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뜬구름(부운, 浮雲)

장백산-1 2022. 2. 20. 21:57

3. 뜬구름

무생(無生)의 삶 즐기던 선사의 행복감

깊이 보면 허무 아닌 충만의 시 출가하고도 속된 삶 살던 내게
진정한 부와 자유 의미 일깨워 3행엔 매우 예민한 ‘함정’ 있어


뜬구름(부운, 浮雲)

이른 봄엔 매화가 만발하고 깊은 가을엔 들국화가 만개한다.
이 가운데 일 말하려하니 허공에 뜬구름만 오고간다.
春早梅花發(춘조매화발) 秋深野菊開(추심야국개)
欲說箇中事(욕설개중사) 浮雲空去來(부운공거래)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

얼핏 보면 허무의 시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충만의 시다. 이 시를 선사의 또 다른 시 ‘홀로 앉아’(獨坐, 독좌)와 비교하며 읽으면 선사의 삶이 얼마나 충만했는지를 더 밀도 깊게 알 수 있다.

“깊은 산에 홀로 앉아 온갖 일 내려놓고/ 모든 관계를 끊고 나고 없음을 배운다./ 평생을 뒤져봐도 남은 물건은 없고/ 한 사발 새 차와 경전 한 권뿐이다.[獨坐深山萬事輕(독좌심산만사경)/ 掩關經日學無生(엄관경일학무생)/ 生涯點檢無餘物(생애점검무여물)/ 一椀新茶一卷經(일완신차일권경)]”

얼마 전, 지인을 만났다. 20년 만이었다. 나의 (승려로) 변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지인이 물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냐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매우 만족하고 있다고. 지인은 또 물었다. 지난 나의 삶에 대해서. 나는 대답했다. 미련 없다고. 지인은 또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나는 또 대답했다. ‘남’이라고,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 내려놓아 지더라고.

맞다. 나는 지금 나의 삶에 매우 만족하며 산다. 절 한 채 없이 살지만, 절 있는 사람(승려) 하나도 안 부럽다. 절이 없어서 더욱 홀가분하다. 처음엔 안 그랬다. 나도 처음엔 절 하나 있었으면, 누구 불심 깊고 돈 많은 신도가 절 하나 보시해주었으면, 잘 먹고 잘 사는 형제들이 절 한 채 지어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다. 그러나 그 바람이 크면 클수록 내 마음은 더욱 거지같아졌다. 날마다의 삶이 거지의 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 드신 어느 신도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자신은 부모형제를 ‘남’처럼 여기며 산다고. 그들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산다고. 그 순간 나는 띵했다. 그분이, 그분의 말씀이 ‘부처’고 ‘법(法)’이었다. 겉으로만 수행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나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여태껏 ‘탐(貪)’으로, ‘갈애’로 ‘속(俗)’의 삶을 살고 있었던 거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아니, ‘남’으로, ‘남의 것’으로,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자 마음의 ‘탐’과 ‘갈애’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크나큰 ‘해방감’이었다. 공부와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아니었지만, 어떤 것이 진정한 ‘부자(富者)’의 마음이고 ‘자유’의 삶인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부휴선수 선사의 이 시가 보물로 다가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선사의 ‘뜬구름(浮雲)’은 부질없음이 아니라 ‘매화’는 ‘매화’로 충만하고, ‘들국화’는 ‘들국화’로 충만한 삶이었던 것이다. 그 ‘독좌(獨坐)’의 삶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을까. ‘모든 관계를 끊고[掩關(엄관)]’, ‘없는 것’ ‘남의 것’으로 여기고 ‘무생(無生)의 삶을 즐기던 선사의 행복감이 눈앞에 선하다.

그런데 이 시에는 매우 예민한 ‘함정’이 하나 있다. 3행의 ‘說(설)’이 어떤 판본엔 ‘識(식)’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說’과 ‘識’의 차이는 엄청나다. ‘說’은 깨달음의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고, ‘識’은 깨달음의 상태에서 ‘아는’(보는) 것이다. 그래서 ‘說’엔 가르침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識’엔 관조의 의미가 더 깊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경중을 따질 순 없다. 선사는 이미 깨달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생의 높이에선 그 질량의 차이가 매우 크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의 ‘說’은 속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說’을 취한 것은 ‘說’로 표기된 판본이 많기 때문이다.

승한 스님 빠리사선원장 omubuddha@hanmail.net

[1620호 / 2022년 2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