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뭣고(이것이 무엇인가)?
얼굴에 있는 눈이 그 눈을 볼 수 있을까? 눈은 그 눈을 볼 수 없다. 다만 다른 모든 것들을 보는 작용을 통해 '보는 눈'이 있음을 알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눈의 경우 처럼 부처는 부처를 볼 수 없다. 당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부처인 당신이 부처인 당신을 찾고 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보려고 애쓰고 있다. 눈이 눈을 보지 못하듯, 부처는 부처를 보지 못한다.
보는 그것이 바로 찾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부처를 확인하려고 할 때, 부처를 확인하려고 애쓰는 그 놈을 돌이켜 회광반조해 보라.
부처를 찾는 부처는 놔두고, 부처를 찾고자 하는 이 놈은 무엇인가?
불법은 불이법이다. 둘이 아니다. '부처를 찾는 주체'와 '찾아지는 부처'로 둘로 나눈 채, 내가 부처를 찾으려고 하면, 부처는 찾아지지 않는다. 주인과 손님 둘로 나뉘지 않는 것이 곧 부처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즉 찾는 자가 곧 찾는 대상이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이다.부처가 부처를 찾는 것이다.
그러니 주인과 손님 둘로 나누어 놓고, '나'가 '저것(부처)'을 찾으려고 하는 마음 자체가 분별망상이기 때문에, 분별망상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이것이 저것을 보고, 이것이 저것을 알고, 내가 사물을 보는 등으로 대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은 불이법이기에, 그런 분별망상의 방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눈이 제 눈을 보듯, 하나가 하나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염두해 두고 다시, 이 불이법을 확인해 보자. 당신은 부처를 찾고 있다. 견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뭣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깨닫고 싶다. 시도해 보라. '나는 누구인가?' 하고 찾아 보라. 여전히 당신은 오랜 습관적 사고방식으로 '내'가 '진리(부처)'를 찾고자 둘로 나눈 뒤에 애써 찾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하고 묻는 그 놈이 바로 찾는 '진리(부처)'이다.
다시! 당신은 지금 묻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 묻고 있는 무언가가 있고, 찾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분명히 '진리가 뭐지?' '참나가 뭐지?'하고 묻고 있지 않은가? 묻고 있는 그 질문이 바로 진리가 뭐지? 참나가 뭐지?에 대한 답이다. '진리가 뭐지?'하는 그 놈은 무엇인가?
그것이 그것이다. 다만 이렇게 확인되고 있지 않은가? '뭐지?' 이렇게 확인이 된다. 그동안 내가 나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글쓴이 : 법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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