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의 깨달음(무상정등정각 / 아뇩다라샴막삼보리)에 이른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자리가 아니기에 ‘무기공(無記空)’을 적멸로 알면 일생 허비
“수보리여, 그대가 만약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킨(발심, 발보리심, 발아뇩다라샴막삼보리심)사람은 모든 존재의 끊어짐(斷)과 없어짐(滅)을 설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말지니라. 왜냐하면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존재에 대해 끊어짐과 없어짐의 관념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제27분 후반부 구마라집 역본의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발아뇩다라샤막삼보리심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에 해당되는 범본(梵本)과 다른 한역본을 보면 ‘보살의 삶(菩薩乘)에 마음을 낸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후반부는 대승보살이 모든 것을 다 끊어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불교수행을 하는 경우 번뇌를 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불교수행자의 네 가지 큰 서원(四弘誓願)에서도 ‘번뇌 다함없지만 끊기를 서원합니다(煩惱無盡誓願斷)’라고 했다. 그럼 번뇌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 끊는 것이 가능한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서 괴로움(苦)의 원인인 집(集)은 고(苦)를 집기(集起)하는 것 즉 부녈 망상 번뇌를 말하고, 멸(滅)은 분별 망상 번뇌가 소멸된 상태 또는 소멸된 경지를 말한다. 그리고 이 분별 망상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으로 도(道) 즉, 팔정도(八正道)가 제시되었는데, 팔정도(八正道)는 팔정중도(八正中道)라고도 한다. 팔정도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최초의 다섯 제자를 상대로 최초로 녹야원에서 처음 설하신 내용인 중도(中道)에 이르는 구체적인 수행법이다.
팔정도, 팔정중도를 좀 쉽게 설명해보면 ①치우침 없이 바른 견해(정견 正見) ②치우침 없이 바르게 생각하기(정사유 正思惟) ③치우침 없이 바르게 말하기(정어 正語) ④치우침 없이 바르게 행동하기(정업 正業) ⑤치우침 없이 바르게 생활하기(정명 正命) ⑥치우침 없이 바르게 노력하기(정정진 正精進) ⑦치우침 없이 바르게 알차리기(정념 正念) ⑧치우침 없이 바르게 집중하기(정정 正定)이다. ‘치우침 없이’라는 말은 중도(中道)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상생활이 ‘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중론(中論)>에서는 팔정중도(八正中道)를 분명히 하기 위해 생김(生) · 멸함(滅), 끊어짐(斷) · 한결 같음(常), 같음(一) · 다름(異), 감(去) · 옴(來)의 여덟 가지 분별(分別)인 치우침(팔사 八邪)을 떠난 것이라는 뜻의 팔부중도(八不中道)를 강조했다. 즉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不生)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不滅),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不斷) 한결 같은 것도 아니며(不常), 동일한 것도 아니고(不一) 다른 것도 아니며(不異), 가는 것도 아니고(不去) 오는 것이 아니다(不來)고 하였다. 팔부중도(八不中道)에서는 위에 예시한 여덟 가지를 대표로 들었지만 중도(中道)란 모든 치우침에서 벗어난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금강경>식으로 말하면 일체의 관념(相), 분별심(分別心)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지의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깨달음인 적멸(寂滅)에 이르는 구체적 수행법인 팔정도(八正道)에서는 번뇌(煩惱)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지도 않았고, 또한 번뇌(煩惱)를 끊어 없앤다는 표현도 하지 않았다. 단지 치우침 없는 바른 삶의 방식을 여덟 가지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번뇌(煩惱)란 치우침 없는 바른 이 여덟 가지 삶의 방식(八正道)가 제대로 실천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분별 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분별 망상 번뇌(煩惱)란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는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로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치우친 잘못된 인식과 치우친 잘못된 생각이 분별 망상 번뇌(煩惱)이다. 인식과 생각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분별 망상 번뇌를 내는 마음과 지혜를 내는 마음이 별개(別個)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분별 망상 번뇌를 내는 마음을 없애버리면 지혜를 내는 마음도 없어지는 법이다.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涅槃)에 대해 ‘완전히 모든 것을 끊어버려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풀이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언어해석만으로 접근한 잘못된 해석이다. 열반이라는 말을 아무리 분석해도 정신적 경지가 그 말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수행자가 아무 것도 없음을 추구하다가 인지작용 없이 며칠이 찰나처럼 지나가는 무기공(無記空)을 체험한 후, 무기공을 적멸(寂滅)로 오인하면 일생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다.
최상의 깨달음(무상정등정각, 아뇩다라샤막삼보리)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끊어없애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지금 여기라는 모든 순간순간이 삼매인 지혜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 살아있는 동안 지금 여기라는 모든 순간순간이 삼매(三昧)인 그 지혜의 삶이 곧 적멸(寂滅)이다.
[불교신문3342호 / 2017년11월4일자]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삽화 박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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