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간지의 사람 사는 세상

어둠이 빛을 만났을 때 (한국은 왜 노무현을 미워했나?)

장백산-1 2008. 3. 30. 14:52
어둠이 빛을 만났을 때(한국은 왜 노무현을 미워했나?(성서적 조명으로 이해하기)
번호 70717 글쓴이 엘파소 별(simc) 조회 2237 등록일 2008-3-29 15:51 누리807 톡톡1


어둠이 빛을 만났을 때…
 왜 한국은 노무현을 미워했는가? - 성서적 조명으로 이해하기


2003-2007년 5년간 한국사회는 집단 히스테리가 그 어느 시대보다 극도로 노출되었던 기간이라 할만 하다. 어쩌면 인간의 원초적 죄의식 또는 무의식적 히스테리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로 염치없이 드러났던 시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것은 인간이 지닌 죄악성이나 무의식에 잠재된 폭력성 혹은 파괴적 본능이 노출되는 통로는 고대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는 점에서 착안한다. 성서를 읽는 나로서는 성서의 주인공인 예수를 통해 드러난 인간들의 무의식적 집단히스테리가 이 시대 한국사회에 염치도, 부끄럼도, 체면도, 양심도 없이 노골화하는 현상과 비교하여보고 싶다. 결론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다만, 시대가 다를 뿐. 나는 이 현상을 '빛과 어둠이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물음에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왜 싫고 노무현은 왜 싫은가? – 이 둘의 절묘한 일치

1. 기득권에 대한 도전

3년간의 공식 활동을 했던 30대 예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다 결국 로마의 외세를 끌어들여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1% 절대 상위 기득권 계층이었다. 제사장 그룹, 바리새인파 그룹, 일명 장로들이라는 이들의 산헤드린Sanhedrin (의회) 등이 예수 죽이기에 성공한 것이다. 제정일치 사회에서 그들은 절대권력이었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는 그들이 지금껏 절대다수의 백성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지켜온 법질서나 의식세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예수는 이를 정면으로 도전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수도 없이 위선자들이라고 불렀다(특별히 마 23장을 보라).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이 위선자임을 발가벗겨 보였다. "감히 어디라고 종교로 무장한 권력에 도전하면서 절대 권력을 향해 '위선자'라고 폭로하다니…" 이것이 예수를 죽인 이유다. 예수는 그 자체만으로 그들의 부끄러운 위선을 폭로하였다.

곧 예수의 언행 하나하나는 자신들의 존재적 위협으로 느꼈던 것이다. 자기의 위선과 죄를 드러내는 데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언행을 바리새인들이 감시하며 수시로 예수의 언행에 시비를 걸거나 제자들의 행위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다. 이유는 예수를 죽이기 위한 구실을 찾기 위해서다. 한국의 '조중동문'이 지난 5년 동안 주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노무현의 등장 자체가 한국사회의 극소수 기득권 계층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노무현의 어법을 보라 어디 기득권층의 근엄한 척, 위엄 있는 척, 권위 있는 척하는 구석이 있는가? 그의 모든 언행이 도무지 상위 1%의 귀족적인 자신들의 품위(?)와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자신들이 얼마나 위선적이냐고, 자신들이 얼마나 속임수로 국민을 속이는지를 폭로하는 것만 같아 보였다.

대통령이 그 모양이냐고 악을 쓴 이유는 도둑이 제 발 저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죽이고 싶도록 싫었다. 이것이 5년 동안 정치권과 재벌과 '조중동문' 언론이 모순의 극치를 감수하면서 '좌파' '빨갱이' 하며 노무현 죽이기에 올 인했던 이유다. 노무현과 참여정부 그 자체만으로 그들은 존재적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어떻게 지켜온 권력인데 감히 존재의 근본까지 흔들어대다니….


2. 희생양이 필요한 야만사회

예수의 죽음을 성서는 철저하게 '희생양'으로 설명한다. 물론 희생양은 유대 종교 전통에 따른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이집트로부터 탈출할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이집트의 맏아들에 대한 죽음의 대재앙을 피해갈 수 있게 한 것부터 구약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 의식(예배)의 하나로 양을 잡아 바치는 '희생양'을 예수의 죽음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것이 교리적으로 설명될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그렇게 희생양으로 설명된다. 대제사장들과 바리파 사람들은 예수 앞에서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고 자신들의 위선이 폭로될 때 대중들 앞에 자신들의 정당함을 항변하기 위하여 예수를 희생양으로 사용했다. 철저하게 자신들의 죄와 위선을 감추기 위해서다.

