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장백산-1 2020. 10. 2. 14:43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 법정스님

승가에 결제, 해제와 함께 안거제도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결제기간과 해제기간은 상호 보완한다. 결제만 있고 해제가 없다면 결제는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결제가 없고 해제만 지속된다면 안거 또한 있을 수 없다.

여름철 결제일인 음력 4월 보름 이전까지는 책 만드는 일로 너무 바삐 자주 산을 내려갔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과 관계된 일이므로 그 나름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안팎으로 분주하고 고단한 나날이었음이 되돌아 보인다. 이제는 다시 산의 살림살이에만
안주할 때가 되었다.

옛 선사의 법문에 ‘때로는 높디높은 봉우리로 우뚝 서고, 유시고고봉정립(有時高高峰頂立)
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라, 유시 심심해저행(有時深深海底行)’이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안거기간은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는 그런 때이다. 깊고깊은 그 잠김에서 속이 여물어야 
다시 우뚝선 봉우리로  솟아오를 수 있는 저력이 생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나온 세월 동안 내 자신을 일으켜 세우며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가신 큰어른들의 가르침 덕이다. 해인사에서 10여 년을 살면서 안팎으로 
수행자의 터전을 닦던 풋중 시절, 구참 스님들로부터 보고 듣고 익히면서 배운 그 덕이 결코 
적지 않았다. 겉으로는 수행승의 차림만 했지 안으로는 새카만 먹통이었는데 수행의 덕을 
쌓으신 구참 스님들의 말 없는 가르침에 그 때마다 큰 감화를 받아 먹통을 조금씩 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홀로 사는 나를 받쳐 주는 저력이 있다면 장경각 법보전에서 조석으로 기도하던 
그 힘이라고 생각된다. 큰법당에서 대중 예불이 끝난 후 혼자 장경각에 올라가 백팔배를 드리면서 
기도하는 일로 그 날의 정신적인 양식을 마련했었다. 기도는 꾸준히 지속하는 정진력에 의미가 있다.
어쩌다 도중에 한두 번 기도를 거르게 되면 기도의 리듬이 깨지기 때문에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장경각 법보전 주련에는 지금도 이런 법문이 걸려 있다. ‘부처님 계신 곳이 어디인가? 지금 바로
그대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다. 원각도량하처 현금생사즉시(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時)’
이 주련을 대할 때마다 내 마음에 전율 같은 것이 흘렀다. 종교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 설 자리가 
어디인가를 소리 높이 외치고 있었다. 팔만대장경판이 모셔진 그 곳에서 큰소리로 들려오는 그런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서 있는 바로 여기 이 자리를 떠나 따로 어디서 찾지 말라는
그르침이다.

종교만이 아니라 우리들 삶도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떠나서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지금 이 자리 이 순간 여기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뿐이지 다른 시절이 없다,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時現今 更無時節)’라는
임제 선사의 가르침도 같은 뜻이다.

오두막 둘레는 한동안 철쭉이 볼만했다. 그대로 바라보기도 아름답지만 발 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훨씬 아름답다. 여기에 사물을 보는 비밀이 있다. 완전한 노출보다는 알맞게 가려진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드러내기를 자랑하는 여름철에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