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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마음챙김)과 직지인심(直指人心)

장백산-1 2025. 1. 1. 15:47

알아차림(마음챙김)과 직지인심(直指人心)

 

이상에서와 같이 정념, 사념처는 초기불교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수행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수행법이다. 정념, 사념처, 알아차림, 마음챙김이 곧 중도이고, 팔정도이며, 지관, 정혜의 수행이며 이것이 곧 연기와 무아를 깨닫는 방법이며, 참된 동체대비의 자비심을 계발하는 수행법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중도, 팔정도, 정견, 정념, 사념처의 수행을 곧 알아차림(마음챙김)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사실 말이란 모두 방편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 말로 표현된 것은 전부 다 명색(名色)이기에,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이쓰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그러나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중생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보니 어쩔 수 없이 말이라는 부족한 방편을 써서 법을 최대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알아차림이라는 방편의 말도 하나의 말일 뿐이기에, 자칫 오해될 소지가 있다. 알아차림이라고 하니, 사람들은 여기에 알아차리는 ‘나’가 있고, 저쪽에 알아차릴 ‘대상’이 따로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불법은 불이법, 불이중도다. 둘로 나뉘지 않는다. ‘보는 것’이 따로 있고, ‘보이는 것’이 따로 있지 않다. 십이처에서 설명했듯이 내입처와 외입처는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허망한 착각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주객의 분별, 자아관념이라는 허망한 착각을 내려놓고,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차리게 된다면, 모든 대상이 사실은 대상이 아니었음이 문득 자각될 것이다. 이것이 곧 법(Dhamma)의 확인이다. 올바른 자각, 정념은 ‘이것’이라는 주관이 ‘저것’이라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법이 법을 보는’ 것이며, 자기가 자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확인하는 것이며, 보이는 것이 그대로 보는 것이 되는 불이법의 자각이다. 일체 삼라만상, 일체 모든 것들, 모든 존재(dhamma)가 그대로 법(Dhamma)이다.

 

그래서 선(禪)에서는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는 제자의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 ‘마삼근’, ‘마른 똥 막대기’, ‘할’, ‘방’이라고 답한 것이다. 이것이 곧 선의 근본정신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다. 곧바로 그 마음(법, Dhamma)을 가리켜 자성을 보아 성불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이 곧 초기불교의 사념처, 알아차림(마음챙김)에 다름이 아니다.

 

알아차리는 주관과 알아차림의 대상인 객관을 둘로 나누지 않고, ‘나’라는 자아의식을 개입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본다면, 꽃 한 송이를 보더라도 그저 볼 뿐이기에, 아무런 분별이 없다. 분별없이 꽃 한 송이라는 법(dhamma)을 보면, 거기에서 문득 법(Dhamma)이 드러난다. 이 법(Dhamma)을 선불교에서는 성(性), 성품(性品),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경봉(鏡峰ㆍ1892-1982)스님께서는 이러한 법을 깨닫고는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남기셨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我是訪吾 物物頭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目前卽見 主人樓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呵呵逢着 無疑惑

우담바라 꽃의 빛이 온누리에 흐르는구나 優鉢本花光 法界流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