 보이잖아요. 야, 이파리가 반짝반짝 빛나고 과일이 반짝반짝 빛나고 깨끗하고 먼지도 안 묻고 겉으로 봤을 때는 아 참 좋아 보이니까 남들도 야, 좋아 보인다. 당장 그런 건 있겠지요. 그런데 타인에게 복을 짓는 것은 근원인 뿌리에 물과 양분을 주는 것과 똑같습니다. 근원적으로 내적으로 지금 당장 눈에 결과로 드러나진 않지만, 뿌리에 물과 양분을 주면 머지않아 나무전체가 아주 균형 있는 영양분을 얻게 되지 않습니까. 그것과 똑같다.
왜냐하면 나의 뿌리가 바로 타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어디서 나왔느냐, 타인으로부터 내가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타인을 의지해서 내가 생겨났습니다.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는 것이지, 나 혼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밖에 있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잖아요. 공기의 도움이 있어야 내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고, 태양의 도움이 있어야 내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고, 옷을 만든 사람이 옷을 만들어 주는 도움이 없었으면 내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 옷을 입을 수가 없었겠지요. 음식을 먹는데, 옛날에는 다 자기가 먹을 걸 자기가 농사를 지어서 먹어야 됐지만, 음식을 해주는 사람,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동시다발적으로 돕지 않으면 우린 단 한 순간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 이치를 연기법(緣起法)이라고 말하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서로 상호 연결되고 연관된 관계 속에서 모든 존재가 나를, 나 하나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수 있도록 이 세상 모든 것, 온 우주가 일시에 도움을 주고 있는 거예요.
사실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나’지, 타인이 아니고 내 바깥이 아니거든요. 바깥이 있어야 내가 있는데. 바깥이 있으므로 내가 있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오직 나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나의 근원적인 뿌리는 내가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일체 모든 존재들(일체 중생)이거든요. 그래서 타인에게 복을 짓는다. 타인을 돕는다. 타인을 깨달음, 즉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근원적(根源的)인 괴움을 해결하도록 이끈다고 하는 것은 곧 나의 근원에 물과 영양분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실제 이것은 인과응보(因果應報)로써 초기불교에서도 시론(施論, 보시 ; 재시, 법시, 무외시), 계론(戒論 :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생천론(生天論 : 하늘에 즉 좋은 곳에 태어남)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이 아주 쉽게 애기한 것처럼 이거는 가장 직접적입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상당히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오거든요. 그래서 어~ 낮은 수준의 어떤 방편(方便)의 법문에서는 인과응보에 대한 법문을 많이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마음공부를 하고 싶어도 마음공부할 수 있을만한 복이 안돼서 마음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내가 당장 경제적으로 너무 힘드니까 마음공부할 정신이 없습니다. 내가 당장 남들하고 마음고생하고 남들과 대인관계에서 너무 힘든 게 많으니까, 내가 이 마음공부를 하고 싶어도 자꾸 딴 데 신경을 쓰게 됩니다. 자식이 너무 말을 안 듣고 뭐 자식과의 관계, 뭐 남편과의 관계 부인과의 관계에서 풀어야 될 숙제가 많으니까, 내가 이 마음공부에 올 인을 못하겠네요. 뭐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다는 것이지요. 조금만 더 연세드시면 법회에 오고 싶어도 못 오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 법문이 이제 안 들릴 수도 있고요. 이 책을 보고 싶어도 책을 못 보는 때가 이제 그런 때가 금방 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음공부는 그야말로 바로 지금 당장,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가 아주 좋은 기회 최적기이지요, 최적지이고.
왜냐하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으니까. 무시무종으로 영원히 항상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뿐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여러분은 지금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지요. 그냥 지금 이 자리 이 순간 여기에 있는 거예요. 늙었다 젊었다라는 분별은 거울을 볼 때만 느껴지는 마음지요. 연세 드신 분들, 내가 늙었나? 이게 의식적으로 늙지 않은 거 같잖아요. 여러분들 이십대 같지 않습니까? 의식은 그렇거든요, 사실은. 이 거울을 보는데 젊은이가 보나 늙은이가 보나 뭔 차이가 있어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 만법, 제법, 우리 모두의 근본성품에서는 어떤 분별 차별 구분 구별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하나 일으킬 때만 내가 나이가 든 게 딱 느껴져요. 눈으로 거울 속에 내 모습을 볼 때만 흰머리를 볼 때만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일어나서 나이가 든 느낌이 느껴지는 거예요. 본래는 그런 나이 이런 시간,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냥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가장 최적화된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가장 중요한 때와 가장 중요한 곳만이 있을 뿐 있지요.
그래서 주변에 내가 베풀 수 있는 복을 베풀 수 있다면 최대한 베풀어라하는 이유는 그렇게 복을 많이 베풀어 놓으면 내가 그러한 자양분을 얻게 됩니다. 내가 이 마음공부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양분을 얻게 되고 재시(財施 재물보시)를 많이 베풀면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이 아, 내가 이 물질적으로 허덕이느라고 이 마음공부 못하는 이런 일은 없겠구나.
법시(法施 법보시)를 많이 베풀어서 주변 사람들이 힘들 때 많이 지혜로움을 베풀어주고 이렇게 하게 되면 내가 바른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 훌륭한 법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을 갖게 되고요. 남들에게 무외시(無畏施 두려움 공포를 없애주는 보시)를 베풀어서 남들이 힘들고 두려움을 느끼고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을 없애주면 내가 내 인생에서 두려울 일이 없어지지요. 내 인생에서 두려울 일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냐면, 바로 깨닫게 된다는 애기 즉,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근원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인 생노병사(生老病死)를 깨닫기 전에는 두려운 마음이 완전히 사라질 수가 없거든요. 완전한 무외(無畏)가 될 수없습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 하나만을 생각하고 사는 삶이 중생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라면, 생노병사(생노병사)라는 근원적인 괴로움을 해결하는 발심(發心), 이 깨달음의 마음공부에 있어서는 ‘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방편(方便)으로 ‘나’라고 하는 허망하고 헛된 생각, 망상(妄想), 환상(幻想)에 불과한 아상(我相)을 내려놓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이렇게, 일체 중생을 마땅히 멸도(滅道), 깨달음에 들게 하리라. 완전한 멸도, 모든 존재들의 괴로움을 내가 완전하게 없애 주겠다 라고 발심(發心)을 하는데 서원(誓願)을 하는데,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제로는 단 한 중생도 멸도에 들게 한 바가 없다. 내가 멸도에 들게 했다는 아상(我相)이 없다는 말이지요. 내가 남들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이렇게 좋은 일을 했어. 내가 이렇게 베풀었어 하는 아상(我相)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공덕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하나의 아상(我相)일 뿐이니까. 아상(我相)이라는 분별심(分別心)을 내세우면 아상(我相)이라는 분별심(分別心) 그 마음은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근원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겠다는 발심(發心) 즉,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마음이니까. 그래서 깨닫겠다는 발심을 한 사람이 아상(我相, 나라는 상), 인상(人相, 너라는 상), 중생상(衆生相, 중생이라는 상), 수자상(壽者相, 무병장수 하겠다는 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다. 아, 인, 중생, 수자라는 그 상(相)을 온전히 타파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깨달음, 즉 생노병사라는 근원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겠다는 발심(發心)에 가까이 가는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요.
-법상스님 -금강경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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