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3) - 불교의 모든 교리는 중도의 다른 표현
불교의 기본은 연기법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연기법에 의해 인연이 화합할 때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생겨난 것들이기에 고겅된 실체가 아니어서 무아(無我)다.
길다 짧다, 옳다 그르다, 아름답나 추하다, 선과 악, 크다 작다, 길다 짧다 등의 모든 상대적인 것들은 사실 인연 따라 그렇게 불리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들은 실체가 없고, 그렇기에 그 모든 것들은 중도적으로 이해될 뿐, ‘길다’, ‘짧다’라고, ‘이것이다’라고 극단으로 치우쳐서 볼 수는 없다.
긴 것은 짧은 것을 인연으로만 길 수 있기 때문에, 연기적으로만 상대적으로 길 뿐이다. 그러니 ‘길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치우친 견해이며, 중도가 아니다. 이처럼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만 그렇게 규정되는 것일 뿐이기에, 연기된 것은 실체가 없어서, ‘이렇다’거나, ‘저렇다’고 극단으로 말할 수 없어 중도다. 연기 즉 중도다. 또한 그렇기에 연기 즉 무아다.
이처럼 중도는 양 극단에 치우침 없이, 분별없이 대상을 보기 때문에 이를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곧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다. 혹은 정념(正念), 위빠사나라고도 한다. 또한 이것은 분별을 멈추고(止) 있는 그대로 보는 것(觀) 이기에, 지관(止觀), 정혜(定慧)라고도 한다.
중도는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이 아니기에 불이법(不二法)이다. 불이중도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대상을 평등하게 바라보게 된다. 일체중생을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 즉 자비심이다. 이처럼 ‘보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다. 중도의 수행은 곧 지혜를 닦는 것임과 동시에 자비를 닦는 수행이다.
이처럼 연기, 무아, 중도, 지관, 자비, 불이, 공 등 불교 교리는 하나의 진리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다. 불교는 여러 가지 주장하는 바를 내세우는 종교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진실, 하나의 법을 다양한 방편과 다양한 교리로 설하는 것일뿐이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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