물론 기독교는 예수를 마지막 희생양으로 믿으며 이후로는 희생양이 필요 없게 된다. 그리고 예수 이후부터는 용서와 은혜의 해가 되는 것이다(눅 4:18-19) 더 이상 희생양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사실 희생양의 종교적 행위는 고대사회에 많이 발견되는 종교적 문화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는 자신의 죄를 대신해 줄 희생양을 필요하지 않을 만큼 법치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를 보라 어디를 가나 희생양을 찾고 있지 않은가? 특히 정치에서는 이것이 전문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희생양을 찾아 죽이고 나서야 속이 후련해지는 것이다. 이것도 히스테리의 일종이다.

조중동문은 물론이고 정치권이 5년 내내 자신들의 문제, 자신들의 원죄를 감추기 위하여 노무현과 또 그와 함께 한 이들을 수도 없이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시퍼런 칼날로 밝은 대낮에 수많은 양의 목을 치지 않았던가? 한국사회는 여전히 희생양을 바쳐 자신들의 죄를 대신하게 하는 고대사회의 수준에 있다. 그리고 십자가 처형에 열광했던 군중들처럼 희생양의 피 흘림으로 히스테리적 카타르시스에 열중하는 사회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노무현을 죽이는 이유다.


3. 신분의 차이

예수는 그야말로 촌놈이었다. 갈릴리라 하면 유대의 변방이다. 중앙에서는 골치 아픈 지역이다. 국경 지역에다 수시로 일어나는 외세 로마와 외세에 빌붙어 권력을 즐기는 헤롯왕가를 향한 무장혁명이 일어나곤 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여기서 올라온 갓서른 된 젊은 청년에 불과한 예수가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수많은 추종자와 함께 입성한 것이다.

연일 수많은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대중들은 그의 가르침에 매료되고 만다. 이것이 문제다. 기존의 기득권층의 권위와 비교할 수 없는 천한 것이 나타나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이다. 나중에 예수를 따르게 된 나다나엘은 "나사렛(예수의 고향)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소?" 하고 말한다. (요 1:46) 이 말이 그 시대의 생각이다.

예수가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강의했을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고 시비를 했다.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다. 시골 촌뜨기 그 어느 파에 속하지도 않고 그 어떤 기성질서를 따라 줄 선 적도 없으면서 예루살렘에 나타나 대중 스타가 된 예수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학벌사회, 아니 학벌 카르텔이 철옹성 같은 한국 사회에서 노무현은 이단자다. 학력이 상고 졸업이라고 얼마나 비아냥거렸는가? 광주에서도 아니고, 대구도 아니고 뭐야 고향이 봉하라 하지 않는가? 그 동네가 어디에 있지?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온다고… 자격이라고는 변호사 자격증 하나밖에 없으면서 대통령이 되어 나타난 노무현은 말 그대로 이단자다. 도무지 한국정치현실에는 끼일 수 없는 천한 신분이다.

취임 직후 자신의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대화를 하는 검사들을 지켜보면서 ‘검새’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도 그 시대정신이다. 그 '검새'들도 기분이 나쁜 거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고 대통령을 해먹겠다니 울화통이 터지는 것이다. 노무현이 변호사라 법조인이긴 하지만 어디 같은 반열에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대학도 안 나온 주제에…서울대 법대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전여옥이 물고 늘어지기를 대통령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고 했던가? 이 정신 나간 말이 통하는 한국사회에서 노무현은 살아남을 수 없는 이단이다.

학벌, 계파 지역적 기득권도 없이 대통령이 되다니 이건 순전히 선거조작이지 않은가 그래서 한나라당은 재검표를 요구했었지? 이것은 자신의 임명권자에게 대들었던 검새들만의 감정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지극히 일상적인 문화가 아닌가? 그래서 노무현같이 천한(?) 신분을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자격으로 이 일을 하시오? 하고 묻고 싶었던 게다.


4. 이해를 못 한다.

