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여섯 가지 문을 잘 지키라.

장백산-1 2022. 6. 27. 14:34

여섯 가지 문을 잘 지키라.

 

숲의 생명들을 스치운 차고 맑은 바람을 통해 봄소식이 전해진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한결 부드럽고 따뜻해 졌다. 이런 날 숲 길을 거닐며 호흡을 지켜보는 일은 그 어떤 종교적인 의식 보다도 더 신성하게 느껴진다. 내 나이만큼의 세월동안 숨을 쉬며 살았지만 이렇게 숨을 깊이 쉬어 보는 일은 근래에 들어와서다.

 

보통 생각하기에 사람들은 몸이 따로 있고, 내 몸 밖의 대상이 따로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몸도 몸밖 외부의 대상도 그냥 그저 텅 비어 있다. 안팎의 분별이라는 게 공허하다. 법계에서 본다면 안이라는 것도 밖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호흡을 할 때 코를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바람이 움직일 뿐. 그저 저쪽 산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와 우리 뺨을 스치고 다시 다른 쪽으로 불어가듯, 우리 몸 또한 코를 통해 그저 바람이 인연따라 불어오고 불어갈 뿐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그냥 우리 목숨도 없어지는 것 아닌가.

 

그래서 호흡관(呼吸觀)이 중요하다. 호흡지간에 생사가 달려있으며, 나아가 호흡지간에서 해탈에 이르는 빛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호흡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의 일이며, 깨달음도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집중함으로써 발견되기 때문이다. 일체를 다 놓아버렸을 때,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는 들어오고 나가는 숨만이 적요한 침묵으로 피어오른다. 들오오고 나가는 바로 그 숨을 놓치지 말고 관찰해야 한다.

 

이처럼 대지의 바람이 코라는 문을 통해 들고 나듯, 우리 몸의 여섯 기관 즉 눈-귀-코-혀-몸-뜻 또한 다만 나와 대상을 이어주는 문일 뿐이다. 그러나 그 여섯가지 문은 안과 밖이 따로 없는 그저 인연(因緣)따라 열리고 닫히는 공(空)한 문(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는 것의 실체가 이러한 것이다. 실제로 내가 있고, 상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눈-귀-코-혀-몸-뜻 여섯개의 문을 통해 색-성-향-미-촉-법의 대상이 실체없이 인연따라 들고 날 뿐이다. 그러니 육근을 '나'라고 고집할 것도, 육경을 '상대'라고 나눌 것도 없다. 우리 몸도 공하고 바깥 대상도 공할 뿐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텅 비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여섯 가지 문을 잘 관찰하고 그 여섯 가지 문으로 들락날락하는 것들을 잘 관찰해야 한다.

 

수문장이 졸고 있으면 성 안에 있는 온갖 금은 보화를 누가 훔쳐가는지 어찌 알겠는가. 우리 몸의 여섯 가지 문을 잘 관찰하지 않고 놓치고 산다는 것은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이 여섯 가지 문을 졸지말고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여섯 가지 문도 실체가 없고, 대상도 실체가 없으며, 오고 가는 것 또한 실체가 없다. 다만 변화(變化)할 뿐이다. 인연따라 다만 변화해 갈 뿐이다. 바로 그 움직임, 변화를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랬을 때 안팎이 따로 없는 온 우주 법계의 본래 성품을 볼 수 있다. 움직임, 변화를 놓치지 말고 알아차릴 때 우리 몸은 깨어난다. 우리 몸과 마음은 가장 이상적인 기운으로 넘친다. 성 안의 모든 것들도 공하고, 성 밖의 모든 것들도 공하며, 성문으로 들고 나는 모든 것들 또한 공하고, 성문이라는 자체 또한 다 공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안팎의 차별이 없기에, 내가 곧 우주가 된다. 여섯 가지 문을 잘 지키라.

 
법보신문,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