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한한 능력을 한정시키는 분별심
본래 사람들에게 부여된 능력은 한계(限界)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자신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려놓고 살아갑니다. '나의 능력은 이 정도가 상한선이야' 라고 스스로 자기 한정의 관념의 선을 그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한정시킨 그 능력을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로 덮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 자신의 능력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삽니다.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어느 선까지만 한정지어 놓고는 스스로가 규정해 놓은 그 자기한정(自己限定)의 관념(觀念)에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사람들이 '내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말을 할 때 그 정도의 능력은 바로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한정짓고 있는 자기한정의 관념에서 나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무한한 스스로의 능력를 얼마만큼 한정 지어 두느냐에 따라
자신의 능력의 범위가 결정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 능력의 범위란 본래부터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스스로의 능력을 한정(限定)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능력만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능력이라는 것은 본래 한정지어진 개념이 아닙니다. 한정한다는 것은 이미 무엇인가가 얼마만큼 있다는 말이지만, 사람들의 본성(本性)은 본래부터 텅~비어 있기에 얼마 만큼이라는 한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본성(本性)은 본래부터 텅~비어 있기에 무엇이라도 또 얼마만큼이라도 담을 수 있는 모양도 정해진 것이 없고 크기도 정해진 것이 없는 공(空)의 그릇입니다.
본래 갖추고 있는 텅 ~비어 오히려 충만한 그 공(空)의 무한한 능력을 똑바로 보십시오.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 법신(法身) 비로자나불(琵盧遮那佛)의 한량없는 무한(無限) 시간(時間) 무한(無限) 공간(空間)의 드러남을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의 본질 본바탕이 바로 법신(法身) 비로자나불(琵盧遮那佛)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들의 본질 본바탕인 법신(法身) 비로자나불(琵盧遮那佛)이라는 주인공(主人工)이 잠시 잠깐 동안 실체(實體)가 없는 연(緣)을 따라 실체가 없는 중생심, 분별심을 일으킨 것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겉 껍데기인 허상(虛象)을 보지 말고 내면에 또 이 우주에 가득히 충만한 법신(法身), 비로자나불(琵盧遮那佛)을 보십시오.
언젠가 해외토픽에 나온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시장에 갔다 돌아오는 엄마가 집 앞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를 불렀는데 그 아이가 엄마를 향해 뛰어오다가 그만 차에 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차 밑으로 들어간 아들을 향해 달려가 차를 힘껏 치켜들고는 아들를 구해내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나중에 엄마의 그 힘이 어디서 나왔나 하여 다시 차를 들어보도록 했더니 차는 꼼짝도 안 하더란 말입니다. 덩치 큰 장정들이 몇 이 들어야 들릴 그런 무게였습니다.
어린 아들이 차에 치인 순간 엄마의 머릿속에는 내가 저 차를 들 수 있을까? 얼마나 무거울까? 무거운데 들지도 못할꺼 119에 전화나 할까 하는 등의 그 어떤 분별심(分別心)이 없었습니다. 오직 차를 향해,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 엄마의 마음에 자기한정(自己限定)의 관념(觀念)은 붙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엄마 스스로의 능력으로 아들을 구할 수 있겠다 없겠다 하는 그 어떤 분별심(分別心)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직 자식을 구하겠다는 생각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끌었을 것입니다. 오직 목표를 향한 순수하고 텅빈 마음만 있었을 뿐입니다.
다른 예로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이란 박사도 평생을 물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하지만 자신의 두뇌 용량의 단 몇 퍼센트도 활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본래 가진 능력(能力)은 한정(限定)되어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한정의 관념에 빠지기 때문에 그 관념의 감옥에 자신의 능력을 가두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한정의 감옥에서 벗어나세요.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무한히 사용하는 겁니다. 자기한정이라는 개념은 아집(我執)이라는 자기집착에 노예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본래 나가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나도 없고 상대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나는 안되고 상대는 된다는 분별심(分別心)도 사라집니다. 상대가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나 또한 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으면 당연히 상대도 할 수 있습니다.
힘겨운 일에 직면해서도,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도, 스스로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마음은 버려야 할 첫 번째 허망한 관념(觀念)입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나약한 마음이 반복되면 그 마음은 점차 현실로 실체화 될지도 모릅니다.
공부 안 된다는 생각, 시험 잘 볼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일찍부터 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되더라도 왜 이렇게 사업이 안되지 하는 마음은 금물입니다. 혹은 사업이 잘 되냐고 누가 묻더라도 '잘 된다' 고 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사업이 잘 될 수 있도록 하는 마음공부, 마음연습이기 때문입니다.
마음도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마음의 도리는 본래 한정된 것,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마음 일으킨대로 성취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모든 것이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어 무엇이든지 마음먹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음먹은 것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여 굳게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일이 않되게 되기 시작하며, 추구하지만 안되는 이유는 오직 '나는 안돼'하는 자기 한정의 마음 때문임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이야말로 내 마음을 연습한 그대로가 나타난 현상(現象)입니다. 누구에게 빌려 준 돈을 떼어 먹혔어도 그것은 내 마음이 일으키는 탐심(貪心)의 드러남이며, 주위 사람이 내게 화를 내도 그것은 내 마음이 일으키는 진심(嗔心 : 화를 내는 마음)의 드러남이며, 생각한 만큼 일이 잘 안 되는 것 또한 나의 어리석은 마음, 치심(癡心)의 나툼입니다.
밝은 마음을 계속 연습하면 그만큼 세상이 밝아지고, 어두운 마음을 계속 연습하면 그만큼 세상이 어두워집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닦은 만큼 세상은 그 만큼만 밝아질 것입니다. 에누리 없는 세상이 바로 인연과(因緣果)의 법칙 아니던가요.
스스로 스스로의 능력을 한정(限定)하지 말고 텅~비어 무엇이라도 다 담을 수 있도록 활짝 열린 마음을 연습하세요. '된다' '된다' 하는 마음을 내면에 담아 두면 모든 일이 절로 되어지고, '안된다' '안된다' 하는 마음을 마음 속에 담아 두면 될 일도 안되는 것이 사람들 마음의 이치입니다.
한정(限定)을 짓지 않는 무한(無限)한 능력(能力)을 지닌 마음이 법신(法身), 비로자나불(琵盧遮那佛), 청안청락(淸安淸樂)의 밝은 마음입니다.
2009.05.07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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