예수의 언행에 대하여 대중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았다고 고백하는 반면 공부 많이 하고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 대제사장이나 율법교사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의 언행에 대하여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그들은 도무지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의 제자들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열심히 배우고 훈련을 받았지만 맨날 야단만 맞았다. 도무지 예수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으면 예수가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들어라"라고 했겠는가? 도무지 그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과 생명 없는 교리에 묶인 머리는 예수의 생명 있는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1:5에서 예수를 이렇게 비유한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혹은. '깨닫지' 또는 '받아들이지'로 번역할 수도 있음/표준 새 번역,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but the darkness has not understood it./NIV)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 적절하다. 이해가 안 되는데 같이 갈 수 있겠는가? 결국은 죽이고 제거하고 자신들 멸망의 길을 지키는 수밖에. 오래전 개그맨 고 김형곤이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관둬, 이대로 살다 죽을래.' 아무리 계몽해도 안된다.

그렇게 잘나고 신분이 높고 우량족(?)인 그들이 왜 대학에도 들어가 보지 못한 상고 출신 노무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건 학력과는 별개이다. 생각의 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몰입해보라. 수년 내에 생각은 멈추고 말 것이다. 그저 돼지처럼 먹어치우는 일에 몰입할 것이다(사실 돼지도 배부르면 먹기를 멈추니 적정한 비유는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돼지를 그렇게 부르니 이해하시라).

공동체를 생각하고 모순을 극복하고 고난과 아픔을 극복하며 전진하는 삶을 살아보라 생각은 우주가 된다. 최근 '고소영'이나 '강부자' 나 '2MB'라는 말은 한국사회의 현상을 보여준다. 돈과 권력을 탐하는 이들의 머리가 얼마나 망가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 좋은 학력간판과 경력과 돈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무식한지를 보여주지 않는가? 그들이 노무현의 말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사실 노무현 말은 너무 쉽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은 다 이해하는 데 그들만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오해는 살인을 부른다.


5. 기회주의자들

예수의 측근 중 하나인 유다는 예수를 배신한다. 물론 베드로도 배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들에게 말한다. 십자가 앞에서 대부분의 제자들은 도망을 치고 숨어있었다. 예수가 체포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사형이라는 법적인 절차를 얻어 처형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라왔던 군중들은 일제히 태도를 바꾼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그리고 장로들이 시키는 대로 예수를 죽이라고 아우성을 친다. 참으로 비겁하고 비열한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힘이 있는 편에 끼여 자신의 이익을 보전하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아마도 정동영이 선거에 참패하고 진보진영으로부터 외면받은 것은 노무현 그늘 아래 있었던 전력 때문이 아니라 가롯 유다 같은 처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노무현 정신을 따라 새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던 이들이 그 믿음을 철회하고 당장의 자기 이익을 위해 노무현을 팔아넘긴 이 들이 하나 둘이 아니지 않은가?

철새라는 말은 그래도 약과다 뒤통수를 치는 배신을 정치의 생리로 굳게 믿는 한국의 정치 세계에서 바보 노무현은 밥이다. 누구는 오징어보다 더 만만하다 했던가? 배신당하는 놈이 바보지 배신 한 놈이 바보 되는 거 봤는가 한국정치판에서? 노무현은 바보기 때문에 배신당하였고, 이명박이는 거짓과 배신으로(대통령이 되자마자 자기 당원들에게 배신자가 되었다.) 대통령 되어 나라가 만신창이가 된 것도 노무현 때문이라고 욕먹는 것이다. 참 미련하고 바보다. 밟아 죽이는 대로 밟히면서 5년을 지냈다.


6. 부활

예수가 십자가에서 희생양으로 죽게 되자 그를 따랐던 제자들, 추종자들은 절망과 탄식으로 혼란에 빠진다. 그런데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무덤에 그가 없었다.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만나자 했다. 기독교는 여기서 조직적으로 시작된다. 겁먹고 울면서 절망적인 경험을 하였지만 부활의 예수를 만난 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시작했다.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전도자들이 된 것이다. 그들은 아주 똑똑하게 되었고,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의 가르침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떤 죽음의 위협도 그들을 가로막지 못했다. 예수 3년의 공생애는 이렇게 극적인 반전을 통해 제자들을 통해 다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이다.

5년간 한국의 정치와 다수의 언론들이 집요하게 죽였던 그 노무현이 살아서 돌아왔다. 죽었던 사람이 돌아왔다고 하면 그를 죽인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노무현은 봉하에서 다시 살아났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감동을 먹고 노무현의 생각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봉하에서 사람 사는 세상 운동이 시작되고 있다 마치 갈릴리처럼. 장차 한국사회를 변화시킬 새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낙심들 하지 마시기를…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니.

(오해하지 마시기를 노무현을 예수라 비유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모델로 노무현과 한국사회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 엘파소 별