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이름'과 '모양'을 쫓아가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장백산-1 2024. 2. 21. 15:58

'이름'과 '모양'을 쫓아가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이름'과 '모양'을 따라가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은 눈 앞에 있는 유형 무형의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붙이고 나서는 그것을 안다고 인식한다. 인식하는 것은 곧 분별하는 것이다. '사람'과 '고양이'를 인식하여 둘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별한다.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을 '크다' '작다'라고 이름 붙이고, 크다고 분별하여 알고, 작다고 분별해서 안다.

그런데 이런 습관적인 '이름 붙이기'와 '모양 따라가기', 그리고 그로인한 인식과 분별, 앎의 습관, 대상에 이름 붙이는 습관을 잠시 내려놓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떨까? 왜 이렇게 해보라는 것일까? 본래 우리의 천진한 본래성품이 이러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처음 태어난 아기는 그 어떤 대상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고 구분하며 차별하지 않았다. 갓난애는 아는 것이 없었고, 그저 모를 뿐이었다. 바로 그 첫 번째 자리, 우리 모두가 나온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보자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을 때, 모양을 따라가 차별심,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을 때는 어떨까? 그저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이 있는 그대로 보일 뿐이다. 그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일 뿐이다. 그저 이것이다. 지금 여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분별도 해석도 인식도 앎도 붙지 않는다. 그저 이러할 뿐이다. 이를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고 했다. 상(모양)이 있는 바 모든 것은 본래 허망하니, 만약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이름과 모양으로 분별해서 보지 않을 때, 상을 상으로 보지 않을 때, 즉견여래, 곧장 여래를 보게 된다. 이름과 모양을 따라가지 않을 때, 지금 여기 눈앞에, 목전에 늘 여래가 드러나 있고 진리가 드러나 있다.

이 말을 머리로 해석해서 이해하려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체험적으로 경험해 보라. 지금 여기 목전에 무엇이 있는가? 대답하려고 하지 말고, 머리를 굴리지 말고, 분별하지 말고,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지 말고, '이런 모양은 이런 이름'이라고 판단하지 말고, 그냥 그저 보라. 정견!
중도! 목전의 이것! 뜰 앞의 잣나무! 볼펜! 할! 이것이 무엇인가?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